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D+1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4 E-flat major Moderato
내림마장조 보통 빠르게
윤 점장이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본부장님. 나흘만인데 4년 만에 만난 기분입니다.”
온정도 환하게 웃어주며 마주 잡았다.
“나흘이나 됐어요?”
“예. 연주회 끝나니까 바로 뵙네요.”
온정이 손을 놓으며 다가오는 곤돌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네요.”
“힘드셨나 봅니다. 조금 마르셨어요.”
“그래요?”
“예. 마음이 안 좋습니다.”
온정이 빙긋 웃고는 곤돌라에 올랐다.
총 6명을 태운 곤돌라가 상승을 시작했다.
…거리가 얼마나 돼요?
…선로 길이가 2,753미터에요.
…속도는 계속 이 속도에요?
…네.
…그럼 10분쯤 걸려요?
…네. 계산이 빠르시네요.
“계산이 일이니까.”
“예?”
온정이 소스라치게 놀라선 윤 점장을 쳐다보았다.
“네?”
“지금 계, 뭐라고 하셨거든요. 저한테 뭐 물어보셨습니까?”
온정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니에요. 속말이 튀어나왔나 봐요.”
윤 점장이 온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따로 말을 걸지는 않았다. 곤돌라에 내려서도, 커피를 만들어 내밀면서도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하지만 온정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기계적으로, 몸에 배인 대로 이리 갔다가 저리 갔다가 할 따름이었다. 그러다 윤 점장에게서 커피를 받아들고서야 입술을 뗐다.
“잘 마실게요.”
“예.”
윤 점장에게 부드럽게 웃어주고는 카페를 나와 별채로 향했다.
‘나흘 만이라고?’
넉 달 전 같기만 한 나흘 전이 언제인지 되짚어보려다 그만두고는 가방에서 키홀더를 꺼냈다. 자동차 키와 별채 키가 매달려 있었다. 차키를 보니 기억이 전날로 날아갔다.
“다시는 뵐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순간 몸이 휘청했지만 온정은 바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곤 걷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무작정 그냥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우뚝 섰다.
…그러니까 누나 넌, 내가 아무 여자 몸이나 벌리고 들어가는 그런 자식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왜 그런 식으로 받아요? 그런 뜻이 아니…….
…그러는 넌! 그러는 누나 넌 내가 네 인생에 유일한 남자야? 잠자리 기술이 그렇게나 능숙하면서 그동안 받아준 남자가 몇 명인지 내가 알 게…….
생각의 끝에서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얼얼했다. 통증이 다른 통증을 깨웠다. 발바닥이 아파오기 시작한 것이다. 온정이 허리를 숙여 발을 쳐다보았다. 왼쪽 발가락 쪽 스타킹의 올이 완전히 뜯겨나가 있었다.
“하아!”
온정이 고개를 돌려 <오디세이 아트홀> 쪽을 바라보았다. 나왕산의 유려한 선을 닮은 지붕만 보일 뿐이었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갈 데가 없네.’
그랬다. 집에 가는 게 최선이지만 클러치 백을 두고 왔으니 차를 운전할 수가 없었다. 물론 수배하려고만 하면 타고 움직일 차 정도는 구할 수 있었다. 나름 본부장에, 오너의 딸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싫었다. 뭔가 문제가 생긴 듯한 모습을 다른 누군가에게 보여주기가 끔찍하게 싫었다.
‘일단 사무실에 가자.’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으로 길을 틀었다. 그리고 거의 다다를 즈음 들고 있던 하이힐을 내리고 발을 집어넣었다.
‘아파.’
도로 벗고 싶었지만 온정은 더 꼿꼿하게 섰다.
심호흡을 하고 정문으로 다가가자 컨시어지가 나타났다.
“본부장님 오십니까?”
“네. 고생이 많으세요.”
컨시어지가 환하게 웃으며 문을 열어주었다. 온정은 아무렇지 않게 통과해 프런트로 직진했다.
“3층 키가 없어요.”
“네, 본부장님.”
프런트 직원이 바로 수화기를 들고 어딘가와 통화하더니 온정에게 상냥하게 대꾸했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본부장님.”
“고마워요.”
직원이 따라와 엘리베이터에 키를 대주었다. 3층은 직원 전용 카드가 있어야만 버튼이 눌러져서 어쩔 수 없었다.
버튼까지 눌러준 직원은 문이 닫힐 때까지 앞에 서 있었다. 온정은 환한 미소를 유지했고 문이 닫히고서도 반듯한 자세를 유지했다. 감시카메라가 자신을 비추고 있다는 걸 알아서였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바로 앞에 또 다른 직원이 서 있었다.
“오셨습니까, 본부장님.”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해요.”
“아닙니다.”
“재발급은 안 하셔도 돼요. 두고 왔을 뿐이에요.”
“예. 알겠습니다.”
직원이 ‘곤돌라 사업본부’라고 쓰인 문을 열어주고 멀어졌다.
‘드디어.’
그랬다. ‘드디어’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드디어’ 몸에서 힘을 빼고 주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어둠이 이성을 헤집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호흡이 가빠졌다.
“흑!”
참고 참아왔던 눈물이 터지려는 순간이었다. 본부장실 내선 전화기가 울기 시작했다. 벌떡 일어나 본부장실로 뛰어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수화기를 들었다.
“네. 예온정입니다.”
-본부장님.
강 실장이었다.
“네.”
-제가 지금 본부장님 백을 가지고 있습니다.
‘댄.’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프런트에 두세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내일부터 정상 출근해요.”
-예.
“그럼 들어가세요, 강 실장님.”
-예.
수화기를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어쩐 일이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터지려던 눈물이 그새 말라버린 모양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눈을 비비고 별채 안으로 들어섰다. 바로 의자에 앉아 양말을 벗고 발바닥부터 살폈다.
‘괜찮네. 하긴 오프로드를 수 시간 걸은 것도 아닌데 탈 날 건 없지.’
양말을 다시 신고 커피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아버지가 조용하시네.’
중간에 말도 없이 사라졌다고 야단이 날 줄 알았는데, 지금까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는 점이 외려 불안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겠지.’
심호흡을 하고 아버지 지용의 번호를 눌렀다.
-뭐냐.
“저 별채에요.”
-한데?
“몇 시간 연락 안 될 수도 있어요.”
-또 산 타려고?
“네.”
-알았다. 그리고 애썼다.
머릿속에 물음표가 떴다.
-제이슨 그 친구가 아주 후하게 인사했다.
후한 인사라는 게 뭔가 싶었지만, 아무튼 자신 때문에 사달이 벌어진 건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어젯밤에 산 정상 쪽에만 비가 조금 왔다고 했으니까 안 미끄러지게 조심하고.
“네.”
뚝.
‘비?’
그러고 보니 그런 것도 같았다. 다른 때 같으면 금방 알아봤을 텐데, 정신이 어지간히도 없나 보다 싶어 의기소침해졌다.
“후우!”
커피를 마저 마시고 트래킹화로 갈아 신었다. 그러곤 작은 가방을 등에 둘러메고 별채를 나섰다. 가만히 있다가는 숨이 막히든지 속이 터지든지 해서 죽을 것 같은 게, 땀을 빼야 했다.
***
눈을 뜨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언제 잠들었지?’
그러다 시선이 온정의 옷에 닿았다. 온정이 잘 때 입었던 옷인데, 밤새 끌어안고 뭉갠 탓에 꾸깃꾸깃했다.
시계를 확인하니 흔히들 말하는 해가 중천인 시간이었다. 날 밝을 즈음 잠깐 눕는다는 것이 몇 시간을 그대로 자버린 모양이었다.
“하아!”
머리맡의 휴대폰을 들고 강 실장의 번호를 눌렀다.
-예. 미스터 대니…….
“누나 지금 어디 있어요?”
-출근하셨습니다.
“산에요?”
-예.
“알았어요.”
-그리고 제이슨 씨 일행은 방금 전에 출발하셨습니다.
“나하고는 상관없는 사람들이에요.”
-아! 예. 알겠…….
“강 실장님. 저 곤돌라 정거장까지 데려다주세요.”
-아아! 예.
“10분? 그 정도면 돼요.”
-예. 로비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휴대폰을 내리고 욕실로 튀어가 빠른 속도로 세수를 했다. 그러곤 청바지에 혹시 몰라 챙겨 다니긴 했으나 한 번도 입어본 적은 없는 후드 티를 꺼내 입고 후드를 둘러썼다. 비어져 나오는 머리카락을 쑤셔 넣는데 짜증이 치밀었다.
‘잘라버릴까.’
운동화를 찾아 신었다.
‘나도 무릎 꿇는 거야. 때리면 맞고.’
그러다 전날 밤 뺨이 떨어져나갈 뻔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맞아도 싸지. 젠장.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엘리베이터에서 튀어 나가니 강 실장이 로비 한가운데 서 있다가 대니얼을 발견하고는 움찔했다.
“아니신 줄 알았습니다.”
귀에 안 들렸다. 대니얼이 강 실장의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요.”
강 실장이 또 움찔하더니 발짝을 뗐다. 하지만 더는 이렇다 저렇다 말하지 않고 정거장까지 태워다주고는 함께 곤돌라에 올랐다.
“같이 가세요?”
“모셔다만 드립니다.”
그 말에 대니얼이 강 실장을 향해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었고, 강 실장은 당황한 얼굴로 곤돌라 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대니얼은 점점 가까워지는 산 정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때 바람이 지나가면서 곤돌라가 덜컥거렸다.
…나도 탈 수 있어요?
…그럼요. 원하시면 제가 모실게요.
…아무 때나?
…오늘은 안 돼요. 바람이 너무 불어서 운행도 못 하지만, 운행한대도 몇 분 안에 토할 거예요.
…덜컥덜컥.
…네. 곤돌라 안에서 바람을 맞으면 심장이 덜컥덜컥, 그렇더라고요.
‘누나.’
그때 뒤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색깔만 다른 똑같은 셔츠를 맞춰 입은 커플이 곤돌라에 함께 올랐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대니얼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향했다. 옆에서 비명을 질러도 눈동자 한 번 움직이지 않는 사람이 자신인데, 지금은 관심이 쏠렸다. 다른 커플들은 어떻게 지내나,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자마자 대니얼은 진심으로 놀라고야 말았다. 남자가 여자에게 키스를 퍼붓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가 한국 맞나 싶을 정도로 농밀한 키스였다.
순간 벌게진 얼굴의 강 실장과 눈이 마주쳤다. 강 실장이 외면함과 동시에 커플이 입술을 뗐다.
“선배!”
“어때?”
“하아!”
“한 번 더 하자.”
이어지는 또 한 번의 작은 웃음.
부러웠다. 어제 그 일만 일어나지 않았다면 자신도 지금 온정과 다정하게 있을 텐데 말이다.
대니얼이 곤돌라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왕산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락에서 보던 그 세상보다 훨씬 높고 훨씬 큰데 지난번엔 왜 겹쳐봤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간에 주름까지 잡고 자세히 살피자니 곤돌라가 정거장에 도착했다. 대니얼이 강 실장을 돌아보았다.
“바로 내려가시죠?”
“예.”
“그럼 가세요.”
“예.”
막 뛰려고 자세를 잡는데 절대 뛰지 말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하아!”
무시하려다가 온정에게 민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뛰는 대신 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별채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뭐부터 해야 하지?’
걱정이 됐다.
‘걱정하면 뭐 해. 안 만날 것도 아닌데.’
가슴을 펴고 별채의 문을 두드렸다. 아무런 기척이 없었다.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두드렸다. 역시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손잡이를 돌렸다.
턱.
돌아가지 않았다.
‘출근했다며!’
대니얼이 별채를 빙 돌아 창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려 했지만 커튼이 내려 있었다.
“젠장!”
이번엔 주저 없이 조금 떨어진 본채로 향했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자 세 남자의 시선이 대니얼에게로 몰려왔다. 그중 한 사람이 일어나 다가왔다.
“아! 그 바이올린…….”
“맞아요. 누, 아니 본부장님 없어요?”
“본부장님이요? 우리 예온정 본부장님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여기 안 계시는데…… 늘 별채에…….”
“거기 잠겼어요.”
“잠겨요? 아! 그럼 카페에 가보시겠습니까? 오랜만에 출근하셨기 때문에 점검 가셨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였다. 안에서 다른 목소리가 비어져 나왔다.
“본부장님 트래킹 가셨어.”
앞의 남자가 안쪽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무슨 소리야?”
“한 바퀴 돌고 오신다고 가셨어.”
“언제?”
“한 30분 됐나?”
“몇 코스?”
“A.”
앞의 남자가 대니얼을 보고 웃었다.
“기다리셔야겠습니다. 짧아도 3시간이거든요.”
낙심이 됐다. 지금도 미칠 지경인데 짧아도 3시간이라니.
“이렇게 혼자 다니시면 안 되는 분으로 알고 있는데 카페로 모셔다드릴까요? 아니면 내려가시겠습니까?”
“전화, 그럼 통화할게요.”
“아, 그게 트래킹 중에는 전화 안 받으십니다. 사실 말이 트래킹이지 코스 점검도 병행하시는 거거든요. 담당자가 있기는 하지만 따로 살피시는 부분이 있어서 집중력 떨어진다고 전화 안 받으십니다.”
‘아!’
남자가 밖으로 나왔다.
“우선 카페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대니얼은 순순히 남자의 뒤를 따랐다.
남자가 말을 이었다.
“잠깐 한숨 돌리셨다가 카페 윤 점장한테 말씀하시면 시간 맞춰서 안내해드릴 겁니다.”
대니얼은 군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남자의 말대로 한숨 돌려야지 싶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뭐 놓친 건 없는지에 대해 생각이란 걸 좀 다시 해봐야 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5 e minor Posato
마단조 조용하게
야외 테라스 맨 끄트머리 의자에서 대니얼이 무릎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윤 점장의 안내로 2층 테라스로 올라와 자리를 잡은 이후로 내내 이 자세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몸이 단 한 군데도 저리지 않은 걸 보면 30분도 흐르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미칠 거 같아.’
게다가 후드 속 머리카락이 목덜미를 간질이며 신경을 긁어댔다.
‘이 와중에 짜증 나게.’
긴 흑발은 대니얼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시작은 아버지 준수의 조언을 빙자한 명령에서 시작했으나 지금은 대니얼 자신도 흑발이 자신을 가장 잘 드러낸다고 여기는 터였다. 성경 속 삼손이 머리카락을 잘리고 나서 힘을 잃었듯이 자신도 머리카락이 없으면 영감이고 기교고 다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터무니없는 염려도 한몫을 했고 말이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 죽을 거 같아.’
…그러는 넌! 그러는 누나 넌 내가 네 인생에 유일한 남자야? 잠자리 기술이 그렇게나 능숙하면서 그동안 받아준 남자가 몇 명인지 내가 알 게…….
다리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죽어. 그냥 죽어. 죽을 거 같다고 징징거리지만 말고 지금 당장 죽으라고.’
그러다 몸짓을 멈췄다. 죽을 때 죽더라도 용서는 빌어야 했다. 진심은 그게 아니라고, 질투에 눈이 멀어 헛소리했다고 해명은 해야 했다.
대니얼이 몸을 일으켰다. 물이라도 마셔야 숨을 쉴 것 같아 실내로 들어서는데 매거진래크에 꽂힌 브로슈어가 눈에 들어왔다.
‘나왕산 트래킹?’
바로 뽑아 들고 내용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개요를 읽고 한 장을 넘기니 ‘A’ 자가 나타났다.
…본부장님 트래킹 가셨어.
…무슨 소리야?
…한 바퀴 돌고 오신다고 가셨어.
…언제?
…한 30분 됐나?
…몇 코스?
…A.
눈앞에 들고 자세히 보니 곤돌라 정거장에서 시작해 곤돌라 정거장에서 끝나는 A코스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다른 코스는 볼 것도 없이 브로슈어를 들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마중 가자.’
카페를 나서며 흘깃하니 윤 점장은 보이지 않았다.
‘됐어. 그 사람이 뭐라고 일일이 보고하고 다녀.’
카페 밖에서 위치를 확인했다. 그러곤 나무 화살표를 거슬러 거꾸로 되짚어가기 시작했다.
‘이거 신경줄이 완전 No.15네.’
그랬다. 대니얼에게 ‘No.12 A-flat major Allegro’가 ‘곱게 미친 자의 장章’이라면 ‘No.15 e minor Posato’는 ‘제 발 저린 자의 장章’이었다. 연주하다 보면 그렇게 느껴졌다.
제 발 저린 자. 잘못한 건 참 잘도 아는 자. 다른 사람에게 걸려 뒈지게 혼나기 전에 제풀에 먼저 죽을 자.
물론 대니얼은 혼난 터였다. 그 매서운 따귀라니. 하지만 부족했다. 더 혼나야 했고 더 굴러야 했다.
‘아, 누나. 혼날게.’
초조하고 불안해 안절부절못하는 심정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아, 더워.’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 후드를 벗었다. 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날리는데 다시 짜증이 치밀었다.
‘정말로 잘라야겠어.’
누가 알랴. 머리카락을 짧게 함으로써 다른 사람으로 거듭날지. 제발이지 그랬으면 좋겠다.
대니얼의 연주는 늘 ‘약 빤 연주’ 대 ‘영혼 없는 연주’로 패가 갈렸다. 그때마다 대니얼은 ‘약 빤 연주’ 쪽 사람들이 선한 거라고 여겼다. 마음이 선해서 그렇게 들어주는 거라고, 영혼이 선해서 별거 아닌 연주자의 별거 아닌 속내까지 다 받아들여 주는 거라고, 그렇게 여겼다.
그런데 이젠 정말이지 ‘약 빤 연주’가 시시때때로 가능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단 조건이 있었다. 온정이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 온정과 계속해서 몸과 마음을 나눠야 한다는 것. 온정이 떨어져 나가고 나니 알 수 있었다.
‘얼마나 왔지?’
브로슈어의 코스를 찬찬히 짚고 나무 화살표에 적힌 ‘남은 거리 **㎞’를 확인한 뒤 휴대폰으로 시간을 체크했다.
‘40분 왔는데, 여기까지 온 게 맞나?’
연주 시간은 초 단위로 계산이 되는데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일단 가.’
그러고 걸음을 떼는 순간이었다. 오른쪽 굽이길 쪽에 노란색이 나타났다.
“아!”
나무에 가려 전신을 알아볼 순 없었지만 그냥 알 수 있었다. 온정이라는 것을.
…파란색 좋아해? 여기에도 파란색 꽃이 잔뜩 있는데?
…좋아하는 색은 노랑인데, 나하고는 안 어울리더라고요. 아파 보인데요.
산에선 입는구나. 누가 뭐라고 하던 산에선 솔직해지는구나.
대니얼이 뛰기 시작했다. 노란색만 보고 탁탁탁 달렸다.
‘누나!’
커브를 돌자 온정의 모습 전체가 드러났다.
눈이 마주쳤다. 커다래지는 눈 그리고 벌어지는 입.
‘누나!’
미동 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온정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리고 부둥켜안았다.
“누나! 아, 누나!”
“댄?”
‘미스터 대니얼 도라고 안 했어. 댄이라고 했어.’
팔에 힘을 주며 몸을 밀착했다.
“아, 찾았다!”
그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니얼이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선 무릎을 꿇고 온정의 허리를 안았다.
“잘못했어. 내가 헛소리했어. 아, 누나. 아프게 해서 미안해. 맨발로 걸어가게 만들어서 정말 미안해. 울었어? 울었지. 누나. 잘못했어. 아, 누나. 내가 정말 잘못했어.”
“하아!”
무거운 한숨이 머리 위로 쿵쿵 떨어졌다.
대니얼이 온정의 배에 머리를 묻고 계속했다.
“미안해. 잘못했어. 누나. 정말 미안해. 누나. 누나.”
“사고 나면 어쩌려고 초행에 혼자서 여길 와요? 길도 젖어서 위험한데?”
“죽을 거 같아서, 가만히 앉아선 못 기다리겠어서 왔어. 어쩔 수 없었어.”
“일어나요.”
“잘못했어. 미안해, 누나.”
“일어나요.”
“나 누나가 처음인데, 누나는 내가 처음이 아니란 게 속상했었나 봐.”
평소의 크기를 찾아가던 온정의 눈이 다시 커졌다.
“그걸 옹졸하게 꽁하고 있었나 봐. 꼴에 사내새끼라고 자존심 챙긴다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는데, 그게 내심 계속 화났었나 봐. 그래서 꼬아 들은 거 같아. 아니, 같은 게 아니라 그랬어. 배배 꼬아 들었어.”
“댄.”
“누나. 잘못했어. 나 절대 그렇게 생각 안 해. 무의식도 네 생각이다, 그러면서 뭐라고 하면 할 말 없기는 한데, 그래도 아니야. 그런 생각 추호도 안 해. 누나. 상처받았지? 아, 미안해.”
“하아아!”
“누나.”
“일어나요.”
대니얼이 고개를 들고 온정을 쳐다보았다.
“일어나요. 앞으로 40분은 걸어야 해요. 무릎 아프면 집에 못 가요.”
그 말에 대니얼이 주춤주춤 일어섰다. 온정을 난감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대니얼이 바로 서자 온정이 대니얼을 지나쳐 대니얼이 지금까지 온 길로 향했다.
“누나.”
“일단 가요. 가서 얘기해요.”
앞서가던 온정이 뒤를 돌아보았다.
‘하룻밤 새 얼굴이 난리가 났네.’
그랬다. 매일 보던 대니얼의 얼굴이 아니었다.
“안 따라와요?”
“아니, 따라가.”
대니얼이 조심스럽게 온정의 손목을 잡았다. 온정은 뿌리치지 않았다.
“정말 아무 대책 없이 브로슈어 하나만 들고 온 거예요?”
“응.”
온정이 둘러메고 있던 가방에서 물병을 꺼내 내밀었다. 그때까지도 대니얼은 온정의 손목을 꽉 붙들고 있었다.
“마셔요.”
순순히 받아 목을 축이자 이번엔 온정이 초콜릿을 건넸다. 그 또한 순순히 받아선 종이 포장을 벗겨 입에 넣었다. 거기까지 확인한 온정이 대니얼의 손에서 브로슈어를 가져가 가방에 넣고는 다시 둘러멨다. 대니얼이 손을 내밀었다.
“가방 나 줘.”
“안 무거워요.”
온정이 몸을 돌려 앞서가기 시작했다. 대니얼이 부리나케 쫓아가 놓쳤던 온정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이제야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
시간에 맞춰 올라온 도시락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두 사람이 마주 앉았다. 온정은 아무 말 없이 먹기 시작했고, 그런 온정을 빤히 쳐다보던 대니얼도 젓가락을 들었다. 일어나서 먹은 거라곤 한 시간 반쯤 전에 온정이 준 초콜릿 하나뿐인데도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고, 그래서 당연히 안 먹어도 될 것 같았음에도 온정이 먹어서 그냥 먹었다. 그런데 웬걸, 먹다 보니 술술 먹혔다.
그렇게 5분? 아니 7분? 식사가 끝이 났다. 말 한마디 없이 먹으니 이건 뭐 전광석화나 다름없었다.
온정이 일어나 도시락을 챙겼다.
“재활용 정리하고 커피 가져올게요.”
대니얼이 벌떡 일어섰다.
“같이 가.”
“아니요. 여기 있어요. 오래 안 걸려요.”
대니얼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온정의 목소리가 너무 딱딱했다. 안 그래도 얼굴을 봐주지 않아서 미칠 지경인데, 목소리에서 누그러질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 누나.’
그러는 동안 온정이 도시락 빈 통과 자질구레한 쓰레기가 든 봉투를 들고 별채를 나섰다. 카페로 향하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혼자서 그러고 나타날 줄이야.’
그랬다. 대니얼을 생각하고 있어서 대니얼이 보인 줄 알았다. ‘아, 찾았다!’ 시점까지만 해도 무슨 헛것이 이렇게나 구체적인가 했었다. 그러다 대니얼이 무릎을 꿇고 ‘잘못했어. 내가 헛소리했어.’를 하고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완전한 제정신 말이다.
‘보내자. 고이 보내는 거야.’
카페로 들어서자 윤 점장이 바로 다가왔다.
“그 사람 괜찮습니까?”
“네.”
“아까는 그 사람이 옆에 있어서 말씀 못 드렸는데, 사실 저는 그때까지도 그 사람 2층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누가 말 건다고 대꾸할 상태가 아닌 거로 보여서 일부러 내버려 둔 건데, 갑자기 본부장님하고 문 열고 들어와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그랬어요?”
“시간이 그렇게나 흐른 줄도 몰랐습니다. 제대로 못 챙겨서 죄송합니다.”
“아니요. 신경 쓰게 만들어서 내가 더 미안해요.”
온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커피 부탁해요. 그냥 아메리카노 진하게.”
“두 잔이시죠?”
“네.”
윤 점장이 바로 머신을 작동했다. 온정이 윤 점장에게 등을 돌리고 서서 밖을 쳐다보았다.
‘보내긴 보내는데, 어떻게 보내지?’
진심으로 뜻밖이었다. 그렇게 끝인 줄 알았다. 대니얼이 진심으로 반성할 거라고도, 자신을 그런 식으로 찾아올 거라고도 생각 안 했을뿐더러, 더는 마주칠 일도 없을 거라 믿었다.
“하아!”
“본부장님.”
고개를 돌리자 윤 점장이 커피를 내밀었다.
“고마워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돌아오셔서 좋습니다.”
커피를 받아들며 온정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절반만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네?”
“주제넘었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4, 5초 정도 그대로 서 있던 온정이 되물었다.
“내가 절반만 돌아온 것 같아요?”
윤 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온정이 활짝 웃었다.
“알려줘서 고마워요.”
몸을 돌렸다. 별채로 향하는데 마음이 아렸다. 윤 점장의 말뜻이 무엇인지 다 알아들어서 가슴이 쓰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신의 태반이 아직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남아있으니까 말이다.
별채로 가까이 가자 대니얼이 문을 열고는 커피를 받아들었다. 발자국 소리를 귀담아듣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쏟아지려는 한숨을 꿀꺽 삼키고 문을 닫은 다음 대니얼이 자리에 앉는 것을 보고 창 옆에 기대섰다.
“댄.”
“응.”
“마시고 내려가요.”
“같이?”
“아니요. 강 실장님더러 아래서 기다리시라고 할게요. 만나서 호텔로 돌아가요.”
대니얼이 들고 있던 커피를 테이블에 올리고 손을 맞잡았다.
“용서가 안 돼?”
“네.”
손바닥에 얼굴을 파묻는 대니얼을 무덤덤하게 바라보며 온정이 말을 이었다.
“댄하고 키스하고 섹스하면서 나는 내가 좋았어요. 나도 이렇게 집중할 수 있구나.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세상이 정해둔 규칙, 세상이 원하는 방식, 그런 거 개의치 않고 오로지 나, 그리고 상대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도 있구나.”
대니얼은 알아듣고도 남았다. 파가니니가 바이올린과 악보를 대하는 방식이 그랬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만 단위로 그의 곡을 연주하면서도 단 한 번도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은 이유였다.
“그런데 댄의 그 말이 나를 세상으로 끌어내렸어요.”
대니얼이 고개를 들어 온정을 쳐다보았다.
“세상이 만들어놓은 틀, 세상이 정해둔 규칙, 세상이 원하는 방식, 그걸 다시 고민하게 만들었어요. 그러니까 현실을 먼저 보게 만들었다는 뜻이에요.”
심장이 내려앉았다.
“1년 2개월 전에 끝난 내 지난 연애. 아, 완전히 끝난 건 1년 2개월 전이지만, 문제가 된 시기는 그보다 반년 더 전이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연애가 끝난 건 1년 8개월 전이라는 게 맞겠네요.”
끝나기까지 반년이나 걸렸다는 뜻이었다. 왜?
“꽤 시끄러웠어요. 사실혼 관계에 있는 엄연한 부부 사이에 내가 끼어든 꼴이었거든요.”
대니얼의 눈이 커다래졌다.
“내가 그 여자와 아이의 존재를 알았고 몰랐고, 그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 여자는 결론만 얘기했으니까.”
아이라는 말에 메시지 내용이 떠올랐다.
…아이가 무슨 죄인가 싶어서 아빠로만 살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아이가 제 엄마랑 똑같아져. 눈이 안 가. 손도 안 가. 마음은 더 안 가. 괴로워서 죽을 거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어. 밥도 먹히지 않아.
“우리 아버지요. 처음엔 그 여자 달래기만 했어요. 아버지 성격이 괴팍하게 변하시긴 했어도 공감 능력이 좋은 편이거든요. 그러니까 당신 마음 이해한다, 이렇게 된 상황도 다 이해한다. 계속 그랬죠. 하지만 그 여자는 아니었어요. 더 크게 보상해라. 아니면 세상에 대고 불륜녀, 상간녀라고 소문내서 오디세이 이미지 박살 내겠다.”
대니얼은 경악했다.
“참다못한 아버지가 그 두 사람을 사기로 엮었어요. 너희 둘이 짜고 내 딸한테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 다 안다, 아니면 이런 식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그렇게요. 당연히 보상계획도 철회했죠. 그랬더니 그 여자, 그제야 조용해지더라고요.”
‘누나.’
“나 만나는 동안 그 사람 정말 헌신적이었어요.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욕만 하셨지만, 그건 내가 알아요. 미안해서였겠죠. 내가 그 여자한테 괴롭힘당하는 거 보면서는 정말 고통스러워했어요. 되는 거 하나 없는 자신의 거지 같은 인생이 나까지 감염시켰다고.”
‘그럼 유일하게 사랑했다는 그 말, 진심이었어? 어떻게 좀 해보려고 갖다 붙인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어?’
“문제는 내가 그 정도의 감정이 아니었다는 거였어요.”
대니얼은 순간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이 와중에도 그게 기쁘게 들렸다.
“그 남자의 사랑을 열심히 따라가는 중이었지, 아직 그 수준까지는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그 여자가 더 끔찍하게 싫었어요. 데려가. 난 이 남자 없어도 되니까 데려가고 빨리 입 닫아. 시끄러워서 귀 터질 것 같으니까 둘 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
온정이 커피를 한꺼번에 들이켰다. 미지근한 물이라도 마시듯이.
“결국 조용해졌죠. 그런데 후폭풍이 찾아오더군요. 바로 죄책감이었어요. 그 남자에 대한 죄책감. 솔직히 나는 잘못한 거 없었어요. 먼저 좋아해 준 것도 그 남자였고, 나 만나기 전부터 이미 사실혼 관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던 상황이었고, 그래서 나한테 전부를 숨길 수밖에 없는 상태였고, 내 잘못은 하나도 없었어요. 그럼에도 그 모든 일이 나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면서 죽을 것처럼 힘들더라고요.”
대니얼의 가슴에 지진이 일어났다. 그냥 만났다가 헤어진 그런 관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아버지하고 약속했어요. 연애든 결혼이든, 아버지가 정해주는 사람과 하겠다고.”
‘아니야. 그래도 그건 아니야.’
“그래놓고 그 약속을 내 손으로 깼어요. 아주 당당하게. 아무렇지 않았어요. 댄에 대한 내 마음이 그렇게 움직였으니까. 움직이는 마음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으니까.”
‘누나.’
“그래서 불안했어요. 댄에게 굳이 내가 아니어도 된다면 더 가면 안 돼. 그런데 댄이…….”
대니얼이 우당탕쿵탕 요란하게 일어섰다.
“누나. 아니야. 그거 내 진심 아니었어.”
“상관없어요. 나도 결론만 보기로 했으니까.”
대니얼이 온정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온정은 자리를 옮겨 거리를 유지했다.
“그 여자가 나를 불륜녀, 상간녀라고 부를 때 특유의 표정이 있었어요. 경멸과 멸시, 너 따위가 뭔데, 너는 몸 대준 창녀밖에는 안 돼, 하는 얼굴.”
“누나.”
“그 얼굴을 댄에게서 봤어요.”
대니얼이 주르르 내려앉았다.
“댄. 사과는 고마워요. 받을게요.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요.”
온정이 발을 옮겼다.
“정거장에 있을게요. 그리로 와요. 참, 룸에 있는 내 물건은 그대로 두면 돼요. 나중에 챙겨갈게요.”
온정이 밖으로 나갔다.
대니얼이 바닥에 고개를 박았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6 g minor Presto
사단조 매우 빠르게
잉베이 맘스틴의 일렉트릭 기타 연주곡을 찾아 스피커의 볼륨을 높였다. 그러곤 바닥에 ‘큰 대大’ 자로 벌러덩 누웠다.
…천재, 천재 하니까 지구인이 다 네 발아래 있는 것 같니? 네가 아무리 천재에 만재라 해도 나한테는 투 지미 밑이야. 잉베이 맘스틴을 기준으로 치면, 밑도 그냥 밑이 아니라 해저 3만리.
‘해저 3만리 맞지. 인성이 아주 저질 쓰레기잖아.’
…그 여자가 나를 불륜녀, 상간녀라고 부를 때 특유의 표정이 있었어요. 경멸과 멸시, 너 따위가 뭔데, 너는 몸 대준 창녀밖에는 안 돼, 하는 얼굴. 그 얼굴을 댄에게서 봤어요.
자신의 얼굴이 그랬다니. 그런 충격이 없었다.
리모컨을 들고 볼륨을 더 높였다. 일렉트릭 기타 소리에 고막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더불어 심장도 찢기는 기분이었다.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서 할퀴고 긁힌다는 느낌은 있었어도 찢긴다는 기분까진 안 들었는데, 이건 뭐 시작부터 바로 북북 찢어버리네.’
이렇게나 극렬한 소리를 온정이 왜 선호하는지는 모르지만 어쩐지 이해가 갔다. 관심을 가지고 들으니 중독될 만한 소리였다.
“하아!”
대니얼을 곤돌라에 태운 온정은 곤돌라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정거장에 서 있었다. 냉정하게 돌아가라고 해놓고, 그렇게 대니얼을 배웅했다.
대니얼이 몸을 돌려 웅크렸다.
‘미치겠다.’
그때 머리카락이 스르르 내려와 시야를 가렸다.
대니얼이 튕겨나듯 몸을 일으켰다.
‘더는 못 참아.’
성큼성큼 걸어가 객실 전화기를 들고 버튼을 눌렀다.
-네, 미스터 대니…….
더 들을 이유가 없었다.
“가위가 필요해요.”
-저, 미스터 대니얼. 죄송하지만 잘 안 들립니다.
대니얼이 스피커를 흘깃했다. 아닌 게 아니라 소리가 대단히 컸다. 하지만 줄일 마음이 없어 목청을 키웠다.
“가위. 가위 달라고 했어요.”
-아, 가위 말씀이…….
대니얼은 이번에도 말을 끊고 목청을 높였다.
“아주 잘 드는 거. 갖다 대기만 해도 잘리는 거.”
대답이 없었다.
“들고 올라오지 말고 엘리베이터에 둬요.”
약 3초 정도의 침묵 후에 대답이 들려왔다.
-알겠습니다.
전화기를 내려놓고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 그리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귓속에서는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지글지글 끓고 가슴속에서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분노가 지글지글 끓었다.
‘끝내버릴 거야.’
순간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와. 빨리 오라고.’
문이 열리고 검은색의 서빙 카트가 나타났다. 가위는 그 위 나무 바구니 안에 들어있었다.
가위를 들고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를 내려보낸 후 돌아섰다. 그러곤 커다란 책상으로 가 그 위에 놓인 메모지를 들어 가위에 댔다.
사각.
종이가 곱게 잘려나가는 소리가 경쾌했다.
‘마음에 드네.’
가위를 들고 욕실로 향했다. 세면대 위에 가위를 놓고 옷을 벗었다.
‘아, 두근거려.’
왼손으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움켜잡고 가위를 들었다. 그러곤 가차 없이 손을 움직였다.
사각.
“와우!”
감탄사가 절로 비어져 나왔다. 조금의 걸리적거림도 없이 깔끔하게 잘려나간 머리카락 다발이 놀라울 정도였다.
‘5성 호텔답게 가위도 5성이네.’
다른 부분을 움켜쥐고 다시 가위질을 했다. 사각사각 소리와 함께 싹둑싹둑 잘려나가는 머리카락을 보고 있자니 흥분이 됐다.
‘끝내주네.’
오른쪽 머리카락을 잡기 위해 팔을 가로지르며 가위를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앗!”
오른쪽 귓불에 통증이 쏟아졌다. 예리하게 베어져 나간 자리에서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피도 보고. 정말 끝내준다니까.’
대니얼은 상처를 무시했다. 귀가 잘린 것도 아닌데 호들갑 떨 것 없다는 판단이었다. 무엇보다 머리카락을 자르는 게 급했다.
잡고 잘라내고, 잡고 잘라내고, 몇 번을 거듭하다 보니 귀 아래가 텅 비었다.
웃음이 터졌다.
‘맨해튼 거지도 이러고는 안 다니겠다.’
그도 그럴 것이 머리가 난리였다. 쥐가 파먹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맨해튼 거지보다 못한 자식이니까 이게 어울리지.’
머리카락을 모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고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물을 틀었다. 물이 들어가면서 귀가 따끔했지만 개의치 않고 그냥 있었다.
‘그럼 나 이제 다른 사람 된 건가?’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질문했다. 하지만 대답이 불가능했다.
물을 잠그고 물을 뚝뚝 흘리며 스파 풀로 향했다. 안으로 들어가 수온을 36.5도에 설정하고 물을 틀었다. 기분 나쁜 온도 36.5도, 불쾌한 온도 36.5도.
일렉트릭 기타 소리가 여전히 지글거리는 가운데 대니얼이 풀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
‘No.16 g minor Presto’가 시작됐다. Presto. 매우 빠르게. 알레그로Allegro와 비바체Vivace도 ‘빠르게’지만 그보다 빠른 속도가 Presto였다. 메트로놈으로 따지면 알레그로는 132박 눈금에, 비바체는 180박 눈금에, 프레스토는 184박 눈금에 표시되어 있다던가. 1분에 184번이면 와우!
그럼 파가니니도 메트로놈을 썼을까? 1827년에 죽은 베토벤이 메트로놈을 극찬했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1840년에 죽은 파가니니도 메트로놈의 존재만큼은 알았을 게 분명했다. 그가 썼는지 안 썼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잠시 박자를 따라가던 온정이 몸을 바로 하고 컴퓨터에 집중했다. 자리를 비운 동안 곤돌라와 카페가 제대로 운영이 됐는지 확인해야 했다.
‘하긴 제대로 운영이 안 될 게 뭐 있다고.’
그래도 그런 거 하라고 앉혀둔 자리 아닌가.
‘지금이라도 다른 일 할까. 오디세이하고 관련이 없는 그런 일.’
어려서부터 오디세이에서 일하는 것으로 알고 살아왔다. 당연히 대학 졸업 후의 첫 직장도 오디세이였다. 그런데 이제 와 새삼 방향을 틀 수 있을지 심란했다.
“후우!”
그때였다. 휴대폰이 울렸다.
리모컨으로 볼륨을 줄인 후 휴대폰을 들었다.
“네, 강 실장님.”
-별채에 계십니까?
“네.”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인데요?”
-잠시 내려와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왜요?”
-미스터 대니얼 도께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온정이 벌떡 일어났다.
“무슨 문제요?”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너무 불안해서…….
“뭔데요?”
-그게 가위를 찾으셨습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가위요?”
-예. 그냥 가위 말고 갖다 대기만 해도 잘리는 그런 가위를 찾으셔서…….
온정이 오디오를 껐다. 그러곤 휴대폰을 스피커 모드로 설정해 책상에 내려놓고 컴퓨터에 뜬 문서들을 하나씩 내리기 시작했다.
-사람 오는 거 싫다고 하셔서 서빙 카트에 담아서 엘리베이터로 올려보냈는데, 전화 받은 담당 직원이 분위기가 이상했다면서 발을 동동 구릅니다.
“콜 해 보셨어요?”
-그게 실은 저희가 먼저 연락 못 하게 돼 있습니다.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입니다.
“저번엔 하셨잖아요.”
-그땐 본부장님이 룸에 계셨기 때문에 예외였습니다. 원래는 그것도 연락 안 드리는 건데, 본부장님 계시니까 혹시나 달라진 게 있나 해서 확인 차 전화 드린 거였습니다.
컴퓨터의 전원을 내리고 별채의 조명을 모두 껐다. 가방을 들고 별채를 나서며 온정이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지금 아무것도 못 하고 계신 거예요?”
-예. 별일이 없는 경우, 저희의 대응이 오히려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제가 가볼게요.”
-지금 내려오십니까?
“네. 정거장으로 가고 있어요. 운행시간표 상으로는 방금 전에 한 대 내려갔거든요. 비상으로 이동할게요. 그래도 5분은 소요되니까 15분 뒤에 봬요.”
-예.
휴대폰을 내리고 정거장으로 달렸다.
‘댄. 별일 없죠?’
너무 냉정하게 굴었나, 어차피 며칠 후면 떠날 사람인데 그냥 봐줄 걸 그랬나, 후회가 밀려왔다.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데, 퀭한 눈으로 무릎 꿇고 비는데, 질투 때문에 자신도 모르게 어깃장을 놓은 거라는데, 그냥 받아주지 뭘 그렇게 밀어 냈나 싶은 것이 미칠 것 같았다.
‘아, 댄. 이상한 짓 하는 거 아니죠?’
직원을 호출해 비상용 곤돌라를 대기시킨 후 대니얼의 번호를 눌렀다. 받지 않았다.
‘그냥 쉬는 거예요. 그렇죠? 그럴 가치 없는 일인 거 알잖아요.’
하지만 온정도 알고 있었다. 대니얼의 예민함을, 대니얼의 아슬아슬함을, 대니얼의 위태로움을.
‘아, 댄.’
곤돌라가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는 10분 동안 몸에서 수분이 날아갔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것이 손가락만 대도 피부가 벗겨질 것 같았다.
곤돌라에서 내리니 강 실장이 차에 시동을 걸고 대기하고 있었다.
“변동사항 있어요?”
“없습니다.”
강 실장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어젯밤에도 굉장히 안 좋으셨습니다. 저한테 본부장님 백 주실 때 얼굴이 거의 밀랍이셨습니다.”
‘하아!’
“그리고 제이슨 씨와도 다투시는 것 같았습니다.”
“네?”
“소리가 워낙 작아서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가 대단히 살벌했습니다.”
온정이 심호흡을 했고, 그러는 동안 차가 호텔 앞에 도착했다.
아직 반납하지 않은 블랙카드를 꺼내 쥐고 미친 듯이 달려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런데 조금 올라가자마자 소리가 들렸다.
‘잉베이 맘스틴.’
가슴이 쿵쾅거렸다. 일렉트릭 기타 소리를 듣고 대니얼이 얼마나 기겁했는데, 그 소리가 들려온단 말인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폭발음이나 다를 바 없는 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가방을 떨어뜨리고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댄!”
그때였다. 스파 풀에 늘어져 있는 대니얼이 보였다. 심장이 떨어지려고 했지만 온정은 가까스로 버티며 달려갔다. 그리고 대니얼의 얼굴을 확인했다.
“헉!”
엉망진창이 된 머리로 눈을 감고, 파랗게 변한 입술을 꾹 다물고, 풀에 기대있는 대니얼은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댄.”
절망적으로 불렀는데 대니얼이 천천히 눈을 떴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대니얼의 볼을 감쌌다. 얼음장이었다.
“누나?”
“아아!”
대니얼을 물에서 끄집어내기 위해 힘을 주자니 대니얼이 온정을 물 안으로 끌어당겼다.
풍덩.
온정은 그 와중에도 일단 온수부터 틀고 대니얼을 온몸으로 껴안았다.
‘아! 아아!’
“누나.”
입이 안 떨어졌다. 얼마나 놀랐는지, 오장육부가 다 굳어버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왔어?”
온정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내쉬었다.
“일단 나가요.”
“왜?”
“몸이 너무 차요.”
“따뜻해지고 있어. 안 나가도 돼.”
아닌 게 아니라 수온이 빠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온정이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가위 찾은 이유가 이거였어요?”
“가위? 아, 가위. 누나 그래서 왔구나. 사람들이 누나한테 연락했구나. 그래서 왔구나.”
온정이 대니얼을 뚫어져라 쳐다보자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맞아.”
“왜요?”
“다른 사람인 척하려고.”
‘그게 무슨!’
온정이 손을 뻗어 대니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시선이 귓불에 닿으면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다쳤어요?”
대니얼이 온정을 다시 잡아당겨선 품에 꽉 안았다.
“괜찮아. 살짝 스쳤을 뿐이야.”
“가위로 그랬다는 거잖아요.”
“응.”
“안 돼요. 소독해야 해요.”
“괜찮다니까?”
“안 돼요.”
온정이 빠져나가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대니얼은 온정을 풀어주지 않았다.
“댄!”
대니얼이 온정의 입술로 돌진했다. 혀로 밀고 들어가 속을 휘저으며 숨을 빨아들였다.
‘다 괜찮아졌어. 누나 왔으니까 다 괜찮다고.’
온정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긴장이 풀려서인지 손끝과 발끝으로 에너지가 다 녹아나가는 기분이었다. 온정이 늘어지자 대니얼이 입술을 놓아주고는 온정의 얼굴을 입술로 휘저어갔다. 눈썹을 핥고 콧등을 빨고 턱을 갉죽이고, 그러다 목을 깨물었다. 부드럽게 그러면서 집요하게.
“댄!”
그저 불렀을 뿐인데 대니얼이 온정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야상을 벗기고 니트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러곤 브래지어 위에 얼굴을 파묻고 숨을 몰아쉬었다.
“누나. 내가 그렇게 걱정됐어?”
그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별채에서부터 여기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에 이르기까지 긴박했던 순간이 그대로 떠올랐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느꼈던 감정이 고스란히 되살아난 까닭이었다.
그때였다. 엘리베이터 앞에 떨어뜨린 가방에서 휴대폰 진동음이 들렸다.
“아! 맞다.”
온정이 대니얼에게 “잠깐만요.” 하고는 풀을 엉금엉금 기어나갔다. 바닥에 물이 흥건해졌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고 귀에 댔다.
“강 실장님. 괜찮아요.”
-예? 본부장님? 잘 안 들립니다.
‘아!’
온정이 대니얼을 보고 손짓했다. 음악 좀 끄라고. 그러자 대니얼이 잽싸게 옆의 리모컨을 들어 눌렀다. 삽시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강 실장님.”
-예. 이제 들립니다.
“네. 괜찮아요.”
-하아!
“죄송해요. 챙기느라고 바로 연락 못 드렸어요.”
-정말 괜찮으십니까?
“아! 문제가 하나 있어요.”
-예?
“호텔 바버 숍 대표님 섭외 가능할까요?”
-바버 숍 말씀이십니까?
“네. 계신다는 것만 알지 직접 뵌 적이 없어서요.”
-예. 당연히 가능합니다.
“여기로 오셔야 할 것 같아요.”
-혹시 그럼 아까 그 가위로 머리를…….
“네.”
-하아!
“시간은 우리가 맞출게요. 알아보시고 연락주세요. 바로 받을게요.”
-알겠습니다. 다른 건 또 없으십니까?
“소독약하고 연고도 새것으로 준비해 주세요. 여기 있는 거 알지만 의무실에서 다른 걸로 받아다 주세요.”
-가위에 다치셨습니까?
“네. 귓불을 좀. 혹시 염증 생길 수 있으니까 설명 잘해주세요.”
-하아!
온정이 피식했다. 웬만해선 다른 사람 앞에서 한숨 안 쉬는 강 실장의 연달은 한숨이 우습기도 하고, 이렇게 돼버린 상황이 어이없기도 하고, 참 복잡했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한 분이 열 분 몫 하십니다.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엔 속내까지 드러내고 있었다. 강 실장도 어지간히 조바심쳤다는 뜻이었다.
온정이 휴대폰을 내려놓고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풀에 엎드려 온정을 빤히 쳐다보는 까만 밤송이가 기가 막혔다. 그러다 자신이 물에 빠진 생쥐 꼴이라는 걸 새삼 깨닫고 그 자리에서 옷을 벗었다. 대니얼이 쳐다보거나 말거나 개의치 않고 속옷까지 다 벗은 후 미끄러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움직여 타월로 몸을 닦은 후 자신의 가방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옷을 꺼내 입고 나왔는데도 대니얼은 여전히 같은 자세였다.
“몸 불겠어요.”
그러곤 젖은 옷을 갈무리해 욕실에 던져 넣고 물이 흥건한 자리를 찾아 꼼꼼하게 닦았다.
“누나.”
“네.”
“여기 있을 거지?”
온정이 손을 멈췄다. 그리고 가만히 있었다. 침묵에 침묵이 보태지고, 정적에 정적이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온정이 몸을 일으켜 똑바로 서선 대니얼을 응시했다.
“출근은 해야 해요.”
대니얼이 활짝 웃으며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응. 해. 내가 따라가면 돼.”
온정이 가슴을 있는 대로 부풀렸다가 내렸다. 후우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