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2)

무수한 신고가 들어왔을 텐데도 이반의 빌라 주변에 경찰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값비싼 저택이 즐비한 곳인데도. 이반의 말대로 안톤이 CIA나 해리슨을 통해 미리 손을 써 둔 모양이다.

언제부터 레드 마피아가 연방 요원을 제 부하처럼 굴리게 되었는지 모를 노릇이다. 지윤은 차 안에서 훤하게 불이 켜진 빌라 내부를 염탐했다.

거실 가운데에 이반이 양손이 뒤로 묶인 채 잡혀 있었다. 이마에서부터 볼을 타고 기다랗게 내려온 핏줄기 빼고는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한 사내가 이반에게 총을 겨눈 채 러시아 말로 뭔가를 물었다. 이반이 옆으로 서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지만, 사내가 원하는 대답을 주지는 않은 것 같다.

사내가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는 이반을 후려쳤다. 하지만 바로 죽이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반에게 원하는 것이 있나 보다.

지윤은 빌라를 크게 돌아 맞은편에 차를 세웠다. 시동은 끄지 않은 상태로 조용히 창문을 내리고 M700을 꺼냈다. 트렁크에서 찾은 저격 소총이었다.

타깃은 성난 황소처럼 씩씩거리는 사내였다. 거리가 있어서 명중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지윤은 신체 중 가장 면적이 넓은 배를 조준하고 기다렸다.

드디어 사내가 핸드폰을 들면서 멈춰 섰다. 조준경에 집중하고 호흡을 들이켰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거렸다. 셋, 둘, 하나. 지윤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기관총보다는 소리가 작지만 시선을 모으기는 충분했다. 빌라 내의 남자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췄다. 다음 순간, 사내의 옆구리에서 피가 터졌다.

“크아아아악!”

사내의 찢어질 듯한 비명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남자들이 전방을 향해 마구잡이로 총을 갈겼다. 옆구리를 움켜쥐고 신음하던 그가 악다구니를 쓰자, 남자들이 일제히 흩어졌다. 하나같이 총을 고쳐 드는 모습이 당장 총을 갈길 것처럼 살벌했다.

지윤은 남자들이 빌라 밖으로 쏟아져 빠져나오기만을 기다렸다가 기어를 바꿨다. 달릴 준비를 마친 재규어가 풀숲에 도사린 짐승처럼 나직하게 그르렁거리다 튀어 나갔다.

덜컹! 도로 턱을 단숨에 넘어선 은색 차체가 잔디를 짓밟고 전면 창이 사라져 버린 빌라 내부까지 들이닥쳤다.

“дибил(시발)!”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사내와 그의 옆구리를 누르고 있던 또 다른 사내가 욕설을 뱉으며 총을 난사했다. 브레이크를 밟은 지윤이 보조석 쪽으로 엎드림과 동시에 차량 전면 유리가 박살 났다. 쏟아지는 유리 파편을 맞으며 지윤이 팔을 뻗어 보조석 문을 열었다.

“이반!”

이반이 구르듯 보조석 안으로 들어왔다. 지윤이 고개도 들지 않고 기어를 후진으로 바꾼 뒤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후방 카메라 화면을 보면서 핸들을 조종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미처 닫지 못한 보조석 문짝이 뼈대만 남은 전면 창 프레임에 걸려 걸레처럼 찢겨 나갔다.

“чёрт(젠장)!”

“Хватай этого детеныша(저 새끼 잡아)!”

재규어를 발견하자마자 흩어졌던 사내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앞선 자들이 발포를 하기 시작하자 차체가 우그러졌다. 핸들을 크게 돌리자 재규어가 드리프트를 하면서 먼지를 일으켰다. 한 바퀴 도는가 싶었던 차가 앞으로 총알처럼 튕겨 나갔다.

구불구불한 숲길을 질주하던 지윤이 룸 미러를 흘끔 보고는 핸들을 틀었다. 도로를 이탈한 차가 길도 없는 숲으로 들어섰다. 큼지막한 나무를 피해 울퉁불퉁한 흙길을 마구잡이로 달리다 예고도 없이 멈췄다. 바로 시동을 끄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가로등도 없이 어두컴컴한 숲은 달빛밖에 의지할 만한 것이 없었다. 어둠과 길쭉길쭉하게 자란 풀이 재규어를 적절하게 가려 주었다. 난폭한 침입자에 놀란 풀벌레들이 잠시 후 다시 울기 시작했다. 호흡조차 죽이고 있다 보니 몇 대의 차량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가 연달아 들렸다.

그제야 지윤이 핸들에서 손을 뗐다. 잔뜩 긴장한 탓에 딱딱하게 굳은 손이 펴지지 않았다. 어깨에 돌덩이가 얹어진 것처럼 뻐근했다. 좌석에 뒤통수를 기대고 내내 조이고 있던 숨통을 풀어놨다.

“차가 너무 눈에 띄어. 여기서 기다리고 있다가 잠잠해지면 다시 빌라로 돌아갈 거야. 아우디로 갈아타고 출발하자.”

“왜 다시 왔어요.”

이반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어쩐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구해 줬다고 해서 고마워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하고 있었다. 지윤은 정면을 향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오지 말랬잖아. 잭슨빌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잖아요.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할 만하니까 간 거야.”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눈먼 총알이 어디에서 날아올지도 모르는데! 거기가 어디라고 와!”

이반이 이렇게 목소리를 높인 적은 처음이었다. 언제나 물 흐르듯 잔잔하고 나른하게 말했었다. 강압적인 냄새를 풍길 때마저도 어조만큼은 부드러워 격차가 더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가.

“그럼 당신이 죽을 게 뻔한데, 어떻게 그냥 가? 당신이 죽는 게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은 것보다 더 두려운데,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이 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제발 가르쳐 줘. 나도 그만두고 싶으니까!”

“그 감정이 뭔데요.”

“…….”

지윤은 힘없이 입을 다물었다. 미련하게도 너를 사랑하는 걸 그만두지 못했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후….”

이반은 고집스레 침묵하는 지윤을 보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뒤로 묶인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다시 돌아왔을 때부터 미친 듯이 뛰기 시작한 심장이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지윤이 살아남은 건 행운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안톤의 부하들이 흩어지지 않았다면, 차를 향해 날아간 십여 발의 총알 중 하나라도 맞았다면. 생각만 해도 피가 차갑게 식고 눈앞이 아찔했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가슴이 떨렸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되돌아온 그녀를 미치도록 안고 싶어서.

쏴아아, 바람이 불면서 풀이 나부꼈다. 전면 유리가 사라진 차 안으로 바람이 들어와 자유롭게 유영했다.

이반은 눈을 꾹 감아 속눈썹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털어 냈다. 그러다 등을 지윤 쪽으로 돌리고 묶인 손목을 내밀었다.

“이거 풀 수 있어요?”

지윤은 이반의 손목을 빈틈없이 구속한 케이블 타이를 흘끔 보았다.

“나이프 없이는 안 돼.”

“글러브 박스에 티슈 있을 거예요. 눈 좀 닦아 줘요.”

“…다시 돌아앉아 봐.”

이반이 그녀를 향해 돌아앉았다. 머리카락을 치워 보니 이마에 난 상처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지윤은 보조석 앞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손이 글러브 박스에 닿기도 전에 어깨가 이반의 가슴에 닿았다. 놀라울 정도로 뜨거운 체온이 얇은 천을 뚫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불에 덴 것만 같아 지윤이 황급히 물러섰다.

“…비켜야 꺼낼 거 아냐.”

“쏟아지는 총알을 뚫고 나는 구출했으면서, 이런 건 못 하겠어요?”

이반이 지윤의 얼굴을 끈질기게 응시했다.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시선을 맞출 수가 없어 지윤은 눈을 내리깔았다. 그러곤 팔을 최대한 뻗어 글러브 박스를 열었다.

이반과 맞닿은 살갗에 신경이 온통 쏠린 나머지 글러브 박스 안을 더듬는 손이 어수선했다. 두꺼운 차량 설명서를 들어 올리자 납작하게 눌린 포켓 티슈가 나왔다.

그걸 손톱 끝으로 끌어당겨 마침내 손에 쥐자, 저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숨결이 번진 이반의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그거, 위험한데.”

위협적인 음성이 귓바퀴를 자극했다. 솜털이 일제히 일어서면서 볼에 소름이 돋았다. 지윤은 아무렇지 않은 척, 몸을 바로 세우고 포켓 티슈를 뜯었다. 길쭉하게 접힌 티슈를 꺼내서 그의 이마를 조심스럽게 닦는데 이반이 입을 열었다.

“숨 쉬지 마요. 흥분되니까.”

“…….”

“눈도 깜빡거리지 마.”

지윤이 미간을 찌푸리며 애써 핏줄기에 정신을 집중했다. 티슈로 조심스럽게 상처 주변을 훑으려니 이반이 못마땅한 듯 눈썹을 들었다.

“눈 돌리지 마.”

“어쩌라는 거야!”

참다못한 지윤이 치켜뜬 눈으로 이반을 노려보았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회색 눈동자가 그녀의 시선을 단숨에 옭아맸다.

“그렇게 봐요. 나만.”

둘의 시선이 어지럽게 얽혔다. 이반의 이마에서 시작된 피가 그의 왼쪽 눈으로 스며들어 갔다가 볼을 타고 천천히 흘렀다. 마치 피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그럼에도 그의 눈은 단 한 번도 닫히지 않은 채 오롯이 한 여자만을 담았다. 살이 조여들 정도의 야릇한 긴장감이 지윤을 사로잡았다.

지윤이 이를 갈다가 이반의 목덜미를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거칠거칠한 입술이 이반의 매끄러운 입술을 빨았다.

읏, 이반의 벌어진 입에서 탄성과 함께 혀가 딸려 나왔다. 말랑하고 얇은 그녀의 혀를 감싸다가 아랫입술과 한꺼번에 빨아들였다.

추읍. 질척한 소리가 이어졌다. 이반이 얼굴을 죽 내밀어 좁고 습한 그녀의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작은 살덩이를 자근자근 씹다가 그녀의 입술을 물어뜯을 것처럼 억세게 빨았다.

거친 키스에 지윤의 연약한 입술이 견디지 못하고 찢어졌다. 이반이 목마른 짐승처럼 피를 핥아 먹다가 다시 혀를 집어넣었다. 그녀의 침을 마음껏 들이켜고 혀를 섞었다. 지윤의 숨소리가 가빠졌다. 가슴팍이 오르내릴 정도로 흥분한 건 이반도 마찬가지였다.

“후, 이리 와요.”

보조석으로 넘어간 지윤이 그의 탄탄한 허벅지에 앉자마자 이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급히 그녀와 입술을 맞대며 허리를 잘게 흔들었다.

지윤이 고개를 비틀며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고 아랫배와 아랫배가 빈틈없이 닿자, 절절 끓는 남자의 몸이 느껴졌다.

허리를 점점 노골적으로 움직이던 그가 짐승처럼 지윤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그녀의 보드라운 귓불을 짓이기듯 물고 벌겋게 변할 정도로 빨았다. 지윤이 목을 뒤로 젖히며 애달프게 앓았다.

“으응, 아… 흐으읏.”

“벗어요.”

그녀가 상체를 뒤로 젖히며 티셔츠를 벗었다. 브래지어를 벗기도 전에 이반이 브래지어째로 가슴을 덥석 물었다. 훅을 풀지 못한 지윤이 결국 브래지어를 위로 올려 버렸다.

기다렸다는 듯, 이반이 코를 가슴에 처박고 냄새를 한껏 들이켰다. 그러다 길게 내민 혀로 선홍색의 젖꼭지를 꾹 눌렀다. 반항하듯 불쑥 튀어나온 젖꼭지를 날카로운 송곳니로 씹어 물어 잇자국을 새겼다. 지윤이 몸을 떨었다.

“아, 흑!”

“젖꼭지가 섰어요. 씹어 먹고 싶게 야해서….”

이반의 속삭임이 끝나기도 전에 지윤이 그의 양 볼을 붙잡고 얼굴을 내렸다. 또다시 서로의 입술이 엉겨 붙었다.

추삽질을 하는 것처럼 음탕하게 들락거리는 이반의 혀를 지윤이 빨아 당겼다. 엉덩이를 앞뒤로 움직여 질퍽하게 젖은 바짓가랑이 사이로 이반의 페니스를 문질렀다. 그녀의 입 안으로 짐승의 울음소리를 닮은 남자의 신음이 흘러 들어갔다.

이반의 미간이 선명하게 접혔다. 헐떡이는 그의 입술은 달빛 아래서 확연히 보일 정도로 붉었다. 폭발 직전의 회색빛 동공이 어둠 속에서도 번뜩였다.

“자지 꺼내요.”

지윤이 엉덩이를 들고 이반의 바지 지퍼를 내렸다. 검은 브리프를 살짝 벌리자마자 검붉게 달아오른 페니스가 튕겨 나왔다. 쿠퍼액으로 귀두를 엉망으로 적신 채 까닥거리는 그걸 지윤이 움켜잡았다. 쓰읍, 하고 이반이 잇새로 숨을 들이켰다.

지윤은 이를 악물어 쾌감을 참는 이반의 표정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밑에서 왈칵 뜨거운 것이 새어 나왔다. 실금한 것처럼 바지 사이가 짙게 물들었다.

그녀가 이반에게 키스하며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내렸다. 급히 다리 한쪽만 빼내고 바로 이반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페니스를 음부에 가둔 채 앞뒤로 천천히 문질렀다. 젖은 살갗이 마찰하는 천박한 소리가 귀를 자극했다.

씹! 이반이 욕설을 뱉으며 입을 벌렸다. 지윤이 그 입 안에 혀를 밀어 넣자, 그가 허겁지겁 달라붙어 빨아 당겼다. 동시에 허리를 위협적으로 쳐올렸다. 애액에 미끄러진 귀두가 클리토리스를 긁었다. 하악! 지윤이 짧게 탄성을 지르며 이반에게 가랑이 사이를 바짝 붙이고 허리를 돌렸다.

“이러다 싸겠어. 넣어요.”

지윤이 번들번들 젖어 있는 이반의 페니스를 구멍에 댄 채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쯔억, 하고 두툼하게 부풀어 오른 귀두가 젖은 내벽을 벌리며 안으로 파고 들어갔다.

커다란 흉기로 내부를 가득 채운 듯, 압박감을 참아 내던 지윤이 이반의 목덜미에 이마를 비볐다. 마침내 음모가 비벼질 정도로 깊게 삽입했을 때, 둘은 동시에 신음했다.

“으, 으, 흐읏!”

“아아….”

지윤의 엉덩이가 조금 올라갔다가 페니스를 완벽하게 집어삼키며 내려갔다. 엉성하던 몸짓이 점차 리드미컬하게 바뀌었다. 그녀가 상기된 얼굴을 하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내려간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손, 시발.”

이반이 뒤로 묶인 팔목을 비틀다 나직하게 욕을 지껄였다. 움직이지 않는 팔목을 잘라 버리고 싶을 만큼 답답했다. 입에서 뜨거운 숨이 뿜어져 나왔다. 살랑살랑 움직이는 그녀의 허릿짓은 충분히 자극적이었지만 갈증을 채울 수는 없었다.

그녀의 젖가슴을 움켜잡고 빨고 싶었다. 손자국이 나도록 허리를 쥐고 구멍이 짓무를 때까지 처박고 싶었다. 그의 바지까지 적실 정도로 흥건한 애액이 사방에 튀도록 페니스를 들쑤시고 싶었다.

“무릎 세워서, 후, 쪼그리고 앉아요. 오줌 싸는 것처럼.”

“하아… 왜, 흐으읏….”

“못 참겠어. 읏, 미칠 것 같으니까, 빨리.”

지윤이 머뭇거리다 이반의 허벅지 양옆에 발을 올리고 쪼그려 앉았다. 그 바람에 페니스가 귀두만 남기고 빠져나왔다.

그의 것을 품은 채 벌어진 지윤의 음부를 보며 이반이 입술을 핥았다. 강하게 허리를 위로 튕기자 지윤의 머리가 차 천장에 부딪혔다.

“하윽!”

끝까지 삽입된 페니스가 잠시 빠져나갔다가 다시 위로 솟구쳤다. 그것을 시작으로 이반의 허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엉덩이가 좌석에 닿기도 전에 추켜 올라갔다.

퍽, 퍽, 퍽! 망치로 때려 박는 것처럼 근육질의 허벅지가 동그란 엉덩이를 쳐 댔다. 지윤은 아예 차 천장을 손바닥으로 밀며 버텼다.

투명한 애액이 이반의 바지에 후드득 떨어졌다. 페니스의 움직임에 따라 벌건 살이 딸려 나왔다가 안으로 말려 사라졌다. 그걸 주시하던 이반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강인한 목이 유연하게 휘어지고, 불거진 목젖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가 올라왔다.

“보지 만져 봐요.”

“시, 으응, 싫어….”

“내가 못 만져 주잖아. 그러니까, 나 대신 만져요.”

지윤이 입술을 물었다. 손을 내려 클리토리스를 더듬는 것만으로 그녀가 울 것처럼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이반이 발갛게 물든 그녀의 눈꼬리를 혀로 샅샅이 핥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곳, 거기. 손가락으로 문질러 봐요.”

“음, 아아, 흑….”

클리토리스를 자극하자 내벽의 매끄러운 점막이 페니스에 달라붙었다. 아플 정도로 조여드는 구멍 속을 페니스가 후벼 팠다. 이반이 목 끝까지 차오른 사정의 기운을 억눌렀다.

“흣… 손톱으로, 긁어요.”

“아, 안 돼! 아, 아, 아!”

지윤의 신음이 뚝뚝 끊어졌다. 이내 글러브 박스에 닿을 정도로 허리를 휘며 몸을 경직시켰다. 얼어붙은 것처럼 굳어 있던 몸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페니스를 품고 있는 구멍에서 뽀얀 물이 줄줄 흘렀다.

이반은 절정에 다다른 그녀의 표정에 시선을 고정하고 페니스를 쳐올렸다. 단번에 뿌리까지 삽입하자 지윤이 창에 찔린 것처럼 펄떡댔다. 페니스가 진동하듯 얕게 왕복하면서 안을 짓이겼다. 지윤의 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움직이던 이반이 이를 사납게 물었다.

“후욱, 쌀 것 같아. 빼요.”

그 순간 지윤이 이반의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페니스는 끝까지 삽입된 채였다. 놀란 이반이 참을 틈도 없이 정액이 쏟아졌다. 그가 눈을 질끈 감았다.

사정은 길었다. 페니스를 빼자 구멍 밖으로 정액이 몽글몽글 떨어졌다. 그걸 보며 이반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발기가 풀리기도 전에 페니스에 힘이 들어갈 정도로 음탕한 광경이었다.

그는 이제껏 단 한 번도 그녀 안에 사정하지 않았었다. 콘돔은 상호 합의하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질내 사정은 허락하지 않았기에 매번 돌아 버릴 것 같은 쾌감을 견디며 밖에다 사정했었다.

이반은 아직 잔열이 남아 있는 지윤의 얼굴을 핥듯이 살폈다. 갑자기 허락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집어넣고 있는 사람은 저인데, 제 속에 뭔가 꽉 들어찬 기분이다.

“이건 무슨 의미예요?”

“…아무 의미 없어.”

눈을 피하면서 그렇게 말하면 믿을 수가 없잖아요. 이반의 입매가 슬쩍 올라갔다.

“또 섰어요.”

“…그런데.”

“한 번 더 해요.”

지윤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흘러넘치는 감정을 주체 못 해 충동적으로 그와 섹스를 했지만, 생각해 보면 미친 짓이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한가롭게 섹스나 하고 있다니. 그것도 야외, 차 안에서. 지윤은 사라져 버린 보조석 차 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빨리 출발해야 돼. 안톤 쪽 놈들이 우리를 찾다가 다시 돌아올지도 몰라. 당신, 손도 풀어야 하잖아.”

이반이 그녀의 말을 듣다가 눈을 살짝 찡그렸다.

“아….”

“왜 그래?”

“음, 아니에요.”

“말해 봐, 뭔데?”

“손목이 조금 쓰라린 거 같아서. 괜찮아요.”

“돌아봐.”

이반이 등을 돌리자마자 지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손목을 얼마나 무식하게 비틀었는지 케이블 타이가 살을 파고 들어가 있었다. 거기서 나온 핏물로 하얀 티셔츠가 벌겋게 물들었다. 이 지경이 됐는데도 조금 쓰라리다니. 이 남자, 통각이 잘못된 거 아니야?

“케이블 타이 안 써 봤어? 모서리가 얼마나 날카로운데, 팔목을 이렇게 움직이면 어떡해?”

“피 나요?”

“그럼 피가 안 나겠어?”

“그런 줄도 몰랐네. 환장하게 좋아서.”

지윤이 참혹한 상처를 살펴보다 혀를 찼다. 이반의 빌라로 서둘러 가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겼다. 그녀는 콘솔 박스 앞 컵 홀더에 놓여 있는 포켓 티슈를 꺼내 이반의 페니스를 닦아 주었다.

꼿꼿하게 서 있던 페니스가 꿈틀거렸다. 힘줄이 볼록하게 일어선 그것은 신체 일부분이 아니라 흉기 같았다. 이반이 눈썹을 야릇하게 찌푸리다가 지윤에게 입을 맞췄다.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빨며 작게 속삭였다.

“잡고 흔들어 줘요.”

“…그럴 시간 없댔잖아.”

지윤이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자 그가 나직하게 웃었다.

“지금 빌라에 못 가요.”

“왜?”

“아까 사이렌 소리 못 들었어요? 이 동네 경찰은 모두 내 빌라에 와 있을걸요.”

“…언제? 난 못 들었는데.”

“당신이 내 좆을 보지에 쑤셔 넣고 엉덩이를 들썩거릴 때.”

이반이 그때를 회상하며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작정하고 유혹하려는 듯 끈적끈적하게 웃으며 지윤의 귓구멍에 혀를 집어넣었다. 반사적으로 자잘하게 일어난 솜털을 혓바닥으로 넓게 핥았다.

“아, 미친. 또 흥분돼. 자지 문질러 봐요.”

“…….”

“아니면 빨아 줄래요?”

지윤의 침묵을 갈등으로 해석한 그가 은밀하게 유혹했다.

“안드레이에게 아까 문자 보냈으니까 일 끝나면 찾아올 거예요.”

“…….”

“그러니까 빨아 봐요. 좆물 싸지른 더러운 구멍에 혀를 쑤셔 넣고 찔러요. 내가 당신에게 했던 것처럼, 당신도 내 구멍에 박아 봐.”

그가 악마처럼 천박한 단어를 귓속에 밀어 넣었다. 미쳤어. 지윤은 천천히 고개를 숙이면서 자신이 드디어 미쳤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 과정을 이반이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주시했다.

빨간 혀가 곧추선 페니스 끝에 닿았다. 뜨겁고 말랑한 혓바닥이 부푼 선단을 조심스레 맛보았다. 곧 귀두가 그녀의 작은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젖은 점막이 귀두를 조이며 빨아들였다. 아무런 기교도 없이 쪽쪽 빨기만 하는데 왜 이렇게 좋은 거지? 이반의 눈매가 고통스러운 듯 좁혀졌다.

“너무 좋아. 내가 당신 빨아 줬을 때도 이랬어요? 이렇게 돌 것 같아?”

이반의 엉덩이가 좌석에서 떴다.

“구멍을 벌리고 혀끝으로 찔러요. 거기, 아아… 좋아.”

지윤이 선단을 벌렸다. 그녀의 음부처럼 빨간 구멍이 속살을 내놓은 채 벌름거렸다. 그 안에 고여 있는 쿠퍼액을 핥은 뒤 혀를 뾰족하게 세워 요도구를 콕콕 찔렀다. 아무것도 들여보내지 않았을 좁디좁은 구멍 속을 억지로 후벼 팠다. 이반이 다문 이를 사납게 드러냈다.

“이로 긁어도 돼. 하, 씨발….”

뭉툭한 이가 요도구와 선단을 긁었다. 고통과 쾌감의 경계에 선 아슬아슬한 감각에 이반이 신음하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지윤이 귀두를 삼키고 어설프게 얼굴을 움직였다. 볼이 사탕을 문 것처럼 볼록해졌다가 홀쭉해졌다. 그러면서도 혀끝으로 요도구를 찔렀다. 이반이 그녀의 내부를 들쑤셨던 것처럼, 그녀가 이반의 페니스 안을 들쑤셨다.

이반이 더운 숨을 연신 터트렸다. 요도구가 찢어질 것처럼 벌어졌는데도 부족했다. 구멍이 너덜너덜해지더라도 상관없었다. 정액이 줄줄 새도 괜찮았다. 그녀의 혀가 전부 안으로 파고 들어오길 바랐다. 간질간질한 내부를 엉망으로 짓이겨 주었으면 했다.

“그대로, 있어요.”

“으읍!”

페니스가 그녀의 목젖을 지나 목구멍까지 단숨에 밀고 들어왔다. 숨통이 턱 막힌 지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이물감에 의한 생리적인 눈물이 눈꼬리를 타고 흘렀다. 구역질에 내장이 뒤집어질 것 같은데도 밑이 젖었다.

입이 음부라도 된 듯 페니스가 빠르게 들락거렸다. 커다란 살덩이를 억지로 품느라 한계까지 벌어진 그녀의 입술에 피가 사르르 올라왔다. 굵은 기둥을 타고 삼키지 못한 침과 음액이 한데 섞여 느른하게 떨어졌다.

음모가 입술에 닿을 정도로 페니스가 입 안으로 쳐들어왔다. 예고도 없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은 기둥 끝에서 뜨뜻미지근한 것이 힘차게 쏘아졌다. 혀를 거치지 않고 목구멍을 타고 바로 넘어오는 그것을 지윤이 꿀꺽 삼켰다. 비릿한 맛을 느끼기도 전에 이반이 페니스를 빼내며 말했다.

“고개 들어요.”

얼굴을 들자마자 그가 입을 붙여 왔다. 그녀의 입 안에 남은 정액의 비린 맛을 남김없이 지우려는 듯, 점막을 핥고 혀를 굴렸다.

쯔읍쯔읍, 혀뿌리가 얼얼할 정도로 빨아들이던 이반이 입술을 붙인 채 웃었다. 목덜미가 서늘할 정도로 사나운 웃음소리였다.

지윤이 배부른 포식자 같은 회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성한 유리창 하나 없이 뻥 뚫려 있는데도 차 안이 답답했다. 야릇한 열기에 몸이 괴로웠다. 어딘가 고장이라도 났는지 아래에서 물이 질질 샜다. 얼굴을 바짝 붙인 채 서로의 눈만 쳐다보고 있는데,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받지 마요.”

“…그로모프 씨일 수도 있잖아.”

“기다리라고 해요. 나 아직 안 끝났어.”

강렬한 그의 시선을 외면하고 지윤이 전화를 받았다. 액정을 누르자마자 핸드폰에서 성난 음성이 튀어나왔다.

- влин(젠장)! 전화를 왜 이제야 받아!

“아… 미안합니다. 전화 온 줄 몰랐어요.”

- 응? 에일린이야? 일리야는? 일리야는 어떻게 됐어? 다친 건 아니지? 안톤네 머저리들이 대가리를 좆같이 굴렸는지 CIA가 현장을 덮쳤어! 놈들을 따돌리고 있는데 어느새 이, 개씹새끼들이 안 보이는 거야! 씨발, 함정이다 싶었는데, CIA 때문에 돌아갈 수도 없고! 그놈들, 주파수 잡아서 통화 엿듣는 거 알지? 일리야랑 연락을 하고 싶어도 도청될까 봐 하지도 못하고! 존나….

잔뜩 흥분한 안드레이의 목소리는 핸드폰 밖에서도 잘 들렸다. 장황한 상황 설명은 그렇다고 쳐도 욕설이 너무 많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이반이 눈살을 찌푸렸다.

“귀에 대 줘요.”

지윤이 이반의 귀에 핸드폰을 대 주었다.

“누구한테 욕질이야. 앤디, 혓바닥 잘라 줄까?”

핸드폰이 징징 울릴 정도로 쏟아지던 안드레이의 욕설이 단번에 끊어졌다. 짤막하게 대답만 하던 이반은 그들이 있는 위치를 알려 주며 통화를 마쳤다.

“데리러 올 거예요. 옷 입어요.”

지윤은 축축하게 젖은 팬티를 벗어 버리고 바지를 입었다. 그리고 이반의 페니스를 바지 속으로 집어넣고 지퍼를 올렸다.

애액으로 엉망이 된 이반의 바지 앞섶을 휴지로 박박 닦았지만, 그의 페니스만 성나게 만들었을 뿐, 결과가 시원치 않았다. 소변이라도 지린 것처럼 진하게 물들어 휴지 따위로 수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밤이라 보이지 않길 바라야겠네. 지윤이 휴지를 모아 컵 홀더에 쑤셔 박으며 한숨을 쉬었다.

갑자기 뭐에 홀린 것처럼 이반과 사랑을 나누었지만, 예전처럼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지지 않았다. 몸을 섞었다고 흐릿하게 변한 관계가 다시 선명해지는, 그런 마법 같은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독하리만큼 허탈한 감정이 온몸을 사로잡았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다. 구차하게 매달릴 것 같아서. 사랑해 주지 않아도 되니 옆에 있게 해 달라고. 섹스 따위, 얼마든지 할 테니까 버리지 말라고 애원할 것 같아서. 그래서 이반과 대화를 피했었다.

어차피 모든 일이 끝나면 그는 돌아갈 것이다. 사랑을 연기했던 기억 따위는 깔끔하게 지워 버린 채. 배신한 남자를 버리기는커녕 매달릴 생각만 하는 스스로가 한심해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반이 첫사랑이라서 그런 걸까.’

스스로를 제법 건조한 성격이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꼭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이렇게 사랑이 구질구질한 줄 알았다면 시작하지도 않았을 텐데. 후회는 언제나 그렇듯 늦었다.

지윤은 고즈넉한 빛을 뿌리는 달을 피해 눈을 감았다. 길쭉한 속눈썹을 차분하게 내려 세상을 차단했다. 피딱지가 앉은 입술은 단호히 다물었다.

밤의 그림자가 반쯤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작고 창백했다. 갑자기 존재 자체를 거부당한 기분에 이반의 눈매가 깊숙이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당장 죽을 것처럼 사랑을 나눴으면서. 이대로 숨이 멎어도 좋을 것 같은 환희에 떨 때는 언제고. 다시 차가워진 그녀의 행동이 실탄이 되어 명치에 틀어박힌 것 같다.

아프다. 피가 나는 손목보다도 더.

이 상황에서도 그녀를 보며 착실히 발기하는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미친개가 아니라 발정 난 개로 별명을 바꿔야겠군. 이반은 씁쓸하게 웃었다.

“생각해 봤는데, 질문이 잘못됐어요.”

지윤이 눈을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무슨 질문?”

“당신이 빌라에서 했던 질문이요.”

“…듣기 싫다고, 몇 번을 말해 줘야 되니.”

“듣기 싫어도 들어요.”

이반은 기어코 말을 할 작정으로 보였다.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둘밖에 없으니 꼼짝없이 듣는 수밖에. 어차피 안드레이가 오기 전까지는 이동하기도 힘들었다. 지윤은 이반의 고집에 두 손을 들었다.

“하아, 그래, 좋아. 말해 봐. 당신 소원대로 들어 줄게.”

밖에서 새어 들어온 바람이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단정한 이마에 흩어졌다. 다소 흐트러진 모습을 하고도 그림 같은 남자가 과거를 회상했다. 허공을 향한 눈매가 가늘어졌다. 요란하게 우는 벌레 소리를 가르고 그가 말했다.

“내 어머니는 예쁘게 시들어 버린 꽃 같았어요.”

“…갑자기 어머니 얘기는 왜 해?”

“계속 들어 봐요.”

이반이 말을 이었다.

“어머니는 겉모습은 화려했지만 사실은 손끝만 닿아도 버석거리며 부서질 것처럼 연약했죠. 잘 몰랐는데 정신도 그랬나 봐요. 어느 날 나한테 주스를 주면서 사랑한다고 하더라고요.”


 

“이반, 내 아들. 엄마는 널 정말 사랑한단다.”


 

그러면서 그녀는 개새끼처럼 살 바에는 아직 인간일 때 멈추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속삭였다. 당시에는 그녀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정확하게 안다. 그녀는 결심한 거였다. 아들과 함께 죽어 버리기로.

“그런 말은 한 번도 안 하던 사람이었는데. 신기해서 받아 마셨죠. 그리고 바로 정신을 잃었어요.”

지윤이 눈을 크게 떴다.

“깨어나 보니 온통 피바다였어요. 약을 탄 주스를 아들에게 먹이고, 자기는 손목을 그어 자살한 거죠.”

바보 같은 여자. 그녀는 내내 남편에게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 젊고 아름다운 정부에게 자신의 자리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유명한 영화배우였던 그녀 자신 또한 정부에서 본처로 올라섰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녀가 공포를 피하기 위해 죽음으로 도피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녀가 준 주스를 마시고 정신을 차렸을 때, 이반은 피 웅덩이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 검붉은 색깔이, 그 비린 냄새가, 뜨뜻한 온기가, 끈적끈적한 감촉이, 미치도록 황홀하면서도 내장이 뒤틀릴 정도로 구역질이 났다.

그 뒤로 여자의 음부를 생각하면 반사적으로 피 웅덩이가 연상되었다. 이상하게도 닮았다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섹스는커녕 여자를 상대로 발기조차 하지 못했다. 성욕이 끓어오르긴 했지만 단지 본능이었을 뿐, 사람에게 흥분해서는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가 혼자 남는 걸 두려워했어요. 그 집에서 내가 어떻게 자랄지 알고 있었거든. 아들이 아버지 같은 개새끼로 변하기 전에 죽여 버리자 싶었겠죠. 그랬으니 얼마나 독하게 약을 탔겠어요. 그런데도 난 살아남았어요.”

“…….”

“당신을 만나고 나서 그런 생각을 했었어요. 당신이 혹시 너무 무섭거나 고통스러워서 자신을 해치고 싶어지면, 나에게 배신당한 울분을 스스로에게 풀고 싶어지면, 차라리 그 분풀이를 나한테 했으면 좋겠다고. 그날의 후유증으로 난 고통을 잘 못 느끼거든요.”

지윤은 그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그의 비참한 가정사에 대한 충격 때문이 아니었다. 그의 고통, 꽁꽁 숨겨 왔던 치부를 엿본 듯한 기분이었다. 한때, 한없이 다정한 연인 같았던 그의 눈이 지금은 광기를 먹고 자란 짐승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일까.

“당신을 사랑하냐는 질문에 난 해 줄 말이 없어요. 내가 아는 사랑은 좋은 게 아니라. 상대를 서서히 망가뜨리다 아예 못 쓰게 만들어 버리거든. 하지만 난 당신이 고통스러워할 만한 행동은 조금도 할 수 없잖아요.”

아, 물론 섹스할 때는 빼고. 그가 입꼬리를 의미심장하게 올리며 덧붙였다. 그러나 지윤은 조금도 웃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메마른 입술을 보며 이반이 미소를 천천히 지웠다.

“당신이 대답해 봐요. 난 당신을 사랑하는 건가요?”

지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반이 희미하게 웃었다. 피곤하고 지친 기색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그래서 당신의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거예요. 그 상황에서는 나 대신 죽어 줄 수 있냐는 질문이 맞겠죠.”

“…그 질문에는 대답할 수 있어? 고민하지 않고 대답할 수 있냐고.”

“당연하죠.”

지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바지를 쥐어뜯을 것처럼 움켜쥐었다. 이윽고 잔뜩 잠긴 목소리가 메마른 목구멍을 타고 새어 나왔다.

“…나 대신 죽어 줄래?”

이반은 조금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기꺼이.”

가슴이 터질 듯 떨리면서도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지윤은 자신을 위해 기꺼이 죽어 주겠다는 그의 대답을 미치도록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간 지내 온 삶이, 겪어 온 배신이, 그녀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다.

한번 깨진 항아리는 절대 예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안다. 당장은 멀쩡해 보이지만, 언젠가는 물이 천천히 새어 나가는 법이다. 그러다 결국 바스러지겠지.

지윤은 시시하고 지저분한 끝을 예감하면서도 이반의 말에 속아 줘야 할지, 지금이라도 끝내는 게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마음은 그를 따라가라고 속삭였지만, 이성이 발목을 움켜잡았다. 감정이 남았을 때 그만두는 게 좋다고. 회생하기 어려울 정도로 상처받고 너덜너덜해진 뒤에는 늦을 거라고 뇌까렸다.

“물론, 의도를 가지고 당신에게 접근한 건 맞아요. 나에게 필요한 걸 당신이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당신을 보는데… 이상하더라고요.”

‘심장이.’ 이반이 읊조리며 그녀를 가만히 응시했다. 지윤은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마음을 내보였음에도 그녀의 표정에서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정적이 답답하긴 처음이었다. 이반은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가 여러 개의 손전등 불빛을 보고는 차에서 내렸다.

“일리야!”

안드레이가 풀을 헤치고 성큼성큼 다가왔다. 손전등으로 이반의 얼굴을 비춰 보고는 커다랗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다 이반이 뒤로 돌아서 손목을 내밀자 혀를 찼다.

“누가 나이프 좀 가져와!”

누군가 건넨 군용 나이프로 안드레이가 케이블 타이를 단번에 끊었다. 이반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다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제법 심한 상처인데도 그의 눈빛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지독하네. 아프지도 않냐?”

“별로.”

모친에 의해 살해당할 뻔한 뒤로 그의 통각은 고장이 나 버렸다. 이 정도의 상처는 고통이라 할 수도 없었다. 정작 그를 아프게 만드는 존재는 상처가 아니라 사람이었다.

나에게 고통을 주는 유일한 여자.

이반은 안드레이에게 치료를 받으며 차 안에 마네킹처럼 앉아 있는 지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타인을 보듯 무감각한 시선. 이반을 향한 지윤의 눈빛이 그러했다. 그를 마음속에서 완벽하게 밀어내 버린 듯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할 거라고 믿었는데, 그 확신이 흔들렸다. 그녀는 FBI 출신이었다. 이반을 저격에서 보호해 주고 그를 살리기 위해 목숨 걸고 빌라로 돌아온 건, 단순한 정의감에 의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은 비릿하게 웃었다. 마음이 떠난 상대를 축복하며 이별하는 게 정상적인 남자의 행동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자신은 정상이 아니었다. 미친개라는 별명이 더없이 잘 어울리는 미친 새끼가 아닌가. 달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에 잔인한 기색이 잠시 떠올랐다 흔적 없이 사라졌다.

“앤디, 얘기 좀 할까.”

이반의 손목에 붕대를 감아 주던 안드레이가 시선을 흘낏 올리더니 숨을 들이켰다.

“무, 무슨 얘기? 이번 일은 내 실수라기보다는 비겁하게 CIA를 끌어들인 안톤 쪽 새끼들 때문….”

“그거 말고.”

“그럼 뭔데? 또 무슨 생각을 하길래 눈깔이 획 돌아간 건데? 네가 그렇게 볼 때마다 정말 소름 끼치는 거 아냐?”

“닥치고 따라와.”

이반과 안드레이는 지윤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단둘이 대화를 나누었다. 지윤은 그제야 살그머니 눈을 떴다.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안드레이가 펄쩍 뛰는 모습이 보였다.

“нет(안 돼)!”

“Ты ненормальный(미쳤어)?”

몇 개의 단어 외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안드레이의 멱살을 잡고 이반이 조용하게 속삭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깨를 축 늘어뜨린 안드레이가 지윤에게 눈만 까딱하더니 부하들을 끌고 돌아갔다. 뒤이어 이반이 가방과 새로운 차 키를 들고 걸어왔다.

“이제 가요.”

지윤은 터덜터덜 걸어가는 안드레이의 뒷모습을 흘끔 보았다.

“그로모프 씨는, 같이 가는 거 아니었어?”

“그건 안 돼요.”

“왜?”

“이 나라에 있는 요원들 다 달라붙을걸요.”

모여 있으면 그만큼 더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FBI뿐만 아니라 CIA까지 한참 전부터 따라붙었을 것이다. 음습한 집단답게 어딘가에 숨어서 염탐이나 하고 있겠지.

투입할 만한 요원은 한정되어 있으니 두 무리로 나누면 그만큼 귀찮은 일도 적어졌다. 안톤의 부하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라도 조금 떨어진 상태에서 포위하듯 따라붙는 게 효과적이었다. 함께 있으면 같이 위험에 빠질 가능성도 크니까.

지윤은 차에서 내려 이반과 함께 숲 밖으로 나갔다. 도로로 올라가자 정말 이반의 말대로 사이렌 소리가 어지럽게 들렸다. 일이 다 끝난 뒤에야 벌 떼처럼 경찰들이 몰려온 모양이다. 과연 이 사건은 어떻게 포장되어 뉴스에 나올까.

“운전은 내가 할게요.”

삐빅.

자동차 잠금장치가 해제되는 소리에 지윤이 고개를 틀었다. 길가에 서 있는 하얀 캐딜락에 이반이 올라타고 있었다. 그녀는 보조석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면서 라디오를 켰다. 주파수를 잡으려는데 이반이 바로 꺼 버렸다.

“듣지 마요.”

“…어떻게 보도되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아?”

“가스 폭발이나 수도관 폭발 둘 중에 하나겠죠. 그냥 조용히 가요.”

듣기 싫은 건가.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굳이 이유를 알고 싶은 마음은 없어 지윤이 얌전히 손을 내렸다.

“내일 아침에는 잭슨빌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음 경로는 거기서 알려 줄 거죠?”

“응.”

“출발할게요.”

하지만 1미터도 가지 않아 이반이 브레이크를 콱 밟았다.

“근데 나한테 할 말 없어요?”

“잭슨빌부터는 내가 운전할게.”

“그런 말 말고.”

“…없는데.”

이반의 음성이 더욱 낮아졌다.

“한 가지 확인할 게 있어요.”

“뭘.”

“나랑 섹스했잖아요. 나에게 키스하고 내 자지를 빨았잖아. 난 우리가 예전으로 돌아간 줄 알았는데.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예요?”

“하고 싶었는데 네가 옆에 있었을 뿐이야.”

“마지막 기회예요. 잘 생각해 보고 말해요. 정말, 그게 전부예요?”

지윤이 고개를 돌렸다. 단단하게 잠긴 문처럼 감정이 삭제된 까만 눈으로 이반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반, 우리는 결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해.”

“아까 내가 한 말은요. 그건 당신에게 아무 의미도 없어요?”

지윤이 입술을 차갑게 들어 올렸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말이야? 그런 말은 누구든지 할 수 있어! 나에게서 원하는 걸 얻으려면, 그게 자기 목숨에 직결된 거라면! 간이라도 내놔야지, 안 그래?”

“…당신에게 원하는 게 있어서. 그래서 내가 그런 말을 한 거란 말이죠?”

“나를 속인 사람과 섹스를 했을 뿐인데 갑자기 믿어 주는 게 더 우스운 일 아닌가? 일리야 페트로비치 라브노프 씨.”

이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를 보며 지윤이 잔인한 말을 쏟아 냈다.

“처음이 어렵지, 한번 배신한 놈은 계속 배신하게 되어 있어. 나는 더 이상 그런 놈들에게 내 시간과 마음을 뺏기지 않을 거야. 그 끝이 얼마나 더러운지, 충분히 겪어 봤거든. 너와 나는 이미 끝났어. 무슨 일이 일어나도 달라지지 않아.”

“…아까처럼 발정이 나면 씹질은 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할 수 있는 게 섹스야. 별 의미도 없는 행위일 뿐인데 욕구가 생기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하, 이반이 서늘한 웃음을 뱉었다.

“좋아요. 뭐가 됐든 끝을 봐요, 우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