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간을 열다 (2/183)

공간을 열다

“아이고, 침대 나르기 이렇게 힘든 집은 처음이네.”

“아, 죄송합니다.”

이삿짐이랄 건 별로 없었지만, 일단, 싱크대와, 침대 소파, 냉장고, TV 정도는 들여놨다.

냉장고와 침대는 배달을 하러 온 아저씨들에게 미안할 정도로 좁은 계단으로 옮기는 일이 힘들었다. 그나마 옥상으로 올린 후에 내리는 거라, 다행인 정도였다.

“휴, 겨우 이사가 마무리된 건가?”

대충 정리를 하자, 그래도 생각보다는 괜찮은 것 같았다. 어쨌든 내 집이고,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이었다.

좁기는 하지만, 고시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건물은 건축가가 무슨 상까지 받았다는데, 아무튼, 좁은 공간을 최대한 활용해 보려고 노력한 점은 인정을 해야 했다.

계단 밑에도 수납 공간이 있고, 여기저기, 숨겨진 공간이 많이 있었다.

“저도 다는 몰라요. 사시면서 찾아보세요. 숨은 공간들이 많이 있으니까.”

부동산 매니저도 다는 모른다는 이 건물의 숨은 공간. 아직 입주한 적은 없는 신축 건물이라고 했다. 지은 지는 2년 정도 됐다고 했는데, 아무튼 내가 첫 번째 입주자인 셈이었다.

짐 정리를 하고,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도 시원해질 무렵이었다.

맥주 한잔을 마시고 나자, 긴장도 풀리고, 비로소 건물주가 되었다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약간 피곤하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피로감이었다. 거기에 알코올 기운인지, 조금씩 졸리기도 하고.

아, 벌써 자면, 안 되는데, 정신 좀 차리자.

기지개를 켜고, 옥상에 올라가 볼 생각이었다. 약간 춥기는 하지만, 야외 테라스가 있어서, 여름에는 정말 좋을 것 같았다.

옥상으로 올라가려는데, 계단 안쪽에 낯선 문이 보였다.

“또, 숨은 공간인가?”

열어 봐야, 수납장 정도겠지만, 그래도 건물주가 되었으니 속속들이 다 알아야겠지?

진석은 천천히 의문의 문을 열어 보았다.

어?

안쪽은 뭔가 어두운 공간으로 연결되고 있었다.

내가 술에 취해서, 옥상 문을 잘못 연 건가? 머릿속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앞으로 한 발을 내디뎠다.

그와 동시에, 뭔가 팟, 하고 주위가 환해지는 느낌…….

바다잖아? 바다? 바다라고?

그것은 바다였다. 그리고, 맨발인 발바닥으로 바닷물이 닿고 있었다.

뭐지? 여긴 어디? 난 누구? 이건 꿈이겠지?

역시 꿈인가? 주위는 완벽한 바다뿐이었다.

하늘과 바다, 그리고, 아주 작은, 검은색의 바위, 가로세로 30㎝쯤, 문구용 30㎝ 자, 네 개를 이어 놓은 크기의 사각형의 바위, 아니, 바닥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돌로 된, 사각형의 공간에 서 있었다. 그리고, 찰랑이는 파도를 타고, 바닷물이 발바닥에 닿고 있었다.

문은?

뒤를 돌아봤을 때는 문 같은 것은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끝없이 펼쳐진 푸른 바다와, 하늘, 그리고, 흰 구름과 눈부신 태양…….

날씨는 전혀 춥지 않고, 적당히 따뜻한 정도, 분명 초겨울인데, 여긴 열대 지방인가?

대체 여기는 어디냐고?

망망대해 한가운데 작은 돌덩어리 위에, 그렇게 진석은 서 있었다.

그래, 난 꿈을 꾸는 거야. 어제 자기 전에 맥주 한잔을 하고 옥상에 가려다가, 그대로 잠든 거지. 이건 꿈이고.

하하……. 간단한 걸 가지고, 괜히 쫄았네……. 꿈에서 깨기만 하면, 되는 거잖아.

그래, 시간이 다 해결해 주겠지……. 기다려 보자.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꿈에서 깰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거지?

휴대폰을 보니, 오후 10시 30분이었다. 정확히는 기억 안 나지만, 맥주 마시면서 TV를 볼 때가 10시 25분쯤이었는데…….

아직, 5분밖에……. 아, 그렇지. 이건 꿈이지……. 그래, 기다려 보자.

한 시간쯤 지났으려나, 계속 서 있으려니 다리도 아프고, 별수 없이, 자리에 앉았다. 사각형의 돌은 크기가 작아서, 다리는 물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을 보니, 아직도 10시 30분. 그래, 이건 좋은 징조야…….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건,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증거……. 하하……. 하하하……. 그런데 왜 안 깨는 거냐고?

-공간주님, 시간 포인트 부족으로 공간 폐쇄 1시간 전입니다.

사…… 상태창인가? 뭐라는 거냐? 뭐가 뭐라고?

-시간 포인트가 부족합니다. 공간을 사용하려면, 시간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쉽게 말해, 시간이 부족합니다.

“시간은 많은데…….”

-공간을 사용하려면, 시간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1시간 후에는 자동으로 공간이 폐쇄됩니다.

“공간이 폐쇄되면 나는 어떻게 되는데?”

-공간이 자동 폐쇄되면, 시공간 안의 모든 생명체도 같이 종료됩니다.

“종료? 집에 간다는 말인가?”

-쉽게 말해, 생명이 종료된다. 그런 의미입니다. 더 쉽게는 죽는다, 그런 의미입니다.

“뭐…… 뭐? 죽는다고? 내가 죽는다는 말이야?”

“안 돼. 겨우 고생하다가, 로또에 당첨되어 건물주가 되었는데 이대로 죽을 수는 없어.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공간 폐쇄를 막으려면, 시간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시간 포인트가 어디에 있는 건데?”

-시간 포인트는 현실 세계에 있습니다.

“현실? 그럼 여기는 어디라는 거야?”

-이곳은 공간주님의 개인 공간입니다.

“무슨 말이야? 아까부터 공간주라니?”

-말 그대로입니다. 이곳은 공간주님의 개인 공간입니다.

진석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이는 것은 바다와 하늘뿐.

“이 바다와 하늘, 이런 공간이 내 거라는 거야?”

-아닙니다. 공간주님의 공간은 육지를 말합니다.

“육지라니? 설마, 이 바윗덩어리? 이게 내 공간이라는 거냐?”

-그렇습니다. 공간주님의 개인 공간입니다.

“이건, 내가 전에 살던, 고시원보다도 작은데, 이깟 바다 위에 방석만 한 바위를 어디에 쓰라는 거냐?”

-공간은 확장 가능합니다.

“뭐라고? 확장, 크게 할 수 있다는 말이야?”

-그렇습니다.

“역시, 이건, 무슨 꿈이나, 아니면, 게임의 일부인가? 아무튼, 여긴 너무 좁아. 공간을 늘려 줘.”

-공간을 확장하려면 시간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젠장. 그놈의 시간 포인트. 그건, 현실 세계에 있는 거라며? 현실 세계에 가야 포인트인지 뭔지를 딸 거 야냐?”

-공간을 정지하고, 현실로 복귀하시겠습니까?

“어라? 그게 가능해? 돌아갈 수 있는 거야? 내 집으로?”

-시공간을 정지하시면, 돌아가실 수 있습니다. 공간을 정지하고 현실로 복귀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바로 복귀시켜 줘.”

-복귀 시에 시간 포집기를 받으실 수 있습니다.

“시간 포집기는 뭐냐?”

-시간을 포집하는 아이템입니다. 시간 포집기로 시간을 포집하면, 시간 포인트가 올라갑니다. 시간 포인트는 공간주님의 공간을 확장하고, 시간을 연장하는 데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일종의 게임인 모양이었다.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시간 포인트를 쌓으면, 공간, 그러니까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이 바윗덩어리를 더 크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시간도 연장도 가능하고? 그런데 이 게임을 내가 할 필요가 있는 건가? 모르겠다. 일단 포집기인지 뭔지 받고 집에 가고 싶어.

“이거, 설마 유료 게임은 아니겠지?”

-따로 비용은 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흠, 그러면, 시간 포집기인지 그거 주고, 나는 집으로 보내 줘.”

-공간을 정지하겠습니다. 시간 포집기는 지급되었습니다. 뒤쪽을 확인해 주십쇼.

“뒤를?”

돌아보니 뒤쪽에 문이 보였다. 바다 위에 다른 것은 없고, 문, 문짝만 있는 뭔가 초현실주의 화가의 그림 같은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었다. 집에 갈 수만 있다면, 진석은 조심스럽게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문이 열리고, 문 반대편에, 진석의 방이 보였다.

“진짜, 집이다.”

진석은 서둘러, 발을 내디뎠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이었다. 손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있었다.

어라? 뭐지? 꿈을 꾼 건가? 이 책은 또 뭐야?

책에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제목이 크게 쓰여 있었다.

시간과 공간이라? 시간을 확인해 보니, 10시 31분이었다.

멈춰 있던, 시간이 흐른 것이었다. 겨우 1분이지만 말이다.

아무튼, 돌아왔으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꿈은 아니었던 모양이네, 이 책은 처음 보는데, 무슨 내용이지?

일단, 소파로 돌아가 책을 펼쳐 보았다. 과학이나, 물리학책인 모양이었다.

처음엔 나오는 게, 아인슈타인이 어쩌고 하면서, 시간과 공간은 동일한 개념으로, 우주적 관점에서는 시간과 공간이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의 개념으로 존재한다, 이런 이야기였다.

별로 재밌는 건 모르겠는데, 아까 이상한 경험을 해서인지 책을 자꾸 읽게 되었다. 그렇게 꽤 책을 읽었을 때였다.

-시간 포인트 1이 지급되었습니다.

사…… 상태창이잖아? 역시 꿈이 아니었나? 시간 포인트 1이 지급되었다고?

“시간 포인트가 왜 지급된 거냐?”

혹시나 하고 상태창에 물어보았다.

-시간 포집기를 한 시간 사용했기 때문에, 한 시간이 포집되었습니다. 포집된 시간은 포인트로 전환됩니다. 1시간에 1포인트가 지급됩니다.

“시간 포집기? 아까 말한 시간 포집기가 이 책이었어?”

-시간 포집기는 다양한 형태로 위장을 하고 있습니다. 포집 대상에게 시간을 포집하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입니다.

“숨기긴 뭘 숨겨? 나한테는 다 말해 주면서?”

-그건 공간주님이기 때문입니다. 공간주님은 일반적인 시간 포집 대상은 아닙니다.

“아니, 그럼? 시간 포집 대상이라는 건, 누굴 말하는 거야?”

-공간주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입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 범위가 너무 넓은데, 이 책 한 권으로?”

-포집기의 수를 확장하시겠습니까?

“그런 것도 가능해? 몇 개나 늘릴 수 있는 거지?”

-기본적으로 100개까지 가능하고, 추가 확장은 포인트가 필요합니다.

“100개? 뭐, 일단, 그럼, 100개로 확장해 줘.”

진석은 별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잠시 후, 뭔가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고개를 돌린 진석의 눈에 들어온 것은, 진석의 방 안 가득, 쌓인, 책, 책들이었다.

대충, 100권쯤 되는 것 같았다.

진짜, 책이잖아, 책을 한 권, 한 권 살펴보았다.

오래된 책들이 아니라, 새 책들이었다. 그것도 발행일이 비교적 최근으로, 베스트 셀러에 속하는 책들이었다.

“이게 시간 포집기라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 책들을 읽으면, 한 시간에 1씩 포인트가 쌓인다, 그런 말이지?”

-그렇습니다. 포집된 시간은 포인트로 전환되고, 시간 포인트는 공간을 운영하는 데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음, 뭐, 대충 룰은 알겠는데, 그 공간이라는 걸로 뭘 할 수 있는 거지? 커지게 해서 말이야.”

-뭐든지 가능합니다. 공간에서 공간주님은 무제한의 능력을 가진,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쉽게 설명하자면, 공간에서 공간주님은 신적인 존재입니다. 아니, 신 그 자체입니다.

“뭐? 뭐라고? 시…… 신이라고?”

*   *   *

“카페가 아담하네요. 수정 씨라고 했죠? 이름도 예쁘시고, 얼굴도 예쁘시고.”

“저, 손님, 알바생에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시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아, 예,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사장님.”

이수정은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카운터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잠시 외출했다가 돌아오니, 또, 그 녀석이었다.

미대생이라고 하는데, 카페에서 알바를 하는 수정이에게 모델을 해 달라고 추근거리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나를 보자,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카페 밖으로 나가 버렸다.

북카페 갈무리. 꼬마 빌딩, 1층과 지하 공간을 이용해 창업한 진석의 카페였다. 꼬마 빌딩을 사고도, 15억 정도의 돈이 남았기 때문에, 당분간 돈 걱정은 없었다.

그래서, 사업이라기보다는 취미 삼아, 카페를 창업한 것이었다.

그리고, 시간 포집기인지 뭔지도 사용해 볼 겸 말이다.

카페 한쪽을 채우고 있는 서가에는 시간 포집기, 그러니까, 위장한 시간 포집기 100개가, 100권의 책으로 위장해 꽂혀 있었다.

책들은 신간 베스트 셀러들이라, 카페 손님들이, 커피를 마시며, 부담 없이 책을 읽을 수 있었다.

꼬마 빌딩의 위치는 애매한 것은 분명했다.

크게 보면, 유동 인구가 많은 홍대 인근이었지만, 중심대로가 아니라, 골목길을 두 번 거쳐 들어와야 하는 그것도 골목의 끝의 막다른 곳이었다.

보통 상가 위치 중에서 가장 좋다고 하는 모퉁이 건물과는 완전 반대 개념으로, 일부러 찾지 않으면 들어오는 사람이 없는 위치였다.

하지만, 역으로 번잡한 홍대 일대에서 상대적으로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라는 장점도 있었다.

그리고 골목도 깊지 않아서, 일단 위치만 알게 되면 다시 찾기 좋은 곳이었다.

“사장님은 안 추우세요?”

“어?”

“옷을 얇게 입고 다니셔서요.”

“어, 뭐, 나야, 하루 종일 건물 안에 있는데, 추울 일이 있나.”

사실대로 말하자면, 건물 안이 아니라, 공간 안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에게 기묘한 공간이라는 곳이 주어지고, 그곳의 시공간을 지배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것이었다.

그리고 상당한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서서히 그 공간이란 곳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오늘 매출은 어때?”

“뭐, 그럭저럭요. 전표하고, 현금통 확인해 보시겠어요?”

“아, 아니, 이제, 점심시간인데, 저녁에나 확인해 보지, 뭐.”

그래도 시간 포집기는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시간 포집기 좀 확인해 줘.”

구석 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을 하자, 상태창이 떴다.

-오늘 오전의 포집된 시간은, 모두 8시간입니다.

나쁘지 않았다. 오전에는 포집되는 양이 가장 적은 시간대였다. 보통은 오후가 되어야, 포집량이 많아진다.

“급한 대로 이거라도 써야겠군.”

“사장님, 뭐라고요?”

“아냐. 난, 할 일이 있어서. 수고해, 수정 씨.”

카페를 한 번 둘러보고는, 다시 3층의 나만의 공간으로 올라왔다.

이놈의 계단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좁은 계단을 올라, 원룸으로 쓰는 3층으로 올라왔다.

“공간의 문을 열어 줘.”

-시공간의 문을 열겠습니다.

상태창에 명령을 내리자, 눈앞에 문이 나타났다. 문은 어디서든 자유롭게 열 수가 있었다.

문을 열자, 대략 30평 정도 크기의 바위섬이 나타났다. 그리고, 섬의 한가운데는 노란색의 소파가 놓여 있었다.

“소파를 가져다 놓기를 잘했네.”

진석은 공간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몸을 가라앉혔다.

문은 사라지고, 화장한 하늘과 에메랄드빛 바다 한가운데의 섬, 그리고, 노란색의 소파와 진석뿐이었다.

완벽하게 고립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조용하게 시간을 보내기는 참 좋았다.

날씨도 겨울인 현실 세계와 달리, 이 공간은 항상 초여름처럼, 적당히 따스한 날씨였다.

북카페에서 포집한 시간 포인트를 이용해서, 섬은 100제곱미터, 대략, 30평 정도의 크기로 확장 시킬 수가 있었다.

1제곱 미터 크기의 사각형 바닥이 하나의 기준이었다. 1 제곱미터당, 시간 포인트 1이 소모된다. 30평 규모로 확장하는 데는 100시간 포인트가 사용되었다.

그 외에,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데는 1시간에 1시간 포인트가 사용된다.

-공간의 사용하는 데 필요한 포인트는 1시간당 1시간 포인트입니다.

“그럼, 공간이 더 커지면, 공간을 이용하는 포인트도 높아지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 공간의 크기에 상관없이, 시간당 시간 포인트 1이 소모됩니다.

크기에 상관없이 공간을 쓰는데, 1시간 포인트라면, 나쁘지 않다.

일종의 임대료 개념이라고 생각하면, 북카페에서 하루에 50시간 포인트 정도가 들어오니까, 큰 문제는 없다.

카페에 손님이 많지는 않지만, 앉아서 오랫동안 책을 보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보통은 진상 손님이겠지만, 시간 포인트를 포집하는 나에게는 좋은 고객이다.

그나저나, 이, 작은 바위섬도 나쁘지는 않지만, 딱히 할 일은 없잖아?

바닥도 바위투성이라 불편하고 이렇게 소파 하나 가져다 놓고 일광욕을 즐기는 정도…….

“그런데, 생각해 보니 이상하네, 내가 공간주라며 왜 포인트를 내야 하는 건데? 건물주가 임대료 내는 거잖아?”

-그건 임대료라기보다는 투자 비용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건물 살 때, 돈 주고 사셨지 않습니까?

“아, 그렇기는 하네. 흠, 아무튼, 그런데 말이야. 이거 바닥이 바위라 공간을 늘려도 별로 쓸모는 없겠어, 바닥이 흙이라면 상추라도 키우겠지만 말이야.”

-바닥을 변경하시겠습니까?

“어? 바닥 변경이라고?”

-바닥의 종류를 변경하시겠습니까?

“그럼, 바위로 된 바닥을, 흙으로 바꿀 수 있는 거야?”

-물론입니다.

“그럼 당장 바꿔야지. 바꿔 줘, 어서.”

-바닥의 종류를 변경하려면, 시간 포인트 10이 소모됩니다. 변경하시겠습니까?

뭐야? 이것도 또, 포인트가 들어가는 건가? 이놈의 공간은 시간 포인트 없이는 안 돌아가는군.

“좋아, 바닥을 흙으로 변경해 줘.”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변경이 완료되었습니다.

뭔가, 바닥에서 빛이 나오는 느낌이 들더니 바윗덩어리 바닥이, 흙으로 변해 있었다.

“진짜 흙이잖아.”

진석은 손으로 흙을 만져 보았다. 약간 딱딱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인 흙으로 된 땅이었다. 이제 진석의 공간은 30평 크기의 흙으로 된 작은 섬이 돼 있었다.

이건 마치, 작은 텃밭 같은 느낌이네. 정말, 상추 같은 걸 심어 볼까?

아니지. 이 공간에서 나는 신적인 존재라고 했잖아.

그럼, 그냥, 상추가 자라라, 그렇게 말하면, 상추가 생겨나는 거 아닌가?

“상추야, 자라라.”

음, 뭐지? 아무 반응이 없네……. 상추가 아직 없어서 그런가. 순서의 문제인가?

“상추야 생겨나라. 상추 탄생, 상추 나와라.”

-상추가 필요하십니까?

“상추는 어떻게 만드는 거냐?”

-상추 재배를 원하시면, 밭을 만들어서, 상추씨를 심으면 됩니다.

“아니, 그건, 그냥, 농사짓는 거잖아. 난, 여기서 신이라면서, 내가 말하면, 그냥 나오는 거 아니었었어?”

-신의 개념을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신은 공간과 시간, 시공간을 지배하는 존재를 말합니다. 공간주님은 공간과 시간을 통제하실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상추는 씨를 사다가 뿌리셔야 나옵니다.

“뭐야? 신이 상추씨를 사다가 뿌린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   *

“상추씨를 사러 왔는데요.”

“상추요?”

“서울에도 종묘상이 있는 줄은 처음 알았네요.”

종로 5가에는 약국만 있는 줄 알았는데, 종묘상회들도 많이 있었다.

“아, 그렇죠. 요즘은 서울에서도 농사를 많이 지으세요.”

“정말요? 서울에서요?”

“요즘 옥상에 텃밭 만드는 게 유행이잖아요. 상추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적상추도 괜찮고, 샌드위치 만드는 데 쓰기에는 로메인 상추나, 양상추도 괜찮아요. 고기랑 드실 거면, 꽃상추도 좋고.”

“종류별로 다 주세요.”

“집에서 키우실 건가요? 화분에.”

“아, 예, 옥상이나 그런 데요. 하하…….”

*   *   *

“사장님, 어디 갔다 오세요?”

“어, 살 물건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상추씨와, 삽, 호미 같은 농기구들을 사 오는 길이었다.

“저 수업 들어가야 되는데?”

“5분만 기다려, 교대해 줄게.”

공간의 장점은, 공간 안에 시간은 외부의 세계와는 별개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공간 안에서 하루나 이틀을 보내도, 다시 공간 밖으로 나왔을 때는, 들어간 시간과 동일하다는 것이다.

즉, 공간은, 현실과는 분리된 별도의 시공간인 것이다.

쉽게 말해, 농사지을 시간은 충분하다는 말이다.

30평 정도의 공간을 텃밭으로 바꿀 생각이었다. 땅을 파고, 밭고랑을 만들고, 상추씨를 뿌리기 시작했다.

“잠깐, 물을 줘야 하는 거 아닌가?”

밭고랑까지 만드는 데 5시간 정도가 걸렸다. 물론, 중간중간, 쉬면서 해서 말이다.

“뭐가 이렇게 힘든 거야?”

신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힘든 거였나? 아무튼, 소파에 누워 좀 자고 나니, 겨우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나마 간식거리와 음료수를 준비해 온 것이 다행이었다. 빵하고, 커피를 먹고 나니, 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상추씨를 뿌리고, 물을 주라고 한 것 같은데, 물을 어디서 구하냐?”

주위에 널린 것이 물이기는 했는데, 저건, 바닷물이잖아. 물은, 집에서 길어와야 하나?

“물도, 외부에서 가져와야 하는 거냐?”

-물이라면 기본 제공입니다. 물이 필요하십니까?

“기본 제공이라고? 물이 어디 있는데?”

-물이라면, 땅속에 얼마든지 있습니다.

“땅을 파야 하는 건가?”

-물이 필요하시면, 주문을 외우시면 됩니다.

“주문?”

-샘이여 솟아라, 이렇게 말입니다.

“샘이여 솟아라…….”

땅이 꿈틀꿈틀하더니, 땅속에서 물이 솟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은 연못이 생겨났다.

진석이 다가가서 살펴보니, 물도 깨끗하고 짠맛도 없는 물이었다.

진석은 물뿌리개에 물을 담아, 상추씨를 뿌린 밭고랑에 물을 충분히 뿌려주기 시작했다.

“의외네. 상추씨는 종묘상에서 사 와야 하는데, 물은 왜 기본인 거냐?”

-물은 수소와 산소의 혼합물입니다. 수소와 산소 모두 우주 탄생부터 기본으로 있던 물질이죠. 다른 신들도 기본으로 제공하는 원소들입니다. 하지만, 우주가 탄생할 때부터 상추씨가 있었던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럼, 내가 사는 세계의 신은 상추를 어디서 사 온 거냐?”

-신과 창조의 과정에 대해서는 피조물들에게는 절대적 비밀입니다. 그게 규정입니다.

“야, 상추 어디서 사 왔냐는 게 그렇게 큰 비밀이야?”

“규칙은 규칙입니다.”

그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신에 관한 궁금증은 물리학적으로는 사건의 지평을 넘어서는 일이었다. 한마디로 불가능한 범위의 호기심이라는 것이다.

“그래, 그런 거 알아서 뭐 하겠어. 상추나 키워서 쌈 싸 먹으면 되지. 그나저나, 이거 먹으려면 6주는 지나야 한다고 하던데, 여기서 6주를 기다릴 수도 없고, 상추를 빨리 자라게 할 수는 없는 거냐?”

-기다리기 지루하시면, 시간의 진행을 고속으로 해 보시죠.

“고속, 시간을 고속으로 진행시킨다고? 그게 가능해?”

-공간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지배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공간주님이 소유하신 공간에서는 시간의 속도는 공간주님의 뜻대로 결정하실 수 있습니다. 또, 공간을 분할하여 시간을 차등으로 진행시킬 수도 있습니다.

“오……. 그러니까, 시간의 속도는 내 마음이라는 거지? 부분적으로 시간의 속도를 조정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시간의 속도를 조정하시겠습니까? 시간의 속도 조정에는 추가 포인트 10이 필요합니다.

간만에 듣는 좋은 정보였다.

상추씨를 뿌렸는데, 시간을 빨리 진행시키면, 당장에라도, 상추를 먹을 수 있는 거잖아?

“좋아. 6주를 고속으로 진행시키면, 얼마나 걸리는 거냐? 내가 체감하는 시간으로 말이야.”

-1시간도 가능하고, 1분도 가능하고, 1초도 가능합니다. 상추가 빨리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려면, 10분 정도로 진행하는 게 적당하다고 추천합니다.

“좋아, 그러면 10분 동안 1,000시간을 고속으로 진행해 줘.”

-공간주님의 시간과는 별도로, 이 공간의 시간 1,000시간을 고속으로 진행하겠습니다. 공간주님이 느끼는 체감 시간은 10분으로 조정했습니다. 그럼, 시작합니다.

뭔가 주위에 느낌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추씨를 뿌린 밭고랑에 뭔가 변화가 생기고 있었다.

진석의 체감으로 1분 정도가 지나자, 발아가 시작되었다. 3분 정도가 되었을 때는, 떡잎이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떡잎이 성장을 하는가 싶더니, 6분 정도가 되자, 본잎 주위로 4~5장 정도의 잎사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라난 잎들이 분화하며, 계속 성장하기 시작했다.

-1,000시간이 모두 진행되었습니다.

10분 정도의 시간이 지난 느낌인데, 정말, 상추들에게는 천 시간이 진행된 모양이었다.

어느새, 상추들은 완전히 자라, 풍성하게 싱싱한 잎들을 펼쳐 놓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뜯어서 먹을 정도로 커진 모습이었다.

“이거 대박인데. 정말, 신이 된 기분이잖아. 아니, 여기서는 내가 신이라고 했지.”

진석은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상춧잎을 뜯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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