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편안한 연꽃 열매(2) (25/183)

42화. 편안한 연꽃 열매(2)

“아버지, 뭐 하세요?”

주말에 시골에 있는 부모님의 과수원에 내려갔다. 아버지는 고목에 줄을 걸고는, 이리저리 당기고 계셨다.

나무 밑동을 보니, 톱으로 깊게 베여 있는 모양이 마치 연필을 깍아서 꽂아 놓은 것 같은 모양이었다.

“나무를 자르시게요?”

“그래, 나무가 죽어서 고목이 되어 버렸어, 과수원에서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데 베어 치워야지.”

“아버지도 참, 이런 일은 사람 사서 하시죠. 나무가 꽤 큰데,”

“허허, 이 녀석, 아니 이만한 일도 사람 사서 할 거면 과수원은 왜 하니?”

“이리 나오세요, 제가 해볼게요.”

아버지는 나무 밑동을 어느 정도 베어내고는 나무가 쓰러져 덮칠까 봐, 나무 위에 줄을 걸어 멀리서 당기고 계셨다.

연필처럼 깍여 나가서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의외로, 나무의 목질은 질긴데가 있어서 좀처럼 쓰러지지 않고 있었다.

“제가 옆에서 밀어 볼게요.”

“위험해, 멀리서 줄을 당기는 게 낫다니까.”

“나무가 안 쓰러지니까 그러죠.”

진석은 보다 못해 나무 옆으로 다가가 팔과 어깨로 나무 기둥을 밀기 시작했다.

‘우지끈’ 하는 소리와 함께. 그제서야 고목이 넘어갔다.

“아이고, 고생했다. 사업하느라 힘든 아들을 오자마자 이런 일이나 시키고 말이야. 허허.”

“이게 뭐 일인가요? 나무는 저 구석으로 옮길까요?”

“같이 하자, 혼자서는 무거워.”

진석과 아버지가 앞뒤로 나무 기둥을 들어올렸는데 진짜 아버지 말대로 상당히 무거웠다.

“이런 건 일꾼들 시키면 간단한데.”

“일꾼이 어디 따로 있니? 아버지가 일꾼이지.”

“아버지 어쨌든 힘든 일은 이제 그만하세요. 용돈도 제가 넉넉하게 드리잖아요. 부족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시고요.”

“아이고, 돈은 이제 그만 보내라, 너 또, 천만 원 보냈더구나.”

“아버지도 돈 좀 쓰고 사세요.”

“시골에서 늙은이가 돈 쓸 일이 뭐가 있냐?”

“그래도 필요한데 쓰세요. 동네 어른들에게 한턱내셔도 되잖아요.”

“허허, 시골 사람들끼리 서로 상부상조하며 사는 동네라, 여기서 돈 자랑하고 그런 것도 별로다.”

“알았어요. 아버지한테는 못 당하겠네요. 엄마는 잘 계시죠?”

“그래, 엄마야 늘 잘 있지. 요새는 진석이 네가 주는 용돈에, 꿀에, 인삼에 점점 더 건강해지는 것 같더구나.”

“그래요? 다행이네요.”

“너, 그런데, 아까부터 들고 있던 자루는 뭐냐?”

“아, 이거요? 연자육이라고 아세요?”

“연자육? 연꽃 씨앗 말이냐?”

“맞아요.”

진석은 자루에서 연자육을 한 움큼 쥐어 꺼내 보였다.

“어디서 난 거냐? 사온 거야?”

“아뇨, 뭐, 아는 사람한테서 좀 받았어요. 저랑 같이 일하는 사람인데. 농사도 짓고 그래요. 연못 그런 데서 수확한 건데, 좀 가져와 봤어요.”

“연자육도 좋지. 너, 그거 먹을 줄은 아냐?”

“글쎄요. 뭐, 차로도 마시고 그런다고 들은 것 같은데.”

“예전에 알던 스님이 연자육을 가루를 내서 차로 드시더라고. 별다른 거 없이 물에 타면, 연자육 차가 되는 거야. 간단하지?”

“가루요?”

***

카페 오아시스 건국대점

“휴우 덥기는 덥군.”

건국대 입구에 자리 잡은 북카페 오아시스 건대점은 젊은 대학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방학인데도 대학생들이 더 많은 것 같은데.”

유민지는 카페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었다. 캣타워 주위에는 고양이들이 낮잠을 여유롭게 즐기고 있었고, 80년대 풍의 시티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장님도, 요즘, 대학생들이 방학이 어디 있어요?”

“하긴, 다들 취업난에 방학에도 도서관이 만원이라면서?”

“그럴걸요, 이 근처에 다 대학생만 있는 건 아니겠지만 요새 젊은 사람들 스트레스가 많잖아요.”

서울 여기저기 핫플레이스마다 하나씩 오픈한 북카페가 벌써 30개 가까이 되고 있었다. 부산이나 인천에도 분점들이 늘어나고 말이다.

“장사는 잘되고 있는 건가?”

“사장님이 강조하시는 게, 항상 그거잖아요. 카페지만, 커피나 음료를 팔지 말고, 책과 함께 시간과 공간을 팔아라, 이런 거요.”

“잘 지켜지고 있는 거야?”

“보시다시피요. 절반 정도는 주문은 안 하고, 시간 때우러 온 사람들이에요. 아니면, 전날 밤에 술 마시고 놀다가, 여기서 졸고 있는 사람들도 있고요.”

“괜찮아, 돈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우리는 다른 방식으로 이익을 보고 있으니까.”

진석은 북카페를 한 번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설치된 캣타워에는 고양이들이 올라가서 낮잠을 즐기고 있었다. 더러는 꼬맹이들에게 잡혀서 시달리는 녀석들도 있었다.

한두 마리씩 키우던 고양이들은 계속 숫자가 늘어났다. 진석이 데려온 녀석들도 있고, 북카페 오아시스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것이 유명해지자, 갈 곳 없는 고양이들을 부탁하는 사람들도 늘어나서, 이래저래 고양이들은 계속 늘어난 것이다.

그중에 상당수는 공간으로 진석이 데려가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공간과, 북카페 오아시스 모두 고양이들의 천국이 되어 가고 있었다.

“민지 씨, 고양이들은 어때? 어째, 점점 고양이 카페가 되어 가는데.”

“아이들이 좋아해요. 고양이랑 놀다가 그림책도 보다 가기도 하고.”

캣타워 옆에는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코너도 따로 마련해 놓고, 작은 의자와 테이블이 있는 키즈존을 설치했다. 사실, 캣타워는 변형된 시간 포집기였다. 주로 책 읽는 것을 싫어하는 아이들과, 젊은 여성들의 시간을 포집하기 위해 그 모양을 변화시킨 장치였다.

고양이들이 사람들을 캣타워로 유인하면, 타워의 포집기가 사람들의 시간과 상상력을 흡수하는 시스템이었다.

어른들처럼, 아이들의 상상력과 시간도 공간을 만드는 중요한 원천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유민지는 홍대 본점을 운영하면서 틈틈이 서울의 다른 카페들을 점검하러 다니고 있었다. 진석도 유민지를 따라 건대점을 찾아온 것이다.

“여기는 뭐가 잘 나가?”

“요새는 더워서, 흑당 버블티가 인기예요. 더위에 지쳤을 때는 달달한 게 최고죠.”

“그래? 그거 버블티에 다른 재료를 넣어도 괜찮을까?”

“어떤 재료를 넣으시려고요?”

“연자육이라고 알아? 연꽃 열매인데 스님들이 즐겨 드신다고 하더라고.”

“연꽃 열매요? 어떻게 생긴 건데요?”

“생긴 건, 큰 콩같이 생긴 건데, 가루를 내서 차로 마시면 좋다고 하더라고. 내가 좀 가져왔거든.”

진석은 들고 온 가방에서 연자육 가루가 들어있는 통 두 개를 꺼냈다. 연자육은 껍질을 까면 흰색에 가까운 열매가 나오지만, 가루를 낼 때는 껍질째 갈아도 무방하다고 했다.

약간 검은빛이 도는 가루는 오아시스의 물가에서 키운 것이고, 보라색이 감도는 것은 공간의 산에서 재배한 연자육이었다.

같은 검은색 씨앗을 뿌렸는데, 신기하게도 산에서 키운 것은, 밝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역시나 공간의 산에 흐르는 에너지의 영향을 받아 뭔가 다른 빛깔을 내고 있었다.

“약간 색깔이 다르네요.”

“음, 맛도 검은색은 미숫가루 같은 느낌이고, 보라색은 커피처럼 쓴맛인데.”

두 가지 연자육 가루는 맛도 확실히 다르게 느껴졌다. 진석은 가루 맛을 보고, 물에 살짝 타서도 먹어도 보았다.

“민지 씨, 이걸로 버블티를 만들어 볼까?”

“진짜로 만드시게요?”

“그래, 어디 보니까, 홍삼을 넣은 버블티도 있던데, 연자육 버블티도 괜찮지 않아?”

“뭐, 몸에 좋은 거라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해요. 그런데 어디에 좋다는 거죠?”

“스님들이 먹고 마음이 평온해진다고 하더라고, 심장에도 좋고, 화병 다스리는 데도 쓰인다니까. 스트레스 해소가 된다고 할 수 있지.”

여름에 잘 나간다는 흑당 버블티에 연자육 가루를 섞어 보았다. 단맛이 강해서 그런지, 공간의 산에서 재배한 쓴맛이 나는 보라색 연자육 가루가 더 잘 어울리는 느낌이었다. 쓴맛과 단맛의 대비가 묘하게 달콤하면서도 뒷맛은 깔끔한 느낌을 주는 것이었다.

“저는 이게 더 맛있는 거 같아요.”

주방에 부탁해, 두 종류의 연자육 흑당 버블티를 만들어 와서, 유민지와 같이 맛을 보았다.

“나도 보라색 가루가 들어간 게 더 입에 맞아. 뒷맛이 더 깔끔한 것 같아.”

“그럼, 이걸로 신메뉴는 결정인가요?”

***

엔시스 테크 본사.

도성준이 은퇴를 하고, 강민호가 이제는 엔시스의 사장 겸, 연구팀장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난번에 부탁한 장미사과 추출물은 어떻게 됐습니까?”

“예, 상당히 긍정적인 결과입니다. 샘플로 주신 장미사과에서 얻은 추출물 중에, 독특한 기능을 하는 몇 가지 물질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연히 아토피에도 효과를 보이고 있고요.”

“그러면, 건강 보조식품은 쉽게 만들 수 있는 거겠군요?”

“예, 사실은 장미사과의 추출물로 분말 형태의 스틱 시제품을 하나 만들어 봤습니다.”

강민호는 커피 스틱처럼 생긴 걸 내밀었다.

“한 번 맛을 보시죠.”

손으로 쉽게 컷팅이 되는 방식이었다. 스틱을 뜯으니, 향긋한 사과 향기가 나는 분말 가루가 들어있었다.

“그냥 드셔도 되고 물에 넣어서 마셔도 좋습니다. 아토피 환자들 주에 아이들이 많다는 걸 고려해서 먹기 좋은 분말 스틱으로 만들어 봤는데 이진석 사장님 생각은 어떠신가요?”

“좋은 아이디어네요.”

진석은 분말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약간 새콤한 맛이 났고, 설탕도 조금 들어갔는지 단맛도 느껴졌다.

“좀 달기는 하지만, 아이들 입맛에는 딱 맞겠는데요.”

“아마, 그럴 겁니다.”

“일단, 기존에 장미사과를 공급하던 아토피 환자들에게 제공해 보고, 효과에 큰 차이가 없다면 대량으로 생산하는 걸로 하죠.”

“알겠습니다. 일단, 테스트용으로 생산을 해두겠습니다.”

***

“지영 씨라고 했죠?”

전에는 유민지랑 같이 왔었지만, 오늘은 진석 혼자 북카페 오아시스 건대점을 찾았다.

“연자육 버블티는 반응이 괜찮은 편인가요?”

“연자육 버블티요? 아, 흑당 연꽃 버블티 말씀이시군요?”

원래는 연자육 버블티로 하려고 했지만, 손님들이 연자육이라는 말을 잘 몰라서, 설명하는 게 귀찮아 메뉴 이름을 바꾸었다고 했다.

“괜찮은 거죠? 사장님, 제멋대로 이름을 바꿔서 죄송해요.”

“아, 아니에요. 지영 씨. 새 이름이 더 멋있네요. 흑당 연꽃 버블티라? 연꽃 버블티가 더 그럴 듯 하네요.”

김지영은 20대 후반 정도의 지적인 느낌의 여자였다.

“아무튼, 연꽃 버블티는 사람들이 꽤 좋아하는 것 같아요.”

김지영 말로는 원래 인기가 있던, 허니 스트로베리 스무디 이상으로 인기가 있다고 했다.

“딸기 스무디는 먹고 나면 기운이 나고 그런 편인데 연꽃 버블티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떤 점이요?”

“저기 보세요.”

김지영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캣타워 앞의 소파에서 어떤 남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저분처럼 연꽃 버블티를 마시고, 저렇게 조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래요? 뭔가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주나 보군요?”

“맞아요. 사장님, 저도 몇 번 먹어봤는데, 몸이 좀 나른해지는 느낌이었어요.”

“축 처지는 느낌 그런 건가요?”

“뭐, 처진다, 그런 건 아니고요. 기분이 상쾌하고 릴랙스 되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아무튼, 연꽃 버블티를 마시고 나면, 몸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요, 그럼, 나도 한 잔 부탁해요.”

진석도 흑당 연꽃 버블티를 맛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맛을 음미하다가, 쭈욱 들이키자 크게 한숨이 새어 나오며, 몸에 긴장이 천천히 풀려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떠세요? 맛이?”

“좋은데요, 아주 훌륭해요. 좀 달지 않을까 했는데, 보라색 연자육에 쓴맛이 있어서 그런지 뒷맛이 깔끔하네요.”

“그럼, 합격인가요?”

“하하, 물론 합격이죠.”

연자육의 효과인지 버블티를 마시고 나자 몸이 나른해지기 시작했다.

“휴우...”

깊게 호흡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진석은 자신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호흡과 동시에 몸이 더 깊게 릴랙스 되는 느낌이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이 차분해지고, 심장도 편안해져서 호흡이 한결 편하고 부드러워진 느낌이었다.

“지영 씨, 아주 훌륭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