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맛있는 바나나(1)
북카페 오아시스 건대점.
“지영 씨, 저 학생들은 다 뭐야?”
“알바하고 싶다고 몰려온 지원자들이에요.”
“알바 지원자들?”
한지수는 말 그대로 벼락 스타가 되어버렸다. 클럽 이비자 미백 크림도 대성공을 거두었지만, 어쩌면 그보다도 무명의 카페 아르바이트생이었던 한지수가 화장품 cf를 통해 얼굴을 알리면서, 떠오르는 라이징 스타가 되어 버렸고..
“한지수는 이번에 영화 캐스팅 됐다면서요?”
“그래, 주연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연기 경력도 없는데 주연으로 바로 해도 되는 건가?”
“그거야, 캐스팅한 감독이 알아서 할 일이겠죠.”
“저 여대생들이 다, 한지수처럼, 오아시스 카페에서 알바를 하다가 스타가 되지 않을까 모여든 학생들이라는 거지?”
“한지수가 워낙 뜨고 나니까, 한지수처럼 되고 싶다고 오아시스에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대학생도 있고, 고등학생들도 많이 오고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하지.”
“사장님은 이번 일이 어떻게 보이시는데요?”
“난, 그저 재밌게 보이는데. 내가 멀리서 보는 모양이지.”
한지수는 cf모델로 성공하면서 카페 아르바이트는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되었다.
***
진석의 요트가 중문 마리나로 입항하고 있었다.
배에서 내려, 렌트한 차를 타고 향한 곳은 제주도의 농업 연구소
“오, 여기에 바나나가 다 있네요.”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열대과일 바나나, 물론 마트에서는 흔하지만 말이다.
진석이 바나나 나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자 안경을 낀 직원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다가왔다.
“신기하죠. 한국에 바나나를 키우는 곳이 다 있고 말입니다.”
“하긴, 여긴 온실이니까. 가능한 거겠죠?”
진석이 지금 들어온 곳은, 제주 농업 연구소 산하의 온실동이었다.
“제주도 정도 날씨면 바나나가 노지 재배가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겨울에는 온도가 낮아서 대량 생산하기는 여건이 좋지 않으니까요. 이진석 사장님이시죠?”
“저를 아십니까?”
“하하, 한국에서 농업 관련된 일을 하면서, 이진석 사장님을 모른다면야 되겠습니까. 농업계의 슈퍼스타이신데.”
“슈퍼스타라뇨? 과찬이십니다.”
“그정도 자격이 충분하신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이번에는 바나나에 관심을 가지시는 건가요?”
“음, 뭐, 좀 흥미롭네요. 바나나는 어떻게 번식하는 건가요?”
“바나나요? 아, 참, 저는 송유민이라고 합니다. 이곳 온실을 관리하고 있죠.”
남자는 30대 초반 정도의 깔끔한 인상이었다. 약간 짧은 머리에 회사원 같은 인상이기도 했는데, 실제로도 제주시 공무원이라고 했다.
“여기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제주시에서 운영하는 연구소군요?”
“예, 제주도는 자치제도가 발달한 곳이죠. 뭍 그러니까, 중앙정부와는 좀 독립적인 것이 있습니다.”
“바나나 나무는 왜 키우는 겁니까. 관상용인가요?”
“아닙니다. 제주도는 평균 기온이 높은 지역이라, 바나나 재배도 가능하죠.”
“정말요?”
“그럼요, 단지, 바나나 농사를 지을 만큼, 바나나가 고수익 장물은 아니니까요. 사실, 바나나가 본격적으로 수입되기 전인, 80년대만 해도, 제주도에서는 바나나를 재배했었죠.”
“오, 80년대에 말인가요?”
“그 시절에는 바나나가 굉장히 고가였기 때문에, 감귤 농사보다 더 수입이 좋은 작물이었습니다.”
“그 정도였나요?”
“최근에 바나나 농사를 짓는 농가가 늘어나기는 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수입 바나나가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에, 그렇게 큰 경쟁력이 있는 건 아닙니다.”
“음, 제주도에서 바나나 재배가 가능했었다니 신기하네요.”
“예, 하우스 재배로 바나나를 키웠는데, 여름과 가을 정도는 노지도 괜찮지만, 겨울에는 따로 가온을 해야 하기 때문이죠.”
“흥미로운 사실을 배워가네요. 참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바나나는 어떻게 키우는 겁니까? 씨가 따로 있나요?”
“바나나는 자연 3배체 식물입니다.”
“자연 3배체요?”
“유전자가 3개가 모여 한 쌍을 이룬다는 말이죠. 쉽게 말해, 남과 여 사이에, 뭔가 하나가 더 끼어들어 있는 셈입니다.”
“어디로 들은 적이 있는 것 같네요. 우리가 아는 보통 식물은 2배체, 즉 암수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 유전자 하나가 더 들어간 게, 3배체 식물이라는 거죠. 씨 없는 수박처럼 말이죠.”
“예, 잘 알고 계시네요. 사실, 씨 없는 수박은 원래, 2배체인 수박에, 인공적으로 만든 4배체를 교배시켜 3배체를 만든 거죠. 그렇게 되면, 생식력이 없는 씨 없는 수박이 나오는 겁니다.”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바나나는 말하자면, 자연적으로 씨가 없는 3배체 작물이라는 거군요.”
“맞습니다. 이렇게 무성생식을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죠. 감자도 그렇고요.”
“바나나도 영양체 번식인가요? 감자처럼?”
“아닙니다. 바나나는 일종의 클론 복제를 하기는 하지만, 감자나 고구마와는 다르죠. 뿌리 부분에서 측아, 라고 하는 일종의 새순이 돋는데 그걸 잘라 심으면, 바나나 나무가 되는 거죠.”
“그것도 무성 생식 종류겠군요. 그렇다면, 다양성의 문제가 생기지 않나요. 클론 번식을 하는 식물들은 유전적으로 동일해져서, 나중에 각종 병해에 취약하게 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바나나도 딱 그런 상황이죠. 사실은 바나나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파나마 병 곰팡이 균에, 몇 종류의 바나나들은 거의 멸종을 하고, 지금의 캐번디시 바나나만 남은 거죠.”
“멸종요?”
“예, 사실, 바나나는 말레이시아가 원산지인데, 처음에 미국에 바나나가 소개됐을 때만 해도 굉장히 고급 과일이었습니다.”
“그때는 지금과 다른 품종이었나요?”
“그렇죠, 초기에 미국에서 바나나가 맛있는 과일로 명성을 떨치던 시절의 바나나는 그로 미셸이라는 품종이었죠, 아까 말씀드린 곰팡이 균에 멸종한 비운의 바나나입니다.”
“그게 더 맛이 좋았나보죠?”
“보통 그렇게 알려져 있죠. 그로 미셸이 바나나를 대중화시킨 맛있는 바나나였다면, 지금의 캐번디시는 파나마 곰팡이에 강한, 튼튼한 품종이죠. 어차피, 지금은 하나 남은 상업적으로 재배되는 바나나지만 말입니다.”
“아쉽네요. 더 맛있는 바나나가 있었다니, 지금은 그 맛을 볼 수 없고 말입니다.”
“하하, 아쉬우시면,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바나나를 좀 연구해 보시죠. 제이에스의 기술력은 상상을 초월한다고 하던데.”
“하하, 그래볼까요? 그나저나, 바나나는 씨가 정말 없는 겁니까?”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상업적으로 재배되는 바나나는 아니지만, 야생 바나나 중에는 아직도 씨앗이 있는 바나나들이 있죠. 제가 보여드리겠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송유민은 온실 한쪽으로 진석을 안내했다.
***
“공간주님, 오늘은 뭘 가져오신 건가요?”
“바나나야, 물론, 보통 바나나는 아니고, 열대 우림에 자생하는 야생 바나나지.”
송유민 연구원이 진석에게 전해준 것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져온 야생 바나나였다. 맛이나 모양은 보통의 케번디시보다 떨어지기는 했지만, 안쪽을 갈라보니, 마치 호박처럼 씨앗이 많이 들어 있었다.
잘라 낸 야생 바나나는 마치 호박 같은 느낌이었다. 과육 부분 가운데에 씨앗이 들어 있었다.
“씨앗을 채취해서 뭔가 만들어보자고.”
***
상하이, 난징루
“이곳이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인가요?”
“그렇죠, 서울로 치면, 강남 정도라고 할 수 있죠.”
서태준은 진석에게 상하이를 구경시켜 주고 있었다.
상하이의 강남이라고 할 수 있는 난징루를 걷고 있으려니, 여기저기서 페라리, 람보르기니 같은 슈퍼카들이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공산주의 국가라고는 하지만, 부자들의 씀씀이는 자본주의 국가들 못지않군요.”
“하하, 저런 슈퍼카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초대받은 상하이 요트 클럽에는 저런 차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호화 요트들이 즐비하죠.”
중국에서 사업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는 꽌시를 만들기 위해, 서태준과 함께 상하이를 찾은 진석은 상하이 일대의 백화점 수십 개를 가지고 있다는 바이반 그룹의 리진 회장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리진 회장은 상하이 요트 클럽의 회장을 맡고 있기도 했다.
서태준과 난징루 일대를 관광 겸, 돌아보고 그 다음날은 리진 회장이 주최하는 요트 선상 파티에 초대되었다.
상하이의 마리나 일대에는 화려한 요트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확실히 중국에 요트들이 많네요. 한국에 비해서 스케일이 있다고 할까.”
진석이 감탄하는 표정을 짓자, 서태준도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부자들이 더 과감한 편이죠. 자동차 중에, 고급 수입 명차들을 슈퍼카라고 하는 것처럼, 75피트 이상의 고급 호화 요트를 메가 요트라고 부르죠.”
“메가 요트요? 슈퍼카, 메가 요트 약간 비슷한 느낌이네요.”
“요즘 중국 경제가 호황이라, 어지간한 슈퍼카 정도로는 부자 축에도 못 낀다고 하죠. 그래서 더 고가의 사치품인 메가 요트 시장이 아주 활발합니다. 그런데 재밌는 건, 이런 메가 요트 중에, 70% 이상이 항해한 적이 없는 요트들이라는 거죠.”
“예, 왜죠? 이런 좋은 요트를 왜 운행을 안 하는 겁니까?”
“그만큼, 요트는 과시욕에 적합한 사치품이라는 거죠. 꼭 배를 출항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 주변에 부를 과시하는 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에, 비싼 배지만, 이렇게 마리나에 정박해 놓기만 하는 겁니다.”
“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네요.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지 않을 거라면, 배가 왜 필요한 건가요?”
***
제이에스 본사.
“그래서 선상 파티는 어땠어요?”
“완전 멋졌지.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배가, 엄청 큰 배였는데. 굳이 출항을 하지 않고, 멋진 요트 위에서 파티를 벌이는 것만으도 가치가 있더라고.”
리진 회장이 주최한 선상 파티에 참성한 진석은 바이반 그룹 계열의 백화점에 클럽 이비자 매장을 입주시키는데 합의를 할 수 있었다.
서태준이 말하는 꽌시 덕분이었는지, 리진 회장은 제이에스와의 합자 회사를 설립하는 데 적극적이었고, 그것은 곧 성과로 나타났다.
“중국에 단독으로 진출하기는 어렵고, 바이반 그룹과 손잡기로 했어.”
진석의 말에, 이수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잘하셨네요. 중국은 공산주의 국가라 외국인이 단독으로 사업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어쩌겠어. 중국 화장품 시장에 도전하려면, 중국인들과 인맥을 만들어야지,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르라고 하잖아.”
***
중국 출장에서 돌아와, 진석은 바로 공간의 문을 열었다.
“사령관, 지난번에 심은 바나나는 잘 자라고 있겠지?”
“예, 산 아래쪽에 바나나 군락이 형성되었습니다.”
“그래?”
진석은 이번에도 산기슭의 마련된 밭들에서 실험을 시작했다. 지난번에 심어놓은 것은, 원산지인 말레이시아의 밀림에서 가져온 야생 바나나들이었다. 지금의 측아 번식을 하는 캐번디시 종보다는 상품성은 떨어지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야생 바나나들은, 바나나 열매속에 씨가 들어 있었다. 그것도 아주 단단한 씨가 들어 있어서 종자를 채취할 수는 있지만,
바나나 자체의 상품성은 떨어진다. 그 외에도 맛과 모양도 지금의 예쁘고 먹음직스러운 바나나 송이와는 완전히 다른 투박한 모습이었다.
“바나나처럼 생기지도 않았고 맛도 별로고.”
진석은 씨가 씹히는 바나나를 하나 씹어보다가 그대로 뱉어 버렸다.
“맛이 그렇게 형편없나요?”
“그래, 더 맛있는 바나나를 만들고 싶은데, 이건, 캐번디시만도 못해. 할 수 없지 작업을 시작하자고.”
또다시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일꾼들이 몰려들어, 야생 바나나 종자를 채취하고, 그걸 비어 있는 밭에 심으면, 진석이 시간을 가속했다. 금세 씨앗에서 싹이 나오고, 줄기가 뻗으며 3미터 이상으로 자라는 바나나 나무가 생겨났다. 그리고, 꽃이 피고, 바나나 꽃에서 열매에 해당하는 바나나 송이가 자라기 시작한다.
1년, 5년, 10년, 100년...그리고 천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뭐지? 이번 바나나는 좀 괜찮아 보이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진흙인간이라 바나나를 먹을 수는 없지만, 맛있어 보이네요.”
천 년의 시간을 가속한 후에 드디어 뭔가 야생 바나나에서 변종 바나나가 나오기 시작했다. 진석은 바나나 송이가 노랗게 익은 변종 바나나를 하나 따서 먹어 보았다.
“음, 맛있어. 이건, 당도가 굉장히 높은데. 그리고 속은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기까지 하고.”
그리고 얼마 전까지 가운데에 있던 단단한 씨앗도 보이지가 않았다.
“씨는 없어진 건가? 그러면 곤란한데..”
“아닙니다. 공간주님, 씨는 바나나 끝에 있네요.”
“그래?”
사령관의 말대로, 바나나 열매의 맨 끝에 검은 씨앗이 들어 있었다. 다른 바나나들도 껍질을 까보니, 다 씨앗이 맨 끝부분에 박혀 있었다.
“음, 맛도 좋고, 씨앗이 있기는 하지만, 맨 끝부분에 들어 있어서, 먹는데 방해되지 않고 이거 괜찮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