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12)

지윤이 차를 끌고 도착한 곳은 근처 슈퍼마켓이 아닌, 잭슨빌에서 60마일 정도 떨어진 레이크 시티라는 중소 도시였다.

말만 도시일 뿐 시골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번화가라 해도 슈퍼마켓과 철물점, 도서관, 펍 따위가 다였다.

여기서 5마일 정도 안으로 더 들어가야 주거지가 나왔다. 비슷비슷하게 생긴 이층집들이 공원을 중심으로 빙 둘러서 있는 중산층 마을이다.

지윤은 한적한 번화가를 한 바퀴 둘러보다가 ‘폴&제인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오랜 세월이 느껴지는 문을 당겨 열자, 삐거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머리에 헤어 롤러를 잔뜩 단 중년 여성이 시선을 흘끔 돌렸다.

“안녕하세요, 제인.”

“…오, 미쉘! 이게 얼마 만이니!”

“오랜만이에요. 잘 지내셨어요?”

“나야 항상 똑같지. 갑자기 이사를 가 버려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른단다. 마이클은 잘 있고?”

2년 전, 마틸다를 정착시켰던 곳이 바로 이 마을이었다. 해리슨은 마이클로, 지윤은 그의 딸 미쉘로 위장해서 마틸다의 옆집에서 살았다.

“예, 잘 계세요.”

마틸다를 죽인 대가로 부국장까지 올라섰으니 잘 있는 거겠지. 지윤은 조소를 숨기며 친근하게 웃었다. 지난 2년 동안 일어났던 동네 사건을 줄줄 늘어놓던 제인이 돌연 굵직한 허벅지를 내리쳤다.

“아, 내 정신 좀 봐! 그거 가지러 온 거지? 그 왜, 너 이사 갈 때 개인 보관함에 맡겨 놓은 물건 있잖니.”

은행이나 우체국이 먼 소도시에선 슈퍼마켓에서 개인 보관함을 운영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크기가 작아서 부피 큰 물건을 맡길 수는 없지만, 우편물이나 사진처럼 얇은 물건은 충분히 보관이 가능했다.

“맞아요. 그거 가지러 왔어요.”

“열쇠 없이는 안 되는 거 알지?”

“여기요.”

지윤은 목걸이를 풀어서 제인에게 통째로 건넸다. 헤드 부분에 아기자기한 비즈가 붙어 있어 펜던트처럼 보이긴 했지만, 사물함 열쇠가 틀림없었다. 열쇠를 살펴보던 제인이 탄성을 터트렸다.

“어머, 예쁘기도 하지. 보관함 열쇠가 맞구나. 저 방으로 들어가서 직접 가지고 나오렴.”

“예.”

지윤은 보관함이 자리한 곳으로 들어가 원하는 것을 찾았다. 차 마시고 가라는 제인에게 다음에 오겠다고 말한 뒤 슈퍼마켓 밖으로 나왔다. 바로 차에 올라타면서 전화를 걸었지만 이반이 전화를 받지 않았다.

30초가 지나기 전에 통화를 종료하고 다시 걸었다. 두 번째 통화마저도 음성 메시지로 넘어가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뭔가 잘못됐다.

이반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지윤은 입술을 자근자근 씹다 2년이나 지났음에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전화번호를 빠르게 눌렀다.

770-815-.

번호를 다 누르지도 않았는데 통화 기록이 떴다. PM 3:37. 통화 시간을 보니 어제 낮, 빌라에서 밥 먹을 때 이반과 통화했던 그 상대였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두 번의 신호음 만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 라브노프 씨, 어떻게 된 일입니까.

“선배가 왜 이 전화를 받아요?”

- …에일린?

해리슨의 당황한 목소리가 핸드폰을 타고 흘렀다. 그가 왜 이반과 통화를 한 건지, 둘이 무슨 사이인지,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당장 이반이 더 급했다. 지윤은 곧바로 용건을 꺼냈다.

“이반에게 무슨 일이 생겼어요?”

- 일리야 말이냐?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요즘 현장 안 뛰나 봐요. 연기력이 많이 줄었네요. 계속 미행했던 거 다 아니까 시치미 떼지 말아요.”

페인트 공장 사건이 일어나기 훨씬 전부터 FBI와 CIA는 이반을 감시했다. 어제 빌라에서 총격 사건이 벌어졌을 때, 경찰이 늑장 대응 했던 이유도 빤했다. 누군가 지켜보면서 경찰의 발목을 잡고 있었겠지.

“그쪽 특기 잘 봤어요.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멀찌감치 서서 구경 잘하시더라고요. 경찰까지 막아 놓고.”

지윤이 빌라에서 있었던 사건을 지목하며 비꼬자 해리슨이 발끈했다.

- 우리가 아니라 CIA 애들이 한 짓이야! 상부에서도 웬만하면 관여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상부 지시 아니면, CIA. 선배는 변명할 거리가 많아서 좋겠어요.”

- 나라고 좋아서 6개월간 집에도 못 들어가고 좆뺑이 치는 줄 알아? 우리도 비상 걸렸다고 말했었잖아! 오늘 아침에는 안톤이 일리야를….

핸드폰에서 해리슨의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했다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지윤은 핸들을 움켜잡았다.

“안톤? 안톤이 지금 여기에 와 있다는 말이에요? 어디에 있는데요? 이반을 어떻게 했어요?”

- …….

“선배!”

초조감을 못 이겨 지윤이 고함을 지르자 해리슨이 진득한 한숨을 내뿜었다.

- 오늘 아침, 안톤이 전세기를 통해 도착했다. 그리고 네가 그 집에서 나오고 정확히 45분 뒤, 안톤의 부하들이 일리야를 끌고 갔어. 네가 자리를 비운 건 미처 몰랐던 것 같아. 너를 한참 찾더라고.

“…이반이 납치당하는데, 그걸 그냥 보고만 있었다는 말이에요?”

- 그럼 미행 중이라는 걸 대놓고 알려 주라는 거냐? 미행 자체가 불법인 거 몰라?

“이반에게는 부하들이 있어요! 그들은요? 그들은 가만히 손 놓고 있었어요?”

- …CIA가 훼방을 놓은 것 같아. 걔들 입장에서는 약점을 잡고 있는 안톤이 후계자가 되는 게 유리하니까. 조종하기가 쉽잖아. 이런 말을 쉽게 해 주는 거 보면 알겠지만… 우린 CIA와는 달라. 안톤과 손잡은 건 걔들이지 우리가 아니라고. 우린 그냥 더 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지켜보는 것뿐이다.

CIA가 타국의 정치에 개입하는 건 그리 비밀도 아니었다. 그러나 레드 마피아의 후계 전쟁까지 관여하다니. 지윤이 이를 갈았다.

“안톤과 통화하고 싶어요.”

- 그걸 왜 나한테 말해?

“나한테 갚을 빚 있잖아요. 시간 없어요. 빨리 연결해 줘요.”

- 아무리 예전 일을 들먹여도 안 되는 건 안 돼.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이미 말했잖아. 우린 안톤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니까?

지윤은 충전 중인 태블릿을 내려다보았다. 2년 전 사건이 종결되기 전에 보관함에 숨겨 두었던 태블릿이었다.

‘이렇게 쓰려던 게 아니었는데.’

이반에게 주고, 이 모든 일을 끝내려고 했었는데. 질끈 감았다 다시 뜬 그녀의 눈에는 결연한 빛이 서려 있었다.

“제시의 유전자 검사 복사본, 내가 가지고 있어요.”

- …미쳤구나.

“나도 공개하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까 빨리 통화하게 해 줘요.”

- 지금 네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지윤은 핸들을 내리쳤다.

“내가 모를 것 같아? 신문사에 자료 보내기 전에 당장 연결해!”

- …이번 일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거다.

“그러는 선배는요. 대가를 받았어요? 아, 혹시 부국장 승진이 대가인가요? 그런 거라면 나도 받고 싶네요.”

- …5분만 기다려.

말도 없이 통화가 끊어졌다. 지윤은 핸드폰을 움켜쥐고 시계를 노려보았다. 정확히 5분 뒤, 핸드폰이 진동했다.


 

unknown


 

“네.”

- 나와 통화하길 원했다지?

중후한 음성과 고위층 특유의 세련된 발음이 핸드폰에서 흘러나왔다. 안톤 페트로비치 라브노프. 지윤이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당신이 원하는 걸 가지고 있습니다.”

- 글쎄, 내가 뭘 원한다고 생각하는데?

“제시.”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윤은 그가 집중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숨소리가 급격하게 낮아졌으니.

“더 말할까요? 이 핸드폰 도청되고 있을 수도 있는데요.”

- 원하는 게 뭐야.

“아시잖아요.”

- 아, 일리야를 풀어 달라는 거로군. 미친 내 동생 새끼를 말이야.

잠시 안톤이 말을 멈췄다. 다시 들려온 음성은 이제까지와는 다르게 점잖은 기색이 완벽히 사라져 있었다.

- 그런데 이미 늦었어. 그 개새끼가 나를 물었거든. 러시아에는 이런 말이 있지. 미친개는 때려죽여야 한다는. 난 그 말을 실천해 볼까 해.

“…제시의 정보는 필요 없습니까?”

- 필요 없어. 일리야를 제거하면 그만이니까. 아, 오해하지는 마. 먼저 시작한 건 그 새끼야. 나는 웬만하면 노망난 늙은이의 명령에 따라 주려고 했으니까. 뭐, 혹시 모르지. 내가 원하는 걸 그 새끼가 주면 고통 없이 죽여 줄지도. 아가씨가 도와주겠나?

안톤의 음성은 바위처럼 딱딱했다. 도저히 파고 들어갈 틈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이반을 죽이기로 결심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벌써 죽였을 수도.’

이반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맥이 탁 풀리고 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기 시작했다. 지윤은 떨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이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리면, 당신에게 좋지 못한 일이 생길 겁니다.”

- 큭, 재미있군. 그래, 좋지 못한 일이 뭔지 들어나 볼까?

“제시와 관련된 일입니다.”

- 말했잖아. 제시의 행방 따위는 관심 없다고. 겨우 그따위 것으로 나와 협상하려고 했었나? 나와 통화를 원한다고 해서 제법 재미있는 얘기를 해 줄 줄 알았는데, 이거 참 실망스러워.

“제시의 유전자 기록. 이것도 실망스러우십니까?”

- …….

그는 침묵했지만 그 속에 번져 있는 분노의 기색은 어렵지 않게 읽혔다. 지윤이 여유를 가장한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어떻게 할까요. 기자에게 제보할까요? 아니면 당신의 부친에게 바로 보내는 방법도 괜찮겠네요. 직접 선택하시죠.”

- …만나서 얘기하는 게 좋겠군.

지윤은 통화가 끊어진 핸드폰을 옆 좌석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한참 호흡을 다스리다 태블릿 전원을 켜서 실행시켰다. 잠시 후.

부아아앙!

캐딜락이 먼지를 일으키며 출발했다.


 

***


 

다시 차를 끌고 도착한 장소는 레이크 시티에서 6마일 정도 떨어진 수목림이었다. 지금 당장은 길쭉길쭉한 나무가 빼곡히 자라 있어 보이지 않지만, 차로 조금만 들어가면 그리 넓지 않은 호수가 나왔다. 거기가 바로 마틸다가 살해당한 장소였다.

벌써부터 물 냄새가 나는 것 같다. 지윤은 뻣뻣하게 굳어 버린 손을 탈탈 털었다. 아직 호수는 보지도 않았는데 몸이 자꾸만 말썽을 부렸다.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던 그 장소로 돌아온 탓이다.

누가 그랬던가. 범인은 반드시 살인 현장으로 돌아온다고.

지윤은 자신이 살인 공모자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안톤과 거래한 부패 요원으로 낙인찍히면서까지 변명 한번 하지 않았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진실을 알면서도 침묵한 죄는 살인죄와 같았다. 오히려 진실을 영원히 묻어 버리는 데 일조하였으니 질이 더 나쁘다고 봐야 했다.

입을 다문 죄. 그건 배지를 반납했음에도 내내 지윤을 괴롭혔다. 제시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아무리 자위를 해도 소용없었다. 트라우마는 물론이거니와 거의 매일같이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어쩌다 꿈을 꾸지 않은 날이 있긴 했지만, 고통이 덜한 건 아니었다. 제시와 마틸다에 대한 죄책감이 심장을 끊임없이 갉아 먹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최악의 장소에 제 발로 찾아오다니. 만날 장소를 정하라는 안톤의 말에 반사적으로 이곳을 떠올렸던 이유를 아직도 잘 모르겠다.

공터로 들어가자 작은 산장을 둘러싸고 있는 무장한 남자들이 보였다. 그 사이에 190cm는 거뜬히 넘어 보이는 금발의 남자가 한가롭게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누군가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네자 그가 몸을 돌렸다.

“아가씨가 윤인가?”

“지윤 박입니다. 라브노프 씨.”

“사진으로 몇 번 봐서 그런지 낯이 익어.”

그레이 톤의 고급스러운 슈트를 갖춰 입은 그는 대단히 정력적이고 자신만만해 보였다. 다만, 같은 부친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이반과 닮은 구석이 없었다.

머리칼이 검어서 그런지 이반은 어딘지 모르게 동양적인 느낌을 풍겼다. 나긋나긋한 표정이나 행동도 다소 마초처럼 느껴지곤 하는 외국 남성과는 달랐다.

하지만 안톤은 금발과 푸른 눈을 가진 전형적인 서양인이었다. 날렵한 콧날과 깎은 듯한 턱선이 왕족의 후예처럼 우아했다. 귀족으로 태어난 듯 사람을 향한 시선에 경멸이 깔려 있었다.

안톤이 지윤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코웃음을 흘렸다.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동양 여자와 놀아난 이반에 대한 비웃음이었다.

“일리야 같은 미친 새끼를 살리려고 하나 있는 목숨 줄을 바치다니. 영리한 줄 알았는데 머리가 좀 모자란 아가씨였어. 하긴, 제정신이라면 미친개와 붙어먹을 생각부터 하지 않았겠지만.”

이반을 들먹여 자극할 생각인가 본데, 지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녀가 입매를 도도히 비틀었다.

“쓸데없는 소리 하면서 시간 낭비 마시죠, 라브노프 씨. 지금 한창 바쁜 시기 아닙니까?”

상원 의원의 임기인 2년이 지났으니 재선을 준비하느라 바쁘지 않냐는 뜻이었다. 하지만 치부를 들킨 듯, 안톤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모자란 줄 알았더니 겁대가리를 상실한 아가씨였어. 끌고 와.”

명령을 받은 부하가 산장에서 이반을 데리고 나왔다. 손이 묶여 있고 입에 재갈이 물려 있지만 스스로 걸어 나오는 걸 보니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다.

누구라도 잡히기만 하면 찢어발길 것처럼 날을 세우던 이반이 그녀를 보고는 우뚝 멈췄다. 그도 지윤이 다쳤을까 봐 내내 가슴 졸였던 모양이다.

이반과 지윤의 시선이 마주쳤다. 지윤은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힘껏 참았다. 그리고 허리 뒤에 꽂아 두었던 태블릿을 꺼내 들었다.

“교환할까요?”

“거기에 있는 게 원본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자신 없으면 그만두시든가요.”

큭, 호기로운 태도를 비웃듯 안톤이 낮게 웃었다. 그가 품위 있게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연극을 하듯 손을 양쪽으로 벌렸다.

“자, 생각해 봐. 마틸다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아가씨뿐이야. 물론 해리슨도 있지만, 그 새끼는 제 손으로 마틸다를 죽였잖아. 죽어도 누설할 리 없지. 이게 무슨 말인지 알아? 아가씨만 없으면 진실은 영원히 묻힌다는 소리야.”

“그 정도 준비도 없이 왔을까 봐요.”

지윤이 태블릿을 실행시켰다. 열두 자리의 입력란이 화면에 나타났다.

“태블릿에 비밀번호를 걸어 뒀습니다. 한 시간 안에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자동으로 50명의 기자에게 메일이 갈 겁니다.”

“한 시간이라.”

“우리도 빠져나갈 시간은 있어야죠.”

“바보는 아니었군.”

묘한 표정으로 지윤을 응시하던 그가 픽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러다 거만하게 손짓하자 부하가 이반의 등을 총으로 밀며 그녀에게 걸어왔다. 지윤이 이반의 손목을 가리켰다.

“풀어 줘.”

부하가 뒤를 잠깐 돌아보더니 말없이 나이프를 꺼내 이반의 손목을 죄고 있는 케이블 타이를 끊었다. 지윤이 이반을 뒤로 끌어당기면서 부하의 손에 태블릿을 넘겨주었다. 그와 동시에 이반이 재갈을 스스로 내리면서 고함을 질렀다.

“안 돼!”

부하에게 태블릿을 전달받은 안톤이 환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태블릿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는 부하의 총을 빼앗아 쏴 버렸다. 탕, 탕, 탕, 탕! 지윤은 형태를 알 수도 없게 부서져 버린 태블릿을 멍하게 쳐다보았다.

“무슨 짓을….”

“이따위 것을 내밀면 내가 겁먹을 것 같았나? 이미 여론은 나에게 등을 돌렸다. 거기에 제시가 내 딸이라는 사실 하나 더해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어.”

여론? 안톤의 말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던 지윤이 미간을 접었다.

“페트로 씨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요.”

“아, 아버지. 그래,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부터 나를 탐탁지 않아 하셨지. 내가 그렇게도 원하던 방산업체도 결국엔 저 새끼한테 주시더군.”

턱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기던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래 사셨으니 이제 돌아가실 때도 됐지. 그렇게 좋아하시는 막내아들과 사이좋게 묻어 드릴 수밖에.”

안톤은 동생과 부친에 대한 살해 계획을 노래하듯 읊조렸다. 소름 끼칠 정도로 여상스러운 태도였다. 지윤은 뒷걸음질 치고 싶은 충동을 참았다.

“…그럼 왜 나와 만나자고 한 겁니까.”

“말했잖아. 미친개가 나를 물었다고. 저 새끼가 내 비밀을 폭로하는 바람에 내 정치 생명이 죽어 버렸거든. 나에게 가장 중요한 걸 죽였으니 나도 동생의 가장 중요한 걸 죽여야 계산이 맞지 않겠어?”

지윤은 혼란스러웠다. 비밀을 폭로했다니. 아까부터 안톤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이반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가만히 있기만 했다. 조곤조곤 설명하던 안톤이 부드러운 미소를 단숨에 거두었다.

“처리해.”

안톤의 부하가 소음기를 단 총을 손에 쥐고 다가왔다. 글록의 차가운 총신을 보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이반을 봐서 다행이라고.

이반과 손을 잡기 위해 손을 옆으로 내미는데 문득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자 내내 조용하던 이반이 입꼬리를 한껏 벌린 채 미소 짓고 있었다.

웃어?

“아, 난 마지막에 주절주절 떠드는 놈이 그렇게 좋더라. 자기가 멍청한 줄도 모르고 건방을 떠는 게 얼마나 웃긴지. 윤, 재미있지 않았어요?”

“…이반,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잠깐만 기다려 봐요.”

이반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을 터치하자 무려 한 시간 이상 통화 중인 화면이 떴다. 통화 상대는 ‘영감’. 그게 누군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아 지윤이 숨을 들이켰다.

“아버지, 이제 끊겠습니다.”

이반이 무뚝뚝하게 통화를 끊고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안톤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부하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이반은 통화 중도 아니었으며, 심지어 핸드폰조차 손에 들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통화를 연결해 놓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어쩐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태연하더라니…. 저 교활한 새끼는 부하들이 덮칠 걸 미리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여자도 미리 빼돌려 놨겠지.

안톤의 입매가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미 일은 벌어졌다. 페트로가 비밀을 알아 버렸으니 이제 후계는커녕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 빠졌다.

살 수 있는 길은 자신 외에 후계가 될 만한 존재를 없애 버리는 방법뿐이었다. 혈연에 집착하는 페트로의 성격상 자식이 안톤밖에 남지 않는다면 아무리 죽이고 싶더라도 그에게 후계를 물려줄 수밖에 없을 테니. 안톤이 사납게 일갈했다.

“죽여!”

그 순간, 바로 앞에 서 있던 안톤의 부하가 망치로 후려 맞은 것처럼 옆으로 픽 쓰러졌다. 뒤늦게, 그의 관자놀이에서 핏물을 뿜어내는 탄환 구멍이 눈에 들어왔다.

“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이반이 지윤을 밀었다. 그리고 바닥에 엎어진 그녀를 제 몸으로 꼼꼼히 덮었다.

“저격이다!”

“안톤 님을 보호해!”

부하들에게 둘러싸인 안톤이 빠르게 후퇴했다. 사람보다는 땅에 박히는 총알이 더 많았다. 운 좋게 명중했다 해도 팔이나 다리 정도를 맞힌 게 다였다. 가만히 있는데도 총알이 피해 갈 지경이었다.

치밀하게 계획된 저격이 아니라 아마추어가 마구잡이로 쏘는 것 같다. 안톤의 부하를 단번에 사살한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형편없는 사격 실력에 지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당신의 부하들이야?”

“설마요. 우리 애들은 이렇게 등신처럼 안 쏴요.”

“그럼 저건 누군데?”

“나도 모르죠. 아무튼 숲으로 들어가야 돼요. 목표는 저기에 있는 가장 큰 나무. 셋 세면 일어서서 뛰어요. 준비됐어요?”

“응.”

함께 셋을 센 이반과 지윤은 아름드리나무 숲 사이로 전력 질주 했다. 저격수가 그들을 발견했는지 총알이 이반과 지윤을 향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달려가는 방향으로 땅이 푹푹 파이고 흙이 튀었다. 마침내 저격이 어려운 나무 사이로 그들이 구르듯 숨어들고 나서야 비로소 총성이 그쳤다.

“하아, 하아, 하아, 안으로 더 들어가야 돼!”

지윤이 숨을 헐떡거리다 이반을 끌어당겼다. 이반이 희게 질린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는데 안톤의 부하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 같았다.

“후, 알았어요.”

그가 숨을 내쉬며 허리를 폈다. 두어 걸음 걸었을까. 이반이 말한 아름드리나무를 지나가는데 어디선가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앞서 걷던 지윤이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이반이 우두커니 멈춰 서 있었다. 그가 고개를 내리더니 옆구리를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

손바닥에 새빨간 핏물이 잔뜩 묻어났다. 하얗던 티셔츠가 순식간에 벌겋게 물들었다. 그가 고장 난 인형처럼 무너졌다.

“이반!”

지윤이 비명을 지르며 그를 끌어안았다. 피로 엉망진창이 된 이반의 티셔츠를 들어 올리자 손가락 굵기의 총알 자국이 보였다. 다행히 관통한 것 같지만 위치가 아슬아슬했다. 내장이 찢겼을지도 모르겠다.

지윤은 재빨리 티셔츠를 벗었다. 여러 번 접어 상처를 덮고 체중을 실어 압박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꺼내 번호를 차근차근 눌렀다.

- 또 왜!

“이반이 총에 맞았어요. 수목림 가장 큰 나무예요.”

-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고 했지!

“30분 안에 오지 않으면 제시가 안톤의 딸이라는 증거를 기자들에게 넘길 겁니다.”

- 이미 한번 사용한 카드는 소용없다는 것도 몰라? 넘기려면 넘겨.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날, 선배가 운전했던 차량 블랙박스 영상과 함께요.”

- …젠자앙!

빌어먹을! 좆같은! 씨발! 집기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연달아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지윤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내가 하는 말이 사실일까 고민하지 마요. 콴티코에서 내가 뭘 배운지, 선배는 알잖아요. 기본 경력이 10년은 되어야 지원할 수 있는 WP에 이제 갓 훈련생 신분에서 벗어난 햇병아리가 배치된 이유, 알고 있잖아요.”

- …….

“그냥 인터넷에 정보 올리고 잠적할까요? 마음먹고 숨기로 작정한 나를, 선배가 잡을 수 있겠어요?”

- …….

“25분 남았어요.”

-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널 연방 교도소에 처박아 버릴 테니까!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소리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지윤은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팔로 훔치고 양손으로 상처를 짓눌렀다.

“조금만 참아. 바로 병원으로 옮겨 줄게. 천천히 숨 쉬어.”

“…졸려요.”

“안 돼! 눈 감으면 죽여 버릴 거야. 절대 눈 감지 마!”

이반이 웃으려다가 격렬하게 기침을 터트렸다. 지윤은 그의 얼굴에 튄 피를 닦아 주었다.

다행히 핏속에 살점이 섞여 나온 것 같지는 않았다. 내장은 괜찮은 걸까. 제발, 제발. 지윤은 같은 단어만 반복하다가 입술을 깨물어 눈물을 참았다.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면 이반이 더 불안해할 테니까.

“입술… 물지 말아요.”

“입 다물고 숨 쉬는 데 집중해.”

“입술….”

“알았으니까 그만 말하라고 했잖아!”

지윤이 입술을 놓고 이마의 땀을 닦는 척 어깨에 눈을 비볐다. 땀이 많이 흘러서 다행이었다. 눈물까지 감춰 주니.

눈을 꼭 감아 눈물을 떨구고 상처를 누르고 있으려니 이반이 딱딱한 뭔가로 손을 톡톡 두드렸다. 새빨갛게 변한 USB였다.

“이게 뭐야?”

이반이 느리게 눈을 깜빡거리다 힘없이 웃었다. 벌어진 입 사이로 핏물이 새어 나왔다.

“내가… 이제까지 저지른 범죄. 알려지면 절대 못 빠져나갈 만큼… 후, 굵직한 것들로만 골라서 넣어 놨어요.”

“…이걸 왜 주는 건데?”

“그걸 걸고 FBI와 협상해요. 아마… 국빈 대우 해 줄 거예요. 돈 있는 대로 챙겨서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마지막 유언 같은 말이었다. 내내 침착함을 유지하던 지윤이 그제야 흔들리기 시작했다.

“미쳤어?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보고 지금 당신을 배신하라는 거야? 못 해! 안 해!”

“나는 당신을 배신했는데… 당신은 왜 못 해요.”

“입 닥쳐! 조용히 해! 앞으로 한마디라도 더 하면 죽여 버릴 거야!”

이반이 지윤의 입을 더듬더듬 만졌다. 핏자국이 번져 있는 입술을 가만히 올려다보다 조용히 말했다.

“영악하게 좀 살아요. 2년이나 만나지 않은 어린애를 지켜 준답시고… 쿨럭, 목숨을 걸거나, 배신한 애인도 받아 주지 말고. 당신을 위해… 살아.”

“야, 약한 소리 하지 마! 이 정도로는 안 죽어! 머리에 총을 맞고도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도 있는데 무슨 소리야! 이반! 이반? 아, 안 돼! 눈 감지 마! 제발 눈 감지 마!”

“…미안, 해요.”

“뭐가 미안하다는 거야! 이반? 내 말 들려? 이반….”

이반의 손이 끝내 툭 떨어졌다. 안 돼, 이럴 수는 없어. 이렇게 끝날 수는. 지윤의 비명 소리가 숲을 뒤흔들었다.

“이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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