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담수와 염수(1)
상태창의 말대로 흙탕물은 점점 시간이 지나며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뿌연 상태가 지속되고 있자, 진석은 시간을 조금 가속시켰다.
시간이 가속되며, 물에서 흙기운이 사라지며 물은 맑은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제야 깨끗해졌군.”
“공간주님, 이게 다 뭔가요?”
“아, 사령관, 이건 바다, 아니, 양어장이야. 물고기들을 키우기 좋은 환경이지.”
“역시, 공간주님은 위대하십니다. 그럼, 지난번에 말씀하신 양어장은?”
“그것도 진행해, 여기는 미네랄이 풍부한 염수 양어장이고, 담수 양어장도 필요하니까.”
“알겠습니다.”
일단 양어장은 만들었는데, 이제는 물고기가 필요했다.
“물고기도 역시 외부에서 들여와야 하는 거겠지?”
-어류를 외부에서 반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 공간주님의 레벨도 많이 올라갔기 때문에, 초급의 생명창조 스킬을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초급 생명창조 스킬이라고?”
-그렇습니다. 원시의 바다는 생명이 창조되기에 최적의 조건입니다. 미네랄과 같은 영양분이 풍부해서, 단세포 생물을 만들기 좋은 조건입니다.
“단세포 생물이라, 그러니까 자기결합 같은 거 말인가? 초화학에서 말하는, 분자들이 자연적으로 결합을 해서 세포를 만들어 내는 거 말이야?”
진석은 도성준 박사에서 들을 말을 떠올렸다.
-자기결합이라? 그런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분자가 외부의 작용 없이 스스로 결합을 해서, 세포로 성장한다는 말이겠죠? 분자라는 건, 스스로 생각하거나 사고하는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스스로 뭘 결합을 한다는 말입니까? 분자에서 세포로 성장하는 건 오직, 공간주님, 그러니까. 신의 의지가 개입했을 때뿐입니다.
“뭐야? 분자들끼리 자연적으로 이어지고 그럴 수도 있는 거잖아, 우연적으로 말이야?”
-만일 우연적인 확률을 말하는 거라면, 로또 1등에 매일 100회 연속으로 당첨될 확률이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흠, 그 정도인가?”
-아무튼, 자연적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건, 시간낭비라는 것을 말해드립니다.
“그럼, 신의 의지는 어떻게 개입하는 거야?”
-단세포 생물의 창조를 원하시는 거라면, 생명창조 스킬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분자로부터, 단세포 미생물인 플랑크톤을 창조하는 데는 5천 시간 포인트가 소모됩니다.
“생명을 창조하면 이 바다에 물고기들이 생기는 건가?”
- 그렇게 생각하셔도 됩니다.
어떻게 할지 잠시 고민이 되었다. 진흙 사령관에게 담수 양어장도 만들라고 지시해둔 상태였다.
그렇다면, 일단, 염수의 바다에서는 생명을 창조해서, 괜찮은 물고기가 나오는지 보고, 담수 양어장이 완성되기를 기다려 보기로 했다.
-생명을 창조하시겠습니까?
“좋아, 해보지 뭐, 생명을 창조한다.”
뭐지, 땅도 흔들리지 않고, 별다른 변화가 없잖아? 물속을 살펴볼까?
진석은 염수 호수로 다가가 안쪽을 살펴보았다. 맑은 물은 속까지 투명하게 보이고 있었지만,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다.
“생명 창조가 이루어지는 거야? 왠지 조용하네. 아직인 건가?”
-아닙니다. 규모가 작은 미시 세계에서 벌어진 일이라, 거대한 진동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조산운동보다 훨씬 엄청난 일이 이미 벌어졌습니다. 공간주님이 생명을 창조하신 겁니다.
“정말? 내가 생명을 창조했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음, 역시 아주 작은 단세포 수준의 생명이 만들어진 것인가?”
-그렇습니다. 수많은 분자들이 복잡한 연결 과정을 거쳐, 하나의 세포가 되었습니다. 비록 공간주님은 그걸 눈으로 보지 못하셨지만, 산의 생성이나 바다의 생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어마어마한 과정이었습니다.
“그래, 이 염수의 바다 어디엔가, 아주 작은 생명의 씨앗이 뿌려졌다는 말이겠군.”
“공간주님, 물속에 뭔가 있는 건가요?”
“어, 사령관, 아직은 아무 것도 안 보이겠지만, 여기서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이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여기서 아마도, 물고기들이 생겨날 거야.”
“물고기 말입니까? 고양이들이 좋아하겠군요.”
“그래, 물론, 고양이들이 좋아하겠지.”
아무래도 이번 일은 한 번에 끝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일단은 좀 쉬고, 생명을 본격적으로 진화시키는 일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오아시스의 저택으로 돌아오자, 고양이들이 야옹거리고 있었다. 일단, 깨끗한 물부터 그릇에 따라 주었다.
물을 싫어하는 고양이들이지만, 고양이들에게 음수량은 상당히 중요하다. 물을 주자, 목이 말랐는지 고양이들은 물을 핥아 먹기 시작했다.
조금 쉬다가,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다음날은 사령관과 테니스를 좀 치고 빈둥거리며 야자수 사이에 걸어둔 해먹에서 꾸벅꾸벅 조는 걸로 하루를 보냈다.
그리고 다음 날,
“음, 오늘은 본격적으로 바다에서 작업을 해야겠군.”
일단, 바다의 시간을 천년 정도 가속해 보았다.
“뭐지? 달라진 게 없잖아?”
-농작물을 키우는 것과는 많이 다릅니다. 지금 원시의 바다에 있는 것은 작은 단세포 플랑크톤 정도니까요. 그들에게는 성장이 아니라, 진화가 필요한 거죠.
“천 년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거군?”
진석은 이번에는 1만 년의 시간을 가속했다. 시간을 가속하는 것은 진석의 고유의 힘으로, 1만 년의 시간이라고 해도, 불과 몇 분만에 가속이 가능했다.
하지만 1만 년 단위의 시간을 계속 가속해도, 아무런 변화도 찾을 수가 없었다.
“뭐지? 대체 시간을 얼마나 가속해야 하는 거야?”
-공간주님, 창조의 과정에 대한 정보는 따로 드릴 수 없지만, 공간주님이 사시던 지구의 과학 연구 결과를 조금 소개해 드리자면, 단세포의 생명체가 나타난 것이 대략 19억 년 전이고, 그로부터 다세포 생명이 나타나기까지의 기간을 대략 13억 년이 지난 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3억? 억 년이라고?”
역시 단위 자체가 틀렸던 모양이었다.
“한 번에 시간을 얼마까지 가속할 수 있는 거지?”
-한 번에 가속할 수 있는 시간은 원칙적으로는 무한대지만, 안정성을 고려해서, 백만 년 이상은 권해드리지 않습니다.
원시의 바다에서 생명을, 아니, 물고기를 창조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공간주님, 양식장 공사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크기는 어느 정도로 만들면 될까요?”
“아, 사령관, 민물 양식장 말이군. 그거라면, 이 호수 정도면 될 것 같은데, 비슷한 사이즈로 말이야.”
“예, 곧바로 작업에 들어가겠습니다.”
사령관은 일꾼들을 데리고 민물 양식장 공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진석은 염수의 호수에서 지루한 시간 가속 작업을 반복했다.
***
“아, 더는 못 하겠다. 바다의 시간을 얼마나 가속한 거지?”
-이제 겨우 7억 년이 지났을 뿐입니다.
보통은 공간에서는 편하게 쉬다가 가는 편인데, 이번에는 좀 지겨운 느낌이었다.
“그래, 이건 좀 나중에 하자고, 난 밖에 나갔다 올게.”
***
공간의 문이 열리고, 진석은 스카이 캐슬 레지던스의 거실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내려다보이는 한강은 날씨가 좋아서 빛이 산란이 되는 건지, 약간 뿌옇게 보이고 있었다.
포근하고 좋은 날씨였다. 한강 다리를 지나는 장난감 같은 자동차들의 움직임도 왠지 진석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진석은 나른한 기분을 느끼며 소파에 잠시 누웠다. 살짝 잠이 들려는데..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도성준입니다.”
“도 박사님이 무슨 일로?”
“성공입니다.”
“예?”
“넥타르의 FDA 승인이 떨어졌습니다.”
“정말요?”
진석은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지금껏 준비는 하고 있었고, 성공에 대한 확신도 어느 정도 하고 있었지만, 진짜 FAD 승인이 났다는 말을 듣자, 비로소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실감이 나고 있었다.
“수고하셨습니다. 도성준 박사님, 다 박사님과 여러분의 도움 덕분이죠.”
“가장 큰 일을 하신 건, 이진석 사장님이죠.”
“하하, 그런가요? 일단 축하라도 해야겠네요. 와인이라도 한잔 하시죠.”
“와인요? 지금은 일이 좀 많아서.”
“하하, 알겠습니다. 생각이 짧았네요. 우리도 준비를 해야겠죠.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는 거니까요. 축배는 나중에 들기로 하죠.”
***
그 후로 두 달간은 정신없는 시간들이 계속되었다. 미국으로 출장을 갔다가, 유럽에도 다녀오고 인터뷰 요청도 쇄도하고 청와대 만찬에 초대되기도 했다.
“이진석 사장님과 도성준 박사님, 두 분이 엄청난 일을 하신 것 같군요.”
장태민 대통령을 실물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만찬이 진행되고 있었다. 주로 재벌 그룹의 오너들이 초대된 경제인 초정 만찬이었는데,
젊은 사업가로는 유일하게 진석이 초대를 받은 것이었다.
“아직, 사업 초기라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하하, 겸손이 지나치시네요. 외국에서는 제이에스 바이오가,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이라는 인식이 있을 정도인데.”
재계 서열 2위인 태성 그룹의 김한영 회장은 덕담인 듯, 말을 건냈다. 김한영 회장은 전형적인 재벌 3세 경영인으로 아직 40대 후반의 젊은 나이였다.
오늘 청와대 만찬에 초대받은 기업가들은 재계 순위 10위권 기업들의 총수들이었다. 당연히 진석이 낄 자리는 아니었지만, 최근에 넥타르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고, 장태민 대통령이 미래산업으로 생명공학을 강조하는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재벌 그룹에도 생명공학 투자를 권유하는 의미로 진석과 도성준을 초대한 모양이었다.
“독일에 갔다 오셨다면서요? 최근에.”
“예, 바이엘과 투자문제로 협의를 하러 갔었습니다.”
“바이엘은 아스피린으로 세계적인 대기업이 되었죠, 축구단도 유명하고요.”
“그렇다고 하더군요. 제약 분야에서 독보적인 기업이고, 모기업이 성공하면서 축구나 각종 스포츠에도 많이 투자를 한 모양입니다. 바이어 04 레버쿠젠 축구단의 모기업이기도 하죠. 이런저런 투자로 지역 경제도 좋아지고요.”
“하하, 듣고 보니, 아주 좋은 사례네요. 벤처 기업이 성장해서, 수출도 많이 하고 스포츠나 문화예술에도 투자하고, 지역과 공생하는 관계는 아주 바람직합니다.”
대통령은, 주위를 둘러보며 다른 대기업 총수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말했다.
만찬장은 시종일관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다. 정치인과 기업가 사이의 입장의 차이가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느낌이었다.
“다들, 노력하시는 건 알겠지만 혁신하지 않으면 후발주자들에게 자리를 빼앗기는 법이죠. 여기, 이진석 사장님이 아직은 재계 10권에도 못 들지만 세상 일은 모르는 법이니까요. 다음에는 특별 게스트가 아니라, 정식으로 초대를 받을지도 모르죠.”
대통령의 말에, 어색한 미소가 감돌았다. 생각하기에 따라, 10대 그룹 중에서 진석에게 밀리는 기업이 나올 거라는 말이니 말이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다음 만찬에도 이진석 사장님을 보게 되면 좋겠네요. 그런 의미에서 건배나 하죠.”
김한영은 어색한 분위기를 깨려는 듯, 먼저 잔을 들었다.
***
“천천히 좀 달려요.”
하늘색의 람보르기니는 굉음을 내며 도산대로를 달리고 있었다.
“천천히 가는 중이에요.”
“그래요? 소리가 엄청난데요.”
“계기판을 보세요. 그저 소리만 요란한 거라고요.”
최진아의 말대로,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최진아가 운전하는 람보르기니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달리고 있어서, 소리만 들어서는 엄청나게 폭주하는 느낌이었다.
거기에, 뭔가 팝콘을 튀기는 것처럼, 투타탁 거리는 소리가 엔진에서 들리고 있었다.
“엔진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닌가요? 소리가 이상한데요?”
“걱정할 거 없어요. 잔유가 연소되는 소리예요. 원래, 저런 소리가 나는 거라고요.”
“그래요? 폭발하는 소리가 같은데요.”
“기름 찌꺼기가 연소되는 거니까, 폭발은 폭발이죠.”
최진아는 넥타르의 FAD 승인을 축하하겠다며 진석을 불러냈다. 자기가 대접하는 거니까. 자기 차로 가자며 그녀가 타고 온 것은 하늘색의 아주 예쁜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라는 차였다.
“이 차는 생긴 것도 엄청 특이하고, 소리도 엄청 튀는데요.”
“전 연예인이잖요. 평범한 건 안 어울린다고요. 저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요란하고 튀는 소리를 내며 살 거든요.”
“시사 프로그램 진행한 때는 굉장히 차분하시던데. 다른 모습이네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는 법이죠. 자, 다 왔어요.”
진아는 차를 골목으로 몰고 가더니, 식당 앞에 멈추어 세웠다.
“여기는 어디죠?”
“자주 가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에요. 아주 분위기가 좋아요. 오늘은 맛있는 이태리 요리와 고급 와인으로 우아한 저녁을 대접하려고요.”
최진아는 람보르기니를 몰 때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럼, 기대해 볼까요.”
진석은 최진아와 함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