소설리스트

상쾌한 흙당근(2) (49/183)

66화. 상쾌한 흙당근(2)

진석은 하얀 백마를 타고, 공간의 들판을 달리고 있었다. 그런 진석의 뒤를 수십 명의 일꾼들이 말을 타고 뒤따르고 있었다.

“사령관, 오늘따라 상쾌한 느낌인데, 뭔가 더 시원하게 달리는 기분이야.”

“공간주님, 기분 탓이 아니라, 말들이 더 빨리 달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 어떻게 된 거지?”

“글쎄요. 요즘 보라색 당근을 간식으로 주고 있기는 한데, 그 외에는 별로 달라진 일이 없는데.”

“당근?”

“예, 전에, 공간주님이 말들에게 간식으로 주라고 하셨잖습니까?”

확실히 그런 말을 지나가면서 한 것 같았다. 당근이라면, 말들이 좋아하는 채소니까, 일꾼들과 짐들을 싣고 다니느라, 고생하는 말들에게 영양간식으로 주라고 한 건데...

확실히 말들이 전보다 빨라지기는 한 느낌, 아니, 실제로 빨라졌다. 넓어진 공간을 순찰하기 위해, 공간을 한 바퀴 돌아보고 있는데도 평소와는 달리, 별로 지치는 기색도 없고 말이다.

설마, 폐활량이 늘어난 건가?

제주도에서 그 유리라는 아이는 숨쉬기가 편해졌다고 했다. 원래 앓고 있던 천식이 좋아졌다는 의미라고 생각했는데, 단순히 알레르기 천식이 좋아졌다는 게 아니라 폐기능도 전체적으로 향상이 된 모양이었다.

공간의 말들도 달리는 폼이 전과 달리 힘이 넘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말들이 힘이 좋아진 것 같아. 다들, 더 빨라지고..”

“공간주님, 그러면 좋은 거 아닙니까? 당근을 계속 줘야겠군요. 말들이 뭔가 더 업그레이드 된 느낌입니다.”

“그래, 당근은 충분하니까..”

***

춘천, 송암 스포츠 센터, 축구 전용 경기장.

“1:0 이군요.”

fc 강원의 챌린지 리그 경기가 벌어지고 있었다. 김현수 감독이 부임한 후, 특별한 투자 없이 강원도 출신 신인 선수들로, 팀을 리빌딩한 상황, 아무래도 투자가 적었던 건지 챌린지 리그에서도 중위권에 머물고 있었다.

그나마 오늘은 전반에 먼저 선취 득점에 성공하며, 1점을 리드 중이었다. 진석은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다가, 전반이 끝나자 김현수 감독에게 다가갔다.

“하하, 구단주님이 오셨군요?”

“오늘은 이기는 건가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축구에서 한 점은 크니까요. 경기는 언제부터 보신 겁니까?”

“전반 5분 정도부터 봤습니다. 잠깐 본 거지만, 마치 바르셀로나를 보는 것 같던데요.”

김현수 감독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바르셀로나와 비교하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전반전 경기력만 봐서는 리틀 바르셀로나 정도는 되겠더군요. 짧은 패스로 상대를 농락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만 락커룸으로 가보시죠. 아직 후반이 남았으니까요.”

“하하, 오늘은 어떻게든 꼭 이겨보겠습니다. 지켜봐 주십쇼.”

김현수는 선수들과 락커룸으로 사라져갔다. 진석도 오랜만에 축구장에 와보는 거라, 경기장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매점에서 핫도그도 하나 사 먹어 보고,

“생각보다 핫도그가 맛있는데..”

후반전은 양상이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전반이 강원도의 짧은 숏패스에 상대가 말려들었다면, 후반은 상대 팀이 거칠고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공을 뺏으려고 시도하는 것이었다.

저돌적으로 달려오는 수비를 피해 옆으로 패스를 시도하지만, 그쪽도 역시 상대가 위치를 선점하는 모습이었다.

“뭐지, 압박이 강하게 들어오잖아?”

최근의 축구계의 트렌드인 압박 전술로 상대가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었다. 갑자기 강해진 압박에 강원 fc 선수들은 조금 당황하며, 우왕좌왕하는 느낌이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좀 더 침착하게, 간격을 벌리고, 넓게 포진해야지.”

진석은 어느새 축구경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김현수 감독도 상대 전술이 변할 걸 보고, 필드를 향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정수야, 가운데로 몰리지 말고, 옆으로 크게 벌려”

상대팀의 강한 압박에, 수비형 미드필더, 한정수에게, 사이드로 넓게 볼을 돌리라는 지시였다.

하지만, 중앙 쪽에서 사이드로 롱패스를 시도하던, 한정수의 패스가 부정확하게 윙백에게 전달되면서, 사이드 아웃이 되고 말았다.

공격권이 넘어가고 이번에는 상대의 롱스로인에 이은 빠른 속공이 시작되었다.

“뭐지, 너무 느리잖아?”

전반전 경기 때는 못 느꼈는데, 전체적으로 강원 fc의 기동력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상대의 속공이 빠르게 전개되자, 우리 진영으로 복귀하지 못하면서 수비가 뻥뚤리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걸 불안하게 바라보던 진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크 측면에서 강한 슛이 골대를 향하고, 겨우 골기퍼가 펀칭에 성공했지만, 바운드 된 볼이, 정면으로 쇄도하던 상대 공격수에 걸리면서 가볍게 골...

“동점이군..”

이후의 전개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짧은 티키타카를 시도하던 강원에 강한 압박이 들어오고, 압박에 당황해, 패스 미스가 벌어진다, 그리고, 상대의 빠른 역습 시도, 몇 번은 그런 속공 시도를 겨우 막아내는 느낌이었지만,

“또, 실점인가?”

옆에서 강원 fc의 저지 유니폼을 입은 꼬마 소년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도 또 지겠어요, 벌써 3대 1이에요.”

경기는 후반에만 내리 4 실점하며, 강원의 패로 끝났다.

경기가 끝나자, 진석은 라커룸으로 향했다.

“모두 수고했어요.”

“아, 구단주님, 죄송합니다. 모처럼 경기를 보러 오셨는데.”

“뭐, 할 수 없죠.”

김현수 감독은 난감해하는 표정이었고, 다른 선수들도 땀에 젖은 얼굴로 어색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

춘천 시내, 닭갈비집...

진석은 김현수 감독과 팀 운영에 대한 이야기도 할겸, 식사를 하러 닭갈비집을 찾았다.

“역시, 춘천하면 닭갈비죠.”

“하하, 구단주님은 춘천에 오면 자주 드신다면서요?”

“오면 먹는데, 춘천에 자주 오지는 않아서요, 가끔 먹으면 별미더군요.”

“맛있는 요리인 것 맞는데, 저는 춘천이 고향이라 너무 자주 먹어서 좀 질린 느낌입니다.”

“뭐, 원래, 자기 고향 음식은 그런 애증의 관계가 있는 거죠. 그나저나, 경기를 보니까, 문제점도 좀 보이네요.”

“아, 그러시군요.”

김현수 감독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저는 축구 전문가는 아니지만, 오늘 경기를 보니까 후반에 체력이 급격히 하락하는 느낌이 있던데요.”

“그게..아무래도 스타 플레이어나, 개인기가 좋은 선수가 없다 보니, 패스 위주로 게임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음, 그게, 체력하고 관계가 있나요?”

“소위 말하는 티키타카인데, 물론, 바르셀로나처럼 개인 능력이 좋다면, 섬세한 패싱 게임을 할 수 있지만, 저희가 그 정도 수준은 아니거든요.”

“그래서요?”

“개인기가 부족한데, 패싱 게임을 하려면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공간을 만들어 줘야 합니다. 쉽게 말해, 많이 뛰면서 패스하기 좋은 공간을 만들어 주는 거죠.”

“음, 그런 식으로 부족한 개인기를 보완한다 이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개인기가 좋고, 패스 시야가 좋으면 많이 움직이지 않고도 패스 루트를 찾을 수 있지만, 저희 팀의 현재 상황에서는 주변에서 많이 뛰어 주지 않으면 패스 루트가 안 나옵니다.”

“그럼, 체력 부담이 상당하겠네요?”

“예, 전반은 그런 식으로 선제 득점하고, 후반에는 아무래도 체력 문제가 있으니까, 잠그는 수비 전술을 기본 전략으로 삼고 있는데, 전반에 득점이 안 되거나, 후반 초반에 실점하면 전략이 다 틀어지는 거죠.”

“오늘 경기도 그런 케이스입니까?”

“예, 전반 선제 득점까지는 좋았는데, 후반 초반에 너무 일찍 실점했고 그래서 잠그는 전술로 전환을 못 했습니다. 동점이라도 해서 승점 1점을 딸 수도 있었지만, 구단주님도 오시고 해서, 어떻게든 이기는 경기를 보여드리려고 했던 게, 결국 무리수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와서 괜히 승점 1점만 날아갔군요.”

“아닙니다. 어차피, 이번 시즌은 k리그 승급은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김현수 감독을 말끝을 흐렸다.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좋은 성적을 기대한 건 아니니까요. 천천히 리빌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려고 젊은 선수들로 팀을 구성한 거고.”

“저도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지만, 경기를 치를수록 결국 선수들의 클래스는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전술로도 커버가 안 될 거라는 말인가요?”

“전술이라는 것도, 결국 숫자 놀음에 불과합니다. 필드에서 언제 어떻게 어떤 상황에서 우리 팀의 숫자를 늘릴 건지, 줄인 건지 계획을 세워보는 거죠.”

“전반전처럼만 경기력을 유지하면 성적이 나올 것 같은데 말이죠.”

“그게 체력적인 문제라, 개인기도 이미 유소년기에 완성되는 거지만, 체력도 타고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훈련으로 체력 향상을 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오히려 무리하게 체력 훈련을 하다가 부상이 생기거나 팀 분위기가 나빠지는 경우도 많으니까요.”

“식단을 바꿔보는 건 어떻습니까?”

“식단요?”

“뭘 먹느냐에 따라서, 컨디션에 영향을 주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식단 문제라면, 지금도 큰 불만은 없습니다. 영양적으로 그렇고 선수들도 큰 불평은 없고요.”

“아뇨, 저희 제이에스 바이오는 농산물이나 식품 영양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이 많으니까요. 아무래도 팀의 체력 강화를 위해서, 새로운 식단을 제공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현수 감독은 좀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진석 구단주님의 생각이 그러시다면요. 한번 해보죠.”

***

은하수 농장..

진석의 빨간 페라리가 은하수 농장으로 천천히 들어오고 있었다. 장미를 출하하는지 트럭이 세워져 있고, 인부들이 분주하게 포장된 장미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진석의 페라리가 트럭 옆에 주차를 하자, 일하던 젊은 인부들이 슬쩍 진석 쪽을 쳐다보았다.

시간을 잘못 맞춘 건가? 한참 일하고 있는데 왔군. 진석이 차에서 내리자, 하우스 안에서 서은주의 모습이 보였다.

“바쁘게 일하시는데 방해가 되는 거 아닌가요?”

“어머, 이진석 사장님. 잠시만요. 거의 다 끝났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짐들을 마저 나르고 정리까지 하는 데는 1시간 정도가 걸렸다. 진석은 무료하게 하우스 주위를 거닐다가, 농로를 따라 더 걷기 시작했다.

은하수 농장 뒤쪽으로는 넓은 평야지대였다. 김포 평야쯤 되는 것 같은데, 길가에서 조금 들어온 곳에 장미농장이 있고, 농로를 따라 더 깊이 들어가면 넓은 논들이 나왔다.

농로는 사람도 없고, 차도 다니지 않아서 길가에 핀 잡초들만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센트럴 파크도 좋지만, 이런 시골 농로에서 조깅을 하는 것도 괜찮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자전거가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저 사람, 얼굴이 낮이 익은데..”

“왜, 최 씨가 아는 사람이야? 우리 동네 청년은 아닌데?”

자전거에 탄 사람은 두 명의 노인들이었다. 진석을 알아보는 걸 보니, 진석이 가끔 먹거리를 보내는 동네 노인정에서 진석을 본 모양이었다.

“하하, 어르신들 안녕하세요. 전, 제이에스 바이오라는 회사의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혹시 노인정에서 저 보신 적 없으세요? 가끔 이 동네 노인정에 가는데 말이죠.”

“아, 그러고 보니, 그 가끔 떡도 보내고, 과일도 보내는 그 사업가 양반이구먼, 은하수 농장 여주인하고 친하다는..”

“하하, 예, 그렇습니다. 어디 자전거 타고 가시나봐요?”

“아, 운동하러 가는 길이야. 내가 숨이 차서 한동안은 밖에도 못 돌아다녔는데. 요새 건강이 많이 좋아졌어.”

“오, 그러세요?”

“그래, 그렇다니까, 나뿐 아니라, 우리 노인정 노인들이 요새 운동하는 사람들이 늘었어.”

“음 좋은 일이네요.”

“그러게 말이야, 다들, 숨차다고 헉헉거리던 노인들이 갑자기 배드민턴을 치고, 등산을 한다고 하지를 않나, 우리는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고 말이야..하하..참, 얼마 전에 보낸, 그 보라색 당근은 잘 먹고 있어요.”

“아, 그 녹즙기도 제이에스인가 거기서 보낸 거지? 그걸로 채소랑 과일 주스를 만들어서 먹어서 노인네들이 다들 건강해진 거 아냐?”

“아, 녹즙기로 주스를 만들어 드세요?”

“좋은 기계를 보내줘서 많이 먹지. 당근도 많이 있어서 그걸로 아침에 당근 주스를 만들어서 한 잔씩 다 마신다고.”

두 노인은 한동안 노인정 자랑을 하다가, 농로 쪽으로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 갔다.

“보라색 당근이 확실히 폐기능을 강화하는 모양이군...”

진석은 다시 농로를 반대로 되돌아 은하수 농장으로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