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과 꿀
“이게 다 뭐예요?”
“보면, 모르냐? 벌통이지.”
새로 지은 전원주택을 구경하고, 아버지의 과수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과수원 앞쪽에 윙윙거리는 소리와 함께, 벌통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양봉도 하세요?”
“그래. 저게 농가에서 부수입 올리기에는 괜찮거든. 전부터 하고 싶었는데 마침, 양봉하다가 그만둔 사람이 있어서, 내가 벌들을 다 인수해 왔지.”
“아버지도. 뭐 하러 힘들게 양봉을 해요. 과수원만 해도 힘든데.”
“괜찮아. 벌 키우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다. 너, 아버지가 키운 벌꿀 좀 먹어 볼래?”
“예?”
아버지는 진석이 모르는 사이에 양봉을 시작해서, 이제 수확한 꿀까지 있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디선가 꿀이 가득 들어 있는 유리병 하나를 들고 오셨다.
“좀 먹어 봐. 토종꿀이라, 진짜 좋은 거야.”
“토종꿀요? 그러고 보니, 꿀 색깔이 다르네요.”
아버지가 들고 오신 병에 들어 있는 꿀은 진한 갈색으로 보통 연한 황금빛을 띠는 일반 꿀하고는 좀 달라 보였다.
“그래. 이건, 자연 야생꿀이다. 한봉이라고 하지.”
“한봉요?”
“그래, 전통 한국 방식이라고 할까. 여기 앞에 보이는 양봉 벌통이 아니라, 흙으로 벌집을 산속에 만들어 놓고, 1년 동안 가만히 놔두는 거야. 자연 상태로. 그리고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거지.”
“와, 그래요? 양봉하고는 다른가 보네요.”
“양봉이야, 벌통에 꿀이 차면, 수시로 꿀을 수확하는 거니까. 그러면, 벌들은 먹을 게 없잖아. 그래서 벌들한테는 설탕물을 먹이고 그런 식이지. 그러다 보니, 벌들한테도 좋지 않고. 자연스럽게 순수 꽃에서 채취한 꿀이라기보다는 설탕 꿀이 되는 경우도 많고.”
“오, 그래서 색깔부터 다르네요.”
“그리고 자연에서 1년을 숙성한 숙성 꿀이니까, 아무래도 다르지. 벌꿀 성분이 몸에 좋다는 건,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전해지는 이야기인데, 그건, 이런 자연꿀을 말하는 거야. 나도 들은 이야기지만, 자연 상태에서 1년 이상 숙성을 거치면, 꿀의 성분이 변해서 피로 회복이나 면역력 기능을 강화시키는 성분이 늘어난다고 하더구나.”
“말하자면, 이게 진짜 꿀이네요.”
“그래. 양봉 방식은 달콤한 맛은 그대로지만, 예전부터 신들의 음료라고 불리던 벌꿀의 진짜 효능은 없는 거지. 양봉 꿀은, 숙성 꿀이 아니니까 달기만 한 거야. 그저 달달한 꿀인 거지.”
진석의 아버지가 주신 꿀을 한 숟가락 맛보았다. 확실히, 맛이 진하고 향도 훌륭했다. 거기에 몸에 좋은 성분도 많이 들어 있다고 하니, 왠지 먹고 나서 힘도 솟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왜 토종꿀이 아니라, 양봉을 하세요?”
“토종꿀은 진짜 좋은 꿀이지만, 말 그대로 야생에서 꿀을 채취하는 거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생산량도 적거든. 물론, 가격은 토종꿀이 훨씬 비싸. 양봉 꿀보다 5배 정도는 더 받을 수 있지만 생산량도 그만큼 적어서 크게 이득이 되는 정도는 아니지.”
“음, 그렇겠네요.”
“거기다, 산속에 벌통을 만들어 놓고 1년 정도 기다려야 하는 거라, 중간에 벌들이 죽거나, 누가 훔쳐 갈 수도 있고. 아니면, 야생 동물들이 벌통을 망가뜨릴 수도 있어서, 여간 신경 쓸 일이 많은 게 아니거든.”
“그래서, 양봉보다 더 비싸고 좋은 꿀이 나오지만, 양봉이 더 편하고 이득이라는 말이군요.”
“그래. 아무래도, 빨리 수확하고 판매도 쉽고 그런 양봉이 농가에서 하기에는 더 유리하지.”
아버지는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을 위해서, 어렵게 구한 토종꿀을 내오신 모양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토종 벌통은 인근의 산속에 하나를 만들어 놓고, 시험 삼아 해 보신 거라고 했다.
직접 토종꿀을 키워 보니, 수확량도 적고, 1년을 기다리는 토종꿀보다는 양봉이 더 낫다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었다.
“토종꿀은 진짜 좋은 거니까, 우리 식구들이나 먹으면 되지, 뭐.”
“하하. 그러면 되죠.”
“아무튼, 우리 아들이, 집도 새로 지어 주고 이제 아빠는 걱정이 없구나.”
“뭘요? 이제 일은 좀 쉬엄쉬엄하세요. 돈은 제가 충분히 버니까요.”
“그래, 서울에서 하는 사업은 그렇게 잘되는 거냐?”
“예. 이번에 빌딩도 하나 샀어요. 언제 한번 서울 오세요. 제 빌딩 보여 드릴게요.”
“그래, 농사일 한가할 때, 한 번 가서 봐야겠구나. 우리 아들 얼마나 성공을 했는지 말이야.”
“하하……. 아버지도 참……. 하하…….”
* * *
시골에 내려가니 어머니도 맛있는 음식도 해 주시고, 토종꿀도 한 통 받아 오고, 그리고 아버지에게 부탁해서 토종벌도 분양을 받아 왔다.
아버지는 토종벌 통을 만드는 법을 물어보고, 벌도 분양해 달라는 진석을 의아한 눈으로 보시기는 했지만, 회사에서 연구용을 키워 볼 거라는 말에 흔쾌히 분양을 해 주셨다.
서울에 오자마자 꼬마 빌딩으로 들어가, 공간의 문을 열었다. 밖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공간에 들어올 때마다, 이제는 너무나 편안함을 느낀다.
따뜻하고 건조한 기후, 누구의 눈치도 볼 것 없는 자유로운 나만의 시간과 공간. 아름다운 오아시스에 진석이 건설한 여러 건물들은 진석이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었다.
진석은 공간에 들어서자마자 일단 냉장고에서 시원한 맥주를 꺼내 마시고는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그렇게 늘어지게 낮잠을 즐기고는 일어나 본격적인 작업을 시작했다.
이번에 계획한 사업은 토종벌을 키워서 꿀을 생산해 보는 일이었다. 대충 시세를 보니, 토종꿀이 1㎏에 15만 원 이상으로 기존 양봉 꿀보다 훨씬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하지만 값이 비싸도 생산이 어려워서 토종꿀의 점점 생산은 줄어드는 추세였다. 한번 도전해 볼 만한 일인 것 같았다.
“음, 그런데, 아버지가 토종꿀 통을 만들어 놓은 곳은 산속이던데, 여기는 산이 없잖아.”
그러고 보니, 공간은 모두 평지뿐이었다. 벌통을 꼭 산속에 만들어야 하는가 싶기도 했지만. 이번 기회에 공간에 산을 만들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이봐, 공간에는 산을 만들 수는 없는 건가?”
-산이라면, 지표면이 상승해서 불룩 솟은 지형을 말하시는 겁니까?
“뭐, 그런 걸 보통 산이라고 하지. 공간의 바닥을 변경해서 산을 만들고 싶은데.”
-그거라면 가능합니다. 공간의 특정 지형을 결정하는 건 공간주님의 권한입니다. 다만 지형을 기존 형태에서 변경할 경우 추가로 100시간 포인트가 사용됩니다.
시간 포인트라면, 충분히 벌어들이고 있었다. 진석은 오아시스에서 좀 떨어진 곳에 산을 만들기로 했다.
-산을 만드시려면, 만들려는 산의 이미지를 떠올려 주십쇼.
“산의 이미지라?”
아주 큰 산을 만들려는 건 아니었다. 진석은 전에 살던 아파트 앞에 있던 야산을 떠올렸다.
-공간주님이 상상하신 산의 이미지를 스캔하고 있습니다. 이미지는 보정 작업을 거쳐, 출력하도록 하겠습니다. 산을 출력하시겠습니까?
“그래, 출력.”
-산의 규모가 크기 때문에 충분히 거리를 두고 물러나 주시기 바랍니다.
“산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데?”
-공간주님이 상상하신 이미지를 바탕으로 보정 작업을 거쳐, 출력 예정인 산의 면적은 1만 평 규모에 높이는 가장 상부가 60미터입니다.
“그렇게 들어서는 잘 모르겠네. 아무튼, 내가 상상한 그 정도의 산이겠지?”
-그렇습니다. 최대한 공간주님의 상상과 근접하게 보정 작업을 했습니다.
진석은 산이 만들어질 예정지로부터 물러나 오아시스의 집 앞까지 돌아왔다.
-이제 출력을 시작합니다.
생각해 보니, 규모가 꽤 큰 것 같았다. 높이가 60미터라면, 한 15층 아파트 정도 되는 느낌인데 오아시스의 다른 건물과는 비교가 안 되는 규모였다.
땅이 흔들리며 강한 진동이 느껴졌다.
“오오……. 이거 뭐야?”
주변의 땅 위로 강한 번개 같은 에너지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순간, 굉음을 내며, 땅이 갈라지기 시작했다.
산을 만드는 일이라, 스케일이 다른 느낌이었다. 그리고 땅이 크게 흔들리며 요동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저 멀리, 황무지 한복판이 완전히 갈라지는가 싶더니, 땅 위로 거대한 흙더미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와, 엄청난데.”
진짜 산 하나가, 땅속에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엄청난 진동과 흙먼지가 뿜어져 나왔다. 진석은 흙먼지를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이 없어서, 먼지가 그대로 들어오네.”
아직 진석이 만든 건물들에서 따로 창문이나 문이 없었다. 혼자 쓰는 공간이라 누가 올 일도 없고 그저 건물들에는 출입구나 창이 뚫려 있는 정도였다.
진석은 급한 대로 창가로 선풍기를 틀어 먼지가 들어오는 걸 막았다. 다행히 흙먼지들은 그리 오래가지 않고 잦아들었다.
“다음번에는 마스크랑, 고글이라도 준비해야겠는데.”
-산의 출력이 완료되었습니다.
먼지가 사라지고 다시 주변이 맑아지고 있었다. 진석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눈에 들어온 것은, 엄청난 크기의 흙더미, 아니, 산이었다.
“와, 엄청 크네.”
사실, 생각해 보면,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작은 야산이었지만, 온통 평지인 공간에서 막 솟아오른 산을 보자 왠지 엄청난 크기처럼 느껴졌다.
자연의 일부로 원래 있던 것과, 진석의 의지로 새롭게 만들어 낸 것의 차이랄까? 진석은 눈앞에 보이는 산을 자신의 오아시스의 건물들과 비교해 보고 있었다. 그러자 한층 더 압도적인 크기라는 생각이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공간주님.
“그래, 멋진데. 딱 내가 생각했던 것과 비슷해.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라는 것만 빼고 말이야.”
-나무는 심으면 금방 자랄 겁니다. 토양은 비옥한 편이니까요.
“그래, 나무도 심고, 꽃도 심고. 그리고 토종 벌통도 만들고 말이야.”
진석은 일꾼들을 총동원해, 산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수종은 크게 자라고 열대 기후에 적합한 걸로 흑판수를 심기로 했다. 일꾼들이 모종을 심자, 진석은 산 주위의 시간을 가속해서 나무를 키워내기 시작했다.
거기에 찔레장미도 산 주위에 잔뜩 심어 놓았다. 진석이 시간을 가속할 때마다, 나무와 꽃들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가속된 시간 속에서 1년의 시간은 5분 만에도 흐르고, 30년의 시간이 10분 만에 흘러가기도 했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진석의 산은 곧 흑판수들로 무성하게 뒤덮이고 그 주위에는 찔레장미들이 군락을 이룬 모습이 되었다.
“산은 이 정도면 완성이 된 것 같군.”
진석은 일꾼들을 데리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높은 산은 아니어서 오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산 정상 주위 숲속에, 적당한 위치를 정하고, 나무를 잘라서 벌통을 놓을 위치를 정리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진흙으로 자연 상태와 유사한 벌집을 만들었다. 일꾼들에게 벌통 여러 개를 만들어 놓게 하고, 시골에서 가져온 벌들을 옮겨 넣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을 가속해서, 벌들을 증식시키기 시작했다.
원래, 꿀벌의 생식 능력은 엄청난 편이다. 그렇게 시간을 가속하기를 반복하자, 벌들의 숫자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꾼들이 만들어 놓은 수백 개의 진흙 벌통들이 벌들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그다음에는 벌통 가득, 꿀들이 들어차고 있었다.
벌통이 꿀로 채워지자, 진흙 일꾼들이 벌통을 해체하고 꿀을 따기 시작했다. 벌들이 꿀을 지키려고 덤벼들어 보지만, 흙으로 만든 일꾼들은 꿈쩍도 하지 않고 벌꿀을 채취하고 있었다.
“와, 1년 이상 숙성된 최상품의 꿀이라는 거지.”
공해도 없고, 주변에 찔레장미 군락이 있어서 꿀을 채취하기 최적의 환경, 벌통마다 꿀이 가득 들어 있었다. 거기에 모두 충분히 숙성된 토종 야생 꿀들이었다.
진석은 지금 막 수확한 꿀을 숟가락을 떠서 맛을 보았다.
“음, 맛이 기가 막힌데. 아버지가 주신 토종꿀도 좋았지만, 이건 향이나 맛이 더 고급스러워.”
벌들이 꿀을 채취한 것은 주변의 찔레장미들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벌통에 모인 꿀에서도 향긋하면서 달콤한 향기가 나고, 맛도 전에 먹어 본 꿀들과 달리 아주 신선한 맛이 나고 있었다.
“맛이 특이하네. 진짜 맛있는데. 그리고 먹으니까, 왠지 힘도 솟는 것 같고 말이야. 아버지랑 어머니에게도 보내 드려야겠는데…….”
* * *
“사장님, 웬 꿀이에요?”
진석이 사무실로 꿀 병이 가득 담겨 있는 상자를 들고 들어가자, 유민지와, 이수정이 눈을 크게 뜨고 달려왔다.
“아, 이거 한번 맛 좀 볼래? 100퍼센트 자연산 토종꿀이야.”
“어디서 난 건데요?”
“아, 그건…… 강원도에서 가져온 건데. 한번 맛 좀 봐. 나도 먹어 봤는데, 개인적으로 평생에 가장 맛있는 꿀인 것 같아.”
이미, 아버지에게도 택배로 꿀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유민지와 이수정도 진석이 공간에서 만든 꿀을 먹어 보더니, 둘 다, 맛있다며 엄지척을 보여 주었다.
“괜찮지?”
“괜찮은 정도가 아닌데요. 이거 맛이 되게 특이해요. 달기도 하지만 향도 너무 좋고 달다기보다 감미롭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먹을 때는 맛있고, 먹고 나면, 어딘지 기분도 나른하니 좋아지고.”
“하하, 그래?”
진석의 느낌도 비슷했다. 공간에서 채취한 꿀은 전에 먹어 본 꿀들과는 어딘지 좀 다른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이 꿀들은 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어, 우리가 판매를 해 볼까 하고.”
“꿀을요?”
“그래. 토종꿀이라, 가격을 꽤 받을 수 있을 거야.”
진석의 말에, 이수정은 상자의 꿀 병들을 이리저리 꺼내 바라보더니.
“이 꿀들 팔지 말고 우리가 쓰면 어때요?”
“우리가? 우리 직원들이 먹자고?”
“그게 아니라, 북카페에서 이걸로 음료 같은 걸 만들어서 팔면 좋을 것 같은데. 안 그래? 민지 씨.”
“맞아요. 여기에 딸기도 좀 넣고, 스무디를 만들어서 팔면 어떨까요?”
“딸기 벌꿀 스무디라?”
“이름은, 허니 스트로베리 스무디라고 하면 되겠네요.”
“그러지 말고, 민지 씨가 매장에 내려가서 한번 만들어 봐.”
이수정의 성화에, 유민지가 꿀 몇 병을 가지고 카페 오아시스로 내려갔다. 그리고 얼마 후에, 딸기와 벌꿀로 만든 스무디를 가지고 올라왔다.
“와, 색깔 예쁘다. 역시 딸기 스무디가 최고지.”
진석도 스무디 잔을 받아먹어 보았다.
“음, 맛있는데. 딸기와 벌꿀이 아주 잘 어울려.”
“그렇죠? 사장님. 그리고 벌꿀이 향도 독특하고 먹으니까 왠지 기운이 솟는다고 할까? 아무튼, 기분이 좋아진다고요.”
“하하, 기분이 좋아지고, 힘이 솟는다고? 맛이 있으니까,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석도 공간에서 만든 토종꿀을 먹고 나서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피로가 풀리고, 기분이 업 되는 느낌이었다.
꿀에 당분이 많아서 그런 건가? 당분이 체내에 들어가면, 스트레스를 억제하고 신체 활력을 준다는 말은 들은 적이 있었다. 물론 일시적으로 말이다.
“아무튼, 이 스무디 엄청 맛있다고요. 사장님이 가져온 벌꿀이 맛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래, 수정 씨 말대로 꿀을 따로 판매하지 말고, 우리 카페에서 스무디를 만들어 팔면 되겠어.”
“그럼, 허니 스트로베리 스무디를 신제품으로 출시할까요?”
“그래, 민지 씨가 만든 이 스무디면 아마 대박이 날 거야. 한번 본격적으로 만들어서 팔아 보자고.”
* * *
마침, 여름도 다가오고 있었다. 유민지가 만든 딸기와 벌꿀 스무디는 별다른 레시피는 아니었지만, 기본 재료가 신선하고 좋은 것들이어서 그런지 진석이 먹어 보기에도 진짜 맛이 있었고, 그건 북카페를 찾는 손님들의 입에도 마찬가지였다.
“여기, 허니 스트로베리 스무디요.”
“저도요. 허니 스트로베리 스무디.”
“야, 여기 딸기 스무디 진짜 맛있지?”
“응, 한번 먹으면 자꾸 생각나는 거 있지. 그리고 먹고 나면, 컨디션도 좋아지는 것 같아서 난 매일 먹어.”
스무디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딸기 스무디는 어느새, 북카페 오아시스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가 되어 있었다.
“역시, 민지 씨의 실력이 좋아서인가? 스무디가 엄청 나가네.”
“아니에요. 제가 특별히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쓰는 단미 딸기도 아주 신선하고 특히, 사장님이 가져다주신 토종 벌꿀이 진짜 좋은 것 같아요. 제가 혹시나 해서 다른 꿀들을 넣어 봤는데 다른 꿀은 이 맛이 안 나요.”
“그래,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꿀이야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나저나 오아시스 2호점이 곧 오픈할 거니까. 그것도 좀 신경 쓰는 거 잊지 말고.”
“예, 2호점이 생기면 더 좋죠. 점점 회사가 커지는 거잖아요.”
“아, 참, 깜빡했는데, 2호점도 2호점이지만, 이제 3호점도 준비해야 돼.”
“3호점요?”
“그래. 가로수길에 내가 괜찮은 건물을 찾았거든.”
“그럼, 2호점은요?”
“2호점은 신촌이니까, 가깝잖아, 여기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원해 주면 되고, 아무튼 가로수점은 민지 씨가 점장이 돼서, 특별히 더 신경 써 줘야겠어.”
“제가요?”
유민지는 약간 의외라는 표정이었지만, 나쁜 기회는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진석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카페 오아시스는 돈을 벌려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지만 운이 좋은 건지 북카페 스타일의 카페가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오아시스도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거기에 진석이 공간에서 생산한 벌꿀 스무디가 인기를 끌면서, 전부터 생각했던, 2호점을 오픈하게 된 것이고 3호점도 연이어 오픈을 하게 되었다.
잘만 되면, 진석이 공간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간 포인트도 충분히 벌어들일 것이다.
말하자면, 선순환인 셈이었다. 공간에서 재배한 농작물들로 돈을 벌고, 그걸로 북카페에 더 투자할 수 있고, 북카페에서 벌어들인 시간 포인트로 공간을 더 늘리고 관리할 수 있게 되는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다.
공간도, 진석의 사업도, 북카페도 모두 빠르게 성장하고 있었다.
* * *
은하수 농원.
“벌꿀이네요.”
“선물입니다. 지난번에 인삼 보내 주셨잖아요.”
오랜만에 찾은 은하수 농장은 이제는 모두 찔레장미들로 가득한 모습이었다.
“찔레장미가 잘나가죠?”
“예. 그렇지 않아도, 이번에 유럽에 2천만 불 수출 계약을 맺을 것 같아요.”
“2천만 불요?”
“예. 모종, 2천만 주 주문이 왔거든요.”
“와, 대박인데요.”
은하수 농장과는 서로 협력 관계였다. 찔레장미의 모종에 관한 권리는 제이에스의 소유였기 때문에 은하수 농장의 매출은 곧 제이에스의 로열티 수익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다.
“은하수 농장에서 다 감당할 수 있나요?”
“물량은 다른 농장에서 분산해서 생산하려고 하는데, 그래도 괜찮겠죠?”
“뭐, 장미 관련된 일은, 서은주 사장님이 하시는 거니까요. 좋을 대로 하세요.”
“그래도 보고는 해야죠. 찔레장미는 이진석 사장님 거잖아요.”
“하하. 그런가요? 서로 협력 관계니까, 서은주 사장님이 잘돼야 저도 좋죠.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지 말하세요. 장미 모종도 더 구할 수 있고, 자금 지원도 해 드리겠습니다.”
“어머. 정말요? 당장, 필요한 건 없지만 나중에라도 어려우면 도움 부탁할게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부담 없이 말하세요. 제가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까요.”
은하수 농장과 김포의 여러 농장들에서는 찔레장미와 단미 딸기 모종들이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었고, 이제는 해외에 수출까지 하고 있었다. 덕분에 진석도 로열티로 짭짤한 수익을 올리는 중이었다.
거기에 공간에 갈 때마다, 한 번씩 수확하는 고려인삼도 한 번에 수십억의 수익을 올리고 있었다.
북카페는 돈보다는 시간 포인트를 벌려고 하는 사업이지만, 허니 스트로베리 스무디가 대인기를 얻으면서 북카페도 상당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야말로, 여기저기에서 돈이 굴러 들어오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진석은 시간도 충분했다. 돈을 많이 번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시간이 부족하고 일에 치여서 살면 그게 행복이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진석은 바쁘게 진행되는 사업을 하면서도 언제나 쉬고 싶을 때는 공간의 문을 열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멋진 열대의 낙원에서 말이다.
* * *
공간의 면적은 이제 17만 평까지 늘어나 있었다. 새로 개업한 북카페 2호점과 3호점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북카페에서 벌어들이는 시간 포인트도 세 배로 늘어났다.
“섀시들은 어디에 쓰시게요?”
“어, 뭐. 쓸 데가 있어.”
사무실에서 진석이 창과 문에 쓰는 섀시들을 주문하는 걸 보고 이수정이 호기심이 생긴 모양이었다.
“거기에 유리창, 어디 집 지으세요?”
“시골에 건물이 좀 있어서, 섀시를 해서 유리창이랑 문도 새로 해 보려고.”
“사장님도. 그런 건 전문가에게 맡기면 되죠. 뭘 일일이 섀시랑 유리까지 구매를 해요?”
“하하.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참, 그보다, 이번에 찔레장미 수출 계약은 잘된 거지?”
“예. 유럽 쪽은 잘됐어요.”
은하수 농장에서 수출한 장미들이 유럽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추가 주문이 들어온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미국에서도 로열티 계약을 맺고 싶다는 제의가 왔다. 자기들이 모종까지 직접 생산하고 싶다는 것이었는데, 일단, 그 문제는 보류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직은 국내 화훼 농가를 보호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사업으로 회사의 자금 사정은 아주 좋은 상태라 단기간의 이익보다는 장기적으로 접근하기로 한 것이다.
“그래. 일단은 모종이든 뭐든 우리나라 농가들과 상생하는 쪽으로 하자고.”
핸드폰이 울렸다.
“아버지, 무슨 일이세요?”
-진석아, 너 지난번에 보낸 꿀 말이다.
“아, 그거 드셔 보셨어요?”
-그래, 그거 정말 좋은 것 같다. 나랑, 엄마랑 매일 아침저녁으로 한 숟가락씩 먹고 있는데 너희 엄마, 허리 디스크가 싹 나았다.
“허리 디스크요? 엄마 허리 디스크가 있었어요?”
-아아, 약간……. 심한 건 아니고, 시골에서 과수원 일하고 하다 보니 가끔 허리가 아프다고 하더라고. 병원에 가봤더니 수술할 정도는 아닌데 디스크 초기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하더구나.
“저런, 아니 그런데 왜 저한테는 그런 얘기 한 번도 없으셨어요?”
-그거야, 뭐, 아들 걱정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해서 그런 거지. 아주 심한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네가 보내 준 꿀을 먹었더니, 엄마 허리 아픈 것도 좋아지고 나도, 사실 어깨에 오십견이라고 무척 아팠거든…….
“아버지 어깨도 좋아지셨어요?”
-그래. 그 꿀이 뭔가 효험이 있나 보다.
“그래요?”
-그래서 꿀 있으면, 지난번하고 같은 걸로, 몇 병 더 보내라. 그 꿀이 아주 만병통치약이야.
“하하, 그런가요? 아무튼, 꿀 드시고 좋아지셨다니 저야 기쁘죠. 얼마든지 보내 드릴게요.”
전화를 끊고 다시 생각해 보니, 아버지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했다. 진석도 언제부터인가 몸의 자잘하게 아프던 것들이 다 사라지고 아주 컨디션이 좋은 상태였다. 그것도 그런 몸이 좋은 상태가 계속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수정 씨, 요즘 컨디션은 어때?”
“컨디션요? 좋죠. 요새,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아니면, 사업이 잘되고 저도 연봉이 올라서 그런지, 기분도 좋고 몸도 아주 가볍고 컨디션은 베리 굿이라고요.”
“그래?”
이수정의 책상을 보니, 스무디 컵이 놓여 있었다.
“허니 스트로베리 스무디 자주 먹는 거야?”
“예, 카페가 바로 밑이잖아요. 같은 회사고, 저뿐만 아니라 딸기 스무디가 요즘 최고 인기일걸요. 점심이나 저녁때는 저거 먹으려고 줄도 서는 거 사장님도 보셨죠?”
이수정의 말대로, 북카페에서 벌꿀 스트로베리 스무디가 엄청난 인기였다. 사람들이 몰릴 때는 카페 앞쪽 길을 따라 골목까지 줄이 늘어서기도 했다.
“저거, SNS에서는 마약 스무디라고 소문이 났어요.”
“마약 스무디?”
“예. 맛도 맛이고, 먹으면 에너지 드링크처럼 힘이 솟는다나 뭐라나.”
“그래?”
뭔가 공간에서 생산한 벌꿀에는 특별한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 체력 회복이나 통증 억제 효과 같은 것들 말이다.
* * *
공간에 오자마자, 일꾼들을 데리고 산으로 가서 진흙 벌집을 만드는 일부터 시작했다. 벌집의 숫자는 모두 5백 개였다. 벌집이 완성되자 진석은 시간을 가속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꿀은 충분하겠군.”
꿀 채취 작업을 마치고, 진석은 오아시스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오아시스 건물에, 창과 문 섀시 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자재들은 이미 공간으로 옮겨온 상태. 이번에 가져온 섀시와 유리창을 설치하는 작업이었다.
“아아, 거긴, 그렇게 하는 게 아니고…….”
투박한 손을 가진, 진흙 인간들이 유리를 다루는 것이 여간 불안한 것이 아니었다. 거기다 땅을 파거나, 하는 일들에 비해서 다소 복잡한 섀시 작업이라 일꾼들은 우왕좌왕하며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었다.
“일이 조금만 복잡해져도 잘 안 되네.”
-진흙 일꾼들의 현재 지능으로는 복잡한 작업은 무리입니다.
“혹시, 일꾼들이 더 똑똑해질 수는 없는 거겠지?”
-일꾼의 지능의 향상을 원하시는 겁니까?
“그게 가능해? 저건, 지능이랄 것도 없는 진흙 덩어리 아니었나?”
-진흙 인간의 작동 메커니즘을 지능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학습 능력을 추가하면 좀 더 복잡한 작업이 가능합니다.
“학습 능력이라고?”
-그렇습니다. 현재의 일꾼들은 공간주님의 명령에 의해 지시한 작업만을 수행하기 때문에 작업이 여러 단계로 나뉘면, 매번 명령을 반복해야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 학습 능력이라는 게 생기면?”
-말 그대로 학습을 통해, 작업 과정 전체를 배우고 배운 것을 순차적으로 실행할 수 있습니다. 공간주님은 일꾼들을 학습시키고 원하는 작업을 지시하는 것만으로 충분해지는 겁니다.
“아, 학습 과정을 거치면, 하나하나 이거 여기로, 저거는 저기로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무슨 작업을 해라, 하는 정도면 된다는 거지?”
-그렇습니다. 한번 학습 과정을 거치면 응용력도 생기기 때문에 여러 가지 작업을 동시에 수행하기에는 적합합니다.
그래, 공간이 계속 커지고 있었다. 작물의 종류도 많아지고 공간에 새로운 건물들도 좀 더 꾸미고 싶은 마음이었다. 일꾼들이 지금처럼 일일이 지시를 받아 움직인다면 너무 번거롭게 된다.
“그럼 지금 학습 능력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
-공간의 크기가 그동안 꾸준히 증가해서 공간주님의 레벨도 향상되었습니다. 현재 레벨은 22입니다. 공간관리 스킬 중에서, 학습 능력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신, 스킬 사용을 위해서는 1천 시간 포인트가 차감됩니다.
“뭐, 그 정도 포인트는 있으니까, 좋아 학습 능력 스킬을 사용하겠어.”
-학습 능력 스킬을 설정 중입니다. 포인트가 차감 중입니다. 학습 능력 스킬을 획득하셨습니다.
“음, 이제 일꾼들이 좀 똑똑해진 건가?”
진석은 여전히 어설프게 작업을 하고 있는 일꾼들을 바라보았다.
“달라진 게 없는데?”
-학습 능력을 추가한 것이지 학습을 한 건 아닙니다. 뭔가 일꾼들의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교육 작업이 필요합니다.
“교육 작업이라? 어떻게 교육을 시키라는 거야?”
-현실 세계의 인간들의 교육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아기들을 생각해 보십쇼. 어른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모방하지 않습니까?
“모방이라고? 그럼, 내가 먼저 하는 걸 보여 주고 그걸 모방하게 하라는 거야?”
-모든 학습이라는 건, 모방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모방에서 끝나는 거죠.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결과물을 완벽하게 카피하려는 행동, 그것이 바로 학습의 본질입니다.
“그렇기는 한데, 나도 이런 섀시 작업은 서툴러서 말이야. 하긴 나도 잘못하는 걸 저런 진흙 덩어리들에게 시키려니 잘 안 되는 거겠지.”
뭘 따라 하게 하고 싶어도 진석 자신도 잘못하는 걸 따라 하게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뭔가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잠깐, 그 모방이라는 게, 꼭 내가 직접 뭔가를 하는 걸 보여 줘야 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동영상 같은 걸 보여 줘도 되는 거잖아?”
-모방을 통한 학습에 모방의 대상이 정해진 것은 아닙니다. 동영상이든 뭐든 그것을 보고 모방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렇다는 거지?”
그럼, 문제가 간단해질 수 있다. 섀시 작업을 하는 동영상이 인터넷을 찾아보면 어딘가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저런 걸 가르치는 학원도 있을 테고, 요즘 학원이라면 동영상은 다 있을 테니까 동영상을 찾아서 보여 주면 해결이 될 일이다.
진석은 일단 시간을 멈추고 공간을 나왔다.
어디 보자, 창틀, 섀시 이런 걸로 검색을 해 볼까?
역시나 유튜브와 동영상의 시대였다. 어렵지 않게 셀프 섀시 시공 영상을 찾을 수 있었다.
음, 공간에는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다. 당연히 인터넷도 안 되는 곳이라 찾은 셀프 섀시 작업 동영상은 노트북에 저장해서 가져가야 했다.
다행히 유튜브 영상은 설정을 보니, 다운로드가 가능했다. 영상을 다운로드해서 노트북에 저장하고 다시 공간의 문을 열었다.
“이봐, 일꾼들 모두 모여 봐. 오늘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공부를 좀 해야겠어.”
진석은 오아시스의 체육관으로 쓰는 건물로 일꾼들을 모았다. 일꾼들 수가 3백 명이 넘어서 한 번에 다 체육관에 들어오자 체육관이 너무 꽉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너무 많은데.”
모든 일꾼들에게 섀시 작업을 가르칠 필요는 없었다.
“잠깐. 다 들어올 필요는 없고, 50명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 아니다 30명이면 충분해.”
일꾼들 대부분을 나가게 하고, 30명만 남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다. 그리고 다음은 운동할 때 영상이나 뮤직비디오를 보려고 설치해 둔 TV에 노트북을 연결했다.
“모두, 집중해서 이걸 보라고. 여기 선생님이 하는 걸 잘 보고 따라 하는 거야.”
진석이 영상을 플레이하자, 일꾼들이 TV 화면에 나오는 셀프 섀시 작업 영상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런 걸 보여 준다고 건축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건가?”
-학습의 과정이란, 단순합니다. 모방 그 자체죠. 인간의 복잡한 지능이라는 것, 혹은 예술의 창의력이라는 것도 모방 작업의 반복으로 끊임없이 여러 단계의 카피를 반복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럴 리가? 인간은 좀 다르지 않나?”
-아기들을 생각해 보십쇼. 어른들이 보기에는 이상하고 기괴할 정도로 뭔가를 반복하는 일들이 많죠. 그리고 그런 유아기가 지나면서 그런 단순 반복은 조금 더 복잡하게 변주되는데 반복을 하면서도 약간의 변화를 추구하게 됩니다. 그런 것이 바로 놀이라는 거죠.
“아이들에게 놀이는 곧 학습이라던데. 결국, 단순 반복이야말로 학습의 본질이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하지만 반복이라는 건, 언제나 실패하게 마련이죠.
“반복이 실패한다고?”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온전하게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인간은 드물죠. 자기 생각조차도 언어라는 외부의 도구를 사용하는 순간 반복은 실패하게 됩니다.
“그거야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생각과 언어는 다르니까.”
-생각과 언어도 다르고, 자신의 머릿속의 상상과 현실이란 언제나 불일치하는 것입니다. 뭔가를 만들거나 행동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끝없는 불일치의 연속입니다. 완벽한 반복을 시도하지만 번번이 과녁의 중심을 빗나가는 화살 같은 거죠.
“대체 무슨 개소리야?”
-영상이 다 끝났네요. 이제 일을 시작해도 될 겁니다.
섀시 시공에 관한 동영상이 다 재생된 모양이었다. 정말, 이런 걸 보여 주는 것만으로 창과 문을 만들 수 있는 건가?
“이봐, 다 보고 배웠으면,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 보자고.”
진석의 말에, 일꾼들이 우르르 일어서기 시작했다.
창과 문의 섀시와 유리 몰딩에 필요한 재료들은 이미 다 구매를 해서 공간으로 옮겨 놓은 상태였다. 문제는 숙련된 작업자가 없다는 것인데…….
“오, 뭐지? 제법 능숙하게 하는데.”
사실, 진석도 이런 건축 인테리어에 관한 일은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꾼들에게 세세하게 작업을 지시하기가 어려웠던 건데, 의외로 일꾼들은 유튜브에서 다운받은 영상을 보고는 일을 척척 해내기 시작했다.
“뭐지? 나보다, 훨씬 더 빨리 배우는 느낌인데.”
-학습 능력이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진흙 일꾼들이 일반적인 인간들보다 더 우수합니다.
“역시 그런 건가?”
하지만, 의문이었다. 단순한 진흙 덩어리에 불과한 일꾼들이 어떤 원리로 학습을 할 수 있는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인가? 뭔가 내부에 뇌에 해당하는 기관이 있는 건가?
“그런데 일꾼들이 뇌가 있는 거야? 꼭 인간의 뇌 같은 것이 아니라도, 그와 유사한 기관이 있어야 학습이라는 기능을 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학습이라는 기능만 가지고 있습니다. 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기관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뭐…… 뭐? 그야, 당연히 어떤 기관이 존재해야 그 기관에 의해서 기능이 생기는 거잖아?”
-그건 아날로그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뭔가 실존해야 그에 따라 어떤 기능이 생긴다는 말이죠? 뇌가 있으니까, 지능이 생긴다는 발상 말입니다.
“그야, 당연한 거지. 기관이 있으니 기능이 있는 거잖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이죠. 공간주님은 신이지 않습니까? 적어도 이 공간에서는요.
“그럼 아니라는 거야? 기능이 먼저고 기관이 나중에 생긴다는 말이야?”
-신의 레벨, 디지털의 세계에서는 기능이란 기능, 순수한 기능일 뿐입니다. 기관에 의해서 기능이 파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능을 가능하게 하는 아직 분화되지 않은 순수한 기관이자 동시에 기능 그 자체인 무한한 가능성이 존재합니다. 마치 알처럼 말입니다.
“알이라면? 계란?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일꾼은 뇌가 없다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진흙 일꾼은 단지 학습 능력, 일종의 지능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공간주님과 시스템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것이지 뇌와 같은 기관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저 진흙 인간에게는 뇌라는 건 영원히 없는 건가?”
-뇌가 필요한 시기가 되면 뇌가 생기겠죠.
뇌가 있든 없든, 일꾼들의 학습 능력으로 난이도 있는 섀시 작업이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전에는 에어컨을 틀어 놔도 창과 문이 없어서 별로 시원한 줄도 몰랐는데, 이제는 창과 문이 완성되면서, 에어컨도 제대로 작동하게 된 것이다.
“흠, 모양새도 그럴듯하고, 이제 운동하다 더우면 에어컨도 시원하게 틀 수 있겠는걸.”
진석은 완성된 창문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오케이, 일꾼들이 실력이 좋아졌네. 이제 뭐든 원하는 걸 만들 수 있겠는데, 다음에는 뭘 만들어볼까?
* * *
시골, 부모님의 집.
“아버지, 저 왔어요.”
“그래, 잘 왔다. 너 서울에서 바쁜데 괜찮은 거냐?”
“바쁘기는 해도, 시간은 많으니까요. 하하. 제가 사장이잖아요. 시간이든 뭐든, 제 맘대로죠.”
“저런, 아무리 사장이라도 그러면 안 돼. 조직을 관리하는 데 원칙이 있어야지. 원래, 주인이 가장 먼저 일어나고 제일 늦게 잠들어야 하는 법이다.”
“하하. 걱정하지 마세요. 그나저나, 얼굴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아, 엄마…….”
“어이구. 우리 진석이 우리 장한 아들…….”
“아, 엄마, 왜 그래…….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물론, 어린아이는 아니지만, 부모님들 눈에는 다 큰 자식도 어린아이들 같으신 모양이다.
“이게 다 꿀이냐?”
아버지는 차 트렁크에 가득 실린 상자들을 보며 조금 놀라시는 표정이었다.
“예. 이 꿀이 저도 먹고 있는데, 확실히 몸에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좀 피곤하고 그런 게 있었는데 이거 먹고 좋아졌거든요.”
“맞아, 나도 엄마도 이 꿀 덕에 몸이 좋아진 것 같다.”
“참, 엄마는 허리 아프면, 얘기를 하지, 내가 걱정할까 봐 그런 거예요?”
“괜찮아. 엄마 허리 약간 뻣뻣하고 좀 그런 게 있었는데 우리 아들이 가져다준 꿀 먹고 이제는 다 나았어.”
“다음에는 어디 아프면 빨리빨리 말해 줘요. 나중에 그런 말 들으니까, 조금 서운했어.”
“우리 아들이 엄마 그렇게 걱정해 주는 거 보니까, 장하네.”
“엄마는 장하기는 뭐가 장해? 내가 지금 몇 살인데. 완전 애들 취급이네.”
“하하. 그런가? 자, 들어가서 밥이나 먹자. 엄마가 우리 진석이 온다고 특별 요리를 준비했어.”
“정말요? 기대해도 되는 거죠?”
“그래. 어서 들어가서 맛있게 먹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