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신들의 음료(2)
“약속을 지키셨네요.”
유민지에게 여의도 근처에 북카페 오아시스 분점을 오픈하자고 했고, 미국에 진석이 다녀온 사이에, 유민지는 임대할 건물을 알아보고 있었다. 다행히 조건이 맞아, 진석의 최종 승인을 받아 여의도 분점을 오픈하게 된 것이다.
위치는 방송국 바로 앞쪽이었다. 따로 연락을 한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최진아가 찾아왔다.
“어떻게 아신 거죠?”
“어떻게 알기는요. 방송국 입구에 떡하니 카페를 오픈했는데, 당연히 눈에 띄지 않겠어요.”
“하하, 그런가요. 뭐, 최진아 씨 부탁도 있었고, 그게 아니더라도 여의도에 북카페를 오픈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미국에 가셨던 일은 잘되신 건가요?”
최진아는 진석이 미국에 출장 갔었던 일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카페 오픈한 거는 지나가다 보고 알았다고 해도, 미국에 갔던 건 어떻게 안 겁니까?”
“사실은 태준 오빠에게 들었어요.”
“태준? 서태준 씨 말인가요?”
서태준과는 스카이 캐슬을 오고 가며 자주 보는 사이였다. 특히 아침에 레지던스 전용 식당에서 자주 마주치게 되는 일이 많았는데, 아침으로 토스트를 먹는 취향도 비슷해서, 같이 합석을 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일도 많았다.
미국에 가기 전에도, 중요한 출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한 기억이었다.
“예, 맞아요.”
“그러고 보니, 두 분은 친분이 있겠네요. 같은 탤런트 계통이니까.”
“맞아요, 태준 오빠랑은 꽤 친해요. 오빠한테, 진석 씨가 미국으로 출장을 간다는 말을 들었죠. 아마도, 넥타르에 관련된 일이겠죠?”
“후후, 역시 진아 씨는 눈치가 빠르시군요. 맞습니다. 이제 넥타르 개발도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으니까요. 미국 뉴욕대학 의과대학과 공동으로 넥타르에 대한 임상실험을 진행 중입니다.”
“그러면, 곧 좋은 소식이 들려오겠네요?”
“그러면 좋겠지만, 신약 개발이라는 게, 로또와 비슷하죠. 엄청난 성공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지만, 확률적으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희박한 확률이라도 누군가는 복권에 당첨되잖아요?”
“물론 그렇기는 합니다.”
생각해 보니, 진석은 800만 분의 1의 확률이라는 로또에 이미 당첨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제 또 다른 로또 당첨을 기다리는 셈이었다.
***
공간에 말이 생기면서, 진석은 다른 동물들에게도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평소에 키워보고 싶었던 건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인간과 함께 했어요.”
“고대 이집트 말입니까?”
집 근처에 고양이 카페가 있었는데, 고양이를 분양한다는 광고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귀여운 인상의 여자가 고양이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었다.
고양이들이 좋아한다는 튜브식 간식이었다.
“와, 정말, 고양이들이 좋아하나보네요. 다들 몰려드는 걸 보니.”
“예, 츄르 하나면, 난리가 나죠.”
모여든 고양이들은 순서대로 간식을 받아먹고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래도, 하나씩 먹고 나서 더 달라고는 안 하네요.”
“고양이들은 그다지 식탐이 있는 편은 아니에요. 물론, 예외적인 고양이들도 있지만.”
“고양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이 키운 모양이군요.”
고양이 카페 앞에는 고대 이집트의 고양이라는 책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충 훑어보니, 고대 이집트 시절부터, 인간과 고양이가 공존했다는 그런 내용이었다.
“사실, 모든 고양이는 이집트 고양이에요.”
“그래요?”
“개와는 좀 다른데, 고대 이집트가 원산지라고 하죠. 마치 인간이 모두 아프리카 대륙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랑 비슷해요.”
“모든 고양이는 이집트 출신이라 재밌는 이야기네요.”
“고양이는 고대 이집트에서는 풍요와 다산의 상징이었죠. 고양이는 바스테르 여신의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신성시되었으니까요.”
“아, 저도 책에서 본 적이 있어요. 풍요와 다산의 여신이죠? 창고의 여신이고요.”
“맞아요. 잘 아시네요.”
“듣기로는 바빌론의 이슈타르도 비슷한 성격의 신이라고 하더라고요. 꿀벌의 여신 이슈타르도 풍요의 다산, 그리고 창고의 신이죠?”
“신화를 좋아하시나봐요?”
“뭐, 책에서 조금 읽은 정도죠.”
“이집트의 바스테르, 바빌론의 이슈타르, 그리고 수메르의 이난나도 이름은 달라도, 비슷한 신화를 가지고 있죠.”
“아, 맞아, 수메르의 이난나도 있었죠.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그런데 고양이를 보러 오신 건가요?”
“아, 분양 광고를 보고요.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한유진이에요.”
“여기 직원이신가요?”
“직원 겸 사장이죠.”
한유진은 귀여운 인상과는 달리 목소리는 성우나 아나운서를 연상시키는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분양을 하는 거면 새끼 고양이인가요?”
“예, 어미랑 같이 데려가셔도 좋고요.”
“고양이가 굉장히 귀엽네요.”
“먼치킨 고양이에요. 사실은, 크면, 지금처럼 귀엽지는 않은데 새끼 먼치킨 고양이들은 정말 귀엽죠.”
“이것도 분양하시는 건가요?”
“예. 하지만, 귀엽다고 가져가서 방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요. 아무에게나 분양을 하지는 않아요.”
“뭐, 저는 집도 넓은 편이고요.”
“재력은 중요하지 않죠. 돈이 많고 집이 넓고, 집에 마당도 있다고 해도, 고양이를 키우는 건 전혀 다른 문제거든요. 고양이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져줄 수 있는냐의 문제라는 거죠.”
“음, 사실은, 북카페를 하고 있어요. 오아시스라고 들어봤나요?”
“북카페 오아시스요? 그거라면 잘알죠. 거기서 일하세요?”
“아, 일하는 건 아니고, 오아시스의 사장입니다. 여기저기 분점들도 있고요. 사실은 집에서 고양이를 키워볼까 해서 와본 건데, 생각해 보니까 고양이를 돌봐줄 사람도 있어야 하고..”
“그래서요?”
“그래서 카페에는 젊은 여직원들이 많으니까요, 한 번 먼저 카페에서 키워보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북카페에서요?”
“제 생각에는 잘 어울릴 것 같은데요. 책과 고양이, 나른한 오후, 보사노바 음악 이런 것들은 꽤나 잘 어울리지 않나요? 그리고, 카페는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이니까, 고양이들을 보러 오셔도 좋고요.”
“북카페라? 여직원들이 많으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하네요. 대신, 나중에 카페에서 고양이가 방치되거나, 손님들이 너무 귀찮게 하는 것 같으면 제가 다시 데려와도 되는 거죠?”
“물론입니다.”
***
북카페 오아시스,
“어머, 이 고양이 어디서 가져오신 거예요?”
“분양받은 거야, 먼치킨 고양이라고 하는데 귀엽지?”
“어머, 세상에. 어쩜 이렇게 귀엽게 생겼지..”
“민지 씨가, 잘 좀 키워 줘.”
“제가요?”
“북카페에서 키워보면 괜찮을 것 같아서 데려왔어. 고양이가 있는 풍경이라는 건 좀 여유롭잖아, 우리 북카페 오아시스 컨셉과 잘 어울린다고.”
“음, 그렇기는 하네요. 아무튼, 이 고양이들 너무 귀여워요. 제가 키울 거예요.”
“마음대로 해.”
***
스카이 캐슬 레지던스, 진석의 집.
아침부터 요란하게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진석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창밖으로 보이는 멋진 풍경..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사장님, 큰일 났어요.”
“수정 씨. 왜?”
“뉴스 좀 보세요.”
“뉴스?”
“지금, TV에 우리회사 기사가 나와요.”
“TV라고?”
“kbc요.”
진석은 거실로 나가, TV를 켰다. TV에서 정규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CNN에서 단독으로 한국 바이오 기업이 혁신적인 당뇨 치료제를 개발했다. 이런 기사를 냈군요.”
“예, 저도, 새벽에 CNN에서 속보를 내보내길래, 깜짝 놀라서 취재를 좀 해봤는데요.”
“사실인가요?”
“예, 저희 kbc 미국 특파원들에게 알아봤는데, 미국 뉴욕대학의 임상실험 결과가 좋게 나와서 미국 FAD 승인이 임박했다. 이런 정보가 미국 쪽에 돌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제이에스 바이오라? 저는 처음 듣는데, 이시영 기자는 들어본 회사인가요?”
“저도, 김영준 앵커처럼, 처음 듣는 회사기는 한데, 다른 기자들에게 물어보니까, 나름 유망한 벤처 기업으로 알려져서, kbc의 시사프로그램에도 출연했었다고 하더라고요.”
“누가요?”
“여기, CEO가, 이진석이라고 젊은 사업가입니다. 그래서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프로에 출연해서, 청년 사업가 대표로 대담도 하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음, 나름 알려진 기업이다. 뭐 하는 회사입니까?”
“생명공학, 바이오, 그런 쪽이고. 딸기 아시죠, 단미라고, 요새 신품종으로 마트에 가면 많이 있는데 그런 품종도 개발해서 업계에서는 유명하다고 하더라고요.”
“음, 아무튼 당뇨 치료제라는 게 수요는 많지만, 인슐린 정도를 제외하고는 치료제가 없는 걸로 아는데, 아무튼 굉장한 일이네요?”
“아, 그렇습니다. 당뇨라는 게, 워낙 대표적인 성인질환이고 만성질환이라, 정말 당뇨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거든요. 노년층에는 아주 흔하고요. 중장년도 증가 추세고, 요새는 소아당뇨도 많고요.”
“음, 그런데 우리나라가 아니, 우리나라 기업이 당뇨 치료제를 개발했다. 그런데 미국 FDA의 승인요건을 충족해서 승인이 임박했다. 그런 거죠?”
“예, 아주 이례적인 일인데, 한국 기업이 신약을 개발한 건데, 관련 기사가 미국 CNN에서 단독으로 먼저 보도를 했어요. 아무래도, 큰 이슈가 되는 신약이고, FDA가 미국 기관이다 보니까, 미국 기자들에게 먼저 정보가 간 것 같습니다.”
“뭐, 아직 정식 승인은 안 난 것 같네요. 아무튼 당뇨 치료제가 나온다는 기사니까, 당뇨 환자분들에게는 좋은 소식이 되겠네요. 이상 뉴스 브리핑 시간이었고, 다음은 날씨 알아보겠습니다. 한이슬 캐스터...”
뭐지? 넥타르가 승인이 날 거라는 건가? 그런데 어떻게 사장인 나도 모르게 그런 기사가 나오는 거야?
휴대폰이 울렸다, 도성준 사장이었다.
“도성준 박사님, 어떻게 된 겁니까? 뉴스 보셨나요?”
“아, 죄송합니다. 아니, 축하드립니다. 이진석 사장님.”
“예?”
“저도 지금 댄 김에게 막 연락을 받았습니다. 임상실험 결과가 아주 좋아서, FDA 관계자 말로는 승인이 날 확률이 90% 이상이랍니다.”
“그래요? 좋은 소식이기는 한데. 어떻게 기자들이 우리보다 더 먼저 안 건가요?”
“뭐, 그건, FDA 내부에서 정보가 유출된 건 같은데, 아무튼, 기자들에게 그런 정보가 유출될 정도면, FDA 내부적으로는 승인이 기정사실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그런 소식을 뉴스로 들으니, 얼떨떨하네요. 아무튼, 도성준 박사님도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드디어, 우리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군요.”
“아직, 정식 발표가 남아 있지만, 댄 김 말로도 승인은 확실하고 발표만 남았다는 것 같습니다.”
“신중한 댄 김 교수가 한 말이라면, 확실하겠죠. 일단, 저는 아침부터 먹어야겠습니다.”
대충 샤워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스카이 캐슬 입주자 전용의 식당은, 진석이 매일 같이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러 들르는 곳이었다.
창가에 앉아 한강을 바라보며 식사를 하고 있는데, 서태준이 나타났다.
“저도 뉴스 봤습니다. 굉장한 일을 해내셨더군요.”
서태준은 묻지도 않고, 진석의 테이블에 합석을 했다.
“아, 넥타르 말인가요?”
“그거 말고 또 뭐가 있겠습니까? 역시나 제 예상이 맞았네요.”
“예상요?”
“제가 관상을 좀 보거든요. 이진석 사장님을 딱 봤을 때, 아, 이 사람은 크게 되겠다. 그런 감이 오더라는 거죠.”
“하하, 영화배우이신 줄 알았는데, 관상까지 보시는 줄을 몰랐네요.”
“아무튼, 신약 개발에 성공하신 거 축하드립니다. 아침 뉴스에도 나오고, 저도 궁금해서 CNN 홈페이지에도 들어가 봤는데 메인 뉴스더군요.”
“그래요, 전 아직 확인을 안 해봤는데, 저도 좀 봐야겠네요.”
“진아랑 약속하신 건 잊지 않으셨겠죠?”
“최진아 씨 말입니까?”
“예, 신약 개발에 성공하면, 진아 프로그램에 단독으로 출연하기로 했다면서요?”
“진아 씨가 그런 말도 했나요?”
“생각하는 것보다 친하거든요.”
다시 핸드폰이 요란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최진아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최진아 씨 전화네요.”
“하하, 그래요? 받아 보시죠.”
“여보세요. 이진석입니다.”
“최진아예요. 방금 뉴스 봤어요. 엄청난 일을 하셨네요. 축하드려요.”
“아, 뭐, 아직 정식 발표가 난 게 아니라.”
“저도 방송국 쪽에 알아봤는데 거의 확실하니까, 일단, 녹화부터 하자고 하던데요.”
“녹화요?”
“예, 넥타르가 FDA 정식 승인을 받으면, 바로 방송에 내보낼 수 있게 사전 녹화를 하자는 거죠.”
“사전 녹화라?”
“저랑 한 약속 잊으신 건 아니죠?”
“음, 좋습니다. 대신, 방송은 정식 발표 후에 나가는 겁니다.”
“그야, 물론이죠.”
“진아가 뭐라고 하죠?”
“약속을 지키라는군요.”
진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카페인이 체내로 들어오며,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