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D+2 (7/13)

6. D+2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7 E-flat major Sostenuto-Andante

내림마장조 무겁게-느리게

눈을 떠 눈꺼풀을 끔벅끔벅하던 온정이 “하아!” 하며 팔로 눈을 가렸다.

“누나 왜? 왜 가리는데?”

“언제부터 그러고 나 보고 있었어요?”

“한 시간?”

“어쩐지 꿈에 누가 자꾸 따라다니더라니.”

“허! 정말 그랬어? 쫓겨 다니다가 눈 뜬 거야?”

온정이 입술을 앙다물었다. 웃을 뻔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니얼이 온정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잡아선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자 대니얼이 아주 예쁘게 눈웃음을 쳤다.

‘여우!’

“누나 있으니까 정말 좋다. 그제 밤에 죽는 줄 알았거든.”

‘그랬어요?’

“실은 누나가 여기서 잘 때 입었던 옷 내내 끌어안고 있었어. 일곱 살 때까지 애착 담요 끌고 다녔는데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었어.”

‘그랬어요?’

“애착 담요 하니까 갑자기 울컥하네.”

“왜요?”

“킹이 뺏어서 나 보는 데서 태웠거든.”

온정이 손을 뻗어 대니얼의 볼을 어루만졌다.

“지금도 생생해.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으면서 눈물도 안 나오더라고.”

‘왜 그렇게까지 하셨대요?’

“그래서 그날 연습을 못 했거든? 그랬더니 또 가두더라고.”

‘정말이었네. 진짜로 가두고 굶겼네.’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노여움이 치올랐지만 온정은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시점엔 태우는 킹보다 그걸 가만 내버려 두는 어머니가 더 원망스러웠어.”

‘아! 그 기분은 나도 알아요.’

알고도 남았다. 평소에도 온정과 훈정에게 데면데면하게 군 어머니였지만, 그래도 막상 위험이 닥치면 보호해줄 줄 알았다. 낳아준 엄마니까 당연히 그럴 거라 믿었다. 하지만 첫 만남 때부터 외손들에게 무시무시한 폭언을 퍼부은 외할아버지를 어머니 희경은 마냥 내버려 두었다.

물론 어른이 되고 나서 이해하기는 했다. 말리고 나섰으면 일이 더 커질 수도 있었으니 어머니 희경으로서는 그게 나름의 최선이었을 수 있다고. 하지만 희경은 폭언 뒤에조차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 일이 있었니?’ 하는 얼굴로 자신의 일만 했을 뿐이었다. 그 배신감이라니. 희경은 지금도 여전했다.

‘그만 생각해야겠어.’

온정이 손을 옮겨 대니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댄.”

“응?”

“정말 다른 사람 같아요.”

진심이었다. 전날 바버 숍 대표가 ‘지금 상황에서 최선은 삭발이지만, 투블럭 댄디 컷도 어느 수준까지는 맞출 수 있습니다.’ 하며 공들여 손질해준 헤어스타일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 것이다.

대니얼이 배시시 웃었다.

“잘 어울리지?”

“엄청 어울려요. 꼭 댄 때문에 생겨난 헤어스타일 같아요.”

“내 생각도 그래. 그런 엉망진창을 이렇게 완벽하게 다듬어놓다니. 놀라워.”

온정이 대니얼의 귀를 살폈다.

대니얼이 바로 반응했다.

“말짱해. 걱정 안 해도 돼.”

온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열다섯 살짜리도 아니고 무슨 그런 사고를 쳐요?”

“열다섯 살짜리들이 들으면 분노해. 열다섯 살짜리는 그런 사고 안 쳐.”

“편드는 거 보니까 열다섯 살이신가 봐요, 미스터 대니얼 도.”

대니얼이 온정의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그렇게 부르지 마.”

“왜요, 미스터 대니얼 도?”

“하지 말라니까.”

“그럼 이유, 말해줘요.”

대니얼이 온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렀다가 뗐다. 그러곤 나직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킹은 뼛속까지 한국 사람이야.”

“그래요?”

“응. 집 안에 있을 때의 킹과 집 밖에 있을 때의 킹은 완전히 다르지.”

“어떤 점에서요?”

“대표적으로 집에선 영어 절대 안 써. 듣는 것도 싫어해. 그래서 고용인들 전부 한국어해.”

뜻밖이었다. 다국적기업의 회장이 그럴 줄이야.

“아버지 최측근들은 한국어가 굉장히 유창해. 아버지가 회사 일이야 다 영어로 소통하지만, 한국어 잘하면 아무래도 예쁨 받기 마련이니까 다들 기를 쓰고 배운 거지. 그중에서 최고가 제이슨이야. 제이슨은 사자성어도 자유자재로 써.”

“훠우!”

“킹은 특히 이름에 집착해. 영어식 이름 없이 무조건 ‘도준수’ 그렇게 쓰고 누가 ‘준수 도’ 그러면 무례하다고 정색해. 나나 어머니 이름은 무조건 풀 네임으로 해야 하고. 미스터 대니얼 도, 미시즈 나디아 쇼, 그렇게.”

“어머니 성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요?”

“응. 누가 미시즈 나디아 도, 그렇게 부르잖아? 그럼 그 자리에서 정정해줘. 나디아 쇼라고. 남의 성 막 바꾸지 말라고. 어머니도 좋아해. 이름만 그렇게 부를 뿐이지 내 식구, 내 사람 챙기는 면에선 킹의 집착을 그 누구도 못 따라가니까. 왜 그런 거 있잖아. 조강지처 개념.”

대니얼이 피식했다.

“웃기는 거지. 나한테는 그렇게 혹독하게 굴면서 자기들끼리는 좋아.”

온정이 대니얼의 손을 꼭 잡았다.

“그래서 내가 미스터 대니얼 도라고 부르는 게 싫어요?”

“응. 냉정하게 들려. 다른 사람들이야 뭐라고 부르든 신경 안 써서 아무렇지 않은데, 누나가 그렇게 부르면 마음이 힘들어.”

온정이 누운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다신 그렇게 안 부를게요.”

대니얼이 몸을 돌려선 온정의 어깨 옆에 손바닥을 짚었다.

“이제 용서해주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어요.”

대니얼이 온정을 끌어안으며 몸 위에 엎드렸다.

“천천히 해도 돼. 어쨌든 지금 내 옆에 있으니까.”

온정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러고 있는 걸 보면 용서가 아닐까 싶으면서도 막상 ‘용서’라는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같은 의미에서 섹스도 불가능했다. 그걸 아는지, 대니얼도 지난밤에는 얌전히 잠만 잤고 말이다.

심호흡을 하고 입을 열었다.

“댄. 나 출근 준비해야 해요.”

대니얼이 바로 몸을 세워선 온정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다.

“나, 누나 만나러 가도 돼?”

“일정 없어요? 사흘 더 있기로 할 때 오디세이하고 얘기된 거 없어요?”

“없어. 연주회 끝나고 바로 움직이기 싫어서 그냥 더 있겠다고 한 거지, 놀 생각은 전혀 안 했어.”

“나 없었으면 뭐 할 생각이었는데요?”

“뭐 할 생각 같은 거 없었는데?”

“그럼 그냥 멍?”

“응. 연습하고 멍. 연습하고 멍.”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그래서 온정은 자신도 모르게 대니얼을 안았다.

토닥토닥, 토닥토닥.

그때였다. 온정의 휴대폰이 진동했다.

“하아! 아버지 같아요. 잠시만요.”

온정이 침대에서 벗어나 맞은편 방으로 가 충전 중인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네.”

-너 지금 어디야?

쩌렁쩌렁.

“네?”

-집 아니지?

‘아!’

온정이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서 대니얼과 함께 묵고 있다는 건 지용은 전혀 모르는 사실이었다.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에서도 온정이 아침저녁으로 드나든다고만 알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게 어떻게 되느냐고? 온정이 호텔 관계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은 감시카메라를 비롯한 그 어떤 감시체계에서도 예외에 든 장소였고, 출입 또한 특별카드를 통한 이중 보안을 거쳐야 가능한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까닭이었다. 엘리베이터가 그냥 엘리베이터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의도만 있다면 충분히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일단 엘리베이터까지 아무나 접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일차적으로 걸렸다. 기록을 확인하면 온정이 언제 들어가고 나왔는지 확인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불순한 목적이 없는 다음에야 홍보실에서 알아서 챙기고 있는 VVIP의 주변을 누가 그렇게까지 나서서 들쑤시겠는가.

뿐만 아니라 청소니 뭐니 하는 서비스 부분에서도 대니얼은 사람을 일절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세탁물은 런드리 바구니로, 룸서비스는 서빙 카트로 별도의 엘리베이터를 통해 오르락내리락했으니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걸 본 사람이 있을 수도 없었다. 아무런 언급이 없이도 눈치를 챈 사람은 강 실장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결국 밟힌 모양이었다. 며칠이나 됐다고. 그렇다면 누구의 꼬리일까. 온정의 꼬리일까, 아니면 강 실장의 꼬리일까, 그도 아니면 대니얼의 꼬리일까.

-새끼야. 당장 뛰어와.

뚝.

“누나.”

온정이 천천히 몸을 돌려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댄. 아버지한테 다녀올게요.”

“무슨 일 생겼어?”

온정이 웃었다.

“아무래도 무릎 꿇어야 할 것 같아요.”

“같이 가.”

“네?”

“나 때문이잖아. 그러니까 같이 가.”

온정이 대니얼에게 다가가 머리를 살살 만졌다. 길었을 때보다 외려 손이 더 잘 갔다.

“지금은 나 혼자 다녀올게요.”

“같이 가자니까?”

“댄도 곧 만나게 될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은 숨 고르고 있어요.”

대니얼이 온정을 와락 끌어안았다.

“꿇지 마.”

“별 거 아니에요.”

“싫어. 꿇지 마. 그때 내 앞에서 꿇었던 게 마지막이었던 거야. 더는 꿇지 마.”

“노력해볼게요.”

말의 끝에서 온정이 웃었다. 긴장이라곤 없는 편안한 웃음이었다.

***

문을 열자마자 무언가가 날아와 왼쪽 눈 옆 벽에 부딪혔다가 떨어졌다. 내려다보니 티슈 상자였다.

“너 뭐 하는 새끼야!”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지용에게로 다가갔다.

“네가 왜 거기서 자! 네가 왜 거기서 자!!”

전화로는 그리도 쩌렁쩌렁하더니 목소리가 낮았다. 부사장실이 시끄럽다는 걸 밖에 알리기 싫다는 뜻이었다.

“너 솔직하게 말해. 독주회 그대로 진행한 거, 혹시…….”

“아니에요.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럼 뭐야? 너 지금 애비 엿 먹이냐? 그동안 당한 거 복수하고 싶었냐? 저번에 그 난리를 친 것도 모자라서 또 일을 쳐? 그렇다고 애비를 딸 판 개자식으로 만들어?”

“아버지. 아니에요.”

“그럼 뭐야? 그 아편쟁이 당장 불러. 하, 같이 오랄 걸 그랬네. 열 받아서 그 생각까지는 못 했네.”

그 말에 온정이 지용을 와락 끌어안았다. 지용이 깜짝 놀라선 뻣뻣하게 굳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아주 어려서 말고는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안은 적이 없는데.

“아빠.”

게다가 아빠.

온정도 자신의 행동이 의외였다. 하지만 지용의 염려와 애정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윽박지르고 소리 지르고 무릎 꿇리고, 그런 괴팍한 아버지이나 미워는 해도 싫어하지 않은 이유가 그거였다. 애정.

지난번 그 남자와 그 여자 문제를 해결할 때도 그랬었다. 내 새끼한테 흠집 나는 건 절대 못 참는다, 바로 그거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상황 자체가 지독하게 꼬여 있어서 온정이 이런 식으로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지용에게서 틈이 보였다.

지용이 가슴을 들썩였다.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아빠 딸 그런 사람 아닌 거 아시잖아요.”

온정이 차분하게 말을 이어갔다.

“아빠 말씀대로 훈정이 보살피듯 한 거예요. 아빠 아시잖아요. 그 방 웬만한 아파트만 한 거. 아무 일 없었어요.”

그랬다. 온정은 일단 ‘솔직’을 피했다. 솔직하기 위해선 대니얼의 의사부터 확인해야 하는데, 상황에 떠밀려 급하게 진행하기는 싫었다. 한 발짝 떨어져 생각할 시간도 필요했다.

“정말이냐?”

지용의 목소리가 누그러져 있었다.

“네. 댄이 불안해했어요. 마음이 많이 여리더라고요. 그래서 누나의 마음으로 챙겼어요.”

“그렇다고 같이 자?”

온정이 지용의 팔을 위아래로 쓰다듬고는 몸을 뗐다.

“말씀 안 드려서 죄송해요. 그냥 조용하게 흘려보내고 싶었어요.”

지용이 한숨을 내쉬고는 의자에 털썩 앉았다.

“새벽에 운동하러 나갔다가 박 대표 만났다.”

“박 대표요?”

“호텔 바버 숍 박 대표.”

‘아!’

“박 대표 바버 생활이 40년이다. 사내들 머리 만지고 얼굴 만지면서 쌓인 눈치가 아주 그냥 만치라고. 한데 박 대표가 그 아편쟁이 얘길 하더라.”

또 아편쟁이. 하지만 온정은 그냥 있었다. 자연스럽게 달라지리라.

“시작은 ‘머리를 얼마나 난리를 쳐놨는지 다듬느라고 혼났습니다.’ 그랬는데…….”

지용이 온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말끝에 너희 둘이 부부로 보인다는 말을 하더라.”

온정이 입을 벌렸다.

“사실 자기가 여자는 잘 몰라서 너까지 확신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편쟁이는 두말할 거 없었다더라. 너를 제 마누라 보듯 봤다나. 그러면서 혼사 계획 있냐고 묻더라. 박 대표가 호텔 소속이기는 해도 내 수하는 아니잖냐. 평소에도 만나면 이 말 저 말 하는데 아까는 넘치더라. 자기가 더 흥분해서는.”

“당황하셨겠어요.”

“적당히 넘겼다. 그러곤 그 길로 집을 찾아갔더니…….”

“무슨 집이요? 제집에요?”

“그래. 너 사는 집.”

‘아!’

“비어있더구나.”

“놀라시게 해서 죄송해요.”

“정말 아니야?”

“댄이 저한테 의지하는 건 맞아요.”

“그래 보이긴 한다. 하, 댄이라니. 도 회장 들으면 난리 날 소리지. 누가 자기 아들 이름 부르면 하늘이 내려앉는 줄 아는 양반인데.”

지용이 한숨을 내쉬었다.

“저번에 네가 댄이라고 하길래 속으로 이상하다 싶으면서도 또래끼리 만났으니 이름 텄나보다 하고 넘겼더니 한 지붕 아래서 그러고 있었던 거네.”

또래. 다섯 살이나 차이가 나는데 또래. 하긴 지용의 눈에는 스물여덟이나 서른셋이나 또래로 보이겠다 싶었다.

“하! 뒷골 땡겨.”

“죄송해요.”

지용이 손가락으로 이마를 긁었다.

“너 나한테 불려 나오는 거 봤을 텐데, 뭐래?”

“같이 가자고 했어요.”

“한데 왜 혼자 왔어?”

“아버지 뭐 던지실 것 같아서요.”

“그새 또 아버지라네.”

‘아!’

“하이고. 새벽부터 용 썼더니 기운 딸려 죽겠네.”

“식사 챙겨드릴까요?”

“됐다. 좀 쉬었다가 먹으면 된다.”

“죄송해요.”

“그래서 가는 날까지 더 붙들고 있겠대?”

가는 날. 그 말이 심장에 콕 박혔다.

“그럴 거 같아요.”

온정이 덧붙였다.

“출근은 해요.”

“그럼 저는 혼자 남아서 뭐 한다는데?”

“저 따라간대요.”

지용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디를? 산에를?”

“네.”

지용이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더니 “허!” 했다.

“고소공포증 있다던데 곤돌라를 탄다고?”

“네.”

“혹시 탄 적 또 있냐?”

“네.”

“있다고? 너 솔직하게 말해. 그 아편쟁이 너한테 다른 마음 있지?”

“그에 대해선 얘기 안 나눠봐서 몰라요.”

“아니 여적 그런 중요한 얘기도 안 하고 뭐 했냐? 붙어 앉아서 숨만 쉬었냐?”

온정이 가만히 있자 지용이 또 “허!” 했다.

“혹시 제이슨 그 친구도 뭐 알고 갔냐?”

“아니요. 알고 말고 할 게 없었어요.”

“그래?”

“네.”

“알았다.”

“죄송해요.”

“그놈의 죄송 소리는 어지간히도 하지.”

지용이 손바닥으로 이마를 감쌌다.

“가 봐.”

“네.”

“아! 내일 밥 먹자고 해. 셋이서.”

“네.”

“강 실장 편에 공식적으로 청 넣을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네.”

지용이 손을 흔들었다.

온정이 몸을 돌려 부사장실을 나와선 문에 기댔다.

“후우!”

최선이었다. 지금으로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온정이 걸음을 뗐다.

‘그나저나 생각지도 않은 데서 터졌네.’

그러게 말이다. 바버 숍 대표가 그런 말을 했을 줄이야. 그저 조용히 머리만 만져주고 갔는데 말이다.

…너희 둘이 부부로 보인다는 말을 하더라. 사실 자기가 여자는 잘 몰라서 너까지 확신하기는 좀 그렇지만, 아편쟁이는 두말할 거 없었다더라. 너를 제 마누라 보듯 봤다나. 그러면서 혼사 계획 있냐고 묻더라.

‘댄이 나를 정말 그렇게 본다는 거야? 다른 사람 눈에도 보일 정도로?’

온정으로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아아!”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원래 속도보다 빠르고 본디 강도보다 세게, 그렇게 뛰기 시작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8 C major Corrente-Allegro

다장조 빠르게-빠르게

엘리베이터 앞에 이불을 끌어다 놓고 그 위에 쿠션을 던졌다. 그리고 엎드렸다.

‘언제 와.’

나간 지 고작 20분.

실소가 터졌다. 그러니까 어이없을 때, 어처구니없을 때 나오는 웃음 말이다.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이 안 나.’

몸을 뒤집어 쿠션에 등을 대고 몸을 활처럼 만들었다. 그리고 고개를 뒤로 꺾고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오기를 다시 기다렸다.

‘진짜 무릎 꿇으면 안 되는데.’

자신 앞에서 거리낌 없이 무릎을 꿇던 온정의 모습이 떠오르자 명치에 불이 일었다.

‘내가 미친놈이지. 하아!’

입을 벌리고 “누나아…….” 하고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그러다 목울대를 마구 쳤다. 당연히 “아…….”가 요들송처럼 이리저리 구불댔다.

“누나아…….”

목에서 손을 떼고 침을 넘겼다. 그러곤 노래를 시작했다.

“누나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그러다 멈췄다.

“섬을 왜 보내. 배 못 뜨면 어쩌려고.”

몸을 다시 빙그르르 돌려 엎드리고는 팔다리를 허우적댔다.

“언제 와. 언제!!”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누나다!”

벌떡 일어나 침실로 뛰어갔다. 그 짧은 동안에 휴대폰 하나 안 챙기고 뭐 했느냐고 스스로를 혼내면서 말이다. 하지만 액정을 확인하자마자 표정이 삽시간에 굳었다.

King

“이쪽 킹도 용트림하시나 보군.”

심호흡을 하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어제 세 번이나 전화했다.

“네.”

-안다는 거야, 모른다는 거야?

“알아요.”

-알면서도 안 걸었다?

“네.”

-네?

“네.”

-댄.

대니얼은 그냥 있었다.

-또 뭐가 꼬인 게냐?

“배가 고파서요.”

-배가 고프면 밥을 먹어. 애비한테 신경질 내지 말고.

“그럼 끊을게요. 밥 먹게.”

-댄.

대니얼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여전히 조용했다.

‘언제 와.’

-댄.

“네.”

-바이올린 소리가 다르더구나.

제이슨 일행이 열심히 녹화했으니, 준수도 열심히 확인했을 것이었다. 어쨌거나 소리의 변화를 단박에 캐치한 준수가 새삼 놀라웠다.

-무슨 일 있는 게냐?

“저야 늘 무슨 일이 있는 거 모르세요?”

-댄.

그놈의 댄, 댄. 온정이 불러주는 댄과 너무 달랐다.

‘누나. 빨리 와서 댄이라고 불러줘. 덮어 씌워줘.’

-너는 파가니니다. 잊지 마라.

“아니요. 저는 대니얼이에요. 니콜로 파가니니가 아니라 대니얼 도에요. 아버지야말로 잊지 마세요.”

-너…….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요? 가두고 굶겨야 하는데, 눈물 콧물 쏙 빠지도록 몰아붙여야 하는데, 못 그래서 화나세요?”

-그건 다 너 잘되라고…….

“네.”

-후우!

침묵이 이어졌다.

-댄.

‘그냥 말을 해요. 이름 좀 그만 부르고.’

-싱가포르에 갈 생각이다.

“좋네요. 아들이 연주회 엎는 것도 구경하시고.”

-너…….

“아버지 계신 데선 연주 안 해요. 절대 안 해요.”

-댄.

“그만큼 들었으면 됐지, 뭘 또 더 들으시려고.”

-소리가 달라. 직접 듣고 싶다.

“그럴 일은 없어요. 늘 말씀드리는 거지만 아버지 앞에선 연주 안 해요.”

-몰래 들여다볼 수 있는데도 예의상 말해주는 거다.

“그럼 한 번 해보세요. 제가 아나 모르나.”

그때였다. 엘리베이터에 불이 들어왔다.

“밥 왔어요. 끊을게요.”

뚝.

휴대폰을 카우치에 던지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문이 열리고 온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서 뭐 해요?”

“시간 재고 있었어.”

피식하는 온정을 잡아당겨선 껴안았다.

“혼났어?”

“아니요.”

“정말?”

“네.”

“무릎은?”

“안 꿇었어요.”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온정이 말을 이었다.

“곧 밥 올 거예요. 먹고 바로 나갈 거고요.”

“응. 오후에 만나.”

“네. 연습 잘해요.”

“응.”

“전화하면 정거장에 나가 있을게요.”

“응.”

대니얼이 한소끔 쉬고 입을 열었다.

“한참 기다렸어.”

“네.”

‘누나. 나 혼자 못 갈 거 같아. 싱가포르 잊어버리고 있다가 아까 아버지 말 듣는 순간 기겁했어.’

“댄. 이제 좀 놓죠.”

대니얼이 순순히 팔을 놓고 온정에게 눈을 맞췄다.

“산에서 잘 수 있어?”

“네?”

“오늘 자자.”

“귀신 나와요.”

“내가 더 무섭…… 아, 나 머리 잘랐지. 그래도 내가 더 무서워. 응? 자자.”

“허!”

“한 번씩 못 내려와서 거기서 잘 때 있다고 했잖아. 오늘이 그런 날인 거야.”

“누구 맘대로요?”

“누나 마음대로인 걸로 해. 응? 그러자. 옷은 뭐 준비하면 돼?”

온정이 어깨를 내려뜨리며 “하아!” 했다.

“나 반바지부터 경량패딩까지 다 있어. 뭐 챙겨?”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니얼도 덩달아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웃긴 건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온정이 웃으니 기분이 대단히 좋았다.

***

연습실을 나가니 문 바로 옆에 훈정이 서 있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삐딱한 자세였다. 고개를 까딱하고 지나치려니 훈정이 다가왔다.

“미스터 대니얼 도.”

대니얼이 멈췄다.

“잘못 찾아온 줄 알았습니다.”

훈정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확 달라지셨습니다.”

대니얼은 대꾸하지 않았다.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하는지 아직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호텔로 가십니까?”

“네.”

바이올린을 두고 가방을 챙겨 나와야 했다.

“걸어오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그럼 지금 가실 때도…….”

“걸어가요.”

“함께 걷고 싶습니다만.”

대니얼은 길게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니얼이 걸음을 옮기자 훈정이 바로 옆에 서서 따라왔다.

“제가 왜 찾아왔는지 궁금하실 겁니다.”

‘어. 몹시 궁금해.’

“새벽에 난리가 났었습니다. 운동 나가셨던 아버지가 시간도 얼마 안 지났는데 갑자기 들어오시더니 누나 집에 가자고.”

‘아!’

“알았느냐, 몰랐느냐. 알았으면 왜 말을 안 했으며, 몰랐다면 네가 동생이냐. 저한테 어찌나 고함을 치시던지 고막 나갈 뻔했습니다.”

짐작이 갔다.

“방금 전에 아버지 뵈었는데, 들어보니 누나가 일단 불씨는 죽였더군요.”

밥 먹을 때 온정이 담담하게 풀어줘서 대니얼도 아는 바였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그래?’

“리셉션 때 누나 보는 미스터…….”

“그냥 대니얼이라고 해요.”

“아! 고맙습니다.”

훈정이 약 3초 후에 다시 말을 이었다.

“리셉션 때 누나 보는 대니얼 씨의 눈은 그냥 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지 모르겠는데…….”

‘무슨 소릴 지껄이려고?’

“우리 누나, 사람 참 잘 보살핍니다.”

‘그게 무슨 뜻?’

“정말 잘 챙깁니다. 보면 아는지, 필요한 거 바로바로 짚어내고 꼬인 거 바로바로 풀어주고, 그런 거 참 잘합니다. 그런 누나의 하나밖에 없는 동생으로 살면서 참 편했습니다.”

‘좋았다’가 아니라 ‘편했다’라. 미묘한 차이가 느껴지는 것이 어쩐지 마음이 상했다.

“나이 차이는 두 살밖에 안 나지만, 웬만한 엄마들보다 잘 챙겼다고 생각합니다.”

‘엄마!’

“아마 대니얼 씨께도 어느 정도는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혹시 그걸 오해하시는 건 아닌지…….”

“예훈정 본부장님.”

“이름 부르셔도 됩니다. 대니얼 씨께서도 이름 부르게 해주셨는데, 제가 그렇게 불리는 건 아니지 싶습니다.”

“그러죠. 훈정 씨.”

“예.”

“여자친구 있다고 들었어요.”

훈정이 ‘어?’ 하는 얼굴로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그 여자친구분이 누나를 꺼려한다는 내용도 알고 있어요.”

“누나라고 부르십니까?”

대니얼은 개의치 않고 계속했다.

“누나는 그런 말 안 했어요. 내가 미루어 짐작하고 판단한 거지. 하지만 맞잖아요?”

잠시 침묵하던 훈정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그런데요?”

“그러니까 잘 생각해 봐요. 자신을 엄마처럼 보살펴준 하나밖에 없는 누나와…….”

대니얼은 ‘하나밖에 없는’을 일부러 강하게 발음했다.

“맘 편하게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게 만드는데도, 그 여자를 어떻게 해보기는커녕 시시덕거리며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이 누구인지.”

“대니얼 씨.”

대니얼이 발을 멈췄다.

“훈정 씨는 동생으로서 자격 상실이에요.”

몸을 돌리고 훈정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누나하고 뭘 하든 어떻게 살든 참견하지 마.”

커다래지는 훈정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대니얼이 말을 이었다.

“너는 그 여자, 네 누나 허락받고 만나? 네 누나가 그러래? 네 누나 무시당하는 거 빤히 보면서도 힘 하나 못 쓰는 주제에 어딜 감히 찾아와서 동생입네 까불어.”

훈정이 입을 벌렸다.

대니얼이 손가락으로 훈정의 명치께를 꾹 눌렀다.

“나 염탐할 시간, 나한테 조언이랍시고 떠들 시간, 그럴 시간 있으면 네 여자나 건방 못 떨게 해.”

손가락을 떼면서 덧붙였다.

“내 감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너는 너나 잘해.”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몸을 휙 돌린 대니얼이 호텔을 향해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나이 차이는 두 살밖에 안 나지만, 웬만한 엄마들보다 잘 챙겼다고 생각합니다.

‘배은망덕한 자식. 그걸 알면서도 그런 여자를 그냥 둬?’

온정의 아버지라는 사람은 그녀를 수시로 무릎 꿇리고, 온정의 동생이라는 사람은 그녀가 홀대받는데도 방치하고 있었다. 대니얼의 아버지 준수가 대니얼을 가두고 굶길 때 늘 그랬었다. ‘다 너를 위해서’라고. 그런데 지용과 훈정에게는 그런 표면적인 이유조차도 없었다. 그저 자기들 편할 대로, 감정 내키는 대로 행동할 따름이었다. 그런 면에서 준수보다 더 악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대니얼 씨께도 어느 정도는 그랬을 겁니다. 그래서 혹시 그걸 오해하시는 건 아닌지…….

‘오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정말이지 화가 났다.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 누나 보고 싶다.’

뛰다시피 호텔 쪽으로 들어서는데 컨시어지 옆에 강 실장이 서 있었다.

대니얼을 발견한 강 실장이 바로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휴대폰이 꺼져 있다고 나와서 직접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훈정 때문에 휴대폰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자각이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혼자 다니셔도 되는지…….”

“성인 남자가 혼자 다니지 그럼 누구 달고 다녀요?”

“그건 아닙니다만…….”

“무슨 일이세요?”

“저희 부사장님께서 내일 저녁 식사를 함께 하셨으면 하십니다.”

“아!”

곧바로 되물었다.

“누나도 같이 먹는 거죠?”

“예. 혹시 예훈정 본부…….”

“싫어요.”

대니얼의 득달같은 반응에 강 실장이 움찔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간과 장소는 제가 예온정 본부장님께 말씀드려 놓겠습니다.”

“이 약속에 대해 누나도 알아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습니다.”

알지 싶었다. 아무래도 새벽에 있었던 일의 여파 같았다.

‘어찌 됐건 잘 됐지. 나도 뭐라고 말은 해둬야 하니까.’

“그런데 미스터 대니얼 도. 호텔로 아예 들어가십니까?”

대니얼이 환하게 웃었다.

“도로 나올 거예요. 곤돌라 탈 예정이거든요.”

“별채 가십니까?”

“네.”

“제가 정거장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와! 고맙습니다, 강 실장님. 그럼 5분만 계시겠어요? 금방 나올게요.”

“더 오래 걸리셔도 됩니다.”

아니 될 소리. 더 서둘러도 모자랄 판인데.

대니얼이 호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9 E-flat major Lento-Allegro assai

내림마장조 느리게-매우 빠르게

야전침대에 비스듬하게 누워 눈만 멀뚱거리는 대니얼을 온정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없었으면 뭐 할 생각이었는데요?

…뭐 할 생각 같은 거 없었는데?

…그럼 그냥 멍?

…응. 연습하고 멍. 연습하고 멍.

‘남들은 상상도 못 할 그림이야. 틈틈이 환각 파티라도 벌이게 생겨선 저렇게 조신하게 멍, 하고 있을 거라고 누가 짐작이나 하겠어?’

머리가 길었을 때와는 또 다른 퇴폐미였다. 그때는 껍질이 없는 과일이었다면 지금은 껍질이 있는 과일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때는 딸기나 바나나처럼 안과 겉의 색이 같은 계열의 과일이었다면, 지금은 겉은 노란데 속은 빨간 자몽이나 겉은 보라색인데 속은 연두색인 포도처럼 안과 겉의 색이 완전히 다른 계열이었다.

‘벗겨보고 싶네.’

생각의 끝에서 온정이 화들짝 놀랐다. 벗겨보고 싶다니.

온정이 팔꿈치를 세우고는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예온정.’

그때였다.

“누나 왜 그래?”

온정이 얼굴을 들자 대니얼이 몸을 일으켜 온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다른 걱정거리라도 생겼어?”

“그게 무슨 뜻이에요?”

“내 걱정 말고 다른 걱정할 게 또 생겼나 해서.”

온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걸 왜 물어요?”

대니얼이 일어나 온정에게 다가왔다.

“실은 나, 누나한테 자백할 거 있어.”

“자백이요?”

“응.”

온정이 의자에 등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나 모르게 사고 쳤어요?”

“응.”

‘그럴 일이 있었나?’

대니얼이 온정에게 더 다가갔다. 다리와 다리가 닿았다.

“연주회 전날 새벽에…….”

온정이 빠르게 시간을 거슬렀지만 짚이는 게 없었다.

“내가 누나 휴대폰을 건드렸어.”

“네?”

“목이 말라서 잠이 깼어. 그래서 물 마시러 나갔다가 그 김에 테라스에서 바람도 좀 맞았어.”

목소리마저 조심스러운 대니얼을 온정이 가만히 응시했다.

“그런데 누나 휴대폰이 번쩍거리더라고. 뭔가 싶어서 봤더니 메시지가 와있었어.”

온정이 ‘아!’ 하는 얼굴로 팔짱을 풀었다. 대니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뭐 짐작되는 거 있어?”

“네.”

대니얼의 눈빛이 바로 날카로워졌다.

“흔적이 남았어? 내가 다 지웠는데?”

“아니요. 흔적 같은 건 없었어요. 깨끗했어요.”

“그런데 왜 뭘 아는 얼굴이야? 혹시 그 자식이 메시지 또 보냈어?”

“네.”

대니얼이 몸을 숙여 한 손으로 의자 팔걸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온정의 팔을 잡았다.

“언제?”

“우리 풀장 선베드에서 낮잠 잔 거 기억해요?”

“그걸 어떻게 잊어?”

“그때 깨고 나서 확인했더니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어요.”

팔걸이를 잡고 있던 손으로 온정의 다른 팔을 잡으며 대니얼이 몸을 더 숙였다.

“뭐래?”

“괜한 말 해서 미안하댔어요.”

“또?”

“그게 전부에요. 그래서 의아했었거든요.”

“그래서 무슨 소리 하는 거냐고 물었어?”

불안으로 흔들리는 대니얼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온정은 순순히 답했다.

“그냥 무시했어요.”

대니얼이 “아아!” 하며 온정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그러곤 바들바들 떨리는 한숨을 흘렸다.

“잘못했어. 그러면 안 되는데, 그래선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어.”

“댄. 그때 우리 섹스 전이었어요.”

“아니. 섹스 맞아. 삽입은 안 했지만, 그래도 나한테는 섹스였어.”

‘그래서 그때부터 질투가 쌓였어요?’

…그러는 넌! 그러는 누나 넌 내가 네 인생에 유일한 남자야? 잠자리 기술이 그렇게나 능숙하면서 그동안 받아준 남자가 몇 명인지 내가 알 게…….

‘뜬금없고 난데없는 그 말이 거기서부터 시작된 거였어요?’

그냥 들어서 아는 것과 자신의 눈으로 직접 보는 것의 차이가 엄청나다는 것은 온정도 아는 바였다. 아버지 지용이 그 남자에 대한 뒷조사 내용을 말해줬을 때, 몹시 충격을 받았었다. 하지만 그 여자가 직접 찾아와 따지고 들었을 때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같은 내용이었는데도 말이다.

댄이 말을 이었다.

“모르지 않았어. 내가 누나더러 남자 있냐고 물었을 때 누나가 대답해줬으니까.”

…누나 씨. 궁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남자 있어? 남자 있냐니까?

…지금은 없어요.

…지금은? 그럼 언제까지 있었는데?

…1년 2개월 전까지 있었어요.

…그럼 궁할 때 됐잖아. 왜 아니라고 뻗대?

“하지만 그건 그냥 지나가는 글자였어. 차에서 보는 간판들처럼 지나가는 글자. 그런데 메시지는 아니었어. 글자가 나를 덮친다는 기분이었어. 한 자 한 자가 가슴에 콕콕 박혔어. 그래서 그랬어.”

“알았어요.”

대니얼이 고개를 들고 온정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게 다야?”

“네?”

“화 안 내?”

“아! 네.”

“왜?”

“화가 안 나는데 무슨 수로 화를 내겠어요. 화는 나야 나는 거예요.”

“화가 안 나?”

“안 나네요.”

“내가 누나 휴대폰을 맘대로 만지고 메시지를 맘대로 지웠다는데 화가 안 난다고?”

“네. 안 나요.”

대니얼이 몸을 내려선 무릎으로 섰다.

“자세가 왜 그래요?”

“화 안 내니까 더 무서워.”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댄. 안 그래도 돼요.”

“내가 저번에 놀라게 해서 나 더는 안 건드리는 거야? 누나야말로 안 그래도 돼. 그냥 화 내. 참지 말고 내.”

“댄.”

“가둬도 되고 굶겨도 되고 다 해도 돼.”

‘뭐?’

“아! 오늘 밤에 나 여기 혼자 있을까? 누나가 밖에서 문 잠그고……”

온정이 대니얼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러자 대니얼이 바로 온정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아, 세상에. 밖에서 문을 잠그라니. 그런 말을 어쩜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속이 쑤셨다. 아리고 저리고를 넘어 말도 못 하게 쑤셨다.

“댄. 잘 지웠어요.”

“응?”

“지워줘서 고마워요. 무슨 내용이었는지 모르지만, 봤으면 나 굉장히 우울했을 거예요. 그러니까 잘한 거예요.”

“그래?”

“네. 아주 잘했어요. 그리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래도 미안해, 누나. 다신 안 그럴게.”

온정이 팔에 힘을 주었다. 대니얼의 내면에 들어앉아 나가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아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괴롭히는 아이, 그 아이를 부숴버리고 싶어서 있는 대로 힘을 실었다.

***

카페 뒤 산장에서 야전침대 하나를 더 들고 와 원래 있던 야전침대 옆에 붙였다.

“하나에서 같이 자면 안 돼?”

“하중 못 견뎌요.”

“그러게 왜 이렇게 약한 걸 샀어?”

“이래 봬도 고강도 알루미늄 프레임이에요.”

“같이 자지도 못하는데 고강도는 무슨 고강도?”

“야전침대가 뭔지 몰라요?”

“알지. 그래도 더 튼튼한 거 없어?”

“더 튼튼해도 둘이선 못 자요.”

“왜?”

“눈 없어요? 좁잖아요.”

“그럼 텐트는? 텐트 치자. 텐트는 둘이 잘 수 있잖아.”

“댄. 그만 징징거려요.”

대니얼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이게 뭐야!”

온정은 결국 소리 내서 웃고 말았다.

“왜 웃어?”

“미취학 아동과의 말씨름 같아서요.”

“미취학?”

“네.”

대니얼이 입을 있는 대로 내밀며 자기 몫의 야전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누난 몰라.”

“뭐를요?”

“내가 얼마나 로맨틱한 그림을 그렸는데.”

온정이 몸까지 흔들며 웃었다.

“다행이네요. 에로틱이 아니고 로맨틱이라.”

대니얼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에로틱으로 해도 돼?”

‘내가 또 괜한 말 했지.’

온정이 검지로 대니얼의 이마를 밀어선 다시 눕게 했다.

“귀신 오면 댄이 상대할 거죠?”

“그건 걱정 마.”

자연스러운 화제 전환을 안심하며 온정이 별채의 불을 껐다.

“다 꺼?”

“네. 불빛 있으면 벌레 꼬여요.”

“방충망 있잖아.”

“뚫고 들어오더라고요.”

“그럼 창문 닫을까?”

“조금 있다가요.”

온정이 옆의 야전침대에 반듯하게 누웠다.

“누나는 여기가 좋아?”

“네. 좋아요. 이 별채 사수하려고 댄한테 무릎도 꿇었으니까.”

“아. 그랬구나.”

잠시 잠깐의 침묵 후에 댄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하는 일은? 지금 하고 있는 일도 좋아?”

“생각 안 해요.”

“왜?”

“생각했다가 안 좋아한다고 결론 나면 곤란하잖아요.”

“안 하면 되잖아.”

“순서가 틀려요. 좋아하는 걸 찾은 다음에 그만둬야지, 일단 그만두기부터 했다가 좋아하는 거 못 찾으면 더 골치 아파져요.”

“아! 나는 바이올린 하나만 보고 살아서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다.”

온정이 설핏 웃었다.

“누나.”

온정이 대니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내 에이전트 할래?”

“네?”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도와 종신 계약 맺은 에이전트.”

“종신 계약이요?”

“응. 계약 해지가 불가능한 에이전트.”

“그런 것도 있어요?”

“알 게 뭐야. 내가 한다면 하는 거지.”

온정이 대니얼 쪽으로 몸을 아예 돌렸다.

“혼자 다니는 거 힘들어요?”

“생각 안 하는데, 가끔 버겁긴 해.”

“에이전시에 소속되는 건 생각 없어요?”

“어디 묶이는 거 싫어.”

“그런데 나더러 에이전트를 하래요?”

“누나는 괜찮아. 아니, 괜찮은 게 아니라 좋아.”

“지금 생각한 거예요? 생각했던 걸 지금 말하는 거예요?”

“생각했던 걸 지금 말하는 거야. 보면 볼수록 누나 진짜 잘할 거 같아.”

온정은 가만히 있었다. 너무 뜻밖이어서 바로바로 판단이 안 됐다.

“킹은 겉으로 보이는 걸 대단히 중시해. 내 감정이나 취향은 안중에 없고 스타일, 이미지, 기교 그런 데 집중하지. 하지만 누나는 나한테서 나도 모르는 무언가를 끄집어내 줄 사람으로 보여.”

“그래요?”

“응. 나를 진짜 바이올리니스트로 만들어 줄 위대한 인물로 보여.”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웃음은 오래 가지 못했다. 대니얼이 입을 맞춘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쪽, 쫍, 하는 소리가 간지럽게 울렸다.

잠시 후 대니얼이 입술을 떼고 나직하게 말했다.

“누나 끌고 다니고 싶어서 그냥 하는 말 아니야. 아티스트는 자기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굉장히 영리해.”

“그렇겠죠?”

“나 키워봐.”

“그런 확신이 벌써 들어요?”

“응. 나를 28년 동안 키운 킹한테도 그런 확신이 안 드는데, 누나한테는 들어.”

“영광이네요, 댄.”

대니얼이 온정의 뺨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손은 곧 천천히 아래로 향했다.

“누나. 젖 먹여줘.”

‘아, 댄.’

대니얼이 몸의 반은 자신 몫의 야전침대에 두고 몸의 반을 온정에게 포갰다.

“누나. 안 보이니까 더 잘 느껴진다.”

‘그건 나도 그러네요.’

대니얼의 손이 살짝 빨라졌다. 온정의 셔츠를 들어 올려 살갗을 부드럽게 문지르다가 브래지어를 들쳤다.

“숨 막혀 보여. 이것 좀 하지 마.”

그러곤 바로 가슴을 물었다.

“아아!”

온정이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흘리면서 대니얼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이 꽁꽁 닫혀 있었는데, 섹스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없었는데, 몸이 빠른 속도로 열리고 있었다.

온정이 대니얼의 허리를 잡고 자신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대니얼이 바로 넘어와선 온정을 깔아뭉갰다.

‘아, 누나. 나 받아주는 거야?’

흥분이 가파르게 치솟았다. 온정의 옷을 끌어안은 채 침대에 홀로 웅크려 있던 밤이 떠올랐다. 그런 비탄이라니. 그러고 보니 비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장이 ‘No.3 e minor Sostenuto-Presto’이었던가?

그럼 지금은? 24개의 카프리스 중에 어느 부분이 지금과 가장 잘 어울리지? 아, ‘No.19 E-flat major Lento-Allegro assai’이겠구나. 내림마장조로 느리게-매우 빠르게. 느리게 그리고 매우 빠르게. 이를테면 ‘희롱하는 자의 장章’이랄까. 상대의 몸을? 아니, 자신의 몸을.

대니얼이 온정의 바지 단추를 풀고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그 결에 지퍼가 저절로 내려갔고 손은 곧 숲에 닿았다. 매혹적인 그 숲.

“으음!”

대니얼의 신음에 온정이 팔을 내려 대니얼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그러곤 똑같이 손바닥을 밀어 넣었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꽤나 외설스럽게 들렸다.

“댄.”

대니얼이 온정의 가슴을 입에 문 채로 “음!” 하고 대답했다.

“바로 넣어줘요.”

대니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손을 더듬어 온정의 바지와 팬티를 벗기고 자신은 위아래를 모두 벗었다. 그리고 온정의 발목을 잡아 위로 올리며 부드럽게 삽입했다.

“하아!”

“아아!”

다리를 뒤로 곧게 뻗은 대니얼이 발가락에 힘을 주고 허리를 움직였다.

“아, 누나.”

대니얼은 온정의 질 안이 뜨거웠고 온정은 대니얼의 페니스가 뜨거웠다. 뜨거움과 뜨거움이 만나니 불꽃이 튀었다. 이상한 건 불꽃의 성분이 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단내가 폴폴 나는 아주 끈적이는 물.

온정이 코로 냄새를 들이켰다.

‘아, 야릇한 냄새. 창문 닫을걸. 밤벌레들이 찾아오겠어.’

대니얼의 몸짓이 서서히 거세졌다. 반면 기교는 더 세심해졌다. 하루에도 열두 번은 섹스한 사람처럼 몸의 기교가 섬세해졌다.

‘이게 경험이 쌓여서 느는 게 아니었어. 누나가 능숙했던 건 경험 때문이 아니라 감정 덕분이었어.’

미안함이 폭발하고 깨달음이 폭발하고 마지막으로 애정이 폭발했다. 그리고 그 폭발이 몸을 폭주하게 만들었다. 미친 듯이 허리를 흔들며 온정의 가슴을 쥐어뜯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댄.”

온정이 허리를 비틀며 몸부림쳤다. 감각이 너무 생동해서 다른 때보다 오르가슴이 빨리 찾아온 것이다.

온정의 반응에 더는 견디지 못한 대니얼이 온정의 몸에서 페니스를 빼는 순간이었다. 야전침대가 주저앉았다.

“악!”

“꺄악!”

그 와중에도 대니얼의 사정은 시작됐고, 온정의 오르가슴도 멈추지 않았다.

온정의 다리 사이에 흥건하게 쏟아부은 대니얼이 잘게 경련하는 그녀를 일으켜 옆의 야전침대에 눕히고 다시 삽입했다.

“누나. 이 침대도 포기해. 내가 더 좋은 걸로 사줄게.”

대니얼이 바로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어쩐지 오늘 밤엔 아무리 쏟아내도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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