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3/12)

50분짜리 상담일 뿐인데 끝나고 나면 진이 다 빠졌다. 지윤은 손으로 뜨거운 해를 가리며 한숨을 쉬었다.

상담은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모든 걸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노력하고 있다는 얄팍한 마음의 위안, 상담으로 얻을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어둑해진 거리를 걷다 보니 멀리 익숙한 간판이 보였다.


 

Coffee


 

단순하다 못해 성의 없어 보이는 간판. 이반이 보고 싶은 마음에 지윤의 걸음이 빨라졌다.

“…뭐야.”

전면 유리 안으로 엉망으로 변해 버린 매장 내부가 보였다. 육중한 뭔가에 떠밀린 듯 의자와 테이블이 죄다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지윤이 선물했던 화분도 흙을 쏟아 낸 채 엎어져 있었고, 커피 잔도 성한 게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몸싸움을 벌인 것처럼.

지윤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문을 살며시 밀었다. 바닥에 뿌려진 유리 파편과 흙더미에 찍힌 발자국을 피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어지럽게 널려진 상황에서 당황한 기색이 읽혔다. 하지만 핏자국이 없는 걸 보니 혈투가 벌어진 건 아니다. 더 큰 소란이 일어나기 전에 적절한 수단으로 제압한 모양이다.

‘클로로포름인가?’

아수라장에서 금고 하나만 멀쩡한 걸 보면 강도는 아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이반이 목적이었다는 의미다.

서둘러 경찰에 신고하려는 찰나, 카운터 옆에 있는 전화기가 날카롭게 울렸다. 흠칫 놀란 지윤은 전화기를 가만히 응시했다. 끈질기게 이어지던 벨 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지윤의 핸드폰이 울렸다.


 

unknown


 

지윤은 액정을 들여다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에일린?

“…전화 잘못 거셨습니다.”

핸드폰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건 빤히 보이는 거짓말에 대한 비웃음에 가까웠다. 서류상에서 완벽하게 사라진 이름인데 이 사람은 어떻게 알아낸 걸까. 지윤은 청각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 이대로 끊으면 네 애인과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텐데, 괜찮겠어?

“…원하는 게 뭐야.”

- 커피숍이 엉망이지? 미안하게 됐어. 하지만 우리도 어쩔 수가 없었어. 당신의 애인이 너무 심하게 반항하더라고.

“용건만 말해.”

- 거, 급하시기는. 27번가, 페인트 공장. 넉넉히 한 시간 줄게. 아, 혹시나 해서 말해 두는 건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당신의 예쁜 애인이 발로 커피 내리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지윤은 제가 밟았던 곳을 되밟으면서 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집으로 올라가 침대 밑을 더듬거렸다. 테이프로 붙어 있는 차가운 글록의 감촉이 느껴진다. 통째로 뜯어내 테이프를 벗겨 버리고 허리 뒤쪽에 찼다.

이어서 화장실 변기 뚜껑을 열어 비닐로 돌돌 말아 놓은 피스톨을 꺼내 발목에 숨겼다. 총알을 확인할 필요는 없었다. 2년 전부터 가득 장전해 놓은 상태니까.

밖으로 뛰어나온 그녀는 택시를 잡아탔다.

“27번가, 페인트 공장으로 가 주세요.”

“거긴 이미 망해서 문 닫은 지 오래인데?”

“알아요.”

페인트 공장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더러운 길에 찌그러진 페인트 통만 굴러다녔다. 지윤은 주변을 돌아보다가 건물이 가장 잘 보이는 언덕으로 올라가 무성하게 피어 있는 잡초 속에 배를 깔고 엎드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들어 인명부를 검색했다.


 

해리슨 버켄필드


 

“후우….”

잠시 호흡을 고르다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가 세 번 울리기도 전에 통화가 연결되었다.

- …에일린.

“선배, 도와주세요. 아는 사람이 납치를 당한 것 같아요.”

- 후, 2년 만에 연락해서는…. 할 말이 그것밖에 없냐?

“오래간만인 척 하지 마세요. 나 계속 감시했잖아요.”

- …….

“저한테 빚진 거 있죠? 그거 지금 갚으세요.”

- …왜 옛날 얘기를 이제 와서 꺼내? 지금 협박하는 거냐?

“말싸움할 시간 없어요. 도와주실 거예요, 말 거예요.”

- 여기도 비상 걸렸어. 라브노프가 후계 싸움을 여기서 벌이고 있단 말이다.

“…라브노프요?”

라브노프 일가. 마약부터 무기까지, 손대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러시아를 주름잡고 있는 레드 마피아였다. 몇 년 전부터 정계에도 진출하여 제왕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 그래, 그 라브노프 말이다. 빌어먹을! 왕위 다툼을 벌이려면 자기네 나라에서나 할 것이지. 남의 나라엔 왜 오고 지랄들인지. 놈들 때문에 6개월 전부터 집에도 못 들어갔다.

현재 라브노프의 보스는 페트로 바르샤비치 라브노프. 페트로의 나이가 칠순이 넘었을 테니 후계를 정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미국엔 왜 온 거지?’

하지만 후계 다툼을 러시아가 아닌 미국에서 하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후계는 첫째 아들로 결정된 게 아니었나?

첫째 아들은 39세의 젊은 나이로 러시아 상원 의원에 선출될 정도로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겸직 금지 원칙에 따라 대표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것이나 다름없는 제약 회사도 엄청난 수익을 내고 있었다.

‘당연히 그가 될 줄 알았는데….’

물론 둘째 아들도 수익 면으로 봤을 때 첫째 아들에 비해 뒤처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마약 스캔들을 몇 번이나 일으킨 인물이었다.

마약 사업을 그렇게 크게 하면서도 단 한 번도 복용한 적 없을 정도로 자기 관리가 엄격했던 페트로가 봤을 때, 둘째 아들은 후계자감이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셋째 아들이 있었는데,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두 명의 형제에 비해 나이가 많이 어려서 그런지 얼굴이 알려지지도 않고 두각을 나타내지도 않았다.

물론 그가 물려받은 방산업체가 평범의 범주를 넘어선 것이긴 하지만 실제 운영자는 그가 아니라 그의 사촌이라고 들었다.

“근데 그런 정보를 왜 나한에 얘기해 줘요? 기밀 아니에요?”

- …넌 뭐 아는 거 없나 해서.

“지금 평범한 시민에게 레드 마피아에 대해서 묻는 거예요?”

- 킁, 평범한 시민 좋아하네… 모르면 됐다.

해리슨의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어딘지 거슬렸다. 그러나 지윤은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도와줄 거죠? 여기 27번가 페인트 공장이에요. 붉은 벽돌로 만들어진 건물이고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저격은 어려워요. 연막탄으로 시선을 끌고 한 번에 덮치는 게 좋겠어요. 제가 신호를 줄 테니까….”

- 27번가 페인트 공장? 잠깐만… 끊지 말고 있어 봐!

해리슨의 목소리가 돌변했다. 지윤은 잡초를 살짝 넘겨 페인트 건물을 주시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철컥.

결코 잊을 수 없는 소리가 뒤통수에서 들렸다. 2년이 지났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이건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다.

“통화 계속해.”

“…아빠, 다시 걸게요. 혹시 저와 연락이 안 돼도 걱정하지 마시라고 전화드렸어요.”

지윤은 태연하게 통화를 종료하고 천천히 일어섰다. 두 손을 든 채 돌아서지 않고 그대로 있으려니 몸을 더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쉽게 허리춤에서 글록을 찾아낸 놈이 피식 웃었다.

“깜찍한 걸 가져오셨네. 애들이나 가지고 노는 이런 걸로 누굴 죽일 수는 있겠어?”

“너 하나 죽일 정도는 돼.”

“어이구, 무서워라. 헛소리 말고 걸어.”

딱딱한 것이 등을 꾹 밀었다. 해리슨은 벌써 위치 추적까지 다 해 놨을 것이다. 주소까지 말해 주었으니 찾아오는 건 어렵지 않겠지. 관건은 시간이었다. 어떻게 해야 시간을 끌 수 있을까. 지윤은 페인트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눈부신 조명이 허름한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바닥에 어지럽게 널려진 전선과 발전기가 보였다. 생각보다 철저하게 계획한 것 같다.

“이반….”

조명 한가운데에 이반이 앉아 있었다. 얼굴을 복면으로 가리고 있어서 상태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옷에 핏자국이 없는 걸 보면 큰 부상을 입은 건 아닌 것 같다. 지윤은 빠르게 이반의 상태를 확인하고는 눈을 내리깔았다.

구두 소리와 함께 누군가 이반 옆에 섰다. 왼쪽 손에 든 44구경 리볼버로 자신의 허벅지를 리드미컬하게 툭툭 쳤다. 마치 노래에 박자를 맞추듯 한가로운 태도였다.

왼손잡이, 30대 중반, 화력이 강한 대신 무겁고 반동이 심해 일반인들은 사격조차 힘든 리볼버를 사용할 정도면 총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실제로 납치범에게서는 긴장감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지윤은 굳이 얼굴을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조명이 이쪽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주 보고 있으면 중요한 순간에 피아 식별을 못 할 수가 있다.

“에일린, 오느라 수고 많았어. 혼자만 모시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입을 안 열 것 같지 뭐야.”

통화 중이라서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영어가 자연스럽긴 하지만 러시아 특유의 발음이 중간중간 섞여 나왔다. 여기에 몇 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 러시아 사람들일 것이다.

“요원들은 고문을 해도 입을 잘 안 열더라고. 꼭 가족이나 애인 중 누군가를 데리고 협박을 해야 그제야 말을 들어 처먹으니 원. 우리도 참 힘들어.”

납치범들은 지윤이 연방 정부 요원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지윤은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서 있었다.

“자, 그러니까 우리 빠르게 가자고. 쓸데없는 시간 낭비하지 말고. 당신도 애인과 빨리 돌아가서 떡 쳐야 하지 않겠어? 뭐, 곱상하니 힘을 쓸 것 같지는 않지만.”

사방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안에 최소 열 명은 넘게 있는 것 같다.

“인질은 한 명, 질문도 하나. 공평하지? 자, 시작할까?”

납치범이 이반의 어깨에 팔을 올리고 비스듬하게 기댔다. 리볼버를 잡은 손이 이반의 정수리위에 얹어졌다.

“제시, 어디 있어.”

“…누구?”

“제시 말이야. 어디 있냐고.”

“…돈을 원하는 게 아니었어?”

“돈은 우리가 너보다 훨씬 많은데 무슨 소리야? 제시가 있는 장소나 불어.”

“제시라니? 난 그런 사람 몰라!”

“하… 또 일을 어렵게 만들려고 하시네.”

“정말이야! 뭔가 착오가 있었던 거 아니야? 제시라는 이름은 처음 듣는다고!”

납치범이 손을 내밀자 누군가 서류를 건네주었다. 그가 건성으로 서류를 넘기더니 심드렁하게 읽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지윤 박, 원래 이름은 에일린 지윤 최, 시민권자, 스물일곱 살에 FBI 요원으로 합격. 음? 공부를 아주 잘했나 봐? WP(witness protection, 증인보호프로그램)에서 해리슨 버켄필드와 한 팀으로 투입. 아, 해리슨 버켄필드라면 나이가 나이니만큼 부부 관계는 아니었을 테고, 부녀지간으로 위장했었나 보지?”

그의 말이 맞았다. 해리슨과 지윤은 부녀지간으로 위장해 증인의 이웃이 되어 그들을 보호하고 빨리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왔다.

“처음 투입된 작전이… 엑! 재수도 없게 마틸다 링컨이었잖아? 그년이 우리 보스의 중요 정보는 물론 딸까지 데리고 도망쳤을 때부터 끝이 좋지 않을 줄 알았어. 미친년이 죽으려면 혼자 죽을 것이지, 호수로 차를 몰았다며? 차 안에 너랑 애까지 함께 있었는데. 넌 그 와중에 애를 구해 낸 거야? 와우, 브라보. 한 편의 영화 같잖아?”

페트로의 정부였던 마틸다는 도피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낯선 환경, 낯선 사람들, 평범한 삶. 모든 것이 그녀를 절벽으로 밀었다. 마틸다는 결국 극심한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11월 18일, 오후 3시경. 슈퍼마켓에 가야 하는 날이었는데 그날따라 해리슨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슈퍼마켓 정도는 셋이서도 여러 번 다녀온 적이 있었기에 지윤은 마틸다와 제시를 데리고 출발했다.

문제는 돌아오는 길이었다. 마틸다가 갑자기 차 키를 빼앗더니 운전을 하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허락해 주지 않으면 아예 꼼짝도 하지 않을 작정인 것 같았다. 지윤은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마틸다의 성화에 굴복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벌어졌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멀쩡히 운전하던 마틸다가 느닷없이 핸들을 꺾어 호수로 차를 몰았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말릴 틈도 없었다. 차는 그대로 호수 속으로 가라앉았다.

여기까지가 내부 조사에서 밝혀진 내용이었다.

“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마틸다 그년, 익사한 거 아니지?”

“…….”

“전직 국가 대표 수영 선수가 익사라니. 개도 안 웃을 얘기잖아. 그런데 미국 정부 소속 누군가가 우리의 사주를 받아 마틸다를 제거했다는 소문이 들리더란 말이지. 근무 중에 너와 연락이 안 된 적이 몇 번 있다는 해리슨의 증언도 있었고….”

말을 잠시 멈춘 납치범이 능글맞게 웃었다.

“얼마 받았어?”

중요 증인을 잃어버린 사건은 중대 과실이었다. 게다가 이해할 수 없는 점 또한 발견되었다. 우울증 환자에게 운전을 맡긴 이유라든지, 전직 수영 선수였던 마틸다가 빠져나오지 못한 이유라든지.

지윤은 마피아의 뒷돈을 받고 증인을 살해한 부패 요원 취급을 당하다 끝내 배지를 반납했다. 2년이나 지났음에도 아직도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때 다른 사내가 납치범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납치범이 짜증스럽다는 듯 서류를 획 넘기더니 이반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었다.

“더 얘기하고 싶은데 안타깝게도 시간이 없네.”

“아, 안 돼! 난 정말 몰라! 정말 모른다고! 차, 차라리 나를 쏴! 제발 나를 죽여!”

“그렇게 사랑하는 사이는 아니었나 봐? 나 같으면 얼굴도 가물가물한 꼬마 아이보다는 애인을 더 살리고 싶을 텐데. 정 그렇다면, 하는 수 없지. 자, 작별 인사나 해.”

납치범이 이반의 복면을 벗겼다. 눈을 느리게 깜빡거려 초점을 맞추던 이반이 지윤을 쳐다보았다. 흙투성이에 땀으로 범벅된 그녀의 모습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다가 돌연 묘하게 웃었다.

“이반?”

이 상황에서 전혀 나올 수 없는 이상한 미소였다. 마치, 피비린내가 날 것만 같은 잔인한 미소. 납치범이 이반의 머리에 총을 가져다 대고 방아쇠를 천천히 당겼다.

“안 돼!”

탕!

지윤의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총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모든 조명이 일제히 꺼졌다. 칠흑 같은 어둠이 공간을 점령했다. 사방에서 고막을 터트릴 것처럼 총소리가 울려 댔다. 어지러운 발소리와 비명 소리가 섞여 정신없이 터져 나왔다.

지윤은 이반을 향해 달려가다가 뭔가에 부딪혀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너무 깜깜하다 보니 방향 감각이 사라졌다.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데 이반이 어디에 있었는지 위치를 잡을 수가 없었다.

“이, 이반? 이반! 소리를 내! 이반!”

맙소사. 정말 총에 맞은 건 아니겠지. 손이 아마추어처럼 바들바들 떨렸다.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는데 시체로 추정되는 것들이 앞을 막았다. 팔꿈치와 배가 축축하게 젖었다. 물보다 점성이 높은 액체가 만져지고, 이어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사태를 파악한다. 훈련생 시절, 그렇게 반복해서 받았던 교육이었는데 막상 일이 닥치고 보니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이반이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눈물부터 벌컥 쏟아졌다.

“이반! 젠장! 이 멍청한 새끼! 무슨 말이라도 좀 하라고! 제발!”

눈먼 짐승처럼 바닥을 이리저리 기어가고 있는데, 다시 불이 켜졌다. 눈이 멀 것만 같은 조명이 아니라 은은한 빛이었다.

어디선가 쏟아져 들어온 낯선 남자들이 납치범들을 제압한 뒤였다. 지윤은 인질먼저 구하라고 소리를 지르려다 멈칫했다. 남자들은 차림새부터 연방 요원이 아니었다. 불길함을 감지한 지윤이 빠르게 이반을 찾았다.

“…이반?”

분명 의자에 묶여 있었던 이반이 자유롭게 일어나 있었다. 손목을 쓰다듬는 모습이 다행히도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사람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완벽하게 표정이 사라진 얼굴이… 그녀가 알던 이반이 아니었다.

그때, 신장이 2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사내가 이반에게 다가왔다. 그는 어처구니없게도 시그 MPX 기관 단총을 들고 있었다. 이제 막 개발해서 유통도 안 된 총인데.

“다 정리했어. 조금 있으면 요원 애들이 도착할 거야. 그 전에 출발해야 돼.”

“시간은.”

“8분. 이거, 저놈한테서 뺏은 건데 너 줄까?”

사내가 이반에게 리볼버를 넘겨주었다. 이반이 리볼버의 길고 매끈한 총신을 슬쩍 보더니 납치범에게 걸어갔다.

“자, 잠깐! 난 안톤 님께서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야! 널 죽일 생각은 전혀 없었….”

탕!

천둥소리와 닮은 총소리가 창고를 뒤흔들었다. 납치범의 머리가 수박처럼 산산이 조각났다. 이반이 볼에 튄 피를 손등으로 느릿하게 닦았다.

“씨발, 더럽게.”

그러고는 지윤을 향해 미소 지었다. 예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미소라서 더욱더 섬뜩했다.

“괜찮아요?”

“…….”

“아, 저 새끼 때문에 그래요? 징그러워서?”

만나면서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던 욕설을 뱉어서가 아니었다. 다정한 미소나 나긋한 말투도 예전과 같았다. 똑같은 얼굴과 똑같은 목소리를 지녔음에도 낯설었다. 그는 완벽히, 다른 사람이었다.

지윤은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티셔츠를 훌렁 벗어 머리통이 날아간 시체를 덮었다. 은은한 조명 아래 근육의 자잘한 굴곡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제 괜찮죠?”

“너….”

목소리가 잔뜩 갈라져 나왔다. 지윤은 침을 삼켜 비쩍 마른 목구멍을 적셨다.

“당신, 누구야.”

이반이 야릇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누구긴요, 당신의 이반이죠.”

“헛소리하지 마! 너 대체 누구야!”

“지금 이 상황에서 내 정체가 중요해요? 당신의 목숨보다?”

이반이 의자를 바로 세우더니 지윤을 일으켜서 그 위에 앉혔다. 온통 피범벅으로 엉망인 그녀의 행색에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다른 새끼 피 좀 묻히지 마요. 짜증 나니까.”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뱉은 그가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 리볼버로 그녀의 허벅지를 천천히 문질렀다. 뜨뜻한 열기가 남아 있는 총구가 허벅지를 기어 올라갔다. 점점 안쪽으로. 소름 끼치는 감각에 지윤의 목젖이 가파르게 움직였다.

“미친! 그만하지 못해!”

“말해 주면 그만할게요.”

“도대체 뭘 자꾸 말하라는 거야!”

“제시, 어디 있어요?”

또 제시. 지윤은 답답한 마음에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람 잘못 찾아왔어. 당신이 더 잘 알 텐데? 내 친구 중에 제시라는 사람은 없어.”

“당신 친구 중에는 없죠. 입술 물지 말아요.”

“알면서 나한테 왜 이래! 저 남자들은 대체 뭐고! 납치범하고는 무슨 관계지?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죽이다니 어쩌려고 그래? 엎어져 있는 상대를 위에서 쐈으니 정당방위로 우기지도 못해! 당신 제정신이야?”

“윤.”

“대답해!”

“입술 물지 말라고. 상처 신경 쓰이니까.”

위협적으로 낮아진 목소리와 입술을 주시하는 회색 눈동자. 피비린내를 맡은 맹수같이 사나운 기색이 풍겼다.

지윤은 피가 나도록 짓씹고 있던 입술을 툭 뱉었다. 당장이라도 목덜미를 물어뜯을 것처럼 서늘하던 이반의 표정이 나른한 햇살처럼 바뀌었다. 그가 지윤의 볼을 톡톡 두드렸다.

“착해요.”

“…너와 무슨 관계인데 그 사람을 찾는 거지? 당하더라도 이유는 알고 당해야 할 거 아니야?”

지윤의 어설픈 유도 신문에 그가 피식 웃었다.

“동생이에요. 배다른 여동생.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죠. 노인네가 힘이 참 좋지 않아요?”

“…난 당신 아버지 본 적도 없어. 제시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 아무것도 모른다고.”

“뭐, 잊어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2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애인의 말인데 믿어 줘야죠.”

고개를 끄덕거리던 그가 불쑥 생각난 것처럼 툭 물었다.

“그럼 마틸다 링컨은 알죠?”

“…….”

“아까 저 새끼가 나불거렸잖아요. 당신이 내 의붓어머니를 죽였다고. 그 여자는 기억나죠?”


 

“제시! 제시를 먼저 구해 줘! 난 괜찮으니까 제시 먼저…!”


 

악몽 같은 기억이 불쑥 떠올라 머릿속을 점령했다. 지윤은 저도 모르게 더듬거렸다.

“내… 내가 죽인 거 아니야.”

이반이 눈매를 얄팍하게 접으며 웃었다. 마치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거짓말.”

지윤과 이반의 시선이 격렬하게 부딪쳤다. 이반은 지윤의 살벌하게 가라앉은 검은 동공을 보며 입술을 핥았다. 그가 입꼬리를 올리며 무슨 말을 뱉기도 전에, 덩치 큰 사내가 짤막하게 고함을 질렀다.

“일리야! 애들 왔어!”

‘일리야?’

지윤은 숨을 집어삼켰다. 뒤이어 벼락같은 깨달음이 머릿속을 관통했다. 줄곧 FBI에게 감시당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당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철저한 오판이었다. 감시대상은이반, 일리야 페트로비치 라브노프였다. 라브노프의 주인이 될지도 모르는 페트로의 셋째 아들.

그저 돈이 무척 많을 뿐인 평범한 학생이라더니. CIA[1] 등신 새끼들 나가 죽어라. 이반이 지윤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 귀찮네요. 우리 나가서 얘기해요.”

“싫어! 이거 놔! 안 놔?”

“윤, 자꾸 이러면 흥분돼요. 지금도 봐요. 자지가 섰잖아. 만져 볼래요?”

“…미친 사이코 새끼!”

“맞아요. 나 미친 사이코예요. 그러니 조용히 따라와요. 당신의 옛 동료들을 죽이고 싶지는 않으니까.”

“…….”

“아니면 다 죽여 줄까요? 2년 전 사건에 대한 모든 책임을 당신에게 뒤집어씌운 개새끼들이잖아요. 죽여 줘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2년 전 사건부터 그녀가 일을 스스로 그만둔 게 아니라 압력에 못 이겨 쫓겨 나왔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다. 지윤은 팔이 뻐근하도록 주먹을 말아 쥐었다.

“놔. 조용히 갈 테니까.”

“흐음, 아쉽네요.”

묘한 콧소리를 내던 그가 지윤의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기분이 좋을 때 그가 자주 하는 버릇이다. 지윤은 순간 욕지거리가 나올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그녀의 기분을 알아차렸는지 이반이 예쁘게 웃었다. 다음 순간, 누군가 허연 천으로 입과 코를 덮었다.

지윤은 반항하지 않고 이반을 노려보았다. 의식이 끊어질 때까지, 그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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