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D+3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20 D major Allegretto
라장조 약간 빠르게
곤돌라 정거장 의자에 두 사람이 나란히 몸을 내렸다. 푸르스름한 하늘 사이로 해가 비집고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니얼이 주변을 빙 둘러 두리번거렸다.
“여기 우리밖에 없는 거 맞지?”
“네.”
“밤에 산에서 야영하는 사람은 없어?”
“여긴 사유지라서 불가능해요. 걸리면 벌금이 엄청나거든요.”
“나는 지금까지 산은 다 나라 건 줄 알았어.”
온정이 “하하!” 하고 웃었다.
대니얼이 온정의 어깨를 감싸며 몸을 밀착했다.
“누나 여기선 안 할 거지?”
온정이 고개를 휙 돌려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여기서 섹스하고 싶어요?”
“응.”
“안 돼요.”
대니얼이 온정의 어깻죽지에 고개를 파묻으며 “하아!” 했다.
“댄.”
“알았어. 하자고 안 보채. 그냥 누나 냄새만 맡는 거야.”
온정이 대니얼의 뼘을 감싸고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췄다. 그러자 대니얼이 온정을 꼭 끌어안았다.
“나 달래준 거야?”
“네.”
“그럼 달래질게.”
온정이 다정하게 웃자 대니얼이 팔에 힘을 더 주었다.
“하아, 여기 그리고 지금. 정말 평화로워.”
“그래요?”
“응.”
대니얼이 “풉!” 하고는 말을 이었다.
“우리 간밤에 너무 요란해서 귀신이 기겁했나 봐. 결국 안 왔어.”
“왔는데 우리가 못 봤을 수도 있어요.”
“하느라고?”
“네.”
“아! 그럴 가능성이 더 높네. 우리 진짜 정신 못 차렸으니까.”
정신 못 차린 거 맞았다. 섹스를 일러 ‘거사’를 치른다고 한다던가. 실로 정확한 표현이었다. ‘클 거巨’에 ‘일 사事’, 그런 큰일이 없었다.
“그런데 누나. 하나도 안 피곤해.”
“그래요?”
“응. 몸이 굉장히 가벼워. 공중부양이라도 할 거 같아.”
온정이 대니얼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이런 장소에서 보니까 또 다른 사람 같아서요.”
“어떻게 다른데?”
“친구들하고 어울려 캠핑 온 학생 같아요. 아무 근심 없는 어린 학생.”
“나 안 어려.”
“포인트를 비껴갔어요.”
“아니. 내 포인트는 거기야. 나 결코 안 어려.”
온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알았어요.”
잠시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대니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리고 안 어리고의 기준이 뭔데?”
“하하하!”
“말해 봐. 무언가를 이것과 저것으로 나누기 위해선 척도라는 게 있잖아.”
“그 말이 그렇게나 걸려요?”
“응. 기준점을 말해 봐.”
온정이 “음!” 하며 눈동자를 굴렸다.
“훈정이요.”
“동생?”
“네. 훈정이를 기준으로 그 아래는 어리다, 그 위는 어리지 않다.”
“동생이 나이를 계속 먹어도?”
“네.”
“그럼 나도 계속 어린 축에서 강제로 살아야 해?”
온정이 또 “하하!” 하고 웃었다.
“정말 싫은가 봐요. 얼굴이 딱딱해졌어요.”
“응. 싫어. 진짜 싫어.”
온정이 대니얼의 손을 잡았다.
“나한테 댄은 많이 달라요. 간단하지가 않다는 뜻이에요.”
“어떻게?”
“사람의 감정이란 거의 양면적이에요. 한 가지 사실에서 한 가지 감정만 느끼는 경우는 극히 드물죠. 그게 인간이 가진 본성의 근간이에요.”
대니얼이 온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하고, 연민을 느끼는 동시에 고소함을 느끼고, 존경심을 갖는 동시에 시기심도 갖고, 그걸 한꺼번에 다 하는 게 사람이에요. 나만 해도 아버지가 그래요. 감사하지만 밉기도 해요.”
대니얼도 알아들었다. 자신 또한 다르지 않았다. 특히 부모를 상대로 품은 양가감정이 그랬다.
“나는요. 훈정이에게 뭘 기대한 적이 없어요. 내가 5만큼 했으니까 너는 적어도 3은 해라.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그런 마음이 아예 안 들어요.”
“아들도 아니고 동생인데 어떻게 그래?”
“누가 그래요? 자식한테 그런 기대를 안 갖는다고? 어떻게 보면 더 지독하게 보상을 바라는 사람들이 부모인 거 몰라요?”
“아! 그러네. 킹만 해도 이자 쳐서 갚으라는 고리대금업자처럼 보일 때도 있으니까. 그런데?”
온정이 대니얼의 손을 더 꼭 쥐었다.
“훈정이를 사랑해요. 하지만 내 걸로 하고 싶지는 않아요.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욕심도 없어요. 훈정이가 원하는 건 다 해줄 수 있지만, 거기서 끝이에요. 예를 들자면 일방통행 도로 같은 거예요. 나한테서 훈정이에게 향하는 길, 그거 딱 하나.”
대니얼이 굉장히 진지해졌다.
“한때는 훈정이에게 가진 감정이 혈육으로서의 감정이 아니라 대승적 감정인가 고민도 했어요. 하지만 난 그렇게 인류애가 넘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생각은 버렸어요. 그냥 훈정이에게 가진 내 사랑이 그렇게 생긴 거예요.”
온정이 대니얼에게 눈을 맞췄다.
“그런데 댄한테는 안 그래요. 내가 5를 했다면 4는 받고 싶어요.”
대니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심이야?”
“네. 똑같이 5를 받으면 더 좋고, 6이나 7을 받으면 더, 더 좋고.”
“왜 말 안 했어?”
“말을 뭐 하러 해요. 내가 알아서 받으면 되는데.”
“어?”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외할아버지가 우리 남매를 싫어하시는 거 뻔히 알면서도 주는 건 거절 안 했어요. 주실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만든 적도 있어요.”
“와우!”
“나요. 밉다고 등 돌리고 싫다고 버려버리고, 그런 단순한 성격 아니에요. 댄 앞에서 무릎 꿇고도 다음 날 댄 입에 거리낌 없이 가슴 물린 사람이 나에요.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 즉, 내가 작정만 하면 나는 댄한테서 5가 아니라 10도 챙겨낼 수 있다는 뜻이에요.”
대니얼이 몸을 똑바로 했다.
“누나. 내 에이전트 해. 진심으로. 응?”
“얘기가 또 그리로 가네요?”
“가야지. 내가 말했잖아. 아티스트들은 자기 분야에 대해선 엄청 영리하다고. 누나 잡아야 내가 성장할 거라는 예감이 마구 밀려오고 있어.”
대니얼이 고개를 뒤로 꺾고 “와!” 했다.
“누나가 오프로더 안에서 나더러 ‘야!’ 했을 때 알아봤어. 해저 3만리라고 했을 때 알아봤다니까? 누나 진짜 끝내줘. 와! 짜릿해.”
온정이 몸을 일으켜 대니얼의 다리 위에 앉았다. 그러곤 대니얼의 목울대에 키스했다.
“아, 누나.”
“취소할게요.”
“뭐를?”
“여기서 해요. 해 완전히 뜨기 전에.”
대니얼이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바로 온정을 끌어안았다.
‘정거장에 설 때마다 생각나고 싶어요.’
온정이 대니얼의 중심에 자신의 중심을 비비며 셔츠를 올려 가슴을 드러냈고, 대니얼이 바로 덥석 물었다.
“하아!”
빠르게 커지는 페니스의 부피감이 뿌듯했다. 그래서 칭찬을 담아 꾹 눌렀다.
“하읏!”
대니얼이 짧게 신음하고는 옷을 입은 채로 온정의 중심에 빠르게 문질렀다. 그러다 입술을 떼고 온정의 가슴에 고개를 박고는 자신과 온정의 바지를 고관절 부분까지 끌어내렸다.
“누나. 이 작은 숲이 저 큰 숲보다 힘이 더 세.”
그 말에 온정이 허리를 밀었고, 그러면서 귀두 부분이 질구에 닿았다. 대니얼이 부르르 떨고는 엉덩이를 돌려 삽입했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순간, 해가 떴다. 해가 뜨기 전에 섹스를 끝낼 계획이었는데 계산이 틀린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일출을 자각하지 못했다. 세상이 빠르게 환해지는 동안 서로의 몸 안에 빛을 채울 따름이었다.
***
대니얼이 탄 곤돌라를 뚫어져라, 아니 곤돌라 창에 바짝 붙어 열심히 손을 흔드는 대니얼을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누가 팔을 건드렸다. 돌아보니 훈정이었다.
“너 왜 여기 있어?”
훈정이 대니얼이 탄 곤돌라를 손으로 가리켰다.
“대니얼 씨야말로 왜 저기 있어?”
온정이 몸을 돌리자 훈정이 따라왔다.
“이 시간에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내려가는 거에 타고 있다고? 어떻게 그래?”
대꾸 없이 별채로 향하던 온정이 발을 우뚝 멈췄다.
‘아! 야전침대!’
박살이 난 야전침대를 갈무리해 별채 구석에 세워뒀는데, 아무래도 그게 걸렸다.
온정이 훈정을 쳐다보았다.
“나 보러 온 거지?”
“당연하지. 내가 누나 아니면 여기를 왜 와.”
“그래. 카페로 가자.”
“왜?”
“커피 당겨.”
“아! 그래 그럼.”
그때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Dan
피식, 하고 웃음이 나왔다.
‘훈정이를 봤겠지.’
휴대폰을 귀에 댔다. 훈정이 듣건 말건 개의치 않고 바로 대꾸했다.
“왜요?”
-왜 왔대?
“할 얘기 있대요.”
-무슨 얘기?
“지금 들으러 가고 있어요.”
-아!
“연습 잘해요.”
-나 보고 뭐라고 안 해?
“댄하고 똑같은 거 묻더라고요.”
-왜 왔냐고?
“네.”
-그래서?
“아직 대답 안 했어요.”
-대답할 거야?
“안 할 생각이에요.”
-왜? 나 거기서 잤다고 해.
“음. 그래요, 그럼.”
-진짜? 진짜 그렇게 말한다고?
“네.”
-누나는 정말…….
“연습 잘해요.”
-응. 기분이 날아가. 어제보다 더 잘 될 거 같아.
“다행이에요. 이따가 봐요.”
-응.
휴대폰을 내리고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훈정이 온정을 빠른 걸음으로 지나쳐 커피를 주문했다.
“윤 점장 휴일인가 보네?”
“어.”
“겸사겸사 얼굴 보면 좋을 텐데.”
온정은 별다른 대꾸 없이 2층 테라스 쪽으로 올라가 끄트머리에 자리를 잡았다. 멀리 대각선 방향 아래쪽에 의자가 보였다.
‘밖에서 섹스라니. 내가 나 때문에 놀라.’
빨라지려는 심장을 다독이며 호흡을 조절했다.
그때 훈정이 테이블 위에 커피를 내려놓고 맞은편에 앉았다.
“다정하게 통화하네?”
“어.”
훈정이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
“미안해, 누나.”
뜻밖의 발언에 온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갑자기 뭐가?”
“어제 서린이하고 진지하게 얘기했어.”
온정이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솔직히 말해서 나 계속 피하기만 했거든. 서린이가 화내고 짜증 낼 적마다 살살 달래서 상황만 모면하기 바빴고.”
훈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어제는…… 어쨌든 더는 안 되겠어서 내가 작정하고 먼저 얘기를 꺼냈어.”
“내가 왜 싫으냐고?”
훈정이 움찔했다. 그리고 3초쯤 후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도 안 되는 얘기를 늘어놓더라고. 서린이 꽤 합리적이거든? 누나도 알다시피 나 단순하잖아. 그래서 서린이의 그런 면에 반했고, 그런 면이 좋았어. 그런데 이건 입 여는 시점부터 다 엉망진창인 거야.”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기에 온정은 그냥 입을 다물고 있었다.
“어렸을 때 자기 언니들한테 당한 거, 학교 다닐 때 친구들한테 당한 거, 지금 직장에서 동료들한테 당하는 거, 아무튼 여자들이 자기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면서 별의별 에피소드를 다 꺼내는데, 듣다 보니까 어이가 없는 거야. 그럴 만한 게, 빌미를 다 서린이가 제공했더라고. 시작을 다 서린이가 했더라니까? 그래놓고 자기만 피해자야.”
그 또한 대강은 가늠하고 있었기에 온정은 계속해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 이야기의 끝이 왜 누나가 싫다야? 누나가 뭘 어쨌기에? 누나하고 대화다운 대화를 해봤어, 누나하고 밥 다운 밥을 먹어봤어? 누나하고 뭘 했다고 결론이 그래? 거기 어디에 합리적이고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구석이 있어?”
‘후우!’
“난 속으로 혹시라도 서린이를 대하는 누나 태도에 문제가 있었나, 나는 모르는 여자들만의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나, 돌아가지도 않는 머리 굴리느라고 어깨가 다 결렸는데 허!”
훈정이 고개를 떨궜다.
“서린이 화내고 짜증 내는 거 싫다고 어영부영 넘겨온 내가 너무 한심스럽더라고. 진즉에 꺼내놓고 진지하게 말해봤으면 시간 낭비도 없었을 테고, 어제처럼 큰 싸움이 벌어지지도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 누나한테 미안할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미치겠는 거야.”
온정이 컵을 들어 커피를 넘겼다.
“솔직히 어제 대니얼 씨한테 그 말 들었을 땐 주먹 날릴 뻔했거든?”
온정이 손을 멈췄다.
“무슨 말?”
훈정이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렸다. 그러곤 전날 대니얼과 있었던 일을 가감 없이 풀었다.
“‘내 감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너나 잘해.’ 하고 휙 돌아서 가는데 목덜미 잡아채서 갈길 뻔했다고. 나보다 나이도 적은 게.”
온정은 울컥했다. 그런 일이 있었을 줄이야. 그런 말을 했을 줄이야.
“그런데 틀린 말이 하나도 없는 거야. 내가 진짜 누나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나 싶고.”
훈정이 온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누나. 정말 미안해. 누나를 그런 식으로 대하는 여자를 이리 봐주고 저리 봐주고 한 내가 정말…….”
훈정이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숨을 몰아쉬었다.
“누나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대니얼 씨는 한눈에 다 파악하고 누나를 보호하는데, 정작 누나가 키우다시피 한 친동생인 나는…… 내가 누나를…….”
훈정이 눈까지 감고 숨을 골랐다.
“정말 미안해, 누나.”
훈정이 커다란 한숨을 내쉬었다.
“속상해 죽겠어. 내가 앞으로 대니얼 씨한테 누나에 대해 무슨 말을 한들 그게 과연 먹히겠어? 귓등으로도 안 들을 텐데? 누나에 대해서 내가 뭘 주장하겠어? 너나 잘하라는 말까지 들은 주제에 무슨 권리로 감 놔라 배 놔라 하겠어? 하다못해 우리 누나 눈에서 눈물 나게 만들면 네 눈에선 피눈물 나게 해준다, 뭐 그런 드라마 대사조차도 못 친다고.”
그 말에 갑자기 웃음이 비어져 나오면서 온정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누나 웃어? 난 지금 미치고 팔짝 뛰겠는데 웃음이 나와?”
“어, 나와.”
“하아아!”
“그래서 그 말 하려고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왔어?”
“더 일찍 올 거였는데, 깜빡 잠이 들어버린 바람에. 어제 거의 밤 샜거든.”
훈정이 바로 말을 이었다.
“헤어질 거야. 어제는 싸우느라고 거기까지는 말을 못 했는데, 더는 못 만날 거 같아. 아니, 내가 저더러 누나 데리고 살래? 누나 앞에서 설설 기래?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서. 사람이 완전히 달리 보이더라고. 정이 확 떨어졌어.”
온정은 말을 아꼈다. 아무리 동생이지만 애정 문제만큼은 건드려선 안 된다는 게 철칙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자신의 애정 문제를 훈정이 참견하도록 두지도 않을 거고 말이다.
“누나. 진심으로 미안해. 내가 너무 피하기만 하다가 일을 크게 만들었어. 부끄럽게 생각해.”
온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Dan
“하하하하!” 하고 웃음이 터졌다.
훈정이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누군데 그래?”
온정이 웃음을 삼키며 휴대폰을 귀에 댔다.
“왜요?”
-동생이 뭐래?
“하하하하!”
-왜 웃어?
“연습 안 해요?”
-이제 할 거야. 뭐라는데?
“얘기 중이에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해?
“하하하하!”
-왜 자꾸 웃어?
온정이 훈정을 힐긋 했다.
“댄. 예뻐요.”
경악으로 커다래지는 훈정의 눈이 우스웠다.
-내가 예쁘다고?
“네. 엄청 예뻐요.”
-와! 이거 뭐지? 신종 채찍인가? 그게 뭐든 신난다. 연습 두 배, 아니 세 배로 잘할게.
“네.”
휴대폰을 내리자 훈정이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카락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그런 훈정을 담담하게 바라보며 온정이 느긋한 몸짓으로 컵을 들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21 A major Amoroso-Presto
가장조 부드럽게-매우 빠르게
‘No.21 A major Amoroso-Presto’를 시작하고 약 30여 초. 대니얼이 문득 활을 멈췄다.
‘이 부분이 원래 이렇게 우울했었나?’
바이올린까지 내린 대니얼이 구석으로 움직여 의자에 몸을 내렸다.
‘오늘따라 우는 것처럼 들리네.’
고개를 내려 바이올린과 활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악기는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기교에도 별 차이가 없었다. 하루 사이에 얼마나 변한다고. 초보라면 10분 만에도 달라진 소리를 낼 수 있겠으나, 대니얼은 열 살도 되기 전부터 세계를 넘나드는 터였다.
물론 사흘 전의 연주회 때도 변화를 느끼기는 했다. 아버지 준수의 말이 아니어도 자신의 귀에도 다르게 들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연습 시간이었다. 대니얼의 경우, 연습 때는 감정보다는 기교에 집중하기 때문에 이런 적이 거의 없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는가.
대니얼이 양손에 바이올린과 활을 든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대니얼이 눈을 뜸과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 나 내일 떠나는구나. 그렇지! 나 내일 가지!’
그랬다. 다음 날 오후에 싱가포르로 출발하게 돼 있었다. 연주회 전에 연주회장 근처에서 사흘을 묵는 대니얼로서는 내일 떠나야 일정을 맞출 수 있었다.
‘내일 오후부터는 누나를 못 보는 거였어.’
방금 전까지 앉아있던 의자에 바이올린과 활을 내렸다. 그러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내 옆에 누나가 없다고?’
바닥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차라리 같이 떨어지면 좋겠는데, 자신은 간당간당하게 매달린 기분이었다.
‘무슨 이런 속수무책이 다 있지?’
대니얼이 뒤로 벌러덩 누웠다. 냉기가 온몸을 파고들면서 소름이 일었다.
‘허! 어떻게 이렇게 암담할 수가 있냐고.’
법적으로 간섭받지 않아도 되는 나이를 지나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사람 떼어내기’였다. 쉽지는 않았다. 주변에 머리카락만 보여도 발광을 하고, 그림자만 비쳐도 난동을 부리고, 그 지난한 과정을 거치고서야 아버지 준수가 항복했고, 그때부터 온전히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이후로는 완전하게 혼자 움직였다.
연주 여행을 가서도 최소한의 도움 외에는 사람과의 접촉을 피했다. 그렇게 해도 들러붙는 사람들이 남자여자 골고루 있었지만 가차 없이 쫓아냈다. 힘들어도 혼자, 외로워도 혼자, 고단해도 혼자, 무서워도 혼자, 그게 편한 까닭이었다.
‘잘 지내왔는데 왜 갑자기 혼자가 되는 게 이렇게나 싫으냐니까?’
가슴을 들썩이던 대니얼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가방에 바이올린과 활을 넣고 앞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올렸다.
-예. 미스터 대니얼 도.
“질문 있어요, 강 실장님.”
-예.
“내일 헬기 이용 가능해요?”
-헬기 말씀이십니까?
“네. 자동차로 가려면 새벽같이 나가야 하지만, 헬기는 천천히 출발해도 되잖아요.”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알아봐 주세요. 비용은 제가 대요.”
-아닙니다. 원래 이용하실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그건 염려 안 하셔도 됩니다.
“그럼 부탁할게요, 강 실장님.”
-그런데 미스터 대니얼 도.
“고소공포증은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아! 예.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시간 확정한 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휴대폰을 내리고 방음의 방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호텔에 들러 바이올린을 두고 갈까 하다가 그냥 곤돌라 정거장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어서 좋네.’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 측에서야 사람 없는 이 상황이 반갑지 않겠지만, 대니얼은 좋았다.
정거장에 도착하니 대니얼을 알아본 직원이 바로 달려 나와선 막 출발하려는 텅 빈 곤돌라에 대니얼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고마워요.”
대니얼의 인사에 직원이 화들짝 놀라더니 90도로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러고 보니 나 처음으로 인사했구나.’
한숨이 쏟아졌다. 그 누구에게도 인사한 적이 없었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누나는 직원들한테 엄청 상냥하게 인사하던데. 이름도 다 알고.’
한숨이 연거푸 쏟아졌다.
어깨를 늘어뜨리고 풍경을 보고 있자니 며칠 전 곤돌라에 함께 탔던 커플이 떠올랐다.
…선배!
…어때?
…하아!
…한 번 더 하자.
‘한 번 더 하자는 건 뭐 남자들 전용이야? 나도 툭하면 누나한테 한 번 더하자고 조르는데.’
대니얼이 문가에 섰다. 도착하려면 더 있어야 하지만 마음이 급했다.
전방에 시선을 두고 산꼭대기를 노려보았다. 10분이 길게 느껴지는 게 꼭 나왕산 탓이기라도 한 듯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노려보았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기 마련이어서 대니얼은 곧 도착했다. 바로 앞에 또 다른 직원이 서 있었다.
“또 뵙습니다.”
대니얼이 고개를 까딱하고는 빠르게 별채로 향했다. 그런데 가까이 가자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발을 멈추고 귀를 기울이니 별채 뒤쪽이 살짝 수런거렸다.
‘뭐지?’
여차하면 바이올린 가방이라도 휘두를 생각으로 손에 힘을 주고 뒤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심호흡을 하고는 고개를 들이밀었다.
“누나 뭐 해?”
온정이 깜짝 놀라선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댄!”
대니얼이 온정에게 빠르게 다가갔다.
“뭐 하는 거야?”
“여기 왜 왔어요?”
“뭐 하는 거냐니까?”
“조금 있다가 만날 텐데 왜 올라왔어요?”
그러다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나 데리러 왔어요?”
“응. 1분이라도 빨리 보려고.”
온정이 환하게 웃는 동안 대니얼이 상황을 확인하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이거 우리가 부순 야전침대네?”
“네. 해체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군데군데 어그러져서 분리가 잘 안 되네요.”
“내가 할게.”
온정이 기겁했다.
“연주회 앞두고 손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고 그런 소리를 해요?”
“이 정도는 괜찮아.”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괜찮다니까?”
“누구 맘대로 괜찮대요. 근처에도 가지 말아요.”
대니얼이 온정을 끌어안았다.
“아, 갑갑해. 정말 해주고 싶어.”
“알았어요. 고맙기도 해요.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응.”
온정이 대니얼을 가만히 떼어내고는 야전침대 잔해를 구석으로 몰아놓고 허리를 폈다.
“댄.”
“응?”
“난 이런 거 대신해준다고 감동 받는 사람 아니에요.”
“응.”
“앞으로도 나설 생각 말아요.”
“하아!”
온정이 환하게 웃으며 대니얼의 팔을 잡고 별채 안으로 데려갔다.
“연습 잘했어요?”
“No.21 하다가 기분이 이상해서 멈추고 온 거야.”
“그랬어요?”
“응.”
“그럼 여기서 이어서 할래요?”
“여기서?”
“네.”
대니얼이 온정을 빤히 쳐다보다가 바이올린 가방을 열었다. 바로 꺼내지 않고 한참을 들여다보던 대니얼이 조심스럽게 바이올린과 활을 꺼내 자세를 잡았다. 그러곤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 마주 선 온정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결심했다. 싱가포르에 아버지 준수를 오라고 해야겠다고. 그의 앞에서 연주를 해야겠다고. 그리고 자신의 변화가 누구에게서 비롯되었는지 알려야겠다고. 아니 보여줘야겠다고.
***
어둑해지기 시작하는 창밖을 흘깃한 대니얼이 바로 이어서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누나. 통화하고 들어가자.”
“그래요.”
“킹 일어나서 한숨 돌렸을 시간이거든.”
“몇 시에 일어나시는데요?”
“4시.”
“훠우!”
대니얼이 온정의 손을 꼭 잡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그런데 분명히 받았는데도 건너편에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아버지?”
-하아!
‘웬 한숨? 시간을 잘못 잡았나?’
-납치라도 당한 줄 알았다.
“납치요?”
-네가 애비한테 먼저 전화한 거, 지금이 처음이다.
‘그런가?’
그랬거나 안 그랬거나 대니얼은 무시하고 해야 할 말을 했다.
“싱가포르 오세요.”
이번에도 조용했다. 하지만 대니얼은 그냥 계속했다.
“그렇게 알게요.”
휴대폰을 내리려는데 건너편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댄.
“네.”
-무슨 일 있는 게냐?
“싱가포르에서 확인하세요.”
-그래. 알았다.
“끊어요.”
휴대폰을 재킷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온정을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럼 이젠 누나네 킹 만나러 갈까?”
온정이 소리는 내지 않고 입꼬리만 살짝 말아 올리며 웃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자 룸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보통은 비서 포함해 한둘이 따라다니는데 뜻밖이었다.
“오셨습니까?”
온정이 무리 중에서 강 실장을 발견하고는 바로 물었다.
“어떻게 여기 계세요?”
“부사장님께서 저희도 부르셨습니다.”
“연주회 때문인가 봐요.”
“예. 하루 공연이었는데도 반향이 컸다고 하시면서 저희도 여기서 밥 먹으라고 하셨습니다.”
온정이 활짝 웃었다.
“좋네요. 맛있게 많이 드세요.”
“예. 본부장님.”
강 실장이 대니얼을 쳐다보며 활짝 웃었다.
“미스터 대니얼 도. 즐거운 시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이며 강 실장에게 손을 내밀었다. 강 실장이 깜짝 놀라 손을 맞잡자 대니얼이 나직하게 말했다.
“첫날부터 내내 고생하셨어요. 내일도 부탁드려요.”
“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대니얼이 손을 놓자 다른 직원이 룸의 문을 열어주었다.
온정이 대니얼과 함께 안으로 들어서자 지용이 빠르게 다가와 대니얼에게 손을 내밀었다. 대니얼이 맞잡자 지용이 정중하게 웃었다.
“리셉션 때 나눈 이야기가 별로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대니얼은 별다른 대꾸 없이 그저 웃기만 했다.
지용의 안내로 세 사람이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자 바로 음식이 날라져 왔다.
지용이 직원에게 일렀다.
“따로 부르기 전까지는 들어오지 말게.”
“예. 부사장님.”
상이 모두 차려지고 식사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지용이었다.
“헬기를 요청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온정이 대니얼을 쳐다보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누나한테 말해야 하는 거 잊어버렸어. 부사장님 식사 초대에 신경이 팔려서.”
고개를 살짝 끄덕인 온정이 젓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지용이 온정을 쳐다보았다.
“내일 강 실장은 두고 네가 따라가.”
온정이 “네?” 했다.
하지만 지용은 대답 없이 다시 대니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낫지 않겠습니까?”
“네.”
그냥 네.
지용이 ‘흠!’ 하는 표정으로 대니얼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우리 아이하고 많이 가까워지신 모양입니다.”
“네.”
또 그냥 네.
온정이 피식했다. 대니얼에게서 심통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심통이 말도 못 하게 귀여웠다.
“한데 머리를 자르셨습니다. 바버 숍 대표에게 전해 듣긴 했으나 실제로 보니 적잖이 충격입니다.”
“네.”
“도 회장님이 많이 놀라시겠습니다.”
“네.”
지용이 이번에도 ‘흠!’ 하는 표정을 짓고는 심상하게 말을 이어갔다.
“싱가포르로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싱가포르 일정이 끝나면 어디로 가십니까?”
이번엔 ‘네’가 불가능한 질문이어서 온정은 귀를 기울였다.
“고민 중이에요.”
“고민 중이라. 연주회 일정은 없습니까?”
“한 달 뒤에 있어요.”
“아!”
지용이 고개를 몇 번이나 주억거렸다.
“어느 지역입니까?”
“북유럽 순회 일정이에요.”
“아하! 북유럽.”
지용이 바로 말을 이었다.
“에이전시 없이 활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지용이 뭐라고 또 질문을 하려는데 대니얼이 먼저 덧붙였다.
“조만간 생길 예정이에요.”
지용이 깜짝 놀라는 동시에 온정이 움찔했다.
“도 회장님 말씀으로는…….”
“그분은 아무것도 모르세요.”
“아하!”
온정은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그렇게나 부드러운 ‘아하’라니. 지용의 한풀 꺾인 반응이 재미있었다. 돌진 직전의 야수나 다름없는 아버지가 아니던가. 만일 온정이 저런 식으로 대꾸했다면 ‘그분? 그게 애비더러 할 소리냐? 그러고도 네가 자식이냐, 새끼야?’ 하며 볼펜이라도 던졌을 텐데 말이다.
이후로 밥 먹는 소리만 들리는 가운데 지용이 헛기침을 했다.
“우리 아이가 불편하게 만들어드린 건 없는지 걱정이 됩니다.”
“너무 편하게 해줘서 떠나기 싫은 상황이에요.”
“아하!”
온정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먹기만 했다.
“그럼 싱가포르에서 다시 이리로 오시면 되겠습니다.”
대니얼이 지용을 쳐다보자 지용이 말을 이었다.
“한 달이 빈다고 하셨으니 그동안 룸도 그대로 쓰시고, 연습실도 지금처럼 사용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대니얼이 이번엔 온정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온정은 마주 보지 않고 젓가락만 부지런히 놀렸다. 대니얼이 온정 쪽으로 상체를 기울였다.
“누나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지금 연습실에서 하루 10시간 연습은 힘들어요.”
“그런가?”
“네. 주변 환경이 비인간적이에요.”
대니얼이 동의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습실이 아트홀 부속건물에 들어있는데, 공연이 없는 날은 썰렁한 것이 진심으로 살풍경한 까닭이었다.
“거기서 한 달 동안 하루 10시간씩 있다가 나오면 바이올린에서 기계 소리밖에 안 나올 거예요.”
“그래?”
“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당장 결정해야 할 문제 아니니까 차분하게 궁리해 봐요.”
“같이 궁리해준다는 거지?”
“네.”
대니얼이 환하게 웃으며 지용을 쳐다보았다.
“결정되면 말씀드릴게요.”
말은 대니얼이 하는데 지용의 시선은 온정에게 닿아있었다. 하지만 이내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그러십시다. 뭐든 최고로 지원하겠습니다.”
“제가 도 회장님 아들이기 때문인가요?”
“지금까지는 그랬습니다.”
“그럼 다음부터는 다른 이유가 있다는 뜻이신가요?”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결정이 되면 공유하지요.”
대니얼이 활짝 웃고는 온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누나 많이 먹어.”
온정이 다정하게 대답했다.
“고마워요. 댄도 많이 먹어요.”
“응.”
지용이 수저를 든 채로 대니얼과 온정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22 F major Marcato
바장조 똑똑하게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으로 들어서자마자 대니얼이 온정의 허리춤을 잡고 들어 올렸다.
“댄!”
“하하!”
“들어 올리기만 하면 어떡해요. 몇 바퀴 돌려야지.”
“아!”
대니얼이 온정을 높이 든 채로 바로 세 바퀴를 돌고는 내려서 끌어안았다.
“와! 기분 좋아. 나 일부러 계속 심통만 냈거든? 하하! 기분이 너무 좋아.”
어린아이 같은 소리였지만 온정도 함께 웃고 말았다. 아버지 지용이 한 번씩 난감해하는 모습이 꽤 재미있었던 것이다. 부모님에게 장난을 친다던가, 일부러 곯린다던가, 그런 생각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그런데 대니얼이 대놓고 퉁퉁거리는 걸 보는데 묘한 희열이 느껴졌다.
“누나는 나중에 킹 만나면 어떤 컨셉으로 갈 거야?”
온정이 웃음을 터뜨리며 대니얼의 품에서 벗어났다. 대니얼이 온정의 양팔을 다정하게 잡았다.
“응? 어떤 컨셉이 자연스러워?”
“컨셉 잡고 행동해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아! 그렇겠구나.”
“킹한테도 천적이 있어요?”
“없지. 오죽하면 내가 킹이라고 부르겠어.”
“흠! 고민되네요.”
“정 할 거 없으면 그냥 개겨.”
온정이 아까보다 더 크게 웃었다.
“생각해 봐. 내가 뭘요? 내가 뭘 어쨌다고요? 그런 식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눈치 없이 굴면 킹이 뒤로 넘어가지 않을까?”
“킹을 뒤로 넘기고 싶어요?”
“뒷목 잡는 거 한 번 봤으면 좋겠어.”
“그러다 진짜 큰일 나면 어쩌려고요.”
“거기까진 안 가지. 내가 연주회 엎었을 때 콧김만 풍풍 뿜는데, 한 단계만 높이면 뒷목 잡을 거 같더라고. 그런데 연주회 엎는 거 이상의 무기가 나한테는 없잖아. 그래서 더 이상의 시도를 못 했거든.”
“그럼 그 무기를 나더러 장만하라는 거예요?”
“말이 그렇게 되네.”
“알았어요. 고민은 해볼게요.”
대니얼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러다 바로 정색했다.
“참, 잊고 있었다. 아까 동생 뭐래?”
“아, 나도 잊어버렸네요. 거기에 대해 할 말 있어요.”
“뭔데?”
온정이 대니얼과 나란히 카우치에 앉았다.
“훈정이한테 정말 그랬다면서요?”
…잡으러 다니는 누나도 있고. 동생이 샘나.
…훈정이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기막혀할 거예요.
…그럼 그 동생 버리고 나를 가져. 나는 고맙게 여길 테니까.
…그건 댄이 훈정이한테 직접 말해요. 네가 그따위로 굴어서 네 누나 내가 가져간다, 그렇게.
“그거보단 셌지.”
“아무튼 그런 식으로 말했다면서요?”
“응. 그게 왜?”
“훈정이, 여자친구하고 헤어지겠대요.”
대니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누나 동생 커플 깬 거야?”
“네.”
“와우! 나 진심으로 멋진데?”
온정이 고개까지 뒤로 젖히고 소리 내서 웃었다.
“실은 굉장히 거슬렸어요.”
“동생 여자친구?”
온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훈정이가 좋다니까 아무 내색 안 했지만 얼굴 보며 살고 싶지 않았어요.”
“그 정도였어?”
“네. 훈정이와 남매로 살기 어렵겠구나, 아기를 낳아도 고모 노릇 할 기회가 없겠구나, 그랬어요.”
“부모님은?”
“엄마는 관심이 없으니까 외로 치고. 아버지는 결정적인 하자가 없는 한은 내버려 둔다는 주의세요. 외할아버지 때문에 마음고생을 굉장히 많이 하셨거든요.”
결정적인 하자, 라는 말에 대니얼은 그 남자를 떠올렸다. 그런 하자가 어디 있을까.
“그래서 아무도 걱정을 안 내비쳤죠. 그래 봐야 훈정이만 다치니까요. 둘 사이만 좋다면 제삼자야 뭐.”
“그걸 내가 건드렸구나.”
“네. 훈정이도 내심 쌓이는 게 있었나 봐요.”
“그래서?”
“네?”
“헤어진다고 했다며. 그래서 누나는 뭐라 그랬는데?”
“아무 말 안 했어요.”
“왜? 지금이라도 정신 차렸다고 칭찬해주지?”
“그래주기 싫었어요.”
대니얼의 눈이 커다래졌다.
“상처받았거든요.”
대니얼이 온정을 와락 끌어안았다.
“아, 누나.”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나 싫다는 여자하고 저렇게 지내나.”
“응. 이해해.”
“안 보고 살아도 상관은 없어요. 나도 엄마 딸이라 냉정한 구석이 있어서 사람한테 매달리고 안 그러거든요. 그래도 서운하긴 하더라고요.”
“누나 하나도 안 냉정해.”
온정이 피식했다.
“어디다 말도 못 하고 그냥 묻어두고 있던 건데, 그걸 댄이…….”
“그럼 동생한테 안 준 칭찬 나한테 주면 되겠네.”
“네?”
“우리 춤추자.”
온정이 고개를 들었다.
“춤이요?”
“응. No.22만 계속 재생되게 해놓고 거기 맞춰서.”
머릿속에 ‘No.22 F major Marcato’를 떠올렸다. 아닌 게 아니라 24개의 카프리스 가운데 춤곡의 느낌이 가장 많이 났다.
온정이 환하게 웃었다.
“그래요.”
“기왕 추는 거 발가벗고 출까?”
“댄.”
“알았어. 옷은 입자.”
부리나케 달려가는 대니얼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온정은 속이 울컥했다.
‘내일…… 가는구나.’
안 그래도 에이전트 건에 대해 맹렬하게 궁리 중이었다. ‘곤돌라 사업본부’에서 평생 있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사업본부나 본사 쪽으로 가는 건 싫고, 여러모로 골치 아픈 상황에서 매혹적인 제안인 건 사실이니까 말이다. 게다가 일렉트릭 기타 분야에서 갈고 닦은 귀의 내공 덕분인지 바이올린 선율이 잘 읽혔다. 한다면 즐겁게 할 수 있지 싶었다.
문제는 대니얼과의 관계였다. 혹시 중간에 사이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그 후폭풍을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었다. 눈앞에 닥친 일 앞에서 미래를 염려한 적 없었는데, 이번 일은 심히 걱정이 됐다.
그때 ‘No.22 F major Marcato’가 크게 들려왔다. 이어서 대니얼이 다다다 뛰어오더니 온정을 일으켜선 자세를 잡았다.
“댄. 이건 왈츠 자세인데요.”
“아는 게 이것밖에 없어.”
온정이 “하하!” 했다.
“춰봤어요?”
“어려서 선생하고.”
“파티에선 안 춰봤다는 뜻이에요?”
“응.”
“왜요?”
“추기 싫어서. 허리 잡고 손잡고, 딱 질색이야.”
“그런데 그 질색이 지금 나한테는 돼요?”
“응. 누나한텐 다 돼. 배워두길 잘했어.”
“그래요. 리드해 봐요.”
대니얼이 환하게 웃고는 온정을 리드해갔다. 4분의 3박자 왈츠 스텝을 8분의 6박자에 맞추려니 다리가 꼬였지만 두 사람은 개의치 않고 빙글빙글 돌았다.
“누나.”
“네.”
“나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아.”
“그래요?”
“응.”
대니얼이 온정을 꼭 끌어안았다. 그 상태로 2분 19초 정도 되는 ‘No.22 F major Marcato’가 정확히 스물두 번 반복될 때까지 돌고 또 돌았다.
***
보이는 거라곤 오로지 나왕산밖에 없는 둥지 모양의 선베드에 온정이 먼저 누웠다. 대니얼이 짐을 푼 이후로 사람을 맞이한 적 없는 풀장 물가를 새 두 마리가 배회하고 있었지만, 선베드 쪽에선 제법 멀었다.
온정이 속으로 ‘새 이름이 뭘까?’ 하는데 대니얼이 온정의 몸 위에 엎드렸다. 온정과 마찬가지로 알몸이었다.
“누나. 속눈썹 핥아 봐도 돼?”
온정이 피식하자 대니얼이 혀를 내밀어 온정의 속눈썹을 살살 건드렸다.
“누나. 혀가 아니라 배꼽이 간지러워. 되게 간질간질해.”
눈을 뜨고 버티던 온정이 다시 시작되는 혀 놀림에 그만 감아버렸다.
왼쪽 속눈썹과 오른쪽 속눈썹을 번갈아 핥던 대니얼이 온정 코앞에 얼굴을 들이댔다.
“누나가 내 앞에서 무릎 꿇던 날 말이야. ‘선 무릎, 후 주먹’ 하고는 내 앞에 섰거든?”
“그랬어요?”
“응. 그때 누나가 눈을 똑바로 뜨고 나를 올려다보는데, 순간적으로 속눈썹만 보이는 거야.”
온정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때 손가락으로 쓸어보고 싶다, 그랬었지.”
“그런데 손가락 패스하고 바로 혀에요?”
그 말에 대니얼이 손가락으로 온정의 속눈썹을 살살 쓸었다.
“진짜 간질간질한다. 신기해. 누나 숲에 페니스 비빌 때랑 비슷해.”
“그래요?”
“응. 여기저기가 막 간지러워.”
온정이 팔을 뻗어선 대니얼의 등과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전엔 이러고 있으면 머리카락이 손에 닿았는데 아무것도 없으니까 이상해요.”
“다시 기를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요?”
“누나 내 에이전트잖아.”
“확답 안 했는데요.”
“하게 돼 있어. 나 키우는 재미가 엄청날 거거든.”
“어디에 근거를 둔 자신감이에요?”
“누나한테 근거를 뒀지. 미래가 보여. 누나 덕분에 내가 유명해지는 그림.”
“지금도 충분히 유명해요.”
“아니. 나 모르는 사람이 태반일걸?”
온정의 손이 대니얼의 엉덩이로 향했다. 그러자 대니얼이 허리를 부드럽게 돌리며 중심을 압박했다.
“유명해지고 싶어요?”
“응. 파가니니 말고 대니얼 도로.”
“이해해요.”
“누나는 이해해줄 줄 알았어. 킹은 절대 아니지만.”
“뭐라고 하시는데요?”
“늘 같은 소리지. 너를 파가니니로 믿고 살아라.”
온정은 말문이 막혔다. 왜 다른 사람으로 살라는 말을 그리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나는 대니얼 도로 살 방법을 모르겠어. 다른 작곡가 곡을 연주하면 반응이 시큰둥하거든. 파가니니 곡을 연주해야만 피드백이 오는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고.”
“파가니니를 버리고 싶어요?”
“그건 아니야.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도를 만든 건 분명 파가니니니까. 나의 뿌리는 파가니니 맞아. 하지만 열매는 다양하게 맺어보고 싶어.”
“이런 말 킹한테는 안 해봤어요?”
“어려서 살짝 운을 띄워본 적이 있었는데, 바로 무시당했어.”
온정이 대니얼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허리를 좌우로 살살 비틀어 중심을 자극했다. 대니얼이 나른하게 신음하며 온정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았다.
“계속해줘. 지금 기분 너무 좋아.”
즉각적인 반응에 온정이 허리를 조금 더 유연하게 흔들었다.
“댄.”
“으응?”
“궁리해 볼게요.”
“정말?”
“네.”
“그럼 에이전트 계약해?”
“궁리부터 하고요. 별 아이디어 없으면 계약 못 하죠.”
“왜 못 해?”
“킹 앞에서 큰소리쳐야 하잖아요. 우리 댄 내버려 두세요, 하고. 총알도 없이 방아쇠 당겨봐야 헛짓이에요.”
대니얼이 허리를 꾹 눌렀다.
“아, 누나. 그 말 진짜 짜릿했다.”
온정이 손을 몸과 몸 사이로 밀어 넣어선 페니스를 잡고 몸 안으로 흘려 넣었다.
“흐읏! 아, 누나.”
“좋아요?”
“응. 미치겠어.”
“그럼 미치겠는 거 풀릴 때까지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아, 누나. 나 누나 정말 좋아.”
“고마워요.”
대니얼이 허리를 조금 들고 물결처럼 흔들었다. 귀두가 꾹 박힌 채로 페니스의 몸통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회전하며 질 내벽을 문질렀다.
“아, 댄.”
대니얼이 무릎을 밀어 올리며 상체를 세웠다. 그 결에 온정의 다리가 더 벌어지면서 결합된 부분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내가 사랑하는 숲.”
대니얼이 온정의 치모를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엄지손가락으로는 클리토리스를 가만가만 눌렀다. 클리토리스의 위치는 몸으로 익힌 내용이었다. 그곳을 자극했을 때 온정의 몸이 확 달라지는 까닭이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질 내벽이 리드미컬하게 수축하며 물기를 뿜었다. 안 그래도 원활했던 페니스의 움직임이 더 매끄러워졌고 끈적거림도 높아졌다.
‘아, 솔직한 몸이야.’
다른 손으로 젖가슴을 덮자 꼿꼿하게 곤두선 유두가 손바닥 가득 느껴졌다.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굽혀 물고 쭈욱 빨아들였다. 그러자마자 엄청난 수축이 진행되었다. 한마디로 말도 못하게 조였다. 유두를 입에 문 채로 대니얼이 숨을 골랐다. 그 와중에도 클리토리스는 계속해서 자극했다.
“아, 댄.”
온정이 손을 뻗어 손가락으로 대니얼의 항문에서 음낭 사이를 살살 문질렀다. 그러자 몸 안에서 페니스가 더 커지면서 질 안이 꽉 찼다.
“하아!”
“아아!”
대니얼이 상체를 일으켜선 무릎을 꿇은 자세로 온정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당연히 온정의 엉덩이가 붕 뜨면서 몸이 뒤로 늘어졌다.
“누나.”
온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라고 부른 게 아니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누나한테 나 전부 맡길게.”
“나를 뭘 믿고요?”
대니얼이 허리를 강하게 튕겼다.
“하읏!”
“다 믿지.”
또 튕겼다.
“흐읏!”
“전부 다 믿어. 그래져.”
“그래요?”
퍽.
“하으읏!”
“패러글라이딩 캠프장에서 내가 서슴없이 벼랑 가까이 갈 수 있었던 것도 그래서였어.”
“아!”
퍽.
“흐으읏!”
“아, 누나.”
대니얼이 다리를 풀어 바로 앉고는 온정을 잡아 올려 품에 안았다.
“싱가포르에 와.”
온정이 엉덩이를 강하게 내려앉았다. 그러자 잔잔한 호수에 바윗덩어리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대니얼이 부르르 떨었다.
“내일 같이 가자고는 안 해. 열흘 있을 거니까 그동안에 와. 응?”
“댄.”
“와. 안 오면 내가 데리러 올 거긴 하지만, 그래도 누나가 와.”
온정이 대답 없이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니얼이 손가락으로 숲을 헤집고 자신의 페니스로 인해 적나라하게 갈라지는 질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명을 좀 더 키울걸, 하는 후회가 들 정도로 매혹적인 정경이었다.
숨이 가빠졌다. 그러고 보니 온정의 몸에 바이올린을 덧입히지 않고 있었다. 그저 온정으로만 보고 있었다. 온정은 온정일 뿐이라는 자각이었다. 음악도 아니고 악기도 아니고, 그저 온정.
대니얼이 온정을 부둥켜안고 무릎을 세웠다. 그리고 엉덩이를 아래에서 위로 강하게 찍어 올렸다.
‘아! 아아! 아아아!’
속으로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내지르는 가운데 사정감이 밀려왔다.
‘못 뺄 거 같은데.’
그때였다. 온정이 대니얼의 품에서 빠르게 빠져나가더니 입으로 페니스를 물었다. 정액이 뿜어졌다. 어떻게 피하고 말고 할 새도 없이 온정의 입 안에 쏟아냈다.
“하아, 하, 하아아, 하아!”
자신의 다리 사이에 박힌 검은 머리통을 넋 놓고 보던 대니얼이 “허! 누나!” 하는데 온정이 다시 대니얼의 다리 위에 앉아선 페니스를 도로 집어넣었다.
“댄. 말 안 한 게 있는데요.”
숨을 몰아쉬며 온정의 눈을 쳐다보았다.
“댄 정말 맛있어요.”
대니얼의 눈이 둥그레졌다.
“엄청난 칭찬이야. 연주 좋다는 말보다 더 좋아.”
“그래요?”
“응.”
대니얼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럼 누나.”
손을 뒤로 짚고는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맛있게 먹어.”
온정이 야릇한 웃음을 짓고는 골반을 휘돌리기 시작했다. 안 줘도 뺏어 먹을 판에 준다는 걸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