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깨끗한 오이(1) (36/183)

53화. 깨끗한 오이(1)

“아버지 이건 뭐예요?”

“뭐긴 보면 모르니? 비닐하우스잖아.”

시골집에 내려가 보니, 과수원 앞에 못 보던 비닐하우스가 세워져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힘들게 비닐하우스는 왜 만드셨나 하는 거죠?”

“힘들기는.. 비닐하우스 하나 농사 짓는 게 힘들 게 뭐 있니?”

아버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표정이셨다.

“힘드실까봐 그러죠. 비닐하우스에는 뭘 심으시게요?”

“오이도 심고, 상추도 심고, 토마토도 심고, 농사 지어서 팔려고 하는 건 아니고, 텃밭처럼 키워서 우리 식구나 먹으려는 거지.”

“사서 드시면 되죠. 오이나 토마토는 마트에 가면 흔한데.”

“사서 먹는 것보다 집에서 키우는 게 더 편해, 싱싱하기도 하고, 마트에서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면 반은 먹고, 반은 버리잖아.”

“그거야, 뭐, 세상일이 다 그런 거죠. 사서, 안 버리는 게 어딨어요.”

“너는 옆에서 자꾸 투덜거리지만 말고, 안에 들어와서 모종 심는 거나 좀 도와라.”

“모종요?”

“오이 좀 심으려고.”

아버지 성화에 진석은 할 수 없이 하우스에서 오이 모종 심는 일을 돕기 시작했다.

“오이는 뭐 하려고 이렇게 많이 심으세요?”

“오이야, 쓸 데가 많지, 오이소박이도 만들고, 너도 좋아하잖아?”

“그렇기는 하죠. 엄마가 만든 오이소박이는 맛있으니까.”

“입 심심할 때는 생으로 먹어도 좋고. 요즘은 그 뭐냐..팩이라고 하나, 오이를 얼굴에 붙이면, 피부에도 좋다면서?”

“오이 팩요?”

아버지 말에 시큰둥하게 말하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오이도 제법 괜찮은 작물이었다. 아버지 말대로 생으로 먹어도 괜찮고, 소박이 같은 요리 재료로도 쓰이고, 피부에 팩을 하는 사람도 있고.

“저기, 아버지, 이 모종은 남은 거죠?”

“어, 그래, 맞춰서 사 온 건데 심다 보니, 많이 남네. 진석이 네 말대로 다 남고 버리기도 하는 거 아니냐?”

“이건 저 주세요. 저도 가져가서 좀 키워봐야겠어요.”

***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전국 여기저기 늘어난 북카페 오아시스 덕분에, 진석의 공간은 계속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북카페에서 사람들이 캣타워 앞에서 무심하게 보내는 시간들, 커피를 마시며 책장을 넘기는 시간들 모두가 진석의 시간 포인트가 되어, 진석의 공간을 키워 주고 있었다.

이제는 삼천만 평 이상의 크기로, 서해 바다에 있는 강화도 정도의 크기와 비슷한 크기가 되었다.

공간의 크기가 늘어나면서, 공간의 경작지도 확장되고 있었다. 그리고 공간 한가운데에 자리잡은 산도 계속해서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산이 커질 때마다, 지진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간에 있는 모든 건물은 내진에 강한 목조 건물들로 지어지고 있었다.

진석은 공간에 오자마자, 한숨 자고 일어났다. 잠을 늘어지게 자도, 현실의 시간은 진행되지 않기 때문에 진석은 현실 세계에서는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하거나, 사람들을 만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진석을 일 중독자 내지는 슈퍼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은, 진석은 일 중독자라기보다는 하루종일 낮잠을 즐기는 잠 중독자에 가까웠다.

얼마나 잤는지, 더이상 잠이 안 올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나서야 진석은 사령관을 불렀다.

“공간주님, 부르셨습니까.”

“내가 오이 모종을 좀 가져왔는데, 산에 가져가서 좀 심어봐야겠어.”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트럭을 준비할까요?”

“아니, 오늘은, 말을 타고 가자고.”

보통은, 픽업트럭을 타고 가지만 오늘은 말을 타고 산으로 향했다.

“사령관, 이렇게 말을 타고 달리는 것도 꽤 재밌는데.”

“그러게 말입니다.”

공간의 면적도 넓어져서 그런지 산까지 가는 길도 제법 시간이 걸렸다. 말을 타고 천천히 멀리 보이는 산을 향해 가자, 거의 한 시간 가까이 시간이 걸렸다.

산을 따라 흘러내리는 강도 커져서, 제법 폭이 넓어졌다. 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다리가 필요했고, 강 중간중간, 다리가 놓여져 있기도 했다.

산에 도착해서 조금 올라가자, 산기슭을 개간해서 만든 밭들이 나타났다. 산도 커지고 공간도 커지면서, 오아시스와 산 사이의 거리도 멀어져서 이제는 산 아래에 산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숙소가 만들어지고 이곳에서 지내면 일하는 일꾼들도 생겨났다.

“공간주님, 저기 빈 밭이 보이는군요.”

산 아래쪽에 개간된 밭들은 진석이 외부에서 가져오는 작물들을 실험하는 실험공간이었다. 그래서 작물을 바로 심을 수 있게 비어 있는 밭들이 많이 있었다.

진석은 일꾼들에게 명령을 내려, 비어 있는 밭에 오이를 심기 시작했다. 가져온 모종은 아버지의 하우스에서 심고 남은 것 몇십 개 정도였지만, 시간을 가속할 수 있는 진석에게, 모종 몇 개로도 그 수를 불리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몇 번의 시간 가속으로 증식 작업이 진행되자, 오이들은 모종은 수천 개로 늘어났다. 진석은 증식 과정을 거친 오이들의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산에는 공간의 에너지가 왜곡되며, 작물들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독특한 기능을 가진 변종들이 나타나고는 했다. 대부분 그런 변종이 일어나면, 모양이나 색 같은 외형에 변화가 생기고는 했다.

“음, 이 오이는, 색이 너무 하얀데...”

오이 중에, 백오이라는 오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완전히 흰색은 아니다. 초록색 빛이 감도는 흰색 오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석이 살펴보고 있는 오이는 초록빛이 전혀 보이지 않고 전체가 하얀색이었다.

“완전히 하얀 백오이잖아?”

“그러게 말입니다. 공간주님, 뭔가 독특한 색깔이네요.”

“사령관, 이 백오이를 더 증식시키자고.”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바로 실행하겠습니다.”

***

북카페 오아시스 홍대 본점,

“지영 씨, 이 백오이로 만들 수 있는 게 없을까?”

“오이요? 글쎄요. 오이라면, 뭐, 만들 수 있는 건 많겠지만, 저희가 식당은 아니잖아요? 이 걸로 요리를 할 수도 없는 거고.”

북카페 오아시스는 간단한 음료나, 쿠키와 케익 정도만 제공하고 있었다.

“하긴, 오이는 좀 애매한가? 고양이들은 오이를 좋아하려나?”

진석은 캣타워로 다가갔다.

진석이 다가오자, 먹이라도 주는 줄 알고 고양이들이 몰려들었다. 진석이 오이를 내밀자, 냄새를 킁킁거리며 맡더니, 모두 관심이 없다는 듯이 외면하고 돌아서는 것이었다.

“고양이들도 싫어하는군. 역시 오이는 별로인가?”

진석은 뭔가 특별한 효능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백오이를 키웠지만, 카페에서 음료로 만들기에는 적당해 보이지 않았다.

“그냥 생으로 먹어볼까?”

진석은 오이를 생으로 우걱우걱 씹어 보았다.

“맛은 어때요? 사장님.”

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오이를 먹고 있는 진석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냥, 오이 맛이지 뭐.”

“그럼 제가 그냥 먹을까요? 다이어트에는 좋잖아요. 오이가 칼로리로 적고..”

“그래 그러던지.”

아무래도 오이는 생으로 먹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것 같았다.

***

스카이 캐슬 레지던스, 입주민 전용 레스토랑.

“어, 이게 누구신가요? 이진석 사장님.”

뒤를 돌아보니, 서태준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진석이 미국과 유럽을 오고 가고, 해운대에도 요트를 타러 다니는 통에, 서태준과는 자주 볼 일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하하, 그러게요. 같은 아파트에 사는 데도 얼굴 한 번 보기 힘드네요.”

“제가 여기저기 돌아다녀서 그렇죠. 얼마 전에는 남미에도 갔다 왔거든요.”

“저도 봤습니다. ‘감자의 귀환’ 말이죠.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더군요.”

“하하, 서태준 씨도 보셨군요.”

“예, 사실은 저는 중국에 있었는데 심심하기도 해서, 다시 보기로 봤죠.”

“중국요? 중국에 다녀오셨었나요.”

“한 달 정도 있었죠. 모르셨군요?”

“저도 바쁘게 지내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중국이라면 어디를 다녀오신 겁니까?”

“상하이를 시작으로, 난징, 광저우, 청두..기타 등등..거의 전국을 돌아다녔죠.”

“무슨 일로요?”

“제가 모델로 있는 화장품 회사가 신제품 출시를 했는데, 프로모션이 있었거든요.”

“오, 화장품 모델이셨군요.”

“예, 요즘 한류 붐을 타고, K뷰티라고 하죠. 화장품은 그중에서도 수익성이 가장 높은 분야입니다.”

“그렇죠. 보통, 가로수길이나 홍대 거리도 가장 메인 거리는 화장품 상점들이 들어오니까요.”

“원가에 비해서 수익성이 높은 산업이죠.”

“한국 화장품도 인기가 대단한가 보군요?”

“중국인들은 전통적으로 유럽 화장품을 선호하는 편인데, 아무래도, 피부 톤이나 이런 게 한국인과 비슷하거든요. 코카서스 인종인 유럽인에 맞춘 화장품들보다는 한국 화장품이 중국인 피부에 더 잘 맞죠.”

“그렇겠네요.”

“취향도 비슷해서, 중국인들도 하얀 피부를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미백 효과가 있는 걸 좋아하는데, 아무래도 미국이나 유럽 화장품들은 그런 면에서는 취약하죠.”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토양에 따라 자라는 작물이 다르듯, 피부에 따라 필요한 화장품의 조건도 다를 것이다.

“요즘 요트를 타신 다면서요?”

“아, 어떻게 그걸..”

“한국에서 요트 타는 사람은 슈퍼카를 타는 사람보다, 더 적으니까요. 해운대 마리나에 자주 출몰하신다는 말을 들었죠.”

“출몰요? 하하, 졸지에, 야생 수달이라도 된 느낌이네요.”

“요트는 어떤 걸 타십니까?”

“뭐, 작은 거죠. 44피트짜리, 모터보트인데, 해운대 앞바다에서 천천히 타고 돌아다니기는 괜찮습니다. 날씨가 좋으면, 제주도 중문 마리나까지도 가고요.”

“그러시군요. 생각보다 작은 배를 타시네요. 사실, 상하이만 가봐도. 중형, 대형 요트들이 많은데요. 한 150미터 이상 되는 것들 말입니다.”

“배가 크면 좋기는 하겠지만, 선장도 필요하고, 승무원에, 오히려 바다에 나가기 너무 번거롭죠. 준비할 것들도 많고.”

“그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요트는 작은 배로, 혼자 자유롭게 바다에 나가는 맛도 있죠.”

서태준은 남은 커피를 다 마시더니 먼저 일어섰다.

“언제 중국에 가실 일이 있으면 연락 주세요. 제가 이번에 가서 관시를 많이 만들어 두었으니까. 도움이 될 겁니다.”

“중국요? 뭐, 그럴 일이 있을까 싶은데, 아무튼, 기억해 두죠.”

식사를 마치고 나오려는데, 식탁 위의 스마트폰이 진동하고 있었다. 유민지였다.

유민지가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민지 씨. 무슨 일이야?”

“사장님, 어디세요.”

“나, 여기 집이지. 스카이 캐슬 타워.”

“바쁘지 않으면, 홍대 카페로 좀 와주시겠어요?”

“홍대에는 왜?”

“보여드릴 게 있어서요.”

“보여줄 거?”

***

“뭐, 달라진 거, 모르시겠어요?”

유민지는 진석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카페 말인가? 글쎄, 고양이들이 늘었나? 아, 캣타워가 바뀌었군?”

“캣타워는 그대로예요. 그런 거 말고요. 제 얼굴 좀 달라진 것 같지 않아요?”

“얼굴? 얼굴이 왜? 그대로인데..”

“어머, 사장님, 평소에 저한테 관심이 전혀 없으셨죠?”

“흠, 뭐. 우리는 가족 같은 사이인데, 가족끼리 무슨..그나저나 알기 쉽게 설명해 봐. 뭐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지난번에 사장님이 지영이에게 주고 간, 하얀 오이 말이에요.”

“그런데 그게 왜?”

“색깔도 이상하고, 먹어도 별맛도 없어서, 팩을 해봤거든요.”

“팩? 오이로? 오이 팩을? 그래서?”

“그런데, 제가 여드름이 좀 많잖아요. 이마 위쪽은 그래서 항상, 앞머리로 가리고 다녔잖아요.”

“그랬었나?”

“그랬거든요, 아무튼, 이 오이로 팩을 했는데 여드름도 싹 사라지고, 너무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그냥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오늘 스킨만 발랐거든요.”

“그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요. 하얀 오이로 오이 팩을 했더니, 피부가 너무 좋아져서 화장을 따로 안 해도 피부가 화장한 것보다, 더 깨끗해졌어요. 얼굴도 완전 하얘지고요.”

“그러니까. 오이 팩이 피부에 엄청 효과가 있었다, 이거야?”

“예. 사장님, 그 오이가 대체 어떤 오이예요. 더 구해주시면 안 돼요?”

“오이 팩이야. 아무 오이나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아뇨, 다른 오이를 제가 안 써봤겠어요? 다른 오이로는 이렇게 피부가 좋아지지 않는다고요. 그 하얀 오이가 피부에 정말 좋은 것 같아요. 그러니까, 하얀 오이 좀 더 구해주세요. 사장님..”

피부 개선 효과가 있는 오이라는 말이지...

산에서 키운 작물들은 그동안 다 먹어야만 하는 건지 알았는데, 피부에 사용할 수도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걸로 뭘 만들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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