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5/12)

한적한 거리를 미친 듯이 달리던 메르세데스가 흙먼지를 흩날리며 도로변에 급정지했다. 운전석 문을 박차고 나온 지윤이 부서지도록 차 문을 닫았다. 그리고 액정이 깨져 버린 핸드폰을 신경질적으로 꾹꾹 누르다가 사납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목표는 제시 아니었어?”

보조석에서 나온 이반이 차에 팔꿈치를 올리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그쪽 애들을 건드렸잖아요. 일종의 경고예요. 방해하지 말라는.”

선글라스에 하얀 티셔츠, 단순한 구제 청바지를 입은 그는 어딘가 찢어지고 군데군데 핏물이 스며든 지윤과는 다르게 멀쩡했다. 그 모습을 보는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죽을 뻔했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듯한 이반의 여유로운 모습에 기가 찼다.

‘어디 유원지에라도 놀러 나온 줄 알겠네.’

누구는 지금 돌아 버릴 지경인데. 지윤이 이를 갈았다. 그를 저격에서 구한 건 이성적인 판단에서 나온 행동이 아니었다. 그가 위험하다는 걸 깨닫는 순간, 본능처럼 몸이 먼저 움직였다.

그를 소파 뒤로 끌고 가면서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욕설을 지껄였는지 모른다. 호구도 이런 호구가 없다고.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도 그를 놓을 수는 없었다. 매일 모닝커피를 건네주었던 커다란 손, 뜨겁게 부둥켜안았던 몸, 따뜻했던 시선. 전부 가식이었다는 걸 아는 데도 도무지 마음이 끊어지지가 않았다. 멍청하게도 그에게 속았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목격했으면서.

정신 차려. 그는 이반이 아니야. 일리야 페트로비치 라브노프지. 지윤은 무너질 것 같은 심정을 다그쳤다.

“경고? 이마 한가운데에 총알을 박으려고 했는데, 그냥 경고라고? 라브노프 일가는 경고를 그딴 식으로 해?”

“죽일 생각까지는 없었을 거예요. 아마 귀 정도 날려 버리려고 했겠죠. 당신이 방해해서 아무것도 못 했으니 돌아가면 혼 좀 날걸요?”

잠시 말을 멈춘 그가 한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뭔가를 회상하듯 혀끝으로 뾰족한 송곳니를 쓸다가 돌연 진하게 웃었다.

“당신이 사격을 그렇게 잘할 줄은 몰랐어. 또 반했지 뭐예요.”

다소 상기되어 있던 지윤의 낯빛이 단숨에 서늘해졌다. 이반을 노려보던 그녀가 눈도 떼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네 부하들한테 연락해. 위치 알려 주고 너 데리러 오라고 해.”

그가 인 이어와 연결되어 있는 무전기 본체를 들더니 달랑달랑 흔들었다.

“고장 났어요.”

“핸드폰은?”

“없어요. 나오면서 흘렸나 봐.”

“…….”

“못 믿겠으면 확인해 봐요. 흥분되겠지만 참아 볼게요.”

“…빌어먹을!”

지윤이 참지 못하고 욕설을 터트렸다. 버릇처럼 입술을 자근자근 씹으며 성난 짐승처럼 서성거리는 그녀에게 이반의 시선이 고요히 따라붙었다.

“쉴 곳이 필요해요.”

“뭐?”

“당신 치료도 해야 하고. 우리 둘 다 한숨도 못 잤잖아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갑자기 입꼬리를 느른히 올렸다.

“…그래, 네 말이 맞아.”

“음? 웬일이에요?”

“물러서.”

지윤이 뒷주머니에서 피스톨을 꺼내 이반을 조준했다. 까딱까딱하는 총구를 따라 이반이 차에서 천천히 떨어졌다.

“넌 너대로, 난 나대로. 각자 쉬자고.”

“…설마, 나 버리려는 건 아니죠?”

“도심에서 빠져나온 지 세 시간밖에 안 지났어. 열심히 걸어가면 오늘 중으로는 도착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목숨을 위협받는 건 아니라며?”

“혼자 어디 가려고?”

“말했잖아. 안전 가옥 있다고.”

“윤.”

이반의 목소리가 위압적으로 낮아졌다. 그러나 지윤은 아랑곳하지 않고 운전석 문을 열었다.

“잘 가세요, 라브노프 씨. 후계 전쟁인지 뭔지, 빌어먹을 것에서 웬만하면 살아남길 바랄게요.”

싱긋, 가면 같은 웃음을 던지고 차에 탄 그녀는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혹시나 따라오기라도 할까 봐 두려운지 액셀러레이터를 끝까지 밟은 모양이다. 차가 굉음을 내면서 쏜살같이 멀어졌다.

“와, 진짜 너무하네.”

이반은 손을 저어 메케한 연기를 밀어내다 피식 웃었다. 가차 없이 버려졌는데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차가운 표정과 건조한 입술에서 나오는 비아냥거림은 단번에 페니스가 빳빳해질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그녀가 강한 사람이라, 쉽게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라 더 좋았다. 아버지에게 끌려다니다 결국 아들과 함께 동반 자살까지 시도한 어머니와 정반대의 성격이라서.

큭. 이반은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렸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빠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니. 뭘 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아 사이코패스인가, 혼자 생각했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이반이 웃음기 남은 얼굴로 허리춤을 더듬었다. 지윤에게 잃어버렸다고 말한 핸드폰을 멀쩡히 손에 들고 액정을 터치했다. 신호음 한 번 만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출발해.”

이반은 대답도 듣지 않고 통화를 종료했다.


 

***


 

“그분은 한 시간쯤 전에 나가셨는데요. 슈퍼마켓에 가신다고.”

“슈퍼마켓까지 거리는?”

“서쪽으로 10마일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일행입니까?”

모텔 종업원이 안드레이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훑었다. 안드레이가 선글라스를 벗고 순박한 눈을 깜빡거리자 종업원의 눈초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일행이라고 하셔도 객실을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조금 전에도 두 명의 남자가 손님을 찾아왔다가 돌아가셨어요. 두 분도 기다리시든가 아니면 손님과 연락을 한번 해 보시죠. 일행이라면요.”

안드레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관심조차 없는 듯 떨어져 있던 이반이 카운터로 천천히 걸어왔다. 그저 다가오는 것뿐인데도 압박감을 느낀 종업원이 어깨를 움츠렸다.

“피터슨? 다시 말해 보세요.”

이반이 종업원의 명찰을 힐끔 보고는 부드럽게 웃었다. 서리가 뚝뚝 떨어질 정도로 서늘한 목소리 탓일까. 잠시 정신이 팔렸을 만큼 매혹적인 미소인데도 묘하게 소름이 돋았다. 종업원은 솜털이 일어난 팔을 테이블 아래로 내려 가렸다.

“…워, 원래 손님의 정보는 함부로 알려 줄 수가 없어서요. 소송이라도 걸리면 장사 접어야 해서….”

“그쪽 사정 따위는 관심 없고. 그러니까 두 명의 남자가 그녀를 찾아왔다는 거죠?”

“어, 예. 그, 그런데요. 손님이 외출한 뒤 찾아오신 거라 만나진 못했지만요.”

“이 남자처럼 생겼던가요?”

창백한 피부와 주근깨, 붉은 고수머리, 2미터를 넘는 장신. 피터슨은 슬라브인의 특성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안드레이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고개를 마구 끄덕거렸다. 이반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오늘 내가 이 모텔을 통째로 빌릴게요.”

“예… 예에? 여길, 다요?”

“간판은 그대로 켜 두고 손님만 받지 말아요. 215호 스페어키 있죠?”

정확히 지윤에게 빌려준 객실이었다. 피터슨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러자 이반이 길쭉한 손가락으로 그의 뒤를 가리켰다. 객실별로 열쇠를 놔두는 함에 215호만 비어 있었다.

지윤이 오늘 모텔에 찾아온 단 한 명의 손님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머쓱함을 감추며 피터슨이 소심하게 웅얼거렸다.

“저기, 그래도 규정상 안 되는데….”

“내 애인이에요. 같이 찍은 사진이라도 보여 줘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반이 대답했다. 테이블에 기대며 싱긋 웃는 그의 모습은 이를 드러낸 맹수 같았다. 겁에 질린 피터슨은 안 된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때마침 이반의 뒤에 서 있던 안드레이가 마침 슈트 안으로 손을 넣었다. 슈트가 젖혀지면서 허리춤에 달려 있던 시커먼 총 손잡이가 살짝 드러났다. 그걸 본 피터슨이 허옇게 질린 얼굴로 고개를 마구 저었다.

“아, 아닙니다! 여기 있습니다!”

열쇠를 받아 든 이반이 모텔 명함을 한 장 챙겨 돌아섰다. 그제야 안드레이가 슈트 안주머니에서 현금 뭉치를 꺼내 통째로 건넸다.

신용 카드도 아닌 현금, 그것도 모텔 전체를 일주일 내내 빌려도 남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피터슨이 덜덜 떨리는 손으로 현금 뭉치를 들고 있다가 황급히 안드레이를 붙잡았다.

“너, 너무 많습니다, 손님!”

“수리 비용으로 써.”

되묻지도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리는 피터슨을 놔두고 안드레이가 이반을 따라나섰다.

“우리가 오는 사이에 안톤 쪽에서 먼저 따라붙은 모양인데… 객실 호수만 확인하고 조용히 물러난 것 같아.”

이반이 무표정한 얼굴로 머리를 넘겼다. 어느 객실이 나갔는지 다 알도록 훤히 보이는 곳에 키를 보관하는 주제에 소송은 무섭다니. 종업원의 얼굴에 주먹을 날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야 했다.

“슈퍼마켓 쪽으로 애들 보내. 안전한지 멀리서 확인만 하라고.”

“알았어. 객실로 찾아가는 놈들은 어떻게 할래? 내가 처리할까?”

“밖에서 대기하다가 도망치는 놈이나 잡아.”

안드레이가 해괴한 소리라도 들은 듯 눈썹을 치켜세웠다.

“도망치는 놈? 놔 줄거야?”

“실수할 수도 있잖아.”

“퍽이나.”

코웃음을 친 안드레이가 검은 가방을 내밀었다.

“죽이지나 마라. FBI, CIA, 죄다 냄새 맡은 거 알지? 여기서 더 사고 치면 추방당할 수도 있어.”

가방을 건네받은 이반이 대답 없이 객실을 향해 걸어갔다. 널찍한 등을 보며 안드레이가 혀를 찼다. 겉으로는 산책이라도 나온 것처럼 느긋해 보이지만 기분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지윤이 조금만 늦었어도 안톤 쪽 놈들과 마주칠 수 있었으니까.

안드레이는 돌아가면서 팔을 한 바퀴 크게 돌렸다. 이반의 명령인 만큼 직접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일이 끝날 때까지는 꼼짝없이 조준경만 들여다봐야겠지.

부하들이 보는 데서 그러고 있는 게 면이 안 서긴 하지만 솔직히 흥분되는 건 사실이었다. 사격 선수 출신에다 저격수로 군 복무를 했던 전성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아 두근거렸다. 그가 씩 웃으며 인 이어를 귀에 꽂았다.

“준비해.”

215호에 들어선 이반은 카운터에서 가져온 명함을 문틈에 끼워 놓았다. 좁아터진 객실은 냄새마저 텁텁했다.

희미하게 배어 있는 담배 냄새, 후줄근한 커튼, 세탁은 했는지 의심스러운 천 소파, 담배 자국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는 테이블. 침대 시트는 깨끗했지만 그마저도 오래된 티를 냈다.

지윤이 그를 버리고 반나절이나 운전해 와서는 굳이 이런 낡은 모텔을 선택한 이유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반과 안톤의 부하들을 따돌리기 위함이겠지.

그러나 이해한다고 해서 마음까지 괜찮다는 건 아니다. 이런 곳에서 홀로 하룻밤을 지낼 그녀를 생각하니 속이 끓었다.

이반은 정체 모를 얼룩이 넓게 퍼져 있는 소파를 가만히 보다가 침대 끝에 앉았다. 그리고 눈을 감자 자연스레 지윤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갑고 냉소적인 미소, 잘 벼려진 검처럼 새파랗게 빛났던 눈동자, 증오가 담긴 매서운 눈빛.

한참 뒤에 눈을 뜨고 시선을 내렸다. 당연하게도 바지 앞섶이 불쑥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것만으로 불알이 땅기고 아지랑이가 핀 것처럼 페니스가 간질거렸다. 감정이 담기지 않는 눈으로 바짓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보던 그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발소리. 남자. 두 명.

이반은 문 바로 옆 벽에 서서 기다렸다. 곧 문손잡이가 조심스레 돌아갔다. 미리 끼워 놓았던 명함 덕분에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놈들이 뭔가 수상함을 느꼈는지 잠시 가만히 있더니 소리 없이 문을 밀었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 소리와 함께 문이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카펫을 밟는 발소리가 아주 작게 이어졌다. 문을 넘어 소음기를 단 글록 17과 그것을 움켜잡은 털북숭이 손이 보였다.

문과 벽 사이에 서 있던 이반은 문을 발로 차면서 남자의 팔을 잡고 단번에 꺾었다. 문 모서리를 지지대 삼아 반대로 꺾인 팔꿈치에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울렸다.

우두둑!

“끄아아악!”

팔이 부러진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나뒹굴었다. 뒤에서 따라 들어오던 놈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이반이 총을 든 놈의 손을 낚아채 강하게 끌어당겼다. 쾅! 남자가 객실 안으로 튕기듯 빨려 들어오자마자 문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닫혔다.

“сука(개새끼)!”

이반과 한방에 갇힌 놈의 얼굴이 순식간에 공포로 물들었다. 그가 이반에게 잡힌 손을 필사적으로 움직여 방아쇠를 당겼다. 조준이 크게 흔들리면서 총알이 소파 옆, 바닥에 가서 박혔다. 동그랗게 뚫린 카펫을 보며 이반이 눈썹을 들어 올렸다. 실탄 자국을 지윤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내가 개새끼는 맞는데, 이건 곤란하지.”

“이, 일리야 님! 사, 살려… 컥!”

이반이 더 이상 발사되지 못하도록 글록 17의 슬라이드[2]를 단단히 움켜잡고 팔꿈치로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겁에 질려 잘못을 빌던 남자가 얼굴을 감싸며 무릎을 꿇었다. 코와 입에서 시뻘건 피가 쏟아져 나왔다. 핏방울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이반이 재빨리 놈의 슈트를 끌어당겨서 그의 얼굴을 틀어막았다.

“조심해야죠. 내 애인이 자는 방에 다른 새끼 피가 떨어져 있으면 내 기분이 좆같잖아요.”

슈트로 피를 막은 남자가 고개를 황급히 끄덕거렸다. 이반은 땀에 젖은 남자의 정수리를 도닥거려 준 뒤 총을 뺏었다. 팔을 붙잡고 신음하는 남자가 떨어뜨린 총까지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는 안드레이와 통화했다.

“데려가.”

- 블랙백(black bag, 시체를 담는 가방)이 필요한 건 아니지? 애들 보낼게.

얼마 후 부하들이 들이닥쳐 놈들을 끌고 조용히 나갔다. 이반은 바닥에 생긴 실탄 자국을 보며 고민했다. 그러다 그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놈들에게서 뺏은 총을 넣었다. 어차피 지윤은 이반의 가방에 손도 대지 않을 것이다.

혹시 땀 냄새가 남았을까 싶어 환기를 하고 바닥을 한 번 더 꼼꼼히 살폈다. 이윽고 다시 침대에 앉은 이반의 모습은 처음 객실에 들어왔을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


 

슈퍼마켓에서 저렴한 티셔츠와 물과 소독약을 사고 차에 기름을 넣고 나니 해가 지고 있었다. 지윤은 완전히 어두워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가장 먼 경로를 선택해 모텔로 돌아왔다.

차를 가장 후미진 구석에 주차하려다 보니 아까까지만 해도 없었던 아우디가 세워져 있었다. 이런 모텔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고급 세단에 지윤이 가까이 다가갔다.

긁힌 자국 하나 없이 매끈한 표면이 가로등의 불빛을 반사했다. 타이어를 보니 뽑은 지 얼마 안 된 새 차다. 깨끗한 내부에는 운전자를 짐작할 만한 물건은 없었다. 보닛 위에 손바닥을 얹자 잔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도착한 지 한 시간은 넘었다는 의미다.

지윤은 허리춤에서 피스톨을 꺼내 객실로 올라갔다. 다른 객실 손님인 척, 태연히 걸어가다가 문을 지나자마자 벽에 바짝 붙었다. 팔을 뻗어 문손잡이를 돌려 보니 처음부터 잠기지 않은 듯, 부드럽게 돌아갔다.

안에 누군가 있다.

지윤이 객실 문을 손가락으로 툭 밀었다. 끼이익, 하고 벌어지는 문이 닫히지 않도록 발로 지탱하고 피스톨을 단단히 잡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순간적으로 환상인 줄 알았다. 지윤은 침대에 앉아 있는 이반을 보고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떻게….”

일부러 국도를 타고 기름이 간당간당해질 때까지 운전해서 가장 지저분한 모텔을 골랐다. 그러고도 미행이 붙었을까 봐 몇 번이나 길을 돌면서 확인했는데…. 그때, 메르세데스의 미끈한 차체가 퍼뜩 떠올랐다.

‘젠장!’

차에 위치 추적기를 숨겨 놨었나. 아니면 차 키에? 그걸 이제야 생각해 내다니! 멍청하기는! 지윤은 눈을 질끈 감아 목까지 차오른 욕설을 삼켰다.

“밖에 주차되어 있는 아우디, 당신 거야?”

“네.”

그나마 안톤의 부하들이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지윤은 피스톨을 내렸다. 긴장으로 솟아 있던 어깨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여기가 안전 가옥이에요? 생각보다 후지네요.”

지윤은 혀끝을 씹다가 태연히 문을 닫았다. 슈퍼마켓 로고가 찍힌 봉투를 내려놓고 물을 꺼내 마셨다. 시간이 필요했다. 그를 보자마자 뜨거워진 심장을 차갑게 가라앉힐 시간이.

이반이 천천히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왔다. 익숙한 향기가 점점 진해진다. 다소 가라앉았던 심장이 다시 발버둥을 쳤다. 미친. 내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구나. 지윤이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당신에게 안전 가옥 따위 없다는 거 알아요. 나 따돌리고 혼자서 제시를 보호해 주려는 거잖아요, 지금.”

“…….”

“그거, 별로 좋은 생각 아니라고 어제 말했잖아요. 겪어 보고도 몰라요? 안톤은 당신 혼자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고, 꼭 말로 해 줘야 돼요?”

“그럼! 제시가 위험에 빠졌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두고 보기만 하라는 거야? 그 애가 몇 살인 줄 알아?”

“…정말, 혼자서 제시를 보호해 줄 생각이었군요.”

확신한 게 아니라 떠보는 거였구나. 지윤은 아차 싶어 대답하지 않았다. 표정도 지워 버렸다.

요원은 적에게 취조당할 때를 대비해 훈련을 받는다더니, 지금 지윤의 모습이 딱 그러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예 아무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반의 입매가 냉랭하게 굳었다.

“자꾸 자극하지 마요. 만난 적도 없는 여동생, 없애고 싶게 만들지 말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말을 그가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럽게 말했다. 그 격차가 너무나 커서 소름이 돋았다. 지윤이 뒤늦게 미간을 사납게 접었다.

“정신 나간 소리 좀 그만해! 그 애를 지켜야 네가 산다며. 살고 싶어서 전쟁에 끼어든 거라며!”

“내 목숨보다 당신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진 않을게요. 어차피 믿지도 않을 테니까. 마음대로 생각해요. 하지만 내 눈 밖으로 벗어나는 건 안 돼. 다 죽여 버리는 수가 있어요.”

“왜, 콘크리트 발라서 수장이라도 하려고?”

“사람 하나 해치우는데 그런 수고까지야. 갈아서 뿌려 버리면 그만인데.”

“어련하시겠어요, 라브노프 씨.”

지윤이 비아냥거리자 이반이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당신을 그렇게 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에요. 당신을 내 눈 밖으로 나가게 하는 요인을 없애겠다는 말이지. 생각해 봐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오히려 납치범들에게서 구해 줬잖아. 그런데 왜 날 나쁜 새끼처럼 대하지? 정말 나쁜 새끼가 뭔지 보여 줘요?”

“협박하는 거야? 그래, 어디 한번 해 봐.”

지윤의 기색이 도전적으로 바뀌었다. 이반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지윤의 팔을 흘끔 보고는 한 발자국 물러섰다.

“미안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내가 당신에게 아무 짓도 못 한다는 거 알잖아요. 상처 치료부터 해요.”

“왜 말을 돌려? 보여 주겠다며?”

“알았으니까 치료부터 하자고.”

이반이 지윤의 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손끝이 닿기도 전에 지윤이 그의 팔목을 낚아채 앞으로 잡아당겼다. 중심을 잃은 이반이 휘청거리면서 끌려왔다. 그 반동을 이용해 그의 등 뒤로 가 팔목을 꺾었다. 그리고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이고는 귓가에 속삭였다.

“라브노프 씨, 실망인데요? 이 정도의 실력으로 여자를 협박하면 안 되죠.”

이반의 등이 들썩거렸다. 그는 벽에 얼굴을 붙인 채 나직하게 웃고 있었다. 팔을 탈구되기 직전까지 꺾었는데도 인상 한번 쓰지 않았다. 고통을 아예 못 느끼는 사람처럼.

지윤이 당황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이반이 몸을 돌렸다. 팔이 부러져도 상관없는지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오히려 지윤이 놀라 팔을 황급히 놓아주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이반의 입가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풀려난 손으로 지윤을 단단히 잡고 빙 돌려 벽에 붙였다. 반격하려는 그녀의 손을 잡아 머리 위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순식간에 역전된 자세에 지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에게 잡힌 팔이 밧줄로 묶인 것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아랫배에 딱딱하게 발기되어 있는 이반의 페니스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이반의 얼굴이 코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졌다. 그녀의 눈을 파헤치듯 들여다보던 그가 귓가에 속삭였다.

“사실 난 나쁜 놈이 아니라 미친놈이에요. 지금 당장 당신의 구멍 속에 좆을 쑤셔 박고 싶어서 돌아 버린 개새끼. 이런 걸 원해요? 더 보여 줘요?”

“이반!”

“놀란 척하지 마.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내가, 당신 발가락만 봐도 발정 난 개새끼처럼 질질 싸는 거, 알고 있었잖아.”

지윤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그래서 일부러 그를 거절한 적도 있었다. 그가 매달리는 게 좋아서.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짜릿해서. 이 남자가 나를 얼마나 원하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괜찮아요. 당신이 원하면 하루 종일 세우고 있을 수도 있어요. 구멍에 안 박아도 돼요. 거절하면서도 자지를 흘끔거리는 당신의 표정만 봐도 쌀 수 있거든. 난.”

그가 지윤의 아랫배에 페니스를 비볐다. 천천히 문지르기만 하던 행동이 점점 거칠게 변했다. 마치 페니스를 질구에 밀어 넣은 것처럼 허리를 노골적으로 쳐올렸다.

“후….”

이반이 한숨처럼 신음하며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더운 숨결이 연신 터져 나와 지윤의 볼을 달궜다.

아랫배가 뜨거웠다. 밑이 저릿하고 팬티가 불편할 정도로 축축해졌다. 지윤은 흉포하게 일렁이는 이반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당신은 흥분하면 눈부터 젖어요. 그걸 볼 때마다 입 안에 침이 고이죠. 입에 넣고 굴리면 야한 맛이 날 것 같아서. 당신의 아래처럼. 핥아도 돼요?”

“꿈도 꾸지 마.”

이반이 입가를 부드럽게 휘었다. 보란 듯이 혀를 내밀어 눈 대신, 긁히고 상처 난 지윤의 팔을 길게 핥았다.

“윽!”

짤막한 신음 소리가 들리자마자 이반의 손에서 썰물처럼 힘이 빠져나갔다. 절대로 벗어날 수 없도록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할 때는 언제고. 너무나 쉽게 풀어 주자 지윤이 어리둥절해 눈을 깜빡거렸다. 이반이 허탈하게 웃었다.

“이거 봐요. 난 당신에게 아무 짓도 못 한다니까. 하고 싶어 돌아 버릴 지경인데, 당신이 아픈 게 더 신경 쓰여.”

지윤을 보는 그의 눈빛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조금 전까지 지윤에게 페니스를 비비며 천박하게 속삭이던 입술도 단정히 다물렸다.

“그러니까 치료해요. 나 또 미친 짓 하는 거 보고 싶지 않으면.”

특별한 말도 아닌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손목을 살며시 잡는 손에서 조바심이 느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작은 신음 소리만으로 그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아서일지도 모른다. 지윤은 그의 손에 이끌려 침대에 가면서도 소심하게 반항했다.

“…내가 해.”

“앉아요.”

명령하듯 칼로 자른 듯한 말투였다. 지윤이 그를 응시하다 침대에 앉았다.

“소독약, 저기 있어.”

“알아요.”

이반은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녀가 사 온 소독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테이블 옆에 놔둔 가방을 뒤적거려 뭔가를 찾았다. 달그락달그락, 가방 안에서 익숙한 소리가 들렸다. 쇠붙이 부대끼는 소리. 저 안에 적어도 두 자루 이상의 총기가 들어 있는 것 같다.

지윤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이반이 가방에서 꺼낸 스프레이로 상처를 소독하고 그 위에 연고를 바른 뒤 붕대로 덮을 때까지,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말끔하게 붕대를 감은 그가 지윤의 다리를 눈으로 가리켰다.

“바지 벗어요. 허벅지도 다쳤잖아.”

“…….”

“아무 짓도 안 해. 다시 확인시켜 줘요?”

지윤이 일어서서 바지를 벗었다. 다리를 타고 내려가는 바지를 이반이 눈으로 집요하게 좇았다. 그가 턱을 힘주어 닫았다. 발기된 페니스가 바지 밖으로 확연히 드러날 정도로 흥분했으면서도 그에게서는 음탕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저 기계적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연고를 발랐다.

그 모습이 이상하게도 가슴을 울렸다. 마치 멀미를 하는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이반은 나를 사랑했을까.

생각해 보면 그에게 직접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굳이 말로 듣지 않아도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느껴졌기에, 그래서 단 한 번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게 제시를 찾기 위한 거짓임을 깨닫고 난 뒤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뭘까. 자꾸만 그를 믿고 싶어졌다. 다시 배신당할 게 뻔한데, 그럼에도 그에게 속아 주고 싶었다. 마른침만 삼키고 있는 지윤의 허벅지를 이반이 톡톡 두드렸다.

“붕대는 안 감을게요. 불편해도 오늘 하루만 바지 입지 마요.”

“…씻고 싶어.”

“닦아 줄까요?”

지윤은 매몰차게 일어나 욕실 문을 열었다. 이반이 피식 웃더니 지윤이 들고 온 종이봉투를 열어 구제 티셔츠를 들어 올렸다.

“…누가 입던 거라도 벗겨 온 거예요? 옷 가져왔으니까 그거 입어요. 속옷도 사 왔어요.”

지윤은 욕실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고 문 앞에서 그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반이 티셔츠를 휴지통에 처박고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요? 더러워요?”

낡고 허름한 모텔은 수리할 곳이 많았다. 하필이면 욕조 수도꼭지에 문제가 있었는지 새어 나온 물이 욕조에 반쯤 차 있었다. 지윤은 그걸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이반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그녀를 다시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을 크게 떴다. 지윤이 숨을 쉬지 않았다.

“윤!”

지윤의 목에서 쉭쉭거리는 소리가 났다. 필사적으로 숨을 쉬려고 했지만, 물속에 처박힌 것처럼 숨통이 막혔다. 차가운 공포가 피를 얼려 버리고 발목을 붙잡아 호수 밑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제시! 제시를 먼저 구해 줘! 난 괜찮으니까 제시 먼저…!”


 

숨은 쉴 수가 없는데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욕조를 채운 물 안에서 해초처럼 흔들거리는 붉은 머리가 보였다. 마틸다의 머리카락. 눈앞이 까맣게 물들었다. 부릅뜬 지윤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나 좀 봐요. 나 좀 봐! 당신 왜 이래! 날 봐!”

공기가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목구멍에 걸렸다. 크게 벌어진 입술이 퍼렇게 변해 갔다. 이반이 나무토막처럼 굳은 지윤을 안아 욕실에서 멀찍이 떨어뜨렸다. 쾅! 욕실 문이 닫히자 그제야 수면 밖으로 튀어나온 잠수부처럼 그녀가 숨을 들이켰다.

“허억! 컥! 끅, 끄윽, 헉! 헉!”

이반이 그녀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최대한 몸을 구부리게 하고 이마가 바닥에 닿도록 눌렀다.

지윤은 배 속의 태아처럼 사지를 웅크린 채 헐떡거렸다. 멈춰 버렸던 정신이 서서히 돌아왔다. 제 몸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는 이반의 온기가, 그의 무게가, 눈물 날 만큼 안도감을 주었다. 지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바닥에 그녀의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쉬, 괜찮아요. 조금만 이렇게 있어요.”

지윤은 자신에게 트라우마가 생겼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내부 조사를 받고, 받고, 또 받고. 자다가도 툭 치면 줄줄 읊을 정도로 신물 나게 같은 말을 반복했었다.

해리슨의 배신과 동료들의 시선, 상부의 압박. 견디다 못해 내부 조사가 시작된 지 3개월 만에 침묵 서약에 서명하고 사표를 제출했다. 에일린이라는 이름도 버리고 성 또한 어머니 성으로 바꿨다.

그러고 나서야 깨달았다. 욕조에 물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 좁은 공간에 고여 있는 물을 보기만 해도 목을 누가 움켜쥔 것처럼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심지어 세면대에 물을 받는 것조차 꺼려졌다.

아무리 상담을 받아도 나아지지 않았다. 애초에 어떻게 해서 트라우마가 생겼는지 설명할 수가 없다 보니 도움이 될 리가 없었다.

벗어날 길은 없었다. 그저 바다가 보이지 않는, 하천조차 없는 시내 한복판에서 사는 수밖에.

이반이 힘없이 늘어지는 지윤을 안아 침대에 눕혔다. 그리고 젖은 수건을 가져와 식은땀과 눈물로 범벅된 지윤의 얼굴을 닦아 주었다. 차가운 물기가 그녀의 열기를 가라앉혔다.

지윤은 눈을 감은 채 깊은숨을 내쉬었다. 약점이나 다름없는 치부가 모조리 까발려져 세상에 공개된 기분이었다. 차라리 이반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텐데.

이반에게만큼은 절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제는 남보다 더 못한 사이가 되었는데도 병들어 버린 마음은 끝까지 숨기고 싶었다.

지윤은 이반의 손을 밀어낸 뒤 등을 지고 누웠다. 아예 자려는 듯 눈을 감아 버리자 이반이 잠시 후 불을 꺼 주었다.

2인용 낡은 천 소파가 그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삐그덕삐그덕 앓는 소리를 냈다. 그 작은 소파에서 어떻게 자려는 건지. 다리조차 뻗기 힘들 텐데. 그가 어떻게 누워 있는지 보고 싶었지만 일부러 눈을 꾹 감았다.

감은 눈 안으로 잔상이 보였다. 실처럼 나부끼는 붉은 머리카락. 발작을 한번 겪고 나면 한동안 어둠이 너무 무서웠다. 그 까맣고 뿌연 호수 밑바닥 같아서. 숨을 쉬고 있는데도 물속에 잠긴 것 같아서. 지윤은 시트가 찢어지도록 부여잡았다.

그때,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침대 위로 올라온 이반이 옆에 조용히 누워 그녀를 가만히 끌어안았다. 지윤은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아 목젖을 꽉 짓눌렀다.

“뭐 하는 짓이야.”

“혼자 자기 무서워서 그래요. 그냥 안고만 있을게요. 당신 잠들 때까지.”

“…총 들고 잘 거야.”

“그래요. 내가 이상한 짓 하면 막 갈겨 버려요.”

말과는 다르게 그의 페니스는 엉덩이를 쿡쿡 찌르고 있었다. 지윤이 고개를 돌려 노려보자 이반이 눈썹을 늘어뜨렸다.

“이건 좀 봐줘요. 당신을 안고 있는데 안 서는 게 더 이상하잖아.”

“허튼짓하지 마.”

“안 해요. 얼른 자요. 눈이 피곤해 보여.”

그는 정말 손도 까딱하지 않았다. 고르게 이어지는 숨소리를 들어 보니 잠들어 버린 것 같았다. 페니스를 뻣뻣하게 세우고는. 혹시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잔뜩 긴장했던 자신만 우스웠다.

지윤은 몸에 힘을 풀었다. 등에 그의 너른 가슴이 닿았다. 단단한 감촉이 안정감을 준다. 두근, 두근. 누구의 것인지 모를 심장 소리가 조그맣게 울렸다. 지윤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왠지 깊은 잠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나직하게 들렸다. 이반은 지윤이 잠들기만을 기다리다 조용히 눈을 떴다. 아기처럼 한껏 웅크리고 자는 지윤을 바짝 끌어안고 다리를 구부려 그녀의 몸을 제 안에 완벽히 가뒀다.

그녀가 상담을 받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벌써 2년이나 되었다는 사실도 이미 확인했다. 불명예스럽게 일을 그만두었으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했을 뿐, 굳이 상담 내용까지 알아보진 않았다. 그녀가 스스로 말해 주길 바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이리도 지독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건 몰랐다. 욕조를 사용하지 않거나, 유독 바다나 호수를 기피하는 것도 단순한 취향 차이라고 가볍게 넘겼다.

“나란 새끼, 진짜 죽이고 싶네.”

살면서 두려움을 느껴 본 적은 거의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지윤이 공포에 사로잡혀 있을 때,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들었던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에 갇힌 것처럼 절망스러웠다.

동시에, 그녀를 섬에 가둬 두면 도망가지 못하겠구나, 라고 생각한 자신이 소름 끼쳤다.

이반은 지윤의 뒤통수에 조심스레 입술을 눌렀다. 그리고 서늘한 눈으로 어둠을 노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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