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D-day (5/13)

4. D-day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1 C major Andante-Presto

다장조 느리게-매우 빠르게

흐트러진 대니얼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한 가닥 넘겨주자 대니얼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댄, 결전의 날이 밝았어요.”

대니얼이 온정을 끌어안고는 가슴에 이마를 비빚비빚했다.

“컨디션이 정말 좋아.”

“다행이에요.”

“누나 덕.”

온정이 대니얼의 등을 토닥토닥했다.

“물 받아줄까요?”

“응.”

온정이 몸을 일으키자 대니얼이 온정을 다시 잡아당겨선 입을 맞췄다.

“같이 해.”

“그래요.”

온정이 알몸 그대로 침실을 벗어나 알몸 그대로 너른 공간을 가로질러 스파 풀로 향했다.

‘내가 아닌 기분.’

그랬다.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탈피라고 해야 하나, 변태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한 꺼풀이 벗겨나간 기분이었다.

수온을 39도로 설정하고 물을 틀었다. 그러곤 테라스 폴딩 도어 앞에 서서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아.’

문득 별채가 그리웠다. 그 안에 틀어박혀 일렉트릭 기타 소리를 적당히 울리게 해놓고 있으면 그런 만족과 행복이 없었다. 웃음이 나왔다. 그 별채 사수하겠다고 무릎을 꿇으면서 시작된 관계가 여기까지 왔다는 것이 놀라웠다.

그때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대니얼이 온정을 뒤에서 감싸 안았다.

“누나 엉덩이 예쁘다.”

“엉덩이만요?”

“일단은 엉덩이만 보면서 왔어.”

온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들어가자.”

“그래요.”

댄이 온정의 손을 잡고 스파 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다리를 죽 펴고 마주 앉았다. 보글보글 터지는 거품이 물의 표면을 반투명으로 가려주었다.

댄이 양팔을 벌려 풀에 걸쳤다.

“결국 들어왔네.”

“그러네요.”

“늦었지만 환영해.”

“고마워요.”

대니얼이 손을 내밀었다.

온정이 피식, 했다.

“몸 사려요.”

“사리는 거야. 그러니까 와.”

온정은 실랑이하는 대신 순순히 응하기로 했다. 그래서 몸을 움직여 대니얼의 다리 위에 앉아 몸을 기댔다. 그러자 대니얼이 오른손으로 온정의 왼쪽 가슴을 덮고 왼손으로는 온정의 치모를 덮었다.

“댄.”

“만지기만 할 거야. 지난밤 이 숲이 정말 끝내줬거든.”

그랬나 싶었다. 온정은 거기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삽입 이후로는 그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몸이 원하는 대로 흔들고 신경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달리기만 했지 다른 데는 관심조차 없었다는 깨달음이었다. 적어도 상대 기분 정도는 살폈어야 했는데 말이다.

‘진심으로 내가 아닌 기분.’

그때 귓가에 따뜻한 숨이 느껴졌다.

“누나.”

“네.”

“계속 요, 네 할 거야?”

“네.”

“왜?”

“그게 편해요.”

“별 이유 없이 그냥 그게 편해?”

“네.”

“그럼 내가 어, 응 하는 건? 불편해?”

“전혀요.”

온정이 대니얼에게 눈을 맞췄다.

“편한 대로 하면 되는 거예요.”

대니얼이 “응.” 하며 활짝 웃었다.

“누나.”

“네.”

“24개의 카프리스가 음반은 총 플레이 시간이 70분 정도지만 연주회는 그보다 길어.”

“그렇겠죠?”

“오늘 연주회는 인터미션 없이 1시간 40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대니얼 도 바이올린 독주회’ 테마는 24개의 카프리스이지만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도 프로그램에 들어가 있기 때문에 1시간 40분이었다.

“앙코르까지 포함하면 두 시간. 두 시간은 안 넘겨”

“네.”

“그 두 시간 동안 나만 보고 있을 수 있어?”

온정이 고개를 뒤로 돌려 대니얼을 바라보았다.

“눈은 깜빡여도 되죠?”

대니얼이 환하게 웃고는 온정에게 입을 맞췄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했어요? 혼자 일어나서 혼자 준비하고 그랬어요?’

그때였다. 객실 전화기가 울렸다.

온정이 바로 일어나 풀을 빠져나가선 전화기를 들었다.

“네.”

-강 실장입니다.

“네.”

-3시간 후에 리허설인데, 시간 변경 없이 그대로 진행하면 되겠습니까?

“잠시만 기다리세요.”

온정이 전화기를 막고 대니얼이 있는 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댄. 리허설 시간 변경 안 하죠?”

“응.”

다시 전화기를 들었다.

“그대로 진행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10분 전에 모시러 가겠습니다.

“그러실 거 없어요. 제가 길이라도 잃을까 봐서요?”

-그것도 그거지만…….

온정이 피식, 했다. 그것도 그거라니, 너무 진지해서 정말 진담 같았다.

-도 회장님께서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그분들 보시기에…….

“아! 네. 알아들었어요.”

온정이 바로 덧붙였다.

“그런데 그분들 언제 왔어요?”

-어젯밤에 오셨습니다.

“댄 만나겠다고는 안 해요?”

-전혀요. 본인들은 그냥 연주회만 체크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몇 명인데요?”

-다섯 분입니다.

“다섯이요?”

-예.

온정은 진심으로 놀랐다. 처음부터 수행원 식으로 따라온 것도 아니고, 연주회만 체크하는 데 다섯 명이나 필요할 게 무어란 말인가.

“댄하고도 말이 된 내용이래요?”

-안 그래도 물어봤더니 ‘늘 이래왔습니다.’ 딱 한 마디만 했습니다.

늘 그래왔다. 늘.

“우리한테는 사전에 고지한 내용이에요?”

-아닙니다. 아무 말 없었습니다.

“암행어사 출두에요?”

그때였다. 온정의 몸에 커다란 타월이 둘러졌다. 돌아보니 대니얼이 바로 뒤에 와있었다.

-저희들끼리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알았어요. 요란하게 준비해서 기다리세요.”

-예.

전화기를 내리자 대니얼이 온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신경 안 써도 되는 사람들이야.”

“나는 그렇지만 오디세이 입장은 다르니까요.”

대니얼이 환하게 웃었다.

“누나는 그렇다고?”

“네. 난 댄만 신경 써요. 내가 무릎 꿇은 사람은 댄이니까.”

대니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아! 무릎.”

온정을 다정하게 끌어안으며 대니얼이 속삭였다.

“미안해. 정말 꿇으라는 뜻은 아니었어.”

“괜찮아요. 별 대미지 없었어요.”

대니얼이 움찔했다.

“꿇어봤어?”

“네. 아버지 앞에서 많이 꿇어봤어요.”

대니얼이 더 강하게 온정을 끌어안았다.

“반부친연대 꼭 결성하자.”

온정이 소리 내서 웃었다.

***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양쪽으로 말끔한 정장 차림의 남녀들이 도열해 있었다. 온정은 순간적으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영화에서 보던 ‘형님, 나오셨습니까!’ 같았던 것이다.

그때 오른쪽 라인에서 금발의 한 남자가 나와 온정에게 다가왔다.

“예온정 본부장님. 저는 도준수 회장님을 돕고 있는 제이슨 라바베라Jason LaBarbera입니다.”

한국어가 대단히 유창했다.

온정이 “반갑습니다.” 하며 손을 내밀자 제이슨이 부드럽게 맞잡아왔다.

제이슨의 시선은 이내 온정의 뒤로 향했다.

“잘 계셨습니까?”

하지만 대니얼은 대꾸 없이 온정의 팔을 붙들고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빠져나갔다.

강 실장이 기민하게 다가와 온정 옆에 섰다.

“다른 네 분은 어디 계세요?”

“한 분은 밖에 대기 중이시고 세 분은 아트홀에 계십니다.”

온정이 고개를 끄덕이고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매번 이래요?”

대니얼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온정을 잡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러곤 호텔 밖으로 나서자마자 온정의 차로 향했다.

“정말 내 차 타도되겠어요?”

“그게 안정돼.”

“그래요.”

조수석으로 향하는 대니얼을 지켜보다 말고 온정이 제이슨을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제이슨이 바로 고개를 숙여왔다.

‘서먹함이 아니라 살벌함 아닌가? 누가 보면 저 두 사람, 원수진 줄 알겠네.’

그도 그럴 것이 대니얼에게서 냉기가 풀풀 흘렀다. 제이슨 자체와 사이가 좋지 않은 건지, 다섯 명이나 와서 북새를 떠는 시스템의 문제인 건지, 아니면 둘 다인지 온정은 조금 염려스러웠다.

‘처음부터 함께 올 수 없었겠네. 저런 분위기로 어떻게 같이 다녀. 연주회가 문제가 아니라 일상이 엉망 될 텐데.’

온정이 운전석에 올라 바로 출발했다. 차로 고작 3분 걸리는 가까운 거리였다. 하지만 도보 이동은 문제가 많았다. 저 많은 사람이 두 사람을 따라온다고 생각하니 끔찍했고, 그건 대니얼도 수긍한 바였다.

“누나. 웃기지?”

온정은 조금 당황했다.

“뭐가 웃겨요?”

“내가 USA 대통령도 아니고 교황도 아닌데 우르르.”

“그 두 분은 부대를 끌고 다니거든요? 비교할 거를 비교해요.”

“그래?”

“네.”

“그럼 안 웃겨?”

“웃겨요. 댄이 USA 대통령도 아니고 교황도 아닌데 우르르.”

대니얼이 “하하하하!” 하며 큰 소리로 웃었다.

“누나 덕분에 풀린다. 연주회 때마다 아주 지긋지긋해.”

“그래도 오가는 건 혼자 하네요?”

“그건 킹도 어쩔 수 없어. 누가 따라붙는 즉시 내가 연주회 엎어버리니까.”

“허! 진짜 엎어버려요? 협박이 아니고?”

“어. 진짜 엎어버려. 그래서 그것까지는 킹도 어쩌지 못해.”

온정이 대니얼을 보고 활짝 웃었다.

“연대장은 댄이 하는 게 좋겠어요. 나는 아버지한테 못 그러거든요. 엎어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엎어져요.”

대니얼이 온정의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러는 동안 <오디세이 아트홀>에 도착했다. 주차장 쪽으로 방향을 틀자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났다. 백미러로 보니 차에서 강 실장이 내려선 달려왔다. 차창을 열었다.

“본부장님. 여기서 내리시는 게 좋겠습니다. 차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안 돼요. 제 차는 아무도 못 건드려요.”

“압니다. 아는데…….”

“걱정 마세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그 말에 강 실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다가 원래로 돌아갔다.

“알겠습니다.”

차창을 내리고 다시 차를 움직여 주차장 안으로 들어섰다.

“누나.”

대니얼 쪽을 쳐다보지 않은 채로 온정이 “네?” 했다.

“그냥 누나가 해.”

“뭐를요?”

“연대장.”

이번엔 온정이 “하하하하!” 하고 소리 내서 웃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우리 킹 상대해야 할 땐 댄이 연대장하고, 바다 건너 계시는 킹 상대할 땐 내가 연대장 하는 걸로.”

“그거 좋네. 아주 좋아.”

“땡큐요.”

“하하하! 아, 진짜. 하하하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껐다.

“바이올린 들어줄까요?”

“좋아.”

온정이 차에서 내려선 대니얼에게서 바이올린 가방을 받아들었다. 그러곤 나란히 <오디세이 아트홀> 정문 쪽으로 향했다. 뒷문을 이용할까 했지만 체인으로 감겨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정문 앞에 아까 그 사람들이 또 모여 있었다.

‘뭘 저렇게까지 해. 사람 마음 부대끼게. 좀 편하게 두지.’

그때였다. 제이슨의 시선이 온정이 들고 있는 바이올린 가방에 닿았다. 온정은 또 놀랐다. 제이슨의 표정 때문이었다.

“댄. 이거 내가 들고 있으면 안 되는 거예요?

“응?”

“제이슨 씨 눈알이 튀어나오려고 하는데요?”

“아! 하하하!”

온정이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왜 웃어요?”

대니얼이 제이슨을 힐긋하고는 웃음을 이어갔다. 제이슨으로서는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을 만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니얼은 자신의 바이올린에 다른 사람이 손대는 걸 극도로 경계하고 혐오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오죽하면 대니얼의 부모도 만지지 않을까.

“하하하하하!”

“참나. 웃고 싶으면 웃든가요.”

정문을 통과하면서도 대니얼은 계속해서 웃었다.

‘누나가 나를 댄이라고 부르는 걸 알면 저 표정이 한 번 더 나오겠군.’

비슷한 맥락에서 ‘댄’이라고 부를 수 있도록 허용된 사람도 거의 없었다. 정확히 말해서 그의 부모뿐이었다. 아이러니는 댄의 어머니 나디아 쇼는 대니얼을 댄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점이랄까. 꼬박꼬박 대니얼, 대니얼.

‘재미있네.’

대니얼이 싱글거리는 동안 온정이 실내를 훑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사방에 서 있었다. 홍보실은 물론이고 본사 기획팀과 VIP팀에서도 직원들이 잔뜩 나와 있었다.

‘총동원령이라도 떨어진 것 같네.’

온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댄. 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연주회 일정이 정말 오늘 하루에요?”

“응.”

“혹시 우리 오디세이가 깍두기예요? 아, 댄은 깍두기 모르겠구나.”

“알아, 깍두기.”

대니얼이 싱긋 웃었다.

“일정 중간에 오디세이 끼워 넣은 거 맞아.”

온정이 “아하!” 하자 대니얼이 “하하!” 하고 웃었다.

“그럼 여기서 어디로 가요?”

“싱가포르.”

“거기선 며칠 해요?”

“이틀.”

“아하!”

온정이 댄을 툭 쳤다.

“댄도 댄이지만 제이슨 씨도 바쁘겠네요.”

대니얼이 피식, 했다. 알 게 뭐야, 그런 뜻이었다.

“참, 내 자리는 언제 정해줄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니얼이 온정을 끌고 콘서트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가선 무대에서 볼 때 3분의 1 지점, 오른쪽 맨 끄트머리를 딱 짚었다.

“여기.”

온정이 “음!” 하며 주변을 살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자를 따로 챙겨와야겠네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서 있을 생각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오늘만 그렇게 해. 다음부터는 맨 앞줄 가운데를 누나 자리로 정해줄게.”

“고맙네요.”

그러다 온정이 ‘다음?’ 했다. 정말로 다음을 기약해도 되는 거야? 하지만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때 강 실장이 다가왔다.

“그럼 바로 진행해도 되겠습니까?”

그 말에 온정이 바이올린 가방을 대니얼에게 건넸다.

“누나 여기 있을 거지?”

“네.”

대니얼이 활짝 웃고는 몸을 돌려 멀어졌다.

온정이 자리를 옮겨 좌석 한가운데 반듯하게 섰다. 그러곤 대니얼의 움직임을 눈으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2 A-flat major Allegro

내림가장조 빠르게

대기실 앞에서 제이슨과 맞닥뜨렸다. 공손하게 인사해오는 제이슨을 그대로 지나치려던 대니얼이 우뚝 섰다.

“건드리지 마.”

제이슨이 눈을 내리깐 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말도 걸지 말고.”

“예.”

“예온정 눈앞에서 알짱거리지 말란 뜻이야.”

“예.”

“킹한테는 마음대로 해.”

제이슨이 입을 다물었다.

대니얼이 덧붙였다.

“예온정 사진 찍었단 봐. 인터넷에 내 이름이 실시간으로 오르내리는 꼴 보게 해줄 테니까.”

“예.”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꺼지라고 하고 싶었다. 연주회마다 쫓아오는 거 안 지겹냐고, 나 같으면 바이올린의 ‘v’ 자만 봐도 토 나오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제이슨의 탓은 아니었다. 제이슨은 그런 일 하라고 아버지 준수가 고용한 사람일 뿐이니까 말이다.

‘젠장!’

몸을 휙 돌려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온정은 없고 강 실장만 있었다.

대니얼의 표정을 본 강 실장이 서둘러 해명했다.

“화장실 가셨습니다.”

그 말에 대니얼이 문을 다시 열었다. 그러자마자 제이슨의 뒤로 온정이 걸어오고 있었다. 대니얼이 온정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아까 나 갈 때 같이 가지.”

“그러게요.”

온정이 제이슨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왜? 제이슨한테 말 걸려고?’

아니 될 소리. 대니얼이 바로 튀어 나가선 온정을 끌고 대기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음엔 같이 가.”

“푸핫! 그래요.”

일부러 문을 쾅 닫았다. 강 실장이 깜짝 놀라선 헛기침을 하고는 온정 가까이 왔다.

“본부장님. 그럼 다른 VIP 인사는 빠지십니까?”

“훈정이 있잖아요.”

“그럼 리셉션 때는…….”

대니얼이 나섰다.

“강 실장님.”

“예. 미스터 대니얼 도.”

“누나는 나하고만 있을 거예요.”

“아!”

“채갈 생각 마세요.”

“아!”

온정이 얼굴에 웃음을 달고 강 실장에게 나직하게 답했다.

“지금 상황이 이래요. 파악하신 대로 말씀하시면 돼요. 아버지도 별말씀 안 하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강 실장이 한 번 더 “알겠습니다.” 하고는 방을 빠져나갔다.

대니얼이 온정을 돌려세웠다.

“무슨 파악?”

“내가 댄한테 붙잡혀 있다는 거요.”

대니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누나 인질이야?”

온정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평소에 댄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알겠네요.”

“붙잡혀 있다며?”

온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내 표현도 바람직하진 못했네요. 미안해요.”

온정이 덧붙였다.

“핑계를 대자면 훈정이 덕분이에요.”

‘그 동생.’

“훈정이가 어마어마한 개구쟁이였어요. 집에 붙어 있으려 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 눈 뜨면 하는 일이 훈정이 잡으러 다니는 거였어요. 그렇게 붙들어다 놓으면 친구들한테 그러더라고요. 누나한테 붙들려 있다고.”

온정의 얼굴에 온기가 가득했다.

‘동생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

대니얼이 온정의 양팔을 잡았다. 온정의 눈동자가 대니얼에게 꽂혔다.

‘동생에 대해 얘기할 적마다 늘 그런 얼굴이 되는 거야?’

“댄?”

‘내 생각할 때, 내 얘기할 때, 그땐 어떤데?’

“댄?”

대니얼이 온정을 끌어안았다.

“샘나.”

“네?”

“잡으러 다니는 누나도 있고. 동생이 샘나.”

“훈정이한테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기막혀할 거예요.”

“그럼 그 동생 버리고 나를 가져. 나는 고맙게 여길 테니까.”

온정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건 댄이 훈정이한테 직접 말해요. 네가 그따위로 굴어서 네 누나 내가 가져간다, 그렇게.”

“정말이지?”

온정이 소리 내서 웃었다.

“정말 한다?”

“네.”

팔에 힘을 줘 꼭 안았다가 천천히 풀어주고는 온정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

‘점점 자신 없어져. 이 여자 없이 연주회 다닐 자신.’

아예 안 할 수는 있어도 한 번만 하고 그만둘 수는 없다!

세상의 거의 모든 영역이 그럴 것이었다. 모르고 살았으면 몰라도 알게 된 이상 외면도 버림도 불가능한 상태 말이다. 대니얼이 지금 그랬다.

입술을 떼고 온정에게서 뒤로 물러섰다.

‘이 여자 없이? 하아!’

순간 대니얼이 갸웃했다.

“그 파란 꽃무늬 드레스 안 입어?”

온정이 “아!” 했다.

“연주회 끝나고 갈아입을 거예요.”

“왜?”

“아까 대니얼이 지정해준 자리에 있으려면 이대로가 낫지 싶어서요.”

이대로. 그러니까 올 블랙.

“형광색을 입어도 객석에서는 안 보일 텐데?”

“살짝살짝 드러날 수 있어요. 어둠 속에 묻혀 있을 테니까 잘 찾아봐요.”

대니얼이 피식했다.

“내 눈에는 생각보다 잘 보여.”

“그래요?”

“보려고만 하면 다 보여.”

“보려고만 하면?”

“보통은 눈을 감고 연주하거든.”

“그래요?”

대니얼이 온정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안 감아.”

“나 보게요?”

“응.”

“영광입니다. 미스터 대니얼 도.”

그때였다.

똑똑.

온정이 “네!” 하자 문이 열리고 강 실장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다 손을 잡고 선 두 사람을 보고는 움찔, 하더니 어색한 어투로 말했다.

“10분 전입니다.”

온정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니얼의 손을 풀었다.

“댄. 나 서 있을 거예요.”

“왜?”

“댄이 서 있으니까요.”

‘아! 지금 당장 안고 싶다.’

“지금 미리 말하는 건 무대에서 짜증 낼까 봐, 그래서예요. 남는 의자 없어? 뭐 그러면서 인상 벅벅 쓸까 봐.”

“잘 아네. 객석으로 내려가서 다른 사람 밀어버리고 누나 앉히고도 남거든.”

온정이 입을 벌렸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미리 말하길 잘했네요.”

“누나.”

“네.”

“어디 가지 말고 내가 말한 자리에 있어.”

“네.”

대니얼이 바이올린을 집어 들었다. 이어서 활도 집어 들었다. 온정이 대니얼의 드레스 셔츠 매무새를 단정하게 매만져주었다.

***

부드럽고 쑥스럽고 해맑은, 한 마디로 ‘이완’의 단계인 ‘No.11 C major Andante-Presto’가 끝났다. 대니얼은 자세를 바꾸지 않고 심호흡을 했다. 몸을 움직이지 않아서인지 박수가 나오려다가 바로 잦아들었다.

대니얼이 눈동자를 움직여 온정을 쳐다보았다. 어둠 속에 파묻힌 하얀 얼굴이 대니얼에게 향해 있었다. 물론 눈도 대니얼에게 향해 있었다.

‘저 여자가 오르가슴에 오를 때, 얼굴 근육이 어떻게 풀어지는지 알아.’

연습하는 내내 ‘No.12 A-flat major Allegro’ 앞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그거였다. 아니 ‘No.12 A-flat major Allegro’를 앞뒀기 때문에 그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을 것이었다.

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No.12 A-flat major Allegro’의 시작이었다. 대니얼이 ‘곱게 미친 자의 장章’이라고 일컫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곱게 미친 자. 미치긴 미쳤는데 별다른 해악이 없는 자. 굳이 민폐의 유무를 따진다면 남이 아닌 본인 스스로에게 민폐를 끼치는 자.

아버지 준수가 그랬었다.

…No.12는 조마조마해. 너 같아. 부드러운 광기랄까. 댄. 사고 치지 마라.

대니얼은 계속해서 온정을 쳐다보았다.

‘저 여자의 진짜 체온도 내가 알아.’

온정의 몸 안으로 진입할 때, 그리고 움직이기 시작할 때, 그때 체온이 가장 강하게 느껴졌다. 이후로는 함께 달궈지느라고 너도 뜨겁고 나도 뜨겁고 그렇지만, 그 순간만큼은 온정의 체온이 가장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애비는 No.12가 24개 중에 왜 12번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알 거 같다. 조마조마는 가운데 있는 게 낫거든. 너무 앞에 있으면 끝까지 가기도 전에 지치고, 너무 뒤에 있으면 미친 채로 끝나게 되는 셈이니까. 시치미 뚝 떼는 No.13을 들으면 알 수 있지.

‘예온정.’

온정의 몸에 그렸던 네 개의 줄을 떠올렸다. G현, D현, A현, E현.

그리고 첫 섹스를 떠올렸다. 첫 결합, 첫 합일, 첫 결속.

한 손으로는 뜯고, 한 손으로는 활로 문지르는 이 과정을 그대로 온정의 몸에 이입했다. 단전에서부터 희열이 차올랐다. 종이에 염료가 물들 듯, 거즈에 피가 배이듯, 그렇게 점점 희열의 부피가 넓어졌다.

그리고 그 희열이 음표에 실려 공간을 휘돌았다.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객석 구석의 온정은 최선을 다해 평심을 유지했다. 생각이 아침으로 날아갔다.

“미안해. 정말 꿇으라는 뜻은 아니었어.”

“괜찮아요. 별 대미지 없었어요.”

“꿇어봤어?”

“네. 아버지 앞에서 많이 꿇어봤어요.”

“반부친연대 꼭 결성하자.”

온정이 소리 내서 웃자 대니얼이 온정을 번쩍 들어선 전화기가 놓인 테이블에 앉혔다.

“옷 입기 전에…….”

“댄.”

“한 번 더해.”

“준비해야죠.”

“3시간이나 남았어.”

“댄.”

대니얼이 온정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섰다.

“콘돔 언제까지 안 해도 돼?”

“아마 오늘?”

묻는 대로 대답해놓고 온정은 아차, 했다.

“여기는 콘돔 어디서 팔아?”

“알면 직접 사게요?”

“응.”

“아주 나하고 섹스할 거라고 방송이라도 하지 그래요?”

“그래도 돼?”

온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구할 수 있어요. 이래 봬도 나 호텔 관계자예요.”

“아하! 사이즈 확실히 알지?”

“하하하하!”

“그럼 콘돔 없이는 지금이 마지막 아니야?”

‘오늘 밤은 건너 뛰…… 하! 나 지금 무슨 생각 하니.’

“그러니까 해. 하자.”

대니얼이 온정의 손을 끌어다 페니스에 댔다.

“열심히 커지고 있잖아.”

대니얼이 밀착해왔다.

“누나 몸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난리 났어.”

대니얼의 손이 중심을 파고들었다.

“미끈거려.”

“그런 건 설명 안 해도 돼요.”

“나 들어오기 좋으라고 이런 거잖아.”

“하아!”

대니얼이 팽창한 페니스를 온정의 질구에 대고 비볐다. 오로지 허리만 움직여서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 누나.”

온정이 팔을 뻗어 대니얼의 등을 감쌌다. 그러면서 몸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타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게 꼭 자신의 이성 같았다. 결국엔 떨어져 내릴 이성.

온정이 다리를 벌리며 속삭였다.

“맞아요. 댄 들어오기 좋으라고 변한 거.”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니얼이 온정의 몸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리고 1초의 간격도 두지 않고 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아! 댄.’

격한 흔들림에 스탠드가 옆으로 쓰러졌다. 온정이 팔을 더듬거려 전화기가 움직이지 않도록 꽉 눌렀다. 잘못했다가 전화가 걸리기라도 했다가는 낭패였다. 하지만 손이 자꾸 움직였다. 그래서 아예 코드를 빼버리고는 대니얼을 안았다.

“누나. 12번 기억해.”

‘무슨 뜻이지?’

“그때 우리 스피릿 섹스하는 거야.”

웃음이 터졌다. 스피릿 섹스라니. 정신? 영혼? 아니면 기? 섹스를 그렇게 한다고? 뭔가 오글거리고 간질거렸다. 하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오글거리고 간질거려야 할 근육이 허물어지기 시작한 까닭이었다.

온정이 현실로 서둘러 돌아왔다.

평심, 평심, 평심.

궁금했다. 그래서 지금 나하고 섹스하고 있는지. 손에 쥔 건 바이올린이지만, 실제로는 나하고 섹스 중인지.

얼굴이 뜨거워졌다. 손부채질이라고 하고 싶었지만, 온정은 그냥 있었다. 자신이 움직이면 대니얼의 정신이 흐트러질 수 있었다.

온정이 기억을 정리했다.

‘No.12가 음반 상으로는 2분 21초지?’

길지 않았다. 아쉬울 정도로 길지 않았다.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네.’

하지만 끝은 찾아왔다. 그것도 너무 빨리.

대니얼이 활을 휘두르자 사방에서 박수가 터져 나오고 휘파람이 흘러나왔다. 온정도 휘파람을 불어 분위기에 섞여들었다. 그때 대니얼이 대단히 정중한 미소를 짓고는 온정을 다시 쳐다보았다. 마치 ‘느꼈어?’ 하듯이.

실제로 그랬다. 대니얼은 정말로 온정을 향해 ‘느꼈어?’ 하고 물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격렬하게, 깔끔하면서도 열정적으로, 그렇게 연주했으니까 말이다. 바이올린을? 아니 온정을.

바이올린을 인체로 여겨본 적일랑 단 한 번도 없었다. 바이올린을 거의 자식처럼 대하는 사람도 있다지만 대니얼은 아니었다. 아무리 바이올린에 미쳤다 해도 바이올린에 인격을 입히지는 않았다. 그렇게만 해도 나무랄 데 없는 연주가 가능했다.

그런데 오늘 바이올린에 살이 채워지고 체온이 더해졌다. 리허설 때만 해도 ‘응?’ 정도였는데 연주회가 시작되고부터 서서히. 그러다 No.12에서 확실해졌다. 앞으로 자신의 연주가 모든 면에서 새로워질 거라는 사실에 대해서였다.

‘내 미래가 설레. 몹시 설레.’

대니얼이 숨을 골랐다. 24개의 카프리스 가운데 절반이 끝났다. 이제 No.13으로 가야 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3 B-flat major Allegro

내림나장조 빠르게

대니얼은 단 한 마디의 인사말도 없이 허리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주어진 발언 시간을 끝내버렸다. 자신이 주인공인 리셉션인데도 말이다. 그 뒤는 제이슨이 마이크를 들고 유려한 화술로 좌중을 흔들었다. 무표정하게 서있던 금발의 미남 맞나 싶을 정도로 위트와 재치가 넘치는 그의 발언에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리셉션 따위 없었으면 좋겠군.’

온정의 옆에서 샴페인 잔을 받아드는데 한 남자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대니얼이 바로 경계하며 온정을 쳐다보자 얼굴 가득 다정한 미소가 떠있었다.

‘누군데 그렇게 웃어?’

“만나서 반갑습니다. 미스터 대니얼 도. 저는 예훈정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

훈정이 온정의 팔꿈치를 콕 찍었다.

“매력적인 여성분의 하나밖에 없는 핏줄입니다. 오디세이에서 ‘스키 앤 보드 사업본부’를 책임지고 있습니다.”

‘아! 누나가 툭하면 잡으러 다녔다는 그 자식.’

주의 깊게 인상을 살피자니 훈정이 온정에게 속삭이듯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 예쁘네. 평소에도 좀 이러고 다녀. 그 야상 지겹지도 않아?”

“내 눈엔 안 보여.”

“누나 눈만 눈이야? 남의 눈도 좀 보호하고 그래야지. 홍익인간 몰라?”

“그런 어려운 말 몰라.”

“아니 누나…….”

“서린 씨 왔어?”

“어? 왔지.”

“그럼 가. 또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그 말에 대니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무슨 뜻?’

“오늘은 기분 좋아서 괜찮을 거야.”

“그래도 가.”

훈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나 미안해. 하, 나도 서린이가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진짜.”

“가.”

“알았어.”

훈정이 대니얼에게 환하게 웃어주고는 하나 마나 한 인사말을 내놓고 멀어졌다.

대니얼이 득달같이 물었다.

“서린이라는 사람이 누구야?”

“아! 동생 여자친구요.”

“동생 여자친구? 그 사람이 왜?”

“댄이 듣는다는 거 생각 못 하고 떠들었네요.”

“뭔데?”

“남매 사이가 좋을 때 벌어질 수 있는 경우의 수 중에 하나에요.”

“그 여자친구가 누나 질투해?”

온정이 고개를 휙 돌려 대니얼을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그러니까. 갑자기 기분 나빠.’

온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포인트에서 그런 걸로 보여요?”

“그건 아니야.”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내가 그래서. 내가 지금 그래.’

“댄?”

“어쩐지 그럴 거 같았어.”

“훠우!”

온정이 샴페인 잔을 들고는 살짝 흔들며 웃었다.

그런 온정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몸에 열이 올랐다.

“나 더워.”

“그래요? 잠깐 나갈까요?”

잔을 든 채로 두 사람이 리셉션 홀을 벗어났다. 그러곤 환한 조명을 피해 어두운 나무 아래에 나란히 섰다.

“댄. 미안해요.”

대니얼은 긴장했다. 갑자기 뭐가 미안하다는 건가.

“그런 생각을 했어요. 진즉 알았다면.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도를 진즉 알았다면. 그런 소리가 세상에 존재한다는 걸 진즉 알았다면…….”

대니얼이 온정을 바라보았다.

“음반으로 들었을 때, 연습실에서 들었을 때, 아까 리허설에서 들었을 때, 다 좋았어요. 감동이라는 단어로는 정확하게 표현이 안 된다는 점이 안타까워요. 그러니까 그냥 굉장히 좋았다, 그렇게만 할게요.”

온정이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연주회는 또 달랐어요. 진동이 훨씬 강했고 공명도 훨씬 진했고 파장도 훨씬 길었어요. 전체적으로 에너지가 높았어요.”

“현장에서만 느껴지는 게 있지.”

“네. 현장. 바로 여기서만 알 수 있는 느낌들. 그걸 오늘 처음 알았다는 게 안타깝고 속상하고 후회돼요.”

온정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연주회가 처음은 아니에요. 일렉트릭 쪽으로는 수도 없이 갔으니까요. 그런데 오늘 두 시간이 그 모든 공연을 넘어섰어요.”

“난 알아. 누나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

온정이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정말…… 그랬어요?”

“스피릿 섹스, 그걸 묻는 거야?”

“네.”

“했어. 바이올린이 아니라 누나를 연주했으니까. 난 명백하게 그랬으니까.”

“나를 연주하는 게 좋아요?”

대니얼이 온정을 마주 보고 섰다.

“좋으냐고? 고작 좋으냐고?”

대니얼이 두 개의 잔을 바닥에 내려놓고 온정의 맨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난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어. 고대 제사장들이 왜 섹스를 주도했는지. 기록 있다며. 제의 앞두고 이래저래 몸 섞은 거.”

온정도 대강은 주워들은 바였다.

“제상을 거하게 차려놓고 연주하고 춤추고 섹스하고, 그러다 제물을 죽이는 거지. 그게 제의라고. 신한테 잘 봐달라고 한 짓이 그거였다고.”

대니얼이 온정의 매끄러운 팔뚝을 쓸어내렸다.

“왜 그랬겠어? 통하니까 그랬겠지. 어떤 점이? 사람 헤까닥 하게 하는 점이. 그런데 난 지금까지 기교로만 연주했거든. 물론 아무 생각도 아무 마음도 없었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귀 밝은 사람들은 번번이 씹어댔지. 대니얼 도의 연주는 한 마디로 건조하다고. 소울풀soulful이 아니라 소울리스soulless라고.”

온정이 대니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어. 내가 헤까닥 했거든. 하늘에 닿으려고 했다고. 그런데 그걸 두고 고작 좋으냐고?”

“그럼 댄.”

눈과 눈이 부딪쳤다.

“댄의 스피릿 섹스 상대가 꼭 나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뭐?’

“다른 몸을 연주해도 헤까닥 그거 가능해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기묘한 감정이 온정의 심장을 쑤석거렸다. 도대체 대화가 왜 이 방향으로 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온정은 바뀐 방향을 따라 흘러갔다.

“굳이 내가 아니어도 댄의 진심만 실린다면…….”

“예온정!”

대니얼이 온정의 몸에서 손을 뗐다.

“그러니까 누나 넌, 내가 아무 여자 몸이나 벌리고 들어가는 그런 자식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온정은 소스라쳤다.

“왜 그런 식으로 받아요? 그런 뜻이 아니…….”

“그러는 넌! 그러는 누나 넌 내가 네 인생에 유일한 남자야? 잠자리 기술이 그렇게나 능숙하면서 그동안 받아준 남자가 몇 명인지 내가 알 게…….”

온정이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짝.

대니얼의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야말로 눈앞이 번쩍하고 나서야 대니얼이 숨을 들이켰다.

‘나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나 지금 뭐라고 했냐고.’

대니얼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온정을 바라보았다.

‘아! 누나.’

온정이 온몸을 파들파들 떨며 씹어뱉듯 말했다.

“미스터 대니얼 도. 죄송합니다. 더러운 몸으로 귀하신 분을 접대하다니 불쾌하셨을 겁니다.”

온정은 ‘접대’에 힘을 주었다.

“보상을 원하시면 말씀…….”

목이 메었다.

“강 실장님에게 말씀하세요.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습니다.”

‘누나. 아, 누나. 그게 아니라, 아아!’

온정이 대니얼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 한 발짝을 떼려다 말고 멈칫하더니 떨리는 손으로 힐을 벗어 왼손에 들었다.

“다시는 뵐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잠시 휘청, 했던 온정이 허리를 곧추세웠다. 그러곤 걷기 시작했다. 무작정 그냥 걷기 시작했다. 그런 온정을 대니얼은 차마 쫓아가지 못했다.

***

리셉션 홀로 들어서자 강 실장이 바로 다가왔다.

“본부장님은…….”

“부탁이 있어요.”

“예?”

대니얼이 별다른 대꾸 없이 움직이자 강 실장이 기민하게 따라왔다. 대니얼이 향한 곳은 바이올린 가방이 놓인 곳이었다.

바로 옆에 함께 놓아둔 온정의 클러치 백을 조심스럽게 집어 들면서 대니얼은 심장이 조여드는 통증을 느꼈다.

“이 안에 휴대폰, 키홀더, 객…….”

목이 턱 막혔다.

“객실카드, 아무튼 다 들어있어요.”

“예? 아, 예.”

“그래서 갈 데가 없을 거예요.”

강 실장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대니얼이 말을 이었다.

“호텔 3층에 사무실이 있다는 얘길 얼핏 들었는데, 맞아요?”

“예. 3층에 ‘곤돌라 사업본부’ 방이 있습니다.”

“거긴…….”

대니얼이 숨을 골랐다.

“그냥 들어갈 수 있어요?”

“예? 아, 거기도 키가 필요하긴 한데 프런트에서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럼 이거, 그리로 가져다 두세요.”

대니얼이 내미는 클러치 백을 받아들며 강 실장이 이마를 찌푸렸다가 바로 풀었다.

“예. 알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강 실장을 대니얼이 다시 불렀다.

“강 실장님.”

강 실장이 돌아섰다.

“지난번엔 죄송했습니다.”

“예?”

“저 때문에 먼 길 왕복하신 건데 감사 인사는커녕 짜증만 냈어요.”

강 실장이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니얼이 계속했다.

“무례했음을 사과드립니다.”

강 실장이 대니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예. 감사합니다.”

“누나 어디 있는지 알게 되면 객실, 아니 제 휴대폰으로 알려주세요.”

“예.”

강 실장이 돌아서 멀어졌다.

‘아, 내가 정말 돌았지.’

바이올린 가방을 챙겨 들고 리셉션 홀을 빠르게 벗어났다. 호텔까지 걸어서 갈 작정이었다. 혹시 중간에 온정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때였다.

“미스터 대니얼 도.”

제이슨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나한테서 신경 끄고 당신 할 일만 하고 가.”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대니얼이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미스터 대니얼 도.”

우뚝 멈추고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신경 꺼.”

“제가 체크해야 할 내용은 연주회만이 아닙니다. 미스터 대니얼 도의 연주회 앞뒤 컨디션도 확인…….”

“똑같다고 해. 잘 있다고 해.”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이건 저도 그냥 넘어갈 수 없습니다.”

대니얼이 눈을 감고 심호흡을 했다.

“미스터 대니얼 도. 말씀하셔야 저희도 조치를 취합니다.”

대니얼이 눈을 떴다.

“무슨 조치?”

가만히 있는 제이슨을 보고 대니얼이 나직하게 말했다.

“진짜로 조치 취할 일 만들기 전에 신경 꺼.”

“예온정 본부장님 일입니까?”

대니얼의 눈이 번쩍했다.

“사진 찍지 말랬지.”

“안 찍었습니다.”

“사진 찍지 말라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쫓아다니지 말라는 소리야. 몰라?”

“밖에 있던 친구가 혼자 가시는 걸 봤다고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보지 마.”

“미스터 대…….”

“보지 말라고. 내 여자 보지 마.”

제이슨의 눈이 커다래졌다.

대니얼에게 분노가 치올랐다.

‘이게 다 망할 그 금욕주의 때문이야. 어려서부터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은 말이 순결이니 정결이니 따위라, 내 무의식에 그런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었던 거라고. 난 그런 사람이 전혀 아닌데도 프로그래밍 된 대로 말이 튀어나왔다고. 그냥 튀어나오기만 한 게 아니라 누나를 찔렀다고. 그래서 아파서, 내가 찌르는 바람에 아파서 맨발로 혼자 그렇게…….’

가슴이 조각나는 기분이었다.

‘나조차도 차마 잡지 못한 누나를 왜 너희들이 봐? 그 모습을 왜 너희들이 관찰해?’

대니얼이 파래진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 도 회장 아들이야. 바이올린 켠다고 많이 다를 것 같지? 속은 똑같아. 목적을 위해선 다 한다고. 너희들 입에서 내 여자 얘기가 나온다! 그럼 그날로 입에 흙 처 넣어줄 테니 그리 알아. 먹을 만할 거야. 요즘 묘지들이 워낙 고급스러워야 말이지.”

대니얼이 덧붙였다.

“보지 마. 얘기도 하지 마. 내 여자한테서 신경 꺼. 나한테서도 신경 꺼. 연주회 얘기만 전해. 잘했다고. 유난히 끝내줬다고. 오디세이가 잘 챙기고 있다고. 그것만 말해.”

대니얼이 한 반짝 물러서서 제이슨을 노려보았다.

“임무에 충실할 뿐인 거 알아. 그런데 그 임무의 궁극적인 목적이 뭔지는 누구보다 제이슨 당신이 잘 알 거야.”

무어겠는가. 대니얼 도의 무사안일이지. 대니얼이 일단은 무사해야 ‘내 아들이 파가니니의 현신이다.’ 하고 자랑하고 다니지.

“내가 삐끗해버리면 당신도 무사하지 못해. 그러니까 눈 감아.”

대니얼이 몸을 돌렸다.

‘젠장!’

빌어먹을, 제기랄, 젠장!

바이올린 가방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전원을 올렸다. 온정의 번호를 찾아 눌렀다.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후 음성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연결된 후에는 통화료가 부과됩니다. 삐이…….

‘누나.’

입을 꾹 다물고 숨만 쉬다가 휴대폰을 내렸다.

‘무슨 말을 해. 무슨 낯짝으로 입을 떼.’

휴대폰을 손에 꼭 쥐고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오디세이 아트홀>에서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까지 온정의 이름을 속으로 부르며 그냥 걸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떤 말로 돌이키지?’

돌이키다, 라. 과연 그게 가능할까.

‘질투가 다 망쳤어. 오셀로가 데스데모나를 왜 죽였는지 몰라? 질투 때문이었다고. 그런데 내가 그 짓을 했어.’

…댄의 스피릿 섹스 상대가 꼭 나여야 할 필요는 없지 않아요? 다른 몸을 연주해도 헤까닥 그거 가능해요. 굳이 내가 아니어도 댄의 진심만 실린다면…….

그 말을 듣는데 불현듯 온정이 14개월 전에 헤어졌다는 그 남자가 떠올랐다. 온정을 ‘내가 사랑한 유일한 여자’라고 한 남자, 헤어졌다면서 그 새벽에 거리낌 없이 메시지를 보내온 바로 그 남자 말이다. 그러자 이성이 빠르게 허물어졌다. 온정이 그 남자와도 섹스했을 거라는 생각에 갑자기 노여움이 치오르면서 앞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는 넌! 그러는 누나 넌 내가 네 인생에 유일한 남자야? 잠자리 기술이 그렇게나 능숙하면서 그동안 받아준 남자가 몇 명인지 내가 알 게…….

대니얼이 우뚝 섰다.

‘아니야, 누나. 나 그렇게 생각 안 해. 그런 생각 안 했다고.’

…잠자리 기술이 그렇게나 능숙하면서 그동안 받아준 남자가 몇 명인지…….

몸이 떨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한단 말인가.

…다시는 뵐 일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안 돼.’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에 이르자 컨시어지가 대니얼을 향해 정중하게 인사를 해왔다. 대니얼이 멈췄다.

‘저 사람이 원래 있었나?’

그도 그럴 것이 혼자 드나든 적이 없어서 딱히 관심 둘 기회가 없었던 것이다.

혼자.

그랬다. 지금 대니얼은 혼자였다.

대니얼이 미동 없이 가만히 있자 컨시어지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스터 대니얼 도. 혹시 도움이 필요하십니까?”

‘도움 필요해. 누나, 누나를 찾아다 줘. 나 여기 혼자 들어가기 싫어. 15층에 혼자 있기 싫다고.’

“미스터 대니얼 도?”

대니얼이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발짝을 뗐다. 28년을 사는 동안, 스스로가 이렇게까지 무능하고 한심하게 여겨진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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