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날씬한 아보카도(1)
파리 근교 빌레쥐프
“휴우, 겨우 다 심은 건가?”
공간에서는 일꾼에게 명령만 내리면 될 일인데, 빌레쥐프의 진석의 별장에서는 모든 일을 진석이 혼자서 해야 했다.
마치 자취생처럼, 요리도 혼자 해서 먹어야 하고 말이다.
빌레쥐프의 벽돌집에는 멋진 정원이 있었다. 전 주인이 과일나무를 많이 심어 놓아서, 자두가 열리기도 하고, 사과도 열리는 곳이었는데, 그에 비해, 꽃은 전혀 없어서, 진석은 담장 주위에 장미를 심기 시작한 것이다.
사업을 하면서 중간중간 이곳 빌레쥐프에도 들르고 있었다.
파리에 가까운 곳이라, 시간이 나면 지하철을 타고 루브르에 가서 미술품 감상도 할 수 있고,
날씨가 좋은 날이면, 자동차를 타고 프랑스 시골을 드라이브 할 수도 있었다. 진석은 빌레쥐프에서 사용하기 위해 벤츠 한 대를 구입했다.
포르쉐나, 페라리 같은 슈퍼카를 살까 고민했지만, 조용한 주택가인 빌레쥐프의 진석의 집 주변에 그런 요란한 차들은 너무 튀는 것 같아서 평범한 은색, e 클래스를 사게 된 것이었다.
“장미를 심으시네요?”
“오, 크리스티나, 오늘은 수업이 없는 건가?”
“방학이에요.”
“정말?”
“예, 비캉스를 떠날 예정이라고요. 가족들하고요.”
“와, 좋겠는데. 어디로 가는 거야?”
“그리스로 갈 것 같아요, 중간에 시칠리아에도 들르고요.”
“굉장한 바캉스 여행이 되겠네?”
유럽이라 그런지, 여름이 되면 도심은 물론이고 이런 중소도시도 바캉스를 떠나는 사람들로 마을이 텅 비는 곳이 많았다. 진석도 그런 것들이 조금 낯설었지만 이 번이 빌레쥐프에서 맞는 두 번째 여름이라, 어느 정도는 익숙해진 상태였다.
“지난번에 준, cd는 맘에 들어?”
“그거, 정말 좋았어요. 솔직히 잘 모르던, k팝 그룹이었는데 친구들에게 물어보니까, 요즘 한국에서 인기라면서요?”
“그래, 요즘 막 떠오르는 보이그룹이야. 크리스티나가 좋아할 것 같아서, 하나 사 온 거였다고.”
크리스티나는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었다. 길 건너, 두 블록 정도 떨어진 곳에 살고 있는 k팝을 좋아하는 여고생이었는데, 올해 대학에 들어간 것이었다. 진석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먼저 말을 걸어온 활달한 소녀여서 진석과도 금세 친해지게 되었고..
선물이랄 건 없지만, 종종 한국 음악 cd를 갖다 주고는 했다.
“처음에는 좀 당황했어요.”
“왜?”
“cd를 선물로 주셔서요. 전 cd 플레이어가 없었거든요,”
“그래?”
“예, 전 음악이라면, 디지털 음원이나, 유튜브로 들었거든요.”
“그럼 나 때문에 새로 cd플레이어를 산 건가?”
“예, 시내, 약국 뒤쪽에 벼룩시장이 있거든요, 골동품도 파는 가게도 있고, 중고 전자제품 파는 곳도 있고요.”
“거기서 중고 cd 플레이어를 산 거군? 나 때문에..”
“좋은 경험이었죠,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거든요.”
“하하, 그래.”
“오늘은 저도 뭔가 선물을 가져왔어요.”
크리스티나는 들고 온 상자를 내밀었다.
“이게 뭐야?”
“집에서 아보카도 샌드위치를 만들었는데, 괜찮은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우리 외할머니 레시피로 만든 거예요.”
“외할머니 레시피?”
“외할머니가 아보카도를 무척 좋아하셨거든요. 그래서 자주 아보카도로 요리를 만들어 주셨어요.”
“그래?”
“그중에 제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건, 이 아보카도 샌드위치에요.”
“어디 한 번 먹어 볼까?”
상자를 열자, 먹음직스러운 샌드위치가 들어있었다. 마침 장미를 심느라 배도 고팠기 때문에, 정원에 있는 수전에서 대충 손을 씻고는 정원 의자에 앉아,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어때요?”
“아직, 씹지 않았어.”
“하하, 죄송해요. 제가 좀 성격이 급해요. 여자는 좀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알아야 되는데.”
“누가 그런 말을 해?”
“엄마가요. 저한테 늘 그러세요. 크리스티나 넌, 너무 서둘러, 남자애들 앞에서도. 여자들은, 무심한 척, 도도하게 아주 느긋한 태도로 남자를 대해야 한데요. 그래야, 남자들인 안달이 난 다나.”
“이제는 시대가 변했잖아, 좋아하는 남자가 있으면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시대라고.”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도 그렇거든요. 사실, 좋아하는 남자애가 있어요.”
“그래?”
“그래서 고백할까 말까 고민 중이라고요. 아저씨 생각은 어때요? 여자가 먼저 고백하는 거, 남자애들은 싫어할까요?”
“싫어하기는 좋아하면, 먼저 고백하는 거지. 프랑스 사람들은 굉장히 개방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걸로 고민할 줄은 몰랐네?”
“프랑스가 개방적이라고요? 전혀요. 여기는 굉장히 고리타분한 동네라고요, 한국 사람들이 더 개방적이지 않나요? k팝 아이돌들은 정말 멋지더라고요. 생각하는 것도 자유롭고.”
“그래? 한국 속담에 남의 떡이 커 보인다는 말이 있지.”
“무슨 뜻이에요?”
“자기가 사는 곳보다는 다른 나라가 더 멋져 보인다는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모두들, 자신들이 사는 현실보다는 다른 곳에 있을지 모르는 판타지를 찾는 거겠죠?”
“음, 이거 생각보다 맛있는데, 어떻게 만든 거야?”
“뭐, 별건 없어요. 흔해 빠진 프랑스 바게뜨 빵에, 딸기잼을 듬뿍 발라주는 거죠. 그리고 그 위에 으깬 아보카도를 얹어 주면 돼요.”
“정말? 굉장히 간단한데?”
“삶은 계란을 추가해도 되지만, 귀찮으면 안 해도 되고요. 아무튼 마지막으로 인사드리려고 온 거예요. 내일부터는 바캉스 여행을 떠나거든요.”
“그래, 하지만 여름이 끝나면, 다시 보게 되겠지.”
***
여의도의 한정식집.
“두 분은 서로 친분은 없으신가요?”
“하하, 당적이 다르다 보니까. 자주 뵙지는 못했습니다.”
제이에스 스토어에서 제주도산 바나나를 판매하는 문제로 오명진 강원도 지사와, 고일준 제주도 지사 그리고, 진석이 같이 겸사겸사 모인 식사 자리였다.
“제 생각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 같습니다.”
“두 가지 방법요?”
오명진 도지사는 진석을 바라보았다.
“문제가 되는 건, 강원도가 투자한 제이에스 스토어에서 제주도산 농산물을 판매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사실, 제주도 지사님이 계셔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제 개인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도든 강원도든, 둘 다 대한민국이고 어느 곳이든 어려운 농촌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까요.”
“하하, 그렇게 생각해 주시면, 제주도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죠.”
“그런데 고일준 지사님도 아시겠지만, 이제 곧 지방선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선거 국면이 되면, 잘한 일도 비판하고 공격을 하는데, 문제는 제이에스 스토어에 강원도가 투자한 것도 공격 거리가 될 거라는 거죠.”
“설마 그렇기야 할까요? 농산물 판매를 하는 매장인데?”
“아닙니다. 벌써 그런 말들이 돌고 있어요. 강원도 돈으로 다른 지역 농산물 판매를 하게 하면, 강원도만 호구 되는 거 아니냐 이런 식이죠.”
“하하, 별로 적절한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선거철이 되면, 합리적인 것보다 감정적인 이야기들이 주류가 되고는 하죠.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면, 지역 이기주의라고 하겠지만. 지방선거에서는 지역 이기주의자들이 득세하니까요.”
“뭐, 그렇기는 하지만, 저, 그럼, 이진석 사장님이 말한 두 가지 방법이라는 건 뭡니까?”
“제가 생각을 해봤는데, 오명진 지사님 입장도 있고 해서 말입니다. 한 가지 방법은 제주도도 강원도처럼, 제이에스 스토어에 투자를 하는 겁니다.”
“제주도가요?”
“예, 그러면, 공동 투자자가 되는 거니까, 다른 말이 안 나오겠죠.”
진석의 말에, 고일준 지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은 상황이 안 좋은데요. 오명진 지사님도 말했지만, 선거도 코 앞이고. 아마 의회에서 예산 승인이 안 날 겁니다. 제가 제주도 의회와 사이가 안 좋은 편이라.”
“그런 문제가 있군요. 그럼, 두 번째 방법인데, 제이에스 바이오가, 강원도 투자 지분을 모두 인수하는 겁니다.”
“지분을요?”
“예, 뭐, 저도 처음에는 농산물 전용 매장에 확신이 없어서 소극적이었는데. 막상 매장을 열어보니, 가능성이 큰 사업인 것 같습니다.”
“음, 그래서 이참에 아예, 제이에스 스토어를 완전히 제이에스가 인수하겠다 이거군요?”
“강원도의 투자 지분을 인수해도, 강원도 농가들과의 협력 관계는 그대로 유지할 생각입니다. 이미 제이에스 그룹이 강원도에 농업 연구소 단지도 건설했고. 농업 연구와, 농산물 유통 분야에서 계속 강원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으니까요.”
오명진 도지사는 잠시 고민을 하는 것 같았다.
“이게 선거에 도움이 될까요?”
“하하, 저는 정치가는 아니지만, 잘만 포장하면, 예산을 절감한 사례로 잘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인수과정에 대해서는 강원도가 유리하게 발표하셔도 저희는 상관하지 않을 테니까요.”
고일준 제주도 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되면, 제주도 바나나 판매도 문제가 없겠군요?”
“그렇죠. 강원도의 투자 지분을 제이에스가 인수하면, 제이에스 스토어는 사기업일 뿐이니까요.”
“제 생각에는 이진석 사장님의 방법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지금 제주도가 투자하기는 어려운 상황입니다. 선거도 얼마 안 남았고.”
“할 수 없군요. 뭐,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럼, 강원도의 투자 지분을 제이에스 그룹이 인수하는 걸로 하죠.”
“하하, 이렇게 간단하게 해결되네요.”
고일준 지사의 말에, 오명진도 미소를 지었다.
“대신, 언론에는 우리 강원도청에서 적당히 발표하겠습니다. 그건 상관없겠죠?”
“물론이죠. 원하는 대로 발표하시죠.”
***
제주시, 북카페 오아시스 애월읍점
“민지 씨. 카페가 아주 아담하네.”
“예, 서울하고는 다르잖아요. 너무 크게 만들어도, 주변하고 조화가 안 될 것 같아서요.”
“그래? 건물이 좀 더 커도 괜찮지 않아?”
“제가 주변 상권 분석을 좀 해봤는데,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곳도 아니고 해서, 너무 크게 지으면, 손님이 너무 없어 보일 것 같아서요.”
“하긴, 카페만 크고, 사람이 없으면 좀 그렇지.”
요가 강사인, 이채린에게서 구입한 요가 학원 겸 전원주택 건물을 적당히 개조해서 북카페 오아시스 애월읍점을 오픈하게 되었다.
애월읍점은 시골이고 유동인구가 많지 않은 점을 감안해, 테이블이나 의자 수는 줄이고, 대신 적은 수의 손님이라도 다양한 책을 읽을 수 있게, 벽면의 책장을 더 만들어, 장서 수를 늘렸다.
그래서인지 얼핏 보면, 도서관 같은 느낌도 있었다.
“손님은 많이 없겠지만, 한적해서 좋은데. 나도 요트를 타고 제주도에 자주 오는데, 오면 여기서 쉬다가 가면 좋겠어. 구석에서 책도 읽고 말이야.”
“한적하고 조용하기는 해요. 저도 며칠 쉬다 가고 싶은데요.”
“하하, 서울에 바쁜 일이 없으면, 그러던지. 참, 이건 뭐야?”
진석은 테이블 위에 놓인 바구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보카도예요.”
“아보카도?”
그러고 보니, 녹색의 작은 호박 같은 못생긴 열매들이 바구니에 가득 들어있었다.
“근처에 서울에서 귀농한 분이 아보카도 농장을 하신데요. 북카페를 개업했다고 하니까, 개업 선물이라고 주고 가셨어요.”
“오, 그래? 제주도에서도 아보카도 농장이 있었군. 이걸로 샌드위치를 좀 만들어 볼까?”
“샌드위치요?”
“어, 내가 프랑스식 아보카도 샌드위치 레시피를 아는데 말이야, 아주 간단해.”
***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공간주님, 오늘은 뭘 가지고 오셨습니까?”
“아, 이건, 아보카도 씨앗이야.”
“아보카도요?”
사령관은 진석이 가져온 아보카도 씨앗들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래, 샌드위치를 만들고 남은 씨앗들인데, 버리기는 아깝고. 이걸 산에 가져가서 심어 보자고.”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아아, 잠깐, 일단 잠부터 자고 너무 피곤해서. 잠부터 자야겠어.”
“그렇게 하시죠. 저희들은 준비를 하고 대기하겠습니다.”
진석은 일단, 잠부터 자기로 했다. 공간을 허브로 이용하며, 파리, 뉴욕, 해운대, 서울을 오가는 이중, 아니, 4중 생활에, 요트를 타는 취미 생활, 그리고 각종 사업의 규모도 확장되면서, 진석은 현실 세계에서는 항상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시간이 정지되는 공간에서 밀린 잠을 보충해야 했다.
진석은 야자수 그늘의 해먹으로 다가가 쓰러지듯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