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시간 내내 달려서 잭슨빌에 도착했을 때는 어둠이 물러갈 무렵이었다. 이반은 한마디 설명도 없이 가정집에 차를 세웠다. 잭슨빌을 경유할 예정이라는 걸 알아내자마자 미리 렌트를 해 둔 것 같았다.
지윤은 그가 열어 준 현관으로 들어가서 집 안을 살펴보았다. 내부는 말끔하게 청소되어 있었지만 누군가 실제로 사는 집인지 생활감이 느껴졌다.
예상을 증명하듯, 손바닥만 한 크기의 액자가 벽에 줄지어 걸려 있었다. 흑인 가족의 집인가 보다. 검은 고수머리를 여러 가닥으로 촘촘하게 땋은 여자아이가 해맑게 웃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철컥, 하며 현관문이 닫혔다. 이반이 마룻바닥에 가방을 던지듯 툭 내려놓았다. 그리고 지윤의 뒤로 가까이 다가갔다. 머스크 향과 섞인 발정의 냄새가 그에게서 풍겼다.
‘나도 그렇겠지.’
지윤은 뒤돌아서서 이반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그들은 입을 맞췄다. 딱, 하고 이가 부딪칠 정도로 거친 키스였다.
이반이 사납게 물고 빨아들이는 통에 지윤의 입술이 다시 또 터졌다. 핏물 섞인 침을 삼키며 그가 벽으로 지윤을 몰아세웠다.
티셔츠 속으로 이반의 손이 거침없이 침입해 그대로 젖가슴을 쥐어짜듯 움켜잡았다. 일부러 세게 잡았지만 지윤은 아픈 내색도 없이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욕구와 분노가 적절히 뒤섞인 시선에 이반의 페니스가 단단히 부풀었다.
젖가슴을 강하게 빨아들이던 그가 아래로 손을 내렸다. 지윤의 바지 버클을 풀고 안으로 손을 쑥 밀어 넣었다. 팬티도 없이 바로 촉촉이 젖어 있는 음부가 만져졌다. 이반이 픽, 들리도록 웃었다.
“아픈 거 좋아하나 봐. 젖꼭지 씹히는 게 좋아요?”
“입 다물어.”
“난 미친개라 주인 말만 듣거든. 그런데 당신은 내 주인이 아니잖아요. 목줄을 잡으라고 쥐여 줬는데도 스스로 놨잖아?”
이반이 지윤의 머리채를 움켜잡았다. 강압적인 음성이 귀를 달구었다.
“그러니까 명령하지 마.”
지윤의 날 선 표정을 감상하던 그가 입술을 핥았다. 이내 가느다랗게 좁힌 눈을 고양이처럼 휘었다.
“빨아서 세워 봐요. 당신은 흥분했을지 몰라도 난 아직 박고 싶은 정도는 아니라.”
“생리적인 현상도 몰라? 여자가 젖으면 다 흥분한 줄 아나 본데, 그거 정말 무식한 놈들이나 하는 소리야.”
자신보다 체구가 훨씬 큰 사내에게 머리채를 잡혔음에도 지윤에게선 겁먹거나 주눅 든 내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가 입꼬리를 비죽이 올리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다르지. 흥분이 바로 나타나거든. 이렇게.”
지윤이 그의 손목을 잡고 한 바퀴 돌았다. 팔을 뒤로 꺾은 뒤, 범죄자를 제압하듯 이반의 등을 벽에 밀어붙였다. 그리고 손을 앞으로 내밀어 바짝 서 있는 페니스를 강하게 움켜잡았다.
“읏!”
“아아, 들켰네. 맞아요. 나 발정 났어요. 당신 보지에 박고 싶어 눈 돌아갈 지경이야. 그런데 당신도 어쩔 수 없이 일어난 현상은 아닌 것 같은데?”
이어서 그가 은밀하게 속삭였다.
“눈이 젖었거든. 존나 빨고 싶게.”
일부러 붕대 위를 아프게 움켜잡았음에도 이반은 앓는 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붕대 위로 피가 사르르 올라오는데도 그는 흥분한 짐승처럼 목으로 웃었다. 그가 보란 듯이 입 밖으로 새빨간 혀를 내밀어 음탕하게 움직였다. 그녀의 어딘가를 핥는 것처럼.
지윤이 손을 풀면서 팔로 이반의 목을 감았다. 훌쩍 뛰어 그의 허리를 허벅지로 조이며 매달리자 이반이 그녀의 엉덩이를 손으로 받쳤다. 엉덩이 사이를 비비는 손이 성급했다.
한데 엉킨 그들의 몸이 휘청거렸다. 지윤의 등이 벽에 부딪혔다. 그 바람에 아기자기하게 걸려 있던 액자가 바닥으로 툭 추락했다.
이반이 그녀를 벽에 붙여서 세워 둔 콘솔에 앉혔다. 그 위에 올라가 있던 스탠드와 장식품들이 지윤의 엉덩이에 밀려 우르르 밀려났다. 와장창, 뭔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지만 그들의 엉킨 입술을 떨어지지 않았다.
이반이 지윤의 티셔츠를 단번에 벗겨 버렸다. 브래지어를 거의 잡아 뜯듯이 풀고 그녀의 바지를 우악스럽게 끌어 내렸다. 지윤이 허벅지로 그의 허리를 조여 대는 탓에 바지가 엉덩이쯤에 걸쳤다. 그제야 이반이 지윤에게서 입술을 떼어 냈다. 엉망으로 젖은 지윤의 입술을 질척하게 핥고 바로 무릎을 꿇었다.
“흐읍….”
양쪽으로 벌어진 지윤의 다리 사이에 이반이 코를 박았다. 가슴이 들썩이도록 냄새를 들이켜고 키득거렸다.
“여기에서 좆물 냄새 나는 거 알아요? 미치도록 야해. 바지 벗어요.”
지윤이 바지를 무릎까지 내리자 이반이 한 손으로 잡아당겼다. 바지를 벗느라 다물어진 무릎을 양쪽으로 활짝 벌리고 여린 음모에 가려진 음부를 뚫어지게 감상했다.
“참 희한해요. 당신 거는 왜 싫지 않을까? 오히려 군침이 돌아요. 먹고 싶어서.”
이반이 젖은 살을 손가락으로 벌렸다. 흥건히 젖은 그곳은 꿀이라도 뿌린 듯 온통 미끈미끈했다. 그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손톱만 한 구멍을 엄지로 눌렀다.
침입을 거부하던 구멍이 쯔꺽, 하고 벌어지며 엄지를 삼켰다. 다른 사람보다 유난히 길쭉한 그의 손가락이 내벽 안에서 까닥거렸다.
“손가락이나 좆에는 왜 미각이 없을까요. 있었다면 보지의 맛을 제대로 느껴 볼 수 있을 텐데.”
뽁, 하고 빠져나온 엄지는 뽀얀 애액으로 젖어 있었다. 이반이 그 손가락을 입에 넣고 빨아 먹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까 그건 안 되겠네. 하루 종일 당신 구멍에 뭔가를 끼워 넣지 않고선 못 배길 것 같아서.”
그가 혀를 널찍하게 벌려 음부를 핥아 올렸다. 지윤의 허리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녀가 이반의 어깨에 한쪽 다리를 걸쳐 끌어당겼다.
이반의 입술이 음부에 달라붙었다. 입술 전체로 음부를 문지르다가 혀끝으로 애액을 흘리는 구멍부터 클리토리스를 길게 그었다.
도톰하게 도드라진 그것을 날름거리며 놀리다 입술을 갖다 붙이고 강하게 빨아들였다. 입 안으로 불쑥 들어온 작은 살점을 이로 자근자근 짓이기자 지윤이 그의 머리칼을 움켜잡았다.
“하읏! 아파! 자극이 너무 세…. 흐으읏.”
“구멍에서 물이 질질 새는데? 이거 봐요. 당신 아픈 거 좋아하는 거 맞잖아.”
“천박한 소리 그만해.”
“그만 좀 하라고… 흐윽!”
꼿꼿하게 선 혀가 구멍 안에 틀어박혔다. 안에서 뱀처럼 꾸물거리는 혓바닥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지윤이 엉덩이를 들고 허벅지로 이반의 얼굴을 조였다. 그의 입술에 클리토리스를 부대끼자 다리 사이에서 이반의 난폭한 목울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다 알았다는 듯, 뜨겁게 데워진 혀로 클리토리스를 문질렀다. 살짝살짝 씹다가 내부에 고여 있는 애액까지 모조리 뽑아내려는 듯 흡입했다.
“아! 아! 흐으으, 그만, 그만!”
지윤의 등골이 유연하게 휘어졌다. 바짝 당겨진 엉덩이에 단단히 힘이 들어갔다. 잘록한 허리를 앞으로 내민 채 그녀가 이반의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경련했다.
이반은 움찔거리는 그녀의 허벅지를 틀어잡고 흘러넘치는 애액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의 묵직한 목젖이 위아래로 울렁거렸다. 파르르 떨리는 살점을 그가 입술로 헤집었다. 발씬거리는 구멍을 후비고 클리토리스를 이로 긁었다.
지윤이 절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다시 몸을 굳혔다. 콘솔 모서리를 잡고 머리를 뒤로 한껏 젖혔다.
“아, 하윽! 흑, 흣… 흐으….”
이반이 구멍에 손가락을 끝까지 넣고 내벽을 긁었다. 손에 애액을 잔뜩 묻혀 허공을 향해 일어선 젖꼭지와 잇자국이 새겨진 젖꽃판에 치덕치덕 처발랐다. 날씬한 허벅지와 음부의 경계에 입을 대고 힘껏 빨아들이자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이를 물며 통증을 버티던 지윤이 이반의 머리를 밀어내고 바닥에 내려섰다. 동시에 그의 몸을 콘솔로 밀친 뒤 그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아서 도전적으로 올려다보았다. 이반이 제 입술에 번진 애액으로 타는 속을 적셨다. 피부가 따끔따끔할 정도로 강렬한 눈빛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나도 적셔 주려고요?”
지윤이 이반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브리프와 바지를 한꺼번에 끌어 내리자 딱딱하게 곤두선 페니스가 튕겨져 나와 볼을 때렸다. 한 손에 다 잡히지도 않는 그걸 말아 잡고 두어 번 훑자, 선단에서 쿠퍼액이 길게 늘어졌다.
“충분히 젖은 것 같은데?”
“아아, 난 파블로프의 개라서. 당신 보지 냄새를 맡을 때부터 칠칠치 못하게 새더라고요. 구멍 좀 막아 줄래요?”
지윤이 대답하기도 전에 이반이 그녀의 턱 아래를 잡아 위로 들어 올렸다.
“혀 내밀어요.”
지윤이 입을 천천히 벌렸다. 반쯤 빠져나온 혀에 이반이 직접 페니스를 갖다 대고 문질렀다. 슬쩍슬쩍 비비는 게 아닌 선단이 뭉개지도록 짓누르는 통에 지윤이 얼굴이 통째로 끄덕거렸다.
그녀가 그의 허벅지를 잡으며 버텼다. 잔뜩 찌푸려진 미간에 눈을 고정하며 이반이 더운 숨을 토해 냈다. 다음 순간, 페니스가 혀를 타고 입 안을 가득 채웠다.
“큭!”
귀두가 단번에 목젖까지 치고 들어왔다. 지윤은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입을 떼지 않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새파란 시선도 그대로였다.
그 눈빛. 씨발, 존나 흥분되네요. 이반이 기꺼운 듯 웃었다. 앞뒤로 얕게 흔들던 허리를 크게 빼냈다가 빠르게 튕겼다. 지윤의 턱이 페니스의 부피를 감당 못 하고 동그랗게 부풀었다.
구역질을 참느라 지윤의 입 안이 반사적으로 좁아졌다. 이가 닿았는데도 페니스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도리어 자극으로 받아들인 탓에 사정 직전처럼 딱딱해졌다.
이반은 일부러 그녀의 뭉툭한 어금니 위에 페니스를 비볐다. 홀쭉했던 볼이 불룩불룩 부풀어졌다 꺼지는 모습이, 그녀가 페니스를 먹어 치우는 것 같아 식욕을 돋웠다.
“맛있어요?”
이반이 그녀의 얼굴을 양손으로 고정하고 허리를 흔들었다. 그녀의 턱 아래로 엉겨 붙은 침이 지저분하게 흐르는 모습마저 미치도록 자극적이었다.
그가 사정 직전인 페니스를 빼내고 지윤을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중심을 잡기도 전에 벽에 밀친 뒤 한쪽 허벅지를 들어 올렸다. 나무토막 같은 페니스를 음부에 가져다 대고 단숨에 밀어 넣자, 그녀가 목이라도 졸린 듯 입을 크게 벌렸다. 허공을 향한 검은 동공에 초점이 사라졌다.
“하아앗!”
끈기가 거의 사라진 애액이 지탱하고 있던 한쪽 다리를 타고 줄줄이 흘러내렸다. 이반이 노골적으로 비웃었다.
“넣자마자 싼 거예요?”
그러고선 페니스를 삼킨 음부를 더듬었다. 뿌연 물을 손에 묻혀서 그녀의 입 주변에 엉망으로 펴 발랐다. 그걸 다시 샅샅이 핥은 이반의 혀가 그녀의 입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맛있죠.”
시큼한 맛이 쾌감에 점령된 지윤의 정신을 일깨웠다. 뻣뻣하게 얼어 있던 그녀가 이반의 목에 손을 두르며 그의 혀를 할짝거렸다. 드디어 돌아 버린 건지 그의 말대로 맛있게 느껴졌다.
이반이 지윤에게 혀를 빨리며 허리를 짓쳐 올렸다. 그녀를 벽에 가두고 납작하게 눌렀다. 채 벗지 못해 무릎 아래쯤 걸려 있던 바지가 성가셨는지 그가 쯧, 하고 혀를 찼다. 한쪽 발을 들어 바지를 벗고 아무렇게나 밀어 버렸다. 비로소 자유로워진 그가 다시 허리를 놀렸다.
“으읏! 읏! 으응….”
“하….”
까치발로 지탱하고 있던 지윤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황소처럼 때려 박는 이반의 힘에 못 이겨 결국 풀썩 꺾였다.
지윤이 벽을 타고 주르륵 무너지자 이반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발목을 잡고 죽 끌어당겨 탱탱한 엉덩이를 허벅지 위에 올리자 하체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배꼽을 향해 일어선 페니스를 잡아 지윤의 밑에 조준한 뒤 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아! 그녀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퍼덕거렸다. 가느다란 허리가 뒤틀리고 내벽이 페니스를 쥐어짰다.
아래가 터질 것 같은 압박감에 이반이 눈을 질끈 감았다. 크게 허리를 돌려 비좁은 내부를 억지로 넓혔지만, 곧 오므라들어 표피에 달라붙었다.
“씨발!”
이반이 그녀의 허벅지를 억세게 잡아당기며 허리를 흔들었다. 뭉쳐진 불알이 지윤의 엉덩이를 후려칠 정도로 황급한 움직임이었다.
벽과 이반 사이에서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지윤이 허리를 높게 쳐들었다. 결합부에서 거품과 함께 비어져 나온 탁액이 그녀의 엉덩이 사이를 타고 물처럼 떨어졌다.
이반이 더러워진 마룻바닥을 무릎으로 짓이기며 그녀를 밀어붙였다. 불알까지 집어넣을 듯, 허리를 난폭하게 흔들다 급히 숨을 들이켜며 정액을 쏘았다. 사정을 하는 순간에도 추삽질을 멈추지 않았다. 자궁 입구를 데우는 열기를 느끼며 지윤이 애처롭게 흐느꼈다.
“하으흑!”
이반의 이마에서 시작된 땀방울이 날카로운 코끝을 타고 아직도 경련하는 지윤의 아랫배로 굴러떨어졌다. 그가 이마에 젖은 머리카락을 붙인 채, 여전히 단단하게 여물어 있는 페니스로 내부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지윤은 숨 몰아쉬기도 힘든데, 그는 지친 기색조차 없었다.
“…죽을 것 같아.”
“그대로 누워 있어요.”
“비켜 봐. 등이 아파.”
“…돌아봐요.”
이반은 눈을 찌푸렸다. 그녀의 등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마룻바닥과 벽에 문질러지면서 가벼운 열상을 입은 것 같았다. 쯧, 입 안으로 혀를 찬 그가 일어서서 욕실로 향했다.
지윤은 일어날 힘도 없어 마룻바닥에 누운 채 한숨을 쉬었다. 엉망으로 변한 집안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섹스가 아니라 격투를 한 기분이다. 온몸, 여기저기가 쑤셨다. 내일 아침에는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특히 이반이 물고 빤 젖꼭지와 아래가 허물이 벗겨진 듯 쓰라렸다.
이반이 물에 적셔 온 수건으로 그녀의 몸을 닦기 시작했다. 잡아먹을 것처럼 섹스할 때는 언제고 손길이 조심스럽다. 손가락 하나하나 닦을 때는 정성마저도 느껴졌다. 그의 손길을 느끼던 지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시 말이야.”
“예.”
“미국에 없어.”
“알아요.”
그가 지윤의 발을 닦으며 태연히 대답했다. 놀란 기색은커녕, 상관도 없는 타인의 얘기를 들은 것처럼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지윤이 눈을 크게 떴다.
“…알고 있었어?”
“안톤은 발이 굉장히 넓어요. FBI나 CIA와도 사이가 좋죠.”
‘서로 빨아 주는 사이랄까?’ 이반이 덧붙이며 비아냥거렸다.
“만약 제시가 미국에 있었다면 안톤이 못 찾았을 리가 없어요. 당연히 다른 나라에 있겠죠.”
“그런데… 왜 모르는 척했어?”
“당신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지금 일부러 제시한테 가는 척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나를 따돌리지 않았던 이유도 안톤을 유인하기 위해서잖아요. 나와 함께 있어야 그 새끼가 믿을 테니까. 정말 제시를 위한다면 쫓아가서 보호해 주는 게 아니라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죠.”
새끼발가락까지 꼼꼼하게 닦은 이반이 그제야 지윤과 눈을 맞췄다.
“근데 왜 그렇게 그 아이를 지켜 주려는 거예요?”
지윤은 대꾸 없이 눈을 감았다. 팔을 눈 위에 얹자, 이반이 그녀를 안아 들어 소파에 눕혔다. 곧 그녀와 소파 사이에 끼어들어 빈틈없이 끌어안는 그의 손길을 지윤이 피했다.
“방에서 자.”
“…할 거 다 했다 이거예요?”
“응. 볼일 끝났어.”
“와, 남창 취급 당하는 기분이 어떤지 알려 줄까요?”
“…….”
그가 머뭇거림 없이 일어섰다. 딸깍, 하며 조명이 꺼지고 방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지윤의 눈꺼풀이 슬며시 올라갔다가 다시 닫혔다.
어둠.
호수 바닥에 처박힌 것 같은 진한 어둠이 눈앞에 서서히 펼쳐졌다.
***
“위험해!”
운전하던 해리슨이 뭔가를 피하려는 듯 핸들을 급격하게 꺾었다. 끼이이익! 귀청을 찢을 것 같은 굉음과 함께 차가 붕 떴다. 그리고 곧장 호수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쿵!
몸이 사정없이 뒤흔들렸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얼음장 같은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제시! 제시를 먼저 구해 줘! 난 괜찮으니까 제시 먼저…!”
“에일린! 네가 제시를 데리고 탈출해! 난 마틸다와 나갈게!”
마틸다와 해리슨의 고함 소리가 연달아 터져 나왔다. 나는 베이비 시트의 안전벨트를 풀고 제시를 안았다. 금세 물이 목까지 차올랐다.
윈도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창문이 열리지 않았다. 지체 없이 발목에 감춰 둔 피스톨을 꺼내 발사했다. 거미줄처럼 금 간 창문을 발로 차서 밀어내고 제시와 함께 빠져나왔다.
제시에게 인공호흡을 해서 되살리고 나서야 진즉 돌아왔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해리슨과 마틸다.
나는 다시 차갑고 검푸른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흙이 뿌옇게 일어나 시야 확보가 어려웠지만 아직 꺼지지 않은 헤드라이트만 보고 무작정 잠수했다.
수심이 깊지 않은 호수라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 밑바닥에 앞머리를 처박고 있는 왜건이 보였다. 그리고….
호흡기를 착용한 해리슨이 마틸다를 운전석에 앉히고 있는 모습까지도.
마틸다는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붉은 머리카락이 살아 있는 것처럼 위로 솟아 하늘거렸다. 창백한 얼굴, 물속에서 둥둥 떠 있는 손. 마치 마네킹 같아 현실감이 없었다.
멍하니 멈춰 그 광경을 보고만 있는 내 목덜미를 해리슨이 낚아채서는 물 밖으로 헤엄쳤다. 나는 넋이 나간 상태로 그에게 끌려 나왔다.
“컥! 하아, 하아, 하아!”
무릎을 꿇고 미친 듯이 숨을 쉬고 있는데, 그제야 정신이 돌아왔다. 내가 살인 현장을 목격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머릿속을 지나갔다. 나는 피스톨을 꺼내 해리슨에게 겨눴다.
“해리슨 버켄필드, 당신을 특수 살인 혐의로 체포한다.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진술한 내용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으며,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다.”
“에일린.”
“닥쳐요, 선배.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발포하겠습니다. 범행 현장에서 잡힌 범인이 FBI라면 고위험군에 속하죠. 사살해도 문제 될 건 없습니다.”
나는 피스톨의 해머를 뒤로 젖혔다. 장전 소리에 해리슨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가 손을 들면서 황급히 말했다.
“상부에서 내려온 지시야!”
“개소리 작작 하시죠.”
“안톤이 CIA 쪽에 협상을 걸었어. 마틸다와 미사일 설계도를 교환하자고. 너도 알잖아. 마틸다가 가진 정보는 우리가 원한 수준이 아니었다는 거. 위에서 실망을 많이 했는데 안톤이 먹음직스러운 먹이를 내민 거지. 마피아의 정부와 신무기 설계도. 누구라도 후자를 택하지 않겠냐?”
“선배, 미쳤습니까? 백번 양보해 선배 말이 맞다고 칩시다. 하지만 중요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은 부친의 정부 따위를 안톤이 왜 제거하려 든다는 겁니까?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죠!”
해리슨이 입을 다물었다. 나는 뻔뻔하게 변명을 늘어놓다가 침묵하는 그를 증오스럽게 노려보았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존경했는데. 당신을 아버지처럼 따랐는데!’
나는 뻣뻣하게 굳은 턱을 억지로 움직였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눈을 억지로 부릅떴다.
“법정에서 그렇게 말씀해 보시죠.”
“난 기소되지 않을 거야. 처음부터 이 차에 타지 않은 걸로 조사될 테니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제가 직접 증언할 생각이거든요. 천천히 걸어가 제시를 안으세요. 마틸다에 대한 얘기는 입도 뻥긋하지 마시고요. 허튼짓했다가는 법정에 서지도 못하게 될 겁니다.”
총을 까닥거려 해리슨에게 움직이라는 신호를 주었다. 그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제시가 안톤의 딸이다.”
“…뭐라고요?”
“유전자 검사 결과 안톤과 일치했어. 이 사실이 페트로의 귀에 들어가면 안톤은 끝장이야. 정치적으로도 타격이 클 뿐만 아니라, 제 여자와 붙어먹은 아들을 페트로가 살려 둘 리 없으니까. 마틸다가 망명을 신청한 이유도 페트로에게 살해당할까 봐 두려워서였어.”
부친의 정부와 바람을 피우다가 아이까지 낳다니. 삼류 소설만도 못한 이야기가 해리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헛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차에 타고 있지 않았고, 운전은 마틸다가 했다. 그녀가 너무 조르는 탓에 너는 허락할 수밖에 없었어.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호수로 차를 몰아 자살을 시도한 거야. 너는 갈등하다가 제시를 먼저 구출했어. 마틸다는 수영을 잘하니까 충분히 빠져나올 수 있을 거라고 예상했지. 하지만 불행하게도 예상은 빗나갔다. 마틸다는 안전벨트를 풀지 못했어.”
“…제시는 용케 살려 두네요.”
“앞날이 창창한 제시까지 죽일 수는 없다고 내가 반대했어. 너만 잠자코 있으면 제시에게는 아무런 사고도 생기지 않을 거야.”
반대로, 떠들고 다닌다면 곧 제시에게도 사고가 일어나겠지. 오늘과 비슷한 사고가. 제시가 살아남은 이유는 어린아이이기 때문이 아니다. 나를 협박하기 위해서일 뿐.
입술을 짓이기는 나를 두고 해리슨이 돌아섰다. 나는 총구를 다시 겨누었다.
“해리슨 버켄필드! 멈추십시오! 발포하겠습니다!”
“…….”
“선배!”
해리슨은 그대로 천천히 걸어갔다. 몇 번이나 총을 고쳐 잡았지만 발포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망연자실하게 총을 늘어뜨리고 악다구니를 질렀다.
“법을 지킨다는 사람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어요! 어떻게!”
“사람 사는 세상이야.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어. 적당히 타협할 줄 알아야 이 생활도 오래 할 수 있을 거다.”
해리슨이 호숫가를 벗어나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 어, 언니?”
내 고함 소리를 들었는지 제시가 멀찍이서 주춤주춤 걸어왔다. 이제 겨우 네 살이라 상황까지는 이해하지 못하나 분위기는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아이의 시선이 엄마를 찾아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나는 아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시가 내 목을 끌어안더니 파랗게 질려 벌벌 떨리는 입술로 힘겹게 물었다.
“어, 어, 어, 엄마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변해서 그 어떤 대답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대답 없이 아이를 힘껏 끌어안았다.
질끈 감은 눈에 붉은 산호초 같은 머리카락이 아른거렸다.
***
지이이잉, 지이이잉.
“……!”
지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다행히도 비명은 지르지 않았지만 온몸이 식은땀으로 범벅이었다.
악몽의 잔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침착하게 호흡을 다듬었다. 그리고 베개를 들추어 부르르 떨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AM 7:30. 슬슬 출발할 때다.
이반이 샤워를 하고 있는지 조그맣게 물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조용히 일어났다. 이반의 가방에서 옷을 꺼내 갈아입고 아무렇게나 들어 있던 글록 17을 바지 뒤에 꽂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피스톨을 발목에 숨기고 일어섰다.
“어디 가요?”
“……!”
소스라치게 놀라 뒤를 돌아보니 이반이 바지만 입은 상태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떨어져 그의 가슴을 타고 흘렀다.
“…슈퍼마켓.”
“살 게 있어서.”
“무장한 채로?”
“아… 버릇이라.”
지윤은 글록 17을 꺼내 태연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반이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같이 가요.”
“혼자 갔다 올게.”
“안 된다는 건 알죠?”
“귀찮게 굴지 좀 마. 슈퍼마켓도 허락받고 가야 하니?”
“윤.”
위협적으로 낮아진 그의 목소리에 지윤은 아무렇지 않은 듯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여기서 찢어지면 안톤은 내가 너에게 정보를 알려 줬다고 생각할걸. 내 안전을 위해서라도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어.”
“그럼 내 차 끌고 가요.”
차에 위치 추적기를 달아 놓은 건가. 지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신 애들 붙이지 마. 갔다 오는 데 두 시간 정도 걸릴 거야.”
“대체 뭘 사러 가는 건데?”
“…돌아와서 알려 줄게.”
“내가 어제 주었던 앤디의 핸드폰 가지고 있죠? 0번을 누르면 나와 연결될 거예요. 도착하면 바로 전화해요. 시간이 됐는데도 전화가 오지 않으면… 알죠?”
이반이 생긋 웃으며 말을 생략했다. 나른하게 올라간 입술과 싸늘한 회색 눈에서 포식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지윤이 도망간다 해도 언제든지 찾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녹아 있었다.
“알았어.”
지윤이 대답하자마자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훌쩍 던졌다. 그녀는 그걸 단번에 낚아채 집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