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D+4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23 E-flat major Posato
내림마장조 조용하게
자신의 몸 위에서 꼼짝도 안 하는 대니얼을 연신 토닥토닥하면서 온정도 조금씩 우울해졌다.
‘헤어지는 게 이렇게나 힘들 줄이야.’
첫 번째 연애 때는 만나서 헤어질 적마다 상큼, 깔끔했다. 사귀기는 했으나 이성 친구라기보다는 동성 친구에 가까운 관계였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가 ‘여자’가 생겼으니 ‘완전히’ 헤어지자고 했을 때, 연인을 놓쳤다는 아픔보다 놀이 친구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더 컸다.
두 번째 연애 때는 마음이 자라는 중이었기 때문에 헤어짐 자체가 크게 어렵지 않았다. 여자와 남자의 만남인 건 분명했으나 온도 차가 명백하게 존재한 까닭이었다. 게다가 뒤늦게 밝혀진 어마어마한 사실이라니. 그래서 ‘완전히’ 헤어지게 됐을 때, 사랑이 끝났다는 아픔은 거의 없이 인간에 대한 충격만 남아 괴로웠다.
‘그러고 보니 나 제대로 된 연애를 안 해봤구나.’
그런데 대니얼은 달랐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가슴에 새겨진 서사가 놀라웠다. 크레바스라고 하던가. 빙하가 흘러내릴 때, 그 표면이 쪼개지면서 생기는 틈 말이다. 겉에서 보기에 그 틈이 작고 좁아 보인다고 해서 그 아래까지 그런 건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온정이 지금 그랬다. 깊이가 파악이 되지 않았다.
“누나.”
“네.”
“나 강 실장님하고 갈게.”
온정은 조금 놀랐다.
“왜요?”
“공항에서 헤어지는 게 더 힘들 거 같아.”
‘나도 자신 없기는 해요.’
“그리고 누나 혼자 돌아와야 한다며.”
그건 그랬다. 강 실장은 이제 다시 본사 출근이었다. 헬기도 마찬가지였다. 부사장인 지용도 긴급 상황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 헬기를 온정이 잡아타고 돌아올 순 없었다.
“누나 고생시키기 싫어.”
“알았어요. 배려해줘서 고마워요.”
대니얼이 고개를 들고는 온정과 시선을 맞췄다.
“그러니까 와야 돼. 꼭 와야 돼.”
“네.”
“혹시 킹 보는 거 부담되면 킹 가고 나서 와.”
“그렇지는 않아요.”
대니얼이 활짝 웃었다.
“역시 누나야. 담대하고 용감해.”
온정이 마주 웃어주었다.
“일단은 에이전트 건하고 상관없이 가는 거예요.”
“응. 안 보채. 어차피 하게 될 텐데, 뭐.”
“댄도 역시 댄이에요. 뭐든 자기 마음대로.”
“아니야. 뭐든 내 마음대로였으면 오늘 누나 데려가지.”
“그래요?”
“응. 무슨 수를 써서라도 끌고 가지. 내가 안 그러려고 얼마나 애쓰고 있는데. 나 진짜 누나한테 잘하려고 엄청 신경 쓰는 거야.”
“그런 거면 고마워요.”
“내가 이래 본 역사가 없어.”
“더 고마워요.”
대니얼이 온정의 뺨에 자신의 뺨을 댔다.
“가기 싫다.”
‘실은 나도 댄 보내기 싫어요.’
“누나 옆에 있고 싶어. 마음도 안정되고 밥도 잘 먹히고 연습도 순조롭고.”
“연습도 그래요?”
“응. 내가 아무리 기교 쪽에선 손꼽히는 바이올리니스트라고 해도 손이 잘 안 움직이는 때가 있어.”
온정이 대니얼의 몸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똑같은 곡을 똑같이 하는데도 탁 탁 걸리는 날이 있다고.”
“알 것 같아요.”
“사실 손이 뜻대로 안 돼서 힘든 건 별로 심하지 않아.”
“그럼요?”
“이 상황이 오래 가면 어쩌지? 영영 회복이 안 되면 어쩌지? 이대로 굳어서 내일도 연주가 안 되면 어쩌지?”
“아!”
“그거 정말 무섭거든.”
“이해해요.”
대니얼이 온정을 폭 끌어안았다.
“그런데 누나가 있으니까 훨씬 덜 무서워.”
“그래요?”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어떻게든 흘러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겁먹지 않을 수 있는 힘을 누나가 줘.”
“내가 뭘 했게 그럴까요?”
“그냥 옆에 있는 게 뭘 하는 거야.”
온정이 고개를 돌려 대니얼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싱가포르하고 시차가 어떻게 되지?”
“한 시간이에요.”
“그게 그렇게 바로 나와?”
“주요 국가는 다 외우고 있어요. 그런데 시차는 왜 물어요?”
“전화하려고.”
“댄. 시간 확인하지 말고 하고 싶을 때 해요.”
대니얼이 온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저번에 킹한테 전화하기 전에 시간 확인했죠?”
“응.”
“나한테는 안 그래도 돼요. 그냥 해요.”
대니얼이 온정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왜 다 받아줘?”
“어제 댄이 한 말 그대로 할게요.”
…나를 뭘 믿고요?
…다 믿지. 전부 다 믿어. 그래져.
“나도 그래져요.”
대니얼이 이마를 온정의 젖가슴에 비빚비빚했다.
온정이 한 손으로 대니얼의 볼을 감싸고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잡아 대니얼의 입에 밀어 넣었다.
“한 번 더 먹고 가요.”
대니얼이 진하게 신음하며 젖가슴을 빨아들였다. 순식간에 몸이 달뜨며 중심이 육중해졌다.
아버지 준수가 늘 말했었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물론 되기는 했다. 하지만 결함과 하자가 가득한 ‘됨’이었다. 채워지되 줄줄 새기도 하는 불안정한 ‘됨’이었다.
그런데 온정은 시키는 대로 해요, 하지 않음에도 말하는 대로 하게 됐다. 온정이 이르는 대로만 하면 뭐든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것도 온전한 ‘됨’, 결함과 하자가 없는 완벽한 ‘됨’ 말이다. 새는 구멍 하나 없이 꽉꽉 채워지다가 급기야는 흘러넘치는,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도 영향을 줄 수 있는 그런 ‘됨’ 말이다.
“댄. 넣어줘요.”
그 또한 하라는 대로.
날뛰는 분신을 온정의 몸 안으로 옮겼다.
‘크레바스!’
그랬다. 문득 떠오른 것이 크레바스였다. 온정의 몸 안이 얼마나 깊은지 그 깊이가 좀처럼 가늠되지 않았다. 겉에서 보면 아주 작은 틈인데도 일단 진입만 하면 끝도 없이 들어가니 말이다. 자신의 페니스가 더 길지 못하다는 게 한스러웠다.
“댄.”
대니얼이 귀를 기울여 다음 명령을 기다렸다.
“마음껏 비비다가 숲에 뿌려줘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니얼이 허리를 밀었다. 허리와 엉덩이 쪽의 세포가 타닥타닥 튀는 게 느껴졌다.
“하아, 누나.”
허리를 움직여 천천히 비비기 시작했다.
“아아, 댄. 잘하고 있어요.”
칭찬이 최음제로 작용했다. 한껏 몽롱해진 대니얼이 속도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며 마찰을 거듭했다. 별다른 기교 없이 그저 단순하게 진퇴만 하는데도 온몸이 미치겠다고 아우성을 했다. 뿐이랴. 결합된 부위가 흥건한 것이 온정의 반응 또한 지금까지 중에서 가장 적나라했다.
대니얼이 온정의 귀에 뜨거운 입김을 뿜었다. 온정이 대니얼의 머리를 가슴에 꼭 품고 아래에서 위로 엉덩이를 부드럽게 치올렸다. 중심과 중심이 맞닿을 때마다 쩔꺽쩔꺽 붙는 소리가 났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은 탓에 가느다란 침 한 줄기가 대니얼의 입에서 온정의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허물어질 대로 허물어진 대니얼의 얼굴을 보자 온정에게 뿌듯함이 찾아왔다. 외모에 어울리는 퇴폐미가 사랑스럽고 자랑스러웠다.
“댄! 예뻐요.”
순간 대니얼이 부르르 떨더니 몸을 일으켰다. 온정이 대니얼의 허벅지를 꽉 잡고 그의 중심에 시선을 고정하자마자 대니얼의 페니스에서 액체가 뿜어져 나와 온정의 치모 위로 떨어졌다. 나왕산에 폭설이 쏟아지듯이, 그렇게 온정의 숲에도 뽀얗게 정액이 덮였다.
“아아! 아! 누나!”
온정이 천천히 손을 뻗어 정액을 문질렀다. 숲에 골고루 스며들도록.
그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몸을 계속해서 떨던 대니얼이 온정의 몸 위에 풀썩 엎어졌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진짜 가기 싫어.”
온정이 대니얼을 끌어안고 최선의 다정함으로 몸을 어루만졌다.
***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 스카이라운지 창가에 소리 없는 한숨이 흘렀다. 반듯하게 앉은 온정의 허벅지를 끌어안고 무릎 사이에 고개를 푹 박은 대니얼이 연거푸 뿜어낸 짙은 한숨이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워낙 눈에 띄다 보니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하나같이 멈칫하고는 알게 모르게 힐긋했다.
온정은 대니얼을 마냥 내버려 두었다. 개가 품을 파고들 때 그 어떤 주인이 ‘개야. 예의를 지켜야지!’ 하겠는가. ‘우리 강아지, 오냐오냐!’ 하지.
창밖에 비친 나왕산과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곤돌라를 쳐다보던 온정이 고개를 돌려 스카이라운지 안을 둘러보았다.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손님이 제법 있었다. 보드와 골프를 즐기러 온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의 투숙객들이 분명했다.
‘저 사람들 눈엔 우리가 어떻게 보일까?’
붙들고 물어보나 마나 연인이라고 대답하리라.
온정이 피식했다. 정식으로 사귑시다, 한 건 아니지만 두 사람은 이미 연인이었다. 아니 연인을 넘어 혈맹에 가까운 동지가 돼버린 터였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믿어 의심치 않고, 한 사람이 한 사람을 다 받아주는 관계라니. 그게 가능하다고?
온정이 대니얼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자신이 직접 감겨주고 말려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 부드럽게 감겼다. 뿐이랴. 대니얼의 페니스와 치모도 꼼꼼하게 말려주었다. 왜? 온정의 몸을 채웠고 앞으로도 채울 온정의 것이니까.
앞으로도.
그랬다. 앞으로도. 이후로도 내내 쭉.
대니얼이 팔을 들어 올려선 온정의 허리를 끌어안고 이번엔 배에 고개를 묻었다.
온정이 대니얼의 귓불을 조물조물 만졌다.
“댄. 풀에 오래 있지 말아요.”
“응.”
“실내 온도 너무 낮게 설정하면 안 되는 거 알죠?”
“응.”
“10월 초 말고 9월 말 정도로 해요. 안팎의 온도 차이가 너무 나면 병나요.”
“응.”
“쓸데없는 잔소리 했어요?”
“아니. 쓸데 많아. 듣고 싶으니까 더 해.”
“편식 안 하는 건 좋은데, 그래도 찬 음식은 되도록 피해요.”
“응.”
“헤어숍은 내가 알아보고 일러줄게요.”
“누나가 데려가.”
“음…… 그래요. 그건 그렇게 해요.”
온정이 거기서 말을 멈췄다. 할 말이야 많지만, 그거 다 했다가는 잔소리꾼밖에 안 된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그러자 대니얼이 고개를 들고 온정을 쳐다보았다.
“벌써 끝났어?”
“네.”
“더 해.”
“지금까지 혼자 잘해왔잖아요.”
“그게 뭘 잘한 거야. 그냥 혼자 다녔을 뿐이지 잘한 건 없어.”
온정이 대니얼의 볼을 쓰다듬었다.
“혼자 다녔다는 것 자체가 잘한 거예요.”
대니얼이 배시시 웃었다. 그러다 다시 고개를 묻었다.
“누나 냄새 담아갔으면 좋겠다.”
“옷 하나 가져가잖아요.”
아닌 게 아니라 온정이 입었던 셔츠를 극구 가방에 꾸려 넣은 터였다.
“아아! 떼써서 오늘 같이 갈 걸 그랬나 봐.”
“금방 따라갈게요.”
“금방은 10분 뒤가 금방이지. 며칠 뒤가 무슨 금방이야. 아, 배 아프려고 해. 스트레스받아서.”
온정이 대니얼의 손을 잡아당겨선 꾹꾹 눌렀다.
그때였다. 멀리에 강 실장이 나타났다.
온정과 눈이 마주치자 빠르게 다가오던 강 실장이 온정에게 엎어져 있는 대니얼을 발견하고는 우뚝 섰다.
온정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갈 시간이에요?”
“10분 뒤 출발입니다.”
“올라가기만 하면 되죠?”
“예.”
그도 그럴 것이 스카이라운지에서 별도의 계단을 오르면 바로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의 옥상이었다. H 표시가 커다랗게 그려진 헬리콥터 이착륙장이 바로 그곳이었다.
“5분 뒤에 움직일게요.”
“예.”
강 실장이 멀어지자 대니얼이 몸을 일으켰다. 눈이 벌겠다.
“아아, 댄.”
“미칠 거 같아.”
“공항까지 같이 갈까요?”
대니얼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온정이 부드럽게 웃으며 대니얼을 끌어안았다.
“말했죠? 시간 상관하지 말고 전화하라고.”
“응.”
“씻을 때도 휴대폰 들고 들어갈게요.”
“그럼 그때는 화상통화.”
온정이 피식, 웃었다.
“그래요. 원하는 대로 해요.”
“아아!”
대니얼이 온정을 숨도 못 쉴 정도로 부둥켜안았다.
“빨리 와.”
“네.”
“진짜 빨리 와.”
“네.”
“하아아!”
온정이 대니얼에게 안긴 자세로 천천히 일어섰다. 당연히 대니얼이 따라 올라왔다.
“이제 올라가요.”
“응.”
대니얼이 가까스로 팔을 풀고는 온정의 손을 꼭 잡아 쥐었다. 이어서 스카이라운지 밖으로 나가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은 문을 열었다. 계단 위가 벌써 요란했다.
“프로펠러 소리 벌써 들려.”
“그러네요.”
“머리 자르길 잘했다. 그 머리로 여기 올라왔으면 막 엉켰겠어.”
온정이 “하하!” 하고 웃었다.
계단을 끝까지 오르자 활짝 열린 문을 통해 바람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패러글라이딩 캠프장에서 온몸으로 맞이하던 바람에 비하면 폭력적이었다. 어쩐지 걱정이 되면서 같이 차로 움직일 걸 하는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터였다.
“댄. 기장님 말씀 잘 들어야 해요.”
“응.”
대니얼이 온정을 마주 보고 섰다.
“작별 키스해.”
온정이 대니얼의 목에 팔을 걸고 입술을 포갰다. 거침없이 들어와 입 안을 휘젓는 대니얼의 혀가 온정을 어지럽게 했다.
‘이렇게 힘들 줄 몰랐어요.’
버티고 서있긴 하지만 온정도 처음 겪는 고난이었다.
입술을 떼고 온정이 대니얼의 볼을 감쌌다.
“댄. 빨리 갈게요.”
“응.”
강 실장이 고개를 들이밀고 외쳤다.
“시간 됐습니다.”
온정이 대니얼의 몸을 돌려세워선 부드럽게 밀었다. 대니얼이 고개를 돌려 온정을 한 번 보고는 강 실장을 따라 헬리콥터를 향해 뛰었다.
요란한 소리, 요란한 바람.
온정이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안 두 사람이 헬리콥터에 올랐고, 문이 닫히자마자 헬리콥터가 위로 떠 올랐다. 온정이 팔을 하늘 높이 들고 흔들었다. 소리가 사라지고 바람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흔들었다.
그때였다.
“본부장님.”
‘아! 누구더라?’
하지만 온정은 돌아보지 않았다.
“이제 내려가시죠.”
“네.”
온정이 바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갔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그러곤 그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곧바로 3층으로 향했다.
곤돌라 사업본부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여는 동시에 외쳤다.
“일어나지 마세요! 신경도 쓰지 마세요!”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본부장실’이라고 써진 방으로 이동했다. 들어가 문을 닫은 후 문에 등을 기댔다.
“하아!”
자신도 모르게 주르르 미끄러져 바닥에 주저앉았다. 호흡이 가빠졌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고 울면서 온정은 다시는 대니얼을 만나기 전의 예온정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