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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했던 대로 저택 출입구 앞에 준수가 서 있었다. 온정이 미소를 지으며 차를 세웠다.
차에서 내리자 준수가 바로 다가와 온정을 포옹했다.
“오느라고 고생했다.”
대니얼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준수에게서 온정을 떼어냈다.
“한국식은 안 이래. 그냥 말로만 인사해.”
준수가 대니얼을 노려보는 동시에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님은요?”
“밤에나 들어온다.”
“네.”
세 사람이 나란히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너른 홀을 지나 온정이 ‘레코드 룸’이라고 부르는 방으로 향했다. LP판이 많아서 ‘레코드 룸’이었다.
자리를 잡자 차와 과일이 바로 나왔다. 준수가 가장 먼저 잔을 들었고, 이어서 온정이 들었다. 대니얼은 그냥 멀뚱거리기만 했다.
준수가 온정을 보고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네가 직접 운전하고 돌아다닐 생각이냐?”
“제가 지겨워질 때까지요.”
“지겨워질 것 같기는 하고?”
“모르겠어요.”
“어쨌거나 저 녀석,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라.”
그 말에 대니얼이 온정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팔을 둘렀다. 그 모습을 힐긋한 준수가 말을 이었다.
“일주일 전에 예 부사장 만났다.”
“네. 들었어요.”
“활력하고는. 내가 못 당해.”
온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준수가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재미있냐?”
“네.”
“그래 보이기는 하더구나.”
준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말인데, 그때 막말한 건 내가 미안하게 생각한다.”
대니얼이 일렉트릭 바이올린을 연습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대노한 준수가 온정에게 전화를 걸어선 별의별 험한 말을 다 퍼부었었다. ‘새끼야’ 소리 들으며 툭 하며 무릎 꿇던 온정은 어깨만 한번 으쓱이고 말았지만 대니얼은 아니었다. 가두고 굶겼어도 말만큼은 예의 바르던 아버지의 폭언에 기절초풍해선 한동안 연락을 끊었던 것이다.
이후로도 정식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건 아니었다. 두 아버지가 함께 도모하는 사업이 있다 보니, 여영부영 얽히고설켜 지내온 것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준수가 그 일을 사과하고 있었다.
온정이 바로 대답했다.
“네.”
준수가 온정을 빤히 쳐다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온다고 해서 꽤 놀랐다. 시간이 안 비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그러자 대니얼이 온정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대니얼도 그 할 말이란 게 무엇인지 궁금한 터였다.
온정이 심호흡을 했다.
“아기를 가졌어요.”
준수가 들고 있던 잔을 떨어뜨린 동시에 대니얼이 벌떡 일어섰다. 이후로 약 10초 정도 정적이 흘렀고, 온정은 가만히 있었다.
“누나!”
대니얼이 몸을 내려 온정 앞에 무릎으로 섰다.
“아기?”
“네.”
“그러니까 내 아기? 아니아니, 우리 아기?”
온정이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놀랐어요?”
“말도 못 할 정도로.”
대니얼이 초조한 듯 입술을 축였다.
“그런데 나 아빠 해도 돼?”
“무슨 그런 말이 있어요?”
대니얼이 온정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 철없어서 누나가 아기 안 만드는 줄 알았어.”
온정은 철렁했다. 전혀 생각 못 한 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아기에 대해 대화를 나눈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니 말이다.
“댄. 미안해요. 그런 생각 하는 줄 몰랐어요. 우리 너무 바빴으니까, 그렇게만 알고 있는 줄 알았어요.”
댄이 고개를 휙 들었다.
“잠깐. 그럼 병원을 누나 혼자서 갔다는 뜻이야?”
“네.”
“언제?”
“댄 연습할 때요.”
“아, 누나.”
“확실하지 않아서 그랬어요. 앞으로는 같이 갈게요. 그러니까 각오해요. 내가 꽤 들볶을 거거든요.”
그때였다. 준수가 눈물을 터뜨렸다.
온정과 대니얼이 깜짝 놀라 준수를 쳐다보자 얼굴을 처참하게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쏟았다.
“내가 저 녀석을 툭하면 가두고 굶겨서, 그래서 아이 안 낳는 줄 알았다. 그랬는데…….”
준수가 벌떡 일어나더니 온정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기서 기다려라. 변호사 불러올 테니.”
“네?”
“줄 거 많다. 그리고 집사 보낼 테니 먹고 싶은 거 다 대라.”
준수가 뛰다시피 멀어졌다.
온정과 대니얼의 눈이 마주쳤다. 온정이 피식했다.
“아기 나오기 전에도 이 정도면 나오고 나선 난리 나겠어요.”
하지만 대니얼은 웃지 않았다.
“댄. 당신 너무 심각해요.”
“심각할 수밖에. 누나. 정말 고마워. 나 아빠 만들어줘서 고마워. 이제야 어른 되는 기분이야. 정말 좋아.”
“나도 고마워요. 엄마 만들어줘서.”
대니얼이 온정을 꼭 끌어안으려다 움찔하고는 울상을 했다.
“아, 운전. 그 몸으로 운전을 하면 어떡해.”
“운전이 뭐라고 벌써 안 해요?”
“아, 누나.”
“걱정 말아요. 손해 볼 짓 절대 안 해요.”
온정이 대니얼의 볼을 감쌌다.
“댄. 앞으로 내가 의지할 일이 점점 더 많아질 거예요.”
“응.”
“안 하던 짓도 할 거고, 못 봤던 모습도 보게 될 거예요.”
“응.”
“잘 부탁해요.”
대니얼이 온정을 조심스럽게 껴안았다.
“누나야말로 걱정 마.”
그러더니 “아, 진짜!” 하고는 흐느끼기 시작했다. 온정이 자신을 백 퍼센트 받아준 느낌이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렇게나 사랑을 나눴음에도 아기 소식이 없어 알게 모르게 마음고생을 했던 것이다. 결혼을 했으면 자식이 있어야 한다, 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혹시 온정이 자신에게서 아기를 원하지 않나, 아빠로 삼기에 자신이 너무 많이 부족한가, 그러다 온정이 떠나면 어쩌나, 하는 무서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 일거에 해결되었다.
대니얼의 눈물이 더 뜨거워졌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이 완벽하게 완성된 기분이 말도 못 하게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