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과 모래
“창조의 스킬? 그게 뭔데?”
-공간이 어느 정도 확장되면 이제, 공간주님의 관리 작업을 도와줄 피조물의 창조가 가능합니다.
“뭐…… 뭐라고? 피조물?”
-지금 레벨에서는 아직, 만들 수 있는 피조물은 제한적입니다.
“만들 수는 있는 거냐?”
-현재 레벨에서는 모래인간과 진흙인간 정도만 가능합니다.
“모래인간? 진흙인간? 모래인간이라는 게 뭐지?”
-모래와 진흙 같은 땅속의 기본 원료로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럼 생명체인가?”
-생명체는 아니고 단순한 모래와 진흙일 뿐입니다.
“모래와 진흙? 그걸 일꾼으로 쓸 수 있는 건가? 로봇처럼?”
-로봇과는 좀 다르지만 생명체가 아니고 단순한 작업을 돕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비슷합니다.
“모래가 어떻게 모래인간이 돼서 움직일 수 있다는 거지?”
-공간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합니다. 형태라는 것은 시공간의 다른 형식일 뿐이죠. 공간주님은 공간 내의 모든 형태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한번 해 보시죠.
“뭘 말이야?”
-형태를 만들어 보십쇼.
“형태라고? 어떻게?”
-머릿속으로 원하는 이미지를 생각해 보십쇼. 그리고 형태 만들기 스킬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모래인간이라? 그건 어떻게 생긴 거지?”
-저도 모릅니다. 그건 공간주님이 어떤 걸 생각하느냐에 달려 있지요. 모든 것은 공간주님의 상상력에 달렸습니다.
“그래? 그건 좋은 건가? 내 마음대로라는 건데.”
진석은 머릿속으로 모래로 된, 덩치 큰 어떤 형태를 생각해 보았다.
사람과 로봇의 이미지와 비슷한 것이었다.
-이미지를 스캔하시겠습니까?
“그래, 이미지를 스캔.”
-형태를 출력하시겠습니까?
“그래, 그대로 출력. 그러니까, 창조 가능한 것이겠지?”
-물론입니다. 원하는 숫자를 지정하십쇼.
진석이 머릿속으로 떠올린, 모래인간은 키는 190 정도에, 큰 키의 모래 인형 같은 것이었다.
모래 상이라고 해야 하나?
“모래인간을 20명 출력.”
진석이 출력을 명령하자, 땅바닥이 미세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뭔가, 땅바닥 속에서 기가 모이는 느낌이 들더니, 땅속에서 조금씩 모래로 만들어진 머리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모래로 만든 동상의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모래 상은 점점 더 목과 어깨, 그리고 허리 순으로 위로 솟아오르고 있었다.
마지막 발목과 발바닥까지 땅속에 솟아오른 모래 상은 진석이 상상한 이미지와 완전히 동일했다.
내가 상상한 이미지 그대로잖아?
-물론입니다. 공간주님의 뇌를 스캔해서, 그대로의 이미지를 구현했습니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땅속에서 솟아난 모래인간은 모두 20명이었다.
모두 농구선수처럼 키가 크고 거대한 체격이었다. 하지만, 그래 봐야 모래로 만든 모래 상에 불과했다.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거 움직일 수는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모래인간을 활성화시키시겠습니까?
“그래, 활성화.”
진석이 모래인간을 활성화시키자, 모래인간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간은 느릿느릿한 걸음이었다. 모래의 무게 때문인지, 걸을 때마다 쿵쿵거리는 느낌이었다.
“움직이기는 하는군. 그런데 녀석들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거지?”
-필요한 작업 명령을 내리면 됩니다. 원하는 작업 명령을 작성해 주십쇼.
일단 밭을 더 늘리면 좋을 것 같았다. 딸기와 채소 외에도, 다른 작물도 키워 보고 싶었다.
“좋아. 일단, 밭을 더 만들어야겠어. 그 정도는 가능하겠지? 일단 땅부터 파라고.”
거대한 좀비 같은 모래인간들은 진석의 명령에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으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뭐? 뭐 하는 거야? 손으로 땅을 파고 있잖아?”
-어쩔 수 없습니다. 장비가 없으니.
아무리 그래도, 맨손, 아니 모래 손으로 땅을 파다니.
덩치가 커서 힘 좀 쓸 분위기인데, 손으로 파서는 영 작업 진도가 아니었다.
삽이랑, 곡괭이 같은 걸 가져와야 하나?
아니지, 가져오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모래로 만들 수 없으려나?
“곡괭이를 모래로 만들 수는 없는 거냐?”
-물론 가능합니다. 공간주님은, 공간 안의 모든 것의 형태를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래? 그럼, 모래로 곡괭이와 삽을 만들어 줘.”
-일단 원하는 이미지를 상상하십쇼. 그리고 스캔을 하고 출력을 하면, 원하는 것이 만들어질 겁니다.
아까와 같은 방식이었다. 진석은 머릿속으로 삽과 곡괭이의 이미지를 상상하고 그것을 스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출력을 하자, 다시 땅바닥이 움직이며 기운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땅속의 모래들이 한 지점으로 몰려들더니, 땅속에서 삽과 곡괭이의 형상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봐, 모래인간들. 이걸로 작업을 해 봐. 땅파기가 수월할 거야.”
모래인간들이 모래로 만든 삽과 곡괭이로 땅을 파기 시작했다. 아까 맨손으로 할 때보다는 괜찮아 보였지만, 아직도 뭔가 부족했다.
“잠깐. 땅속의 원료를 이용하면 뭐든 내가 원하는 형상으로 만들 수 있는 거야?”
-그렇습니다. 이 공간에서 뭐든 사물의 형태는 공간주님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렇다면, 땅속의 철로 뭔가를 만들 수도 있는 거지?”
-금속이든 뭐든, 상관없습니다.
“오케이. 그럼, 삽과 곡괭이는 철로 만들어야겠네.”
진석이 스캔과 출력을 하자, 이번에는 땅속에서 철로 된 삽과 곡괭이가 솟아올랐다.
모래인간들이 쇠로 된 삽을 들고 땅을 파기 시작하자, 본격적으로 작업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뭔가 제대로 되는 느낌이잖아.”
모래인간들은 움직임은 느릿느릿했지만, 쉬지 않고 일했고, 힘도 좋은 것 같았다.
진석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천 평 규모의 밭이 3시간 정도 만에 만들어졌다.
진석은 새로 개간된 밭고랑들을 살펴보며 미소를 지었다.
굉장한데, 모래인간들이 있으니, 작업이 훨씬 쉬워졌잖아.
사실, 쉬워진 정도가 아니라, 새로운 차원이 열린 느낌이었다.
거기에 추가로 진흙 인간도 20명을 만들었다.
진흙 인간도 진흙으로 만들어졌을 뿐, 모래인간과 비슷한 체격과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모래인간들은 대체 무슨 에너지로 움직이는 거지?”
-그건 공간주님의 공간 지배력을 이용하는 겁니다. 외부는 공간, 정확히는 시공간을 정지시켜 그 외형을 유지하게 만들고, 내부는 그것과 달리, 시공간을 확장했다가 수축시키는 방법으로 크기를 조절합니다. 인간의 근육을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원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오, 그러니까, 공간의 크기를 늘렸다 줄였다 하는 거라는 말인가? 그런 거라면 유체역학과도 비슷하네.”
아무튼, 별다른 동력 없이 진석의 공간 지배력을 이용해, 움직인다는 말인 것 같았다.
진흙과 모래로 만든, 40명의 일꾼들이 작업을 도와주자, 이것저것 하고 싶은 일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진석 혼자 하기에는 힘이 들어서 못 하고 있던, 여러 가지 망상들이, 이제 실현할 수 있는 실체적 힘을 갖게 된 것이다.
“흠, 공간이 꽤 넓은데, 이 섬을 어떻게 좀 채워 볼까? 그렇지, 나무를 좀 심어 볼까?”
군데군데 딸기밭과 채소밭이 있기는 했지만, 진석의 공간은, 황량한 6천 평짜리 황무지 섬에 가까웠다.
일단 그럴듯한 작은 섬으로 만들려면, 작물 외에도, 나무나 풀이 있어야 했다.
무슨 나무가 좋을까? 야자나 맹그로브 나무, 그런 게 잘 어울릴 것 같은데. 날씨가 온화한 열대나 온대 정도의 기후라, 그런 나무들이 적당할 것 같았다.
“나무 같은 건, 창조할 수 없는 건가?”
-현재로서는 불가능합니다. 필요한 식물들은 외부에서 가져오는 수밖에 없습니다.
현재로는 불가능하다. 나중에는 가능하다는 말인가? 모르겠다. 지금 만들 수 있는 건, 저 모래인간과 진흙인간들뿐인 모양이었다.
일단은 섬에 심을 나무들을 가져오기 위해, 공간을 정지시키고, 밖으로 나가야 했다.
* * *
“야자수 묘목이라? 맹그로브 나무 묘목도요?”
자주 가던, 종로의 종묘상과 근처의 묘목을 파는 가게들을 다 뒤져 보았지만, 야자수 묘목을 파는 곳은 없었다.
결국, 국립식물원을 찾아야 했다.
* * *
“야자수 묘목은 어디에 쓰시려고요? 키울 수 있는 그런 나무는 아닌데.”
“일종의 연구용이죠. 제이에스 바이오의 이진석 대표라고 합니다.”
명함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식물원 사람들도 제이에스 바이오를 알고 있었다.
“신품종 딸기가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이름이 ‘단미’라면서요. 그렇지 않아도. 한번 키워 보려고 문의하려던 참이었는데.”
“그래요? 단미 모종을 좀 보내 드릴까요?”
“그러면, 저희가 고맙죠. 식물원에서 키우면, 홍보 효과도 좀 있을 겁니다.”
“그러면 좋겠네요. 아직은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일단, 모종은 조만간 보내 드리죠.”
“그런데, 야자와 맹그로브는 뭐 하시려고요?”
“새로운 품종을 개발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식물로 실험을 하고 있습니다.”
“야자수는 온실이 아니면, 키우기 어려운데요. 그것도 규모가 있는 온실이 아니고는 좀 어려운데 말입니다.”
“상관없습니다. 아주 넓은 온실을 가지고 있거든요. 연구용이죠.”
“그래서, 야자수 묘목이 필요하시다는 거군요. 맹그로브도요.”
“예, 그 외에도, 열대의 섬 같은 곳에서 잘 자랄 꽃이나 식물들을 구할 수 있을까요?”
식물원은 의외로 협조적이었다. 덕분에 필요한 묘목들과 씨앗들을 구할 수 있었다. 야자수 묘목은 10개뿐이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일단 공간에 심어 놓으면, 시간을 가속해서, 개체 수를 늘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필요한 씨앗과 묘목들을 챙겨서 다시 진석은 공간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모래와 진흙 인간들을 동원해서, 나무를 심고 물을 주었다.
일단 야자수 묘목을 심어 놓고, 그 주변의 시간을 가속하자, 나무들은 금세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열매가 자라고, 나무 아래로 야자가 떨어지고, 썩어서 땅속으로 흡수가 되고, 씨앗이 발아하며, 작은 야자 묘목이 자라난다.
묘목이 자라나는 시점에, 시간을 정지시키고, 모래인간을 동원 재취하고 다시 묘목을 성장시키는 방식이었다.
약간 단순 반복이었지만, 몇 번의 반복 작업을 통해, 야자와 맹그로브 나무는 수십 그루에서 수백으로 다시 수천으로 불어났다.
“후후, 생각보다 쉽잖아.”
같이 가져온 꽃들과 이름 모를 열대 식물들도 몇 번의 증식 작업을 커져, 숫자가 크게 불어났다.
불어난 나무와 꽃들로 공간은 황량한 섬에서 나무와 식물들이 무성한 푸르른 섬으로 변신을 마쳤다.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 풍경이었다.
6천 평 정도의 섬은 야자수와 맹그로브 숲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섬이 되어 있었다.
“약간 휴양지 분위기도 나는데, 뭔가 방갈로 같은 것이 있으면 좋을 텐데. 음…….”
그래, 일을 할 인력은 모래인간들을 동원하면 충분하고, 재료는 나무를 이용하면 가능하다.
“좋아, 나무들을 잘라서, 방갈로를 제작하자고.”
모래인간들과 진흙인간들로 나무를 자르게 하고, 나뭇잎과 줄기로 엉성하게나마, 작은 오두막을 만들 수 있었다.
처음에 가져왔던, 소파도 방갈로 안에 넣어 두자, 그럭저럭, 괜찮은 쉼터가 만들어진 셈이었다.
그래 봐야, 작은 무인도에 오두막 하나를 지어 놓은 거지만, 이 모든 것이 무에서 시작한 것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진석의 입장에서는 만족스러운 작업이었다.
방갈로 다음은 딸기밭을 더 늘리는 것이었다. 이제 본격적으로 딸기 모종을 판매하기 위해서, 필요한 모종을 생산해야 했다.
혼자서 어떻게 모종을 키울까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는 훌륭한 일꾼들이 40명이나 생겨난 것이다.
이제 주문만 들어오면 된다.
* * *
“사장님, 딸기 모종 주문이 들어왔어요.”
“주문?”
장수정은, 꽤 들뜬 목소리였다. 제이에스 바이오에서 처음으로 모종을 납품하게 된 것이다.
“어디서?”
“김포의 성우 농원이라는데요.”
“성우 농원이라?”
딸기를 키우는 수도권의 농장 여러 곳에 샘플들을 보냈었는데 그중 하나에서 첫 주문이 들어온 것이었다.
“5천 주 배달 가능하냐고 해서, 된다고 했는데. 사장님 모종은 있는 거죠?”
“흠, 5천 주라?”
공간에 그 정도의 물량이라면, 넉넉히 준비되어 있었다.
* * *
김포시, 딸기 하우스 단지.
“성우 농원이라. 여기군.”
새로 산, 1톤 트럭 화물칸에는 5천 주의 단미 딸기, 모종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모종을 어떻게 팔아야 할지 몰라서, 단미 딸기와, 모종 시제품을 택배로, 딸기 농장들에 무작위로 보내 본 것이었다.
약간 맨땅에 헤딩하는 느낌이었지만, 그렇게 보낸, 택배 상자를 열어 보고,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제이에스 바이오 이진석이라고 합니다.”
“오, 사장님이시구나? 허허……. 생각보다 젊네요.”
성우 농원의 주인은 60대 초반의 약간 마르고 단단한 체구의 남자였다.
“와, 하우스가 제법 많군요?”
“20년 전부터 작은 한 동에서 시작해서, 조금씩, 늘려나가다 보니까, 이 정도가 됐어요. 대단한 건 아니죠.”
성우 농원은 김포에서 쌈 채소나, 딸기, 오이, 등 서울에 판매할 채소류를 생산하는 농장이었다.
“최성우라고 합니다. 제 이름을 따서 성우 농원이죠. 지금은 아들 둘이랑, 사위 하나가 같이해요. 바쁠 때는 사람들도 쓰고.”
“토마토도 있고, 오이도 있고, 이런 곳에서 서울 사람들의 먹거리가 나오는 거군요.”
진석도 오이가 자라는 하우스는 처음 보는 거라, 신기한 듯,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다.
“딸기 하우스는 어디인가요?”
“딸기는 이쪽 끝에 있는 하우스예요.”
최성우 사장님은, 진석을 비닐하우스로 안내했다.
“꽤, 크네요. 몇 평인가요?”
“2백 평요. 여기에 5천 주를 심으면 딱 좋아요.”
“와, 하우스가 좋은데요. 사실은, 여기 성우 농원이, 저희 회사의 모종을 주문한 첫 농장입니다.”
“하하, 그래요. 아이고, 그거 영광이네요.”
“영광은요. 제가 영광이죠. 아무래도, 딸기도 농업이라 그런지, 낯선 품종을 잘 심으려고 하지 않더라고요.”
뛰어난 맛과 크기, 향을 가진, 단미 라는 신품종을 개발했지만, 신생 회사의 모종이라 그런지, 생각만큼 농가들의 반응은 뜨겁지 않았다.
“뭐, 농사라는 게, 주기가 길어요. 도시 사람들이 하는 일하고는 차원이 다르거든요. 보통, 주나 달 단위가 아니라, 연간 단위로 움직이는 사업이죠. 하지만, 또, 계절이 바뀌듯이 때가 되면, 한 번에 싹하고 변하는 특징도 있어요.”
“한 번에요?”
“예, 농부들의 특징이랄까. 느릿느릿하지만, 계절의 변화를 놓치지 않거든요. 신품종이 좋다고 소문이 나면, 한 번에 다 갈아타죠. 저는 보통보다는 좀 빠른 사람이고요.”
“글쎄요. 사장님 말씀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진석은 최성우 사장의 말이 립서비스인지, 아니면 경험에서 나온, 예측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 할 일은, 적게나마, 들어오는 주문을 충실하게 처리하는 것뿐이었다.
“모종은 여기로 내리면 될까요?”
“예, 하우스 안에 넣을 거니까. 같이 합시다.”
진석이 트럭을 하우스 앞에 세우자, 농장 사람들이 나와서, 같이 모종을 내렸다. 진석의 첫 모종 판매는 모두 5천 주. 판매액은 한 주당, 천 원씩, 모두 5백만 원이었다.
“후회 안 하실 겁니다. 맛도 좋고, 크기도 커서, 수익도 크게 늘 거고요.”
“택배로 보내 준, 그 단미 딸기처럼만 나온다면, 수익이 두 배는 날 거라고 봐요. 그래도 일단은 딸기 농사라는 게, 변수가 많으니까, 일단 심어 봐야죠. 그러면 알겠죠.”
최성우 사장의 말대로, 농업은 주기가 긴 사업이다. 막 신제품을 출시하고, 바로 피드백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 좀, 느긋하게 농부의 마음으로, 천천히 기다려 보자.
* * *
“대학교 1학년이라고요?”
유민지라는 좀 귀여운 인상의 여학생이었다. 대단한 미녀라기보다는 붙임성 좋게 생긴 얼굴이었다.
“성격은 어때요?”
“사람들하고 잘 어울리고, 말도 잘하는 편이고요. 어디서도 적응이 빠릅니다.”
“적응력이라? 그건 참 중요하죠. 환경이 바뀌어도, 적응이 빠르면 살아남으니까요.”
“예, 맞아요. 사실, 저도 한참 바뀐 환경에 적응 중이에요.”
“그건, 무슨 말이죠? 바뀐 환경이라니?”
“원래는 아버지가 공무원이셔서 경제적 어려움 없이 자랐는데, 아버지가 사업을 하신다고 조기 퇴직을 하시더니, 사업이 망해서, 좀 어려워졌어요.”
“음, 그래요? 그래서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바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이거군요?”
“예, 사장님 말대로 살아남는 건 환경에 빨리 적응하는 쪽이니까요. 지난 과거는 잊고, 새롭게 적응해 보려고요.”
“후후. 좋은 자세군요. 합격.”
“어머, 정말요? 그럼, 내일부터 출근할까요?”
“오늘부터는 안 될까요? 그러면, 하루치 일당을 더 버는 거죠.”
“아, 예. 그럼, 오늘부터 바로 일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유쾌한 아가씨였다. 조금 무리하게 바로 일을 부탁했는데, 싫어하지 않고, 바로 시작하는 것도 마음에 들고…….
수정 씨는 제이에스 정식 직원으로 회사 업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카페를 운영할 새로운 알바생이 필요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제로는 수정 씨와, 진석까지 세 명이 번갈아 가며 카페를 보고 있었다.
* * *
“생각보다 카페가 한가하네요.”
“오전에는 사람이 별로 없죠. 이 동네가 그래요. 아침에는 다들 뭐 하고 사는 건지.”
카페에 손님이 없어서, 유민지는 제이에스 사무실에 놀러 와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딸기 모종을 파는 거예요? 딸기 모종은 어디서 키워요?”
“아…… 그건…… 농장이 따로 있어요.”
“어디에요?”
“서울 근교죠?”
“음, 그렇구나. 이 딸기 정말 맛있다.”
유민지는 단미 딸기 맛을 보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맛있어. 그런데 왜 이 딸기 모종이 잘 안 팔려요?”
“뭐, 아직, 홍보가 잘 안 되기도 했고, 원래, 농업이라는 게 속도가 느려요. 하지만, 또 때가 되면, 한 번에 확 바뀌는 거죠. 마치 계절의 변화처럼요.”
“그거, 잘 안 팔리면, 제가 팔아 볼까요?”
“민지 씨가? 어떻게?”
“블로그나. SNS를 이용해 보는 거죠. 꼭 농장에다 팔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농장이 아니면, 어디에 팔려고?”
“요새는 옥상에 화분을 놓고 딸기를 키우는 분들도 많잖아요. 날씨도 따뜻해지니까, 취미 삼아, 작물을 키우는 분들도 많고. 사장님도 그런 거 아시죠? 텃밭 만들기 프로젝트 그런 거요.”
“전문 농장에 파는 게 아니라, 취미로 하는 개인들에게 판매하자는 건가?”
뭐,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개인에게 소량으로 판매하는 건, 큰돈은 안 되겠지만, 그런 식으로 입소문을 타면, 홍보 효과는 좋을 것 같았다.
“뭐, 나쁘지 않은 생각인데. 그런데, 난, SNS 그런 쪽은 잘 모르는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래 봬도, 한때는 맛집 블로거로 날렸었다고요.”
“그래?”
“홍보만 잘하면, 이거 엄청 잘 팔릴 것 같아요. 제가 맛에 좀 예민한데, 이렇게 맛있는 딸기는 정말 처음이라고요.”
“좋아. 민지 씨가 그렇게 해 보고 싶다면…….”
“대신, 홍보 활동비는 따로 주시는 거죠?”
“그야 물론이지.”
생각보다, 적응력이 빠른 아이였다. 유민지가 블로그와 SNS 쪽 홍보를 시작하고부터, 개인 주문이 확실히 늘어나기 시작했다.
* * *
“사장님, 또, 주문이에요. 딸기 모종 20주하고, 그리고, 딸기를 구매하고 싶다는 문의도 많아요. 딸기는 더 없나요?”
“딸기는 좀 기다려 봐.”
모종을 팔아 보려고, 소량으로 개인 주문을 받기 시작했는데, 샘플로 보내준 단미 딸기를 맛보고 딸기를 더 주문하고 싶다는 주문이 많았다.
공간에서 딸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그보다도, 이미 단미의 모종을 사 간, 농장과 구매를 원하는 사람을 연결해 주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어차피, 딸기가 잘 팔려야 모종도 더 찾을 테니 말이다.
“여보세요. 성우 농장이죠?”
-아, 제이에스 사장님이 웬일입니까?
“딸기 모종 말입니다. 잘 자라고 있죠? 이제 수확할 때가 된 것 같은데?”
-맞아요. 잘 아시네요. 딸기 모종이 아주 쑥쑥 잘 자라고 있습니다. 이제 출하할 때가 됐어요.
“그래요? 마침, 저희 회사로 단미 딸기 주문이 들어오고 있는데 납품 가능할까요?”
-납품요?
“뭐, 저희가 중간 도매를 하려는 건 아니고, 주문을 하시는 분들이 있어서, 제가 성우 농장으로 직거래를 좀 연결해 드리려고요.”
그동안 성우 농장을 비롯해서, 몇몇 농장에 모종을 판매한 것들이 어느덧 결실의 열매를 맺고 있었다.
일종의 상생이랄까. 모종을 판매한 농장에 고객들을 소개시켜 주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의외의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 * *
“수정 씨, 이게 다 모종 주문이야?”
“예, 갑자기 모종을 찾는 사람들이 엄청 늘었어요.”
“어디 보자. 이건 농장에서 대량 주문이 많이 들어왔네.”
“예, 드디어 농장주들에게도 입소문이 난 모양이에요.”
제이에스에서 농장주와, 소비자 간의 직거래를 계속 연결해 준 효과였을까?
단미 딸기를 심은 농장들이 딸기 직거래로 고수익을 내고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단미 모종의 인기가 치솟기 시작했다.
“와, 이게 다 주문이라고? 이게 다 얼마야? 주문 들어온 게, 10만 주나 되잖아?”
모종 10만 주면, 1억 원 정도의 주문액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여기저기서 대량의 주문 신청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사장님, 이 주문들 다 받아도 돼요?”
수정 씨가 걱정스러운 듯이 진석에게 물었다.
“뭐, 일단 다 받아 놔. 내가 모종 생산을 늘리라고 명령할 테니까.”
“명령요? 누구한테요?”
* * *
모래와 진흙 일꾼들은 점점 더 숫자가 늘어나고 있었다.
공간의 크기도 점점 더 확장돼서, 현재는 2만 평 이상의 야자수가 늘어선 멋진 열대의 섬으로 변해 있었다.
“모종은 어떻게 생산이 되겠는데, 이걸 운반하기가 너무 힘들잖아.”
딸기 모종 생산은 공간에서 일꾼들에게 맡기면 되지만, 공간 밖으로 모종을 나르는 일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공간의 출입구는 진석의 거실에 있기 때문에, 거실에서 다시, 지하의 창고로 모종을 옮기는 것은 온전히 진석 혼자 해야 하는 일이었다.
몇백 개나, 몇천 개 단위만 해도, 그럭저럭, 무겁지 않은 모종판이라, 어렵지 않게 나를 수 있었다.
하지만 숫자가 몇만, 몇십만 단위가 되자, 이건 전혀 차원의 다른 문제가 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게 힘드시면, 공간의 출입구를 추가해 보시죠.
“뭐, 출입구를 추가하라고? 그게 가능한 거였어?”
-100시간 포인트를 사용하시면, 원하는 곳에 추가로 공간의 출입구를 만들 수 있습니다.
“그래?”
출입구를 다른 곳에 만들 수 있다면, 모종을 나르는 일이 한결 더 쉬워질 수 있다. 그런데 출입구를 어디에 만들지?
지금은 지하 창고에 모종을 보관했다가 택배나, 아니면, 트럭으로 농장에 배달하고는 하는데, 아무래도 물류 창고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여기저기 알아보다가, 파주 쪽에, 창고를 임대하기로 했다. 그리고 주문을 원활하게 처리하기 위해, 트럭 기사도 추가로 고용했다.
* * *
파주의 임대 창고.
창고는 아직 텅 비어 있었다. 진석은 상태창을 열었다.
“새로운 출입구를 열어 줘.”
-새로운 출입구의 위치는 이곳 창고 내부로 지정하겠습니다. 시간 포인트 100포인트가 차감됩니다. 새로운 출입구를 추가하시겠습니까?
“그래, 출입구 추가.”
진석이 명령을 내리자, 공간으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열렸다.
이제 공간과 창고 사이가 다이렉트로 연결된 것이다.
공간에서는 모래와 진흙으로 만든 일꾼들이 모종 생산을 마치고, 출하를 준비 중이었다.
“잠깐. 창고까지 일꾼들이 올 수 있는 건가?”
-창고 정도면 가능합니다. 하지만, 모래와 진흙 일꾼들은 공간을 벗어나면, 형태 유지가 어렵기 때문에, 10분 이상은 공간 밖에 머무르는 것은 위험합니다.
“10분 이내면, 괜찮다는 건가?”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10분을 초과하면, 원래대로, 그러니까, 모래와 진흙으로 돌아갈 겁니다.
공간의 출입구가 열리고, 모래와 진흙 인간들이 모종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꾼들은 공간 밖에서는 10분이라는 시간 제한이 있었지만, 인원이 많았기 때문에, 짧은 시간을 교대로 움직이며, 모종 운반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했다.
텅 비었던, 창고는 어느새, 딸기 모종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