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01 (11/12)

이반의 회복 속도는 경이적이었다. 수술한 다음 날부터 멀쩡히 돌아다녔을 뿐만 아니라 요즘엔 지윤을 안아 올려도 괜찮을 정도로 회복했다. 며칠만 더 있으면 퇴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사이 이반에게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이반이 퇴원하는 날 출국이 예정되어 있으니 발 빠르게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양복을 입은 남자들이 병실을 들락거렸다.

물론, 레드 마피아와의 연루설이 날까 두려워 대리인을 보낸 건지, 하나같이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두고 간 명함을 보면, 대부분 유명 무기 회사의 직원이거나 정치인의 보좌관이었다.

이반과는 다르게 지윤은 한가로운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얼마 후면 러시아로 터전을 옮긴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준비할 일이 없었다.

짐을 싸는 것부터 여러 서류 작업까지, 전반적인 사항을 전부 이반이 처리했다. 그녀는 시민권을 포기하고, 러시아로 국적을 바꾸는 데 필요한 서류에 서명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윤은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사서 병원으로 들어섰다. 날이 좋아서 그런지 병실 밖에 나와 있는 환자와 보호자들이 많았다. 조곤조곤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그들을 지나쳐 병원 건물 후원 쪽으로 향했다.

마치 산책을 나온 것처럼 여유롭게 걷는 그녀의 뒤를 두 남자가 은밀하게 따라갔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미행을 하다가 그녀를 따라 건물 모퉁이를 돌았다.

건물 후원은 그림자가 지고 바람이 많이 불어서 그런지 정문 쪽과는 다르게 인적이 드물었다. 후원에 들어선 남자들은 감쪽같이 사라진 지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여기로 향하는 걸 보고 따라왔는데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젠장! 놓쳤어!”

“어디로 간 거지?”

“나 찾아요?”

느닷없이 뒤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남자들이 재빨리 몸을 돌렸다. 얇은 반팔 티와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평범한 대학생처럼 보이지만, 그녀는 일리야 페트로비치 라브노프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침묵하는 그들에게 지윤이 여상히 물었다.

“FBI는 아닌 것 같고. CIA예요?”

“…….”

“미행을 하려면 옷부터 바꿔 입어요. 너무 눈에 띄네요.”

특색 없는 양복과 선글라스를 착용한 그들은 언뜻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였다. 이반을 찾아오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굳은 표정과 절제된 행동에서 낯익은 냄새가 났다. 비밀스러운 냄새. 지윤은 바람에 나부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왜 따라다녀요? 난 이제 시민권도 포기한 외국인인데.”

“제안드릴 게 있습니다.”

“해 봐요.”

“조용한 곳으로 장소를 옮기시죠.”

“싫어요. 지금도 겨우 시간 낸 거예요. 여기서 말하든가, 아니면 돌아가세요.”

며칠째 따라다니기만 하는 이 남자들과 결론을 내기 위해 커피를 핑계로 잠깐 나오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이반은 시간을 재고 있을 것이다. 오래 걸린다 싶으면 바로 찾으러 나오기 위해.

통각에 둔한 이반은 자기가 아픈 줄도 모르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리 회복이 빠르다고 해도 수술한 지 겨우 열흘째다. 적어도 그가 퇴원하기 전까지 지윤은 이반이 움직일 만한 일은 최대한 줄이고 싶었다.

“라브노프 씨와 함께 러시아로 가신다고요.”

“그런데요?”

“언제든지 돌아오신다면 시민권을 포함한 모든 권리를 원상태로 복구해 드리겠습니다. 원하신다면 정부 요원으로 근무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그 외의 다른 직업도 가능하고요.”

“나한테 그런 걸 왜 해 주는데요?”

“한때 나라를 위해 헌신했던 요원이셨으니 이 정도 보상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와서?”

지윤은 삐딱하게 웃었다.

“돌아가세요. 상부엔 내가 조금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고 보고하시고요.”

“…솔직히 나쁜 제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남녀 사이만큼 불안정한 관계도 없지요. 라브노프 씨를 따라 낯선 나라까지 갔는데 사이가 틀어진다면, 그 이후의 일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돌아올 곳을 하나쯤은 마련해 놓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냥 해 주겠다는 거 아니잖아요, 당신들.”

지윤의 싸늘한 음성에 남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이반의 정보를 훔쳐서 넘기라는 거잖아. 아니에요?”

“…….”

“이제까지 도움 따위 받아 본 적도 없고, 필요도 없어요. 특히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하는 자들과는 절대 손 안 잡아요.”

“일리야 씨는 사람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기는 레드 마피압니다.”

“적어도 당신들처럼 대의를 위해서라는 개소리는 하지 않죠.”

“…….”

“그러니까 앞으로 찾아오지도 말고 미행도 하지 말아요. 또 한 번 눈에 띄면, 내 변호사와 만나야 할 거예요. FBI가 불법 취조로 고소당한 건 알죠? 같은 꼴 당하기 전에 그만두세요.”

남자들이 시선을 교환했다. 생각보다 완강하다 싶은가 보다. 그들의 어두운 선글라스 안으로 낭패의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다시 생각해 보시죠.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후회도 내가 할 테니 상관하지 말아요.”

“일리야는 무서운 사람입니다. 모든 일의 기준을 흥미로 판단하지요. 흥미가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몰입하지만 흥미가 떨어지면 가차 없이 버립니다.”

지윤이 돌아서려다 말고 멈춰 섰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마저도 이용하는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정말, 그런 자가 타인을 존중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

“우리는 일리야를 저격한 자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정체를 듣는 순간, 우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될 겁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언제든지 연락 주십시오.”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G&MI 회계 사무소’. 이런 명함을 사용하는 정부 기관은 CIA뿐이다. 지윤이 받지 않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하자, 남자가 그녀의 손을 직접 잡아서 명함을 쥐여 주었다. 그 순간,

“여기서 뭐 해요?”

이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건물 비상계단을 통해 이반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지윤은 저도 모르게 바지 주머니 속에 명함을 쑤셔 넣었다.

“방금 이 남자와 손잡고 있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봤어요?”

“내가 뭘 떨어뜨렸는데 이분이 주워 주셨어.”

“아, 그랬구나. 난 또. 하마터면 착하신 분 손목을 자를 뻔했네.”

노래하듯 부드러운 음성에 홀려 뒤늦게야 말뜻이 귀에 들어왔다. 지윤이 눈매를 좁혔다.

“이반.”

“농담이에요. 설마 내가 당신 보는 앞에서 그러겠어요?”

그럼 안 보는 곳에서는 자르겠다는 말인가. 지윤은 눈살을 가볍게 찌푸리다가 이반을 끌어당겼다.

“왜 내려왔어. 움직이지 말라니까.”

“정문으로 들어온 사람이 한참이나 지나도 안 오기에.”

“보고 있었어?”

“당연하죠.”

너무나 태연한 대답에 할 말이 없었다. 지윤은 잠시 가만히 있다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

“얼른 올라가자.”

“그래요.”

이반은 얌전히 대답하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전까지 주변을 녹일 것처럼 달콤하게 웃던 사람이라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냉랭한 표정이었다. 남자들은 그의 시선에 밀려 황급히 물러섰다.

남자들이 사라진 방향에서 환자복을 입은 장신의 남자가 나타났다. 이반이 고개를 까딱거리자 그가 조용히 돌아섰다.

“이반, 뭐 해?”

“가요.”

비상구에서 지윤이 이반을 불렀다. 이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걸음을 빨리해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깍지를 끼고 손등의 살갗을 살짝 깨물자 간지러운지 지윤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만하라는 듯 이반의 손을 꼭 잡았다 힘을 푼다.

아, 좋아.

이반이 소리 없이 웃었다.

둘은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올라갔다. 이반은 올라가는 내내 지윤의 손을 가지고 놀았다. 손끝을 쪽쪽 빨다가 질겅질겅 씹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지윤이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놓았다. 그게 너무 좋아서 이반의 행동은 더 짓궂어졌다.

비상계단을 앞서 올라가던 지윤은 돌연 느껴지는 묵직한 질감에 고개를 획 돌렸다. 이반이 그녀의 손을 아랫도리에 대고 있었다. 단단히 일어선 살 기둥의 열기가 손바닥 속으로 파고들었다.

“…갑자기 왜 그래?”

“모르는 척하지 마요. 내내 발정 나서 끙끙거린 거 알잖아요.”

“그래도 퇴원할 때까지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반이 은밀히 속삭였다.

“퇴원하라던데.”

“…벌써?”

지윤은 작게 말하며 뒤로 물러섰다. 이반이 점점 다가오는 탓이다. 곧 차가운 벽이 등을 가로막았다. 벽에 달라붙은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그녀에게 바짝 다가간 이반의 목소리가 밀어처럼 달콤해졌다.

“‘환부는 완벽하게 아물었습니다. 앞으로 큰 무리만 하지 않으면 덧날 일도 없고요. 그러니까 제발 퇴원해 주시면 안 될까요.’ 이러던데요?”

병원 측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레드 마피아가 병원을 들락거리는데 편할 리가 없겠지. 환자나 보호자들의 항의를 받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거 아닌가? 지윤은 일부러 다른 생각에 집중했다.

“총상 환자를 열흘 만에 퇴원시키는 병원이 어디 있어? 내가 의사 만나 볼게.”

“그거, 다시 말해 봐요.”

“…뭘?”

“의사 만난다는 말.”

“…내가 의사 만나 볼게?”

“하, 씹….”

이반이 나직하게 욕설을 뱉고는 미간을 옅게 접은 채 더운 숨을 연신 흘렸다.

“당신이 내 보호자처럼 행동하니까, 벌써 흘린 것 같아. 젖었나 만져 볼래요?”

이반이 하체를 지윤의 아랫배에 붙여 왔다. 얇고 헐렁한 바지는 그의 페니스를 조금도 감춰 주지 못했다. 여밈이 없는 환자복의 특성답게 바지 앞섶에 나 있는 틈새가 벌어졌다. 그 안으로 검붉은 페니스가 설핏 보였다.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순간, 그가 고개를 숙여 지윤의 목덜미를 핥았다.

“흣!”

맙소사.

아메리카노가 바닥에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신음을 뱉은 지윤이 제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다 슬금슬금 아랫배에 비벼지는 페니스에 놀라 이반의 가슴에 손을 얹고 버텼다.

“…이, 이반! 잠깐, 여기 비상계단이야!”

“그런데요.”

“이러다 누구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

“이 더운 날씨에 누가 비상계단을 이용해요.”

“그래도 안 돼! 으….”

이반이 지윤의 가슴을 움켜잡았다. 불룩 솟은 젖꼭지를 옷째로 물었다. 쭈읍쭈읍 빨자 하얀 티셔츠에 그곳만 동그랗게 얼룩이 졌다.

지윤이 그의 손목을 붙잡고 힘껏 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마치 못 박힌 것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훅 전해지는 열기에 전염이 되었는지 밑이 젖어 가기 시작했다. 지윤은 벽과 이반 사이에 끼어 바르작거렸다.

“그, 그만! 하지… 읏, 그만해!”

가슴에 붙어 있던 이반이 고개를 들었다. 무섭게 가라앉은 시선이 그녀를 옭아맸다.

“올라갈까요?”

“응! 제발, 올라가서…!”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반이 그녀를 번쩍 안아들고 계단을 두세 개씩 성큼성큼 올라갔다.

“미쳤어! 내려놔! 빨리!”

“당신이 움직이면 더 흥분하는 거 몰라요? 가만히 있어요.”

“이러다 수술한 자리 잘못되면 어쩌려고!”

“이미 아문 지 오래예요. 하아, 미치겠네. 쌀 것 같으니까 그만 움직이라고.”

위협적인 경고에 지윤의 몸부림이 멈췄다.

“착해요.”

이반이 아이에게 하듯 지윤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는 곧 비상문을 열고 병원 복도로 들어섰다.

복도는 조용했다. VIP 병실이 위치한 단 하나밖에 없는 층인 데다가 현재 입원해 있는 사람이 레드 마피아라는 소문이 들리자 아무도 얼씬대지 않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동상처럼 서 있던 보디가드들이 이반에게 묵례했다. 창피해! 지윤이 팔로 이반의 목을 감으며 얼굴을 묻었다. 마침 병실에서 나오던 안드레이가 그들을 발견하고는 눈을 크게 떴다.

“어? 에일린 어디 아파?”

“꺼져.”

짤막하게 대꾸한 이반이 병실에 들어가자마자 지윤을 내려놓고는 문을 사납게 닫아 버렸다. 그리고 바로 지윤의 손목을 잡아끌어 병실 안에 마련된 욕실로 들어갔다.

사람을 안고 계단을 몇 층이나 올라왔으면서, 그에게선 힘든 기색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땀 한 방울도 솟지 않은 매끄러운 이마 위에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 머리를 쓸어 올리며 그가 입술을 핥았다. 촉촉하게 젖은 입술이 요사하게 벌어졌다.

“벗어요.”

“…….”

“내가 벗겨 주고 싶은데 찢어 버릴 것 같아. 어서요.”

지윤이 그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는 티셔츠를 벗었다. 이어 느릿하게 지퍼를 내리고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벗었다.

발목에 걸린 옷을 이반을 향해 던지자 그가 단숨에 낚아챘다. 애액으로 짙게 물든 팬티에 코를 박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젖은 냄새에 그의 페니스가 폭발할 것처럼 까닥거렸다.

이반이 바지 매듭을 풀었다. 툭 떨어지는 바지를 옆으로 밀어 버리고 페니스를 잡았다. 천천히 흔들리는 선단 끝에서 쿠퍼액이 솟아 길쭉하게 떨어졌다.

“세면대에 앉아요.”

지윤이 잠자코 세면대에 앉자 이반의 허기진 표정이 짙어졌다.

“벌려서 보여 줘요. 얼마나 젖었는지.”

잠깐 머뭇거린 그녀가 무릎을 넓게 벌렸다. 귓불은 벌겋게 익었으면서 애써 표정을 다스리는 그녀를 보며 이반이 목을 울려 웃었다.

“보지도 벌려야죠.”

“…그런 단어 좀 쓰지 마. 예전엔 안 그랬잖아.”

“부끄러워요?”

“조금.”

“그럼 계속해야겠네. 당신이 부끄러워하면 더 흥분되거든.”

지윤이 그를 노려보았다. 이반이 팬티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보면 미치겠어요. 좆이 아플 정도로 서서.”

“…부끄러워해도 그렇고, 노려봐도 그렇고. 어쩌라는 거야.”

“뭘 해도 똑같아요.”

‘죽을 것처럼 흥분되는 건.’ 이반이 속삭이며 지윤에게 입술을 붙였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한 번 핥은 뒤 전부 빨아들였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그의 혀가 지윤의 얇은 혀를 뱀처럼 감았다.

츱, 츄읍. 혀가 비벼지면서 들리는 야릇한 소리가 욕실을 울렸다. 혀끝에서 느껴지는 짜릿한 아픔에 지윤이 어깨를 움츠렸다. 언제나 그렇듯, 그와의 키스는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이 동반되었다. 마치 사나운 짐승과 혀를 섞는 듯,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통증을 호소하기 위해 이반의 어깨를 잡자, 그가 물고 있던 혀를 놔주었다. 몇 번 달래듯 문지르더니 이내 다시 거침없이 빨아 댔다. 입술이 또 터졌는지 침에서 쇠 맛이 났다.

이반이 핏기 도는 지윤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환부를 핥듯, 꼼꼼하고 부드럽게. 그러나 가슴을 움켜잡는 손은 거칠었다.

그가 엄지로 젖꼭지를 튕겨 꼿꼿하게 세우고 옴폭 들어갈 정도로 꾹 눌렀다. 딱딱해진 젖꼭지를 꼬집다 고개를 내렸다. 두툼한 혓바닥이 발딱 일어선 정점을 넓게 쓸고 빨아들였다.

“으응….”

간질간질한 느낌에 이반의 머리칼을 잡던 지윤이 돌연 턱을 치켜 들었다. 그의 손이 밑을 파고들고 있었다.

흐를 정도로 젖은 그곳을 손가락이 쓸어 올렸다. 클리토리스를 눅진하게 비비다 구멍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굴곡진 내벽을 섬세하게 더듬던 손끝이 이내 어느 한 점을 세게 눌렀다. 아! 지윤의 몸이 크게 튀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을 달게 먹으며 이반이 혀를 빨았다. 어느새 손가락이 두 개로 늘어났다. 급히 들락거리는 손길을 따라 세면대에 애액이 뚝뚝 떨어졌다.

춥. 지윤의 신음과 함께 침을 들이켠 그가 무릎을 꿇었다. 가랑이 사이에 얼굴을 바짝 붙이자 그녀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밑을 길게 핥아 올리는 젖은 살덩어리에 그녀의 밋밋한 복부가 긴장으로 팽팽해졌다.

“손으로 벌려 봐요. 구멍 안쪽까지 빨아 줄게요.”

“하아, 하아, 흑!”

지윤이 손을 내려 음부를 벌렸다. 기다렸다는 듯 이반이 길게 빼문 혀를 움찔거리는 구멍에 꽂았다. 꿈틀대는 혓바닥의 움직임에 그녀의 발끝이 곱아들었다. 정말 안쪽까지 들어온 기분이라 절로 아랫배가 단단히 뭉쳤다. 그가 입을 음부에 붙이고 힘껏 빨아 당겼다. 내부가 죄다 밖으로 딸려 나오는 것 같아 지윤이 몸부림쳤다.

“아! 느낌이 이상… 으응!”

천천히 나온 혀는 미끌미끌한 액으로 감싸여 있었다. 그가 물이 뚝뚝 떨어지는 혀로 클리토리스를 비볐다. 동시에 세 개의 손가락이 혀가 있던 자리를 대신했다. 힘줄이 불거진 그의 팔을 타고 뽀얀 애액이 흘러내렸다. 구멍을 헤집는 손가락과 클리토리스를 후비는 혀끝의 움직임에 지윤이 발가락을 힘껏 오므렸다.

“아! 아아! 흐으읏!”

이반이 경련하는 내벽에서 손가락을 뽑았다. 그리고 바로 일어서 그녀의 구멍에 페니스를 처박았다.

“핫! 자, 잠깐, 흐읏!”

“밖에 가드 있어요. 소리 내지 마요.”

“하악! 응, 으….”

“소리 내지 말라니까. 그렇게 꼴리는 소리는 나한테만 들려줘야죠.”

“아읏, 조금 천천… 읍!”

이반이 손으로 지윤의 입을 막았다. 페니스가 구멍을 들락거리는 속도가 빨라졌다. 찌꺽찌꺽, 질퍽한 내벽이 비벼지면서 낯 뜨거운 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이반이 페니스를 끝까지 집어넣은 상태로 허리를 돌렸다. 서로의 음모가 사락거리며 비벼졌다. 크게 돌면서 좁아진 내벽을 벌리던 페니스가 일시에 빠져나갔다가 더 빠른 속도로 안을 치받았다. 접합부에서 애액이 왈칵 새어 나왔다.

“……흡!”

지윤의 몸이 감전된 것처럼 튕겨 올라갔다. 그녀의 허벅지를 움켜쥔 이반의 손등에 힘줄이 곤두섰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로 허리를 난폭하게 흔들던 그가 입술을 짓이겼다.

다문 잇새로 뜨거운 숨이 헐떡이며 터져 나왔다. 열흘 동안 벌어진 적 없던 내벽이 페니스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고통과 닮은 쾌감이 채찍이 되어 등줄기를 후려갈겼다. 이반의 등이 사정을 참느라 덜덜 떨렸다.

“조이지 좀, 마요. 좆 좀 그만, 빨아 먹으라고요.”

“아, 아니, 아이… 읍!”

벌어진 지윤의 입에서 어눌한 단어가 띄엄띄엄 나오다가 이반의 손바닥에 막혀 허무하게 흩어졌다. 대신 일렁이는 눈으로 그를 간절히 쳐다보았지만 되레 이반의 흥분을 돋울 뿐이었다. 으득. 이반이 이를 갈면서 페니스를 완전히 빼냈다. 그리고 지윤을 세면대에서 내려 벽을 향해 돌려세웠다. 그의 이마에서 떨어진 땀이 곧게 파인 그녀의 등골에 굴러떨어졌다. 잘록한 허리를 숙이게 하고 엉덩이 사이에 손을 미끄러뜨리자 그녀가 벽을 짚은 채 흐느꼈다.

“그냥 해! 빨리….”

이반은 터질 것 같은 페니스를 잡아 그녀의 음부를 위아래로 문질렀다.

“빨리, 뭐요? 박아 줘요?”

“으, 응…. 어서.”

“애원해 봐요. 자지로 구멍 속을 긁어 달라고 말해 봐.”

지윤이 그를 맹렬하게 노려보았다.

“박아!”

“아아….”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투에 이반이 헐떡거렸다. 넣지도 않았는데 하마터면 쌀 뻔했다.

“분부대로.”

구멍에 맞추고 단번에 밀어 넣자 두툼한 귀두가 좁디좁은 틈새에 구겨지듯 들어갔다. 큼지막한 손으로 지윤의 아랫배를 감싼 그가 엉덩이를 크게 뺐다가 위로 쳐올렸다. 지윤이 등을 둥글게 말면서 경련했다.

“으으읍!”

“하아….”

뒤에서 밀어붙이는 힘에 못 이겨 타일을 잡고 버티던 지윤의 팔이 풀썩 꺾였다. 벽에 얼굴을 붙인 채 엉덩이만 내민 자세로 퍼덕거렸다. 날카로운 신음 소리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고 그녀의 입 안에서 둔탁하게 맴돌았다.

후읏, 이반이 악다문 잇새로 숨을 내쉬며 허리를 크게 돌렸다. 쩌억, 내벽이 벌어지면서 허옇게 변한 애액이 그녀의 다리를 타고 줄줄 흘렀다.

느릿하게 움직이던 페니스가 다시 내부를 들쑤셨다. 찌꺽찌꺽, 그의 것이 제 안으로 들어갔다가 빠져나오는 소리에 지윤의 목까지 붉게 열이 올랐다. 공기가 부족한 듯 그녀가 입을 크게 벌렸다.

이반이 그 입 안으로 지윤의 밑을 들락거렸던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애액과 침으로 범벅이 된 그것을 지윤이 허겁지겁 핥다 강하게 씹었다. 온몸을 헤집는 날카로운 쾌감을 참지 못한 이반이 숨을 집어삼켰다.

“씹… 아!”

딱딱해진 페니스에서 많은 양의 정액이 쏟아져 나와 내부를 가득 채웠다. 페니스를 빼내니 점점 줄어드는 구멍 사이로 하얀 것이 덩어리째 흘러나왔다.

지윤이 휘청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았다. 재빨리 이반이 그녀의 등 뒤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그녀의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발기가 조금도 풀리지 않은 페니스를 다시 음부에 가져다 댔다. 느른하게 정액을 뱉어 내는 구멍 속으로 페니스가 틀어박혔다.

“하악!”

지윤이 바닥을 짚으며 엎드렸다. 등줄기가 가련하게 떨렸다. 이반은 사냥에 성공한 짐승처럼 지윤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덥석 물었다. 급소를 붙잡힌 지윤이 진저리를 치며 앞으로 기어갔다. 살기위한 본능적인 몸짓이었다. 그런 그녀의 발목을 이반이 잡아 단숨에 잡아당겼다.

“안 돼.”

“이반!”

“싫으면 차라리 뺨을 후려쳐요. 내 배에 칼을 쑤셔 박아도 괜찮아요. 하지만 벗어나는 건 안 돼.”

“잠깐, 배가 꽉 찬 거 같….”

“많이 흘렸는데 무슨 소리예요. 다시 채워 줄게요. 가만히 있어도 질질 샐 만큼. 도저히 움직일 엄두도 내지 못하게.”

이반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지윤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반쯤 빠져나갔던 페니스가 부어오른 내부를 난폭하게 들쑤셨다.

“흣… 뜨거워….”

지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도 마찰열이 느껴지는 것 같다. 안에 고여 있던 정액이 밖으로 비어져 나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시 뜬 그녀의 눈은 초점이 흐릿했다.

양손으로 지탱할 힘조차 없었다. 욕실 바닥에 볼을 대고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 이반을 견뎠다. 퍽퍽퍽, 올려붙이는 사내의 힘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반이 출렁대는 그녀의 가슴을 허옇게 질리도록 움켜잡았다. 여러 번에 걸친 절정에 의해 그녀의 내벽은 처음처럼 뻑뻑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당하게 풀려 쫀쫀하게 잡아끄는 느낌이 숨 막힐 정도로 황홀했다.

이반이 마른 입술을 핥으며 허리를 뒤흔들었다. 지윤은 엎드린 채 맥없이 흔들리기만 했다. 간헐적으로 앓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으로 바닥 타일을 긁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딱딱한 바닥에 지윤의 무릎이 비벼지는 게 거슬렸던 이반이 축 늘어져 있는 그녀의 팔을 끌어당겨 상체를 세웠다. 체중이 실리자 결합이 더욱 깊어졌다. 지윤이 손톱을 세워 그의 팔을 할퀴었다.

“너무 깊… 흐으윽!”

이반이 그녀를 허벅지 위에 앉힌 자세로 허리를 튕겨 올렸다. 열 오른 작은 몸을 팔뚝으로 단단히 옭아매고 벌어진 그녀의 입 안에 손가락을 집어넣었다.

침을 묻혀 마른 입술을 적셔 준 뒤 강압적으로 얼굴을 돌려 입을 맞췄다. 다른 손은 앞으로 내밀어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살짝만 스쳐도 따가울 정도로 예민해진 살을 무참히 짓이기자 지윤이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으으, 읏, 하앗!”

들뜬 엉덩이에서 물이 줄줄 떨어지는 통에 페니스와 불알까지 온통 젖었다. 마치 실금이라도 한 듯 뜨뜻한 느낌에 이반의 입술이 길게 벌어졌다. 뼈가 도드라진 어깨를 씹으며 허리를 쳐올리자 그녀가 전기 충격을 받은 것처럼 파들댔다. 절정이 지나기도 전에 이어진 자극에 지윤의 입가로 침이 질질 샜다.

이반은 딸꾹질하듯 튀는 몸을 양팔로 끌어안고 페니스를 전부 쑤셔 박았다. 그 상태로 허리를 들썩여 페니스를 털었다. 딜도라도 넣은 듯 아랫배 전체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지윤이 숨을 헉! 하고 뱉었다. 늘어진 그녀의 몸이 다시 팽팽히 굳은 순간, 이반이 미간을 엉망으로 접었다.

“크읏!”

그는 지윤을 꼼짝하지 못하게 구속한 채로 남은 한 방울까지 쏟아 냈다. 사정이 끝났는데도 지독한 쾌감은 그대로였다.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발기가 풀리지 않았다. 그가 빨갛게 물든 그녀의 귓불에 입을 대고 속닥거렸다.

“한 번, 아니 두 번 만 더 해요.”

“…어지러워.”

“어지러워?”

“으응.”

나른한 잔열에 감싸여 있던 회색 눈동자가 단번에 또렷해졌다. 그가 분홍색으로 익은 지윤의 얼굴을 세밀히 살폈다.

“내 목에 팔 감아요.”

이반이 그녀를 안아 들었다. 아직도 일어서 있는 페니스를 끄덕거리며 병실로 나가 소파에 그녀를 눕혔다. 빠르게 수건에 물을 묻혀 와 뜨끈하게 데워진 살갗을 문질렀다. 지윤이 부르르 떨며 몸을 웅크렸다.

“차가워….”

“잠깐만요.”

이반은 소름이 돋아 있는 지윤의 팔을 쓸어 주면서 에어컨을 꺼 버렸다. 창문을 열어서 남아 있는 한기를 밀어 버리자 초여름의 더위가 병실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반의 이마에 금세 땀이 맺혔다. 그런데도 지윤의 이마를 짚어 열을 체크하는 그에게서는 더운 내색 하나 없었다.

“에어컨 켜.”

“안돼요. 의사 불러 올 테니까 더워도 이대로 있어요.”

나 말고 너 말이야. 지윤은 말하는 대신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옷부터 입혀 줄게요.”

그녀의 콧잔등에 입을 맞춘 그가 욕실로 가서 지윤의 옷을 들고 나왔다. 구김을 펴기 위해 탈탈 털자, 뭔가가 툭 떨어졌다. 금색 테두리가 둘러져 있는 고급 명함. 이반이 명함에 새겨져 있는 정보를 빠르게 읽고 지윤에게 내밀었다.

“이건 뭐예요?”

지윤이 고개를 돌려 명함을 흘끔 보았다. 욕실에서 옷을 벗다가 떨어졌었나 보다.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다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세금 정리할 게 있어서.”

“변호사는 놔뒀다 뭐 하게요.”

“얼마 되지도 않는 소액인데 거창하게 무슨 변호사야. 그냥 회계사에게 맡기면 돼.”

“흐음.”

콧소리를 내며 그녀를 쳐다보던 이반이 명함을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지윤에게 옷을 다 입힐 때까지 그는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


 

지윤은 급작스러운 체온 상승으로 인한 가벼운 열병에 걸렸다. 집에 가도 된다는 그녀를 이반은 억지로 입원시켰고, 병원에서 나온 날은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이틀 동안 안드레이는 눈코 뜰 새도 없이 움직였다. 지윤 옆에서 꼼짝도 하지 않으려는 이반 때문에 출국 준비를 혼자 도맡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반이 명령한 날짜에 맞추려면 여유가 조금도 없었다.

안드레이의 희생으로 이반과 지윤은 무사히 출국할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공항에 들어섰다. 마침 공항 곳곳에 비치된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한창 흘러나오는 중이었다.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집에서 끌려 나오는 해리슨. 그의 망연자실한 표정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기자들이 질문을 퍼부었지만 해리슨은 입술을 달싹일 힘도 없어 보였다. 영상 밑에 ‘마틸다 링컨 살해 사건에 연루된 전 FBI 부국장’이라는 헤드라인이 지나갔다.

이어서 화면 왼쪽 상단에 차가 호수에 처박히는 영상이 조그맣게 떴다. 이틀 내내 텔레비전을 켜 본 적도 없었던 지윤이 그 장면 앞에서 멈춰 섰다.

“저게 무슨… 당신이 제보한 거야?”

“아니요.”

“정말?”

“나도 지금 처음 봐요. 우리 텔레비전 근처에도 안 갔잖아요.”

이반의 표정은 결백해 보였다. 생각해 보니 안톤의 동영상도 직접 제보했다고 스스럼없이 실토한 그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텔레비전 앞에서 떠나지 못하는 그녀를 이반이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일리야.”

그때, 안드레이가 그의 등 뒤로 접근했다. 이반이 돌아보자 안드레이가 영상에 넋을 놓고 있는 지윤을 흘끔 살피다 뒤로 고갯짓을 했다. 이반이 지윤에게서 몇 걸음 떨어지자마자 목소리를 낮췄다.

“가짜야. 그런 회계 사무소가 있긴 한데 처리한 건이 하나도 없어. 아무래도 CIA 쪽인 것 같은데. 어떻게 할까.”

“내버려 둬.”

“…그래도 괜찮겠어? 앞으로 에일린에게 계속 접근하려고 할 텐데.”

“괜찮아.”

그렇게 말하며 이반이 묘하게 웃었다. 깊이 가라앉은 회색 눈동자가 잠시 불길하게 번들거렸다. 하, 이 새끼. 또 지랄이네. 속으로 중얼거리던 안드레이가 문득 핸드폰을 내밀었다.

“받아 봐.”

“누군데?”

“받아 보면 알걸? 놀랄 거다.”

이반이 전화를 받았다.

“예.”

그제야 지윤이 두리번거리다 그에게 다가왔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는 걸 알고 곧바로 자리를 피해 주려는 그녀의 손을 이반이 잡고 끌어당겼다. ‘떨어지지 말라니까. 내 옆에 있어요.’ 입 모양으로 말하며 허리를 단단히 감싸자 그녀가 미간을 조금 일그러뜨리더니 피식 웃어 버리고 만다.

그 입가에 입을 맞추던 이반이 핸드폰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유명인이 전화를 다 주셨네요. 뉴스에서 온통 당신 얘기뿐이던데요?”

통화 상대를 짐작한 지윤의 눈매가 굳어졌다.

“…아, 그거요? 내가 공개한 거 아닌데. 며칠 전, 병원으로 누가 찾아왔기에 말했을 뿐이에요. 해리슨 버켄필드 같은 사람이 정부 요원으로 일하는 나라와는 공동 무기 개발 못 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당신을 이렇게 쉽게 버릴 줄은 나도 몰랐어요.”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를 찾아온 방문객들은 정계를 주름잡는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반의 방산업체가 가진 기술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공동 개발을 제안했으나 모조리 거절당했다.

그중 누군가 이반의 거절을 심각하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단기간에 정부에 압력을 넣어 걸림돌을 치워 버릴 만큼 힘 있는 자일 것이다.

“버켄필드 씨, 마틸다가 대의를 위한 희생양이었듯이 이번에는 당신이 희생양이 된 거예요. 나라를 위한 결정이었을 테니까 겸허히 받아들여요. 당신네 나라잖아요.”

해리슨의 격양된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왔다. 뭐라고 하는지는 잘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공포와 절망의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아, 내가 그런 말을 하긴 했죠.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주겠다고. 음, 잠깐만요.”

핸드폰을 귀에서 뗀 이반이 가볍게 물었다.

“해리슨이 살려 달라는데, 어떻게 할까요?”

진지한 기색은 조금도 없는 장난스러운 음성이었다. 마치, ‘우리 저녁으로 뭐 먹을까요?’ 같은 뉘앙스였다. 덕분에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졌다. 두근거리던 심장도 제자리를 찾았다. 지윤은 고개를 흔들었다.

“해리슨? 난 그런 사람 몰라.”

이반이 눈꼬리를 얄궂게 휘었다. 잘했다는 듯 지윤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다시 통화했다.

“안타깝네요, 버켄필드 씨. 나는 미친개라 주인님 명령밖에 못 알아들어요. 그런데 주인님이 당신을 모른다지 뭐예요. 그러니 혼자 열심히 해결해 보세요. 구속되면 사식 정도는 넣어 줄게요.”

- 일리야 씨! 일리야! 이 개새끼야! 네가 어떻게….

해리슨의 욕설이 뚝 끊어졌다. 미련 없이 핸드폰을 안드레이에게 전해 준 이반이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지윤에게 내밀었다.

“참 이거.”


 

G&MI 회계 사무소


 

지윤은 명함을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테이블 위에 놔뒀었는데 그대로 있더라고요. 중요한 것 같아서 가져왔어요. 받아요.”

“…회계 처리가 필요할 정도의 금액이 아니라서 놔두려고. 그냥 버려도 돼.”

“언제 필요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가지고 있어 봐요.”

“필요 없어.”

정답.

이반이 다시 지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귀찮다는 듯 지윤이 그의 얼굴을 밀어 버렸다. 이반은 얼굴을 밀어 대는 손가락을 낚아채 손끝에 하나하나 입을 맞췄다.

“사람들이 보잖아! 그만 좀 해.”

지윤이 손을 탈탈 털더니 빠르게 걸었다. 이반이 그 뒤를 바로 쫓아가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몸을 조금 뒤틀던 그녀가 이내 포기한 듯 이반의 허리를 잡았다. 표정과는 다르게 상처라도 건드릴까 봐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며 이반은 여유롭게 웃었다.

섬이 필요해질 일은 당분간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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