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향긋한 송이(3)
“넥타르가 어떨까요?”
“넥타르라?”
진석의 말에, 도성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넥타르, 신들의 음료 말이군요, 그리고 과일 음료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고.”
“당뇨를 치료한다면야, 신들의 음료 넥타르처럼, 불로불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와 비슷한 효과를 얻지 않겠습니까?”
“하하, 괜찮은 이름입니다. 신들의 음료 넥타르라...”
***
파주, 말 체험장.
“작은 말들이 많이 있네요.”
“주로,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들이 많이 오니까요. 대부분 말을 타고 싶어하는 건 아이들이죠.”
“어른들이 탈 만한 말은 없나요?”
“이쪽으로 오시죠.”
말 체험장 주인은 뒤쪽의 마방으로 안내했다. 체험장에서 아이들의 관심을 받고 있는 것은 작은 조랑말들이었다. 키가 아이들 어깨 정도밖에 안 되는 작은 말들도 있어서 아이들이 부담 없이 말을 만지기도 하고, 먹이를 주기도 하는 것이었다.
뒤쪽 마방으로 가자, 한눈에 보기에도 큰 말들이 보였다.
“큰 말들은 이쪽에 다 있군요?”
“큰 말들은 가치가 좀 떨어지죠. 여기 있는 건 서러브레드라는 품종입니다. 경주마죠.”
“서러브레드라?”
“1800년대에 영국에서 명성을 떨쳤던 경주마 이름에서 따온 거죠. 전설적인 경주마로 40번의 대회에 나가서 38번을 우승했다고 하니까요.”
“오, 대단하군요.”
“예, 경주마로 명성을 떨친 후에는 최고의 종마로 활동했죠. 오죽하면, 그 말 이름이 경주마를 대표하는 품종 이름이 된 겁니다. 재밌는 일이죠. 전세계에서 경주마로 뛰는 말들의 80%가 바로 그 서러브레드의 자손입니다.”
“아니, 말 한 마리가 경주마들 80%의 조상이라고요?”
“하하, 최고의 종마로 선택받았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행복한 남자, 아니 수컷이 된 거죠. 경주마 은퇴 후에는 오직 후손을 남기는 일에만 전념을 했으니까.”
“세상에... 하하..”
“원래, 서러브레드는 시골에서 감자 농사를 짓던 말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포테이토였죠.”
“개명을 한 건가요? 유명해지고서?”
“아뇨, 주인이 농부였는데, 경주대회에 출전을 하려면 이름을 적어야 하는데, 거의 문맹에 가까워서 포테이토를 제대로 적지 못 한 거죠. 대충 비슷하게 써서 적은 게 서러브레드가 돼버린 거죠.”
“포테이토, 감자라..이런 말들은 어느 정도 가격에 거래되나요?”
“말을 사려고 하신다는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말을 사서 뭘 하시려는 거죠?”
“뭐, 최근에 흥미가 생겨서요. 사실은 서부 영화를 보다가, 말을 타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 많죠. 문제는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지만 말들을 순간의 흥미로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겁니다.”
“아, 그런가요?”
“여기에 있는 말들은 거의 버려지다시피 한 말들이죠.”
“버려져요?”
“예, 그냥, 말 한 번 사볼까? 그런 식으로 분양을 받아서, 제대로 키우지도 못 하고 버려지는 말들이 많아요.”
“흠. 그렇군요.”
“강아지나 고양이를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셨을 겁니다.”
“뉴스에서 본 것 같네요.”
“말들도 비슷한 상황입니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적인 현상이죠. 미국이 대표적이고요.”
“저는 상상도 못 했는데요, 말이 버려진다는 건..”
“주로, 서러브레드의 후손들이죠. 멋진 전설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 감자 농사 짓던, 말이 홀연히 경주마로 나타나, 영국의 모든 대회를 휩쓸고 최고의 명마가 되고 은퇴 후에는 종마로, 모든 경주마의 조상이 된다는 전설 말입니다. 그래서 말을 가져보고 싶은 사람은 모두 이 서러브레드 품종을 선택하죠.”
“그렇겠군요.”
“하지만, 몇몇 경주마를 제외하면, 대부분 버려지고 말죠. 현대의 사회에서 말들이 자유롭게 살 만한 공간은 많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신기한 장난감이라고 생각하고 돈을 들여 사지만, 곧 실증을 느끼고 키우기도 어려워서 방치하다가 굶어 죽는 녀석들도 많죠. 정식으로 도축되는 녀석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겁니다. 적어도 고통은 줄어드니까요.”
“저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뭐, 대부분이 그러니까요. 한국에서 말을 키울 만한 넓은 장소도 드물고 더구나 개인이 키우기에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체험장의 주인은 말들에 애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진석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제이에스 바이오라? 뭐 하는 곳인가요?”
“생명공학 쪽으로 연구를 하는 벤처 회사입니다. 지금은 농업 쪽 일을 주로 하고 있지만, 동물들에게도 관심이 많죠.”
“그래서요?”
말 체험장 주인은 다소 퉁명스러운 인상의 40대 중반의 남자였다.
“말들은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생활할 거라는 걸 약속드리죠.”
“말들로 뭘 하시려고요?”
“별다른 건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말들을 타고 싶어서 사려는 거죠. 하지만 저희 회사는 농업을 연구하는 회사라 넓은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들을 자유롭게 키울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 말입니다.”
“그래요?”
체험장 주인은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할 수 없죠. 말은 몇 마리나 필요하십니까?”
“여기 있는 게 열 마리군요. 모두 가져가겠습니다.”
“모두요?”
“예, 공간은 충분히 넓으니까요.”
“나이든 수컷들은 거세가 되어 있지만, 아직 어린 말들은 거세가 되지 않았는데, 필요하시면 거세를..”
“아, 아뇨, 저는 자연 상태가 좋습니다.”
***
말들은 파주의 창고로 옮겨졌고, 진석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와, 말들이군요.”
“그래, 안장이나, 필요한 마구들도 사왔으니까 하지만, 입마개는 필요 없을 거야.”
사령관은 신기한 듯, 말들을 둘러보았다. 말들은 모두 열 마리였다.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더러는 늙은 말들도 있고, 아직, 어린 말들도 있어서 실제로 탈 수 있는 말은 한 마리뿐이었다.
“말들은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뭐, 타고 다니려고 가져온 건데. 말들이 그다지 상태가 좋지는 않은 것 같네.”
일단 말들을, 산 아래로 데려가 자유롭게 풀어놓았다. 산에는 꽃과 풀들이 자라고 있어서 완만한 경사의 초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말들은,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풀을 뜯기도 하고,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진석은 상태창을 불렀다.
-궁금한 거라도 있으십니까?
“저 말들에게도 시간을 가속할 수 있을까?”
-물론입니다. 공간에서 시간과 공간은 공간주님의 지배를 받으니까요.
“하지만 시간을 계속 가속하면, 말들이 죽게 될 거 아냐? 유한한 생명체니까.”
-말들에게는 별로 다를 게 없습니다. 외부에서 보면, 그들의 시간이 빠르게 진행되지만 실제로 안에 있는 그들에게는 여전히 같은 시간이 진행되는 거죠.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과도 같은 거죠.
“블랙홀?”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사람을 외부에서 보게 된다면, 엄청난 속도로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끔찍한 장면을 보는 것 같겠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도 그 사람은 절대로 비명을 지르지는 않을 겁니다.”
“왜?”
“외부의 시각과 달리, 내부의 사람에게는 어떤 속도감도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요. 블랙홀 내부로 빨려 들어가는 사람은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오히려 바깥에서 자신을 보는 친구가 돌처럼 굳어졌다고 생각하겠죠.”
“음, 말들에게는 그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는 것뿐이라는 의미겠군.”
“그렇습니다. 시간을 가속한다고 해서 그들의 수명이 줄어드는 건 아닙니다. 시간은 어디에서나 공평하니까요.”
“그래, 그렇겠지.”
진석은 말들이 있는 곳의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고정된 자리에 있는 식물들과 달리, 움직임이 많은 말들은 초지 여기저기를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가속되며 그 움직임들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이든 말들은, 어느 순간 쓰러져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린 새끼들도 탄생을 하며 말들의 숫자는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그렇게 몇 번 가속을 반복하자, 말들의 숫자는 수백 마리로 불어나 있었다.
“와, 공간주님, 엄청나네요.”
“과연 서러브레드의 후손들이군, 엄청난 번식력인데.”
공간의 중심에 있는 산 주위에는 이제 야생마들의 무리가 퍼져나가고 있었다.
숫자가 늘어나면서 크고 탄탄한 체격의 말들도 눈에 뜨였다.
“사령관, 좋은 말들을 골라서 훈련을 시키자고.”
“말들을 말입니까? 하지만 지금 저 말들은 야생마나 다름없는데.”
“모든 말들이야 원래 야생마지. 안 그래? 사령관, 잡아서 길들일 수 있겠지?”
“아..알겠습니다. 공간주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사령관, 최선을 다하는 게 중요한 게 아냐, 중요한 건, 목적을 달성하는 거야. 알겠나?”
“알겠습니다. 공간주님, 당장 야생마를 포획해서 훈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
“사장님,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방송국?”
“예, kbc 방송국에서 사장님을 인터뷰하고 싶다나봐요.”
“나를 왜?”
“이번에 도성준 박사님이 미국의 네이처라는 의학잡지에 기고한 논문이 큰 화제가 되고 있다는데요.”
“음, 넥타르 말이군.”
도성준 박사는 임상 실험을 진행하면서 승인 허가를 위해, 넥타르의 연구분석 내용을 정리한 논문을 네이처지에 보냈다.
물론, 진석에게 미리 허가를 받고 진행한 일이었다. 넥타르가 당뇨에 영향을 주는 췌장의 베타 세포를 강화해 당뇨 증상을 완화시킨다는 실험 결과가 주요 내용으로, 네이처에서 이 실험에 대한 검증을 받으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실제 어떤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의학품으로 개발하기 위해서는 과학계의 다양한 검증을 통해, 그 효과가 유의미한 것인지, 중간에 조작이나 오류는 없는 것인지 검증이 이루어져야 하고,
대개 유력한 과학저널에 논문을 기고하고, 그 내용을 다양한 사람이나 기관들에게서 검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 검증 과정을 거친 실험이나 연구 결과만이 과학적 사실로 인정을 받게 된다.
“방송국에서는 왜 나를 만나자는 거야? 논문에 관한 거라면, 도성준 박사가 더 잘 알 텐데.”
진석의 말에, 이수정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연구 논문뿐만이 아니라, 신기술을 개발한 젊은 벤처사업가에 대해서 인터뷰를 하고 싶대요.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제목으로 젊은 사업가들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는데, 사장님이 제격이라는 거죠.”
“다이내믹 코리아?”
***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방송국이라?”
스튜디오에는 네 명의 사업가들이 모여 있었다. 진석은 바이오 업체 CEO로, 농업과 생명공학을 대표로 나왔고, IT 기업과, 애니메이션 제작사 대표, 그리고 외식업체 대표인 30대의 젊은 사업가들이 한국의 미래 먹거리라는 주제로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는 컨셉의 프로그램이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진석 사장님이 가장 특이하신 분인 것 같아요.”
“제가요?”
진행자는 인기 탤런트로도 유명한, 최진아였다. 서울대 출신으로 배우로도 탑스타의 자리에 올랐고, 지적인 이미지로 시사 프로그램 진행도 하고 있었다.
“농업은 보통 낙후된 산업이라는 인식이 강한데, 제이에스 바이오는 신품종 딸기로 크게 성공을 거두기도 하고, 이번에 넥타르라는 신물질 발견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잖아요. 정말, 넥타르가 당뇨 치료제로 성공한다면 한국 재계 순위가 바뀔 거라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어요.”
“하하, 글쎄요. 아직, 개발 단계고, 임상실험과 FDA 승인 같은 여러 어려운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의외네요, 보통은, 신약 개발이나 신기술 개발하는 회사라면 금방이라도 성공할 것 같이 말하는 게 보통인데.”
“저는 특별히 과장하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신약 개발은 하이리스크 엔 하이리턴이죠. 다들 성공하면 어떻게 될 거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건 알지만, 성공의 열매가 달콤할수록 감수해야 하는 고통도 큰 법이죠.”
“대단히 솔직하신 분이죠.”
최진아는 옆자리의 다른 출연자들을 돌아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진석 사장님 말을 들으니, 앞에서 제가 뻥만 친 것 같아서 창피하네요.”
“그러게요. 우리는 다들, 장밋빛 미래만 얘기했는데.”
그렇게 시사프로그램, 다이내믹 코리아의 녹화는 모두 마무리가 되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제가 잘했는지 모르겠네요.”
“제 개인적으로 이진석 사장님이 가장 재밌었어요.”
“정말요?”
녹화가 끝나고 최진아는 자연스럽게 진석에게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예? 부탁요? 최진아 씨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