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장미의 향기 (5/183)

장미의 향기

“사장님, 이러다가 우리 재벌 되면 어쩌죠?”

이수정은 약간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기는 너무 이르다고요.”

물론, 재벌 운운할 수준은 아니었지만, 딸기 모종 사업은 말 그대로 순풍을 달고 있었다.

입소문을 타고, 단미 딸기 품종이 농가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모종을 찾는 수요도 많아지고 있었다.

초창기에 단미 딸기를 심어서 키웠던, 성우 농원 같은 곳은 이제, 모종 육묘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서울 근교로 퍼졌던, 단미 딸기 재배 농가들이, 이제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모종 물량을 진석 혼자 감당하기는 어려워진 것이다.

성우 농원도 그런 육묘 업체 중의 하나가 되었다.

*   *   *

성우 농원.

“딸기 하우스가 많이 늘었네요?”

오랜만에 다시 찾은 성우 농원은, 다른 작물은 정리를 하고, 모든 하우스가 딸기 모종을 키우는 하우스로 변해 있었다.

“하하. 이게 다, 제이에스 이진석 사장님 덕분이죠. 사실, 판로라는 문제가 해결되면, 단일 작물을 재배하는 게 가장 효율적이죠.”

“그렇기는 하겠죠. 여러 가지 복잡한 일들이 줄어드니까요.”

성우 농원은 기존의 채소류 농사를 정리하고, 제이에스의 단미 딸기의 육묘에 전념하기로 방향을 정했다.

성우 농원의 하우스에서는 이제 단미 품종의 딸기 모종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성우 농원 외에도, 서울 근교의 여러 농장들이 제이에스 바이오와 협약을 맺고, 육묘 사업에 파트너가 되었다.

덕분에, 진석의 일도 크게 줄어들고, 대신 모종 판매보다, 단미 품종의 로열티 수익이 더 많이 생기고 있었다.

연간 딸기 시장이 2조 원 이상이라는 걸 생각하면, 역시나 미래의 수익은 로열티에서 창출될 것이 분명했다.

“덕분에, 단미 딸기가 전국으로 퍼져나가고 있네요.”

“우리들이 오히려 고맙죠. 딸기 육묘에 전념하니까. 우리 성우 농원의 수익도 더 좋아지고 있어요.”

“다행이네요.”

“그리고, 수출 시장 가능성도 높고요.”

“벌써, 싱가포르에 수출한 농가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최근에 생산된 단미 딸기들은 국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해외에도 자동으로 진출하고 있다고 했다.

거기에 단미 품종은 겉이 좀 단단한 편이라, 무른 기존 딸기에 비해, 수출 통관 기간을 잘 견디고 품질을 유지하고 있어, 수출에도 용이하다는 평가였다.

진석은 성우 농원 주위를 그렇게 흐뭇한 눈으로 살펴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그윽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진석의 코끝에 닿고 있었다.

“어디서 좋은 향기가 나네요.”

“아, 저기 오른쪽에 보이는 게 화훼 농장들이에요. 한번 구경시켜 드릴까요?”

*   *   *

“은하수 농장이라. 이름이 예쁘네요.”

성우 농원의 최성우 사장은 진석을 근처의 장미를 키우는 하우스로 안내했다.

“여기, 사장님도 아주 미인이지. 장미꽃을 키워서 그런지……. 하하…….”

“와, 하우스 전체가 장미 천지네요. 장미는 수익성이 어떤가요?”

아무래도, 바이오 사업을 하다 보니, 장미를 봐도,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수익이 나는 작물로 보이는 것이었다.

“장미 하면, 고수익 작물이죠. 원래, 딸기와 장미가 양대 산맥이야. 수익성이 좋은 작물로 말이에요.”

“그래요?”

“그럼, 꽃 중의 여왕은 뭐니 뭐니 해도 역시 장미죠. 이 사장님도, 애인에게 프러포즈할 때, 무슨 꽃을 쓰겠어요?”

“음, 그야, 당연히 장미가 가장 좋겠죠.”

“다들, 그런다니까. 그래서 장미는 전 세계적으로 봐도, 수요가 가장 많은 꽃이에요. 당연히 돈이 되는 고수익 작물이기도 하고.”

“음, 역시 그렇겠군요.”

최성우 사장님의 설명을 듣고 보니, 하우스 가득 피어 있는 아름다운 장미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수출용으로는 딸기보다는 장미지.”

“아무래도, 신선도 유지가 쉬우니까 그렇겠죠?”

“맞아요. 딸기는 아무래도, 해외까지 나가기에는 쉽게 무르는 특성이 있어서 좀 어려운데, 장미는 보존 기간이 길기 때문에 수출에 단점이 없고, 그건, 큰 시장으로 나갈 수 있다는 의미죠.”

“어머, 딸기 농장 사장님이시네. 여기 무슨 일이세요?”

“아, 여기 이분이 제이에스라고 딸기 모종 사업을 크게 하시는 분이야. 서 사장님도 단미 딸기 먹어 봤죠? 그거 개발한 분이 이분이셔.”

“어머, 그래요? 와, 대단하신 분이 오셨네.”

“여기는 서은주 사장님이라고 이 장미를 키우시는 분이고.”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165㎝ 정도의 키에, 장미 농사를 짓고 있어서인지, 수수한 녹색 남방에 청바지 차림의 여자였다. 하지만, 화장기 없는 얼굴인데도 상당한 미인이었다.

“어때요? 서은주 사장님 미인 아닌가?”

“하하, 정말 그러시네요. 키우고 계신 장미가 누굴 닮아서 아름다운가 했더니, 농장 주인을 닮았네요.”

“어머, 농담도 잘하시네요. 그나저나, 장미 농장이 궁금하시면, 제가 더 구경시켜 드릴까요?”

“그러면 감사하죠.”

“그럼, 난, 먼저 가 볼게. 오늘 모종 출하하는 게 있어서.”

마침, 최 사장님이 먼저 돌아가고 나자, 하우스 안에는 서은주와 진석 둘만 남게 되었다.

“와, 장미들이 종류가 다양하네요.”

“딸기는 전문가신데, 장미는 잘 모르시죠?”

“예, 뭐, 장미는 문외한이죠. 장미는 어떤 품종이 유명한가요?”

“장미요? 후후. 딸기랑 장미는 좀 달라요?”

“어떻게요?”

“딸기는 유명한 품종을 손꼽을 정도잖아요. 수십 개 정도…….”

“장미는 다른가요?”

“장미 품종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와일드 로즈, 올드 가든 로즈, 그리고 모던 로즈 이렇게 세 부류죠.”

“흠, 그렇군요.”

“와일드 로즈는 야생에서 자란, 야생화 개념이고, 올드 가든 로즈는 사람들이 원예용으로 키운 장미를 말해요. 거기에, 1867년에 쟝 안드레 기요라는 프랑스 사람이, 인공 교잡에 성공하거든요.”

“그럼, 그 인공 교잡 후에 나온 게 모던 로즈인가요?”

“맞아요. 그게, 우리가 생각하는 지금의 장미들이죠. 모던 로즈 품종 종류가 얼마나 될 것 같아요?”

“수백 종류 정도 아닐까요?”

“후후. 놀라지 마세요. 인공 교잡 전에 올드 가든 로즈 품종 중에 상업적으로 유통되는 게 한 300종류 정도라면, 모던 로즈는 15,000종이 상업적으로 거래된다고요.”

“마…… 만 오천요? 품종이 그렇게 많아요?”

“엄청나죠. 장미 품종은 정말 숫자가 많아요. 딸기처럼, 시장을 한 품종을 장악하는 그런 시장이 아니라고요.”

“와, 그렇게 장미 종류가 많은 줄을 몰랐네요.”

“보통, 일반인들은 잘 모르죠. 장미는 특이하게, 인공 교잡이 정말 잘되는 품종이거든요. 그래서, 아름다운 신품종이 정말 많이 나오죠.”

“하지만, 한 품종이 독점할 시장은 아니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그건 좀 어려워요. 세상에는 4만 종 이상의 장미가 있는데, 다들, 한결같이 미인들이거든요.”

“후후. 마치, 우크라이나에 가면, 김태희가 밭을 간다, 그런 말처럼 들리네요.”

“맞아요. 장미들의 세계에는 모두 미녀들만 살거든요. 아름답지 않고 고혹적이지 않은 장미란 세상에 없죠.”

“모두가 미인이라? 그런 장미들 품종 중에, 좀 더 매력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글쎄요. 다들, 아름답고 유혹적이라. 더 화장을 짙게 하고, 더 섹시한 옷을 입는다고 더 돋보이기는 힘들지 않을까요? 남자들도 그러잖아요. 예쁘고 아름다우면서 어딘지 순수하고 청순한 여자들을 좋아하잖아요?”

“하하. 그렇기는 하죠.”

“제 개인적으로 찔레꽃을 좋아해요. 사실, 찔레꽃은 아까 말한 와일드 로즈의 한 종류거든요.”

“오, 찔레꽃이 장미 종류였군요.”

“찔레는 장미의 먼 조상쯤 되죠. 꽃은 더 수수하고, 향도 그윽하고 농염한 장미보다는 한결, 담백해요. 사실, 장미는 너무 아름다운 꽃이라, 향까지 진한 건, 별로거든요. 예쁜 여자가, 너무 끼를 부리는 느낌이라.”

“하하, 재밌는 표현이네요.”

“장미는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향은 좀 수수하면, 더 상큼할 것 같은데.”

“그런 장미는 없나요?”

“장미라는 게 워낙 화려한 꽃이라, 모양도 화려하고, 향도 화려해요. 또, 우성 형질이 잘 전달되는 편이라, 점점 더 그윽한 향과, 아름다운 외형의 꽃이 된 거죠.”

“너무 아름다운 게 단점이라는 말처럼 들리네요.”

“뭐, 꼭 그런 건 아니고요. 예쁘고 향이 화려한 게 좋지만, 장미를 키우는 입장에서는 좀 다른 느낌의 장미도 키워 보고 싶다는 거죠.”

“찔레꽃 같은 그런 장미 말이군요?”

“사실, 찔레는 장미와 좀 많이 다르죠. 하지만 향은 정말 좋아요. 뭔가 순수한 시골 처녀 같거든요. 하지만, 외모는 아주 미인이라, 그런 순수함이 더 돋보이는…….”

*   *   *

“민지 씨, 장미 좋아해?”

“어머. 저 주시려고 가져오신 거예요?”

꽃을 싫어하는 여자는 없는 모양이다. 은하수 농장에서 얻어 온, 장미를 보여 주자, 유민지는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장미 농장에 갔다가, 좀 얻어 왔어. 카페에 좀 놓으려고.”

진석은 장미를 바구니에 담으면서, 향기를 맡아 보았다. 그윽하고, 고혹적인 특유의 장미 향이었다.

“이것도 좋지만, 좀 더 신선한 향기라면 더 좋을 거라는 거지?”

“민지 씨, 수고해.”

“사장님, 어디 가세요?”

“아, 잠깐, 위층에…….”

은하수 농장에서 얻어온 장미들을 가지고 진석은 공간으로 향했다.

2만 평 크기의 아름다운 열대의 섬, 그리고 섬의 한가운데에 만들어진 밭에는 딸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작물들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은 거기에 장미를 심어 볼 생각이었다.

“이봐, 오늘은 장미야. 꽃을 키워 보는 건 처음이지?”

진석이 부르자, 근처에 있던, 수십 명의 모래와 진흙 일꾼들이 몰려들었다.

모두들 하나같이 거대한 체구의 석상들 같은 모습이었지만, 진석의 말이라면, 뭐든 복종하고 따르는 충실한 일꾼들이었다.

커다랗고 투박한 손으로 장미 모종을 하나씩 심고 있는 모습은 어딘지 언밸런스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진석이 나무 그들에 누워, 잠시 졸고 있는 동안, 장미 모종은 밭에 잘 심어졌다.

진석이 눈을 떴을 때는, 일꾼들이 물뿌리개를 들고 모종 하나하나에 정성스럽게 물을 주고 있었다.

그다음은 시간을 가속시키는 일이었다. 진석이 시간을 가속시키자, 갓 심어진 장미들이 1분 만에, 무성한 장미 넝쿨로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일꾼들을 동원해, 꺾꽂이로 수를 늘리고, 교잡을 시도했다.

교잡으로 새로운 품종이 나오면, 다시, 숫자를 늘린 후에, 성장시키기를 반복하자, 여러 가지 아름다운 변종 장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처음에 가져온 종료는 다섯 가지 정도였지만, 종류는 계속 늘어났다. 교잡과 변종이 이루어지면서도, 아름다운 장미의 특징들은 계속 후대로 이어지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수도 없이 시간을 가속하고 나자, 진석의 장미밭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수백, 수천의 장미들로 아름다운 장미 정원이 되어 있었다.

“와, 내가 만들어 낸 거지만, 정말 대단한데.”

시간의 가속을 통해, 장미의 생의 주기를 1분 내외로 단축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장미들이 엄청 늘어나기는 했는데, 어디 괜찮은 품종이 나왔으려나.”

진석은 반복되는 시간 가속 작업에 약간은 지친 얼굴로, 일꾼들이 열심히 작업을 벌이고 있는 장미밭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색이나 향이 다들 좋은데, 하지만 뭔가 아쉬워.”

장미는 역시 이미 완성된 미인 같은 꽃이다. 이미 기원전 3000년 전의 바빌론의 궁전에서는 장미가 키워지고 있었고, 길가메시의 서사시에도, 이 풀의 가시는 장미처럼 너를 찌를 것이라는 구절이 나올 정도인 것이다.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름답기만 한 장미라면, 이미 고대 수메르 시절에도 존재했다. 진석이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장미 그 이상의 독특함을 가진 장미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장미 정원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지만, 화려하고 그윽한 향기의 전형적인 장미들뿐이었다.

“뭐가 잘못된 거지?”

*   *   *

진석이 다시 공간을 나와 카페로 내려왔을 때는, 민지는 막, 꽃을 화병에 담고 있었다.

“금방 오셨네요.”

“그래, 금방 돌아온다고 했잖아.”

공간에서 보낸, 시간은 진석에게는 이틀 정도의 시간이었지만, 공간에서의 시간은 현실 세계에는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유민지에게는 그저 5분 정도의 시간 정도일 뿐이었다.

진석은 장미 정원을 만들어 놓고, 방갈로에서 실컷 잠까지 자고 오는 길이었다.

“수정이 언니가 찾던데요.”

“어, 그래? 왜?”

“딸기 모종 주문이 왔다고요. 배달 가능한지 연락해 달라고 하던데요.”

“알았어, 금방 갈게.”

양평 쪽에 딸기 농가에서 모종 주문이 온 모양이었다.

마침, 배달 기사분들이 다 나가고 없어서, 진석이 트럭을 몰고, 직접 배달을 나가기로 했다.

주문 물량은 딸기 모종 5천 주였다. 보통은, 모종을 키우는 농가들에 주문을 연결해 주고는 하지만, 지금은 모종이 모자라, 더러는 진석이 직접 공간에서 키운 모종을 팔기도 하고 있었다.

*   *   *

“날씨가 좋은데.”

양평 근교의 딸기 농장에 모종을 전해 주고 나서 돌아오는 길에는 여러 가지 이름 모를 꽃들이 피어 있었다.

“저런 것들은 모두 야생화인가?”

그러고 보니, 은하수 농장 주인인 은주 씨에게 들은 말이 생각이 났다.

산이나 들에 피어 있는 찔레꽃이 장미의 조상이라는 말이었다.

마치, 남아메리카의 테오신테처럼, 한반도의 산과 들에서 볼 수 있는 찔레꽃이 장미의 먼 조상이라는 이야기였다.

진석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잠시 트럭을 세웠다.

그리고 뭔가에 홀린 듯, 냇가를 따라, 점점 더 산 쪽으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찔레꽃이라? 그런데 찔레꽃이 어떻게 생긴 거지?

사실, 서울에서만 자라난 진석에게 찔레꽃이라는 것은 낯선 이름이었다.

이름은 들어서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본 적은 없었다.

“그래, 휴대폰으로 검색해 보자.”

검색해 본 찔레꽃은 흰색의 수수하고 작은 꽃이었다.

그런 게 있나, 하고 주위를 둘러보자, 운 좋게도 산비탈 한쪽에 하얗게 피어 있는 찔레꽃 무리가 보였다.

“와, 이게 찔레꽃이구나. 흠흠…….”

진석은 가장 궁금했던, 향기를 맡아 보았다. 뭔가 코가 시원해지는 청량한 향기. 확실히, 장미 향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신기하네, 이게 장미의 조상이라고? 하긴, 테오신테도 현대의 옥수수하고는 많이 다르니까.”

아마도, 이런 찔레 같은 야생 장미 중에서, 꽃이 더 크고, 아름답게 진화를 거듭한 것이 현대의 장미가 된 것일 것이다.

거기에, 우성 형질이 잘 전달되는 장미의 특성상, 아름다운 외형과, 특유의 장미 향은 변종을 거듭해도, 그대로 남게 되는 모양이었다.

진석이 원하는 것은 이런 찔레꽃같이 청량한 향기를 가진 장미였다.

“음, 그렇다면, 차라리, 이 찔레꽃을 가져다가, 개량을 해 볼까?”

야생의 장미라고 할 수 있는 찔레를 이용해 보기로 했다.

그것은 수천 년에 걸친, 장미의 진화 과정을 다시 원점에서 시작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석은 공간에서 시간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다.

공간에서라면, 수천 년의 시간이라는 것도, 진석에게는 하루 정도의 작업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 기존의 장미로는 새 품종을 만드는 게 한계가 있다. 차라리, 더 먼 조상인 찔레부터 시작해 보는 거다.”

진석은 조심스럽게 야생 찔레꽃을 트럭으로 파 옮기기 시작했다.

*   *   *

“사장님, 양평에 배달은요?”

“어, 잘 갖다주고 왔어.”

“여기저기서 모종이 모자란다고 난리예요.”

“그러게. 육묘하는 농장도 계속 늘어나는데도 수요가 감당이 안 되네.”

“그건 그렇고, 트럭에 있는 건 뭐예요?”

배달을 마치고, 꼬마 빌딩으로 돌아온, 진석의 트럭을 바라보던 수정이 물었다.

“아, 찔레꽃이야. 지나가다가, 예쁘길래.”

“어머, 산에서 저런 거, 다 가지고 오면 어떡해요? 그저 눈으로만 즐겨야 한다고요.”

“나도 알아. 이건, 실험용으로 가져온 거야.”

“실험용요?”

“그래, 찔레를 개량해서 새로운 장미를 만들어 보려고.”

“찔레꽃으로 장미를요? 그게 가능해요?”

“안 될 거 없지. 찔레랑 장미는 같은 종류라고. 찔레꽃이 장미의 먼 조상이니까.”

*   *   *

공간으로 돌아온 진석은 이번에는 장미 모종 대신, 찔레꽃을 키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인공 교잡을 하지 않고, 시간을 가속하며, 자연적으로 돌연변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작업에 필요한 일들은 진흙 일꾼들이 도와주고 있었다.

그렇게, 수십 년, 수백 년, 그리고 천 년의 시간이 지나갔다.

작고 소박했던, 흰색의 찔레꽃은 천 년의 시간을 가속하며, 점점 더 크고, 아름다운 장미의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현대의 장미와 유사한 외형을 갖게 되었을 때쯤, 흰색의 찔레 향을 가진 꽃과, 핑크색의 장미 향을 가진, 두 가지로 변종이 나타나게 되었다.

“모양은 핑크색이 더 장미에 가깝고 아름답군.”

진석은 핑크색 꽃의 향을 맡아 보았다. 향기 역시 진하고 그윽한 장미 향이었다.

물론, 아름답고 향도 좋았지만, 진석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 비해, 흰색의 꽃은, 외형은 장미와 비슷했지만, 향기는 아직도 찔레꽃 특유의 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진석은 흰색의 꽃을 선택하고, 그것을 더 발전시켜 나갔다.

중간중간, 장미 향이 나타났지만, 그럴 때마다, 장미 향의 꽃은 배제시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다시, 수백 년의 시간을 더 가속하고 나자…… 비로소, 현대의 장미의 화려한 형태와, 찔레꽃의 향기를 가진,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품종의 장미가 탄생했다.

“뭐라고 이름을 붙여 줄까?”

*   *   *

“찔레…… 장미요?”

서은주는 진석이 내민 장미의 받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찔레장미라는 것도 있었나? 하긴, 장미 품종은 워낙 많으니까, 제가 다 알지는 못하죠.”

“이건 제가 새로 개발한 품종이에요.”

“개발요? 언제요?”

“아, 저희 회사에서 그동안 여러 작물을 가지고 실험하고 있는 연구팀이 있는데, 그중에 이런 장미도 만들었더라고요. 향을 맡아 보세요. 진짜, 찔레 향이 난다고요.”

진석의 말에, 서은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장미꽃에 코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음, 정말이네. 세상에, 정말, 찔레꽃 향기랑 비슷해요.”

“후후. 그렇죠. 그건, 찔레꽃을 개량해서 만든 품종이에요. 찔레꽃 향기가 나는 게 당연하겠죠.”

“역시 세상은 넓군요. 저는 제가 장미 전문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저도 모르는 이런 찔레장미가 어디선가 개발되고 있을 줄이야…….”

“그래서 말인데요. 이 장미, 은하수 농장에서 키워 보면 어떨까요?”

“저희 농장에서요?”

“예, 저는 이 찔레장미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서은주 사장님 생각은 어때요?”

“경쟁력이라? 저도 거기에는 동의해요. 기존의 장미 향과는 완전히 다른 향. 하지만, 모양은 완벽한 장미의 외형을 가지고 있고. 물론 기존의 장미 향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새로운 걸 찾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하세요? 저랑 생각이 비슷하네요.”

진석의 생각도 그랬다. 뭔가, 이질적인 듯, 장미꽃의 외형과, 찔레꽃의 향기는 잘 어울렸다. 그리고 그런 두 개의 조합은 뭔가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향기가 너무 상큼하고 신선해요. 뭐랄까? 자연 그대로의 향기랄까, 비 갠 오후에 촉촉하게 젖은 들판 한가운데를 걷는 느낌이에요.”

“맘에 드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장미 모종은 몇 개나 필요하세요?”

“음, 5천 주 주문 가능한가요?”

“5천 주나요?”

“그 정도는 키워야죠.”

“새로 개발한 품종이니까, 모종은 공짜로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공짜요? 아니에요. 이만한 퀄리티면 상업적 가치는 충분해요. 모종값은 지불해야죠.”

서은주는 자립적인 여자였다. 결국, 주당, 1천5백 원에 찔레장미 모종 5천 주를 공급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찔레장미는 향기는 찔레꽃 향기가 나는 흰색, 빨강, 핑크, 파랑, 노랑의 다섯 가지 색을 가지고 있었다.

*   *   *

진석의 공간은 계속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3만 평에 가까운 크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일꾼들의 숫자도 계속 늘어서, 지금은 2백 명 이상의 일꾼들이 진석의 작물과, 나무, 장미 들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이 주로 하는 일은, 작물에 물을 주는 일이었다. 진석이 만든, 여러 개의 샘에서는 충분한 물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진석은 일꾼들을 동원해, 물뿌리개로 물을 주기도 하고, 작물을 키우는 주위에 수로를 만들어 물이 흐르게 하기도 하는 방식으로 물을 공급해 주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 공간에는 비가 오지 않네.”

샘에서 솟는 물로 그럭저럭 농사는 짓고 있었지만, 공간의 토양은 전반적으로 메말라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비가 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대지를 촉촉하게 적셔 줄 그런 단비가 필요했다.

-공간에는 아직,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아직은 공간의 사이즈가 많이 부족합니다.

“뭐야? 그럼, 공간이 더 커지면, 비를 내리게 할 수 있다는 말이야?”

-물론입니다. 공간의 크기에 따라, 공간주님의 레벨도 상승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공간관리 스킬도 늘어납니다.

“그럼 비를 내리게 하려면, 공간이 얼마나 더 커져야 하는데?”

-강우 스킬 발동의 최소 조건은 공간 면적, 100제곱 킬로미터입니다.

“100제곱 킬로미터라? 그게 평수로는 얼마나 하는 거지?”

-3천만 평이 조금 넘습니다.

“사…… 삼천만?”

일단, 비를 내리게 하는 건, 당분간은 꿈도 꾸지 말아야 할 것 같다.

대신 진석은 스프링클러를 사서, 공간 여기저기에 스프링클러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전기가 없어, 가솔린펌프 양수기도 구매했다.

비는 내리지 않지만, 여기저기에 샘은 자유롭게 만들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스프링클러와 진흙 일꾼들을 이용해, 작물을 키우는 데 필요한 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있었다.

거기에 야자수와 맹그로브 나무들도 멋지게 자라나기 시작하자, 진석의 공간은 마치 사막 한가운데의 오아시스가 된 느낌이었다.

“주변 풍경은 제법 멋진데. 장미들도 잘 자라고, 야자수에, 커다란 샘이 있어서 오아시스 느낌도 나고 말이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뭔가 부족하십니까?

진석은 뒤를 돌아보았다. 일꾼들이 야자나무와 잎으로 엉성하게 만든, 오두막은 다소 초라한 모습이었다.

“뭐, 많은 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모래인간들로는 이 오두막 이상은 무리겠지?”

진석의 경험으로는 일꾼들의 지능은 아무리 생각해도, 초등학생 수준 이상은 못 되는 것 같았다.

뭔가를 시키면, 할 수는 있지만, 그 이상은 무리.

거기에 따로 건축 지식도 없는 진석이 디테일하게 명령을 내리며, 그럴듯한 건물을 만들어 낼 수도 없는 일이었다.

-건물이 필요하시군요?

“그래. 좀 더 제대로 된 건물을 만들 수는 없는 건가?”

-진흙을 이용해서 건물을 만드는 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진흙? 진흙으로 벽돌이라도 만들라는 거야? 흙벽돌집을 만들라고?”

-그런 방법도 있고, 원하는 건물을 상상할 수 있다면, 흙에서 바로 건물을 출력할 수 있습니다.

“건물을 출력한다니 무슨 말이야?”

-모래인간이나 진흙인간을 만드는 것과 비슷합니다. 공간주님의 공간 지배력을 이용해서, 땅속의 물질들의, 형태를 조정할 수 있고, 그 힘을 이용해 마치 3차원 프린터처럼, 흙 속에서 건물을 출력하는 겁니다. 차이라면, 위에서 아래로 원료를 쌓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솟아오른다는 차이 정도죠.

“그런 게 가능하다고?”

하긴, 이곳에서 나는 신과 같은 존재,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공간주다.

진흙으로 땅속에 일꾼들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크기가 더 크다뿐이지, 건물을 만드는 일은 더 단순한 작업인지도 모른다.

마치, 3차원 프린터를 거꾸로 세워 놓고,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나?

땅속에서부터, 뭔가 진석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이미지의 건물이 솟아오르게 된다는 것 같았다.

“그럼, 건물을 만들려면, 그 건물 이미지를 생각하면 되는 거지?”

-그렇습니다. 너무 자세하게 떠올릴 것까지는 없습니다. 공간주님이 단편적으로 떠올린 이미지들은 시스템이 보정을 해서, 최대한 유사한 건물을 출력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만들어지는 건물의 크기나 형태, 내부와 외부의 구조는 공간주님의 상상력에 의해서 정해집니다. 건물을 출력하시겠습니까?

“건물이라? 어떤 게 좋을까?”

진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석의 공간은 전체적으로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도시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일단, 지금 건물을 만들 원료는 진흙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처음이니까, 시험 삼아, 아주 단순한 형태를 떠올렸다.

그저, 단순한 사각형의 형태.

직사각형의 안은 텅 빈 공간으로 지붕도 납작한 말 그대로 사각형의 상자 같은 모양이었다.

대신 크기는 충분히 넓은 공간을 상상했다.

“좋아, 이미지를 상상했어.”

-그럼, 공간주님이 상상하신 이미지를 스캔해서 출력하겠습니다. 건물 출력에는 10시간 포인트가 사용됩니다. 건물을 출력하시겠습니까?

“좋아, 출력…….”

진석이 건물이 들어설 위치를 지정하자, 땅속에서 뭔가 강렬한 기운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간의 진동과 함께, 메마른 땅이 여러 조각으로 갈라지며, 땅속에서 뭔가 솟아 나오기 시작했다.

처음에 보이는 것은 평평한, 지붕. 진흙으로 만들어진 지붕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건물의 상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진석이 솟아오르는 건물을 만져 보자, 부드러운 흙의 감촉이 느껴졌다.

“아직, 마르지 않았잖아?”

-그렇습니다. 부드러운 진흙입니다.

“나중에는 굳어서 단단해지는 거겠지?”

-그렇습니다. 진흙으로 만든 건물은 움직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일꾼들과는 달리, 출력 후에는 바로 건조되어, 단단한 강도를 유지하게 됩니다.

“음,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고.”

진석은 계속 위로 솟아오르는 커다란 사각형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마지막 하부까지, 다 출력이 되자, 진한 갈색을 띠었던 건물의 진흙은 빠르게 건조되며, 옅은 황토색으로 변해버렸다.

“다 된 건가?”

진석이 입구 쪽으로 들어가자, 대략 50평 정도의 넓은 공간이 나왔다.

하지만, 말 그대로, 넓은 사각형의 건물일 뿐이어서, 내부는 아무런 구조도 없이, 텅 빈 사각형의 상자 같은 모습이었다.

군데군데 나 있는 창과 문은, 유리창이나 문도 없이 그저 외부로 뚫려 있는 형태였다.

-마음에 드십니까?

“뭐, 그럭저럭, 햇살도 막아 주고, 안에 소파를 가져다 놓으면, 쉴 수 있는 공간은 충분히 되겠는데.”

뭔가 많이 부족한 느낌이었지만, 다음 기회도 있으니까, 다음에는 좀 더 그럴듯한 건물을 만들어 볼 생각이었다.

아무튼, 나무로 만든 움막보다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은 분명했다.

*   *   *

진석의 딸기 모종 사업은 나날이 성장을 거듭하고 있었다.

전국의 딸기 농가로 제이에스의 단미 딸기 품종이 퍼져나가고, 해외에서도 모종을 구입하고 싶다는 주문이 들어오고 있었다.

“싱가포르 말인가?”

“예. 요새, 싱가포르로 단미 딸기가 수출돼서 인기라나 봐요. 그래서 그쪽 농가에서도 딸기 모종을 구매하고 싶다는데요.”

“일단은 수출은 좀 기다려 보자고, 아직 국내 농가에 모종 공급하는 것도 어렵잖아.”

“알겠습니다. 사장님, 참 그리고 무슨, 현대 부동산이라는 곳에서 연락해 달라고 하던데요.”

“아, 그거. 잘하면, 새로운 건물로 이사 갈지도 몰라.”

“새 건물요?”

“그래, 아무래도, 여기는 좀 규모가 작잖아. 카페도, 기왕이면, 좀 더 크게 확장해서, 제대로 된 북카페로 만들어 볼 생각이고. 그래서, 근처에 적당한 건물이 있으면 하나 더 사려고.”

*   *   *

“이 건물인가요?”

“예. 어떻습니까? 아주 훌륭하죠. 위치도, 홍대에서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고요. 지난번에, 이진석 사장님이 말씀하신 북카페를 열기에도 좋은 곳이죠.”

현대 부동산의 사장님이 보여 주시는 건물은 6층짜리, 중형 빌딩이었다.

“이거, 면적은 얼마나 되는 건가요?”

“대지 면적만 154평이고, 연면적은 528평입니다. 지상 6층은 보시는 대로고, 지하 2층이 더 있습니다.”

“위치도 사람이 많겠네요?”

“코너 건물이 좋다는 건 아시죠? 여기는 코너는 아니지만, 바로 코너 옆이라, 역시 좋은 위치죠.”

진석은 빌딩과, 주변 상가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여기라면, 진석도 자주 와본 곳이다.

평소에도 유동 인구는 늘 많은 곳. 카페 창업에도 좋은 조건이었다.

여기에 북카페를 만들고, 무료 도서관도 운영하고 하면, 시간 포인트 얻기에도 더없이 좋은 곳이다.

“그런데 가격은 얼마나 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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