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튼튼한 감자(3)
빨간색 람보르기니가, 해운대를 지나치자, 사람들의 시선이 운전석으로 쏠렸다. 선글라스를 낀 진석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탑을 오픈한 람보르기니는 피서객들로 붐비는 해운대 앞을 지나, 마리나 쪽으로 향했다.
마리나 주차장에 주차를 하자, 안면이 있는 관리인이 아는 체를 했다.
“아이고, 사장님, 차가 아주 멋지네요.”
“하하, 안녕하세요, 아저씨, 새로 산 건데, 괜찮은가요?”
“뻘건 게, 아주 죽이네, 아주 멋져.”
“하하, 수고하세요.”
새로 산 람보르기니 에보의 성능은 만족스러웠다. 특유의 스프츠성도 좋고, 하지만 속도를 즐기는 편이 아닌 진석에게는 오픈카 라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확실히, 컨버터블을 타고 바닷가를 달리는 기분은 최고였다.
진석은 요트에 올라 항해를 준비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자, 물 반 사람 반, 인산인해인 해운대가 멀리 보였다.
“복잡한 곳은 딱 질색이라는 말이야.”
여름이라, 바닷가에서 해수욕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사람들이 붐비는 해운대는 영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보다는 요트를 타고 이렇게 멀리서 바라보는 해운대는 그럭저럭 분위기가 있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있어서인지 사람들은 개미처럼 작게 보였다. 멀리서 보면 세상일은 희극이라고 했던가? 이렇게 혼자 요트를 타고 나와서 보는 해수욕장의 인파들은 시끄럽지도 번잡스럽지도 않고 한 폭의 그림처럼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진석은 요트를 몰고 제주도로 향했다.
***
“부산에서요? 꽤 멀리 오셨네요?”
제주 중문 마리나 관리 직원은 배를 정박하는 걸 도와주며 말했다.
나이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안경을 낀 남학생이었다.
“대학생인가요? 아르바이트?”
“예,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방학이라 내려온 겁니다. 집은 제주고요.”
“오, 그래요? 공부를 썩 잘했나봐요. 서울로 유학도 가고.”
“아닙니다. 제주도는 학교가 몇 개 없죠. 원래는 제주교대를 갈까 하다가, 선생님 쪽은 적성에 안 맞는 것 같아서 서울에 공대로 진학했죠.”
“공대도 좋죠. 기술을 배우면 쓸모가 많으니까.”
“신문에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제이에스 바이오 이진석 사장님 아니신가요?”
“하하, 연예인도 아닌데, 절 알아보는 사람이 다 있네요.”
“굉장히 유명한 분이시잖아요. 귀찮게 했다면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귀찮기는요.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는 건 좋은 일이죠.”
남자 대학생은 자신을 고준영이라고 소개했다.
“역시 제주도는 고 씨가 많군요.”
“아, 그렇죠, 고 씨, 양 씨는 정말 흔해요.”
“서울로 치면, 김 씨나 이 씨 정도겠군요, 저도 이 씨지만 말입니다.”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사장님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도 벤처 사업가가 되는 게 꿈이거든요.”
“하하, 나이가 젊으니까. 앞으로 기회가 많이 있을 겁니다.”
“예, 언젠가는 저도 사장님처럼, 성공한 사업가가 돼서 요트를 타고 다니면서 멋진 인생을 살고 싶습니다.”
“수고하세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어디로 가시나요?”
“딱히 정해진 곳은 없고 오늘은 제주도를 여기저기 둘러 보려고요.”
***
“장소진 기자님이라?”
“문화경제 신문 국제부 장소진 기자입니다.”
“국제부요?”
“경제부 기자나, 과학 기술 혹은, 문화 쪽이라면 몰라도 국제부 기자는 처음이군요.”
“기자 자격으로 온 건 아니고요.”
“그럼요?”
“코이카라고 아시나요?”
“코이카요? 국제 봉사 단체던가요?”
“예, 외교부 산하로 저개발 국가에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기구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국가의 지원을 받지만 자원봉사자들이 많이 활동하는 민간 봉사단체 성격도 있고요.”
“코이카가 왜요?”
장소진 기자는 2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다부진 인상의 기자였다. 언뜻 보면 새침한 여대생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 기자라 그런지 어딘지 날카롭고 예리한 인상이었다.
“저도 지금은 기자로 일하고 있지만, 대학생 때는 코이카에서 활동했었거든요.”
“음, 코이카 출신이시군요. 국제 경험이 많으시니까, 국제부 기자를 하는 데는 도움이 되겠네요.”
“예, 저는 주로 중남미 쪽에 봉사활동을 많이 하러 갔었죠. 페루나 에콰도르에서 봉사활동을 주로 했으니까요.”
“안데스 산맥 근처겠군요?”
“맞아요, 인디오 인구 비중이 높은 나라들이죠. 유럽에서 온 백인들에서 비해서, 인디오들은 여전히 가난한 농부들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
“봉사활동이 필요한 곳이겠네요.”
“예, 그리고 이진석 사장님의 도움도 필요하고요.”
“제 도움요? 음, 기부금이나 그런 거 말인가요? 그런 돈이라면, 저도 기부할 용의가 있죠. 얼마나 필요하신가요?”
“아뇨, 돈이 아니라, 감자가 필요해요.”
“감자요?”
***
에콰도르 키토, 국제 공항,
“여기서 이진석 사장님을 또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하하, 그러게 말이야.”
제주도 중문에서 만났던, 알바 대학생, 고준영을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고준영뿐 아니라, kbc의 다큐멘터리 촬영팀, 그리고 장소진 기자 등도 같은 일행이었다.
장소진 기자는 그중에서도 에콰도르에서 1년 동안, 코이카 지사에서 근무했던 경력이 있는 현지 베테랑이었다.
에콰도르는 남아메리카 대륙의 북서부에 자리 잡은 나라다. 인구는 1천 5백만 정도로, 한국의 4분이 일 정도지만, 국토 면적은 세 배 정도 된다.
언뜻 넓은 국토인 것 같지만, 안데스에 접한 대부분이 고지대의 산악지역이라 브라질처럼 자원이 풍부한 아마존 밀림이나, 팜파스 평원이 있는 아르헨티나와는 달리, 넓은 곡창지대는 없는 곳이다.
“인구 구성을 보면, 알 수 있죠, 팜파스가 있는 아르헨티나는 인구 대부분이 이탈리아나, 스페인계 백인, 코카서스 인종이거든요.”
“인디오가 많은 페루나 에콰도르는 좋은 땅이 아니라서, 백인들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건가요?”
“어느 정도는 그런 셈이죠.”
문화경제 신문의 장소진 기자의 제안으로 감자의 원산지인 안데스 산맥의 국가인 에콰도르에 제이에스의 신품종 씨감자를 공급하기로 결정을 내리고 진석도 직접 에콰도르의 산악지대로 봉사활동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KBC의 다큐멘터리 팀도, 촬영을 제의해서 같이 하게 되고 말이다.
“장소기 기자님은 에콰도르나, 안데스는 익숙하시겠네요?”
“그렇죠. 여기는 에콰도르의 수도라, 이 나라에서는 가장 발전한 지역이에요. 여기서, 본격적으로 안데스로 가야 하는데, 각오는 해야 하셔야 할 거예요. 길이 험하거든요.”
“각오는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준영 씨는 이진석 사장님을 어떻게 알아요? 둘이 연결고리가 없어 보이는데.”
코이카 일행과, 싸감자를 안데스의 인디오들에게 전달하러 안데스로 향하는 길, 코이카 봉사단에는 제주도 중문 마리나에서 우연히 만났던, 고준영도 있었다.
“제주도에서 한 번 우연이 뵌 적이 있는데, 이렇게 다시 만나게 돼서, 저도 놀랐습니다.”
“하하, 뭐, 좋은 인연이 있어서 그렇겠죠. 그나저나, 고준영 씨도 정말 열심히 사는 학생이네요. 알바도 하고 해외 봉사도 하고 말이죠.”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것도 취업 스펙을 염두해 두고 하고 있습니다.”
“어머, 고준영 씨, 너무 솔직한 거 아냐?”
“아, 그런가요. 하하..”
***
일단 키토에 집결한 코이카 봉사단은, 인디오들에게 전달할 씨감자와 함께. 산악지대인 로하로 갈 예정이었다.
장소진의 말대로 로하에 가까워지면서 도로 사정은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키토 부근은 그나마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었지만, 로하에 가까워지면서, 비포장 산악도로가 계속되고 있었다.
며칠째,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진석도 지쳐가고 있었다.
“확실히 로하는 낙후된 지역이겠네요?”
“예, 인디오들이 감자나 옥수수 농사를 짓는 산악지대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코이카 봉사단장인 김경수는 50대 후반의 선교사 출신이라고 했다. 원래는 선교를 하러 코이카 활동을 하다가, 이제는 해외 봉사에만 전념한다고 했다.
“선교는 포기하신 건가요?”
“그런 셈이죠. 세계를 돌아다녀 보니, 포교보다 더 중요한 건, 경제와 교육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우리가 가져가는 씨감자가 도움이 될까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인디오의 경제에서 감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아주 크거든요. 아시다시피, 감자는 병해에 약해요. 척박한 산악에서 잘 자라기는 하지만, 한 번 병이 돌면 농사를 망치는 작물이라, 제이에스의 씨감자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농사에는 도움이 되겠군요.”
“감자 생산이 늘면, 아이들도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죠.”
“학교요?”
“예, 먹고 사는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곳이라, 아이들도 농사에 동원되거든요. 결국, 아이들은 교육을 못 받고, 가난한 농부가 되는 악순환이 반복되는 겁니다.”
“씨감자가 아이들을 교육 시키고, 어쩌면, 에콰도르의 미래를 바꿀 수도 있다는 건가요?”
“맞습니다. 절대 과장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마, 로하에 가보시면 알 겁니다.”
***
제이에스 본사,
“에콰도르에 가신 일은 잘되셨어요?”
“그래, 수정 씨. 인디오도 만나고, 씨감자도 전달하고 말이야. 내 SNS에 사진을 올려놓았으니까. 한 번 봐봐, 로하라는 곳에 가서 감자도 심고 말이야. 남는 시간에는 빌카밤바라는 곳에도 갔다 왔어. 이거 보라고.”
“와, 이건 뭐예요? 양인가?”
“알파카라는 거야, 신기하게 생겼지.”
이수정은 진석이 SNS에 올린 사진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
kbc 방송국. 뉴스룸
“뉴스 오늘의 진소희 입니다. 오늘은 최근에 에콰도르에 다녀오신, 제이에스 바이오 그룹의 이진석 회장님을 모셨는데요.”
“회장님요? 회장이라는 명칭은 좀 어색하네요.”
“음, 그러신가요? 요즘 제이에스 바이오가 많이 성장하면서, 자회사도 많아져서 회장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 것 같아서 회장님이라고 호칭을 한 건데, 어색하신가요?”
“하하, 회사가 좀 규모가 커지기는 했지만, 나이도 아직 젊고, 그냥 사장이라고 불러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그럼, 본인이 원하시는 데로, 이진석 사장님으로 호칭하겠습니다. 이진석 사장님, 음, 에콰도르에는 무슨 일로 다녀오신 거죠?”
“예, 우연한 기회에 코이카와 함께, 에콰도르의 산악지역이죠. 로하, 라는 곳을 다녀왔습니다. 가게 된 목적은 우리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개발한 씨감자를 현지 인디오에게 전달하고, 농업 기술도 좀 전수하고 왔습니다.”
“와, 감자라면, 원래 남미 안데스가 원산지 아닌가요?”
“예, 보통 페루와 에콰도르 일대가 감자의 원산지라고 많이 알려져 있죠.”
“그럼, 남미에서 태어나서 조선시대 후기에 우리나라에 들어온 감자가, 다시 고향으로 금의환향을 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하, 뭐, 그렇다고도 할 수 있죠.”
“씨감자라는 게 일반 시청자들에게는 좀 생소할 수도 있는데 어떤 건가요? 그리고 왜, 그걸 남미까지 가지고 가신 건지도 설명 부탁드립니다.”
진석은 그동안의 개발 과정부터, 씨감자에 관한 이야기들로 장황한 설명을 시작했다.
“아, 너무 길게 이야기를 했나요?”
뉴스 담당 PD의 커트 사인이 나오고 있었다.
“예, 시청자분들이 궁금하신 게 많이 해소되셨을 것 같고요. 오늘은, 좀 시간이 없어서, 더 자세한 내용은, 이진석 사장님과 코이카 봉사단과 함께 간 우리 KBC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제작한, ‘감자의 귀환’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다음 주 금요일 저녁 10시 방영 예정입니다. 지금까지 제이에스 바이오 그룹의 이진석 사장님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휴우, 생방송이 쉽지가 않네요.”
“잘하셨는데요.”
KBC의 간판 앵커라고 할 수 있는 진소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 오늘은, 9시 뉴스가 끝나고 진행되는 심층 탐사 뉴스라고 할 수 있었다.
이슈가 되는 사건이나 인물들과 심층 인터뷰를 하는 프로그램으로 시사프로그램치고는 시청률도 꽤 높은 편이었다.
“녹화는 몇 번 해본 적이 있는데 생방송은 처음이라 많이 긴장했네요.”
“전혀 긴장하신 것 같지 않던데요.”
“정말요?”
“그리고, 씨감자 이야기도 아주 흥미로웠고요. 오늘 방송은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참, 그런데, 그 신품종 감자 이름이 뭐라고 하셨죠?”
“아, 그걸 말하는 걸 잊었네요. 뉴스 시간에 말했어야 했는데, 하하. 어쩔 수 없죠. 새로운 감자 이름은 튼튼 감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