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신선한 복숭아(1)
상태창이 열렸다.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보다시피, 산에 공간이 부족한 것 같아.”
-그럼 공간을 늘리시죠.
“공간을 늘리라고, 산을 하나 더 만들라는 말인가?”
-그런 방법도 있고, 아니면 지금의 산을 더 확장할 수도 있습니다.
“산을 확장하다니? 그런 것도 가능한가?”
-지표면이 융기하면서 산악지형이 더 높아지거나 면적이 넓어지는 조산운동은 흔한 일입니다. 지금의 인도 대륙이 아시아와 충돌하면서 히말라야 산맥이 융기한 것처럼 말입니다.
“조산운동은 지각이 이동하면서 일어나는 거잖아?”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간에서는 공간주님의 의지만으로도 가능한 일입니다.
“그래? 그런데 산을 하나 더 만들면, 그 산도 공간 에너지가 집중되어서 과일이나 작물에 영향을 줄까?”
-산이 하나인 것과 둘인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산이 두 개 이상이 된다면, 공간 에너지의 흐름이 분산되어서 지금과 같은 효과는 없을 겁니다.
“산이 더 커지는 건 상관없고?”
-산의 크기가 커져도, 에너지가 집중되는 현상은 큰 차이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산의 크기를 확장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았다.
“좋아, 그럼, 산을 융기시켜서 더 확장을 하자고.”
-산을 확장하려면, 산의 면적과 높이를 재지정해 주십쇼.
지금의 산은 1만 평 규모의 야트막한 산이었다. 산의 높이를 더 높힌다고 해봐야 올라오기 힘든 것 외에는 장점이 없을 것 같고, 지금의 높이를 유지하면서 면적만 2배로 늘리는 것이 괜찮아 보였다.
“좋아, 높이는 이 정도면 되니까, 그대로 두고, 면적만 2만 평으로 확장해 줘.”
-산이 확장되는 것은 융기현상이기 때문에, 얼마라도 높이가 증가해야 합니다.
“뭐야? 그런 거였나? 그럼, 최소한으로 가능한 높이 상승이 얼마야?”
-2만 평 규모로 산의 면적을 늘리시려면, 최소한, 산의 높이도 50미터 이상 상승하는 것이 적합합니다.
“그래, 그 정도면 괜찮겠지, 좋아, 높이 50미터를 상승하고 면적은 지금의 2배로 확장해 줘.”
-산의 면적과 높이를 확장하겠습니다. 확장 작업에는 1천 시간 포인트가 사용됩니다. 확장을 하시겠습니까?
“그래, 확장...”
-일단, 확장 작업을 위해, 산이 융기할 예정입니다. 땅이 심하게 흔들릴 수 있으니, 안전을 위해서 하산해 주십쇼.
진석은 위험할 수 있다는 말에, 일꾼들을 데리고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다시 오아시스 쪽으로 더 이동해서 오아시스와 산의 중간쯤에 도착했을 때였다. 엄청난 굉음과 함께, 땅이 크게 진동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간주님, 땅이 흔들립니다.”
옆에 있던, 사령관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걱정할 거 없어, 산이 융기하고 있는 거야, 땅속으로부터 솟아오르는 거라고.”
심한 진동에도 태연한 진석을 보며, 사령관은 경외하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역시 공간주님이 산을 만드시는 거군요?”
“그래, 천도복숭아를 심으러 왔잖아. 더 크고 넓은 산이 필요하다고.”
진동과 함께, 산과 그 주변의 땅이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흡사 땅속에 있던, 산의 아랫부분이 끌려 나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얼마 후 진동이 완전히 멈추었다. 흙먼지가 풀풀 휘날리는 뿌연 먼지가 가라앉기 시작하자, 확실히 전보다 훨씬 더 높고 커진 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공간주님, 확실히 산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그래, 산이 커지기는 했는데, 워낙 난리를 쳐서, 나무들이나 벌집들이 괜찮을지 모르겠네.”
진석은 일꾼들을 데리고 다시 산으로 올라갔다. 산을 오르다보니, 군데군데 나무가 뿌리째 뽑히거나 넘어져 있는 것들도 있었다. 벌통들도 일부는 지진에 파손된 상태,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10% 정도의 나무와 벌집이 피해를 입은 정도였고,
대다수의 나무들은 별 탈 없이 무사한 모습이었다.
“생각보다, 피해는 적은 것 같습니다.”
“일단, 사령관이 일꾼들을 동원해서, 피해를 입은 나무들을 최대한 복구하라고, 벌집도 진흙으로 망가진 곳을 보수해주고.”
한바탕 지진이 휩쓸고 간 산의 과수원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일꾼들이 일하는 동안, 진석은 더 커진 산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산에서 오아시스로 물이 흘러내려가는 샘과 수로는 별다른 피해가 없어서, 여전히 댐이 있는 곳으로 물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산은 상태창의 설명대로, 밑에서부터 융기한 모양이라, 기존의 산이 더 높이 올라왔고, 산 주위가 위로 솟아 산의 일부로 편입된 느낌이었다.
지진 피해를 정리하고, 그다음은 천도복숭아를 심는 일이었다. 산의 테두리 부분이 새로 생긴 지역이고 그쪽이 비어 있는 황무지 상태였기 때문에 진석은 산 아래쪽을 빙 둘러가며 복숭아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씨앗을 심은 후에, 시간을 가속해 나무를 성장시키고 열매까지 맺자, 열매를 따서 다시 씨를 채취했다. 그리고 다시 씨앗을 심고 시간을 가속하는 방식으로
산의 둘레를 돌며 천도복숭아 나무들이 점점 증식되고 있었다.
***
“천도복숭아네요?”
모처럼, 은하수 농장을 찾았다.
“선물입니다.”
“와, 매번 과일을 선물로 주시네요. 지난번에는 아토피에 좋은 장미사과더니 이건 이름이 뭔가요?”
“이름요?”
딱히 이름을 생각해 놓은 것은 없었다. 서은주의 질문에 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뭐, 그냥, 하늘복숭아라고 하죠.”
“하늘..복숭아요. 그건 천도 라는 말하고 같은 거잖아요? 천도가 하늘의 복숭아라는 의미니까.”
“하하, 그렇기는 하죠. 뭐, 그래도 한자를 순우리말로 바꾼 거니까요. 그것만 해도 어감이 다르잖아요.”
“그렇기는 하네요, 천도복숭아라면, 좀 딱딱해 보이는데, 하늘복숭아는 좀 부드럽고 말캉말캉한 느낌이에요.”
“정말요? 그렇지 않아도, 이 천도복숭아, 아니 하늘복숭아는 좀 식감이 부드럽고, 더 단맛이 강해요. 한 번 드셔보세요.”
진석은 공간에서 수확해 온, 복숭아를 한 개 집어 서은주에게 내밀었다.
“그럼, 한 번 맛을 볼게요.”
서은주는 복숭아를 받더니, 그대로 한 잎 베어 물었다. 확실히 소탈한 모습이었다. 조금만 꾸며도 상당한 미인처럼 보일 텐데, 서은주는 여전히 화장끼 없는 얼굴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진석이 공간에서 수확한 천도복숭아를 맛보고 있었다.
“어때요? 맛이?”
“음, 수분도 많고, 과즙이 달아요. 굉장히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네요. 원래, 천도복숭아는 좀 단단하고 새콤한 맛이잖아요. 그런데 달고 부드러운 백도 같으면서도 또 굉장히 신선한 느낌이네요. 아주 신선한 맛이에요.”
“그래요? 신선한 맛이라, 그거 괜찮은데요.”
“뭐가요?”
서은주는 복숭아가 맛있는지, 야무지게 복숭아를 먹으며 물었다.
“신선한 복숭아, 신선 복숭아 어때요?”
“그거, 이 복숭아 이름이에요?”
“예, 저희 회사에서 새로 개발한 천도복숭아 품종인데, 그렇지 않아도 이름을 뭘로 할까 했는데 하늘 복숭아보다는 신선복숭아가 더 좋겠네요.”
“신선복숭아라? 괜찮은데요. 원래 신선들이 살던, 무릉도원에 복숭아가 열리는 거잖아요?”
“하하, 그런가요? 참, 오다 보니까, 농장 들어오는 곳에 마을이 있던데, 거기 노인정도 있나요?”
“예, 동네마다 노인정은 하나씩 있잖아요. 왜요?”
“신품종이라 사람들 반응이 어떨지 테스트를 해보려는데, 젊은 사람은 많지만 노인분은 찾기가 어려워서.. 저, 그래서 말인데 서은주 사장님이 노인정에 이 복숭아 좀 전해드리면 안 될까요? 나중에 드셔보시고 반응이 어떤지도 좀 말해주고요.”
“뭐, 그러면 저도 좋죠. 이 동네 어르신들인데, 이참에 어르신들에게 점수 딸 기회잖아요.”
진석은 가져온 복숭아 다섯 상자를 노인정까지 실어 주고 돌아왔다.
공간의 산에 아버지가 주신 천도복숭아 씨를 심어 자란 나무는, 시간을 가속하고 증식 작업을 하면서 열매의 모양과 맛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보통의 천도복숭아와 크기는 비슷했지만, 과육이 더 연하고 단맛이 났다. 하지만, 백도처럼 무른 느낌은 아니고, 여전히 단단하고 싱싱한 느낌이었다. 서은주가 맛을 보고 신선하다는 표현을 했는데
뭔가 깔끔하고 달면서도 시원한 향취가 느껴지는 것이 있어서 진석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아무튼, 뭔가 공간의 산에서 키운 복숭아니까, 특별한 효능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은 들었지만, 열매의 맛이 달콤하고 시원하다는 느낌 외에는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상태창에게 물어봐도 대답불가라는 답변...
“만약에, 장미사과처럼 아토피를 치유한다던가 하는 그런 효능이 있다면, 실제로 그 질병에 걸린 사람이 먹어보고 효과를 느끼기 전에는 알기 힘든 일이잖아? 아, 그렇군..”
그런 생각을 하며 은하수 농장에 복숭아를 가져다주러 가던 진석의 눈에 뜨인 것은 동네 입구의 노인정이었다.
“노인들이라면, 다들 아픈 곳 하나씩을 가지고 있을 거잖아..”
아무래도, 나이를 먹게 되면 노화 현상으로 각종 만성질환에 시달리게 된다. 그 말은 노인들에게 이 천도복숭아 먹어보게 하면, 어떤 질환에 효과가 있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였다.
자연스럽게 그 동네에 살며 노인들과도 안면이 있다는 서은주에게 복숭아의 테스트를 맡긴 셈이었다.
***
얼마 후 서은주에게 연락이 왔다.
“이진석 사장님, 지난번에 노인정에 기부하신 복숭아요.”
“그거 어때요? 반응이 괜찮은가요? 어르신들 입에 맛는다던가요?”
“예, 다들, 무슨 복숭아냐고 진짜 맛있다고 칭찬 많이 받았어요.”
“하하, 다행이네요.”
“예, 반응들이 다들 좋아요. 어떤 분은 복숭아를 먹고 나서 몸도 좋아지셨다는 분도 있고요.”
“오, 그래요? 몸이 어떻게요?”
“뭐, 노인분들이니까, 만성질환이 많잖아요. 몇 분은 당뇨가 있었는데, 당수치가 정상이 됐다고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래요?”
그러면서 서은주는 노인정의 어르신들이 좋아한다고 복숭아를 더 보내줄 수 있냐고 물어왔다.
“물론이죠, 복숭아도 보내드리고, 떡도 좀 보내드리고 해야겠네요.”
“정말요? 그러면 좋기는 하죠.”
“예, 기다리세요. 곧 택배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사장님, 무슨 전화예요?”
“어, 수정 씨, 저기 은하수 농장에 보낼 건데, 노인분들이 좋아할 만한 떡하고 과자 이런 것 좀 준비해 줘.”
“떡하고 과자요?”
“그래. 은하수 농장이 있는 마을에 노인정이 있는데 과일하고 간식거리 좀 보내드리려고.”
“어머, 사장님, 좋은 일 하시네요.”
“하하, 뭐, 그런 건 아니고.”
진석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공간에서 키운 천도복숭아, 신선복숭아가 정말 당뇨에 효과가 있다면, 그건 굉장한 발견이었다.
당뇨는 너무 흔한 만성질환이지만 아직, 효과적인 치료제가 방법은 없는 질병이었다. 대부분 치료의 개념은 현대의학에서도 포기하고 당수치를 관리하고 합병증을 예방하는 수준인 대표적인 현대인의 질환, 그런 당뇨에 효과가 있는 물질을 발견한다면, 그게 과일이든 뭐든 정말 엄청난 일인 것이다.
물론, 아직, 서은주의 말만으로는 신선복숭아가 당뇨에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하나의 실마리는 찾은 셈이었다. 이걸 단서로 신선복숭아가 어떤 효능을 가진 과일인지 차근차근 검증을 해보면 되는 것이다.
일단 첫 단추는 꿰어졌다.
진석이 물류 창고에 보관 중이던 신선복숭아를 몇 상자 가져왔고, 그 사이 이수정은 같이 보낼 떡과 과자류를 구해왔다.
“이건 복숭아네요? 천도복숭아.”
“이번에, 새로 개발한 품종이야.”
“그래요? 한 번 먹어 볼래요.”
이수정은 복숭아를 집어 들고는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완전 맛있는데요. 이게 우리 회사에서 개발한 신품종이라는 거죠?”
“그래, 맛과 향이 아주 신선하지? 그래서 이름도 신선복숭아라고 부르기로 했어.”
“음, 신선복숭아라? 괜찮네요. 신선하다는 느낌도 있고, 신선들이 먹는 불로장생의 복숭아 같은 어감도 있고.”
“하하, 그래? 아무튼, 이건 노인정에 보낼 거니까. 몇 개만 먹고, 택배로 발송해줘, 떡하고 과자도 같이.”
“알겠습니다. 사장님. 은하수 농장으로 보내면 되는 거죠?”
“그래, 좀 부탁해.”
28화. 신선한 복숭아(2)
“안녕하세요.”
진석은 입주민 전용 로비에 들어서며 먼저 인사를 건냈다. 고급 아파트라, 스카이 캐슬 입주민 전용 로비가 따로 구비되어 있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바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로비에는 보안 요원들이 일일이 출입자들을 체크하고 있어서 진석도 이사온 첫날은 보안요원들에게 제지를 당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안면이 생겼다.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기다리는데 뒤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로 입주한 분이시죠?”
“아, 서태준 씨군요.”
뒤를 돌아보자, 185cm 정도의 큰 키에 잘생긴 호남형의 얼굴이 진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에서 한 번 뵌 것 같은데.”
“아, 저도 그런 기억이 있네요.”
둘 다 목적지는 42층이었다. 이수정이 지난 번에 사인을 받아 달라고 한 것 같은데, 그렇다고 엘리베이터안에서 사인을 부탁하기도 애매하고, 진석은 사인은 받는 것은 포기했다.
“사업가신가요?”
“아, 뭐, 그런셈이죠.”
“왠지 그럴 것 같더군요.”
“하하, 제가 사업가처럼 생겼나 보죠.?”
“일단, 연예인은 아니시고, 그렇다고 소위 말하는 금수저도 아닌 것 같고, 자수성가한 청년 사업가라는 느낌이 들더군요.”
“뭐, 맞기는 합니다만, 연예인이 아니라는 건 그렇다 쳐도, 금수저가 아니라는 건 어떻게 아신 건가요?”
“로비에서 보안요원들에게 인사를 건내더군요. 금수저들은 이런 호텔 직원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내는 경우가 없죠. 연예인이라면 몰라도, 우리들이야 인사하데는 익숙하죠. 하지만 연예인도 아니시고 나이를 봤을 때, 벤처기업으로 성공하신 청년 사업가가 아닐까 추측을 해 본 거죠.”
“하하, 재밌는 분이군요. 사업가가 아니더라도 다른 직업은 많이 있지 않나요?”
“직업이야 많이 있겠지만, 어떤 직업이든 물려받은 재산이 없는 사람이라면, 따로 사업으로 큰 돈을 벌지 않고는 이 스카이 캐슬 레지던스에 들어올 수는 없죠.”
“영화배우인 줄 알았는데, 추리하시는 건 어디서 배운 건가요?”
“영화배역 중에 형사를 맡은 적이 있었죠. 소거법이라는 겁니다. 가능한 요소 중에서 하나씩 제거해 나가는 방법이죠.”
“명함이라도 드릴까요?”
진석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제이에스 바이오? 뭐하는 곳이죠?”
“생명공학 계열의 벤처 회사입니다. 농업이나 신품종 개발, 그런 일들을 하죠.”
“오, 특이한 사업을 하시는군요. 하지만, 그쪽도 제법 돈이 되는 모양이군요.”
“하하, 수익성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아무튼, 이곳 스카이 캐슬 레지던스 주민이라면 다들 성공한 사람들이죠. 알아두면 나중에 도움이 되더군요. 제 명함은 따로 필요없으시겠죠?”
“뭐, 얼굴이 명함이신 분이니.”
진석의 말에, 서태준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지갑에 끼워 넣었다.
***
은하수 장미 농장...
“떡까지 보내주실 줄은 몰랐어요?”
“어르신들 드리는 건데, 복숭아만 보내기는 그래서요. 급하게 떡집에서 맞춘 건데, 괜찮던가요?”
“예, 맛있던데요.”
서은주와 이번에는 노인정을 같이 방문하기로 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들,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떡하고 복숭아를 보내주신 그 사장님이에요.”
“오, 저런,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나, 덕분에 잘 먹었어요.”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작은 노인정이었다.
“신선복숭아라고 이번에 새로 개발한 품종인데, 어르신들 드시기에는 어떠시던가요?”
“아, 맞아. 그게 새로 나온 복숭아라면서, 무슨 신선이 되는 복숭아라고?”
“하하, 예, 신선하기도 하고, 먹으면 신선처럼 건강해지는 그런 복숭아입니다. 맞은 괜찮으신거죠?”
“그거 맛있지, 내가 나이가 올해 여든 하나인데 내 평생에 그렇게 희한한 복숭아는 처음 먹어봤어.”
“그러세요? 어르신.”
“그래, 맛도 좋고. 먹으니까, 기운도 나는 것 같고. 그 누구야, 이발사 최 씨는 그거먹고 당뇨가 많이 좋아졌다고 하더라고.”
“이발사요?”
“그래, 요 앞에 가면, 승리 이발소라고 있거든,. 그 집 아들 이름이 최승리야, 지금은 군인이라고 하던데”
]
“군대 입대 했나 보죠?”
“입대는 무슨, 그 녀석 육사 나와서 지금은 연대장일껄..”
아들이 군입대 했다는 말인줄 알았는데, 육사 출신으로 연대장이라면, 그 이발사라는 분도 나이가 꽤 많을 것 같았다.
“그분 말고, 다른 분들은 복숭아 드시고, 아픈 곳이 좋아지신 분 없나요?”
“뭐, 글쎄. 아, 그 태식이 동생도 당뇨 있었는데 수치가 내렸갔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태식이 동생이라는 사람도, 70대의 노인이라고 했다. 연세들이 있어서 당 수치가 높으신 분들이 꽤 있는데, 공통적으로 당뇨 수치가 내려갔다는 증언들이 이어졌다.
“어르신들, 제가 신선복숭아를 더 가져왔는데 많이들 드세요. 그리고 혹시 당뇨가 있으신 분들은 당수치가 달라졌는지 나중에 말씀해 주시고요.”
“하하, 그래. 이거 먹고 정말 당뇨가 좋아지면 좋은 거지.”
***
북카페 오아시스 가로수길점
“사장님, 무슨 고민 있으세요?”
“어, 왜?”
“뭔가 고민이 있는 표정처럼 보여서요.”
“하하, 민지 씨, 아니, 유민지 점장님. 내가 무슨 고민이 있겠어.”
창가 테이블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던 진석의 옆으로 유민지가 소리없이 다가와 있었다.
사실, 진석에게 고민 같은 것은 없었다. 단지, 앞으로의 사업 방향에 대해 신중하게 생각을 해보고 있었다.
서은주의 소개로 알게 된, 은하수 농장 근처의 노인정에 꾸준히 신선복숭아를 보내 준 결과, 5명 이상의 당뇨 질환을 가진 노인들에게서 당 수치가 크게 개선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렇다는 것은, 공간에서 재배한 신선복숭아에 뭔가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서 전에 장미사과처럼, 과일을 판매하는 것에 만족하지 말고, 이번에는 신선복숭아에서 당뇨 개선 효과를 내는 물질을 찾아내 신약, 즉, 당뇨 치료제를 개발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신선복숭아를 과일로 먹는 것으로도 당수치 개선 효과가 나타나고 있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진석은 신선복숭아의 여러 물질들을 추출해서 그 중에서 당뇨 치료에 효과가 있는 신물질을 찾아, 새로운 당뇨 치료제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신물질을 실험할 수 있는 실험실과 연구인력이 필요했다.
***
“도성준 사장님이신가요?”
테헤란로에 자리잡은 오피스 빌딩이었다. 엔시스 테크는 신약개발에 필요한 신물질 추출하는 신기술을 개발한 회사였다.
“초분자학이라, 좀 생소한 분야네요.”
“화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가 바로 분자입니다. 물리학에서는 분자를 넘어 원자 그리고 더 작은 미시세계까지도 관찰하지만, 화학분야에서는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기본적 단위를 분자로 보고 연구하는 거죠. 저는 그 중에서도 분자들의 관계, 특히 자기조립을 연구하던 사람입니다.”
“자기조립이라고요? 어떤 의미인가요? 자기조립이라는 게?”
“쉽게 말하면 신학입니다.”
“신학? 종교 그런쪽 말입니까? 아니면 신학문이라는 의미인가요?”
“후후, 신을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죠. 자연계에 무질서한 분자들이 존재하는데 그 분자들이 어떤 외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구성요소들의 상호작용만으로 자기조립이 일어납니다.”
“자연적으로 분자들이 조립을 해서 물질들이 생성된다는 말인가요?”
“예, 굉장히 믿기 힘든 일이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분자들간의 상호작용이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그 연쇄과정의 우연적인 일치가 반복되며, 복잡한 생명체가 만드어지는 거죠.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복잡계 현상을 설명하는 이론이죠.”
“박사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런 자기조립 현상이 가능한 건가요?”
“물론, 신을 대입하면, 다른 설명도 가능하죠, 초월적 존재가 모든 것을 통제하고, 그의 의지에 의해서 분자들의 연결이 일어나고 그런 과정을 거쳐, 분자들의 조립이 일어난다고 말입니다.”
“신을 믿으시나요?”
“과학자에게 신이란 빅뱅 같은 거죠.”
“사고의 지평 너머라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신이 있다고 해도 과학의 연구 범위는 아닙니다. 과학이라는 건, 신이 존재하든 말든, 자연계의 일반 법칙을 연구하는 학문이죠. 그 법칙을 누가 만들었느냐 아니면, 그저 우연적 현상이냐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진화론과 비슷하네요.”
“일종의 진화론의 다른 버전이죠, 화학 버전요. 사실, 인간의 몸이라는 건 분자에서 세포, 그리고 조직, 장기로 이어지는 여러단계의 자기조립과정을 거친, 고도의 복잡성을 가진 자기복합체라고 할 수 있죠. 그게 바로 인간입니다. 후후, 너무 이상한 얘기를 했군요.”
“아닙니다. 흥미로운데요.”
“아무튼, 대학에서는 분자들의 자기조립 문제를 연구하던 교수였죠. 그래서 초분자학자라는 타이틀도 있었고. 아무튼, 지금은 다 망한 벤처 회사 사장이죠.”
“망하기는요? 신기술을 보유한 유망한 회사라고 하던데.”
“선택적 분자추출 기술을 개발하기는 했죠.”
“음, 그러니까. 특정 단백질 효소만 추출하는 기술이라고 하던데?”
“그렇습니다. 기존의 정제법보다, 훨씬 더 효율적이죠. 일종의 낚시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낚시요?”
“예, 정제법이라는게 말 그대로, 순수하게 추출한다는 의미죠. 여러 분자 화합물 중에서 서로 얽혀 있는 것들 중에 하나를 떼어내어서 그 분자의 역할과 기능이 무엇인지 확인해 보는 거죠.”
“솔직히 말하자면, 화학분야는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네요.”
“우리회사에 개발한 쿠거비투릴은 쿠거비투타세라는 호박의 학명에서 따온 겁니다.”
“호박이라?”
“예, 예전에 시골에서는 박 열매를 잘라서, 그릇처럼 사용했죠. 바가지 말입니다. 원래 바가지란 말이 박을 둘로 갈라서 쪽박을 내서 뭔가를 담는다는 의미죠. 강아지처럼, 아지는 작다는 의미거든요. 쪽박이 나서 작아졌다는 의미죠.”
“하하, 그렇군요.”
“아무튼, 쿠거비투릴은 일종의 바구니 같은 겁니다. 원하는 분자에 따라 여러형태로 변형이 가능한데, 이 분자 바구니를 낚시에 걸어서 그 모양에 꼭 맞는 분자만 바구니에 담기게 하는 거죠.”
“대충 감은 오네요. 선택적으로 분자를 추출하는 신기술이군요?”
“그렇습니다.”
“과일에서 특정 질병에 효과를 주는 물질을 추출하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진석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제이에스 바이오라? 아, 그 딸기 품종을 만드는 회사죠? 저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신품종 개발로 요즘 로열티 수익이 엄청나다고 하던데.”
“하하, 뭐, 약간 수익이 나고 있는 정도죠.”
“그럼, 이번에 어떤 작물에 도전하시려는 겁니까?”
“복숭아입니다. 새로 개발한 품종의 천도복숭아인데. 당뇨 질환에도 효과가 있는 것 같아서요.”
“음, 천도복숭아에서 신물질을 추출해 보자는 말씀이시군요.”
“그래서 말인데. 엔시스 테크를 인수하고 싶습니다.”
“예? 신물질 분석 의뢰를 하려는 게 아니고 말입니까?”
“회사 전체를 통째로 사고 싶습니다.”
도성준은 서울대 출신의 분자화학자였다. 초분자학의 권위자로 명성을 날리다가, 벤처 기업을 창업한 인물, 하지만 연구자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사업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했다.
“회사를 인수하고 싶다고요?”
“제 생각에, 도 박사님은, 경영보다는 연구를 하실 분입니다. 저는 과일에서 추출한 천연물질로 당뇨를 치료하는 신약을 개발할 생각이고요. 투자와 경영은 제가 하고, 박사님은 연구개발을 맡아주시죠.”
“흠, 하지만 신약개발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신물질을 찾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고, 그 이후에도 비임상 실험, 그리고 단계별 임상실험 등, 인체에 무해한 천연물질이라도 검증 받는데만 몇 년이 걸리죠. 그 기간에도 실험을 진행하려면, 비용이 엄청 들어가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 막대한 연구비와 시간을 쓰고도 아무것도 못 얻을 수도 있고요. 아니 확률적으로 더 높죠.”
“그렇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필요한 자금조달 계획도 가지고 있고요. 어떻습니까. 엔시스 테크 주식, 100%를 2백 5십억에 인수하고, 도성준 박사님의 연구도 지원할 생각입니다. 괜찮은 제안 아닌가요?”
도성준은 잠시 고민에 빠진 얼굴이었다. 이미 엔시스 테크는 각종 연구투자에 과도한 투자를 하다가, 자금이 다 소진된 상태였다.
“한 번 생각해 보죠.”
29화. 신선한 복숭아(3)
“자동차면 세단을 찾으시나요? 아니면, suv?”
“픽업트럭이 좋을 것 같은데요.”
“픽업트럭요?”
진석은 수입차 매장을 찾았다. 신차도 있고, 다양한 중고 수입차를 거래하는 곳이었다.
자동차 딜러는 30대 중반 정도의 통통한 남자였다.
“사실, 픽업트럭을 찾는 분은 흔치 않죠.”
“예, 농업 관련된 일을 하고 있어서, 산에도 좀 올라가야 하고 말이죠.”
“그런 용도라면 픽업트럭이 좋죠. 사실, 미국에서는 픽업트럭이 엄청 인기거든요.”
“이쪽으로 오시죠.”
***
“포클레인 말입니까?”
“도시라도 건설하시려고요?”
“예?”
“하하, 농담입니다. 건축자재를 많이 사가셔서 말이죠. 거기에 이제는 중장비까지 찾으시고, 전원주택 단지를 조성하시나 해서요.”
“아, 그런 건, 아니고 창고도 짓고 여러 가지를 만들고 있습니다. 재미 삼아서요.”
“와, 재미 삼아서요. 돈도 장난이 아닐 텐데.”
“하하, 뭐, 그러게 말입니다.”
건축 자재상은 포클레인 이야기를 꺼내자, 조금 놀라는 눈치였다. 공간에 필요한 건물들을 짓다 보니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이 많았다. 포클레인 그중에 하나였다.
수영장을 만들 때, 진흙으로 포클레인을 출력해서 사용해 봤는데, 아무래도, 진흙 재질이라, 성능이 떨어지고, 세밀한 작업이 어려웠다. 그래서 그보다 좀 더 정교한 진짜 포클레인을 구매해서 공간으로 가져갈 생각이었다.
자주 가던 건축 자재상에는 포클레인은 없었지만, 다행히, 포클레인 대여와 판매를 하는 중장비 업체를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일단, 중고 포클레인 3대와 덤프트럭 2대를 구매했다.
공간의 문을 열자, 사령관이 마중을 나왔다.
“공간주님, 이건 뭡니까? 진자 포클레인이군요.”
“그래, 사령관, 아무래도 내가 지난번에 진흙으로 만들었던 건, 조금 허접해서 말이야.”
“트럭도 있고, 저건 픽업트럭이군요.”
“그래, 픽업트럭은 내가 타고 다니려고.”
공간의 면적은 꾸준히 증가해, 70만 평 가까운 크기로 성장해 있었다. 여의도보다도 조금 작은 크기였지만, 막상 걸어다니려면, 시간도 걸리고 힘이 들어서, 공간을 돌아다닐, 픽업트럭을 산 것이다.
아직, 공간에는 포장도로라는 것이 없고 황무지와 야산으로 이루어진 지형이라, 오프로드에 적합한 픽업트럭은 공간에서 타고 다니기에는 딱 좋은 차였다. 뒤에 화물칸에 이것저것 필요한 물건들도 싣고 다닐 수도 있고.
진석은 픽업트럭을 타고, 공간을 한 번 쭉 돌아보기로 했다. 일종의 영지 순찰이라고나 할까?
건조한 기후라 자동차가 흙길을 달릴 때마다,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진석은 공간을 신나게 달리며, 공간 한가운데 우뚝 솟은 산을 바라보았다. 공간은 작물을 재배하는 몇몇 지역을 제외하고는 전체적으로는 황무지 같은 모습이었지만, 산은 나무와 꽃들로 뒤덮인 푸른색이었다.
예전부터 픽업트럭 하나를 사서 산이나 들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었는데 이제야 꿈을 이룬 셈이었다.
오아시스로 돌아와 식사를 하고, 한숨 잠부터 늘어지게 잔 후에,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진석이 잠에서 깨었을 때는, 포클레인들이 땅파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공간에서 사용하는 자동차들이 늘어나면서, 주유소도 필요했다. 일단은 1000리터짜리 자동 주유기 몇 개를 설치해 놓기는 했는데, 앞으로 더 수요가 늘어날 것에 대비해서, 유류 저장고를 만들기로 했다.
“사령관 작업은 잘 되고 있나?”
“예, 공간주님이 가져오신 포클레인이 성능이 우수합니다.”
“그래? 잘 됐군.”
포클레인 운전석에는 진흙 일꾼들이 들어가서 조작을 하고 있었다. 직사각형의 구덩이를 파고 있었는데, 중장비에 대한 지식은 없었지만, 반듯하게 잘 파고 있는 것 같았다.
“포클레인 운전을 잘하는데.”
“예, 굴착기 관련 특별 교육을 받은 일꾼들입니다.”
유류 저장고를 만들어서 공간 내에 주유소를 만들 생각이었다.
***
주유소 작업은 한 팀에 맡기고 다른 팀은, 목주주택 주위에 잔디를 깔기 시작했다. 공간은 전반적으로 건조한 기후에 비가 오지 않는 곳이라 건조한 토지는 먼지가 많이 날리는 단점이 있었다. 집 주위와 진석이 생활하는 오아시스 주위만이라도 잔디를 심어서, 잔디밭을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일단, 잔디 모종을 여기저기 심고, 시간을 가속해서 잔디를 증식시켰다. 그리고 잔디가 어느 정도 성장하자 집 앞부터 잔디를 식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프링클러를 잔디밭 주위로 설치해서 충분한 물을 공급할 시설을 마련했다.
“사령관, 잔디 깍기 작업을 해야겠는데.”
진석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잔디밭을 바라보며 말했다. 식재한 잔디 주위의 시간을 가속해 심어놓은 잔디들은, 어느새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다.
잔디밭 가운데에는 분수대도 설치했다. 집의 경계에는 벽돌로 어른 허리 정도의 낮은 담장도 빙 둘러서 만들어 놓았다. 공간에는 인간은 진석뿐이었고 나머지는 진석의 명령에 따르는 일꾼들뿐이라 특별히 담장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진석이 만들고 싶던 이미지를 참조해서 만든 것이었다.
일꾼들이 잔디깍기로 잔디를 깔끔하게 깍아 놓자, 생각보다 훨씬 보기 좋은 느낌의 잔디밭이 완성되었다.
잔디밭이 조성관 진석의 집 안마당과 그 바깥쪽의 황토 지대는 완전히 다른 세계 같은 느낌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공간주님.”
“그래, 아주 보기 좋은데. 기왕 하는 거 말이야. 잔디를 좀 더 심자고.”
“좀 더 말입니까?”
“그래, 담장 너머에도 잔디를 충분히 심고 저기 오아시스 주위도 빙 둘러서 잔디를 깔고, 체육관 앞에도 더 심어서, 테니스 코트를 만들어야겠어.”
“오, 좋은 계획입니다. 당장,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령관은 일거리가 늘어나는 게 어쩐지 신나는 모습이었다.
일꾼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푸른 잔디의 범위는 점점 더 늘어나고 있었다. 집 앞마당에서 시작한 잔디의 영토는 오아시스를 집어삼키고, 체육관 앞까지 진출한 상태였다.
자동차를 가지고 왔으니 주차 공간도 필요했다. 비가 오지는 않는 곳이지만, 먼지가 좀 많은 편이라 실내 주차장도 하나 만들고 그리고 전부터 꼭 하나 갖고 싶었던, 진석의 전용 극장도 하나 짓기 시작했다.
뭐, 엄청난 대극장을 지을 생각은 없었고, 진석이 혼자서 영화 감상할 그런 공간을 만들 생각이었다.
“홈시어터 전용룸을 만드시려고요?”
“그래,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요런 걸로, 하나 만들려고.”
작업을 설명하기 위해, 홈시어터 전용룸의 제작 과정을 정리한 블로그를 사령관에게 보여주었다.
“문제없습니다. 바로 작업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디오와 160인치 액자형 스크린을 설치한 프로젝터를 이용한 홈시어터를 시공한 곳인데, 약간 동굴 같은 분위기가 나면서 오디오 사운드가 괜찮다는 평이었다.
“저런 것과 같은 걸 만들 수 있는 거지?”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 보겠습니다.”
***
공간에서 나와 샤워를 하고, 잠시 거실에서 쉬고 있을 때였다. 진석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도성준입니다.”
“아, 도 사장님, 생각은 해보신 겁니까?”
“예, 저도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론을 내리셨나요?”
“음, 회사 경영이 어려워진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봤죠. 아무래도, 제가 연구자로는 능력이 있지만 경영자로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럼?”
“예. 이 사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죠. 저는 연구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한 것 같습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이제는 같은 배를 타게 됐군요.”
“그렇게 됐네요.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일단, 같이 일하게 된 거 환영하고 축하드립니다. 더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만나서 나누도록 하죠.”
새로운 사업으로 상당한 자금이 들어가게 생겼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딸기 모종 사업이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르면서, 로열티 수익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확실히 농업은 주기가 긴 사업이라, 신품종이 퍼져 나가는 데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어느 순간이 되자, 계절이 변하듯, 단번에 단미 딸기가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단미 품종을 재배하는 농가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연간 2조 원이 넘는 딸기 산업에서 제이에스가 로열티로 챙기는 수익도 연간 천억이 넘어서고 있었다.
거기에 장미와, 인삼 재배로도 상당한 현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걸로 엔시스 테크를 인수하고 새로운 신물질 개발에 투자할 자금은 충당할 수 있었다.
***
“4호점하고 5호점요?”
“그래, 가로수점도 이제는 안정된 것 같으니까, 또, 카페를 늘려야지.”
“사장님은 점포 늘리는 게 재미있으신가봐요?”
“하하, 당연한 거 아닌가, 원래 땅따먹기가 재밌는 거잖아.”
“땅따먹기요”
“그래, 내 영토를 야금야금 늘려나가는 거지. 인류사라는 게 전쟁사라고 하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자신의 영토를 늘려나가는 영토 늘리기 게임 같은 거지. 그러다가 전쟁도 생기는 거고.”
“그런 논리라면 현대에도 그 영토 게임은 계속되는 거네요?”
“총칼 대신, 자본으로 전쟁을 하는 거지, 목표는 도시나 요새가 아니라, 건물과 부동산, 호텔, 아파트 이런 것들로 바뀌기는 했지만 말이야.”
“그럼, 4호점과 5호점은 어디에 내시게요?”
“익선동 쪽이 어떨까?”
“익선동요? 거긴 한옥거리 그런 곳 아닌가요?”
“그래 거기가 요즘 유동인구도 많고 분위기가 독특해서 북카페를 내면 손님들이 많이 몰릴 것 같은데.”
“하긴, 거기가 핫하다고 하더라고요.”
“주말에 한번 가보자고.”
***
익선동 한옥 골목..
“와, 이런 분위기군.”
인사동은 몇 번 와 본 적이 있었지만, 익선동이라는 곳은 좀 낯선 곳이었다. 하지만, 한옥을 개조해서 만든 카페나 식당들 분위기가 제법 독특하고 마음에 들었다.
“길도 좁고, 사람이 너무 많은데.”
주말에 사람이 얼마나 되나 보려고 온 거기는 하지만 워낙 좁은 지역에 사람이 많이 몰리다보니, 너무 번잡한 느낌이었다.
“사장님, 이런 곳에, 북카페가 될까요?”
“음, 지금은 주말이고, 평일에는 좀 다르지 않을까? 이런 한옥골목에 사람이 좀 덜 하면 책 읽기에 딱 좋을 것 같은데.”
일단, 괜찮은 건물이 있다고 했던 부동산 업체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부동산을 통해 알아보니, 50평 규모의 카페를 매매하려는 사람이 있었다. 원하는 가격은 30억 수준...
“아, 이곳인가요?”
진석의 전화를 받고 부동산 직원은 주말인데도 바로 나와 주었다.
“한옥을 개조한 곳이군요?”
“원래 한옥은 아니고, 일반적인 건물인데, 인테리어로 한옥 느낌을 살린 건물입니다.”
약간 통통한 체격의 안경을 낀 부동산 직원은 여기저기 주변 부동산 시세에 대해서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몇 년 전만 해도 평당 3천 수준이었지만, 지금은 6천 수준으로 올랐으니까요. 30억 수준이면, 괜찮은 가격이죠.”
“민지 씨 보기에는 어때?”
“레트로 감성이라고 하나요? 독특해서 좋기는 해요. 여기에 북카페를 만들면 헌책방에서 책 읽는 느낌이 나지 않을까요?”
“아, 맞아, 나도 그 생각했어. 거기에 비까지 내리면, 딱 좋겠는데.”
“비요?”
“그래, 이런 좀 낡은 느낌의 거리에는 비까지 와서 더 우중충해지면 잘 어울리지 않겠어? 진짜 옛날 느낌도 나고 말이야.”
“북카페를 하시려는 건가요? 음, 부동산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별로 추천해 드리고 싶지는 않는데요.”
“왜죠?”
“이렇게 유동인구가 많고, 집객 효과가 좋은 곳에서 북카페는 사람만 많이 몰리고 매출로 이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거든요.”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별 상관은 없습니다. 돈을 벌려고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예? 그럼 왜?”
“뭐, 저에게는 사람들이 책을 읽게 하는 게 곧 돈을 버는 일이라고 할 수 있죠.”
“와, 일종의 문화사업을 하시는 건가요? 재산의 사회환원 차원에서 말입니다.”
“하하, 뭐, 그런 건 아니고 말 그대로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책이든 읽고 상상하게 하는 시간이 저에게는 큰 자산이 된다는 말이죠. 하하. 그나저나, 이 건물 마음에 드네요. 계약하고 싶은데요.”
“아, 그러십니까, 그러시면 저야 그보다 좋은 일이 없죠, 당장 준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