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2)

“…설계도 준비해.”

잠결에 이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하들과 통화를 하는 걸까? 목소리가 건조했다. 지윤에게 하는 것처럼 꿀이 떨어질 듯 상냥하거나 나른한 분위기는 전혀 없었다. 잠기운은 말끔히 사라졌지만 지윤은 그대로 누워 통화를 엿들었다.

“곧 필요해질 것 같아서. 아, 아. 걱정 마.”

그가 핸드폰을 살짝 떼고는 그녀를 흘끔 돌아보았다. 지윤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발소리가 들리더니 매트리스가 푹 꺼졌다. 곧 이마에 흩어져 있는 머리카락을 주의 깊게 쓸어 넘기는 이반의 손길이 느껴졌다.

“아주 중요한 거래에 쓸 거니까.”

통화를 끊은 이반이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툭 던졌다. 그리고 지윤의 볼에 코가 닿을 정도로 얼굴을 숙였다. 흐읍, 하고 숨을 크게 들이켜 지윤의 살냄새를 맘껏 맡은 그가 귓가에 조그맣게 속삭였다.

“자요?”

지윤은 통화 내용을 엿들었다는 걸 들킬까 봐 대답하지 않았다. 몸에서 힘을 빼고 호흡을 최대한 느릿하게 했다. 웃음기 섞인 이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어난 줄 알았는데.”

“…….”

“착각이었나?”

짐승의 목울음 같은 웃음소리에 솜털이 일어섰다.

“자고 있으니까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모르겠네. 그렇죠?”

지이익, 지퍼 열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서 비누 향 섞인 살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조금 거칠어진 이반의 숨소리, 살이 마찰하는 소리가 예민한 귀를 사로잡았다.

일어날까 말까 고민하다가 타이밍을 놓쳐 버린 지윤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불쾌해서가 아니었다. 다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열기에 당황했기 때문이다.

눈으로 본 것도 아닌데 소리와 냄새만으로 밑이 젖었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그의 말처럼 눈이 젖어 있을까 봐, 그래서 흥분했다는 사실을 들킬까 봐 도저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지윤은 지그시 혀끝을 물었다.

“으음….”

지윤의 얼굴 바로 앞에서 페니스를 꺼낸 이반이 곧추선 그것을 천천히 쓸어 올렸다. 이틀째 사정하지 못한 페니스는 검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두어 번 흔들었을 뿐인데 벌써 요도구를 타고 쿠퍼액이 솟았다. 그 천박한 냄새에 이반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나도 별수 없는 라브노프의 개새끼로군.’

그의 부친 페트로는 엄청난 정력가이자 호색한이었다. 187cm의 키에 체구도 단단해 나이보다 훨씬 젊어 보였다.

외모도 썩 괜찮고 돈은 썩을 정도로 많은 그는 결혼만 세 번 한 데다 정부는 셀 수 없이 많았다. 아이가 넷밖에 생기지 않은 게 놀라울 정도로 여자관계가 복잡했다.

비단 페트로뿐만이 아니었다. 라브노프 일가는 대대로 성욕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페트로는 말할 것도 없고 안톤도 마찬가지였다.

정치인이라 이미지 관리 때문에 조심하긴 하지만 2년째 비서와 지저분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물론 그의 부인도 젊은 정부 두 명을 번갈아 가며 만났다. 참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었다.

둘째 알렉세이는 필로폰 중독 때문에 발기가 전혀 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이랄까?

딱히 핏줄을 탓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부친 때문에 어머니가 자살했고, 자신도 어머니에 의해 죽을 뻔하긴 했어도 그건 어머니의 잘못이었다.

페트로 같은 개새끼를 사랑할 정도로 철이 없었던. 다른 여자와 남편을 나누는 고통을 속에만 쌓아 두다가 끝내 스스로를 포기했던 어머니. 바보 같은 그녀의 잘못이었다.

이반은 자신의 몸에 흐르는 피를 증오하진 않았으나 역겹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페트로나 안톤처럼 여자들과 놀아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이 피를 누군가가 이어받을 거라는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차라리 자위가 나았다. 눈앞이 벌게질 정도로 성욕이 끓어오르면 껍질이 벗겨질 때까지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한심하고 구질구질했지만 그럼에도 섹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여자를 안을 생각만 해도 몸 안에 있는 피를 다 쏟은 채 죽어 버린 어머니가 떠올라 페니스가 죽어 버렸다.

그래서 지윤을 보며 발기가 되었을 때, 가장 놀란 건 이반, 그 자신이었다.

4번째 미행하던 날이었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 8시쯤 일어나 조깅을 시작했다. 남들처럼 호수 공원 근처가 아닌 낡아 빠진 운동장이 그녀의 조깅 코스였다. 좁은 트랙을 몇십 바퀴씩 돌다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커피 전문점에 들러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샀다.

그때, 어처구니없게도 페니스가 반응했다. 유혹적인 행동을 한 것도 아니고, 누군가와 음탕한 밀어를 나눈 것도 아니었다. 평소처럼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는 마른 입술이 묘하게 야하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는데, 페니스가 무섭게 부풀어 올랐다.

그녀에게 호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녀는 연약했던 어머니와는 달랐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상대의 목덜미에 칼을 박아 넣으면 모를까 혼자서 끙끙 앓을 사람은 아니었다. 까만 단발머리와 동그랗고 순한 눈을 가진 주제에 차갑고 매몰찬 성격도 좋았다. 안드레이의 미행을 따돌릴 정도로 수준 높은 실력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이성으로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는데. 그날따라 유독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남의 입술을 빨고 싶다고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꼿꼿이 선 페니스 때문에 매장을 나가는 그녀를 따라갈 수도 없었다. 그날 미행은 실패로 끝났다.

그날을 시작으로 비슷한 일이 계속 반복되었다. 점점 미행만으로는 부족했다.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서류에 인쇄된 활자 따위 말고, 직접 그녀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이반은 결국 지윤이 살고 있는 건물 1층에 커피 전문점을 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주세요.’라고 말하는 그녀를 바로 눈앞에서 보고 싶어서.

물론, 그녀와 관계가 발전한 뒤로는 집으로 아메리카노를 가져다주었다. 자신처럼 커피를 주문하는 그녀를 보며 음탕한 생각을 하는 미친 새끼가 없으란 법은 없으니까.

이반은 쿠퍼액을 손에 펴 바르고 빠르게 문질렀다. 허리를 내밀자 지윤의 벌어진 입술에 페니스 끝이 살짝 닿았다. 질척하게 젖은 선단과 마른입술이 투명한 실로 이어지는 아찔한 광경에 그가 시선을 고정했다.

이대로 쑤셔 넣으면 어떻게 될까. 반항하는 그녀를 억누르고 입 안에 페니스를 박아 넣고 싶었다. 작은 머리를 고정하고 목구멍까지 페니스를 밀어 넣으면, 불알이 턱에 부딪힐 정도로 끝까지 처박으면, 그녀는 구역질을 참느라 눈물을 흘릴 것이다.

혹은 죽일 것처럼 노려볼 수도 있고, 페니스를 물어뜯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상상이지만, 그것만으로 사정감이 몰려왔다. 이반이 입술을 짓씹었다.

“하, 씹.”

지윤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어 눈을 부릅떴다. 살벌하게 노려보는데도 이반은 놀란 기색 없이 태연했다. 탁탁탁, 페니스를 흔들고 있는 손이 오히려 급해졌다. 단단한 살덩이를 감싸고 있는 표피가 죽 늘어났다가 붉은 귀두를 뱉으며 오그라들었다. 귀두 끝에서 시작된 쿠퍼액이 꿀처럼 눅진하게 흘렀다. 지윤과 눈을 맞춘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이제, 후, 일어났어요?”

“…뭐 하는 짓이야.”

“아, 입김, 너무 좋아. 혀 내밀어 봐요. 혓바닥에, 비비고 싶어.”

“물어뜯기고 싶으면 해 봐.”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읏!”

이반이 미간을 관능적으로 일그러뜨리며 가늘게 내리뜬 눈으로 지윤의 얼굴을 집요하게 핥았다.

잘게 흔들리던 허리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페니스가 침대를 향해 허연 정액을 울컥울컥 쏟아 냈다. 비를 연상케 하는 비릿한 냄새가 공기 중으로 확 퍼졌다.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페니스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지윤의 총이었다. 어느새 그녀가 베개 밑에서 꺼낸 피스톨로 그의 페니스를 겨누고 있었다.

“비켜.”

“이러면 더 꼴리는데.”

조금 수그러들었던 페니스가 다시 대가리를 들기 시작했다. 귀두가 총구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지윤의 눈꼬리가 날카롭게 섰다.

그녀의 표정에 자극을 받은 이반이 입술을 벌렸다. 유난히 뾰족한 송곳니 끝을 혀로 누르며 허리를 들썩거렸다. 마치 총구의 까만 구멍이 질구라도 되는 듯, 귀두 가운데가 움푹 들어갈 정도로 밀었다가 뒤로 물러났다. 총구가 기름이라도 칠한 듯 번들거렸다.

“미친놈.”

“더, 더 해 봐요.”

“죽고 싶은 거야?”

“총이 아니라 당신의 뜨거운 구멍에 꽂은 채 죽고 싶긴 한데. 해도 돼요?”

“저리 치워!”

순간 이반이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고 허리를 쳐올렸다. 지윤은 소스라치게 놀라 방아쇠에서 손을 뗐다.

장전이 되어 있지는 않았으나 안전장치는 풀려 있었다. 언제든지 발포할 수 있는 상태의 무기를 손에 들고도 그녀는 겁에 질린 사람처럼 주춤거렸다. 혹시라도 발사될까 봐 두려웠던 그녀는 결국 손에서 힘을 뺐다. 총이 침대 위로 툭 떨어졌다.

비틀린 그녀의 입술을 보며 이반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지윤의 손을 천천히 끌어당겨 짤막하게 자른 손톱 끝에 귀두를 눌렀다. 탐색하듯 지윤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건드리던 페니스가 그녀의 손바닥을 타고 올라갔다.

힘없이 풀어진 손에 비비는 것뿐인데 이반이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헐떡거렸다. 자위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에 이반의 눈이 눅진하게 풀어졌다. 제 손으로 지윤의 손을 감싸 둥글게 만든 뒤 페니스를 강하게 쑤셔 넣었다.

몇 번 허리를 흔들지도 않았는데 불알이 단단하게 올라붙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귀두 끝이 아슬아슬한 신호를 보냈다. 이반이 지윤의 엄지를 구부려 선단을 억세게 긁었다. 빨간 구멍이 그녀의 엄지 아래서 짓이겨졌다.

그때 지윤이 터트릴 것처럼 페니스를 쥐어짰다. 고통을 줄 목적이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이반은 지윤이 주는 것이라면 고통마저 기꺼이 받아들이는 미친놈이었다. 통증이 더해지자 사정감이 순식간에 솟구쳤다. 그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탁한 신음을 뱉었다.

“아, 아… 흐읏!”

이미 한 번 사정을 했음에도 많은 양의 정액이 지윤의 손을 흠뻑 적셨다. 이반은 한결 움직이기 수월해진 지윤의 손바닥 감촉을 즐겼다. 이보다 훨씬 뜨겁고 좁고 쫀득한 구멍을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역시 자위로는 만족하기가 어려웠다.

제 손에 오물이라도 묻은 듯 지윤의 표정이 처참해졌다. 화가 나서인지 볼이 붉게 달아올랐다.

닦아 주겠다고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녀가 이반의 몸을 강하게 밀어냈다. 재빠르게 일어나 욕실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이반은 조용히 웃었다. 그녀의 젖은 눈동자는 언제나 식욕과 성욕을 동시에 돋웠다.

“씻겨 줄까요?”

“닥쳐!”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온 지윤은 문을 있는 힘껏 닫았다. 쾅! 소리가 나며 닫힌 문에 등을 기대고 서 있다가 주르륵 무너졌다.

이반을 멈추게 할 방법은 간단했다. 진심으로 거부하면 그는 아무 짓도 못 할 테니까. 하다못해 아픈 척만 해도 그는 그만두었을 것이다. 심지어 사정 도중이라 해도. 그럼에도 가만히 있었던 이유를 모르겠다.

지윤은 다리 사이로 손을 내렸다. 이반이 그녀의 손이 아니라 팬티에 대고 사정한 것처럼 축축했다. 침대 시트를 적셨을지도 모르겠다. 제발 이반이 보지 말아야 할 텐데. 지윤은 까칠한 얼굴을 쓸어내리다 문득 시선을 들었다.

욕조가 물기 하나 없이 바싹 말라 있었다. 고장 난 수도꼭지를 어떻게 고쳤는지 물이 떨어지지 않았다. 청소도 했는지 어제보다 훨씬 깨끗했다. 자면서 어떤 낌새도 느끼지 못했는데.

“하아….”

어쩐지 얼굴이 더워졌다. 지윤은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


 

지윤이 샤워를 하고 나오자마자 이반이 텔레비전을 껐다. 뉴스를 보고 있었는지 심각한 표정의 아나운서가 화면에 잠깐 보였다가 사라졌다.

“이거 입어요.”

널찍한 수건으로 꼼꼼히 가려진 지윤의 몸을 물끄러미 보던 그가 옷을 내밀었다. 그녀가 즐겨 입는 사이즈였다. 지윤은 휴지통에 처박힌 티셔츠를 흘끔 보고는 말없이 옷을 받아 들었다.

“식사는 가다가 해결하는 게 좋겠어요. 안톤의 부하들이 여기를 찾아낸 것 같아요.”

하루가 훌쩍 지났으니 충분히 찾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들이 가진 정보력과 인력을 생각하면 오히려 늦은 감이 있었다. 지윤은 바지를 입고 지퍼를 올렸다.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나 떼어 놓을 생각 하지 말아요. 난 당신이 어딜 가든 찾을 수 있어요. 어제처럼.”

지윤의 까만 눈동자가 그를 향해 슬쩍 움직였다.

“…마음대로 해.”

“정말? 당신 따라가도 돼요?”

“제시를 지켜야 한다던 네 말이 사실이라면, 나밖에 답이 없잖아. 죽어라 나를 쫓아다니겠지. 어차피 따라붙을 텐데 괜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딱히 제시 때문은 아니지만…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아요.”

그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머리를 말려 주기 위해 다가오는 그에게서 지윤이 드라이기를 뺏었다. 뒤돌아서 머리를 말리는 지윤의 마른 등에 깊숙이 잠긴 이반의 시선이 꽂혔다.

“…우리 어디로 가요?”

“제시가 사는 곳을 내가 말할 것 같아? 당신을 어떻게 믿고? 제시를 구하고 싶다면 입 다물고 따라오기나 해.”

그가 상처 입은 것처럼 가슴을 잡고는 휘청거렸다. 지윤이 감흥 없는 눈으로 쳐다보기만 하자 이내 콧잔등을 찡긋거리며 태연하게 허리를 폈다.

“경유지라도 알려 줘요. 계속 모텔에서 자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에요. 일이 벌어지면 방어하기도 어렵고 탈출로 확보는 더더욱 어렵잖아요. 안톤이 손을 써 놨을지도 모르는데 경찰이나 FBI에 도움을 요청할 수도 없고. 별장을 몇 채 사 둔 게 있으니 혹시 그쪽으로 가는 길이면 모텔 말고 별장으로 가요.”

그의 말대로 모텔은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혹시라도 총격전이 벌어지면 일반인이 휘말릴 수 있을뿐더러, 객실 앞을 지키고 서 있으면 꼼짝없이 잡히는 수밖에 없었다. 지윤은 짧게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잭슨빌.”

현재 그들이 있는 장소는 렉싱턴이라는 도시 외곽이었다. 알링턴에서 살던 지윤이 잭슨빌 쪽으로 가야 한다면 렉싱턴에 올 이유가 없었다. 말 그대로 빙 돌아가는 거나 다름없었으니.

아무래도 바다나 호수가 보이지 않는 도로를 이용하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이반은 지윤 모르게 입술 안쪽을 씹었다. 그러다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럼 75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애틀랜타에서 하루 쉬어요. 거기 빌라를 하나 사 둔 게 있어요.”

렉싱턴에서 잭슨빌까지 가는 가장 빠른 도로는 95번 도로였다. 다만 해안가를 통과하는 도로이다 보니 지윤을 위해서 멀리 돌아가려는 것이다. 지윤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반이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여기서 잭슨빌까지는 열두 시간 꼬박 운전해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예요. 어디서건 한 번은 쉬었다 갈 수밖에 없잖아요.”

일정이 탐탁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다만, 숨기기에 급급했던 치부를 남이 배려해 주니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보호받는 것 같아 볼 언저리가 홧홧해졌다.

이제까지 지윤은 누군가를 보호해 주는 입장이었지, 보호를 받은 적은 없었다. 마틸다 사건이 일어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편을 들어 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섭섭하긴 했지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1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요원은 요원. 타인의 보호를 바라는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래서 보호받는다는 게 이토록 따뜻한 건 줄 몰랐다. 제시의 위치를 알기 위한 계산된 행동임을 아는데도, 마치 한증막에 들어선 것처럼 전신이 노곤했다. 따뜻한 막으로 어디 한 군데도 빠짐없이 둘러싸인 것 같다. 지윤은 뜨거워지려는 얼굴을 획 돌리며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조금이라도 제멋대로 행동하거나 의심스러운 짓을 하면 바로 끝이야.”

“개처럼 기라는 말이죠? 나 그거 잘해요. 원래 미친개라.”

이반은 지윤이 객실을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방을 들었다. 그리고 동그랗게 구멍 뚫린 카펫을 힐끔 보고는 피식 웃었다.

지윤은 노출되었을 게 분명한 메르세데스를 지나쳐 이반이 타고 온 아우디 앞에 섰다. 말없이 손을 내밀자 이반이 주머니에서 차 키를 꺼내 훌쩍 던졌다.

가볍게 낚아챈 지윤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뒷좌석에 가방을 던져 넣은 이반이 보조석에 올라타자마자 아우디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국도를 지나 주간 고속 도로에 진입한 차가 육중한 울음 소리를 내며 튕겨 나갔다. 차 안에서 들리는 소리라고는 내비게이션의 안내 음성뿐이었다. 적막의 부담을 이기지 못한 지윤이 라디오 버튼으로 손을 가져갔다.

그 순간, 이반이 그녀의 손을 잡아 손가락 끝에 입을 맞췄다. 별것 아닌 행동에 심장이 툭 떨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덤덤히 넘길 수 있던 행동에 유난히 반응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손가락 키스 정도는 벌써 수백 번도 넘게 했었는데. 운전대를 잡은 지윤의 손에 관절이 불룩하게 일어섰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갑자기 아닌데. 아까부터 하고 싶었어요.”

“이상한 짓 하지 말랬잖아.”

“당신 냄새 때문에 지금 돌겠어요. 더 이상한 짓 하기 전에 손이라도 묶어 놔야죠. 더 꽉 잡아 봐요.”

이반이 깍지를 단단히 꼈다. 뿌리치려다 차선을 넘을 뻔한 지윤이 전방을 노려보았다. 사고가 날까 봐 얌전히 참아 주는 그녀의 행동에 이반이 속으로 웃었다.

‘나 같으면 손가락을 부러뜨려서라도 떨어뜨려 놨을 텐데.’

그녀는 저격에서 그를 구해 주었었다. 총알이 어디서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기어코 이반을 질질 끌고 소파 뒤로 피했다. 어제도 팔을 꺾어 제압은 했지만 그 이상은 하지 못했다. 이반이 아픈 내색을 한 것도 아닌데 지레 겁먹고 손을 놔 버린 건 그녀였다.

지윤은 그 정도로 마음이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스물일곱 살에 FBI 요원이 될 정도면 실력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철저히 단련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반에게 고통을 주지 못했다. 그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사실을 생각하자 속이 달았다. 꿀물을 통째로 들이켠 것처럼. 이반이 손가락으로 그녀의 손등에 글씨를 썼다.

‘하고 싶어요.’

‘하고 싶어.’

‘윤.’

지윤이 갓길에 차를 세웠다. 어시스트 그립[3]을 잡아 쏠리는 몸을 지탱하던 이반이 지윤을 따라 차에서 내렸다.

“왜 멈춰요?”

“여기서부터 당신이 운전해.”

“왜요?”

“…조금만 더 가면 호수가 나와.”

이반은 내비게이션 화면을 확인했다. 호수가 보이려면 아직 멀었는데? 시선을 돌리자 지윤이 고개를 획 틀었다. 더할 나위 없이 차가운 표정과는 어울리지 않게 귓불 끝이 발그스름했다. 이반이 달콤하게 웃었다.

“잘됐네요, 운전하고 싶었는데.”

운전석에 앉은 이반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가 자연스럽게 차선에 끼어들었다. 지윤은 정신없이 뛰어 대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문에 바짝 몸을 붙였다.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을 보며 집중하려 했지만 어느새 이반에게 신경이 쏠렸다.

돌아 버릴 것 같은 심정은 지윤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똑같이 싸구려 비누로 샤워를 했음에도 그에게서 풍기는 냄새는 달랐다.

그의 체취와 섞인 향기가 묘하게 신경을 자극했다. 지윤은 창문을 내리려다가 고속 도로임을 상기하고 윈도 버튼에서 손을 뗐다.

그때, 사이드 미러로 검은색 밴이 눈에 들어왔다. 새까맣게 선팅으로 가려져 운전자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국은 전면 유리의 경우 선팅의 농도를 규제하거나 아예 금지하는 주가 많아 대부분 저런 식으로 진한 필름은 붙이지 않았다.

“…차선 바꿔 봐.”

이반이 잠자코 차선을 바꿨다. 잠시 보이지 않던 밴이 슬그머니 따라붙었다. 그리 가깝지는 않지만, 언제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 거리를 유지한 채.

“블랙 밴, VMN-486. 당신 부하들이야?”

“설마요. 미행을 저렇게 티 나게 하면 나가 죽어야죠.”

“다음 출구에서 빠져.”

지윤이 피스톨을 꺼냈다. 룸 미러를 흘끔 본 이반이 속도를 조금 줄였다. 바로 거리를 벌릴 것 같던 검은 밴이 오히려 아우디 옆에 바짝 붙었다.

사이드 미러가 아슬아슬하게 스칠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제야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내부가 희미하게 보였다. 기관총을 들고 있는 남자의 모습까지도.

“이반!”

“꽉 잡아요.”

지윤이 좌석에 몸을 붙이고 어시스트 그립을 붙잡았다. 동시에 이반이 핸들을 오른쪽으로 크게 돌렸다.

2차선에서 유유히 달리던 아우디가 갑자기 차선을 횡으로 가로질렀다. 몸이 옆으로 쏠리고, 여기저기서 클랙슨 소리와 타이어의 마찰음이 비명처럼 울렸다.

콰쾅! 따라오려던 검은 밴이 뒤차와 충돌하면서 앞으로 죽 미끄러졌다. 이어서 피하지 못한 몇 대의 차량이 꼬리처럼 처박혔다.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아우디가 오른쪽 고속 도로 출구에 진입했다. 룸 미러로 뭉게뭉게 올라오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지윤이 입술을 자근거리다가 피스톨을 다시 집어넣었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낯빛이 창백했다. 죄 없는 사람까지 다쳤을까 봐 걱정되는 것이다.

‘누가 요원 출신 아니랄까 봐.’

이반이 나직하게 말했다.

“많이 다친 사람은 없을 거예요. 나 때문에 속도를 먼저 줄여서.”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내가 걱정돼서요.”

지윤은 말을 덧붙이려다 그만두었다. 느닷없이 이반이 손을 뻗었기 때문이다. 따뜻하고 큼지막한 손이 그녀의 눈을 가렸다.

“경로를 바꿨잖아요. 언제 호수나 강이 나올지 몰라요.”

“…….”

“한숨 자요.”

지윤은 머뭇거리다 눈을 감았다. 그녀가 잠들 때까지 이반은 손을 치우지 않았다.


 

***


 

“제시! 제시를 먼저 구해 줘! 난 괜찮으니까 제시 먼저…!”


 

“흐읍!”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던가. 지윤은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관자놀이가 움찔거릴 정도로 심장이 뛰었다. 조금 전까지 잠수를 한 것처럼 숨이 가빴다.

애써 호흡을 다스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내밀어진 손이 이마에 솟은 땀을 훔쳤다. 지윤은 본능적으로 손목을 낚아챘다. 손목을 잡힌 이반이 입꼬리를 늘였다. 웃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웃는, 기묘한 표정이었다.

“옮기면 깰까 봐 기다렸는데. 깨울 걸 그랬나 봐요.”

“아….”

시간을 보니 오후 2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어림잡아 네 시간 정도 잔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태평하게 잠을 자고도 모자라 꿈까지 꾼 자신이 어처구니가 없어 지윤이 시계만 멍하니 쳐다보았다.

“얼마나 이러고 있었던 거야?”

“한 시간 정도. 이제 들어갈까요? 식사해야죠.”

이반의 빌라는 널찍하고 세련된 2층 건물이었다. 담도 없이 개방된 넓은 정원, 화이트 계열의 깔끔한 외관과 스틸 프레임의 큼지막한 전면 창이 마치 미술관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이반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니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붉은 고수머리를 가진 거대한 남자.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던 그가 지윤의 얼굴보다도 더 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안녕, 에일린.”

“엊그제 봤죠? 안드레이라고, 내 사촌이에요.”

이반의 방산업체를 운영한다고 알려진 안드레이 보리스비치 그로모프. 대대로 용병업체를 운영하는 그로모프 일가의 일원답게 안드레이 또한 국가 대표 사격 선수 출신의 뛰어난 용병이었다.

지윤은 안드레이의 뒷모습을 훑었다. 슈트 겉으로 어색하게 튀어나온 모양을 보니 양쪽 옆구리에 두 자루의 총을 소지한 듯 보였다. 특히 왼쪽은 권총류가 아니라 기관 단총 종류인 것 같다.

수십 명은 단번에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중무장을 하고 요리를 하다니. 앞치마를 입은 모습이 방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잘 어울렸다. 지윤은 고개만 까딱 숙이고 식탁에 앉았다.

안드레이가 큼지막한 웍을 한 손으로 들고 흔들었다. 치이이익, 식욕을 돋우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얼마 기다리지도 않았는데 그가 두 개의 접시에 볶음밥을 담아서 내밀었다.

“뽈룹이라고, 러시아식 소고기 볶음밥이야. 버터와 카레가 포인트지. 먹어 봐.”

한 숟가락 뜨자 카레 향이 훅 올라왔다. 적당한 크기로 잘린 소고기와 당근은 알맞게 익어 풍부한 맛을 품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어젯밤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쪼그라들어 허기진다는 신호조차 보내지 않던 내장이 밥 한 숟가락에 격렬히 꿈틀거렸다. 지윤은 빠르게 숟가락을 움직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이반이 지윤의 접시에 제 몫의 뽈룹을 덜어 주었다. 숟가락질을 잠깐 멈추는가 싶던 지윤이 별말 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이반의 눈짓에 안드레이가 컵에 물을 따라 내밀었다. 그때, 어디선가 진동 소리가 들렸다. 안드레이가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오랜만입니다….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바꿔 드리겠습니다.”

그가 이반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반이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핸드폰을 받았다. ‘예.’라고 대답한 뒤 조용히 상대방의 말만 듣던 그가 지윤에게 가볍게 웃어 주고는 후원으로 나갔다.

“마피아도 그 정도로 거저 처먹으려 들지는 않아요. 자신 없으면 없던 일로 하죠. 당신을 대신할 사람은 많으니까.”

이반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전면 창이 닫히면서 끊어졌다.

지윤은 창밖으로 이반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안드레이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를 죄다 드러내며 어설프게 웃었다.

“마, 맛은 어때? 먹을 만하지?”

“예.”

“더 줄까? 아직 많이 남았어.”

“괜찮습니다.”

딱딱한 대답에 당황한 안드레이가 머리를 긁적거렸다. 어색한 분위기에 대한 알레르기라도 있는지, 억지로 대화를 이어 가려고 노력했다.

“최근에 나온 시그 MPX 보여 줄까? 제법 잘 빠졌는데.”

“관심 없습니다.”

“아, 그, 그래. 아, 맞다. 저번에 미사일 시범 발사했을 때 동영상 찍어 놨거든. 그거라도 보여 줘?”

“…극비 아닙니까?”

“뭐 어때? 친하면 그럴 수도 있지. 친구끼리는 야동도 돌려 보고 그러잖아?”

“그로모프 씨와 나는 친구가 아닙니다.”

“어, 음… 그, 그럼 일리야의 약점이라도 알려 줄까?”

지윤이 처음으로 거절하지 않았다. 용기를 얻은 안드레이가 신나서 떠들었다.

“그놈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스크램블드에그야. 식감이 아주 좆같… 마음에 안 든다나? 골탕 먹이고 싶으면 그거 해 줘 봐. 또 모르지. 네가 해 주면 군말 않고 먹을지도.”

군말 없이 먹던데. 할 줄 아는 음식이 그거밖에 없어서 여러 번 해 줬었는데 그때마다 이반은 남김없이 먹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스크램블드에그라며. 지윤은 내색 없이 남은 밥을 싹싹 긁었다.

“더러운 것도 싫어해. 결벽증 같은 게 있어서. 예전에 실수로 땀을 튀긴 적 있었는데 총 맞을 뻔했어. 정떨어지게 만들고 싶으면 안 씻으면 될 거야.”

이반은 지윤의 땀을 아랑곳하지 않고 핥아 댔다. 더럽다고 아무리 피해도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씻지 않은 상태에 더 흥분했다. 게다가 어제는 더러운 소파에 눕기도 했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에 올라오긴 했지만.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건 서핑이야. 유일한 취미라 한때 마이애미에서 살다시피 했어. 러시아는 서핑을 하기가 좆… 별로거든. 파도가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빌라를 구입할 정도로 사족을 못 써. 나중에 같이 하자고 해 봐. 좋아 죽을걸?”

트라우마는 둘째 치더라도 어처구니없었다. 왜 내가 이반과 계속 만날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지윤이 차갑게 노려보자 그가 찔끔한 표정으로 황급히 수습했다.

“아, 아니! 지금 말고.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하란 소리지. 화 풀리면….”

“그럴 일 없습니다.”

“…어, 그, 그래.”

괜히 말을 꺼냈다 싶었는지 그가 입을 다물고는 괜스레 홈 바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지윤의 눈치를 살폈다.

“아까 고속 도로에서 따라붙었던 놈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우리가 정리할 필요도 없었어. 바로 경찰이 몰려와서.”

“…다친 사람이 많았습니까?”

“음, 아닐걸? 대충 분위기를 보니 중상자는 없었던 것 같아. 요즘 에어백 기술이 좋잖아.”

묵직하던 명치가 조금 가벼워졌다. 지윤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놈들은, 얼마나 더 남았습니까?”

“몇 명이 넘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속 도로에서 따라붙은 놈들이 다는 아닐 거야. 안톤네 애들이 오합지졸이긴 한데 쪽수가 많거든.”

“혹시 안톤이 제시에서 이반으로 타깃을 바꿀 수도 있습니까?”

“…어? 아, 아니!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전혀 아닌데? 동생을 죽이려는 형이 어디 있어?”

허둥지둥 부정하는 안드레이의 표정은 누가 봐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설펐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검은 밴의 목적을 단순 미행으로 보기엔 수상한 점이 많았다.

달리는 차를 향해 기관총을 들었다는 건, 상대가 죽어도 상관없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렇다면 그 대상은 이반일 것이다. 지윤은 죽여 봤자 이득이 없으니까.

‘제시를 찾을 수가 없으니 이반을 제거하자고 생각한 걸까?’

경쟁자가 없으면 페트로가 제시한 조건을 이행하지 않아도 그 자리를 차지하는 건 안톤일 수밖에 없다. 제시는 나중에 찾더라도 일단 경쟁자부터 제거하는 건 적절한 판단이었다.

비록 그 경쟁자가 자신의 동생이지만. 라브노프 일가에 정상인의 윤리를 기대하는 건 사치였다. 지윤은 목 끝까지 차오른 한숨을 툭 뱉었다.

“가능하다는 말이군요. 심지어 벌써 바뀌었을 수도 있고요.”

“…그… 어.”

거짓말을 해 봤자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안드레이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타깃을 확실히 바꾸었다고 보는 건 무리가 있어. 안톤이 지금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을걸?”

“무슨 일 있습니까?”

“…그건 말할 수 없어.”

안드레이가 입을 단호히 다물었다. 그에게서 정보를 더 얻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지윤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반을 설득해서 데려가는 게 좋겠습니다.”

“너랑 떼어 놓으라고? 난 절대 설득 못 해!”

“기절시키는 건 어떻습니까. 일단, 목숨이 위험하니까요.”

“일어나자마자 날 죽일 텐데?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저에게 약품을 주세요. 제가 하면 그로모프 씨에게 화풀이를 하지는 않겠죠.”

“아냐, 반드시 날 죽일걸. 쟤….”

‘미친놈이잖아. 상식이 안 통해.’ 안드레이의 뒷말은 은밀했다. 지윤은 마른세수를 했다. 제시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한데 이반까지….

‘아니야.’

차라리 함께 있는 게 이반을 위한 일일 수도 있었다. 이반을 따돌리기도 힘들뿐더러, 안톤은 지윤과 이반이 제시에게 가고 있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걸 역이용하면 제시에게 도착할 때까지는 이반을 건드리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아까도 미행을 눈치채지 못했다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일이 벌어져 봤자 발을 묶기 위해 타이어나 터트리는 정도였을 수도.

정말 죽일 작정이었다면 조심스레 따라올 필요 없이 바로 총을 갈겨 버렸어야 맞는데, 그들은 우리가 눈치채고 나서야 움직였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는 이반을 제거하기로 결정한 건 아니지 않을까? 안드레이의 말대로 안톤이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정보를 감안하면, 이 가설에 무게가 실렸다.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다정히 해요?”

통화를 마친 이반이 안으로 들어왔다. 안드레이와 지윤을 번갈아 쳐다보는 표정은 일견 해맑아 보였지만 안드레이는 알고 있었다. 이반의 기분이 안 좋다는 사실을.

통화 내용이 만족스럽지 않았거나, 지윤과 대화를 나눈 게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 틀림없이 후자라고 생각하며 안드레이가 입술을 비틀었다. 어휴, 저 미친놈.

“얘기는 무슨. 별말 안 했어.”

“음, 그래?”

이반은 의심하는 눈치였지만 지윤 앞에서 따져 묻지는 않았다. 때마침 다행스럽게도 인 이어를 통해 무전이 들어왔다. 이 근방에서 안톤의 부하들이 포착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심각한 얼굴로 보고를 듣던 안드레이가 지윤을 의식해 표정을 풀었다.

“그새 따라붙었나 보네. 숫자가 꽤 많다는 걸 보니 죄다 모였나 봐. 지긋지긋한 놈들, 드디어 싹 쓸어버릴 수 있겠어. 식사 마저 해. 갔다 올게.”

안드레이가 앞치마를 던지듯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그의 등을 집요하게 주시하던 이반이 이내 턱을 괴고 지윤을 쳐다보았다.

“무슨 얘기 했어요?”

지윤은 조금 갈등했다. 이반은 눈치챘을까. 안톤이 자신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순간 그가 보일 반응은 명확했다.

‘우선적으로 나와 떨어지려고 하겠지. 내가 위험해질 수도 있으니까.’

여기까지 생각하던 지윤은 문득 스치는 깨달음에 입을 살짝 벌렸다. 이반은 배신자인데. 1년 동안이나 자신을 사랑하는 척 속여 왔던 나쁜 새끼인데. 그가 그녀의 안전을 중심으로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이반이 보이는 모든 행동은 진심이 아니었다. 아무리 그에게 감정이 남았다 해도 거짓된 행동을 진심으로 착각할 정도로 자신은 어리숙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신이 그에게 최우선일 거라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서로를 사랑한다고 믿었던, 그 시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그녀가 조용히 대답했다.

“…당신 욕.”

“그걸 왜 안 들리는 곳에서 해요. 아깝게. 대놓고 하라니까.”

이반이 피식 웃더니 지윤의 입가를 쓸었다. 그러고는 손에 붙어 나온 밥알을 아무렇지 않게 제 입에 넣더니 눈을 가느다랗게 휘었다.

“맛있네. 이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당신 몸에 닿은 건 다 맛있나 봐.”

“…스크램블드에그는, 좋아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잖아요. 저번에 말하지 않았어요?”

거짓말.

그의 입술이 거짓말을 매끄럽게 뱉어 냈다. 차마 의심할 수도 없도록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가 했던 모든 거짓말도 이러했을 것이다. 행동도, 눈빛도 계산된 연기였음을 이제는 안다. 그런데도 듣고 싶어졌다. 그의 입으로, 거짓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지윤이 충동을 참지 못하고 입을 벌렸다.

“나는, 날 사랑했어?”

뜬금없는 질문에 그가 눈을 크게 떴다. 그러더니 복잡한 표정으로 미간을 찡그렸다.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넘어가야 하나 고민하는 눈치다. 그 모습을 보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 거짓말도 하기 싫은 거구나.

모텔 욕조를 고쳐 주고, 눈을 가려 주던 다정함에 흔들렸던 마음이 처참하게 무너졌다. 몸속 어딘가 구멍이 뚫려 피가 줄줄 새어 나오고 있는데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마음인지, 머리인지, 심장인지. 지윤은 제 뺨을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냥 헛소리해 본 거야. 잊어버려.”

“기다려 봐요. 생각 좀 해 보려고 그래요.”

“…그게 생각해야 할 정도로 복잡한 문제였는지는 몰랐네.”

“윤.”

이반이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이 손목에 닿기도 전에 지윤이 사정없이 뿌리쳤다.

“방금 넌 거짓으로라도 대답했어야 했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연기는 잘하면서, 정작 말해 보라니까 못 하겠어? 하긴, 넌 예전에도 사랑한단 말 한번 한 적 없었는데. 내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한 것 같네요. 미안해요, 라브노프 씨.”

숨겨 두었던 감정이 막을 틈도 없이 튀어나왔다. 젠장! 지윤은 반사적으로 아랫입술을 말아 물었다. 뉘엿뉘엿 지는 해를 보며 감정을 조절해 보려고 했지만, 자꾸만 눈가가 시큰거렸다.

왜 그런 걸 물어봤을까. 우리 사이에 그런 질문은 독이 든 상자와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굳이 상자를 열어 본 이유를 모르겠다. 이렇게 멍청할 수가. 아직도 그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한, 거짓으로라도 위로받고 싶은 자신이 눈물 날 정도로 한심했다.

지윤은 눈을 감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기진맥진했다. 몸이 아니라 정신력이 한 줌 남김없이 고갈된 기분이다.

“나 어디서 쉬면 돼.”

“2층…. 잠깐 나랑 얘기 좀 해요.”

“당신이랑 할 얘기 없어.”

지윤이 천천히 돌아서서 느릿하게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은 꼿꼿이 서 있음에도 아슬아슬해 보였다. 다 타 버려 형체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숯처럼. 이반의 눈이 그녀의 등에 따라붙었다.


 

***


 

방으로 들어온 지윤은 간단히 샤워를 하고 피스톨을 점검했다. 주황색 노을을 안개처럼 퍼트리며 지는 해를 보다 깜빡 잠들었나 보다. 일어나 보니 밖이 깜깜했다.

지윤은 시간을 확인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 이반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해야만 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싫어도 이반과 함께할 수밖에 없으니.

한숨을 흘리며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내키지 않은 몸을 움직여 거실로 나왔다. 술 한 잔을 앞에 두고 소파에 앉아 있던 이반이 고개를 들었다.

무감각한 눈빛이 지윤에게 닿자마자 개화했다. 감정을 묵직하게 품은 눈을 외면하며 지윤이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냈다.

“앉아요.”

“명령하지 마.”

“…그럼 거기서 들어요. 아까 내 태도를 오해한 것 같은데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그 얘기는 그만해.”

이반이 일어서서 지윤에게 다가왔다. 언제나 부드럽게 휘어 있던 입술이 단단히 경직되어 있었다. 이글거리는 눈을 하고선 그가 지윤의 팔을 움켜잡았다.

“왜 내 말은 안 들어요? 왜 당신 말만 해? 내가 말한다잖아. 할 말이 있다잖아.”

“더 할 말이 남았어? 남았어도, 거짓일 게 빤한데 내가 들어 줘야 하나? 그럼 아까 기회를 줬을 때 했어야지. 이미 끝났어.”

“아니, 당신은 끝낼 수 없어요.”

“끝내는 것도 허락 맡아야 되니? 왜?”

“날 사랑하잖아요.”

“…뭐?”

“날 사랑하는 거 알아.”

지윤의 얼굴에서 삐뚜름한 미소가 단번에 지워졌다. 대신 치부를 들킨 것처럼 귓가가 빠르게 달아올랐다. 부정해야 했는데 당황한 나머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등신! 스스로에게 욕을 지껄이며 팔을 뿌리쳤지만, 달라붙은 것처럼 이반의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윤이 눈을 치켜떴다.

“놔!”

“내 말 들으면 놔줄게요.”

“듣기 싫다고 했잖아!”

“싫어도 들어!”

이반의 음성이 밧줄이 되어 몸을 꽁꽁 동여매는 것 같다. 그는 언제나 그랬다. 존댓말을 하면서 내내 져 주는 것 같다가도 한 번씩 사람을 꼼짝 못 하게 짓눌렀다.

이럴 때마다 거대한 짐승의 앞발에 깔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지윤은 차갑게 웃으며 반항을 멈추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

그 순간, 모든 불이 일제히 꺼졌다. 어둠이 집 안을 삽시간에 덮쳤다. 반사적으로 밖을 보니 멀리 떨어진 다른 집은 전기가 멀쩡히 들어와 있었다. 정전이 된 곳은 이반의 빌라뿐이었다. 지윤이 재빨리 자세를 낮추며 피스톨을 꺼냈다.

“차단기 어디 있어.”

“밖에. 후원 쪽에 있어요.”

누군가 일부러 전기를 차단했다. 안톤의 부하들이겠지. 어떻게 된 거지? 분명 안드레이가 안톤의 부하들을 정리한다며 나간 지 반나절이나 지났다.

‘설마 놓친 건가? 그랬으면 안드레이가 연락을 안 했을 리 없는데….’

상황 파악을 끝낸 지윤이 탄식처럼 말을 뱉었다.

“…이쪽이 진짜야. 안드레이 쪽은 미끼였고.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겠지. 포위당하기 전에 빨리 여기서 나가야 돼.”

“웬일로 머리를 썼네요.”

이반이 픽 웃으며 핸드폰을 꺼내 문자를 전송했다. 그리고 주방 수납장을 열고 매그넘을 꺼냈다. 그와 동시에 귀청이 터지는 굉음과 함께 전면 유리가 모두 박살 났다.

투투투투투.

기관총이 초당 800발의 실탄을 집 안에 쏟아부었다. 벽이 움푹 파이고 고급스러운 소파가 단숨에 걸레가 되어 나뒹굴었다. 내장재의 잔해가 사방에서 비산했다.

지윤과 이반은 홈 바를 등지고 앉아 총성이 멎기만을 기다렸다. 대응 사격을 하기는커녕 머리를 들 수조차 없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총알들을 피해 탈출하기도 어려웠다. 유리잔을 비롯한 각종 접시들이 퍽퍽 터지면서 날카로운 파편을 뿌렸다.

이반이 지윤의 목을 끌어당겨 품에 가뒀다. 피할 수도 없게 힘을 주어 안은 손이 억셌다. 지윤은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다 몸부림을 멈췄다. 이런 상황에서도 빌어먹을 심장이 반응했다.

총성이 뚝 끊어지고 불이 다시 켜졌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엄청났던 소음이 사라지자 불길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지윤은 눈을 빠르게 깜빡거려 시야를 적응시켰다. 손가락 두 개로 자신의 눈을 가리킨 뒤 납작 엎드려 부서진 전면 창 근처로 기어갔다. 잔디를 밟는 발소리가 작게 들렸다. 열 명 남짓한 거무스름한 형체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포위망을 좁히려는 모양이다.

‘빨리 나가야 돼.’

지윤이 이반을 돌아보며 고갯짓을 했다. 앞서겠다는 신호를 보냈는데도 이반은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는데 심장이 철렁거렸다. 다시 돌아온 지윤이 이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죽고 싶어? 가만히 앉아서 뭐 하는 거야!”

이반이 지윤의 손에 차 키를 쥐여 주었다.

“후원을 지나 남쪽으로 50미터 정도 가면 은색 재규어가 있을 거예요.”

“그런데?”

“알잖아요. 엄호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

“…….”

“먼저 가요. 바로 뒤쫓아 갈 테니 잭슨빌에서 만나요.”

혼자 남아 지윤이 빠져나갈 시간을 벌겠다는 소리였다. 둘 다 빠져나가면 얼마 못 가 잡힐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적들은 다수인 데다 화력까지 갖추었으니까. 그러나 누군가 남아서 유인을 하면 탈출 확률은 높아졌다. 비록 한 사람뿐이겠지만. 지윤이 턱을 힘주어 닫았다.

“헛소리 마.”

“금방 따라간다니까요.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누군가 따라붙으면 피스톨로는 부족할 거예요. 트렁크에 총 몇 자루 들어 있으니까 그거 써요. 뭐 해요? 어서 움직여요.”

“제정신이야? 밖에 몇 명이 와 있는 줄도 모르면서, 어떻게 빠져나올 건데!”

“안드레이를 유인하느라 이쪽으로는 얼마 안 왔을 거예요.”

“안 돼. 나 혼자는 못 가.”

“저 새끼들 나 못 죽여. 내 말 믿어요.”

“네 거짓말을 또 믿으라고? 차라리 죽겠다고 해.”

“나 일어설까요? 조준 잘할 수 있도록 거실 한가운데로 가요?”

하다 하다 이제 제 목숨을 인질로 삼다니. 지윤은 입술이 하얗게 질리도록 물었다. 그녀의 손을 이반이 매몰차게 떼어 냈다. 그러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지윤의 바지에 욱여넣었다.

“도착하면 전화할게요.”

“…….”

“당신이 다칠까 봐 아무것도 못 하겠어. 방해만 된다고. 그러니까 빨리 가. 시발, 빨리 꺼지라니까!”

이반의 손길에 지윤이 뒤로 떠밀렸다. 그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잡으려 했지만 이반이 모두 쳐 냈다. 탕! 뒤로 물러선 이반이 천장을 향해 매그넘을 발사했다.

잔디를 밟는 소리가 멎었다. 철컥철컥, 장전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대로라면 둘 다 잡힌다.

‘이반은… 그래, 쉽게 죽이지 않을 거야. 그것만 찾아서 오면, 그러면 그를 구할 수 있어.’

지윤은 이반을 노려보다가 밖으로 나가 벽에 등을 붙였다. 탕, 탕! 총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발소리가 모여들었다. 투투투투, 기관총 소리가 다시 고막을 찢었다.

지윤은 포복 자세로 넓은 후원을 가로질렀다. 담장이 따로 없는 구조라 숨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멈췄다가 다시 기어가기를 반복. 겨우 밖으로 나가니 가로등 앞에 주차되어 있는 은색 재규어가 보였다.

혹시라도 남아 있을 누군가의 시선을 끌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걸어가 시동을 걸었다. 헤드라이트를 끄고 액셀러레이터를 천천히 밟았다. 재규어가 미끄러지듯 소리 없이 출발했다.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 넓은 도로에 합류할 때까지, 아무도 따라붙지 않았다. 이반이 잡고 있는 거겠지. 지윤은 미칠 것 같은 심정을 운전하는 데 쏟았다.

“그것만 가져오자. 그것만 가져오면 구할 수 있어. 그것만….”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아 어두운 거리를 내달렸다. 그러나.

끼이이익!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리던 재규어가 1마일도 가지 못하고 비명을 지르며 멈췄다. 지윤은 브레이크를 단단히 밟은 채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빌어먹을!”

사실은 짐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돌아갈 때까지 이반이 버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안톤은 기어코 이반을 죽이고야 말 것이다.

“…나랑 상관없는 일이야.”

상관없는 일이다. 그들의 관계는 끝났으니까. 그녀와 그는 서로의 안전을 걱정할 만한 관계가 아니었다. 지윤이 배신자의 신변을 걱정해 줄 정도로 마음이 넓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날 사랑하잖아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잔뜩 곪은 상처를 송곳으로 꿰뚫은 것처럼 아팠다. 동시에 원치 않은 깨달음이 이어졌다. 자신조차 이해하지 못한 마음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를 향한 사랑이 끝나지 않았음을.

그건 잘라 낸다고 잘라지는 게 아니었다. 날카로운 칼로 도려냈다고 생각했는데, 끈질긴 뿌리는 아직도 성히 남아 있었다.

미련퉁이, 등신아, 너 언제까지 그렇게 살래. 지윤은 스스로에게 욕을 중얼거리다 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트렁크를 신경질적으로 열고 그 안에 있는 작고 큰 가방들을 찬찬히 살폈다.

잠시 후, 180도로 회전한 재규어가 뿌옇게 일어난 연기를 뚫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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