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시원한 수박(1)
“프랑스는 처음이시죠?”
“예, 수경 씨는 언제부터 프랑스에 사시는 건가요?”
“저요? 저는 입양아예요.”
“아, 그러시군요.”
“다섯 살 때 입양이 되었다고 하니까, 홀트 아동 복지회를 통해서 프랑스로 입양을 오게 된 거죠.”
“아, 홀트 재단이라면? 양화대교 지나서 합정동에 있는 거 아닌가요?”
“동네 이름은 잘 모르겠어요. 양화대교는 맞을 거예요. 대학 시절에 한국에 1년 정도 교환학생으로 갔었거든요, 그때, 친부모님을 찾겠다고 홀트 복지회 건물에 자주 찾아갔죠. 근처에 한강도 있고 다리도 있었는데, 그 다리가 양화대교인 것 같아요.”
“부모님은 찾으셨나요?”
“아뇨, 워낙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별다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그래도 한국 이름을 쓰시네요.”
“예, 양부모님이 좋은 분이셨어요. 한국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수 있는 기회를 주셨고, 이름도 수경이라는 이름이 예쁘다고 프랑스 이름하고 같이 쓰게 해주셨으니까요.”
정수경은 바이엘에서 소개시켜 준 와인 투어의 가이드였다. 프랑스에 사는 교포나 유학생이 아닌가 했는데 입양인 출신의 프랑스인이었다.
하지만, 한국어도 능숙한 편이었다.
“어릴적부터 한국어 공부를 했거든요.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갔을 때도 언어 문제로 불편한 적은 없었어요. 물론, 한자어는 잘 몰라요. 고사성어 같은 거요.”
“발음도 훌륭하고, 한국어는 완벽한 것 같은데요.”
독일 출장을 마친, 진석이 수경을 만난 곳은 와인으로 유명한 보르도였다. 바이엘 사에서 제공한 차량과 호텔, 그리고 와인 산지를 여행하는 투어의 시작점이었다.
진석과 수경은 유명한 와인이 만들어지는 포도밭도 구경하고, 보르도의 유명한 레스토랑에서 맛있는 음식도 즐긴 후에 다음 행선지인 부르고뉴를 향해 차량으로 이동 중이었다.
“차가 멋진데요.”
“제 차는 아니고, 바이엘에서 제공해준 차예요.”
파란색의 포르쉐는 시원스레 한적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유럽풍의 아름다운 전원지대였다.
“부르고뉴는 보르도와는 또 다르군요.”
“그러게요, 이진석 사장님 말대로 보르도가 규모가 있고, 도시 분위기가 나는 곳이라면, 부르고뉴는 시골 느낌이 더 강해요.”
원래 부르고뉴라는 지명은 부르고뉴 공작가에서 나온 이름이라는데, 한때는 루이 14세에 대항할 정도로 막강한 지방의 세력가였던 모양이었다.
“그거 아세요? 한때는 영국 여왕이 부르고뉴 공작을 지원하기 위해, 보물선을 보냈었다는 거.”
정수경의 말에 진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국 여왕이요?”
“예, 프랑스 왕이었던 루이 14세를 견제하기 위해서였죠. 막대한 황금이 가득한 보물선을 보내서 부르고뉴 공작의 군자금으로 쓰게 할 계획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영국에서 지중해로 들어가기 위해 지브롤터를 지나다가 풍랑에 침몰하고 말았데요.”
“저런..덕분에, 루이 14세는 무사했겠군요.”
“그래요, 그런 이유로, 부르고뉴는 정치적으로 쇠락의 길을 걸어서, 지금은 포도밭으로 유명한 시골마을이 된 거죠.”
진석과 수경이 향하는 곳은 부르고뉴에서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포도주가 만들어지는 본로마네 마을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포도주인 로마네 꽁띠가 만들어지는 곳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막상 차를 타고 마을 안으로 들어서자, 그냥 조용한 시골 마을 느낌이었다. 돌담길을 따라, 정수경의 안내를 받으며 걷다 보니, 저 멀리, 포도밭이 보이고 있었다.
“와, 여기가, 로마네 꽁띠의 포도밭인가요?”
로마네 꽁띠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멀리서 보였다. 진석과 수경은 포도밭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보르도에 비하면 전체적으로 부르고뉴의 포도밭들은 규모가 작아요. 아주 작고 조용한 분위기죠.”
“그러게요. 수경 씨 말대로. 한적한 곳이네요.”
아직 일하는 시기가 아니어서 그런지, 오후의 본로마네 마을은 사람의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덕분에 소박한 듯 고풍스러운 듯한, 본로마네 마을을 천천히 산책하듯 걸을 수 있었다.
“뭔가 엄청난 명성에 비해서 수수한 모습이라, 오히려 진짜 같아요.”
수경에 말에, 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원래, 진짜 유명한 곳들은 따로 꾸밀 필요가 없으니까요. 아무래도, 부르고뉴 와인들의 명성이 더 높아서 그런지 작은 시골 마을도 예사롭게 보이지는 않네요.”
로마네 꽁띠의 포도밭을 마지막으로 바이엘 사에서 주선한 와인 투어는 막을 내렸다.
“이제 파리로 가는 건가요?”
“제가 계약한 가이드 일정은 여기까지예요. 물론, 파리까지 안내해 드리는 일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샤를 드골 공항까지 말이죠?”
“예, 한국으로 가실 거 아닌가요?”
“사실은 파리에 좀 가보고 싶어서요.”
“파리요, 루브르나 에펠탑 말인가요?”
“뭐, 그보다도, 파리에 집을 하나 사고 싶은데.”
“집요?”
“예, 유럽에 오게 되면 머물 작은 집 하나를 구매하고 싶습니다. 좀 조용한 주택가면 되는데. 가능할까요?”
진석의 말에, 정수경은 잠시 생각을 해보는 듯했다.
“아는 언니가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했거든요. 이진석 사장님이 사시기에는 좀 규모가 작은 아담한 집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백문이 불여일견이죠. 한 번 가보죠.”
***
파리 외곽 빌레쥐프..
파리 근처기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한적한 주택가였다. 매물로 집을 내놓은 사람은 한국의 대기업 유럽지사에 근무하던 주재원 부부였다.
“괜찮은 집이죠?”
“집에 정원도 있고, 마음에 드네요.”
대저택까지는 아니었고 60평 규모의 이층집이었다. 집은 프랑스나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지중해풍의 벽돌집이었다.
“파리에 사실 게 아니라 가끔 들러서 별장으로 쓰기에는 좋은 집이죠.”
“집도 집이고, 주변이 한적한 주택가라, 치안이나 그런 문제는 없어 보이네요.”
“그럴 거예요. 여기 전주인 언니하고는 친하게 지냈었는데. 파리 시내와는 달리 여기서는 시끄러운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해요. 동네도 조용조용하고...”
진석이 찾던 바로 그런 집이었다.
“근처에 전철역도 있고 파리와도 아주 가까워요.”
“예, 마음에 드는군요. 이 집으로 하죠.”
***
제이에스 본사
“유럽 출장은 잘 되신 거죠?”
“그래, 바이엘하고 계약 성공이야.”
“와인 투어도 갔다 오시고요?”
“바이엘에서 선물로 준비한 거였다고. 어쩌겠어. 상대의 호의를 거절할 수도 없고 말이야.”
국제법과 상업에 능통한 변호사와, 통역, 그리고 우리측 실무자까지 10여 명이 같이 독일로 떠난 출장길이었다.
유럽 최고의 제약 유통망을 가지고 있는 바이엘과의 계약을 위해 출발한 독일 출장, 사실, 계약 내용은 사전에 검토를 끝낸 것이고, 최종 서명만 남은 상태의 홀가분한 출장이었다.
바이엘도 그런 진석을 위해, 프랑스 유명 포도주 산지를 둘러보는 와인 투어를 제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프랑스에 간 김에, 파리 근교의 빌레쥐프에 정원이 있는 주택도 하나 매입하고 말이다.
***
파리 빌레쥐프,
“날씨가 더운데, 뭐 시원한 거 없나.”
파리는 화창한 오후였다. 진석은 장미가 가득 피어 있는 빌레쥐프의 한적한 주택의 정원에 앉아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있었다. 서울은 아직 새벽 다섯 시...
옆에는 귀여운 먼치킨 고양이 다섯 마리가 잔디가 깔린 정원을 뛰어다니며 놀고 있었다. 아직 아기 고양이들이라, 그리 멀리 돌아다니는 녀석들은 없었고, 책을 읽고 있는 진석 앞에서 야옹거리며 햇볕을 쬐고 있는 정도였다.
지난번에 집을 사러 왔을 때, 근처에 마트가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프랑스인들이 자주 가는 유명 마트 체인이라고 했는데, 거리가 가까워서 걸어서 10분 정도 거리라고 했던 기억이었다.
고양이들은 일단, 상자에 좀 넣어두고, 외출을 했다. 한적한 골목길을 10분 정도 걸어나가자, 좀 큰 대로가 나오고, 멀리 마트가 보였다.
한국의 중형 마트 정도의 크기였는데, 그리 크지는 않아도, 웬만한 것들은 다 갖춘 것 같았다.
“치즈도 좀 사고, 고기도 좀 사고, 과일은 뭐가 좋으려나.”
과일 코너를 둘러보니, 수박이 있었다. 프랑스에서 흔히 먹는 모로코 수박이었다. 약간 길쭉한 모양이었는데, 어떤 맛일지 궁금하기도 해서 모로코 수박도 하나 사고, 쥬스도 좀 사고. 상추도 하나 골랐다. 프랑스는 상추를 줄기째 통으로 파는 게 좀 달랐다.
“이 정도면 대충 된 것 같은데.”
집으로 돌아와, 수박부터 잘라보기로 했다.
과연 모로코 수박은 어떤 맛일까? 길다란 수박을 반으로 자르자 빨간 수박 속살이 드러났다. 그냥 잘라놓은 단면만 봐서는 한국 수박과 다를 점은 없어 보였다.
“맛은 어떨까?”
진석은 수박을 작게 썰어 한 조작을 베어 물었다.
“음, 식감도 괜찮고, 꽤 달잖아.”
수박을 자르고 있자, 새끼 고양이들도 모여들었다. 작게 잘라서 한쪽씩 나눠주니 제법 잘 먹는다.
“너희들 입맛에도 맞는가 보구나.”
맛은 괜찮은데, 모양이 길쭉해서 한국 수박 먹는 맛이 안 나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그래, 역시 수박 하면 한국 수박이지.”
아쉬운 대로, 모로코 수박으로 갈증을 해소하고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서울과 파리의 시차는 7시간 파리가 7시간이 더 빠르다.
거실 시계가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가봐야겠는데.”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
서울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바로 출근이었다.
“수정 씨, 좋은 아침..”
“사장님 좀 늦으셨네요.”
“아, 아침에 책 좀 읽느라.”
“책요? 아침부터요?”
“뭐 어때, 내가 편한 시간에 내가 편하게 읽으면 되는 거지.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책 읽는 사람도 있잖아.”
“그래요? 다들 스마트폰을 보는 것 같던데.”
“시대가 변했다고, 스마트폰으로 책 읽는 사람도 많아. 그건 그렇고, 우리 연구소에 수박 씨앗도 있지?”
“그럴 걸요, 사장님이 씨앗 종류는 최대한 많이 확보하라고 하셨잖아요. 수박은 왜요?”
“여름 대표 과일이잖아. 올해는 아니어도 해마다 여름은 오는 거고, 수박도 신품종을 개발해 보자는 거지.”
***
제이에스 바이오의 종자 연구소에서는 다양한 품종의 씨앗을 보관 중이었다. 진석은 그중에서 최근에 인기가 있다는 껍질이 얇고 무게가 7kg 내외의 품종 몇 개를 골랐다.
공간의 문을 열자, 사령관이 진석을 맞았다.
“이번엔 뭘 가져오신 거죠?”
“사령관, 이건 수박이라는 거야.”
“수박요? 아, 저도 유튜브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겉은 초록색이고 속은 빨간 과일 말이죠?”
“그래, 여름 대표 과일이고 농산물 전체로 봐도, 10대 작물에 들어가는 인기 과일이지.”
수박은 보통 모종을 통해 심는 게 일반적이지만, 진석은 씨앗을 들고 왔다. 씨앗을 비어 있는 오아시스 주변의 밭에 뿌리고, 시간을 가속하자 수박 씨앗에서 떡잎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을 더 가속하자, 줄기가 퍼지면서 순식간에 꽃이 피고, 수박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다. 얼마 후에는 다 자란, 커다란 수박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잘라서 한 번 먹어 볼까?”
진석은 수박을 잘라 맛을 보았다.
“음 당도도 좋고, 딱이네.”
하지만 그저 평범한 수박일 뿐이었다. 진석은 다 자란 수박에서 씨앗을 채취해서, 산으로 향했다.
“사령관, 아무래도, 산에 수박을 심어야겠어.”
“산에 말입니까. 수박이라면, 오아시스 주변에서도 잘 자랄 것 같은데요?”
“그렇기는 한데, 너무 평범해서 말이야. 산에는 특별한 에너지가 흐르니까. 뭔가 특별한 수박이 나올 거라는 거지.”
진석은 일꾼들과 함께, 픽업트럭을 타고 오아시스를 출발해 산으로 향했다. 적당한 장소를 찾다가, 산 아래에 샘이 흐르는 곳 주위에 수박밭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씨앗을 뿌리고 진석이 시간을 가속하자, 이번에도 수박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열린 수박들은 전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평범한 수박들, 하지만, 다시 수박에서 씨를 채취해서 심었을 때는 뭔가 변화가 있었다.
“어, 수박이 색이 다른데요.”
“그러게 말이야.”
수박이 좀 더 진한 녹색이었고, 대신, 검은색 줄무늬는 희미해져서, 전체적으로 아직 익지 않은 크게 자란 호박 느낌이었다.
표면도 매끈하지 않고, 울퉁불퉁해서 언뜻 봐서는 동그란 호박 느낌도 났다.
“뭔가 투박한 느낌이군, 맛은 어떨까?”
진석은 호박처럼 생긴 수박을 하나 따서 칼로 잘라 보았다. 안쪽은 다행히 빨간 수박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한 입 베어 물자 식감도 좋고 달콤한 수박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
“공간주님 맛은 어떻습니까?”
“맛은 수박 맛인데.. 아주 달콤하고 시원한 수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