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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쾌한 흙당근(1) (48/183)

65화. 상쾌한 흙당근(1)

카페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양소진이 손님에게 인사하는 목소리를 실제로 듣게 되는 것은 처음이었다. 남자는 30대 정도로 보이고 안경을 끼고 있었다.

옷차림은 청바지에, 가벼운 캐추얼 셔츠,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한 편한 모습이었다.

“아이스아메리카노 하나 주세요.”

“예,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 근처에 사시나 보죠?”

“아, 예. 원래 서울에 살다가, 작년에 제주도로 왔습니다.”

“작년에요? 요새는 제주로 오는 사람들이 많이 줄었다고 하던데.”

“그렇기는 하죠, 막차를 탄 셈이라고 할까요. 하하.”

“전처럼 사람들이 몰리지 않으면 더 좋을 수도 있죠. 이 카페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은 언제나 번잡하고 귀찮은 일이 많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혹시 탤런트이신가요?”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진석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닙니다.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카페 사장님이세요.”

주방에서 양소진이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나오며 말했다.

“사장님요? 이 카페 사장님이라는 건가요?”

“예, 맞습니다.”

남자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는 약간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저..그럼, 제이그룹 이진석 사장님이시군요?”

“하하, 뭐 그렇게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저를 알아보시는군요.”

“유명하지 않다뇨, 제주도에서는 특히 농사 짓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유명하신 분인데.”

제이에스 바이오가 제주도에 바나나 농장을 세우면서 제주도에 제이에스 그룹이 많이 알려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진석에 대해서도 말이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을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입니다.”

“하하, 존경이라뇨.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이에스 그룹 같은 대기업이 농업에 관심을 가져주고, 농가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충분한 자격이 있으시죠.”

“과한 칭찬이라고 생각하겠습니다. 그런데 농업에 관련된 일을 하시나 보죠?”

“예, 서울에서 회사를 다니다가, 사정이 있어서 제주도로 왔죠. 그리고 요즘은 감귤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어, 그래요. 농사에 꿈이 있으셨군요?”

진석에 말에,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아이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죠.”

“아이요? 자녀분이 왜?”

“알레르기성 천식을 앓고 있는데, 서울에는 공해가 심해서 그런지 천식 증상이 갈수록 심해지더라고요.”

“저런, 천식이면, 목의 기도가 좁아지는 걸 말하는 거죠?”

“그렇죠, 의사 선생님 말로는, 주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고 하더라고요. 신체 제어 시스템이 오작동하는 것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딱히 치료 방법은 없으니까. 공기 좋은 곳으로 내려가 보지 않겠냐고 권유를 받았습니다.”

남자는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더 얼굴이 어두워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보이는 작은 꼬마 숙녀가 안으로 들어왔다.

“아빠, 여기서 뭐 해?”

“유리 너, 아빠 찾아서 온 거야? 길 건널 때, 횡단보도로 건넜어? 손 머리 위로 들고?”

“응. 파란불일 때, 손 들고 건넜어. 아빠는 내가 그런 것도 모르는 줄 알아.”

“따님이시군요?”

“예, 집이 저 길 건너인데, 저를 따라왔나봐요.”

“아빠, 피곤해서 커피 한잔 마시러 온 거야.”

“아이고, 귀엽게 생겼네, 이름이 뭐예요?”

“이유리요. 근데 아저씨는 누구세요?”

“어, 아저씨는 여기 카페 주인이야. 참, 너, 아저씨가 뭐, 맛있는 거 줄까? 뭐 먹을래?”

“당근 주스요..”

“당근? 당근 주스? 정말, 그거 먹을 거야, 맛있는 거 많이 있는데?”

“아, 유리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알러지도 좀 있고 해서 먹는 걸 가려 먹였어요. 집에서도 토마토나 당근을 갈아서 많이 주니까, 그런 게 익숙한 편이에요.”

“아, 그렇군요. 마침, 당근 주스를 마시던 참이었는데, 소진 씨, 여기 유리 양에게도 당근 주스 한 잔 부탁해요.”

“어머, 너 당근을 좋아하는구나, 맞아, 당근 주스 같은 게 몸에도 좋다고, 맛도 그럭저럭 먹을만하고.”

소진이 당근 주스를 내밀자, 유리는 천천히 잔을 들어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채소 주스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잘 마시네요.”

“예, 덕분에 커피도 마시고, 주스까지 잘 마셨습니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네요.”

청바지를 입은 남자는 꼬마 숙녀와 카페를 나갔다.

“보기 좋은 부녀군. 딸 아이도 귀엽고 말이야.”

“그러게요. 저 아저씨는 가끔 와요. 감귤 농장을 하는데 일하다가 피곤하면, 커피도 마실 겸, 와서 책도 읽다가 가고요.”

“그래? 그나저나, 당근은 어떻게 키우는 거야? 당근 농사는 안 지어봐서 말이야.”

“아버지 말로는 씨를 파종한다고 하던데요.”

“씨를? 그런데 당근도 씨가 있었나?”

“어머, 사장님, 그런 것도 모르세요? 실망이데요.”

“하하, 내가 모르는 것도 많지. 그런 걸로 실망까지야.”

“사실은 저도 잘 모르는데,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당근 꽃이 피고 열매도 열린데요. 우리가 먹는 당근은 뿌리고. 열매는 따로 있는 거죠. 씨앗도 거기서 따로 채취해서 다음 해에는 그걸 파종하는 거죠.”

“역시 그렇군.”

“당근 씨가 필요하시면, 아버지에게 말해 볼게요.”

***

진석은 배를 타고 해운대로 돌아왔다. 해운대 마리나에 세워 놓은 차는 페라리 812 슈퍼페스트, 진석이 시동 버튼을 누르자, 12기통 엔진이 경쾌한 굉음을 내며, 페라리를 앞으로 밀어냈다.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오늘은 뭘 가져오신 겁니까?”

“이건 제주도에서 가져온 흙당근 씨앗이야.”

“아, 당근이군요. 혹시 말들에게 먹이시려고 말입니까?”

“말? 그래, 말들을 키우고 있었지. 그것도 괜찮은 생각인데. 당근이라면, 말들 간식으로 주기도 좋고.”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들을 태우고 다니느라, 고생하는데 당근이라도 주면 좋죠.”

“그래, 아무튼 당근을 키워 보자고, 말들에게 간식으로 주기도 하고 말이야.”

진석은 일꾼들과 함께 말을 타고 산으로 향했다. 비어 있는 밭에 제주도에서 가져온 씨앗들을 뿌렸다.

그리고 시간을 가속하자, 땅에서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녹색 줄기가 1미터 가까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하얗고 둥근 꽃이 피고, 열매도 맺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매에서 씨앗을 채취하고 다시 파종하는 것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수십 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공간주님, 당근의 색이 점점, 보라색이 되는데요.”

“그러게 말이야, 처음에는 약간 보랏빛이 감도는 정도더니, 지금은 완전히 진한 보라색이 되었는데.”

색이 변했다면 변종이 일어나서 뭔가 특이한 효능이 나타날 거라는 의미였다.

진석은 보라색의 당근 씨앗들을 모아, 더 증식시키는 것을 반복했다.

***

북카페 오아시스, 홍대 본점,

“보라색 당근이네요.”

“그래, 이걸로 당근 주스를 만들어 보는 거야.”

“당근 주스요?”

유민지는 어딘지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왜, 별로인가?”

“보라색 당근 주스라, 별로 느낌이 좋아 보이지 않는데요.”

“보라색이 어때서? 예쁜색 아닌가? 보랏빛 향기라는 노래도 있잖아.”

“보라색 자체는 예쁜 컬러지만, 보라색 당근 주스는 별로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아요. 당근 주스 자체가 인기 있는 주스는 아니잖아요? 아이들은 당근 싫어하는 경우도 많고.”

“일단 만들어 보자고.”

“뭐, 사장님이 정 원하시다면요.”

유민지는 진석이 가져온 자색 당근을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왔다. 언뜻 봐서는 포도 주스 같은 비주얼이었다. 진석은 유민지가 만들어 온 주스 잔을 들고 천천히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당근 주스라 큰 기대는 없었다. 그냥 당근 맛 아니겠어? 그런 생각으로 주스를 들이키기 시작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맛이 달콤하다. 코끝에 닿는 뭔가 향긋한 향도 좋고, 일반적인 당근 주스와는 달리 달콤한 과일 주스 같은 맛이 났다.

그러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채소라 그런지 뒷맛은 담백하고 깔끔해서 마시고 난 후의 느낌은 상쾌한 바람 같은 느낌이었다.

“어때요? 별로 맛은 없죠? ”

“아니, 생각보다 맛있는데. 민지 씨도 한 번 마셔봐.”

“정말요? 맛없는데 거짓말하는 거 아니에요?”

유민지는 잔뜩 의심스러운 얼굴로 자기도 주스 잔 하나를 들어 주스를 마시기 시작했다.

“음...”

“어때? 맛있지?”

“진짜 맛있네요. 이거 정말, 당근 맞아요. 되게 맛있네. 그러면서도 뒷맛은 깔끔하고..”

“그렇지? 뭔가 제주도의 바람 같은 상쾌함이 있다고..”

***

은하수 농장,

“보라색 당근이네요.”

서은주는 신기하다는 듯이 보라색 당근을 살펴보았다.

“당근이 철분도 풍부하고 건강에 좋은 편이죠. 이건, 이번에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새로 개발한 품종인데, 색도 보라색이고 맛도 일반적인 당근보다 아주 맛있어요.”

“그래요? 음, 뭔가 향도 좋은 것 같아요.”

“새로운 당근이라 반응도 볼 겸, 어르신들 좀 드셔보라고 가져왔어요.”

“그래요? 뭐, 좋기는 한데, 노인정에 계신 분들은 나이가 있으셔서, 좀 딱딱할 것 같은데..”

“그래서, 이것도 준비했죠.”

진석은 가져온 상자에서 녹즙기들을 꺼냈다.

“어머, 이게 다 뭐예요?”

“녹즙기예요. 당근만 달랑 가져오면, 어르신들 드시기 어려울 것 같아서, 녹즙기도 같이 가져왔습니다. 당근도 갈아드시고, 다른 것들도 주스로 만들어 먹기 좋더라고요.”

“와, 이런 걸 다.. 노인정의 어르신들이 좋아하시겠어요.”

“하하, 저는 바빠서, 이만 가봐야 돼서..노인정에 전달하는 건, 은주 씨에게 부탁해요.”

“예, 알았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참, 그리고, 보라색 당근 주스를 마셔보고, 반응도 부탁하고요.”

“그것도 걱정 마세요..”

서은주는 싱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북카페 오아시스, 제주시 애월읍점...

“야옹..”

카페 입구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졸고 있다가 카페로 들어서는 진석을 보고는 길을 비켜주었다.

“어, 소진 씨. 잘 있었어요?”

“사장님, 오셨어요.”

“어, 오늘은, 손님이 제법 있네.”

카페 안에는 관광객처럼 보이는 대학생 한 무리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고 지난번, 청바지를 입은 남자와 그의 딸, 유리가 같이 카페로 들어오고 있었다.

“아, 사장님도 계셨네요.”

남자는 전보다 한결 표정이 밝아 보였다.

“뭐, 좋은 일 있으신가봐요. 얼굴이 좋아지셨네요.”

“아, 저, 그게, 일단, 소진 씨. 보라색 당근 주스부터 주세요.”

“당근 주스요?”

“예, 유리가 마실 거예요.”

“안녕하세요.”

“오, 유리구나, 당근 주스를 정말 좋아하나 보네..오늘도 당근 주스를 마실 거야?”

“저, 사장님, 그 당근 주스 말인데요.”

“예? 주스가 왜요?”

청바지의 남자는 조금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우리 딸, 유리가 천식으로 고생하고 있었거든요.”

“그거라면 들은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요?”

“제가 커피를 마시러 여기 자주 오다 보니까, 유리도 따라와서 여기서 저 보라색 당근 주스를 매일 마셨거든요.”

“음, 혹시, 유리 양의, 천식이 호전됐다는 말인가요?”

“예. 맞습니다.”

청바지의 남자는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그동안의 경과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전부터 먹고 있던 약으로도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아서, 제주도로 이사까지 왔지만, 유리의 병은 크게 좋아지지 않았었는데,

얼마 전부터, 갑자기 유리가 숨쉬기가 편해졌다는 말을 많이 했다는 것이었다.

“숨쉬기가 편해졌다는 게 보라색 당근 주스를 마시기 시작하면서부터라는 거죠?”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외에는 달리 전과 다른 점은 없었고요. 사실, 어린아이가 하는 말이라,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어요.”

“그렇기는 하죠. 숨쉬기가 편해졌다는 건 좀 주관적인 의미이기도 하고.”

“그래서, 병원에서 폐기능 검사를 받아봤습니다.”

“폐기능 검사요?”

“예, 순환기 내과에서 폐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하는 검사인데, 검사를 받아 보니까 확실히 전보다 폐기능 수치가 상승했더라고요.”

“정말요?”

“예, 의사 선생님도 깜짝 놀라시더라니까요. 원래 폐라는 게 쉽게 좋아지거나 하는 경우가 드문데. 우리 유리의 폐가 너무 좋아져서 말이에요.”

“그래요? 폐기능이 향상되었다는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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