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놓쳤지?”
“…….”
“그러니까 내가 뭐랬냐. 그 여자, 보통이 아니라니까? 미행을 귀신처럼 알아채더라고. 이렇게 해서 우리가 원하는 걸 얻을 수나 있겠어? 그냥 하던 대로 납치해서 증거를 요구하는 건 어때? 제시가 안톤의 딸이라는 증거 말이야.”
이반은 마틸다가 안톤과 불륜을 저지를 때부터 그들의 사이를 알고 있었다. 제시가 안톤의 딸이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지만 짐작은 충분히 가능했다. 그렇게 붙어먹었는데 아이가 생길 수밖에.
마틸다와 안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갓 태어난 제시는 페트로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페트로의 자식이라면 누구나 거쳐야 할 DNA 검사를 제시가 건너뛸 수 있었던 이유였다.
그러나 제시가 자라면서 문제가 생겼다. 아이가 점점 안톤을 닮아 가기 시작한 것이다. 마틸다는 페트로에게 불륜 사실을 들킬까 봐 내내 불안해했다.
나중에는 신경 안정제 없이는 잠들 수 없을 정도로 불안 증세가 악화되었다. 결국 그녀는 CIA에 페트로의 정보를 넘기는 대신 철저한 신변 보호를 요구했다.
그 과정에서 CIA가 FBI에게 협력을 요청했고, FBI의 WP팀이 마틸다와 제시를 맡았다. 여기에 투입되었던 요원이 에일린 지윤 최, 현재 이름으로는 지윤 박이었다.
안톤과 거래를 해서 마틸다를 살해한 요원이 그녀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입수한 FBI 내사 보고서만 봐도 그녀밖에 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가 범인이라면 그리고 머리가 조금만 있다면, 제시의 DNA 검사 결과를 반드시 가지고 있을 것이다. 살인에 가담한 만큼, 나중에 진실이 알려졌을 때 자신을 보호할 방패가 필요할 테니까.
이반이 벌써 2주째 지윤을 미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제시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어디에 숨겼는지 알아내기 위해서.
처음부터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제시를 애써 찾아 보호할 생각은 없었다. 제시의 유전자 검사 기록만 입수한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었으니. 이반은 적성에 맞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쉬운 길을 돌아갈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도 않았다.
‘귀찮아.’
이반은 혀끝으로 송곳니를 톡톡 두드렸다. 솔직히 후계 따위엔 관심도 없었다. 시시때때로 목숨을 노리는 안톤을 엿 먹이는 건 제법 흥미 있었으나 최근엔 그마저도 식어 가는 중이었다.
안드레이의 성화에 못 이겨 지윤을 찾는 척은 했지만, 원래는 조용히 잠적할 계획이었다. 재수 없게 안톤의 손에 죽는다 해도 괜찮았다. 삶에 흥미를 끌 만한 건 조금도 남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지윤이 사는 곳을 찾았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하도 미행을 잘 따돌린다기에 흥미가 생겨서 한번 미행했을 뿐이었는데….
이반은 조금 전 커피 전문점에서 겪었던 난처한 경험을 떠올리며, 푹 눌러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버렸다.
“놓친 게 아니야.”
“그럼?”
“좆이 당겨서 못 따라갔어.”
“…뭐가, 어떻게 됐다고?”
“좆 말이야. 자지가 서서 미행할 수가 없었다고.”
“…….”
안드레이가 입을 바보처럼 벌렸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이런 종류의 얘기는 언급해 본 적도 없을뿐더러, 이반이 여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몰라.”
“그 여자가 뭘 어쨌는데?”
“커피를 주문했어.”
“…응?”
“커피를 주문했다고. 그걸 보고 있는데 갑자기 좆이 섰어.”
“…그거, 좀 이상한 거 아니냐?”
그러게.
이반은 초조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지윤을 미행하기 시작한 건 2주 정도 되었지만, 이반이 직접 움직인 건 오늘이 4번째였다. 물론, 사진으로 처음 봤을 때부터 시선을 끄는 여자라고는 생각했다.
그녀에게서는 동양인 특유의 앳되고 부드러운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보고 새파랗게 벼려진 검을 연상한 건 처음이었다.
아이처럼 까맣고 깨끗한 검은 눈동자가 마치 고요한 바닷속에 침잠한 낡은 닻과 닮아 있었다. 너무나 무거워서 결코 들어 올릴 수 없는. 그 눈을 보는 순간, 고장 난 전선을 실수로 건드렸을 때처럼 짜릿한 전류가 느껴졌다.
참 묘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래서일까. 한 번으로 끝낼 미행이 두 번, 세 번으로 이어졌다. 그러다 오늘, 그 일이 생겼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특별한 말도 아니었다. 웃으며 말한 것도 아니고 찬물이 뚝뚝 떨어질 듯 무뚝뚝한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페니스가 반응했다. 두툼하게 부푼 바짓가랑이를 보며 얼마나 어처구니없었는지 모른다. 사람을 상대로 한 번도 움직인 적 없는 살덩이가 또렷하게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는데, 제 눈이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만둘까.’
위기감이 엄습했다. 더 이상 그녀를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몸이든, 마음이든, 타인에게 반응하는 건 좋지 않은 징조다.
이반의 어머니는 유명한 모델이자 영화배우였다. 그녀가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이유는 모두 페트로라는 타인에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하여튼 보는 눈도 없지. 하필이면 개새끼에게 마음을 뺏기다니. 결혼 생활 내내 그녀는 고통스러워했다. 행복해 보인 적이 단 하루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페트로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빌어먹을 놈의 사랑 때문에 그녀는 바싹 마른 꽃잎처럼 바스러지다가 끝내 스스로를 포기했다.
“이반, 내 아들. 엄마는 널 정말 사랑한단다.”
저절로 피 웅덩이가 떠올랐다. 그 검붉고 끈적끈적한 액체가 아직도 몸에 달라붙어 있는 것 같아 살갗이 답답했다. 정체 모를 전염병에라도 걸린 기분이다. 늪인지도 모르고 발을 디딘 것처럼 꺼림칙했다.
이반은 눌린 머리를 흩으며 더러운 기분을 털어 냈다. 이반의 눈치만 흘끔흘끔 보던 안드레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일리야.”
“왜.”
“혹시 말이야. 첫눈에 반하거나, 뭐 그런 건 아니지?”
“너 지금 미행만 4번째야. 한 번쯤은 호기심에 해 볼 수도 있다지만, 이제까지 그런 적은 한 번도 없었잖아?”
“미행 몇 번 했다고 첫눈에 반한 건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으음.”
안드레이가 뜻 모를 탄식을 흘리며 입술을 삐죽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눈치 보느라 입을 다무는 기색이다. 이반이 눈썹을 못마땅하게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이제 와서 말하는 건데… 사실, 미행 전에도 너 좀 이상하긴 했어.”
“뭐가.”
“틈만 나면 그 여자 사진을 들여다봤잖아. 나중에는 미행까지 직접 하겠다고 나서질 않나….”
‘꼭 스토커같이.’ 안드레이가 작게 말을 붙이며 이반을 흘낏댔다. 이반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 안드레이를 한심스럽게 쳐다보다 일어섰다.
“어디 가게?”
“욕실.”
“말하다 말고?”
“네 잡소리에 낭비할 시간 없어.”
“하여튼 말하는 것하고는…. 그럼 내일부터는 애들 보내면 되는 거지?”
이반이 욕실 문을 열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잠깐 침묵하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니.”
“그럼? 네가 계속하겠다는 거야?”
“응.”
“어….”
‘너도 지금 네가 이상한 거 알지?’라고 쓰여 있는 안드레이의 표정에 돌연 짜증이 솟구쳤다. 정말, 그 자신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으니까. 이반은 욕실 문이 부서지도록 힘껏 닫았다.
***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
소음 속에서도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5번째 미행 중인 이반은 카페 구석에 앉아 있다가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불룩하게 튀어나온 바짓가랑이를 보며 입술을 벌렸다.
“씹.”
이게 진짜 미쳤나. 언제는 사람은커녕 짐승을 봐도 꿈쩍하지 않더니, 지금은 뻐근할 정도로 일어서 있었다.
곤란한 건 둘째 치고, 거추장스러웠다. 새끼를 낳는 것 외에는 하등의 쓸모도 없는 신체 일부분이 아닌가. 그런데 가끔씩 페니스에게 조종당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컷이라면 다 그렇겠지만 이반은 특히 심했다. 변태 색정광인 부친의 피를 이어받은 탓에 유독 성욕이 강했다. 중요한 일을 하다가도 한번 욕구가 생기면 페니스를 문지르지 않고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나마 사람을 상대로 발기하는 건 아니라 이제까지는 참았는데 요즘 같아서는 잘라 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길 정도로 제멋대로였다.
이반은 아랫도리를 노려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사이에 주문한 커피가 나왔는지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쯧.”
5번째 실패. 이반은 화를 삭이다 슬금슬금 접근하는 여자들을 피해 카페를 나왔다. 그대로 돌아가려다 그녀가 사는 집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미행은 실패했지만, 집 근처에서 기다리면 그녀를 또 볼 수 있을 것이다.
돌연 기분이 나아졌다. 어제도 이럴 걸 그랬다. 휘파람을 불면서 걸어가던 이반이 갑자기 발을 멈췄다.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기분이 나빴던 이유가 미행이 실패해서가 아니라, 그녀를 보지 못해서인 것 같아서.
뒷골목, 퀴퀴한 냄새를 뿌리는 쓰레기통 앞에서 곰곰이 고민하는 그에게 두 명의 남자가 다가왔다.
주렁주렁 걸고 있는 싸구려 액세서리, 엉덩이 중간쯤 내려간 바지, 잔뜩 충혈된 눈동자, 몸에서 풍기는 락스의 악취, 코 밑에 번진 붉은 수포. 놈들은 마약 살 돈도 없어 시너를 들이켜는 정키였다. 그들이 이반을 양쪽으로 둘러싼 채 껄렁거렸다.
“어이, 우리에게 적선 좀 해 주는 게 어때? 콕(코카인)을 사려는데 돈이 아주 조금 모자라지 뭐야.”
“옷도 비싼 거고, 어쭈? 이 시계 명품 아니야? 이 새끼 부자네, 부자야. 불우 이웃 두 명 정도는 거뜬히 도와줄 수 있겠어.”
이반은 신선한 기분에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도 그럴 게 이제까지 그에게 시비를 거는 존재는 안톤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직접적으로 부딪치는 게 아니라 설계도 따위를 훔치는, 치졸한 방법만 사용했다.
부친인 페트로조차 최대한 그를 피했다. 레드 독, 그의 별명처럼 미친개에게 잘못 접근했다가 어딜 물릴지 몰라 두려운 탓이다. 그러니 이런 양아치들이 신기할 수밖에.
그녀가 자주 이용하는 길에 이런 새끼들이 있어선 곤란하지. 이반이 눈꼬리를 샐쭉하게 휘었다. 오오, 떡 진 머리를 대충 묶은 남자가 누런 이를 드러냈다.
“저 새끼, 존나 꼴리게 생기지 않았냐?”
“아, 이 새끼 또 시작이네. 너나 해. 난 관심 없어.”
“그럼 넌 구경이나 하든지.”
그때, 조금 전까지 놓쳤다고 생각했던 그녀가 보였다.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 산책이라도 하듯 이반 쪽으로 걸어왔다. 어떤 상황인지 빤히 보이는데도 가면을 쓴 듯 건조한 표정이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평범한 걸음으로 느긋하게 다가온 그녀가 남자들 앞에 조용히 섰다.
“뭐야? 이년은. 뒈지기 전에 꺼져라. 아니면 다리 좀 벌려 주든가.”
“노란 년들 구멍이 그렇게 쫀득하다고 소문이 자자해서 어떤 맛일지 궁금했었는데, 드디어 따먹어 보겠네.”
“넌 저 새끼 따먹겠다며!”
“이년 먼저 먹고.”
남자들의 음담패설을 들으면서도 그녀는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말없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일 뿐이었다.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시선을 남자들에게 고정한 채로.
이질적일 정도로 새까만 눈동자에 이유도 없이 소름이 돋았다. 심장이 두 배로 커진 것처럼 가슴이 묵직해졌다. 아랫배 어딘가가 간질거려 절로 복근이 죄어졌다. 이반은 솜털이 일제히 일어선 팔을 쓸어내렸다.
남자가 특유의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그녀에게 접근했다. 벌써부터 흥분했는지 바지 앞섶이 두툼했다.
이반은 그를 보며 허리 뒤춤에 꽂아 둔 매그넘을 언제 꺼낼까 고민했다. 어차피 처리할 생각이긴 했지만, 총까지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상대로 흥분하는 놈들을 보니, 왜인지 페니스에 총알을 박아 주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했다.
경찰이 출동할 때까지 몇 발이나 쏠 수 있을까. 잠시 가늠하는 사이, 남자가 그녀에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이반은 반사적으로 허리 뒤춤으로 손을 올렸다가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몸을 옆으로 살짝 트는 행동만으로 남자를 피했기 때문이다.
다음 순간, 중심을 잃고 크게 휘청거리던 남자가 방어하기도 전에 발목을 발로 차 넘어뜨렸다. 볼품없이 땅에 처박힌 남자가 욕설을 퍼부었다.
“이 좆같은 년이! 우리가 누군 줄….”
남자의 시시한 고함 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리고 바닥을 짚고 있던 남자의 손을 뒤꿈치로 내리찍었다. 빠각!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남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크아아악!”
남자는 흉측하게 구겨진 손을 감싸지도 못하고 더러운 길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그녀는 그 몰골을 단조로이 내려다보기만 했다.
서늘한 시선이 곧, 또 다른 남자를 향했다. 나이프를 빼어 든 남자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녀가 다가가자, 좁혀진 거리만큼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오, 오지 마! 씨발년아! 오지 말라고!”
남자가 목적도 없이 나이프를 성급하게 휘둘렀다. 나이프의 궤적을 가만히 읽던 그녀가 발을 휙 들어 남자의 손목을 올려 찼다.
“아악!”
남자가 나이프를 놓치며 신음했다. 그러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엎어져 있던 놈을 끌고 허둥지둥 꽁무니를 내뺐다. 도망가면서 흔한 욕설조차 내뱉지 않는 걸 보니, 어지간히 겁을 먹은 모양이다.
그녀가 나이프를 툭 차서 쓰레기통 밑으로 밀어 넣었다. 그런 뒤에야 이반을 빤히 쳐다보았다.
미친! 그녀의 시선을 받자마자 페니스가 다시 꿈틀거렸다. 헐렁한 후드 티셔츠를 입고 나왔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변태로 몰릴 뻔했다. 이반은 당황한 심정을 감추며 안심했다는 듯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하아, 큰일 날 뻔했네요.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 시계 차고 뒷골목으로 다니지 마세요. 배에 나이프 박힌 채 알몸으로 죽고 싶지 않으면.”
“얼마 전에 이사 와서 동네에 아직 적응을 못 했어요. 조언 고맙습니다.”
“…이사 왔어요?”
“예, 아, 명함이라도 드릴….”
이반은 있지도 않은 명함을 찾는 척, 주머니를 더듬거리다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내려뜨렸다.
“이런, 조깅하러 나온 거라 명함이 없네요.”
“…….”
“사거리에 있는 운동장이 괜찮더라고요. 요즘 거기에서 조깅 중입니다. 이사 오느라 한참 운동을 쉬었으니 열심히 해야죠.”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탐색의 빛을 띤 시선이 이반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곳을 따라 솜털이 곤두섰다.
“이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호수 공원 근처에서 조깅을 해요. 정키 소굴이나 다름없는 운동장이 아니라.”
“호수를 싫어해서요.”
“…호수를, 싫어하세요?”
“예.”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녀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이반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기다렸다. 그녀가 연락처를 물어 오기를.
친분 관계를 만들어 놓으면 미행할 필요가 없었다. 특히, 그녀처럼 요원 출신일 경우엔 어설픈 미행보다 훨씬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게다가 이반은 자신의 외모가 꽤 괜찮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백이면 백, 친절하게 웃기만 해 줘도 여자들은 연락처를 물어보곤 했으니.
이반은 연락처를 교환하자며 핸드폰을 내미는 그녀를 상상하며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아, 그랬구나.”
작게 중얼거리던 그녀가 고개를 까닥 숙여 인사했다. 그러더니 붙잡을 틈도 주지 않고 돌아서 가 버렸다. 빨리 걷는 것 같지도 않은데 죽죽 멀어지다가 어느새 보이지 않았다. 이반은 그녀가 사라진 빌딩 모퉁이를 모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주머니에 꽂고 있던 손조차 빼지 않았다.
***
“카페를 차려야겠어.”
“…뭘 차려?”
“카페. 커피 전문점, 몰라?”
“알지, 아는데… 레드 마피아가 카페라니, 풋.”
한참 폭소를 터트리던 안드레이가 선글라스를 벗고 눈에 고인 눈물을 닦았다.
“아, 웃겨 죽는 줄 알았네. 한참 지루했는데 덕분에 잘 웃었다.”
이반의 회색 눈동자에 냉기가 돌았다. 느슨하게 풀어져 있던 안드레이의 입가가 단숨에 굳었다.
“…농담 아니었어?”
“농담 같았나 봐?”
“아, 아니, 그게, 넌 커피도 안 마시잖아. 그런데 뜬금없이 커피 전문점을 차리겠다니까 그러지.”
“파는 게 더 이상한데. 일리야, 네가 가진 자산이 얼만지 알아? 무슨 변덕인지는 모르겠는데, 정 하고 싶으면 차라리 커피 체인점을 인수해.”
“상관없어. 어떤 방식이든. 그녀가 사는 건물 1층에 차리기만 하면 되니까.”
“그녀, 누구? 설마 그 여자를 말하는 거야? 지윤 박?”
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긍정이나 다름없는 태도에 안드레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잊었어? 우리는 그 여자에게 받을 게 있어서 접근한 거야!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뭔데? 그 여자한테만 몸이 반응해서 그래?”
“좆 따위 걸리적거리면 잘라 버리면 그만이야.”
“그럼 더 이상하지 않아? 반한 것도 아니라며!”
“…사랑은 아니야.”
“아, 그럼 대체 뭐냐고!”
이반은 대답 없이 명치에 손을 올렸다. 아주 간결하고 효율적인 움직임만으로 정키들을 제압하는 건 그녀의 경력으로 봤을 때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속이 욱신거렸을까. 성욕과는 명백하게 다른 방향으로 몸이 반응했다. 마치, 가슴을 누군가 억세게 짓누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동시에, 느닷없이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냥, 그녀가 다칠 바에야 내가 다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그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뭔데? 안드레이는 목 끝까지 올라온 질문을 한숨으로 대신했다. 평생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편안한 미소가 이반의 입가에 번져 있었기 때문이다.
***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그녀가 말을 멈추고 조금 커진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이반이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이렇게 만나네요. 반가워요.”
“…예.”
“저번에 구해 주셨으니 커피는 그냥 드릴게요.”
이반은 커피 머신을 조작했다. 일주일 동안 수도 없이 연습한 보람이 있었다. 샷을 내려서 뜨거운 물이 담긴 일회용 잔에 붓는 일련의 과정이, 제가 생각해도 제법 능숙했다. 그가 아메리카노를 건네며 지나가듯 물었다.
“이 근처에 사세요?”
“이런 우연이 다 있네요. 어쩐지, 가게 오픈하기 전에 여기저기 돌아다녔었는데 여기가 유독 눈에 띄더라고요.”
“아, 그래서 카페에서 자주 보였던 거구나.”
그녀가 뭔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반이 눈을 크게 떴다.
“날 봤어요?”
“3주 전부터인가? 매일 아침 9시쯤, 운동장 앞 카페에서 항상 같은 자리에 앉아 있었잖아요.”
“…내가 그랬어요?”
“네. 솔직히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이 동네에서 사는 사람치고 행색이 눈에 띄기도 하고, 너무 자주 마주쳤으니까요. 그런데 카페를 차리기 위해서 시장 조사 하셨던 건가 봐요.”
내내 이반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얘기였다. 그녀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예민했다. 이반이 그녀를 보며 발기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카페를 나가는 그녀를 계속 미행했다면, 혹은 선수 쳐서 최근에 이사 왔다고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며칠 전에 만났던 양아치들 꼴이 되었을 것이 분명했다.
‘발기 때문에 미행을 놓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이반은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내가 당신 취향이었나 봐요. 기억하고 있을 정도면.”
“그게 아니라 일종의 버릇 같은 거예요. 어떤 장소 안에 누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인하는…. 음, 설명하니까 이상하게 들리네요. 아무튼 그런 게 있어요.”
그건 버릇이 아니라 학습된 습관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반은 속마음을 감추며 아쉬운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실망이네요.”
“네?”
“내가 당신 취향인 줄 알고 두근거렸거든요. 당신이 내 취향인 것처럼.”
그녀가 당황한 심정을 입술을 무는 것으로 대신했다. 마르고 거친 입술을 하얀 치아가 지그시 짓이겼다. 입술을 무는 버릇이 있었는지 금세 핏기가 사르르 올라왔다.
갈증 나.
급격하게 목이 말랐다. 저 입술을 빨면 갈증이 사라지지 않을까. 상상만으로 입 안에 침이 잔뜩 고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보지 않았던 야릇한 상상은 엄청난 흥분을 몰고 왔다. 이반은 곤두서서 브리프를 적시기 시작하는 페니스를 카운터에 누르며 태연히 눈꼬리를 휘었다.
“미리 말해 두겠는데 이렇게 완벽히 취향인 사람은 처음 봤어요. 내가 워낙 강한 사람을 좋아해서.”
어머니에게 부채감은 있었다. 같이 죽어 주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바랐던 대로 최대한 일반인처럼 생활했다. 평범하게 학교를 다니고 평범하게 과제를 하고 평범하게 친구를 만났다. 물론 겉모습뿐이었지만 이반으로서는 최선이었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좋아했던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름 끼치도록 싫었다. 자신뿐만 아니라 자식까지 죽이는 그 나약함에 진절머리가 났다.
하지만 그녀는 달랐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 암석처럼 단단한 눈은 결코 깨지지 않으리라.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경우를 처음 겪는 걸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기색이었다.
차갑기만 하던 까만 눈이 혼란스럽게 떨렸다. 그걸 발견한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역시 미친놈이 맞는지, 단단해서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렇게 흔들리는 모습도 마음에 들었다. 당장 저 눈동자를 입에 넣고 빨아 먹고 싶을 만큼. 이반은 입술을 핥아 뜨거운 속을 달랬다.
“어때요?”
“…뭐, 뭐가요.”
“나 말이에요. 나, 남자로서 만나 줄 만하지 않아요?”
“별로 그런 생각 안 해 봐서요.”
“이제부터 해 보면 되겠네. 기다릴 테니까 생각해 봐요.”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에요. 음, 관심도 없고. 이제 가 볼게요. 아, 커피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침착하게 거절하던 그녀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돌아섰다. 카페를 나가는 뒷모습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했다. 그러나 이반은 그녀가 엄청나게 동요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관심 없다면서 귀는 왜 빨개졌어요?”
윤.
그래, 윤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어. 윤, 윤. 이반은 몇 번이나 발음을 되풀이하다가 카운터에 턱을 괴며 웃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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