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깨끗한 오이(2)
엔시스 테크 사장실,
“오이라고요?”
“예, 완전히 하얀, 알비노 오이라고 할까요. 뭔가 유전적으로도 특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진석의 말에, 강민호는 신기하다는 듯이 하얀 오이를 들여다보았다.
“이걸 어디에 쓰시려는 겁니까?”
“피부 트러블에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요, 보습 효과도 있는 것 같고.”
“피부에 좋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이 백오이 추출물로 뭔가 피부 개선 효과가 있는 약품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떨까 하는데..”
“진짜 피부 트러블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면, 여드름 치료제나, 염증 치료제 그런 것도 가능할 것 같고요. 기능성 화장품도 가능할 것 같네요.”
“화장품, 기능성? 화장품요?”
“예, 피부에 좋은 물질이라면, 약품보다는 화장품 쪽이 상업적 가치가 있죠.”
“그럴까요?”
“화장품과 약품의 중간 개념으로 기능성 화장품이라는 것도 있습니다.”
“피부 트러블 개선 효과가 있는 화장품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피부에 관련된 약품들은 경계가 모호하기는 하죠. 피부라는 곳이 아무래도, 미용과 관련된 미적 영역이니까 말입니다.”
“그렇겠네요. 아무튼 뭔가 만들어보죠.”
강민호는 잠시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성분이나 효능을 분석하는 건, 저희도 가능하지만 기능성 화장품을 만드실 거라면, 화장품 전문가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화장품 전문가요?”
“피부 개선 효과가 있다고 해도, 보통은 화장품으로 판매가 되니까, 주 고객인 여성의 취향에 맞추어서 향이나, 아니면, 포장 디자인이라거나, 제약 회사인 우리보다는 화장품 쪽에 경험이 있는 업체가 제품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해서 말입니다.”
“그 말도 일리가 있군요. 그럼, 이렇게 하죠. 엔시스가 이 백오이의 성분 분석과 피부에 작용하는 효과를 연구해 주시고. 그 결과가 나오면, 그걸 바탕으로 화장품으로 만들 회사를 알아보는 걸로.”
“알겠습니다. 일단 성분 분석부터 해보겠습니다.”
***
스카이 캐슬, 엘리베이터 안..
“최진아 씨가 대주주라고요?”
“하하, 모르셨나요. 뭐, 남자분이니, 화장품에는 관심이 없으시기는 하겠죠.”
우연히 입주민 전용 로비에서, 서태준을 만나서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42층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최진아 씨는 배우라고만 생각했는데, 화장품 사업을 하는 줄을 몰랐습니다.”
“5년 전쯤인가, ‘서울 로맨스’ 라는 드라마가 베트남에서 크게 히트한 적이 있었죠.”
“그래요? 저는 드라마는 잘 안 봐서.”
“아무튼, 그 드라마가 한국에서는 별로였는데, 베트남이나, 동남아에서 대박이 났었죠. 최진아도 그때, 베트남에서 CF를 수십 편을 찍었을 겁니다.”
“한류라는 말이 실감이 나네요.”
“예,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경제력이 크지는 않아도 아주 작지도 않습니다. 한국에서 빅히트를 하는 것만은 못해도, 베트남이든 어디에서든 드라마가 대박이 나고 인기를 얻으면, 돈벌이가 되는 거죠.”
“그렇겠네요. 대박은 아니어도 중박은 되는 건가요?”
엘리베이터는 42층에서 멈추었다. 다시 복도를 지나, 로비가 나오고 있었다.
“아무튼, 그때, 진아가 화장품 모델로 인기가 좋으니까, 조금 욕심이 났었는지, 자기가 화장품 회사를 차린 거죠.”
“그래서 화장품 사업은 성공한 건가요?”
“최진아의 명성으로 그럭저럭 유지는 하는 것 같은데. 진아 말로는 정리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생각보다, 잘 안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
청담동, 와인바..
“클럽 이비자를 인수하고 싶으시다고요?”
“예, 진아 씨가 매각할 생각이 있으시다면 말입니다.”
부드러운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태준 오빠가 그러던가요. 제가 화장품 회사를 팔고 싶어한다고?”
“예, 서태준 씨가 그런 말을 하더군요.”
“인수하려는 이유가 뭐죠?”
“제이에스에서 새로 개발한 물질이 있는데, 그걸로 기능성 화장품을 만들어보려고 말입니다.”
“음, 그래서 화장품 생산 경험이 있는 회사가 필요하다는 거군요?”
“예, 저도 서태준 씨에게 얼핏 지나가는 말로 듣고나서, 클럽 이비자에 대해서 조사를 좀 해봤습니다. 최진아 씨가 인수하기 전에도 기술력으로 유명한 중소기업이더군요.”
“후후, 맞아요. 제가 연예인이라 화장품이나 그런 쪽은 잘 알거든요. 사업은 잘 모르지만, 화장품은 나름 전문가라, 이것저것 꼼곰하게 따져보고 회사를 인수한 건데, 전에는 성원 생활건강이라는 회사였어요.”
“대기업 하청 회사로 화장품 생산 경력은 상당하더군요.”
“맞아요. 자체 브랜드는 없었지만, 유명한 국내 화장품들을 하청으로 생산하는 중소기업이었죠. 성원의 기술력과 생산경험, 그리고 저의 동남아에서의 인기와 제 투자금을 합쳐서 뭔가 대박이 날 줄 알았는데.”
“크게 성공은 못 하신 모양이네요?”
최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잔을 비웠다.
“처음 시작할 때는 엄청 잘 될줄 알고, 이비자라는 이름도 세계 시장을 겨냥한 브랜드였죠.”
“이비자, 라면, 스페인의 휴양지로 알려진 이비자 섬 말이군요.”
“아시는군요. 맞아요. 저도 몇 번 가본 적이 있어요. 원래는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는데, 지금은 고급 휴양지로 유명해졌죠.”
“아름다운 섬이라고 하더군요?”
“아름답다기보다, 휴식과 힐링을 위한 섬이라고 할까, 사실 가보면 아름다운 해변이 있고 그 외에는 그저 그래요. 엄청 대단한 게 있는 건 아니라는 거죠. 어찌보면, 한적한 시골마을 같은 곳인데. 물론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도 있지만요.”
“휴양지라는 곳이 다 그렇죠. 원래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쉬러 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게 말이에요. 클럽 이비자라는 브랜드로 세계를 석권해 보려는 야심이 있었는데 생각보다 사업이라는 게 쉽지가 않더라고요. 제 얼굴 하나로 화장품을 팔 수는 없는 거라는 걸 깨달은 거죠.”
최진아는 와인 잔을 단번에 비워 버렸다.
“한 잔 더 주세요. 왠지 속상해지네요.”
“하하, 그래도, 연예인 활동 하시면서 그 정도 사업을 하는 것만 해도 대단한 거죠.”
“아무튼, 이진석 사장님이 클럽 이비자를 인수하시고 싶다면 회사는 넘겨드릴게요.”
“정말요?”
“예, 솔직히 저는 사업에는 소질이 없나봐요, 경영 쪽으로는 재미도 없고.”
“그렇다면, 최진아 씨, 지분을 인수하는 걸로 하죠. 일단, 실무적인 건 따로 서류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일단 거래는 성립한 거군요. 건배나 할까요.”
“좋습니다.”
진석은 와인 잔을 들어올렸다.
***
제이에스 스토어 압구정점.
입구에 설치된 대형, TV에서는 제이에스 바이오의 광고가 반복해서 재생되고 있었다.
“지원 씨, 어때요? 압구정 매장도, 생각보다 사람이 많은데요.”
장지원은 신촌 제이에스 스토어 점장을 맡고 있었지만, 압구정점을 오픈하자, 이쪽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예, 요즘은 수박 음료도 잘 나가고, 다큐멘터리가 방영된 이후로는 튼튼 감자를 찾는 분들도 많아요.”
“다른 농산물들은 어때요? 강원도에서 생산된 유기농 채소류나 한우는요?”
“한우도 꾸준하게 팔리고 있고, 유기농 채소들도 가격이 비싼 편인데도 좋아하세요.”
“음, 다행이군요.”
주부 두 명이, 호박과 감자를 고르고 있었다.
“이게 그 튼튼 감자구나, 이거 맛있다면서요?”
“은정이 엄마, 그거 괜찮아. 감자나 단맛이 있어서, 그냥 쪄서 먹어도 애들 간식으로 잘 먹어.”
“그래요? 몇 개 사가야겠네.”
다행히 강원도에서 생산된 농작물들은 잘 판매가 되고 있었다. 진석이 매장을 둘러보며, 하나하나 신선도를 체크해 봤는데. 산지에서 직송한 것들이라, 일반 마트에서 판매되는 것에 비해, 확실히 싱싱하고 상태가 좋은 것들이었다.
다만, 유기동 작물들이라, 가격이 좀 비싼 게 문제였는데, 다행히 품질이 만족스러워서인지 판매가 잘 되고 있었다.
***
춘천, 송암 스포츠 타운, 보조 경기장.
필드에서는 강원 FC 선수들이 두 팀으로 나누어 연습 게임을 하고 있었다.
“팀 리빌딩은 잘 되고 있는 겁니까?”
“예, 보시다시피, 젊은 선수들이 대거 들어왔습니다. 대부분 강원대학에서 제가 가르치던 제자들입니다.”
김현수 감독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경기 내용을 지켜 보고 있었다. 인제에 공사현장을 보고 오는 길에, 춘천에 들러 강원 FC의 경기장이며 선수들 훈련을 한 번 보러 온 길이었다.
“대학에서 가르쳤던 제자들이니, 특징이나 장단점은 잘 파악하고 계시겠네요?”
“그렇기는 하죠.”
“어떻습니까. 내년 시즌에는 괜찮은 결과가 나올까요?”
“아, 글쎄요. 일단은 2부 리그인 챌린지 리그에서 K리그로 승급하는 게 목표니까. 최선을 다해봐야죠.”
“패스 연습을 많이 하네요.”
“지금 우리팀의 자원으로는 스타급 선수는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조직력을 강화하려면, 짧은 패스로 공간을 점유하는 방법 밖에는 없습니다.”
“마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처럼 말이군요?”
진석의 말에, 김현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바르셀로나는 최고의 팀이고, 선수 개개인도 최고의 선수들이죠. 그런 선수들이 자신들의 개인능력을 죽여가면서, 팀을 위해서 티키타카라는 패싱 전술을 쓰는 거라면, 저희들은 부족한 개인기를 커버하기 위해 패싱 위주로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패싱력은 좋아 보이네요. 내년 시즌에는 반드시 K리그로 승급했으면 좋겠네요.”
“최선을 다 해 보겠습니다.”
***
성원 생활건강 인천 공장..
“화장품 공장은 처음인데, 무슨 실험실 같네요.”
“예, 그렇죠. 여기는 신제품을 개발하고, 샘플을 생산하는 곳입니다. 화장품도 제조도 일종의 화학이라고 할 수 있죠.”
“그렇겠네요.”
성원 생활건강은, 3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중소기업이었다. 원래는 유명 브랜드의 화장품을 하청 생산하다가, 10여 년쯤 전에 자체 브랜드를 내놓고 화장품 시장에 정식으로 뛰어든 회사였다.
박성진 사장은 잠시 그때를 회상하는 듯했다.
“지금은 제 나이가 50이지만, 그때는 40대라 아직 혈기가 왕성했죠. 아버지가 평생 대기업에 하청만 하시는게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원래, 성원은 박성진 사장의 아버지가 창업한 화장품 공장이었다. 평생 하청생산만 하면서 원청기업의 갑질에 시달리는 걸 옆에서 지켜봤던 박성진 사장은 신제품 화장품을 개발해 독자 브랜드를 만들려고 했던 모양이었다.
“화장품 제조는 우리가 다 하는 거니까, 브랜드를 만들어서 유통만 시키면 될 거라고 생각한 거죠.”
“생산에는 자신이 있으셨던 모양이군요?”
“제가 착각했던 거죠. 경제는 유통이라는 걸 그때는 전혀 이해를 못했어요. 좋은 제품만 생산하면 되는 줄 알고, 마켓팅이나 브랜드 이미지, 소비자의 구매 패턴 같은 건 전혀 생각을 안 한 거죠.”
“그래도 화장품 자체는 품질이 좋았다고 하던데?”
“제품 품질은 최상급이었죠. 원래 대기업 하청하던 기술과 노하우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똑같은 제품을 만들어도, 포장이 다르면 소비자는 다르게 받아들인 다는 걸 이해를 못 했던 거죠.”
“그래서 최진아 씨와 동업을 하신 거군요?”
“그렇죠, 그때는 자금난도 심각하고. 또 최진아 씨 같은 유명 여배우와 같이 회사를 운영하면, 인지도 때문에라도 우리 제품이 잘 팔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고요.”
“하지만 역시, 최진아 씨와 같이 만든, 클럽 이비자도 성공은 못 했고요?”
“생산 공장과, 유명 여배우의 명성, 그 두 가지로도 뭔가 부족했던 거죠.”
“뭐가 부족했던 걸까요?”
진석의 질문에 박성진은 잠시 뜸을 들였다.
“차별성이죠. 그게 브랜드 이미지든, 아니면 그 제품의 독특한 특성이든 이 제품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남다른 뭔가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우리 제품들은 어정쩡했던 거죠.”
진석은 들고온 상자를 박성진 사장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제가 최진아 씨의 지분을 인수한 건 아실 테고. 이건, 저희 제이에스 바이오 계열사인 엔시스 테크의 연구팀이 개발한 신물질입니다.”
“신물질요?”
“오이 추출물로 만든 천연 크림이라고 할 수 있죠. 물론, 아직 화장품이라고 하기에는 기초물질 수준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피부 미백이나, 수분 보충 효과가 엄청납니다.”
“음, 그럼 이걸로 화장품을 개발하라는 겁니까?”
“예, 이 오이 추출 크림과, 성원의 축적된 화장품 생산 기술이라면 최고의 제품을 만들어 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기존의 화장품들과 확실하게 차별화된 그런 신제품을 말입니다. 하실 수 있겠습니까?”
진석의 말에, 박성진 사장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