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빨간 사과 (8/183)

빨간 사과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벌써 가게? 오늘 밤은 자고 가지. 새로 지은 집에 방도 많은데.”

“가서, 할 일도 있고요. 서울에 올라가 봐야죠.”

“그럼, 이거라도 가지고 가거라.”

“이게 뭐예요?”

“과수원에서 작년에 딴 사과야. 저온 창고에 보관하던 건데, 진석이 너 오면 준다고 하다가 자꾸 잊어버려서 이제야 주는구나.”

“와, 아버지가 키우신 사과라는 거죠. 잘 먹을게요.”

진석은 사과 한 박스를 받아 들고는 차에 실었다.

“가 볼게요. 그만 들어가세요.”

배웅을 나온 부모님을 뒤로하고, 진석은 서울로 차를 몰았다.

“그러고 보니, 과수원에서 키운 사과는 처음 먹어 보네.”

갈 때마다, 사과를 주신다고는 했는데 집도 짓고 다른 일들로 정신이 없어서 매번 빈손으로 왔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챙겨 주신 모양이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직접 정성스럽게 키운 사과는 어떤 맛일까?

*   *   *

“유동 인구 하면 가로수길이죠.”

“역시 그렇겠죠.”

주말이라 사람들로 거리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비고 있었다. 초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여기저기 가벼운 옷차림의 젊은 사람들, 여자들의 옷차림도 한결 화려해진 모습이다.

“이 건물은 몇 평이나 되는 거죠?”

“대지만 60평이에요. 지하 1층에 지상 3층이고요.”

“그런데 가격이 140억이나 한다고요?”

“비싸기는 하지만, 여기가 가로수길 메인 스트리트니까요.”

새로 북카페 오아시스 3호점, 그러니까, 가로수길 점을 개업하기 위해, 전부터 관심 있던 빌딩을 보러 온 길이었다.

진석을 안내하는 것은, 강남의 유명 부동산 업체의 최은희 부장. 30대 중반에 늘씬한 강남 미녀 스타일의 여자였다. 다리가 길어서 입고 있는 베이지색의 미니스커트가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느낌이다.

사실, 가끔 가로수길에 오면, 자주 보이는 익숙한 건물이었다.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이라 가격이 그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다. 홍대에 대지 154평짜리 6층 건물이 120억 정도였는데, 절반 크기도 안 되는 이 건물이 140억이나 한다니…….

“가격이 상당하네요. 이 주위는 오를 만큼 오른 모양이네요.”

진석의 말에 최은희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맞아요. 가로수길이야 워낙 유명해져서, 더 올라갈 것도 없을 것 같기는 해요. 더구나 여기는 메인 스트리트라서 이미 최고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죠.”

“부동산으로는 투자 가치는 없겠군요?”

“그렇죠. 더 이상 오르기는 힘든 곳이고. 가로수길 자체도 정점에 도달한 느낌이고.”

“하지만, 유동 인구라는 측면에서는 이곳만 한 곳도 없고요?”

“가격 상승을 기대하기보다는 엄청난 유동 인구를 이용해서 비즈니스를 하려는 분에게 적합하죠. 워낙 핫 플레이스라 영업도 영업이고 광고 효과도 있는 곳이니까요.”

최은희의 말대로였다. 부동산 가격이 이미 정점을 찍은 느낌이라, 가격이 더 폭등하기는 어려울 것 같은 곳이었다.

가로수길 가장 메인 거리에, 북카페를 창업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사실, 북카페는 손님당 단가가 높은 업종은 분명 아니었다. 이 정도 가격의 건물, 대지 기준으로 평당 2억 5천만 원이나 지불해야 살 수 있는 건물이다.

면적도 지상 3층을 합쳐 봐야, 150평 정도의 공간. 가격에 비해서 절대로 넓다고 할 수 없는 공간…….

하지만 유동 인구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곳만 한 곳도 없다. 거기에 대해 전국적인 유명세가 있는 가로수길 메인 거리, 여기에 북카페 오아시스 3호점을 오픈한다면 홍보 효과 측면에서는 엄청난 효과가 있을 것이다.

“매입하기 부담스러우시면, 임대도 충분히 가능하고요. 그 외에, 여기서 골목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다른 빌딩도 있고요. 더 넓고 저렴하죠.”

“아닙니다. 이게 맘에 드네요.”

“정말, 이 빌딩을 매입하시려고요. 금액이…….”

“140억이라고 하셨죠?”

“정말, 계약하실 생각이세요?”

최은희는 아직 젊은 청년 같은 외모의 진석을 미덥지 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받은 명함에는 제이에스 바이오라는 생명 공학 벤처 사업을 하고 있다고 하는 남자였다.

하지만 부동산에 관심이 있는지, 각종 빌딩 매매에 대해서 자주 전화를 걸어오는 것이었다.

“물론이죠. 무엇보다 위치가 마음에 들어요. 전, 북카페를 열 생각이라, 유동 인구가 최대한 많은 위치가 필요하거든요.”

“북카페요? 이 좋은 곳에요?”

“사람이 많은 곳이니까, 카페를 하기에는 좋은 곳 아닌가요?”

“손님이야 많겠지만, 여기 부동산 가격이나, 임대료 수준을 생각하면 커피나 음료수를 팔아서는 객단가가 맞지 않겠죠.”

“손님은 문전성시를 이루는 곳이지만, 음료수 가격 정도를 받으면서 책까지 읽게 하면 손님당 이익은 크지 않다는 말이군요?”

“저도 북카페 자체는 나쁜 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여기 이 금싸라기 땅에 북카페는 좀 안 어울려요. 손님이야 많겠지만, 정말, 돈이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그런 문제라면 저도 충분히 생각하고 내린 결정입니다.”

“음, 정말요? 이 건물을 매입해서 북카페를 하신다고요?”

물론, 최은희의 말대로, 이미 한번 정점을 찍은 부동산은 투자 메리트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걸 생각하면, 북카페로 쓸 건물을 140억을 주고 사는 셈이었다. 공간에 수십만 평의 땅을 가지고 있는 진석의 입장에서는 정말 작은 땅…….

가격은 엄청나다. 하지만 이 건물의 위치는 가로수길 메인으로 사람들이 진짜 많은 곳이다.

사실, 진석에게 수백억의 돈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니었다. 공간에 갈 때마다, 한 번씩 수확하는 고려인삼으로만 한 번에 30억 가까운 현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140억이라면, 인삼 농사 4번 정도로 벌 수 있는 돈이었다. 이미 그 정도 가격은 진석에게 큰 의미는 없었다.

대신 진석에게 필요한 것은 시간 포인트였다. 북카페를 찾는 사람이 많을수록, 카페에 머무는 사람이 많을수록, 책을 읽는 사람이 많을수록 진석의 시간 포집기는 더 많은 시간을 포집해 줄 것이다.

“예. 사실, 돈은 그리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어머. 정말요? 하지만, 여기에 북카페라? 책을 보는 손님이 많으면 매출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마이너스 아닌가요?”

“매출도 제 고려 대상은 아닙니다.”

“그럼, 이진석 사장님은 왜 북카페를 하시려는 거죠? 그것도 이렇게 번화한 거리에 말이에요?”

“뭐, 일종의 오아시스를 만들려는 거죠. 공교롭게도 저희 북카페 이름도 오아시스죠.”

“오아시스라면? 사막에 있는 거 말인가요?”

“예, 도시도 사실 어떤 면에서 삭막한 콘크리트 사막이라고 할 수 있죠. 저는 도심 한복판, 그것도 가장 사람들로 붐비는 이곳에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와는 좀 다른 느리고 조용한 공간을 만들고 싶은 거죠.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잠시 쉬어 갈 수 있는 그런 곳 말입니다.”

“어머, 이제 보니 로맨티스트시군요.”

“하하, 그런 건 아니고요. 아무튼, 이 건물 사고 싶네요. 위치가 너무 좋아서요.”

“뭐, 저야, 계약을 하신다면 좋죠. 아무튼 대단하시네요. 자수성가한 청년 벤처 사업가에 벌써 젊은 나이에 엄청난 재력으로 이제는 돈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낭만적인 꿈을 위해, 수백억의 빌딩을 사들인다? 이런 말인 거죠?”

“하하. 뭐, 그렇게까지야. 고수익의 사업을 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엄청난 재력가는 아닙니다. 그저, 돈 걱정 없이 제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을 정도죠.”

*   *   *

가로수길의 새 빌딩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돈이 더 필요했다. 당장, 가장 돈을 쉽게 벌어들이는 사업은 고려인삼이었다.

“역시, 제이에스에서 가져오는 인삼은 최고라니까요.”

금산의 인삼 도매상들에게 진석의 인삼은 최상급의 인삼으로 유명했다. 품질이 좋은 최상급 인삼이라 도매상들끼리도 자연히 진석의 인삼을 사기 위해 경쟁이 붙었고 진석도 처음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인삼을 팔 수 있었다.

“하하. 감사합니다. 품질이야, 어디에 내놔도 최고라고 자부합니다.”

“그나저나, 이 사장님, 금방 부자 되겠어요.”

“뭘요. 여기저기 들어가는 돈이 많아서 항상 적자인데요.”

금산 인삼 도매 센터에서 몇 군데 거래처를 돌자, 금세 30억이 채워졌다. 당장 빌딩 구매에 필요한 돈은 해결된 것이었다.

금산에서 돌아와서는 건축 자재상을 돌며 필요한 자재들을 구매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공간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작업들이 꽤 많았다.

가장 먼저 만들고 싶은 것은 수영장이었다. 한국에도 비싼 집은 많지만, 가격에 비해서 집 자체는 공간이 매우 좁다. 그에 비해, 미국의 집들은 한국의 강남 아파트 가격 정도만 돼도 집에 잔디밭과 수영장이 있는데 말이다.

땅값의 차이가 가장 크겠지만, 아무튼 미국의 주택들을 볼 때마다, 가장 부러운 것이 바로 수영장이 있는 집이었다. 뭔가 풍요로운 미국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진석도 수영장이 있는 집을 가져 보는 게 오래된 꿈이었지만, 돈을 잘 벌어도 한국에서는 수영장이 있는 집 자체가 희귀했다. 차라리 그럴 바에는 진석의 공간에 수영장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필요한 건축 자재들은 파주 창고의 출입구를 통해, 이미 공간으로 옮겨 놓은 상태.

가장 먼저 할 일은, 땅을 파는 일이었다. 수영장의 위치는 오아시스의 바로 옆으로 진석이 체육관으로 쓰는 건물의 앞쪽이었다.

진석이 만들려는 것은 가로세로 각각, 50미터와 25미터, 깊이 2미터의 꽤 큰 수영장이었다.

일단 중장비가 없는 관계로 일꾼들을 총동원해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다행히, 일꾼들은 피로감 같은 것은 없었기 때문에, 쉬지 않고 땅파기 작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삽으로 파는 건 여러 가지로 비효율적이었다.

“역시, 포클레인이 필요한 것인가?”

-포클레인이라면, 땅을 파는 굴착기를 원하시는 겁니까?

“그래? 잠깐. 굴착기도 만들 수 있는 건가?”

-굴착기가 필요하다면, 진흙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진흙 일꾼과 원리는 다르지 않습니다. 공간주님의 시공간 지배력을 이용해서, 굴착기의 형상을 출력한 후에 작업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맞아. 어차피, 진흙 인간들도 흙덩어리일 뿐이고, 진흙으로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다면 포클레인이라고 안 될 거 없잖아.”

마치 아이들이 진흙으로 사람도 빚고, 집도 만들고, 자동차도 만드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굴착기가 필요하시면, 원하시는 굴착기의 이미지를 상상해 주십쇼.

진석은 머릿속을 작업에 필요한 굴착기의 모양을 떠올렸다. 어차피, 굴착기의 작동 원리는 진석의 공간 지배력이니까, 복잡한 엔진이나 내부 구조는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커다란 포크와도 같은 굴착기의 외형이면 충분했다.

-공간주님이 상상하신 이미지를 스캔 중입니다. 이미지를 보정해 굴착기를 출력하겠습니다.

땅이 갈라지며, 흙 속에서 굴착기의 윗부분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천천히 위로 올라오던 굴착기는 진흙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외에는 보통 건설 현장에서 보이는 굴착기의 모습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혼자서도 저절로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더 커지고 모양이 특이해진 진흙 일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포클레인이 땅속에서 솟아올랐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땅파기 작업이 시작되었다.

처음 계획한 50미터 길이의 땅을 파고, 그다음은 거푸집으로 콘크리트를 치기 시작했다. 시간을 가속해 콘크리트가 다 양생이 되자, 그 위에 일꾼들을 동원해 푸른색의 타일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타일 줄눈까지 넣고 나자, 그럴듯한 수영장이 완성되었다.

아직 물은 없었지만, 산뜻한 하늘색 타일로 만든 수영장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마지막으로 양수기로 샘에서 물을 끌어와서 수영장을 채우자 푸른 타일 덕분에 아름다운 푸른빛으로 빛나는 진석의 풀장이 완성된 것이다.

“휴우. 겨우 완성인가?”

진석은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수영장에 몸을 담갔다. 시원한 물속에 몸이 들어가자, 전신의 피로가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수영을 즐기다가 나와 보니, 배가 고팠다. 집으로 들어가서 냉장고를 열려는데, 냉장고 옆의 사과 박스가 보였다. 아버지의 과수원의 사과였다.

“그러고 보니, 아직 안 먹었잖아. 어디 한번 먹어 볼까.”

진석은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작년에 수확한 사과여서 그런지 약간 푸석한 식감. 하지만 단맛은 괜찮았다.

“아주 싱싱하지는 않아도 맛있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고생하며 키운 사과라 그런지, 단순한 사과 그 이상의 맛이 느껴졌다. 그렇게 사과를 먹다가 씨 부분만 남게 되었다.

“잠깐. 사과 씨를 심어 볼까.”

보통 사과나무는 묘목을 사서 심는 게 보통이지만, 씨를 심어도 나무가 자라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더 걸리기는 하겠지만, 공간에서 시간이란 진석이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었다.

진석은 먹고 남은 사과 씨앗을 흙 속에 묻었다. 그리고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씨를 심은 흙 속에서 작은 잎이 솟아나더니, 점점 성장하며 작은 묘목이 되었다. 시간을 더 가속하자, 작은 묘목은 쑥쑥 자라나며, 커지고 있었다. 꽃이 피고 지기를 반복하며 성장하던 사과나무에 열매가 열리기 시작했다.

빨갛게 익은 사과가 어느새 나뭇가지마다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따로 사과 묘목 없이도 씨를 심어서 충분히 나무를 성장시킬 수가 있었다. 사과나무에 열린 사과를 따서, 한 입 베어 물어보았다.

나무에서 직접 딴 사과는 확실히 싱싱함이 살아 있었다. 수분이 더 많고 새콤하고 달콤한 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같은 품종이지만 저장고에서 보관된 것과 자연에서 바로 딴 것의 차이인지, 막 나무에서 따낸 사과의 맛이 훨씬 괜찮은 느낌이었다.

“이참에 사과도 심어 봐야겠는데.”

사과나무도 키워 보고 싶은데 어디가 좋을까? 아무래도, 지금 있는 오아시스 일대보다는 양봉을 하기 위해 만들어 낸 산이 괜찮을 거 같았다. 산의 비탈은 아버지의 과수원과 비슷한 지형이었다.

진석은 일꾼들을 동원해, 나무에서 다 익은 빨간 사과들을 수확했다. 그리고, 사과에서 씨앗을 분리해서 산의 비탈진 곳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씨앗을 묻기 시작했다.

진석이 다시 시간을 가속하자, 산의 여기저기에서 사과나무들이 자라났다. 찔레장미뿐이던 산의 주위로 사과꽃들이 피는 모습이 보였다.

진석은 일꾼들을 움직여, 다 자란 사과나무의 열매들을 모아서 사과나무의 숫자를 계속 늘려나갔다. 몇 번을 증식 작업을 반복하자, 산비탈은 사과나무들로 무성하게 채워져 나갔다.

산비탈과 그 주위로 계속 퍼져나가는 사과나무들…….

“이 정도면, 사과는 실컷 먹겠군.”

진석은 산 여기저기를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가 주신 사과 씨앗을 심어 증식시킨 나무들이라, 맺힌 열매도 아버지의 과수원과 같은 종류였다. 다만, 신선도나 수분이 더 풍부한 느낌이었다.

진석은 산을 돌아보며, 사과 몇 개를 따서 맛을 보기 시작했다.

“어라. 이건 왜 이렇게 열매가 작지?”

다른 사과들은 크기가 엇비슷한 모습들이었는데 유독 눈에 띄는 열매가 작은 사과나무가 보였다.

“이상하네, 이것만 왜 사이즈가 작은 거지?”

나무에 다가가 열매를 하나 따 보니, 크기도 좀 작고 껍질의 촉감도 다른 느낌의 사과였다.

“이것도 변종인가?”

우성이든 열성이든 자연계에서 식물의 변종이 일어나는 일은 흔한 일이기는 했다.

“모양은 좀 볼품없는데 맛은 어떨까?”

진석은 빨갛게 익은 작은 사이즈의 사과를 손으로 땄다. 그리고 역시 한 입 베어 물어보았다.

“음, 부드럽고, 단맛이 강하네.”

거기에 속까지 온통 붉은색이었다.

“안까지 빨갛게 익었네.”

이상하게 딱 한 그루에서만 속까지 빨간 사과가 열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맛은 괜찮아서 진석은 사과나무에 열린 작은 크기의 빨간 사과들을 따서 바구니에 담았다.

*   *   *

은하수 농장.

“어머.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찔레장미들을 키우는 협력 업체인 은하수 농장에 도착하자, 농장의 주인인 서은주가 반갑게 진석을 맞았다. 거기에 공간에서 딴 사과들을 전해 주자, 약간 의외라는 얼굴이었다.

“예, 선물입니다. 이번에, 유럽 수출이 잘된 기념으로 준비했어요.”

진석의 말에 서은주도 미소를 지었다. 이번에 최초로 유럽으로 수출한 찔레장미와, 장미 모종들은 무사히 유럽까지 수출을 마친 후였다.

“정말요? 와, 뭔지는 모르겠지만 고맙습니다.”

“이번에 유럽까지 장미를 수출했잖아요. 우리의 첫 번째 유럽 진출이니까, 제가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어요.”

은하수 농장과 협업으로 유럽에 수출한 장미가 2천만 불, 한화 250억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고 있었다. 물론, 은하수 농장 외에도 인근의 화훼 농가들에게 하청 형식으로 장미 생산을 맡는 방식이었다.

수십 개의 농장들이 일종의 농업 조합처럼 움직이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사과를 선물로 사 온 건가요?”

“사 온 건 아니고, 직접 키운 겁니다. 이 사과는 좀 특이해요. 맛이 더 달고 속까지 빨갛더라고요. 거기에 맛은 복숭아에 가까운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나요.”

“그래요. 저도 한번 먹어 볼까요?”

서은주는 진석이 들고 온 박스에서 작고 빨간 사과를 꺼내 한 입 베어 물었다.

“음, 이건 사과 같기는 한데, 보통 사과보다 훨씬 달아요. 거의 딸기 수준인데요.”

아무래도, 공간이라는 특수한 재배 환경에서 약간의 변이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주셨던 처음의 그 사과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의 열매가 되어 있었다.

“저희 회사에서 개발한 신품종입니다. 좀 독특하죠?”

“맛도 특이하고, 속살이 빨갛게 익어 있는 게 마치 빨간 장미 같네요.”

“장미요?”

“예, 사과나무도 장미과 식물이잖아요. 원래는 사과나무와 장미는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면, 같은 종류죠. 차이라면, 사과나무는 열매가 장미꽃은 꽃이 가장 중요하다는 거죠.”

“꽃과 열매의 차이인가요?”

“맞아요. 같은 장미 계열의 조상을 가지고 있지만 장미는 꽃이 발달하고 사과는 열매 위주로 두 갈래 길로 뻗어나간 거죠.”

“듣고 보니, 재밌네요. 장미와 사과 모두 꽃과 열매로는 각자 자기 분야에서 가장 성공한 식물이 되었군요.”

“그러게요. 아무튼 이 특이한 사과 잘 먹을게요. 그런데 이거 이름이 뭐예요?”

“딱히 생각한 이름은 없는데. 은주 씨 말을 들어 보니, 겉도 빨갛고 속도 빨갛게 익어서, 반으로 갈라놓으면 빨간 장미랑 비슷하네요. 그래서 장미사과라고 부르려고요. 앞으로는 말이죠.”

“장미사과요?”

*   *   *

신촌의 북카페 오아시스 2호점이 오픈을 했고, 얼마 후에는 가로수길의 3호점도 오픈을 앞두고 있었다.

“민지 씨가 고생이 많아.”

“뭘요? 제가 할 일을 하는 건데요.”

가로수길 3호점의 개업에 관한 일들은 유민지가 책임을 지고 진행하고 있었다. 물론, 진석이 빌딩 매입을 마무리해서, 건물 인테리어까지는 해 놓은 상태였다.

“앞으로는 3호점은 유민지 점장님 책임이니까, 잘해야 돼.”

“예, 사장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하하. 충성이라고?”

핸드폰이 울렸다. 서은주였다.

“무슨 일이지? 여보세요.”

-사장님, 지난번에 저한테 주신 그 사과 말이에요.

“아, 그게 왜요?”

혹시 사과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특이한 변종 사과라 독이 있다든지 해서 부작용이 생긴 걸까?

-그 사과 더 구할 수 있을까요?

“아, 사과를 더요? 맛이 괜찮은 모양이죠?”

-그게, 맛도 맛이고, 제 조카가 아토피가 심하거든요.

“아토피요? 아토피라면 피부 질환이죠?”

-맞아요. 피부가 건조해지고 그러면서 막 가렵고 그러는 건데, 우리 언니 아들이 그게 좀 심해요.

“그런데 사과와 아토피가 무슨 관계죠?”

-우연인지는 몰라도, 제가 이 사장님이 주신 장미사과가 맛있어서, 언니네 집에 절반을 가져다줬거든요. 그런데 언니 아들이 그 장미사과를 몇 개 먹은 후에는 아토피가 많이 좋아졌다는 거예요.

“정말요? 그럴 리가, 사과가 맛있기는 하지만, 그런 효과가 있을까요?”

-저도 잘은 모르겠지만, 아토피에 좋은 식품이 있다는 말은 있거든요. 일종의 알레르기 반응이라, 자연식품을 먹으면 아토피가 완화되는 경우가 있대요. 그 장미사과도 그런 효과가 있을 수 있잖아요.

“음,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럼, 장미사과는 제가 택배로 더 보내 드릴게요.”

-정말요? 고마워요, 이 사장님.

“하하. 고맙기는요. 서은주 사장님 덕분에, 저도 장미 수출로 큰돈을 벌고 있는걸요. 장미사과도 보내 드리고, 언제 우리 식사나 해요. 제가 그동안 수고해 주신 보답으로 멋진 식사 대접하고 싶어요.”

-뭐, 나중에 그러죠. 고마워요, 이 사장님.

“사장님, 무슨 전화예요?”

“어, 은하수 농장, 서은주 사장님. 내가 사과를 가져다준 게 있는데, 더 보내 달라고 해서.”

“사과요?”

“그래, 신품종 사과가 나왔는데, 나중에 민지 씨도 좀 가져다줄게. 주변에 혹시 아토피를 앓고 있는 사람 없어?”

“아토피요? 우리 고모네 딸이 아토피가 좀 있어요. 초등학생인데, 밤에 잠도 잘 못 잔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내가, 아토피에 좋은 사과가 있는데, 고모 딸한테 사과를 좀 전해 줄래.”

“사과요?”

서은주 사장의 말대로, 공간에서 가져온 장미사과가 뭔가 특별한 효능이 있는지도 몰랐다. 아토피 같은 피부 질환에 큰 효과가 있다면, 그 자체로 굉장한 상품 가치가 있는 품종이 될 수도 있었다.

*   *   *

북카페를 둘러보고, 공간으로 향했다.

“공간에서 재배한 과일이 어떤 특별한 효능이 있을 수도 있는 건가? 아니면, 꿀이라든가?”

-특별한 효능이라면, 특정한 질환의 치료 효과나 아니면, 통증이나 염증을 억제하는 효과 말입니까?

“그래. 약은 아니지만, 식품으로도 면역력이 강화된다거나, 피로 회복이 되는 경우가 있잖아?”

-모든 과일이나 식물, 그 외에 자연에서 채취된 식품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영양분과 비타민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영양분들은 신체에 다양한 영향을 미치고는 하죠.

“그러니까, 특별한 효능이 있다는 말인가?”

-식물은 재배 환경에 따라, 체내에 다양한 성분을 가지게 됩니다. 공간은 외부 세계와는 다른 환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재배된 작물들의 성분도 다를 수 있습니다.

“음, 그래? 환경에 따라, 과일의 성분도 달라진다?”

-특히 공간의 산에서 재배한 식물들은 더 환경적으로 특이성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산? 산이 왜?”

-공간에서 지표 위로 불룩 솟은 지형은 공간 시스템의 특성상, 더 많은 에너지가 모이게 됩니다.

“산에 더 많은 에너지가 모인다고?”

-공간 시스템의 설계 구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에서도 높은 산은, 신들이 산다거나 산신령이 사는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까. 실제로 지표면에서 높이 솟은 지형은 공간 시스템의 에너지가 가중되는 지역으로 높은 에너지 상태에 의해 특이한 환경이 만들어집니다. 더구나 지금은 공간에 산은 단 한 곳뿐이라, 에너지가 단 한 곳뿐인 산으로 몰려드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하긴, 무슨 영산이니 해서 산에는 신령스러운 기운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다. 그래서 기를 받으러 산에 간다는 사람들도 있고, 산속에서 수련을 하거나, 산의 산신령의 기운을 받았다는 무당도 있고…….

역시, 이곳 공간의 산도 뭔가 특별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이봐, 그러면, 내가 공간의 산에서 가져간, 장미사과가 아토피에 정말 효과가 있는 거야?”

-일반적인 가능성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뿐입니다. 구체적인 개별적 사건에 대해 관여하는 것은 시스템이 금지하고 있는 일입니다.

“뭐야? 두루뭉술하게 대답할 뿐이라는 건가?”

아무튼 더 이상 구체적인 대답은 들을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 보는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   *   *

“사장님, 지난번 그 사과 말이에요.”

“어, 민지 씨. 그 고모님 따님은 어때? 아토피에 좀 효험이 있다고 해?”

“예, 그 사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아토피가 많이 줄었대요. 잠도 잘 자고.”

“그래? 다행이네.”

진석은 공간의 산에서 그 장미사과를 대량으로 증식시켜 놓았다. 그리고, 서은주와 유민지 외에도 SNS에 아토피 환우들의 커뮤니티에 장미사과를 소개하는 글을 올려놓았다.

그런 곳에는 원래 아토피에 좋다는 각종 민간요법이나 식품들에 대한 소개가 많이 올라오는 곳이라, 진석의 글은 별다른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그렇게 세 명 정도에게서 장미사과를 구매할 수 있냐는 문의가 들어왔다. 생각보다 관심을 받지 못해서 실망하기는 했지만, 일단, 세 명에게 장미사과 한 박스씩을 무료로 보내 주었다.

그리고 반응을 기다리기로 했다.

*   *   *

“여기 분위기 좋은데요.”

서은주는 와인을 마시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석은 약속대로 은주를 강남의 한우 전문점으로 초대해서 저녁을 대접하는 중이었다.

“예. 저도 직원들하고 몇 번 와 봤는데. 고기도 맛있고, 분위기도 괜찮죠? 여기서 와인하고 한우를 먹으면 잘 어울리더라고요.”

“직원들이라면, 거의 다 여직원들이죠?”

“하하. 뭐, 본사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여직원들이 많죠.”

서은주는 평소와는 좀 다른 느낌이었다. 농장에서 일할 때는 언제나 청바지 차림이었는데, 오늘은 무릎 위로 올라오는 검은색 미니스커트 차림이었다.

원래 날씬한 체형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는데 미니스커트에 하이힐까지 신고 나오자, 농장에서 자주 보던 서은주와는 완전히 다른 섹시한 몸매를 가진 여자의 모습이었다.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다 여자인 것 같던데요. 파주에 창고에 근무하는 직원들 빼고는요.”

“그렇기는 하네요. 사무실 근무가 많고 북카페에서 일하는 직원들이라 그렇죠. 그나저나, 오늘은 좀 색다른 분위기네요.”

“뭐가요?”

“아까, 멀리서 보고 다른 분인 줄 알았어요.”

“아, 치마를 입어서요? 치마 입은 건 처음 보죠?”

“거의 청바지만 입고 있는 것만 봐서, 청바지만 입는 분인 줄 알았죠.”

“농장에서는 그게 제일 편하거든요. 그나저나 지난번에 주신 장미사과 덕분에, 언니한테 큰소리 좀 치게 생겼어요.”

“조카분 아토피가 많이 좋아졌다고요?”

“예. 사실, 아토피가 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병이잖아요.”

“음,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딱히 치료 방법은 없는 거라고.”

“맞아요. 만성 질환이고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거라, 공기 좋은 캐나다로 이민 가는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이들 아토피 때문에 말이에요.”

“아이들이 아프면, 부모 입장에서도 힘이 들죠. 이민을 가는 일도 쉽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괴로운 질병이라는 거죠.”

“저도 직접 겪어 본 건 아니지만, 많이 힘들다고 하더라고요. 아무튼 언니가 성화예요. 그 장미사과 좀 더 보내 달라고.”

“하하. 그거라면,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더구나, 서은주 사장님이라면 더더욱 챙겨 드려야죠. 자, 그러지 말고, 건배나 할까요.”

진석이 먼저 잔을 들어 올리자, 서은주도 잔을 들었다.

“자, 우리의 장밋빛 미래를 위하여.”

“위하여…….”

*   *   *

“사장님, 장미사과 주문이 계속 들어오는데요.”

“그래?”

장미사과가 확실히 효과가 있었던 건지, 아토피 커뮤니티 희원에게 무료로 보내 주었던 사과를 먹어 본 환자들이 효과를 보았다는 후기가 속속 올라왔다. 주문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주문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수정 씨, 아토피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가 봐요.”

“그럼요. 서울에서는 아토피로 고생하는 아이들이 꽤 많아요.”

아토피라는 말은 많이 들었어도 막상 주위에서 환자를 보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미 2천년대 이후로 아토피 환자가 급증해서 이제는 우리나라에만 2백만, 거기에 치료가 필요한 중증의 환자만 백만을 넘는다고 하니, 환자들을 숫자만 해도 엄청난 질병이다.

하지만, 치료제는 거의 전무하고, 그나마 얼마 전에 나왔다는 신약은 가격이 수천만 원대로 가격이나 이런저런 이유로 사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대부분은 민간요법이나 대체 요법에 많이 의존하고 있었다.

“아토피 치료를 잘한다는 병원들이 있는 모양인데, 정확하게 검증된 치료법은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또, 어릴 때 심하다가 나이 들면서 좋아지는 경우도 많아서, 여러 군데 병원을 떠돌다가 저절로 좋아지기도 하고요.”

진석이 공간에서 가져온 장미사과는 시중에 떠돌고 있는 여러 가지 치료법들과는 달리, 효과가 아주 탁월하다는 반응이었다.

[장미 사과 너무 좋네요. 이거 먹고 아이 피부가 확실히 달라지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예요.]

[한방 병원에서 몇 년째 치료 중인데 별 차도가 없다가 이번에 장미사과로 많이 좋아졌어요.]

[사과 홍보하려는 게 아니라, 효과가 너무 좋아서 정보 공유 차원에서 후기 남깁니다. 장미사과, 아토피에는 진짜 효과 있어요.]

커뮤니티에 장미사과로 효과를 봤다는 후기가 올라오면서, 장미사과를 구하고 싶다는 주문이 폭주하고 있었다.

“사장님, 이 주문 다 처리할 수 있는 건가요?”

“일단은 선착순으로 500상자만 배송을 해 보자고. 사과는 내가 구해 올 테니까.”

“그런데 그 장미사과는 어디에서 가져오시는 거예요?”

*   *   *

공간의 문이 열리자 진석은 바쁜 업무로 뻐근해졌던, 어깨와 목이 자연스럽게 이완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돈은 잘 벌고 있었지만, 회사 커지면서 업무량도 많아지고 시간에 쫓겨 처리할 일도 많아졌다. 여기저기 가야 할 곳도 많아져서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나 싶을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공간에 들어오면 그런 바쁜 일상들은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공간의 시간은 온전히 진석의 것이었다.

“이번에는 한 1주일 쉬다가 갈 생각이야.”

-많이 피곤하신 모양이군요?

“이번 주에는 좀 일이 많았어. 북카페 오픈하는 것도 그렇고.”

진석은 공간에 돌아오자마자, 체육관으로 향했다. 체육관에는 지난번에 가져온 자전거가 있었다.

머리도 시킬 겸, 자전거를 타고 오아시스와 산 주위를 자전거를 타고 돌기 시작했다. 산을 제외하면 평지들이 대부분이라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기에는 괜찮은 편이었다.

“좀 더 빨리 달려 볼까.”

천천히 산책하듯 자전거를 타다가, 운동량을 높이기 위해 페달을 힘껏 밟기 시작했다. 그렇게 오아시스를 몇십 바퀴 돌고 나자,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휴우. 땀을 흘리니까, 스트레스가 좀 풀리는 기분이네.”

진석은 자전거를 체육관에 넣어 두고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풀로 향했다. 길이 50미터의 수영장은 진석 혼자 쓰기에는 상당히 큰 느낌이었다.

시원한 물속에 들어가 몸을 식히고 나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수영을 한참 즐기며 몸을 풀어 주다가 수영장 위로 올라와 야자수 그늘에 앉아 시원한 맥주를 마셨다.

그렇게 편안하게 누워 있자 눈꺼풀이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공간의 장점은 자고 싶을 때 자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석은 나른하게 잠이 몰려오자 그대로 눈을 감고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한숨 자고 났더니, 몸이 정말 가벼웠다. 거기에 잠에서 깨자마자, 진석이 산에서 채취한 토종꿀로 만든 딸기 스무디를 한 잔 먹었더니, 약간 나른하던 몸이 확 깨어나며, 몸에서 활력이 솟고 있었다.

“역시, 산에는 공간의 에너지가 모인다더니, 장미사과도 그렇고, 이 벌꿀도 뭔가 피로 회복 효과가 있는 게 분명해.”

공간의 평지에서 재배하는 고려인삼도 품질이 훌륭하기는 하지만, 그저 품질이 좋은 수준에 불과했다. 질 좋은 인삼을 넘어서는 효능은 아니었다. 하지만, 산에서 생산한 토종꿀이나 장미사과는 확실히 뭔가 그 품종이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특별한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푹 쉬었으니, 일을 좀 해 볼까.”

일단 산에 심어 놓은 사과나무들을 더 증식해야 했다. 장미사과의 주문량이 상당해서, 주문량을 맞추려면 나무를 몇 배로 더 늘려야 했다.

진석은 일꾼들을 데리고 산으로 올라갔다. 장미사과를 더 심기 위해서, 전에 많이 심었던 흑판수들은 잘라내야 했다.

수십, 수백 그루의 흑판수들을 잘라내자, 그 나무들의 양도 어마어마했다. 원래 흑판수 목재는 연하면서도 단단해 합판도 만들고 가구 제작에도 많이 쓰인다고 알려져 있었다.

일단 흑판수들을 벌목하고 빈자리에는 장미사과를 심어서 증식하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몇 차례 증식 작업을 거치자 산의 장미사과 나무들은 처음보다, 세 배 정도로 면적이 늘어나 있었다.

덕분에, 500상자 정도의 장미사과를 수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장미사과 묘목도 만들어서 시골에 계신 아버지에게 가져다드릴 생각이었다.

아버지 과수원에서도 잘 자라는지, 그리고 이 산에서 생산한 장미사과처럼, 아토피에 효과가 있을지 실험을 해 보려는 것이었다.

벌꿀도 채취하고, 사과도 수확하고, 그리고 벌목한 흑판수들까지…….

일단, 일꾼들을 동원해 꿀과 사과는 오아시스 옆의 창고 건물로 옮겼고. 흑판수들도 산 아래로 가져가 뭔가를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그동안 건축이나 집짓기에 관한 동영상들을 많이 구해 놓은 것들이 있었다. 그걸 진흙 일꾼들에게 많이 보여 줘서, 이제는 전문가 수준의 건축 기술을 가진 일꾼들도 제법 있었다.

“원래, 목재로 쓰는 나무니까, 잘 건조해서 목조 주택을 지어 볼까.”

일단은 나무를 잘라서 건조 작업에 들어갔다. 건조는 자연건조 방식, 진석은 시간을 가속해서 나무들을 최상의 상태로 건조시켰다.

그다음은, 목수 능력을 가진, 일꾼들을 동원해 목조 주택을 지어보는 것이었다.

지금, 공간에 있는 건물들은 모두 진석이 땅속에서 출력해 낸, 일종의 진흙 건물들이었다. 비가 오지 않는 건조한 공간의 기후에는 잘 어울리는 건물들이었지만, 야간 투박한 모습이라 흑판수 목재들을 이용해서 좀 더 세련된 목조 주택을 지어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설계도나 그런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 노트북에 시골집 설계도면이 있었지.”

진석이 부모님에게 지어 드린, 과수원 옆의 전원주택을 지으면서 건축 설계 사무소에서 받아 본, 도면이 있었다.

공간에는 주거 공간 이외에도 간단한 사무실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진석은 사무실에서 도면을 프린트하기 시작했다.

그다음은 진흙 일꾼들이 도면을 바탕으로 목조 주택을 짓기 시작했다. 이미 전에 섀시 작업이나 수영장 건설 작업을 해 보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그보다, 몇 단계 더 복잡한 작업이었다.

마침 유튜브에 시골 목수라는 분이, 목조 주택 건설 과정을 일일이 촬영해서 올려 놓은 영상들이 있었다.

목수 일을 하시면서 유튜브가 유행하니까, 심심해서 찍어 본 거라고 하는데, 의외로 전원주택이나 귀촌, 집 짓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 구독자가 20만을 넘고 있었다.

시골 목수가 올려놓은 영상에는 터파기 작업부터 시작해서, 목조 주택 자재의 특징, 목조 주택을 지을 때 해야 하지 말아야 하는 일, 기타 주택 건설 과정이 세세하게 영상으로 촬영되어 있었다.

콘텐츠 자체가 목조 주택을 짓는 과정이라, 분량을 위해서라도 설명이 굉장히 디테일했고, 자신이 동료들과 직접 만드는 과정을 하나하나 순서대로 보여 주며 집 한 채를 완성하는 내용이었다.

진석은 건축 쪽에 학습 과정을 거친, 일꾼 50명 정도를 모아 놓고 체육관에서 유튜브를 상영하기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보고 배우라고. 저기 목재들로 멋진 집을 지어야 한다는 말이야.”

몇 달 동안 진행된 영상들이라 분량도 상당했지만 진석은 시간을 가속해, 교육을 빨리 진행시켰다.

교육 과정을 마치고, 본격적인 작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터파기를 하고, 그다음으로 바닥에 배관을 설치하고 버팀 콘크리트를 깔고 기초 먹놓기까지 마치고 나자, 갑자기 일꾼들이 멈추어 섰다.

“뭐야? 왜 하던 걸 멈추는 거야?”

일꾼들은 진수 앞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뭐지?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하지만 진흙 인간들은 말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동안은 단순 작업들이라 진수가 하나하나 작업을 지시하는 경우가 많아서 대화라는 것은 필요하지가 않았다. 진수의 명령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작업이 복잡해지면서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필요한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이봐, 일꾼들이 나한테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일꾼들은 아직 말을 할 수 없습니다. 입도 없고요. 공간주님께서 일꾼들을 창조할 때, 입을 만드는 것도 생략하셨으니까요.

“그럼, 입을 만들면, 말을 할 수 있는 건가?”

-입이 없어도 언어 능력을 추가하시면, 의사소통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입을 만들면 더 자연스럽겠죠.

“입이 없어도 언어 능력이 있으면, 의사소통이 된다? 하지만 입이 있으면 더 자연스럽다? 그래 뭐, 아무튼, 입도 만들고 언어 능력도 필요하다고.”

-공간주님, 창조 스킬 중에, 언어 능력을 추가하시겠습니까? 일꾼들에게 입 모양을 만드는 것까지 포함해서 5천 시간 포인트가 사용됩니다. 언어 능력 추가를 하시겠습니까?

“그래, 언어 능력을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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