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상큼한 블루베리(2)
“블루베리 에이드 주세요.”
“저도요.”
여대생처럼 보이는 두 명의 젊은 여성은, 나란히 블루베리 에이드를 주문했다.
“블루베리 에이드가 제법 팔리는 모양이야?”
“어머, 사장님 언제 오셨어요?”
“방금.”
홍대점에 새로 출시한 블루베리 에이드가 입소문을 타고, 판매가 급증하고 있었다.
“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많이 찾아요. 마시고 나면, 개운하고 머리가 맑아져서 공부가 잘된다고요.”
“그래?”
진석이 운영하는 북카페들 중에, 건국대학이나 서울대, 그리고 신촌의 연세대점 같은 곳들이 대학생들이 많이 모이는 곳들이었다.
그 외에 공시생들이 많은 노량진에도 북카페를 가지고 있었다.
한지수와 블루베리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유민지가 나타났다.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밌게들 하세요?”
“아, 민지 씨. 잘 왔어. 블루베리 에이드 말이야. 꽤 잘나간다면서?”
“예, 학생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진짜인지는 모르겠는데. 공부하기 전에 마시면 공부가 잘된데요.”
“그래?”
역시, 진석이 생각한대로 공간의 산에서 재배한 블루베리에는 뭔가 특별한 효능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기억력과 관계된 효능, 기억력의 상승 내지는 건망증을 개선하는 정도의 효과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공부가 잘되는지는 몰라도, 젊은 학생들이 좋아한다면, 다른 대학가에 있는 카페에서도 판매를 시작하기로 하자고.”
“블루베리만 제대로 공급되면 큰 문제는 없어요. 레시피가 복잡하거나 한 건 아니니까.”
“블루베리만 있으면 된다는 거지?”
***
비가 오기 시작하면서 공간의 산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건조한 기후로 인해서, 다소 척박해 보이는 산이었지만, 최근에는 비가 자주 내려서,
산 전체가 풀과 나무들로 푸르른 모습이었다. 외견상 보기에는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지만, 덕분에 일거리도 늘어났다. 풀과 나무들이 자생하기 시작하면서, 과수원을 관리하거나 새로 과수원을 늘리는 일에 풀과 나무들을 제거하는 일이 추가된 것이다.
“잡초들이군.”
진석은 과수원 주위에 자라기 시작한 잡초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예, 공간주님, 외부에서 가져온 모종 속에 섞여 들어온 모양입니다.”
사령관은 과수원 관리를 지시하고 있었다. 일꾼들은 다행히 휴식이 필요 없는 진흙 인간들이라, 늘어난 작업에도 불평불만 없이 맡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었다.
“인간이었다면, 이렇게 일을 많이 시키면 폭동이 일어났을 거야. 안 그래? 사령관.”
“하하, 우리들은 인간이 아니니까요.”
사령관의 말대로 진흙 인간들은 인간이 아니라, 기계에 가까웠다. 덕분에 손이 많이 가고, 고된 일이 많은 농업에는 상당히 적합한 존재들이었다.
“블루베리는 다 옮겨 심은 건가?”
블루베리 경작지를 늘리기 위해, 나무를 베어내고 땅을 개간해서 묘목들을 옮겨 심는 작업을 하는 중이었다.
일꾼들이 묘목을 옮겨심자, 진석이 시간을 가속해 묘목들을 몇 분 만에 다 자란 나무들로 성장시키고 있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공간주님의 능력은 대단하십니다.”
사령관은 빠르게 자라나는 블루베리 나무들을 보며 감탄을 했다.
“이걸로, 생산량이 10배는 불어났으니까, 당분간은 블루베리 걱정은 없을 거야.”
진석은 산에서 블루베리 증식 작업을 마치고 오아시스로 돌아왔다.
오아시스 주위에는 고양이들이 이제 수백 마리로 불어난 느낌이었다. 캣타워도 몇 개 만들어 놓았지만, 도시의 카페에서 캣타워를 좋아하는 고양이들과 달리, 이곳 오아시스의 고양이들은 캣타워보다는 근처의 야자수 나무를 더 좋아했다.
오아시스 주위의 야자수들은 자연적인 캣타워인 셈이었다.
진석도 야자수 그늘에서 해먹에 매달려 낮잠을 자는 걸 가장 좋아했다. 잠을 푹 자고 나서는 수영을 즐기고, 공간의 염수 호수에서 잡은 연어구이와 토마토를 먹는 게 진석의 일상의 모습이었다.
이번에도 느긋하게 시간을 즐기고는 산에서 수확한 블루베리를 가지고 진석은 공간을 나왔다.
***
“또 신약을 개발 중이라는 거죠?”
“정보가 빠르시네요.”
“방송국에서 일하다 보니까, 기자들하고도 친해요.”
최진아에게 먼저 연락이 왔다. 식사나 하자는 전화였다.
“뉴욕으로 출장을 가실 거라는 거죠?”
“예, 다음 주에 출발이죠.”
“임상실험 문제로요?”
“뉴욕대학 의과대학 팀하고 임상실험을 진행할 생각이에요. 지난번 넥타르도 그쪽에서 임상실험을 맡았거든요.”
“연자육 추출물로 만든, 고혈압 치료제라, 이 약은 이름이 뭐예요?”
“부처님의 이름이 싯타르타잖아요. 싯타르타는 좀 신성 모독인 것 같고, 시타르 라고 부를 생각인데 진아 씨, 생각은 어때요?”
“시타르요? 괜찮은데요. 넥타르 다음은 시타르 군요?”
“그러게요, 약간 어감이 비슷하네요. 하하.”
“축구단도 인수하시고요?”
“아, 뭐, 그건 좀 내용이 복잡한데, 아무래도 우리회사가 농업 관련 바이오 회사다 보니까, 강원도와 협약을 맺고 사업도 진행하려고요, 축구단을 인수한 것도, 그런 협력 사업의 연장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신촌에 만든다는 유기농 농산물 매장 말이죠?”
“맞아요. 유기농 식품을 취급하는 곳은 지금도 많지만, 저희는 품종 개량도 해서, 툭성화된 기능성 작물을 선보일 생각입니다.”
“기능성 작물요?”
“약선식품이라고 하잖아요. 약보다 사실, 더 중요하고 건강을 좌우하는 게 식품이죠.”
“약선식품요?”
“예, 먹거리가 그만큼 중요하죠. 뭘 먹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을 구성하는 물질이 변하는 게 되잖아요. 구성원이 변하면 사회 전체도 변하는 것처럼, 식품도 사람 자체를 변하게 하죠, 그래서 농업이 중요한 거고요.”
“뉴욕에 가면, 일만 하실 건가요?”
“예?”
***
두 번째 찾은 뉴욕은 여전히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댄 김도 넥타르 개발 성공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 돈으로 고가의 아파트도 구입한 모양이었다. 진석은 댄 김의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전망을 바라보며 감탄을 했다.
“맨하튼의 아파트라, 전망이 기가 막히네요.”
“하하, 이진석 사장님 덕분이죠.”
댄 김은 넥타르의 북미 유통을 맡고 있었다.
“그래서 의대교수 일은 때려치웠습니다,”
“의외네요? 의사가 천직이신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뭐, 그렇지도 않아요. 그저 전형적인 이민 2세 엘리트라고 할까요?”
“전형적인 이민 2세 엘리트요?”
“한국에서 온 미국인들의 전형이죠. 부모님은 세탁소나 슈퍼를 하면서, 아이들은 공부를 시켜서 변호사나 의사를 만드는 거죠. 그래서 한인 교회에서 만난 비슷한 조건의 한인 2세와 결혼하고 백인 주류 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는 거죠.”
“그런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요.”
“사실, 의사가 좋은 직업이기는 해요, 안정적이기도 하고, 고소득 직종이고, 사회적으로 인정 내지는 존경을 받죠.”
“그럼 더할 나위가 없는 거 아닌가요?”
“하지만, 실상은 제한된 병원이라는 공간에서 하루종일 아픈 환자들의 푸념과 하소연을 들어주는 일이죠.”
“그런 점이 존경을 받는 이유겠죠?”
“맞아요, 사실, 훌륭한 의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전, 의학을 배우고 연구하는 건 재미 있었지만, 숭고한 희생정신까지는 무리더군요. 그래서 진료보다는 연구 쪽으로 일찌감치 방향을 돌리기도 했고요.”
“이제는 완전히 비즈니스 쪽으로 전향인가요?”
“그렇게도 말할 수 있지만, 의학을 공부하고, 생명에 대한 연구를 계속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일을 하는 셈이죠.”
“그래도 아직, 뉴욕대학에 인맥은 있으시겠죠?”
“신약 임상실험 문제라면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제 후임이라면 잘 아는 친구죠. 그나저나 도성준 박사님이 은퇴했다는 건 아쉽네요.”
“그분은 대학으로 돌아가셨죠. 후진 양성에 힘을 쏟으시겠다고 하니까, 한국 과학계의 미래를 위해서는 좋은 일이겠죠.”
“시타르라는 신물질이군요. 싯타르타에서 따온 이름이라는데 맞습니까?”
“예, 연자육이라는 게 연꽃 열매인데, 부처님하고도 관계가 있으니까요. 부처님의 은덕처럼 온세상의 고통을 덜어주고 중생을 구제하라는 의미입니다.”
“하하. 혹시 불교 신자이신가요?”
“아뇨, 전, 무신론자입니다. 아니 그보다는 범신론자라고나 할까요.”
“범신론이라면, 신 역시도 세계의 일부라는 그런 의미죠?”
“뭐, 진지하게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지만, 글쎄요. 일반적인 종교들은 절대자인 신과 그의 창조물인 세계를 상정하니까요. 그보다는 저는 신 역시도 세계 안의 신, 전체를 이루는 부분으로서의 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분이라면, 전체를 넘을 수는 없다는 의미겠죠?”
“그렇죠, 설사, 모든 부분을 다 합치더라도, 전체성이라는 하나가 더 있는 거 아닙니까? 결국 신이 세상의 모든 것을 창조했다고 하더라도, 세계는 그 신보다 하나는 더 큰다는 의미니까요.”
“아이들의 말장난 같네요. 이 차는 세상에서 가장 빠른 차보다, 더 빠릅니다. 그런 거 말이죠.”
“아무튼, 경치가 정말 멋지네요. 저도 뉴욕에 아파트를 사나 사고 싶은데.”
“아파트요?”
***
“뉴욕에서 다시 만날 줄은 몰랐네요.”
“전, 알았어요. 사실, 일부러 따라온 건 아니고, 저도 뉴욕에 올 일이 있었거든요.”
댄 김을 만나서, 시타르의 임상실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최진아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짜고짜 뉴욕이라며 만나자는 것이었다.
택시를 타고 내린 곳은 뉴욕의 유명한 극장인 민스코프 극장 앞이었다.
“라이언 킹이라? 이거 애니메이션아닌가요?”
“여기서 10년 넘게 장기 공연 중이에요.”
뉴욕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 브로드웨이의 풍경은 역설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있었다.
“굉장하네요. 한가지 뮤지컬을 그렇게 장기 공연이 가능한가요?”
“안에 들어가 보시면 알겠지만, 뉴욕사람들이 보러 오는 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이런 유명한 뮤지컬을 보러 오는 거예요. 뉴욕사람들에게 똑같은 공연을 보여준다면, 아무리 걸작이라도 한계가 있겠지만, 전세계에서 오는 관광객이라면 문제가 다르죠.”
“그렇겠네요. 뉴욕에 와서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보는 것은 외국인들에게 흔치 않은 경험일 테니, 기왕이면 오래되고 유명한 뮤지컬이라면 더 좋을 테고.”
“그렇죠, 그런 관광객들은 새로운 것보다는 오래된 유명 뮤지컬을 선호하니까요.”
최진아는 연예계의 거물답게, 헐리우드나, 뉴욕의 예술계 사람들과도 인맥이 있다고 했다. 뉴욕에도, 뮤지컬 팀의 내한 공연문제로 들렀다가, 진석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라이언 킹이라는 뮤지컬 티켓을 구해서 진석을 초대한 것이었다. 대신 저녁은 진석이 사기로 했다.
뮤지컬이 시작되자, 아프리카의 주술사가 나타났다. 그녀로부터 모든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
“조금 피곤해 보이시네요?”
“아, 어제, 좀 늦게까지 술을 마셨거든요.”
“뉴욕에 오자마자, 파티가 있었나보죠?”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아는 여자분을 우연히 만나게 돼서..”
“한국에서 오신 지 얼마 안 되신 걸로 아는데, 빠르시네요..”
“하하, 뭐, 그저 지인하고 저녁 식사를 한 정도입니다. 와인을 좀 많이 마시기는 했지만.”
제니퍼 리는, 한국계 미국인으로 뉴욕의 맨하튼 일대의 부동산 업자였다. 그녀의 주요 고객들은 한국 혹은 중국에서 온 부자들이었다.
“아시아인들이 아파트를 많이 사나 보죠?”
“예, 투자 가치도 있고, 강남에서 오신 분들이 좋아하세요. 원래 강남도 그런 프리미엄이 있잖아요.”
“프리미엄요?”
“한국의 중심은 서울이고, 서울의 중심은 강남이다. 이런 거죠.”
“아, 그런가요? 저는 강남 출신이 아니라 잘 모르겠네요.”
“뉴욕도 그런 게 좀 있죠. 뉴요커들의 자부심 같은 것도 있고, 맨하튼에 산다는 건, 세상의 중심에 집을 가졌다는 의미가 있는 거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제니퍼 리의 말대로, 뉴욕의 산다는 것은 세상의 중심에 있다는 느낌이 있었다.
“여기 이름이 워터라인 스퀘어라는 거죠?”
“예, 위치는 60번가고요. 보시다시피, 허드슨강이 바로 옆이라, 야외 라운지에서 보면, 허드슨강이 한눈에 들어와요.”
“와, 서울은 고층 아파트는 한강뷰인데, 뉴욕은 허드슨강 뷰군요?”
“아파트 실내는 남향이라, 강보다는 맨하튼의 마천루가 보이는데, 사실 나쁘지 않아요. 강만 보는 것보다는 햇빛도 잘 들어오고요.”
제니퍼 리의 설명대로, 거실 쪽에서 맨허튼의 고층 빌딩들이 내려다보이는 전망이 아주 장관이었다.
“가격은 어느 정도인가요?”
“지금 여기가 한국으로 치면, 55평이에요. 한화로 가격은 58억 정도네요.”
“뉴욕의 맨하튼의 신축 아파트치고는 괜찮은 가격이네요.”
“맞아요, 앞으로 보유하고 계셔도, 오르면 올랐지 떨어지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뉴욕에 부동산 투기를 할 생각은 없었지만, 괜찮은 아파트가 필요했다. 뉴욕대학과 진행하는 임상실험 문제도 있고, 댄 김과 북미 쪽에서 넥타르의 판매 문제로 협의할 일들이 많아서, 뉴욕에 출장 올 일이 생기고 있었다.
“좋습니다. 이 정도면 훌륭하네요. 계약하기로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