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시원한 수박(3)
본격적인 여름 더위가 시작되면서 해운대는 피서객들로 넘치고 있었다.
“어머, 사장님 언제 오셨어요?”
“아, 부산에 올 일이 있어서.”
진석은 북카페 해운대점을 둘러보았다.
“피서객들이 오면서, 손님도 많아졌어요.”
윤아영은 부산 토박이였다. 약간 사투리 억양이 있기는 했지만, 거의 완벽한 서울말을 쓰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러게, 대부분 서울 사람들인가?”
“아닐걸요. 해수욕장은 몰라도, 여기 카페는 온통 부산 사람들이에요.”
“그래? 부산 사람인 건 어떻게 알아?”
“말하는 거 들어보면 알죠.”
“역시, 사투리인가?”
“사투리도 그렇고 억양이라는 게 있으니까. 감이 온다고요.”
“내 생각하고는 다르네, 해운대라면, 부산 사람들은 시들해서 잘 안 오고, 서울 같은 외지 사람들이 많을 것 같은데. 외국인도 많고 말이야.”
“tv에서 그런 것만 보여주니까 그렇죠. 여름철이 되면, 해운대라고 나오는 거 보면 주로 외국인이거나, 서울에서 온 피서객들만 인터뷰하는 게 나오더라고요.”
“하긴, 기자들이 다 그렇지 뭐. 해운대 주민들이 100명이고 외국인이 한 명이면, 외국인과 인터뷰 하는 게 기자들이니까.”
피서객들이 많아서 그런지, 청량음료 종류가 많이 나가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인기가 있는 건, 수박 모히또였다.
“여기, 수박 모히또요.”
“음, 달다. 시원해.”
여대생처럼 보이는 두 여자가 모히또를 주문해서 마시며 살짝 감탄하고 있었다.
“수박 모히또가 역시 잘 나가는 거지?”
“예, 지금은 낮 시간대라 젊은 여자 손님들이 많이 찾는데, 저녁이 되면, 아저씨들이 많이 드시러 와요.”
“아저씨들?”
“예, 이 근처에 고층 아파트들이 많잖아요.”
“아, 그 주민들?”
“그런 것 같던데요. 요즘 이 근처 중년 아저씨들 사이에 이 카페가 입소문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수박 모히또로?”
“저는 여자라서 잘 모르겠는데. 전립선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마시면, 시원하게, 배출이 된다나..”
“장사가 잘되는 건 좋은데. 사람들이 책은 별로 안 읽나 봐.”
진석은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다들, 음료를 마시거나 음악을 듣거나, 혹은 고양이랑 놀고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해수욕장이 개장하면서 분위기가 좀 바뀌었어요. 아무래도, 물놀이하러 와서 책을 읽지는 않잖아요. 주변 분위기도 신나게 놀자는 분위기고.”
“역시 그런 건가?”
“사람도 많고 좀 시끄러워지니까, 하루종일 책 읽던 사람들도 다 사라지고 더 좋죠. 장사 잘되잖아요.”
진석은 윤아영의 말에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
“여기인가? 꽤 넓은데.”
압구정역에서 가까운 위치의 신축 빌딩이었다. 특히 1층은 층고가 넓어서 실제 면적보다 더 넓어 보이는 효과도 있었다.
“근처에, 백화점, CGV도 있고요. 지하철역도 있어서 입지 조건이 좋은 곳입니다.”
“압구정이고, 주변에 상권도 발달한 건 알겠는데, 이 빌딩 자체는 사람들이 몰리는 위치는 아니네요.”
“하지만, 지금 현재 강남에 이만한 위치도 없을 겁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면적도 넓고, 층고도 높죠. 카페나, 농산물 판매장 하기에는 좋은 건물이고요. 솔직히 가로수길 메인 도로에 농산물 매장을 열기는 좀 어렵죠. 마땅한 건물도 없고.”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백화점이 근처에 있고, 주변에 오피스 빌딩도 제법 있어서, 직장인들도 많이 다니거든요.”
“수정 씨, 생각은 어때?”
“강남에 이 정도면 괜찮은 곳 아닌가요? 카페랑은 다르잖아요. 제이에스 스토어는 건강보조식품이나, 유기농 농산물을 판매하는 곳이니까. 소비층도 젊은 사람들보다는 연령대가 있는 주부들이나, 독신 직장인 정도가 타겟층이라고 볼 수 있죠. 그런 면에서는 괜찮은 것 같아요.”
“그래, 내 생각에도, 이만한 건물도 없는 것 같네.”
진석의 말에, 부동산 매니저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여기로 하시겠습니까?”
“예, 이곳이 좋겠네요.”
오명진 도지사의 제의로 강남에 제이에스 스토어 2호점이 오픈을 준비 중이었다.
위치는 압구정역 근처였다. 그래서 이름도 제이에스 스토어 압구정역점으로 부르기로 했다.
역과, 백화점 등, 주변 입지 조건도 좋고. 신축 빌딩의 1층과 2층을 임대하기로 했다.
“수정 씨가, 세부적인 건, 좀, 신경 써 줘. 신촌 제이에스의 장지원 점장이 경험이 있으니까 둘이 상의할 건 상의하고.”
“예, 걱정하지 마세요. 그건 그렇고, 홍보 CF를 만들어 달라는데요”
“홍보 CF? 어디서 CF를 만들어 달라는 거야?”
“강원도에서요. 우리는 그냥, 사업 개념으로 하는 거지만 아무래도 강원도나 오명진 도지사는 일종의 홍보라는 측면으로 생각하잖아요.”
“음, 자기들이 도민들을 위해서 일하는 거니까, 널리 알려달라 이건가?”
“내년에 지방 선거도 있고, 아무래도 신경을 안 쓸 수가 없잖아요. 그런 게 아니더라도, 새로 매장을 열면서 광고 정도는 해야 되는 거 아닌가요.”
“그 말도 일리는 있어.”
“거기다, 광고비는 강원도가 부담한다니까, 따로 신경 쓸 것도 없고요.”
“그래, 광고 대행사나 그런 쪽도 좀 알아봐 줘.”
***
익선동 북카페 오아시스,
“어머, 사장님이 웬일이세요?”
익선동 북카페 점장인 윤희원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나요, 하하, 희원 씨 오랜만이에요.”
“오픈 한 후로는 거의 못 뵀는데, 연락도 없이 오시니까, 조금 놀랐어요.”
“뭐, 카페가 잘되는지 감시 좀 하러 온 거죠.”
“음, 카페는 그럭저럭 잘되고 있어요. 손님도 처음보다는 많이 늘었거든요. 요새는 수박 모히또가 잘 나가요. 요새 아주 인기예요.”
“아, 여기도 수박 모히또 열풍이군요. 역시 중년 남자들이 많이 찾는 건가요?”
“예, 전립선에 좋다고 소문이 났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인가요? 전립선에 좋다는 소문요?”
“아마, 그럴 겁니다. 사실, 지금, 우리 연구팀에서 수박 모히또에 원료가 되는 호박수박의 성분을 분석 중이에요.”
“호박수박요? 그 못생긴, 수박 말이죠? 수박 모히또 용으로 나오는 거?”
“에, 맞아요”
공간에서 생산된 호박수박은 서울과 전국 각지의 북카페들에 배달되고 있었다. 직영점 체제라, 모든 식재료는 제이에스 본사에서 각각의 지점들로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렇고, 윤희원 씨, 모델 해볼 생각 없어요.”
“모델요? 무슨 모델요?”
“제이에스에서 홍보 CF를 만들려고 하는데, 지금 내부적으로 의견이 분분해요. 인기 걸그룹을 모델로 내세우자는 의견도 있고, 우리 직원들 중에서 모델을 선발하자는 이야기도 있고.”
“어머, 우리회사 홍보 모델이라는 거죠?”
“희원 씨가, 기상 캐스터 출신이잖아요. 아무래도, 카메라는 익숙할 것 같아서.”
“그렇기도 하죠.”
“기상 캐스터 출신이고 이미지도 좀 단아한 분위기가 있잖아요.”
“제가요?, 전혀 아닌데.”
윤희원은 멋쩍은 듯 미소를 지었다.
“연예인, 특히 아이돌 그룹을 모델로 내세우자는 의견이 많았는데, 기왕이면 그런 화려한 스타들도 좋지만, 우리 회사에서 같이 일하는 직원을 모델을 쓰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럼, 북카페에 관련된 CF인가요?”
“일단은 제이에스 스토어 광고를 시작으로 해서, 제이에스 그룹 전체의 이미지 광고를 만들어 볼 생각이에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사실, 고등학생 때, 교복 모델을 해 본 적이 있어요.”
“와, 정말요? 잘 어울렸을 것 같네요.”
“그때, 좀 자신감이 붙어서, 나중에 기상 캐스터에도 지원한 거고요.”
“음, 그랬었군요. 그런데 기상 캐스터는 왜 그만둔 건가요. 잘 어울렸을 것 같은데.”
“일은 재밌었는데, 사내 정치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 사이에서 편 가르고, 줄 서고 하는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그런 게 너무 피곤해서 그만뒀어요.”
“하긴, 인간관계가 가장 골치 아프죠. 카페 일은 어때요? 여긴 할 만 한가요?”
“카페는 저랑 잘 맞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지만, 수직적인 인간관계가 아니라, 수평적이잖아요. 서로 적당히 존중하기도 하고, 적당한 거리감도 있고.”
“그렇죠, 손님이라는 게, 단골이라고 해도 사실은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맞아요. 전 그런 게 편하더라고요. 직원이 많은 방송국은 좀 피곤해요. 이 사람, 저 사람, 신경 쓸 일도 많고.”
“아무튼, 모델 일을 강요하는 건 아니니까, 한 번 생각해 보고, 연락 줘요.”
“예, 한 번 생각해 볼게요.”
***
강원도 인제군.
“여기군요. 10만 평을 무상 제공이라? 통이 크신데요.”
“하하, 무상 제공이라고는 하지만, 공짜는 아닙니다.”
“예?”
“인제군을 이제, 이진석 사장님이 확실하게 개발시켜 주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아, 그런 의미인가요?”
오명진 도지사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사실, 충청도에서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죠. 제천시였던 것 같은데, 3만 평의 토지를 무상으로 제공하는 거였죠.”
“3만 평요? 그것도 작지는 않네요. 시 단위라고 생각하면 말이죠.”
“그때 제천 시장이 내걸었던 조건이 3000억 이상 투자, 그리고 500명 이상, 상시 고용을 창출하는 기업이라면, 3만 평을 무상으로 제공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음, 그러면, 10만 평이니까, 1조 정도 투자를 하고, 1500명은 고용해야 하는 건가요?”
“하하, 강제적으로 그런 조건을 건 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내부적으로 검토를 해보니까, 그 정도의 투자 효과가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저희가 생각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농업 연구소와, 각종 식품 가공 공장도 들어설 거고, 그 정도의 투자와 고용 효과는 있을 겁니다.”
“그게 바로 윈윈하는 거죠. 아무래도, 이 인제군 일대는 군부대를 제외하면 별다른 산업이랄 게 없어서 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지역입니다.”
“그렇겠네요. 주변을 봐도, 산지도 많고 경치는 좋은 곳이지만, 인구도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고.”
“그나마, 군인들이 휴가나 외박 나와서 돈을 쓰면서 경제가 돌아가던 곳인데, 이제는 외박 외출 시에 위수 지역이라는 것이 폐지돼서, 지역 경제가 아주 엉망입니다.”
“아, 그렇군요. 위수 지역이라는 게, 외박 나갔을 때, 제한 구역을 말하는 거죠?”
“예, 전에는 군인들이 외박을 나와도, 인제 시내에서 소비를 했는데, 이제는 그런 제한이 없어져서 서울로 가는 친구들도 있고, 아무튼 군인들은 좋지만 지역 경제에는 타격이 큽니다.”
“그렇겠군요.”
“그래서, 이 지역의 위기의식도 있고 해서, 이런 대규모 토지 무상 제공 정책도 나올 수 있었던 겁니다.”
진석은 제이에스의 농업 연구소가 들어설 부지들을 둘러보았다. 토지 자체는 꽤 넓은 곳이었다. 다만, 서울에서 먼 시골이라는 점이 좀 단점이었지만, 농업 개발에 필요한 넓은 토지를 공짜로 확보한 셈이었으니, 상당한 메리트가 있는 것이었다.
“토지를 공짜로 받았으니, 최대한 이 지역에서 필요한 인력을 선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이진석 사장님만 믿겠습니다. 사실, 여기 인제군 일대는 지난 선거에서 별로 표가 안 나온 곳입니다.”
“아, 오명진 도지사님에게 호의적은 곳은 아니었군요?”
“예, 여기 군수님도 저랑은 당이 서로 다르죠. 평소에는 싸울 일이 많지만, 이번에 제이에스 바이오 투자 유치 사업을 같이 하면서 많이 친해졌죠.”
“하하, 제가 본의 아니게, 정치적 화합을 이끌어 낸 건가요?”
“그렇게 말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아무튼, 선거라는 게, 우리나라 같은 양당 구조에서는 한쪽으로 몰리는 경우보다는 박빙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음, 결국, 상대 표를 빼앗아 오는 게 중요하다 이거군요.”
“맞습니다. 우리 표는 지키는 거지, 더 늘어나지는 않으니까요. 상대 표를 빼앗아 올 수 있다면, 박빙의 승부에서 격차를 벌이는 좋은 방법이죠.”
“미래는 알 수 없지만, 다음 선거에서 이번 투자가 신의 한 수가 될 수 있겠군요?”
“개인적으로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도지사님의 재선이 우리 제이에스에도 이득이 되니까요.”
“우리는 같은 배를 탄 건가요?”
“예, 그런 건 같습니다. 이제 배가 순항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죠.”
오명진 같은 정치인과 관계를 쌓아두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지금은 도지사지만, 젊고 인기가 있는 인물이라, 차기 대통령 후보군에도 오르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진석은 지금은 허허벌판인 인제군의 넓은 땅을 바라보며, 머릿속으로 농업연구 센터가 들어선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