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10/12)

쾅!

해리슨이 테이블 위에 서류철을 집어 던졌다. 수갑을 찬 채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지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눈을 내리뜨고는 가만히 테이블 모서리를 응시하기만 했다.

발견 당시 그녀는 브래지어 차림으로 이반의 상처를 압박하고 있었다. 온몸에 피 칠갑을 하고 있었지만, 일부러 샤워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후줄근한 셔츠 하나만 던져 주고 이틀 동안 취조실에 붙잡아 놓는 중이었다.

이반의 상태에 대해서도 의도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모두 그녀의 심리 상태를 불안정하게 만들기 위한 작전이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피로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순간 나락으로 처박힌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절망할 만도 한데, 내내 침착한 감정 상태를 유지했다. 이반의 이름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표정만 봐서는 무슨 일을 겪었는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러니까, 지금 다 인정하겠다는 건가?”

“예.”

“비밀 작전 정보를 개인적으로 빼돌린 것도 모자라 그걸로 레드 마피아와 거래하려고 한 것도 전부?”

“예.”

“…씨발! 지금 장난해?”

벌떡 일어서서 씩씩거리던 그가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나라고 널 설득하고 싶은 줄 알아? 재판이고 뭐고 당장 연방 교도소에 처박고 싶다고! 그런데 위에서 기회를 주라잖아! 일리야에 대한 정보만 넘겨주면 정상 참작해 주겠다잖아!”

좁은 취조실이 울릴 정도로 고함을 질러 대던 해리슨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거뭇거뭇 수염이 올라온 턱을 벅벅 문지르다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 새끼 레드 마피아야. 그놈의 정보를 준다고 해서 죄책감 느낄 필요 없단 말이야. 잘하면 집행 유예로 풀려날 수도 있는데, 그런 새끼 때문에 인생 조질 생각이야?”

“…….”

“네가 협조만 하면 당장 검사 측과 협상할 거야. 넌 어쩔 수 없이 일리야와 연인 관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거절하면 죽을지도 모르는데 열심히 다리를 벌려 줘야지, 안 그래? 마틸다 사건에 대한 정보도 협박을 당해서 넘길 수밖에 없었고.”

지윤이 그제야 내리깔았던 시선을 들었다.

“예전에 선배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까?”

“뭐?”

“그 대가로 선배가 부국장으로 승진한 것처럼, 나에게는 형량을 줄여 주겠다는 거냐고요.”

“에일린!”

“선배나 그러고 사세요. 나는 나대로 살 테니까.”

“레드 마피아와 붙어먹은 년이 어디서 감히 정부 요원을 상대로….”

지윤이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올렸다.

“붙어먹은 건 당신이 먼저 아닌가? 그때 나한테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고 했잖아요. 그러고 보니 내가 선배한테 좋은 거 배웠네요.”

“이… 이, 미친년이!”

해리슨이 지윤에게 달려들었다. 취조실 밖에 있던 요원들이 쏟아져 들어와 그를 뜯어말렸다. 황급하게 녹화 카메라를 가리는 요원도 있었다. 정숙하던 취조실이 삽시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야단법석을 떠는 요원들을 구경하다가 지윤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반과 관련된 정보가 하나 있긴 있어요.”

찬물을 뿌린 것처럼 소음이 사라졌다. 요원들의 눈이 모두 그녀에게 모였다. 지윤이 해맑게 웃었다.

“그는 스크램블드에그를 싫어해요.”

“…….”

“서핑을 제일 좋아하고요.”

“…아아악!”

잠깐의 정적을 뚫고 얼굴이 시뻘게진 해리슨이 악을 쓰며 몸부림쳤다.

“나 말리지 마! 놔! 이거 안 놔? 놔!”

그때, 취조실 문이 열리며 고급스러운 슈트를 차려입은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온 신입 요원이 눈을 마구 깜빡거렸다.

해리슨을 붙잡고 있던 요원들이 눈치껏 후다닥 떨어졌다. 툭, 서류 가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설마 지금 가학 행위를 시도하려는 겁니까?”

해리슨이 치켜들었던 다리를 슬그머니 내렸다.

“당연히, 아닙니다.”

“오호, 녹화 카메라는 누가 가렸습니까? 이거 명백한 불법인 건 아시죠? 지금 이 시간까지 녹화된 분량에 대한 증거 무효 신청을 해야겠군요.”

누군가 녹화 카메라를 가리고 있던 슈트를 재빨리 치웠다. 어차피 녹화 영상이야 조작하면 그만인데 왜 그걸 가려서는! 해리슨이 해당 요원에게 눈을 부라리다가 헛기침을 했다.

“흠, 흠, 근데 누구십니까?”

은테 안경을 쓴 남자가 영업용 미소를 지으며 명함을 내밀었다.

“변호삽니다.”

“…누구의?”

“이곳에 변호받을 사람이 또 있습니까?”

“설마, 에일린 말입니까? 부르지도 않았는데 무슨….”

“모든 국민에게는 변호받을 권리가 있죠. 그래서 저 같은 사람도 먹고사는 게 아닙니까. 그리고 이분의 성함은 지윤 박입니다. 에일린이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취조 기록에 대해서도 증거 무효 신청을 하겠습니다.”

변호사의 덤덤한 말에 요원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변호사가 서류 가방을 열고 준비한 서류를 차례대로 꺼내더니 지윤 앞에 늘어놨다.

“변호사 선임 동의서입니다. 천천히 읽어 보시고 서명하세요.”

지윤이 해리슨을 흘끔 보고는 변호사에게 물었다.

“누가 보낸 거죠?”

“저를 고용한 분은 일리야 페트로비치 라브노프 씨입니다. 제가 변호를 할 의뢰인은 지윤 씨고요.”

“이반은 어떻게 됐어요? 괜찮은 건가요? 수술은요? 잘 된 거예요?”

성급히 터져 나오는 그녀의 질문에 변호사가 씩 웃었다. 가면 같은 영업용 표정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는 친절한 미소였다.

“저들이 왜 라브노프 씨의 정보를 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죽을 줄 알았던 라브노프 씨가 수술을 성공적으로 끝마치고 어제 새벽에 마취에서 깨어나셨기 때문이지요. 모르핀을 안 맞아도 될 정도로 회복 속도가 빨라 의료진도 놀랐다고 하더군요.”

이반이 살았다.

어쩐지. FBI로 끌려오자마자 모든 혐의를 시인했음에도 취조를 끝내지 않는 게 이상하긴 했다.

게다가 모든 질문이 범행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반에 대한 정보에 치중해 있었다. 갑자기 협상을 해 주겠답시고 미끼를 내민 것도 어제부터였다. 그게 먹히지 않으니까 해리슨이 발광하기 시작하는데 그마저도 작위적인 느낌이었다. 마치 연기를 하는 것처럼.

그 수목림에서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것을 끝으로, 이반에 대한 소식은 전혀 듣지 못했다. 일부러 언급을 안 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내색할 수는 없었다.

취조를 당하는 이틀 동안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고 싶어서 피가 마르는 심정이었다. 그럼에도 물어볼 수 없었던 이유는 이반에 대한 정보를 알려 주는 대신 해리슨이 대가를 요구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생사를 놓고 설마 거래를 할까 싶겠지만, 지윤은 해리슨이 어떤 자인지 이미 겪어 보았다. 나라를 위한다는 미명 아래 자신의 출세욕을 충족하는 자였다. 그런 자를 상대로 그 어떤 것도 거래하고 싶지 않았다.

‘이반은 무사해. 그는 죽지 않았어.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지윤은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는 것으로 쏟아질 것 같은 눈물을 거두어냈다. 이반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하자 어깨에서 힘이 절로 빠져나갔다. 뾰족하게 곤두서 있던 신경이 서서히 누그러지면서 이틀 동안 혹사당했던 머릿속에 졸음이 안개처럼 몰려왔다.

“회복이 빨라서가 아니라 통증에 무뎌서 그래요. 딱히 요구하지 않아도 평범한 환자처럼 생각하고 모르핀을 투여하세요. 아프지 않다고 막 움직일지도 몰라요, 저번에 그런 적이 있어서…. 감시가 필요할 거예요.”

“그런 건 저보다 지윤 씨가 직접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남의 말을 안 듣는 분이시잖습니까.”

“…네?”

졸음이 단숨에 사라졌다. 마치 여기서 곧 나갈 거라는 뉘앙스에 지윤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에게 생긋 웃어 준 변호사가 갑자기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참. 해리슨 버켄필드 씨. 제 고용주께서 이 말을 전해 드리라고 하시더군요.”

해리슨이 팔짱을 끼며 콧방귀를 뀌었다.

“마취가 풀렸다는 소리는 들었습니다만, 지금 제정신이긴 하답니까?”

“아주 멀쩡하십니다.”

“…그래요?”

“제 고용주의 건강을 염려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잠시 귀를 빌려주시겠습니까?”

해리슨이 떨떠름하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자 변호사가 그의 귀에 입을 바짝 갖다 붙였다.

“IRK-M 설계도 갖고 싶으면 좆 빠지게 뛰어와.”

변호사가 입을 다시 떼고 웃었다. 천박한 말을 입에 올린 사람 같지 않은 단정한 미소였다.

“…라고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IRK-M이라면 2년 전 안톤에게 입수했던 신형 미사일 설계도였다. 2년 동안 천문학적인 액수의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아직도 완성하지 못한 이유는 설계도가 미완성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그 문제점이 속속 드러나는 바람에 해리슨은 궁지에 몰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며칠 전, 이반이 새로운 IRK-M 설계도를 내밀며 협상을 요구했다. 궁지에서 단번에 벗어날 수 있는 기회임은 틀림없었지만, 그가 요구한 건 제시의 유전자 검사 기록 공개였다.

마틸다를 살해한 해리슨의 입장에서는 결코 들어줄 수 없는 조건이었다. 제시의 유전자 검사 기록이 공개되면, 마틸다의 죽음까지 재조명될 게 당연하니. 그래서 몇 번이고 사정을 설명했지만 그는 ‘마피아도 그렇게 거저 처먹지는 않아요.’라며 협상을 무효로 돌렸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미끼를 내밀었다는 건, 원하는 게 생겼다는 의미. 다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이번 일만 성공시킨다면 궁지에서 벗어나는 것뿐만 아니라, 국장 승진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해리슨은 쾌재를 부르고 싶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기다리십시오. 곧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올 테니.”

“무슨 소립니까?”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취조실 문이 벌컥 열렸다.

“부국장님! 국장님이 찾으세요!”


 

***


 

며칠 전, 잭슨빌 근처에서 총상을 입은 환자가 인근 병원에서 응급조치를 받은 뒤 펜실베이니아 주립 병원으로 옮겨 수술받는 사건이 있었다. 헬리콥터에다 의료진만 10명 이상 동원되는 바람에 병원 내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화제의 인물에 대한 정체는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레드 마피아로 밝혀졌다. 그도 그럴 게 양복을 입은 러시아 남자들이 VIP 병실을 기점으로 주변을 꼼꼼히 둘러쌌기 때문이다. 환자와 보호자들은 그들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멀찍이 피해 다녔다.

너스 데스크 앞에서 이반의 엑스레이를 살펴보던 해리슨이 코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이런 거 봤냐?”

해리슨과 동반한 신입 요원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정확히 갈비뼈와 내장 사이에 허연 원이 보였다. 총알이 지나간 자리가 파편 하나 없이 깔끔했다. 그러니 수술을 받자마자 반나절 만에 멀쩡히 깨어났겠지.

“레드 마피아 주제에 운은 더럽게 좋군요.”

“저격을 누가 했는지 몰라도 총 한번 못 쏴 본 등신이거나 저격의 천재, 둘 중에 하나야.”

해리슨은 엑스레이를 신경질적으로 떠넘기고 VIP 병실 앞에 섰다.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위화감을 조성하는 러시아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 주었다. 그러자 그들이 옆으로 비켜서며 문을 열어 주었다.

병상에 기댄 자세로 안드레이의 보고를 듣던 이반이 고개를 틀었다. 그를 보자마자 해리슨은 생각했다. 우리 요원들이 사진을 발로 찍은 게 분명하다고.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과 CCTV 영상에서는 미끈하게 생긴 기생오라비로 보였는데, 실물을 보니 전혀 아니었다.

아름다운데도 결코 나약해 보이지 않았다. 일견 무방비한 것 같으면서 손끝이 닿는 순간 손목이 잘릴 것 같은 날카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려운 인간이었다.

죽다 살아난 사람이 맞는지 안면엔 꽃이 피었다. 창백한 피부와는 대조적으로 새빨간 입술이 너무나 어울려 비현실적이었다. 얼마나 잘난 인간이건 간에 큰 수술을 했으니 초췌하고 고통에 찌든 모습을 기대했는데 영 실망이었다. 자신을 빤히 보기만 하는 이반에게 해리슨이 먼저 명함을 내밀었다.

“해리슨 버켄필드입니다.”

안드레이가 명함을 대신 받아 이반에게 건넸다. 명함에 손도 대지 않고 대충 훑어보던 이반이 오, 하고 탄성을 흘렸다.

“부국장? 승진이 빠르네. 웃대가리들 밑 좀 빨아 주셨나 봐요.”

“말조심하시죠.”

“내 소문 못 들었어요? 나 미친개라 말 예쁘게 못 해요. 기분 나쁘더라도 버켄필드 씨가 참아요.”

“협상은 그쪽에서 원한 거 아닙니까? 내가 왜 참아야 하는지 모르겠군요.”

“이상하네. 위에서 내 자지라도 빨아 주라고 하지 않았어요?”

이반의 말은 사실이었다. 해리슨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이번 협상을 성공시키라는 상부의 명령을 받은 차였다.

“걱정 말아요. 그쪽 입에 좆을 넣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나도 취향이라는 게 있거든. 그리고 내 애인이 화가 나면 좀 무서워서.”

아무리 상부에서 명령이 내려왔다 해도 비굴해질 필요는 없었다. 기 싸움에서 먼저 꼬리를 내리는 개는 물릴 수밖에 없다. 해리슨이 거만하게 웃었다.

“그러는 당신도 에일린의 밑을 빨아 주지 않았습니까?”

“그녀와 나 사이에서 약자는 나예요. 약자가 강자에게 기는 건, 생존 본능이지 창피한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강자 밑 좀 빨아 줬다고 쪽팔려 하지 말자고요. 당연한 거니까.”

해리슨의 입매가 일자로 다물렸다. 이반이 그 모습을 보며 해맑게 웃다가 문득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어땠어요?”

“뭐가 말입니까.”

“우리 씹질하는 거 어땠냐고요. 꼴리던가요? 매일 나 감시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그런 재미 정도는 있어야죠.”

이반이 야릇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러나 해리슨은 알고 있었다. 이반이 지금 지윤의 집에 카메라를 설치했는지 떠보고 있다는 사실을.

설치하지도 않았지만, 설령 설치했다고 해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불법이 문제가 아니라 이반이 아는 순간, 그가 제시한 모든 조건을 거둘 테니까.

그리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FBI를 공격하겠지.

이반이 지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CIA가 약 6개월 전부터 지윤의 감시 등급을 최상위로 올린 것만 봐도 확실했다.

장차 라브노프 일가의 정점에 설 남자의 연인. 그런 존재를 파악하는 데는 CIA가 가장 빠르고 정확했다. 그런 주제에 미사일 설계도 하나 제대로 확인 못 해서 사람을 우습게 만들어? 음침한 스토커 새끼들. 해리슨은 속으로 CIA에게 저주를 퍼부으면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우려하시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으니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런데….”

해리슨이 말끝을 흐리며 안드레이를 눈으로 가리켰다. 다른 사람이 있는데 말해도 되겠냐는 의미였다. 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내 형제예요. 모든 정보를 공유하죠.”

“그렇다면 편하게 말씀드리죠. 두 가지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두 가지나? 뭔데요?”

해리슨은 이반의 표정 변화를 주목했다.

“27번가 페인트 공장 사건이 있던 날 밤, 러시아 전 채널에 현직 상원 의원과 비서와의 섹스 스캔들을 대대적으로 터트렸습니다. 익명의 제보자가 친절하게도 동영상을 제공했다더군요. 식별 불가능한 사진 따위가 아니었죠. 해당 상원 의원은 발뺌도 못 하고 궁지에 몰렸습니다. 전문가가 찍은 것처럼 영상이 워낙 깔끔해서요.”

“별로 안 좋은 소식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상원 의원이 안톤 페트로비치 라브노프, 당신의 형님이십니다.”

“저런, 안타까운 일이네요.”

이반이 책을 읽듯 말했다. 말과는 다르게 조금도 안타깝지 않은 표정으로. 해리슨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전혀 모르셨습니까?”

“어떻게요? 난 그때 안톤이 보낸 부하들에게 납치당했었잖아요. 당신이 말한 그 페인트 공장으로. 알고 있었을 텐데요?”

납치를 당했다 해도 동영상 따위는 얼마든지 제보할 수 있었다. 부하들은 괜히 있는 게 아니니까.

게다가 레드 마피아의 유력 후계자였던 안톤의 약점을 수집할 정도로 간 큰 존재는 극히 드물었다. 아니, 아예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생글생글 웃는 이 남자, 일리야 페트로비치 라브노프를 제외한다면.

해리슨은 이반 쪽에서 동영상을 제보했다고 확신했다. CIA는 이미 증거까지 확보해 뒀을 것이다.

“매스컴이 온통 그 사건으로 시끄러웠잖습니까. 포털 사이트, 라디오, 텔레비전… 거의 모든 매체가 그 사건을 주요 이슈로 떠들어 댔으니까 말입니다.”

“라디오는 원래 안 듣고, 텔레비전은 볼 시간이 없고. 핸드폰은 통화할 때만 써요.”

“…철저하시군요.”

해리슨에게는 이반의 무덤덤한 반응이 가증스러운 연기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게 레드 독(Red Dog, 광견병 걸린 개를 뜻하는 은어)이라는 별명은 그냥 생긴 게 아니었다.

그는 목적 없이 움직였다. 자국을 위해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개인의 이득을 좇지도 않았다.

적국과 거리낌 없이 무기를 거래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정부를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결정 기준은 흥미,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그의 흥미를 끌지 않으면 무엇을 제시한다 해도 결코 움직이지 않았다.

안톤이 기회가 있었음에도 결국 이반을 살해하지 못한 건 아마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이반이 뭘 계획해 두었는지 모르기에.

이반이라면 자신이 죽는 순간, 방산업체의 모든 정보를 외국에 넘기거나, 혹은 일가의 기밀을 세상에 공개하는 미친 짓을 벌일 수도 있었다.


 

“괜히 레드 독이겠어? 그거 전염병이야. 광견병 걸린 개는 일주일을 못 버티고 죽어. 그런데 그놈은 살아남았잖아. 얼마나 독하겠어? 또 누군가 물어뜯어서 감염시키기 전에 내보내.”


 

해리슨은 상사와의 대화 내용을 되새겼다.

“두 번째 안 좋은 일은 뭔가요?”

“어제 새벽, 안톤 페트로비치 라브노프 씨가 권총으로 자살하셨습니다. 자신의 부도덕적인 행위를 부디 용서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셨지요.”

안톤이 섹스 스캔들 때문에 괴로워한 건 사실이었다. 다만, 죄책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타의에 의해 정치계에서 내동댕이쳐지는 모멸감을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안톤 또한 해리슨처럼 이반이 영상을 터트렸다고 확신했다. 집 밖으로 한 걸음만 나와도 플래시 세례를 받는 와중인데도 미국까지 날아온 건, 이반과 지윤을 제 손으로 직접 죽이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분노하던 자가 갑자기 자살이라니. 더군다나 이 모든 사태의 원흉인 이반은 가만히 놔둔 채 자살을 했다는 건 오만한 안톤의 성격상 말이 되지 않았다.

당연히 제2의 인물이 개입되어 있으며, 누군지 짐작할 수도 있었지만 대놓고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해당 인물이 거물인 까닭이 아니라, 안톤과 혈연관계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소름 끼치는 점은, 이반이 수술을 마친 시간과 안톤이 자살한 시간이 일치한다는 점이었다. 마치 라브노프의 뒤를 물려받을 후계자가 적어도 한 명은 남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처럼. 이반이 수술대 위에서 죽었다면 안톤은 살았을지도 모른다.

이제 라브노프의 왕관은 이반의 차지가 되는 게 확실시되었다. 이틀 내내 지윤을 쥐어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반의 약점을 알아낸다면 앞으로 CIA와 협상이 필요할 때 히든카드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설계도 따위를 제시한다고 개새끼처럼 쪼르르 달려오지 않아도 되고.

‘그 독한 년이 입만 열었다면!’

해리슨은 분노를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고마워요.”

“큰 수술을 마친 분에게 이런 말씀 드리기가 죄송하지만 이제 돌아가 주셔야겠습니다. 형님의 장례식에도 참석해야 하지 않습니까?”

“추방하는 거예요?”

해리슨이 과장되게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그 정도 했으면 이만 끝낼 때도 됐지요. 당신네 일가의 일원들이 여기에서 저지른 일을 수습하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엊그제 벌어졌던 빌라 총격 사건을 가스 폭발이라는, 말도 안 되는 사건으로 탈바꿈하기가 더는 힘들다는 말이죠.”

“누군가 영상이라도 찍었어요? 하긴, 요즘에는 다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으니까. 당신네들 일하기가 점점 힘들어지겠네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돌아가시는 비행기 표는 저희가 예약해 놨습니다.”

이반이 픽 웃었다.

“성의는 고마운데. 있어요, 비행기.”

“…그러십니까.”

“어떤 새끼가 타고 있을지도 모르는 비행기에 그녀를 태울 수는 없잖아요?”

지윤과 같이 러시아로 가겠다는 의미였다. 웃기는군. 해리슨은 여유롭게 대답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에일린은 현재 체포되었습니다. 변호사를 수십 명 붙여 준다 해도 기소는 기정사실입니다. 재판이 끝날 때까지 출국도 금지되었지요. 죄송하지만 혼자 가셔야겠습니다.”

지윤이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는 걸 이반이 모를 리가 없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고통이 크고 피를 많이 흘려 상태가 안 좋기는 했지만, 앰뷸런스에 오르기 전까지 정신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었다.

그래서 수술이 끝나고 정신을 차리자마자 해리슨을 호출한 게 아니었던가. 혹시 잠이 들거나 몽롱해질까 봐 모르핀도 투여하지 않았다. 이반은 제법 날카로운 통증을 무시하며 미소를 유지했다.

“죄목이 뭔지 궁금하네요.”

“극비 정보를 빼돌렸습니다. 그리고 정부 요원을 협박했죠.”

“정부 요원이라면… 아, 그녀가 통화한 사람이 당신이었어요?”

이반은 기억하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의뭉을 떨었다.

“총에 맞은 뒤부터 잘 기억이 안 나서. 말해 봐요.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기밀이라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버켄필드 씨, 당신은 내 자지라도 빨아야 할 입장이라는 거, 다시 말해 줘요?”

다 아는 사실인데 애써 숨길 필요는 없겠지. 괜히 고집부렸다가 저 미친놈이 삐딱하게 나오면 답이 없었다.

게다가 지윤이 얼마나 음습하고 교활한 인간인지 알려 주는 계기로 활용할 수도 있고. 순식간에 계산을 마친 해리슨이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시다시피 당신이 저격을 당하자 당신의 목숨과 제시에 대한 정보를 바꾸자고 하더군요. 우리는 헬리콥터까지 동원해 당신을 병원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문제는 그때가 처음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 적이 또 있었어요?”

“당신이 안톤 씨의 무리들에게 잡혀갔을 때, 안톤 씨와 통화하고 싶다고 요구하면서 털어놓더군요. 제시의 유전자 검사 결과를 빼돌려 놨었다고. 협박을 해 온 건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감히 FBI 부국장을 협박해? 해리슨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 대신 최대한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진지하게 꾸며 냈다.

“에일린은 그런 여자입니다. 당신의 정보도 감쪽같이 빼돌려 숨겨 둘 수도 있는 여자이지요. 콴티코에서도 특수한 케이스였다는 건 아십니까? 그 여자가 받은 건 일반 요원 교육이 아니라 스파이 교육이었습니다. 그걸 단기간에, 유례없는 성적으로 통과한 자가 바로 에일린이죠. 그 여자가 털어놓기 전에는 뭘 숨겼는지 알아차릴 수도 없을 겁니다. 그런 여자와 만나고 싶습니까?”

이반이 해리슨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하, 그녀가 2년 전 사건의 차량 블랙박스 영상을 감쪽같이 숨긴 것처럼요? 당신도 참 곤란하겠네요. 살해 현장 영상이 유출되었으니.”

해리슨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기억이 안 난다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이반은 지윤과 해리슨이 통화할 때 멀쩡했을 것이다.

‘괴물 새끼!’

총알이 옆구리를 뚫고 지나갔는데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니. 보통 사람은 쇼크사를 일으키고도 남을 만한 고통을 겪으면서 남의 통화 내용을 엿듣는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해리슨은 속으로 욕설을 삼켰다.

“아무튼, 비밀 작전과 연관된 정보를 몰래 빼돌린 건 중범죄입니다. 하물며 요원이 그랬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죠. 요원의 침묵 서약은 글자 수 맞추려고 넣은 게 아니니까요. 최소 30년 형은 각오해야 할 겁니다.”

“곤란하네요. 기다리는 건 문제가 안 되는데, 교도소를 폭파하고 싶어질 것 같아서.”

“라브노프 씨의 마음은 알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벌써 확정된 사안입니다.”

“그거야 당신들 생각이고.”

거만하게 대답한 이반이 안드레이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안드레이가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이반에게 건넸다. 소형 USB. 신형 미사일 설계도가 틀림없었다. 해리슨의 눈빛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침이라도 흘리겠네. 그렇게 갖고 싶어요?”

이반이 USB를 달랑달랑 흔들며 비아냥거렸지만 해리슨은 반응하지 않았다. 이반은 보란 듯이 USB를 테이블의 가운데에 내려놓았다.

“이제 조건을 말해 볼까요?”

이반은 설계도를 내밀기만 했지 대가는 말하지 않았었다. 안톤이 죽어 버린 이상, 제시의 유전자 검사 결과는 필요 없었다. 그러나 앞으로 라브노프의 제왕이 될 예정이니만큼 그가 요구할 건 빤했다. 향후 몇 년 동안 일정 수량 이상의 무기 거래를 요구하겠지.

무기 거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한 건 성사될 때마다 발생하는 이득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공개적으로 성사된 적 없던 러시아의 무기 거래를 시작한다면, 게다가 거래 상대가 이반의 방산업체라면, 라브노프 일가는 러시아에 갇혀 있던 지금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원동력을 얻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말씀하시죠.”

“지윤 박의 완벽한 사면을 원해요. 그녀와 관련된 모든 기록을 지우세요.”

“…에일린의 사면이요?”

지윤의 사면과 미사일 설계도를 바꾸다니. 해리슨은 자신이 들은 얘기가 믿기지 않아 되물었다.

“정말 에일린의 사면을 원하시는 겁니까?”

“네.”

“…무기 거래를 원하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당신네 아니라도 살 사람 많아서.”

안 팔려서가 문제가 아니라 이득 문제 아니었나? 무기 거래에서 창출되는 이득을 고작 사람 한 명과 맞바꾸는 것은 너무나 큰 손실이다. 해리슨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파였다.

“우리에게 무기 거래권을 따내는 순간 당신의 일가가 얻는 이득은 한 나라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많을 겁니다. 그런데 그걸, 여자와 바꾸겠다는 말입니까?”

“녹음이라도 해 줘요?”

“부친… 그러니까 페트로 씨에게 허가는 받은 사항입니까?”

“내가 하는 모든 결정에 아버지의 허가는 필요 없어요. 이제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렇죠. 만약, 갑자기 노망이 들어서 아버지가 반대한다면? 이번에야말로 병원에 입원시키는 수밖에.”

“…예?”

‘요즘 치매 노인 요양 병원이 참 좋대요. 영원히 못 나올 수도 있다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반이 해리슨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요? 무슨 말이라도 들었어요?”

아는 티를 내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는다.

부친을 정신 병원에 가둘 계획이냐고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저들의 일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할 문제니까. 해리슨은 조금 전에 들었던 말을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 버렸다.

“아닙니다.”

마틸다의 목숨을 미사일 설계도와 주저 없이 바꾼 것처럼 이번에도 다를 건 없었다. 게다가 지윤을 죽이는 것도 아니고 기록을 지워 주는 것뿐 아니던가. 못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 찝찝한 기분은 뭘까. 이반의 미소가 불길하게 느껴져서일까.

그러나 USB는 반드시 손에 넣어야 했다. 2년 전에 안톤이 넘겨주었던 설계도는 핵심 기술이 빠진 쓰레기였다.

당시에는 설계도를 확인할 만한 물리학자가 없어 안톤을 엿 먹이기 위해 이반이 일부러 조작한 줄도 몰랐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새로이 투입된 물리학자들에게 설계도가 진짜임을 확인한 뒤, 조건을 이행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이반이 내민 조건은 진품 확인이 전제였으니까.

이번 협상을 어떻게 하냐에 따라 국장 자리가 왔다 갔다 했다.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할 수는 없지. 해리슨은 USB를 낚아챘다.

“진품으로 확인되면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그 USB, 비밀번호 걸어 놨는데.”

이반의 중얼거림을 들은 해리슨이 덜컥 굳었다.

“…라브노프 씨, 지금 정부를 상대로 장난하십니까?”

“나도 애인 따라 해 봤어요.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라브노프 씨!”

“그녀부터 먼저 풀어 줘요. 그녀가 이 병실에 도착하는 순간, 당신의 핸드폰으로 메시지가 갈 거예요.”

어차피 사면이 예정되어 있으니 구금 상태에서 벗어나게 하는 정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윤에게 협박당했을 때부터 본때를 보여 주겠다고 벼르고 있던 해리슨에게 이반의 제안이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우실까? 범죄자는 출국도 못 하는데.”

아, 당신은 빼고요. 얄밉게 뒷말을 붙이는 이반을 해리슨이 노려보았다.

“사면은 진품을 확인하고 나서입니다. 그 전까지 출국할 생각은 하지도 마십시오.”

“좋아요.”

해리슨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이반을 향해 고개를 끄덕거리자, 이반이 안드레이에게 눈짓을 보냈다.

안드레이가 잠시 밖으로 나가 부하들에게 지윤을 데려오라고 명령한 뒤 다시 돌아왔다. 이반은 15분을 의미하는 안드레이의 수신호를 보고 입을 열었다.

“만족스러운 협상으로 기억될 것 같네요. 돌아가도 좋아요, 버켄필드 씨.”

해리슨이 어금니를 비틀었다. 분명 엄청난 이득을 얻었는데도 진 기분이었다. 그가 돌연 삐딱하게 웃었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다시는 그쪽과 만날 일이 없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이 병원, 당신네 소굴과 가깝잖아요. 15분 걸린다니까 도착하기 전에 빨리해요.”

지윤과 마주치기 껄끄러운 건 해리슨도 마찬가지였다. 손목시계를 흘끔 본 그가 빠르게 말했다.

“당신의 형님은 처음부터 저격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제시의 행방을 알고 있는 소중한 존재를 저격하는 건 말이 안 되죠.”

잠시 말을 멈춘 해리슨이 손으로 턱을 짚었다.

“그렇다면 당신을 저격한 놈은 도대체 누굴까요?”

“글쎄요. 알렉세이가 보냈나?”

“약물 치료소에 강제 입원 중인 당신의 둘째 형 말입니까? 농담이시겠죠.”

“그럼 잘 모르겠네요. 적이 하도 많아서.”

“총알이 지나간 위치를 보니 모든 장기를 아슬아슬하게 비켜 갔더군요. 거의 거죽만 뚫은 셈이랄까? 물어보니까 상처가 하도 깔끔해서 수술도 봉합 수준이었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 정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까요?”

해리슨이 안드레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안드레이 보리스비치 그로모프 씨가 유명한 저격수 출신 아닙니까? 이거 참 공교로운 우연이군요.”

까만 선글라스로 가려진 안드레이의 눈빛은 조금도 변함없이 묵직했다. 침묵하는 그를 해리슨이 치켜세웠다.

“한때 3000미터 밖에 세워 둔 맥주 캔의 로고를 정확하게 명중시키는 그로모프 씨의 영상이 엄청난 화제였죠. 저도 그 영상을 몇 번이나 봤습니다.”

“실력을 높이 평가해 준 건 고맙습니다. 하지만 10년도 더 지난 일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안드레이의 정중하고 단호한 말투에 해리슨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10년은커녕 한 달만 연습을 안 해도 사격 실력은 금세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서 요원들이 분기마다 사격 시험을 보는 게 아니던가.

게다가 저격 같은 고난도의 기술은 조준경에서 눈을 떼자마자 명중률이 낮아진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실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내가 잘못 생각했나?’

해리슨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섰다. 병실 문을 여는 그의 등에 이반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아, 참. 인사를 못 했네요. 버켄필드 씨, 그녀를 배신해 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내가 아주 좋은 걸 얻었어요. 요즘 같아선 기분이 너무 좋아서 막 베풀고 싶지 뭐예요. 나중에 필요한 일 있으면 연락 한번 해요. 봐서, 도와주고 싶으면 도와줄 테니까.”

해리슨이 미간을 일그러뜨리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스르륵 닫히자마자 보디가드처럼 무게 잡고 서 있던 안드레이가 선글라스를 벗어 들면서 으쓱거렸다.

“들었지? 나 아직 녹슬지 않았다니까?”

“처음 저격했을 때, 윤이 다친 거 기억 안 나?”

“그게 내 잘못이냐? 에일린이 바닥에 기어서 그런 거잖아! 너를 구하려다 그런 거니까 엄밀히 말하면 네 잘못이지! 누구한테 책임을 돌려?”

“흐음….”

“그리고 마구잡이로 쏘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 달리는 너희 둘을 맞히지 않으면서, 동시에 맞히려는 듯 보이게 쏘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냐고!”

자신을 저격하라는 이반의 요구에 미친 듯이 펄쩍 뛰더니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이반은 목까지 불그스름해지는 안드레이에게 최고의 먹이를 흔들었다.

“MK-97.”

“…그건 왜.”

“총에는 관심 없었는데 한번 만들어 보려고.”

“어? 정말? 만날 미사일이나 만들더니 무슨 일이야? 나, 내가 제일 먼저 써 봐도 돼?”

“그러든지.”

이반은 어린애처럼 환호하는 안드레이에게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윤은 언제 도착할까.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병원 정문만 응시하던 이반이 입가를 부드럽게 올렸다.

병원 정문으로 하얀 람보르기니가 진입했다. 화려하고 도도한 자태를 뽐내며 차가 주차장으로 들어갈 때까지 눈으로 좇는 그에게 안드레이가 주저하며 물었다.

“그런데 말이야. 꼭 그렇게 해야만 했어? 처음 저격은 너를 맞히는 게 목적이 아니라 위험하진 않았지만, 수목림에서는… 조금만 빗나갔더라면 넌 지금 관 속에 처박혀 있어야 했을 거다.”

“그녀에게 준 거야. 나를 용서해 줄 기회를.”

“널 용서했는지 어떻게 알아? 얘기해 본 적도 없잖아.”

그녀가 용서를 하지 않았다면, 벌써 인터폴이 찾아왔겠지.

저격을 당했을 때, 용서했다는 말을 받아 낼 수도 있었고, 사랑한다는 고백까지 들을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기절한 척한 이유는 그녀에게 생각을 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고작 1년간 보호한 것뿐인 아이를 지켜 주려 했던 게 아니었나. 게다가 한번 결정을 내리면 절대 바꾸지 않았다.

이반은 그게 두려웠다. 그와의 관계를 끝내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어지간해서는 그녀가 생각을 바꿀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기에. 설령 자신이 내린 결정을 간절히 바꾸고 싶더라도 지윤은 절대 스스로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반이 지윤에게 기회를 주었던 것이다. 그를 용서할 기회를. 결정을 번복할 기회를. 그리고 사랑을 인정할 기회를.

‘내 목숨 정도는 되어야 공평하지.’

이반은 무성의하게 대답했다.

“그냥, 알아.”

“…그러니까 고작 용서받자고 목숨을 걸었다는 거냐?”

“응.”

“야, 이 미친놈아!”

안드레이의 신경질적인 고함 소리가 병실을 울림과 동시에 병실 문이 열렸다. 지윤이 무표정한 얼굴로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눈치를 보던 안드레이가 슬그머니 병실에서 나갔다. 윽! 지윤을 본 이반이 반사적으로 상체를 세우려다 말고 작게 신음했다. 바닥에 못 박힌 듯 서 있던 지윤이 이반의 모습을 보고는 빠르게 다가왔다.

“움직이지마! 많이 아파?”

“음… 참을 만해요.”

웬만해서는 아픈 줄도 모르는 이반이 눈살을 찌푸릴 정도면 얼마나 고통이 심한 걸까. 지윤이 어둡게 물든 얼굴을 숙였다.

“안톤 씨 얘기 들었어.”

“그랬어요?”

“…당신이 영상을 제보한 거야?”

안톤은 내내 이반이 자신을 공격했다고 주장했었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FBI에서 풀려나오는 길에 차 안에서 라디오를 듣고 나서야 그 말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안톤을 자살하게 만든 섹스 스캔들에 이반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요 며칠 동안 매체를 접하지 못하게 하던 이반의 행동을 떠올리면 의심은 더욱 짙어졌다.

“제시만 찾으면 되는 거 아니었어?”

“그러려고 했죠.”

“그런데, 왜 그랬어?”

“말했잖아요. 당신 몸에 다른 새끼 피가 묻으면 짜증 난다고.”

섹스 스캔들은 안톤을 움츠러들게 만들기 위해 이반이 가지고 있던 무기 중 하나였다. 실제로 페인트 공장에서만 해도 이반을 죽이려고 했었던 저들의 태도가 영상을 공개한 이후부터 사뭇 온순해졌다. 이반이 또 다른 약점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섣불리 움직이기가 어려워진 탓이다.

그뿐만 아니라 안톤이 이반과 지윤을 직접 제거하기 위해 미국으로 넘어오도록 만들기까지 했으니 기대 이상의 이득을 얻은 건 맞았다. 하지만 정작 이반은 개의치 않았다. 그에게는 그저 경고에 불과했으니까.

지윤을 페인트 공장에 불러들인 대가로 섹스 동영상을 뿌려 안톤의 정치생명을 끊었다. 안톤의 부하들이 그녀의 모텔 객실로 침입했을 때는 일부러 그가 2년 전에 CIA에 넘겼던 설계도의 완벽한 버전으로 FBI와 협상했다. 안톤의 자존심을 짓밟기 위해서.

지윤을 건드리면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뺏는다. 안톤에게 가장 중요한 건 가족도 돈도 아닌 정치생명과 자존심이라는 걸, 이반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치명적인 약점을 공개한 거야? 네 가족인데?”

“네.”

이반은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 그 일로 인해 결과적으로 안톤이 자살을 했음에도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뭐 이런 사이코패스 새끼가 있나, 싶은 거 알아요. 하지만 어떡해. 서로 물어뜯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집에서 자란걸. 나는 전 세계 사람이 증발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아요. 당신만 무사하다면.”

“…….”

“이런 내가 무서워요?”

지윤은 이반의 얼굴을 물끄러미 응시하다 티셔츠 속에 손을 넣었다. 브래지어 안에 숨겨 놓았던 USB를 꺼내자 이반이 눈썹을 슬쩍 들어 올렸다. 그녀가 테이블 위에 USB를 올려놓는 걸 지켜보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

“그걸로 협상하라니까. 왜 안 했어요?”

“…안 한다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가서 협상해요. 난 상관하지 말고.”

“싫어.”

“자꾸 이러면 당신이 날 선택했다고 오해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도망쳐요. 나 미친놈이라 평생 내 옆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묶어 놓을 수도 있어요.”

“…….”

“당신 입으로 끝났다고 했잖아! 나를 용서할 수 없다고 말했잖아요! 그런데 왜 이래? 왜 자꾸 희망을 주는 건데!”

이반이 창백하게 질린 미간을 찡그렸다. 고통을 참는 모습에 지윤이 황급히 그의 어깨를 잡았다.

“모르핀은 어떻게 된 거야? 아직도 안 맞았어?”

눈을 질끈 감고 있던 그가 한참 만에 숨을 기다랗게 내쉬었다.

“후우…. 그거 맞으면 졸려서.”

“그냥 자! 미련하게 참지 말고!”

“…자 버리면, 당신을 못 볼 수도 있잖아요.”

한몫 잡아서 이민 가랄 때는 언제고. 나약한 소리를 하면서도 그의 표정은 덤덤했다. 그래서 자신을 떠나지 말라고, 용서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보다 더 마음에 와닿는지도 모르겠다.

지윤이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다 테이블 위 놓인 USB를 다시 가져갔다.

“이거, 내가 가질게. 이제 나는 당신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그런데요?”

“그러니까.”

그녀가 이반의 환자복 소매를 잡았다.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입술을 질겅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날 놔주면 안 되는 거 아니야? 내가 이걸 어디에 팔아먹을지 모르잖아.”

이반의 눈이 확 커졌다. 회색빛 동공이 잔 떨림을 품고서 그녀를 직시했다.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예요?”

“알아.”

“그래도 괜찮아요? 정말 내가 당신을 놔주지 않아도?”

“그래, 절대로 놔주지 마.”

“아…!”

이반이 소매에 매달려 있는 지윤의 손을 다급하게 잡았다. 손등에 입을 맞추고 그녀의 얼굴을 당겨 이마를 맞댔다.

“나는 당신의 트라우마를 치료해 줄 수 없어요. 당신이 원하는 건, 정말 다 해 줄 수 있는데, 그것만은 못 해, 내가. 대신 호수나 바다 따위 안 보면서 살게 해 줄게요.”

“그럼 서핑은 어떻게 하려고.”

“서핑? 나 서핑 정말 싫어하는데. 해 본 적도 없어요.”

표정 하나 변함없이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늘어놓는 그의 얼굴을 지윤은 멍하니 쳐다보았다.

자신의 치명적인 약점을 줘 버리고, 하나밖에 없는 취미 생활까지 거침없이 버려 버리는 이 거짓말쟁이가 너무나 얄미웠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지윤의 목에서부터 점점 붉은 기가 올라왔다. 그녀가 돌연 고개를 획 돌리더니 시선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거, 나한테도 물어봐.”

“뭘요?”

“사랑하냐는 질문 말고, 네가 말한 거 있잖아.”

“…나 대신 죽어 줄 수 있냐는, 그 말이요?”

“응, 그거.”

“싫어요.”

“왜?”

“당신은 진짜 죽어 줄 것 같아서.”

이반이 생각도 하기 싫은 듯 짙은 눈썹을 엉망으로 찌푸렸다. 바보 같아. 지윤은 우는 듯 웃으며 그의 목을 끌어당겼다. 통증이 느껴지는지 그가 눈살을 작게 찡그리다가 재빠르게 혀를 내밀어 그녀의 입술을 날름 핥았다.

“배고파요.”

“수술했잖아. 오늘 저녁까지는 금식해야 돼.”

“음식 말고. 당신 입술이면 돼.”

이반이 지윤의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혀를 불쑥 밀어 넣었다. 급하게 시작되는 키스에 지윤이 그의 가슴을 밀었다가 서둘러 손을 거두었다. 혹시나 아프게 했을까 봐 이반의 안색을 살피는 시선이 조심스럽다.

이반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채 목으로 웃었다. ‘아, 당신, 너무 좋아.’ 그가 작게 속삭이고는 다시 입술을 겹쳤다. 그리고 소심하게 움직이는 지윤의 혀를 얽고 빨았다. 그동안 맛보지 못한 걸 모두 보상받겠다는 듯 기색이 사나웠다.

가슴을 덥석 움켜쥐는 이반의 손길에 지윤이 숨을 토해 냈다. 다짜고짜 젖꼭지를 아프도록 비틀던 그가 티셔츠를 위로 올려 버리고 젖가슴을 물었다.

흣! 저도 모르게 신음한 그녀가 제 입을 틀어막았다. ‘왜 막아요. 존나 꼴리는데.’ 이반이 손을 억지로 끌어 내리자 지윤이 그를 노려보았다.

“다 낫기 전엔 안 돼.”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예요?”

“수술 끝난 게 어제잖아. 며칠 참는다고 안 죽어.”

“난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데. 그럼 아래만 핥을게요.”

“꿈도 꾸지 마.”

“만지는 건?”

“퇴원할 때까지는 안 돼.”

“와, 너무하네.”

이반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들어 올렸다. 그러다 뾰족하게 내민 입술을 지윤의 입에 맞췄다. 춉, 춉, 가벼운 키스에 오히려 쑥스러워하던 지윤이 눈을 비볐다.

“눈이 충혈됐네. 졸려요?”

“응….”

“잠을 못 잤어요?”

“이틀 동안.”

“그 새끼들이 잠도 못 자게 한 거예요?”

“그게 아니라, 잠이 안 오더라.”

“이틀이나? 왜요?”

“…그냥.”

지윤이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했다. 그녀의 시선이 이반의 배를 돌돌 말고 있는 붕대에 잠시 머물렀다 서둘러 떨어졌다. 마치 걱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이반은 순간적인 깨달음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나 때문에 못 잤구나. 나 걱정하느라. 그 순간, 람보르기니를 발견했을 때부터 반응하기 시작하던 페니스에 급격히 피가 몰렸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내 집에서 자고 올래요? 앤디한테 데려다주라고 할게요.”

“그냥 여기서 잘래. 소파에서.”

“불편하잖아요.”

자고 일어났을 때, 네 얼굴을 봐야지 안심할 것 같아.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던 지윤이 말을 돌렸다.

“갔다 오는 게 더 불편해.”

“내 옆에서 자라고 하면 말 안 들을 거죠.”

“환자 침대에서 자라고? 말도 안 돼.”

그녀가 어깨를 늘어뜨린 채 소파에 누웠다. 정말 피곤했는지, 담요도 없이 누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반은 그녀의 얼굴을 한참 동안 응시하다 주렁주렁 달려 있는 주삿바늘을 빼냈다. 침대 밖으로 내려서자 환부가 뻐근하게 존재감을 알려 오는데도 그의 얼굴은 아무것도 못 느끼는 사람처럼 덤덤했다. 지윤 앞에서는 신음까지 흘리며 통증을 견디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이반은 맨발로 걸어가 지윤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틀이나 못 잔 데다가 마음이 편해진 탓인지 그녀는 무방비하게 잠들어 있었다.

예전에는 조금만 닿아도 뒤척이더니 지금은 기절한 듯 반응이 없었다. 이반은 지윤이 깊은 잠에 빠졌다는 걸 확인하고는 조심스레 안았다. 그녀를 안은 채 허리를 펴는 순간, 그제야 그가 눈썹을 들어 올렸다.

“으음….”

꽤 아픈데? 방금 터진 것 같기도 하고. 배에 구멍이 뚫리긴 한 모양이다. 이반은 통증을 무시하며 지윤을 병상에 눕혔다. 자신 또한 그녀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옆에 누워서 핸드폰을 들었다.

잠시 후, 안드레이가 들어왔다. 침대에 누워 있는 지윤을 보더니 이내 어떻게 된 일인지 짐작한 듯 혀를 내둘렀다.

“돌았냐? 어제 수술한 놈이 사람을 안아서 옮겨? 날 부르면 되잖아! 그러다 실밥이라도 터지면 어쩔래?”

“그녀를 딴 놈에게 맡기느니, 실밥 터지는 게 나아. 그리고 소리 죽여.”

“내가 딴 놈이야? 말도 못 하게 하려면 왜 불렀는데?”

이반이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는 지윤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넘겼다.

“주삿바늘이 빠졌어. 윤이 일어나기 전에 다시 찔러 놔.”

“…호출 벨은 폼으로 달려 있는 줄 아냐?”

“소리 나잖아. 윤이 예민해.”

“전혀 예민해 보이지 않는다만… 암튼 기다려.”

‘하여튼 미친개라서 그런지 사랑도 정상이 아니야.’ 중얼거리던 안드레이가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참, 그거 말인데.”

“뭐.”

“저번에 빌라 근처 풀숲에서 말했던 그거, 기억 안 나?”

“그런데.”

“네가 빨리 추진하라고 닦달해서 똘랴가 후보지 몇 개를 골라 놓긴 했는데…. 이대로 계속 진행하면 되는 거지?”

잠시 침묵하던 이반이 목소리를 낮췄다.

“진행해.”

이해가 안 되는 명령이었는지 안드레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병실 문을 열었다. 그러다 도저히 궁금해서 못 참겠다는 듯 몸을 돌려 그에게 물었다.

“대체 섬은 왜 사려는 거야? 너 그런 쪽에 전혀 관심 없었잖아.”

이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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