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대홍수(2)
대홍수(2)
비가 내리고 있었다. 며칠째 계속 쉬지 않고 내리는 느낌이었다. 그동안 축적된 수증기들이 한꺼번에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오늘도 비가 많이 오는군요.”
창고 앞쪽에 진흙으로 만들어진 건물은, 계속 내리는 비와 범람한 강물에 휩쓸려, 완전히 붕괴된 모습이었다.
“그래도 다행입니다. 공간주님, 창고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비를 피하기에는 딱이죠.”
“아직 전기 쪽은 이상 없는 모양이군? 사령관.”
저온 창고는 선선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강이 범람한 것 같지만, 수력 발전소에는 별문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비가 오는 것도 나쁘지는 않군요.”
“태평한 소리를 하는군. 저걸 보라고.”
진석은 창고 앞쪽에 무너져내린 진흙 건물을 가리켰다.
“저건, 나중에 복구를 하겠습니다. 비가 그친 후에 말입니다.”
창고 안에는 수백 명의 일꾼들이 모여들어 비를 피하고 있었다. 다른 일꾼들도 창고나 숙소 건물, 체육관 등에서 비를 피하고 있었다.
“비는 그치겠지만 말이야. 앞으로는 자주 비가 내릴 거야. 갑자기 소나기가 내릴 수도 있고. 우기가 되면, 한 달 내내 비가 올 수도 있지.”
“비가 오는 기간에는 휴식을 취하면서 정비를 한다거나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사령관, 이제 모래와 진흙의 시대는 끝났어.”
“무슨 말씀이십니까? 공간주님.”
“말 그대로야, 이 비가 그치고 나도, 전과 같아질 수는 없다는 말이지.”
진석의 말에, 사령관은 조금 당황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생각해봐야겠지, 새로운 환경에 어떻게 적응을 할 것인가 말이야. 아무튼, 전에 하던 방식으로는 안 된다고.”
당장, 강물이 범람하고 있었지만, 비가 내리는 중에는 어떤 작업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진흙 인간들은 물에는 취약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할 일이 많은데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죄송합니다. 비가 오는 중에는 꼼짝도 할 수 없어서..”
“아냐, 죄송하기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다들 모두 무사한 거지?”
“공간주님이 비가 내리기 전에, 대피 명령을 내리신 덕분에, 다들 안전하게 피신했습니다. 외부 작업을 하던 인원은 대피 명령이 없었으면 꼼짝없이 비를 맞고 녹아버릴 뻔했습니다.”
“그래, 당분간은 이렇게 숨어 지내는 수밖에 없어.”
대기 중에 응축된 수증기의 양이 너무 많아서, 공간에 처음으로 내린 비는 앞으로도 며칠 더 계속 쏟아져 내려야 했다.
사실, 비가 내리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달라진 환경 속에서 공간에서 하던 여러 작업들을 진흙 일꾼들이 전처럼 수행할 수 있느냐 하는 걱정이 있었다.
진흙과 모래 인간들은 물에는 아주 취약하기 때문이다.
상태창이 열렸다.
- 고민거리가 있으십니까?
“아, 일꾼들 말이야. 비가 내리니까,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다들, 창고나 건물들에 숨어서 비가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고.”
-진흙 인간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죠. 한계에 도달한 거니까요. 노력으로 넘어설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한계라? 그 한계를 넘을 수는 없는 건가? 우비를 입고, 장화를 신고, 그러면 되는 게 아닐까?”
-직접적으로 비를 맞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 습한 환경이 되면 진흙으로 된 피부가 물러져서, 서서히 붕괴가 일어날 수 있죠.
진석은 상태창의 말에, 창고를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몇몇 일꾼들은 피부에 문제가 생기고 있었다.
“사령관, 저 일꾼들은 왜 저러는 거지? 팔이 녹은 것 같은데? 비를 맞은 건가?”
“습기 때문인지, 다들 피부에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저도, 약간, 이렇게 다리 쪽이 조금 흘러내리고 있는데.”
사령관은 자신의 다리를 보여주었다.
“이런 큰일이군.”
“공간주님, 이렇게 비는 피하고 있지만, 습기 때문에 다들 고생을 하고 있습니다. 비는 언제까지 내리는 겁니까?”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어, 대기가 안정을 찾으려면. 수증기가 다 배출되어야 하니까. 사령관, 일단, 앉아서 쉬고 있으라고,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게 말이야.”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다들, 큰일이군. 아무래도, 이제 진흙과 모래인간들은 한계에 도달한 건가?”
-공간주님, 이제 기상현상이 일어나는 공간에는 진흙 인간들은 적합하지 않습니다. 리스크가 너무 크죠.
“하지만 어쩌라는 거야? 진흙 일꾼들 외에 무슨 대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진흙 일꾼들에게는 새로운 적응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적응? 몸을 새로 만들라는 말인가? 진흙으로 말이야?”
-공간주님 모든 것은 공간주님의 상상력에 달려 있습니다.
“상상력이라고? 나의 상상력에 달린 일이라는 말인가?”
일꾼들을 비로부터 보호할 방법이 있을까? 비옷 같은 걸 입으면 되겠지만, 그마저도 완전한 습기로부터의 방수는 기대할 수 없다.
“상상력이라?”
비, 비가 오는 풍경을 떠올려 보았다.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 한 소녀와 소년이 길을 따라 나란히 걷고 있다.
그리고 내리는 갑작스러운 소나기, 소년은 비에 놀란, 소녀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선가 커다란 연꽃잎을 가져오는데...
연꽃잎은 신기하게도 비에 젖지 않아서, 커다란 연꽃잎을 소년과 소녀는 우산처럼 쓰고 비가 오는 길을 다시 걷는다.
“연꽃잎?”
-연꽃잎 말씀이십니까?
“연꽃잎은 물에 젖지 않잖아? 왜 그런 거지?”
-그것은 연꽃의 특성입니다. 언뜻 보면, 매끄러운 표면 같지만, 나노 분자 수준의 작은 돌기들이 잎에 돋아있죠.
“돌기라고? 그게 물에 젖지 않는 것과 무슨 상관이야?”
-그것은 사이즈의 문제입니다.
“사이즈?”
-연꽃의 돌기는 나노수준의 작은 크기이고, 이것은 물방울 분자의 크기보다 더 작습니다. 쉽게 말해서, 물방울이 축구공이라면, 연꽃잎의 돌기는 축구화의 스터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스터드라면, 축구화 밑에 돌기를 말하는 거지?”
-그렇습니다. 원래, 스터드는 비가 많이 오는 영국에서 개발된 것이죠. 스터드가 물에 젖은 잔디 표면과 축구화 바닥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들어 주기 때문에, 잔디의 물기에 미끄러지는 것을 방지하는 거죠.
“음, 그게 그런 원리군?”
-마찬가지로, 축구공을 뒤집어 놓은 스터드에 올려놓으면, 공과 축구화의 바닥은 닿지 않겠죠. 연꽃의 돌기도 그런 원리로, 물 분자보다 더 작은 돌기가 촘촘하게 표면에 돋아 있기 때문에 그 돌기에 막혀서 물 문자가 연꽃잎 표면에는 도달하지 못하고 미끄러져 내리는 것입니다.
“아, 맞아. 연꽃잎에 물을 뿌리면, 물방울이 모여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걸 본 적이 있어.”
-맞습니다. 연꽃잎은 천연의 방수기능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작은 나노 돌기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잠깐, 그러면, 진흙 일꾼들에게도 그런 방수 돌기를 만들 수는 없는 건가?”
-방수 돌기를 말입니까? 물론, 공간주님은 공간에서 모든 형태를 지배하실 수 있기 때문에 나노 수준의 작은 형태라도 공간주님의 지배력으로 그 형태를 변경할 수 있습니다.
“그럼, 연꽃처럼, 나노 돌기를 진흙 인간들에게 만들어 주면, 물 문자가 침투하지 못할 거 아니야?”
-저의 계산으로는 충분히 가능합니다.
“가능하다니? 결과는 해봐야 안다는 건가?”
-100%의 확률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어차피, 다른 방법은 없었다. 공간에서 작물 재배와 중요한 업무를 도맡아서 하고 있는 일꾼들이 사라진다면, 공간은 그 의미가 없어지는 일이었다.
“좋아, 결과는 모르겠지만, 일단, 도전을 해보는 수밖에.”
-그렇다면, 진흙 인간들에게 방수 돌기를 만들어 보겠습니다. 방수 돌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간주님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머릿속으로 돌기의 이미지를 상상해 주십쇼.
“돌기의 이미지를 상상하라고 그건, 아주 작은 거라면서? 눈에도 안 보이는?”
-크기는 제가 조정할 겁니다. 공간주님께서는 그저 돌기의 형태를 이미지로 상상하시면 됩니다.
진석은 머릿속으로 진흙 인간의 피부 위로, 돋아날 돌기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것은 길고 뭉뚝한 촉수 같은 모습들이었다.
-공간주님, 돌기의 이미지를 스캔했습니다. 이제 진흙 인간들의 표피 위로, 나노 입자 수준의 미세 돌기를 만들겠습니다. 진흙 인간들의 피부에 미세 돌기를 생성하는 데는 5천 시간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미세 방수 돌기를 생성하시겠습니까?
“그래, 미세 방수 돌기를 생성해 줘.”
- 미세 돌기의 생성이 진행 중입니다. 생성이 완료되었습니다.
“뭐지? 아무 일도 안 일어난 것 같은데. 뭐가 변한 건가?”
-미세 방수 돌기는 나노 입자 수준의 작은 크기입니다. 대지에 산이 생성되는 것처럼, 진흙 인간의 표면 위로, 돌출되는 부분이 형성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산과는 달리, 아주 미세한 미시 세계의 일이기 때문에 큰 변화는 인식하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래, 아무튼, 돌기가 생겼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저의 계산이 맞다면, 돌기 형성으로 진흙 인간들에게 방수 기능이 생겼을 확률이 99% 이상입니다.
“아직 1%로는 모른다는 말이겠군. 좋아, 백문이 불여일견. 백견이 불여 일행이라고 했지. 직접 테스트를 해보는 수밖에.”
진석은 창고 안을 둘러보았다.
노블리스 오블리주,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는 프랑스 말이다. 누군가 위험한 일에 앞장을 서야 한다면, 당연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
“사령관...”
“예, 공간주님.”
“뭔가 변한 걸 모르겠나?”
“뭘 말입니까?”
창고 구석에 앉아 쉬던, 사령관은 영문을 모르겠다듯 되물었다.
“내가 창조의 스킬을 이용해서 진흙 인간들에게 방수 돌기를 만들었어.”
“방수 돌기라뇨? 그게 뭘 말하는 겁니까?”
“사령관, 그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미세한 돌기라네, 물 분자보다 작은 나노 돌기를 말하는 거지, 아무튼, 물 분자보다 작은 돌기들이 사령관의 진흙 피부 위로 돋아나서, 이제는 빗방울이 떨어져도 돌기가 방어막 역할을 해준다는 말이야.”
“공간주님, 그 말은 물에 젖지 않는다는 말인가요?”
“그래, 아마도 99%의 확률로 방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지.”
“99%요?”
“나머지 1%는 아직, 미지수라는 말이야. 직접 실험을 해보기 전까지는 말이야.”
“그럼?”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는 말을 아나?”
“무슨 말씀이신지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제가 대표로 실험해 보라는 말이군요.”
“그래, 사령관, 자네는 내가 아는 최고의 진흙 인간이야, 가장 뛰어나고, 똑똑하고, 용맹한 진흙 인간.. 그리고 아마도 별일은 없을 거야. 자, 고민 할 거 없이, 창고 밖으로 나가보라고.”
“저, 만일, 1%의 잘못될 확률이 현실이 된다면..”
“빗물에 녹아버리겠지만, 하하. 설마 그럴 리가 있겠어? 겁낼 거 없다고.”
사령관은 잠시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천천히 비가 내리는 창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창고 밖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고 밖으로 나가서 비를 맞으려는 사령관의 모습에 일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사령관님이 비를 맞으러 나가잖아?”
“괜찮을까? 비를 맞으면, 흙으로 된 몸이 녹는 거 아니었어?”
“공간주님이 괜찮을 거라잖아. 다 생각이 있으시겠지.”
“그래, 무슨 방수 돌기가 생겼다던데, 괜찮으니까. 나가라고 한 거겠지.”
사령관은 성큼성큼 빗속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외마디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아...’
고통인지 환희인지 알 수 없는 기묘한 외침이었다.
“뭐야? 사령관, 몸이 녹고 있는 건 아니지?”
“아닙니다. 공간주님. 비를 맞는 게 너무 기분이 좋아서요. 신기하게 몸이 하나도 젖지 않고 있습니다. 이럴 수가..역시 공간주님의 능력은 대단하십니다.”
“그래, 다행이군. 사령관.”
“와, 역시 공간주님이시잖아. 그럼, 우리도 비를 맞아도 괜찮은 건가?”
“이봐, 모든 진흙 인간들은 방수 돌기가 생겼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밖으로 나가도 돼.”
진석의 말에, 일꾼들은 하나둘, 밖으로 나가 쏟아지는 세찬 빗줄기를 맞기 시작했다.
“와, 정말, 비에 젖지 않잖아.”
“두렵기만 하던 비를 이렇게 맞고 있으니까. 기분 최곤데..”
일꾼들에게 방수 돌기가 생기면서, 공간에 내리는 비의 문제는 해결되었다.
“사령관, 비를 맞으며 즐기는 건, 이쯤하고, 이제 밀린 작업을 시작해야지.”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이제 일단, 댐부터 확인하러 가겠습니다.”
“좋아, 사령관. 밀린 작업들을 시작할 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