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4/12)

“허어, 우리 윤, 총 좀 사 줘야겠어. 이런 건 여덟 살짜리 내 조카도 거들떠보지 않는 건데. 쯧쯧쯧.”

안드레이가 그의 손에는 장난감처럼 보이는 피스톨을 훑어보다 혀를 찼다. 피스톨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선글라스를 벗자, 2미터에 육박하는 덩치와 어울리지 않는 순박한 얼굴이 드러났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계획대로 해.”

이반이 기절한 채 소파에 누워 있는 지윤을 내려다보다 입술만 달싹여 대답했다. 그녀의 볼에 붙어 있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던 그가 불쑥 물었다.

“차는.”

“한 블록 뒤. 공원 앞의 검은 메르세데스.”

안드레이가 이반에게 차 키를 건넸다. 그러고는 이반의 눈치를 흘끔 보더니 고슬고슬한 붉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저기, 일리야, 네가 일부러 납치를 당해 주기까지 했는데도 안톤의 애들을 다 쓸어 버리지 못했어. 남은 놈들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고. 게다가 이번일로 안톤은 너를 완벽한 적으로 인식할 거야. 아마 애들을 더 보내겠지. 그 새끼, 끝까지 발버둥 칠 거다.”

이반은 대꾸도 하지 않고 시선을 들지도 않았다. 관심조차 없어 보이는 그에게 안드레이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너도 알고 있겠지만, 안톤이 후계가 되려면 꼭 제시가 없어도 돼. 너만 제거하면 되니까. 사실 형제를 죽였다는 더러운 소문만 감수하면, 훨씬 더 편하고 깔끔한 방법이긴 하지. 네 계획대로 일이 안 풀릴 수도 있다는 말이야.”

페트로도 아들들끼리 피를 흘릴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금지하지 않았다. 후계 다툼에 상대방을 직접 치지 말라는 법도 없을뿐더러, 본인이 형제들을 제거함으로써 그 자리를 거머쥐었기 때문이다.

부친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다른 먹잇감인 제시를 던져 줌으로써 끝났다. 안톤은 페트로의 명령을 존중해 주는 척, 일단은 제시를 찾고는 있지만 최후의 수단을 생각해 놓을 건 분명했다.

라브노프 일가의 방산업체는 대표자만 이반의 이름으로 되어 있을 뿐, 사촌인 안드레이가 운영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반이 안드레이를 움직였다. 거래만 안드레이가 나설 뿐, 개발 계획부터 거래 품목 확정까지 모두 이반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굳이 복잡하게 운영하는 이유는,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이라도 아들이 평범하게 살길 바랐던 모친 때문이다. 부친인 페트로조차 코웃음을 치는 모친의 바람을 이반은 착실하게 따랐다.

안드레이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일어났다.

“윤이 슬슬 깰 때 됐네. 가 볼게. 너도 잘 생각해 봐.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증거를 찾기보다는 네 손으로 확실히 끝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니까.”

한마디도 꺼내지 않을 것 같던 이반이 돌연 그를 불렀다.

“앤디.”

“응?”

“한 번만 더 윤이라고 부르면 입 찢어 버린다.”

“…이 상황에서 그게 할 말이냐?”

“대답.”

“아, 알았어!”

‘내가 더러워서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안드레이가 쿵쾅쿵쾅 토라진 티를 내면서 밖으로 나갔다. 이반보다 여섯 살이나 위지만 아이 같은 면이 있어 신상 무기 하나만 들려 주면 금세 마음을 풀었다. 이반은 가만히 있다가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지윤의 옷을 벗겼다.


 

***


 

지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집이었다. 눈을 깜빡거려 몽롱하게 잠긴 머리가 깨어나기만을 기다렸다.

“물이에요, 마셔요.”

“치워.”

“정신없잖아요. 물을 마셔야 약 기운이 빨리 사라져요.”

“치우라고 했어.”

“내가 먹여 주는 수가 있어요. 입으로. 그걸 원해요?”

그래, 이런 쓸데없는 소모전으로 힘 빼지 말자. 지윤은 이반의 손에서 낚아채듯이 물컵을 빼앗았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마시고 몸에 이상이 있는지 잠시 기다렸다가 나머지를 단번에 들이켰다. 그녀를 보는 이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꼭 상처받은 짐승처럼. 지윤은 코웃음을 쳤다.

‘그런 표정을 지을 사람은 바로 나야.’

지윤은 매몰차게 시선을 돌렸다. 테이블 위에 피범벅 되어 본래의 색깔을 잃어버린 옷이 가지런하게 접혀 있었다. 속옷까지도. 그제야 발목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이반이 피스톨을 가져간 걸까. 무장 해제는 당연한 수순이었기에 실망스럽지는 않았다. 지윤은 황급히 가슴팍을 더듬었다. 천만다행히도 열쇠 모양의 펜던트가 만져졌다.

“목걸이는 건드리지 않았어요.”

이반이 조용히 말했다. 지윤은 내색하지 않고 태연히 물었다.

“옷은 네가 갈아입혔어?”

“그럼 내 애인을 딴 새끼에게 맡겼을까 봐요.”

“앞으로 이런 짓 하지 마. 우리 이제 그런 사이 아니잖아?”

“왜 아니지?”

“네가 나를 속였으니까.”

반응하지 않으려고 해 봐도 속에서 참을 수 없이 뜨거운 뭔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썩어 가는 살점처럼. 보기만 해도 진저리가 쳐질 정도로 처절한 감정이었다.

지윤은 조금의 의심도 없이 철저하게 속아 버린 자신이 너무나 한심해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래, 스스로가 한심해서일 뿐, 배신감 때문은 아니다. 어차피 누구에게도 기대를 걸지는 않았으니까.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처음 WP 소속이 되어 해리슨과 팀을 이루게 되었을 때, 지윤은 해리슨을 선배 그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태어나자마자 처음 본 존재를 어미로 각인하는 오리처럼, 해리슨을 신뢰했다.

그를 선배로서 존경했고, 동료로서 사랑했고, 친구로서 믿었다. 그래서 그에게 배신당했을 때 받았던 충격은, 동료들의 차가운 시선보다 더 참기 힘들었다.

그 뒤로는 아무도 믿지 않았다. 결국엔 실망할 테니까. 이반을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한 이유도 제멋대로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하기 싫어서였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이 감정은 뭐지. 누군가 절구로 빻은 것처럼 심장이 아팠다. 지윤은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가다듬었다.

“이름부터 가짜였잖아. 설명이 더 필요해?”

“이반은 내가 아버지에게 이름을 받기 전까지 어머니께서 불러 주셨던 이름이에요. 그리고 당신도 원래 이름은 에일린이죠. 그 외에는 딱히 속인 건 없는데.”

“그럼, 네가 나에게 접근한 이유가 제시 때문이 아니라는 거야?”

“…….”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던 이반이 처음으로 입을 닫았다. 차라리 이제까지처럼 뻔뻔하게 굴어! 이제까지처럼 거짓말이라도 하라고! 지윤이 토할 것 같은 감정을 싸늘한 조소로 억눌렀다.

“그동안 재미있었어? 어떤 의심도 없이 너에게 속아 넘어간 날 보며 비웃고 싶었을 텐데, 어떻게 참았는지 궁금하네.”

지윤이 빈정거리자 그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나에게 한 번이라도 부모님이 누구냐고 물어본 적 있어요? 어디서 태어났냐고 물어본 적은? 손님도 없는 가게를 운영하면서 무슨 돈으로 생활하는지, 단 한 번도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나는 속이고 싶어도 속일 수가 없었어요. 당신이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궁금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다. 그의 부모님과 형제들이 궁금했고 어린 시절을 알고 싶었다.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걱정스러워서 잠이 오지 않았다. 가게가 망하면 어떻게 하나. 나 혼자 벌어서 먹여 살릴 수 있을까? 이런 멍청한 고민도 한 적 있었다.

그러나 한번 말을 꺼내는 순간 멈출 수가 없게 될까 봐,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싶어질까 봐, 그래서 집착하고 매달리게 될까 봐 차라리 봉인했다. 어차피 지윤은 자신의 과거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이반에게만 물어보는 것도 공평하지 않았다.

모든 관계에는 끝이 있었다. 영원한 선후배로 남을 것 같았던 해리슨과의 관계는 1년도 채 되지 않아 더럽게 마침표를 찍었다. 동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관계를 끊어 버리는데 저 혼자서만 마음을 정리하지 못해 상처받는 건 한 번으로 족했다.

“지나간 얘기는 그만해. 어차피 우리는 끝났으니까.”

이반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그의 입술에서 건조하고 낮은 음성이 느리게 흘러나왔다.

“누구 맘대로. 난 동의한 적 없어요.”

“왜, 아직도 나에게 이용 가치가 남았어? 뭐가 더 필요한 거야?”

“윤.”

“아, 제시의 행방?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도 모르는데. 2년 전에 사건이 종결되면서 그 아이는 아동 센터에 맡겨졌어. 그 이후로 연락 한번 한 적 없고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 못 믿겠으면 확인해 봐. 다른 나라 정보부 비밀 작전까지 알아낼 정도면, 이 정도는 쉬울 거 아니야.”

“…….”

“이제 볼일 다 봤으면 내 집에서 꺼져 주시죠. 라브노프 씨.”

이반이 지윤을 가만히 응시했다. 다리를 꼬고 등을 편하게 기댄 모습이 마치 권좌에 앉은 제왕 같다. 표정 없는 얼굴에서 먹잇감의 생사를 고민하는 육식 동물의 기운이 읽혔다. 손가락으로 무릎을 톡톡 두드리던 그가 갑자기 쓰게 웃어 버렸다.

“하아, 곤란하네요. 당신은 죽어도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당신의 손끝조차 건드릴 수 없을 것 같단 말이죠.”

“할 수 있으면 해 봐. 콴티코(Quantico, FBI 훈련소)에서만 4년이나 있었어. 총 없이도 너 따위 죽이는 건 일도 아니야.”

“…날, 죽이고 싶어요?”

지윤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반이 아니라, 그를 사랑했던 자신을 죽이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단호하게 다물어진 입술 위에 이반의 시선이 닿았다. 지윤의 입술을 눈으로 핥던 그가 뒷주머니에서 총을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윤의 피스톨이었다.

“해 줄 말이 있어요. 그 얘기를 끝까지 듣고도 나를 죽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해요.”

“하! 내가 못 할 것 같아?”

“전혀, 당신은 정말 쏠 것 같아.”

“그럼 우습지도 않은 허세는 집어치워. 머리통에 구멍 뚫리고 싶지 않으면.”

이반이 반응하기도 전에 피스톨을 낚아채 그에게 겨눌 수는 있었다. 위협을 해서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발포할 자신은 없었다. 자신이 미련하고 답답하다는 건 알지만, 그에게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지윤은 이반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피스톨을 향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반의 표정은 변함없었다. 그저 감정을 담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기만 했다.

‘흔들리지 마. 어차피 저것도 거짓일 테니까.’

지윤은 피스톨을 들고 보란 듯이 꼼꼼하게 점검했다. 철컥, 철컥, 금속성의 소리가 빠르게 이어졌다. 의심스러운 부분은 없었다. 비겁하게 실탄을 빼놓은 것도 아니고, 발사가 되지 않도록 손을 써 둔 것도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수상한 냄새가 나면 바로 쏜다. 지금 넌 내 집에 무단 침입 한 상태고 남들이 봤을 때 난 힘없는 여자야. 네 얼굴을 벌집으로 만들어도 얼마든지 정당방위로 풀려날 수 있어.”

“마음대로. 이제 말해도 돼요?”

“간단하게.”

어깨를 들썩거린 그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핵심만 말할게요. 아버지께서 제시를 원하세요.”

“이제 와서?”

“정확하게 말하면, 제시를 이용해서 후계를 정하기를 원해요.”

“…설명해.”

“아버지는 안톤에게 제시를 찾아서 죽이면 후계자로 인정해 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나한테 내건 조건은 달랐죠. 노인네가 드디어 노망이 난 건지, 안톤으로부터 제시를 지키면 후계자로 인정해 주겠다더군요.”

“…….”

“아, 혹시 궁금할까 봐 말해 주는 건데, 알렉세이는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정키(junkie) 새끼예요. 제정신이나 유지하면 다행이지. 후계 구도에서 밀린 지 오래됐어요.”

페트로의 둘째 아들 알렉세이가 약물 중독 센터를 제집처럼 왔다 갔다 한다는 기사는 읽은 적 있었다. 2년 전쯤에는 사진도 나돈 적 있었는데, 창백하고 해골처럼 바싹 마른 얼굴과 충혈된 눈은 전형적인 필로폰 중독자의 몰골이었다. 한때 미남으로 유명했던 젊었을 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있었다.

“안톤은 당신의 상상 그 이상으로 후계에 집착해요. 러시아를 제 발밑에 두기를 원하죠. 나는 제시를 보호하려는 거예요.”

“…넌 꼭 아닌 것처럼 얘기하지 마. 너도 라브노프잖아?”

“글쎄요, 후계자 따위 내 알 바 아니라.”

“그럼 제시를 왜 보호하려고 하는 건데.”

“안톤이 후계가 되면 나를 제거할 테니까요.”

“…친형제 간이 아니야?”

재미있는 얘기라도 들은 듯 이반이 크게 웃었다. 관능적으로 휘어진 눈매에 저절로 시선이 꽂혔다. 지윤은 억지로 고개를 돌렸다.

“배다른 형제도 형제는 맞겠죠. 우리 형제들은 서로를 증오해요. 동족 혐오라고 할까? 특히 안톤은 나를 무척 싫어하죠. 내가 가진 방산업체에 관심이 많아서.”

이제까지 안톤은 이반의 방산업체를 제 것처럼 휘두르며 각국의 주요 인사들과 커넥션을 구축했다. 주로 미사일 설계도 따위를 던져 주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는 방식이었다.

모른 척 두고 보기만 하던 이반이 얼마 전부터 방산 정보를 흘리는 것을 막았더니 심기가 뒤틀렸던 모양이다. 아까, 이반을 죽이려고 했던 납치범은 안톤의 오른팔이었다.

“지금도 이러는데 후계가 되면, 더 노골적으로 날 제거하려고 하겠죠.”

“말이 앞뒤가 맞지 않잖아. 후계는 관심 없다면서 전쟁에는 끼어든다? 내가 바본 줄 알아? 죽는 게 싫으면 차라리 망명을 해. 너 정도면 어떤 나라라도 보호해 줄 테니까.”

“그러다 결국엔 죽겠죠. 내 의붓어머니처럼.”

“…….”

“솔직히 그것도 별로 나쁘진 않아요. 작년까지만 해도 피곤하고 귀찮아서 그냥 내버려 둘까 했으니까. 그랬는데….”

이반의 눈이 허공을 향했다. 회색 눈동자가 과거의 한 부분을 섬세하게 더듬었다. 그러다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랬는데 당신을 보니까 살고 싶어졌다고 한다면, 믿어 줄래요?”

“개수작 부리지 말라고 했을 텐데.”

“와, 내 애인이 알고 봤더니 입이 험했네. 흥분되게. 더 욕해 볼래요? 당신이 욕하면 꼴릴 것 같아. 한번 해 봐요.”

“…변태 새끼.”

“음, 너무 약한데.”

아쉬운 듯 콧잔등을 찡그린 그의 표정이 점차 음란하게 바뀌었다.

“그래도 괜찮아요. 이미 자지가 터질 지경이라.”

그가 눈짓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저도 모르게 그의 시선을 따라갔던 지윤은 서둘러 고개를 들었다.

“만져 줄래요?”

“미친 소리 좀 작작 해. 나 총 든 거 안 보여?”

“그럼 만지는 거 봐 줘요.”

“…뭐?”

의미심장하게 웃던 그가 턱을 조금 들었다. 눈을 살짝 내리뜬 채 바짓가랑이 위로 천천히 손을 내렸다. 천을 밀어 올리며 불룩하게 튀어나온 페니스를 그가 느릿하게 쓸었다.

“하아.”

붉은 입술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나른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촘촘한 속눈썹으로 가려진 회색 눈이 집요할 정도로 그녀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지윤은 동요를 들키지 않기 위해 혀끝을 씹어 감정을 짓눌렀다. 위협을 해서라도 당장 그만두게 만들어야 하지만 쏠 자신이 없는 이상 협박이 먹힐 리가 없었다.

지이익.

작은 소리와 함께 바지 지퍼가 내려갔다. 그 사이로 크기를 잔뜩 불린 페니스가 튕기듯 튀어나왔다.

선단에 맺혀 있는 쿠퍼액을 그가 엄지로 훑고 기둥을 위아래로 문질렀다.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 굵은 기둥을 타고 핏줄이 균열처럼 일어섰다. 아, 아, 그의 호흡 소리가 더욱 거칠어졌다.

“라브노프 씨.”

“이반이라고, 하아, 불러요. 일리야도 괜찮지만… 으음, 안 되겠다. 생각만 해도 쌀 것 같아.”

일부러 냉랭하게 말했지만, 이반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한번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페니스를 문지르는 손길이 더욱 빨라졌다. 선단에 맺혀 있던 투명한 쿠퍼액이 커다란 손등을 가로지르며 흘러내렸다.

생각해 보면 그다지 음란한 상황도 아닌데 볼이 화끈거렸다. 어처구니없게도 그의 성기를 보자마자 밑이 지끈거렸다. 지윤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물었다. 동시에 페니스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이 우뚝 멈췄다.

“입술 물지 말라고 했잖아요.”

“신경 쓰지 마.”

“당신 입술에 피가 맺혀 있으면, 난 미칠 것 같아. 그 피를 모조리 빨고 입술을 물어뜯고 싶어서. 그리고 이런 생각을 나 말고 다른 새끼도 할까 봐.”

“…….”

“드디어 돌아 버린 건가 싶다가도,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에게는 이러지 않는단 말이죠. 선생님, 제 병명은 뭔가요?”

“미친놈.”

큭, 그가 나지막하게 웃더니 인 이어(in-ear)를 귀에 꽂았다. 누군가의 보고를 받는지 가만히 듣기만 하던 그가 한숨을 쉬더니 인 이어를 뽑았다. 그리고 아직도 흉흉하게 일어서 있는 페니스를 바지 속으로 집어넣었다.

“안톤이 보낸 애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나 봐요. 안전 가옥으로 이동해야겠어요. 제시 문제는… 뭐, 천천히 이동하면서 상의해 볼까요?”

“필요 없어.”

“…네?”

“난 요원 출신이야. 내가 안전 가옥 하나 만들어 두지 않았을 것 같아?”

처음 듣는 정보인지, 그의 미간이 얄팍하게 접혔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안전 가옥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지윤은 피스톨의 해머를 뒤로 당겼다. 철컥, 총알이 약실에 장전되는 소리가 짧게 이어졌다.

“그거 별로 좋은 생각 같지 않은데.”

“그렇게 큰소리치더니, 막상 죽을 것 같으니까 무서워?”

“아니, 그거 말고. 지금 하는 생각 있잖아요.”

“…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아무튼 얘기 다 끝났으면 내 집에서 나가 주시죠. 라브노프 씨.”

이반이 지윤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린 것처럼 매력적인 미소도 없이 서늘한 표정이었다. 그의 인 이어에서 시끄러운 잡음이 새어 나왔다. 분위기상 안톤의 부하들이 가까이 왔다는 경고인 것 같다.

“여긴 위험해요. 같이 나가기라도 해요.”

“너와는 안 가.”

“윤.”

“안 간다고 했어.”

무슨 일이 벌어져도 움직이지 않을 것처럼 미동 없는 지윤을 보다 이반이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요. 그럼 내가 사라지면 피할 거죠? 그러겠다고 약속해요.”

“…….”

“당신에게 함부로 굴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약속해. 내가 나가면 안전한 곳으로 피하겠다고.”

“너만 사라져 주면 여기 있을 이유 없어.”

“좋아요.”

이반이 빠르게 대답하고는 주머니 안에서 차 키를 꺼내 건넸다.

“치워, 차 필요 없어.”

“걸어서 가면 이 동네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잡혀요. 당신이 안톤의 손에 넘어가면 나도 곤란해지니까 어서 받아요.”

제시의 행방을 알고 있는 지윤이 안톤에게 넘어가면 이반이 난처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아픈 걸까. 갈퀴로 긁은 것처럼 쓰라렸다. 지윤은 버릇처럼 입술을 물려다 말고 창 쪽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뭔가가 시야에 걸린 것 같았는데?’

잘못 본 건가? 지윤은 고개를 돌리다 얼어붙었다. 이반의 이마 정가운데에 점처럼 고정되어 있는 붉은 레이저 포인트가 보였다.

“이반!”

슉.

그녀가 이반을 밀어뜨리는 순간, 파공음과 함께 날아온 총알이 이반 대신 기둥에 걸어 놓은 액자에 박혔다.

지윤은 이반의 목덜미를 끌고 소파 뒤로 기어갔다. 액자 파편이 팔뚝과 허벅지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지윤은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심호흡을 했다. 야간 투시경까지 착용하고 건물 안에 숨어 있을 상대에게 저격할 총도 없이 반격은 불가능했다. 빠르게 상황 판단을 끝낸 뒤 현관까지의 거리를 가늠했다.

“이반, 여기서 나가야 돼.”

“한 블록 뒤에 차가 있어요.”

“입구는 안 돼. 복도 끝 창문을 넘어가면 뒷길로 내려가는 철제 사다리가 있어.”

문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저격수는 이반이 보이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때, 이반이 주방으로 기어가 수납장 안에서 뭔가를 꺼냈다.

며칠 전에 이반이 사다 놓은 부탄가스. 그가 그걸 들고 지윤과 눈을 맞췄다. 지윤이 티셔츠를 올려 코까지 가리고 총을 단단히 잡았다. 이반이 손가락을 세 개 폈다.

셋, 둘, 하나.

그가 부탄가스를 창가 쪽으로 집어 던졌다. 지윤의 눈이 깜빡거림 없이 목표물에 따라붙었다. 부탄가스가 적절한 위치에 도달했을 때, 지윤이 피스톨을 정확하게 조준한 뒤 방아쇠를 당겼다.

콰쾅!

폭발음과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엄청난 열기와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그제야 이반과 지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복도 끝에 나 있는 창문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 벽에 등을 대고 잠시 대기했다. 지윤이 빠르게 사위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반이 창문 밖으로 나가 훌쩍 뛰어 철제 사다리에 매달렸다. 둘은 죽 늘어진 사다리를 미끄러지듯 타고 보도블록에 내려섰다.

그제야 건물 안에서 화재 경보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곧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면 집 안에 아무도 없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벌써 알아챘을 수도 있고.

이반이 엄지로 방향을 가리키자 지윤이 두 개의 손가락으로 자신의 눈과 귀를 가리켰다. 고개를 끄덕인 이반이 먼저 앞장섰다. 그 뒤를 지윤이 후방을 경계하면서 따라갔다.

얼마 후,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까만 메르세데스가 거리를 조용히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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