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상큼한 블루베리(1)
“야옹..”
어디가나 고양이 천국이군. 진석에게 다가온 고양이는 진석의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먹이가 없는 걸 알고 돌아서 버렸다.
“공간주님, 묘목을 어디에 심을까요?”
“이건 블루베리니까, 산에 심어야겠어.”
공간의 오아시스, 진석이 요즘 공간에 오면 하는 일은 새로운 과일의 묘목을 심거나 신품종의 작물을 개발하는 일이었다.
“이번에는 블루베리군요.”
사령관은 일꾼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비가 올 수도 있겠는데.”
공간에도 요새는 비가 자주 내리고 있었다. 다행히 비가 와도 진흙 인간들에게 방수 돌기가 생긴 후로는 걱정할 일은 없었다.
그보다는 자주 내리는 비 때문에 공간의 수자원이 늘어나서 농사를 짓기에는 더 적합해진 느낌이었다.
진석은 트럭에 묘목을 싣고, 다른 일꾼들과 함께 산으로 향했다. 공간의 크기가 확장되면서 늘어난 것이 픽업트럭이었다.
공간에서 작업을 위해, 또 이동하기 위해서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인 셈이었다. 서울처럼 아스팔트 도로가 없는 공간에서 이만한 이동수단은 없었다.
산 중턱까지 트럭을 타고 올라가던 진석 일행은, 묘목을 내리고 작업을 시작했다.
일꾼들이 블루베리 묘목을 심으면, 진석이 시간을 가속해서 묘목을 순식간에 성장시키는 방법이었다. 떨어진 씨앗에서 나오는 작은 묘목은 채취해서, 다시 다른 곳으로 옮겨 심고 시간을 가속시킨다.
단순하지만, 진석의 공간에서의 시간 지배력으로 블루베리 나무들은 기하급수적으로 숫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블루베리는 보통 익으면 짙은 보라색에 가까운 푸른색을 띄는데, 진석이 증식 작업을 하는 중에, 특이한 색의 블루베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건 뭐지? 스카이 블루라고 해야 하나?”
진석은 열매를 따서 입에 넣어 보았다. 맛은 괜찮은 편이었다. 블루베리 특유의 달콤한 맛에 약간 신선한 느낌이 더 한 느낌이었다.
“공간주님, 이건, 색이 좀 다르네요.”
“그래, 사령관, 이 하늘색 블루베리를 더 증식시켜야겠어.”
“하늘색을 말입니까?”
“그래.”
공간의 산은 평지뿐인 공간에서 유일하게 지표면으로 솟아 있는 지형이었다. 그것 때문에 공간의 에너지가 이 산에 집중되는 현상이 일어나면서 산에 심는 작물에 영향을 주고 있었다.
이전의 경험에 의하면, 산에서 이렇게 색깔이나 모양이 바뀐 작물들은 뭔가 특별한 효능이 생기고는 했다. 진석은 이번에도 그런 기대를 하며, 하늘색이 감도는 블루베리를 증식시키기 시작했다.
***
북카페 오아시스 홍대 본점.
“지수 씨, 내가 몇 번을 말해, 캣타워 정리 좀 하라고 했지? 고양이들 모래도 갈아주고.”
“아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해서,”
“아니, 이제 갓 스무 살이라면서, 아침에 말한 것도 그렇게 잊어버리면, 그거 큰일 아니야?”
유민지는 평소에는 귀여운 편이지만, 직원들 앞에서는 또 다른 모습, 카리스마가 넘치는 점장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민지 씨, 그만해. 뭐, 바쁘게 일하다 보면 잊어버릴 수도 있지. 이것저것 할 일이 많잖아.”
북카페의 특성상, 잡다한 일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일반적인 카페보다 공간도 훨씬 넓고, 책들이 있어서, 손님들이 보고 난 책들을 순서대로 책장에 정리하는 일도 있었다.
거기에, 카페 오아시스의 명물이 되어 버린 고양이들 때문에 카페 알바생들의 일은 더 늘어난 셈이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한지수는 올해 스무 살의 대학생 알바생이었다. 언뜻 봐서는 걸그룹 멤버를 연상시키는 외모에 성격도 싹싹해서 잘 적응할 줄 알았는데, 완벽해 보이는 그녀에게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건망증이었다.
익숙한 환경이라면,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는데, 북카페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이것저것 지시하는 것들을 하고, 새로운 것도 배우다 보니 뇌에 살짝 과부하가 온 모양이었다.
“지수 씨, 그러지 말고, 이거나 한번 먹어봐.”
“어머, 이거 블루베리죠?”
“그래, 내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건데, 맛이 좀 더 상큼한 것 같아.”
한지수는 진석이 내미는 블루베리 바구니에서 블루베리 몇 개를 집어 들어서 맛을 보았다.
“음, 진짜 맛있어요. 원래, 이런 맛인가? 생으로 블루베리는 먹어본 적이 없어서.”
“보통 블루베리하고는 좀 맛이 다르기는 할 거야, 신품종이거든.”
“아무튼, 대박 맛있는 거 같아요. 최고예요.”
한지수는 엄지척을 해보였다.
“그래, 괜찮으면, 이걸로 신메뉴를 개발하는 건 어때?”
“블루베리로요? 뭐, 이렇게 새콤달콤한 과일이라면 쓸모가 많기는 하죠.”
유민지도 블루베리를 하나 입에 넣으며 말했다.
“이거 꽤 상큼한 맛인데요.”
***
신촌..
“여기 이 건물이군요?”
“원래는 대형마트가 들어가 있던 건물인데, 최근에 마트가 철수하면서, 1층은 공실이 되어 있었다.”
“400백 평이면. 공간은 충분한 것 같습니다.”
장준영은 강원도 기획처 대외협력부 소속의 과장이었다.
“이곳에 유기농 마트를 오픈하시겠다는 거죠?”
홍대의 카페에 들렀다가, 가까운 신촌에서 장준영과의 미팅 겸 입주할 건물 사전 점검이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이름은 아마 제이에스 스토어가 될 겁니다. 강원도 농가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들이 유통되는 창구가 되는 거죠.”
진석의 말에, 장준영은 고개를 갸웃했다.
“위치가 좋기는 한데, 임대료도 비싸고 수익성이 있을까요?”
“뭐, 인구 구성이 대학생들이 많은 지역이기는 하지만 교통이 편리하고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라 유기농 채소나 과일에 관심이 많은 소비자들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음, 괜찮을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저는 공무원이라 판단이 잘 서지는 않네요.”
제이에스 스토어는, 강원도와 협약을 맺고 예산을 지원받아 설립되는 농산물 전용 마트였다. 오명진 지사로부터 축구단 인수 조건으로 지원을 약속받은 사업의 첫 번째 시작인 것이다.
사업의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진석의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개발한, 다양한 작물들을 강원도 농가에서 생산하고 그걸 서울에 전용 매장에서 판매 유통한다는 것이었다.
강원도가 초기에 들어가는 임대료나 인테리어 등의 비용을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잘 될 겁니다. 강원도의 청정 농산물이면 건강에 관심이 많은 서울 사람들에게 크게 어필할 수 있는 요소죠. 거기에 제이에스 바이오는 신품종의 특성화 작물을 개발할 생각인데, 그 두가지가 시너지를 발휘하면 반드시 성공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장준영은 고개를 갸웃하기는 했지만, 오명진 도지사가 특별히 지시를 내려서 지원을 하는 일이라 장준영도 형식적인 서류 검토를 하는 정도였고,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
해운대 요트 마리나
진석은 오후에는 해운대에서 요트를 타면서 시간을 보냈다. 44피트짜리 크루징 요트였는데, 요새는 요트 타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돛으로 주로 움직이는 세일링 요트보다는 엔진으로 작동하는 크루징 요트가 초보자인 진석이 타고 다니기에는 제격이었다.
배를 운전하기 위해 보트 조정면허도 따고 나서 구입한 요트는 작은 고깃배 정도의 크기였지만 탁 트인 바다를 혼자 항해 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한강에도 마리나가 있지만, 요트를 타기에는 한강보다는 바다가 있는 해운대가 역시 좋았다.
거기에 서울과 부산을 오고가는 시간적인 문제도 진석에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배는 부산 앞바다를 유유하게 항해하고 있었다.
“여보세요. 어, 수정 씨. 무슨 일이야?”
“한 시간 후에 회의인 거 아시죠?”
“걱정하지 마, 지금 가는 중이니까. 회의 시간에는 늦지 않을 거야.”
진석은 기수를 마리나 쪽으로 돌렸다. 배를 정박하고, 차를 타고 마리나에서 멀지 않은 오션 시티의 펜트하우스에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시계를 보자, 회의 시간 5분 전이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하군.”
진석은 창밖으로 보이는 해운대의 풍경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잔디가 깔린 오아시스의 진석의 집 정원이었다. 진석은 다시 몇 걸음을 옮기고 공간의 문을 열었다. 공간과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출입구가 열린 곳은 제이에스 본사에 있는 진석의 개인 사무실이었다.
‘똑..똑..’ “사장님, 안에 계세요?”
노크소리와 동시에 들리는 건, 이수정의 목소리였다.
“어, 이제 나갈 거야.”
진석은 사장실 문을 열며 미소를 지었다.
“언제 오신 거예요?”
“방금..”
진석을 시계를 확인해 보았다.
“아직 회의 시간 5분 전이군.”
공간을 허브로 이용하는 방식으로 진석은 해운대와 서울을 오고가는 이중생활을 즐길 수가 있었다. 해운대뿐만 아니라, 어디든 출입구를 만들 수 있는 개인적인 공간,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의 출입이 없는 개인적인 장소만 확보되면, 이런 식으로 공간을 매개로 먼 거리를 실시간으로 오고갈 수 있는 것이다.
***
북카페 오아시스 홍대 본점
“지난 번에 말한 블루베리로 신메뉴는 만들어 본 거야?”
“아, 그거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한지수는 베이지색의 스커트에 하늘색의 블라우스 차림이었다. 깨끗하고 깔끔해 보여서, 카페 알바로는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이거 제가 만들어 본 건데. 한 번 맛보세요.”
“이게 뭐야?”
“블루베리 에이드예요. 블루베리를 갈아 넣고, 꿀도 좀 넣고, 거기에 탄산수, 마지막으로 레몬과 민트 잎은 예쁘라고 장식 겸 넣어 보았고요.”
하늘색 블루베리였는데 믹서에 갈자, 즙은 짙은 붉은색이 나왔다고 했다. 전체적으로는 붉은 빛이 감도는 블루베리 에이드가 완성된 것이다.
얼음이 들어가 시원한 블루베리 에이드는 상큼하고 시원한 맛이었다. 레몬과 민트향도 상큼함을 더 하고 말이다.
“좋은데. 기대 이상이야.”
카페 창가에서 한지수와 블루베리 에이드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자, 어디선지 유민지가 나타났다.
“블루베리 에이드 맘에 드세요?”
“생각보다 맛있는데, 이거 누가 만든 거야? 유민지 전무? 아니면, 한지수 씨?”
“지수 씨가 만든 거예요.”
“와, 대단한데, 이제는 카페에 완전히 적응을 한 모양이네?”
“그럼요, 요새는 지수 씨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데요. 전 이렇게 기억력이 좋은 알바생은 처음이라니까요?”
“하하, 전에는 건망증이 심하다며..”
한지수가 다 마신 잔을 들고, 주방으로 돌아가자 유민지는 한지수 칭찬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것 같았는데, 요새는 달라진 것 같아요. 음, 카페 일에 적응을 한 건가?”
“그렇겠지, 처음에는 다 어리버리하잖아. 갑자기 기억력이 좋아질리도 없고...음, 기억력이 좋아졌다고?”
“아무래도 적응이 돼서 그런 거겠죠? 블루베리 에이드를 개발하는 데 성공하면서 자신감이 붙어서 그런 모양이에요.”
“음, 그래? 한지수 씨가 혼자서 만든 거지?”
“예, 아침부터 나와서 신메뉴를 만들어 본다고 블루베리로 별 걸 다 하더라고요. 갈아서 마셔보기도 하고, 얼려서 먹어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사장님, 블루베리 에이드 개발한다고 한지수가 사장님이 가져온 블루베리 절반은 먹은 것 같아요. 블루베리는 더 있는 거죠?”
“어? 물론이지.”
한지수가 블루베리를 그렇게 많이 먹었다는 건가? 그리고 기억력이 좋아졌다는 말이지?
***
은하수 농장...
“이건 블루베리네요? 색이 특이해요.”
“하하, 이번에 새로 개발한 품종입니다. 색이 밝은 하늘색이죠.”
“음, 맞은 더 상큼한 것 같은데요. 색깔도 더 예쁘고.”
서은주는 블루베리 몇 개를 먹어보다니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로 주신 거죠? 그런데 너무 많은 거 아닌가요?”
“아, 여기 마을 입구에 노인회관이 있잖아요. 새로 개발한 거라, 테스트도 할 겸, 어르신들께 갖다 드리려고요.”
“정말요? 그러면 좋죠. 블루베리가 건강에도 좋다고 하는데 어르신들에게 간식으로 드리면 좋아하실 거예요.”
“하하, 어르신들 드시라고 블루베리는 넉넉하게 가져왔어요. 대신 은주 씨가 나중에 맛은 괜찮은지, 드시고 불편한 곳은 없는지, 블루베리를 드시고 좋아지신 곳이 있는지 그런 것 좀 확인해 주실 수 있죠?”
“그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니까, 일종의 신상품 테스트네요?”
“하하, 그런 셈이죠. 트럭에 많이 싣고 왔으니까. 일단 노인회관으로 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