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D-1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8 E-flat major Maestoso
내림마장조 장엄하게
생수를 병째로 들이키며 테라스로 나갔다.
‘이 시간에 여기 나와 본 적이 없어서 몰랐군. 이렇게나 깜깜할 줄이야.’
그랬다. 곧 동틀 시간인데도 산에 둘러싸였기 때문인지 여전히 어두웠다. 농도 또한 도심의 어둠보다 훨씬 더 짙었다.
‘귀신이 어깨동무하고 나오게 생겼어.’
…솔직히 한국은 짐승보다는 귀신이죠.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누나도 그런 거 안 무서워하게 생겼지.’
생각의 끝에서 만족스런 한숨이 흘렀다. 얼마만의 사정이었는지 몰랐다. 자위를 그만둔 지 꽤 오래됐으니까 말이다. 뿐이랴. 페니스에는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음에도 엄청난 크기의 희열이 온몸을 강타했다.
…네 스스로를 파가니니라고 믿고 사는 게 네 정신에 무리가 덜 갈 거다. 단 여자 문제는 제외. 문란함만큼은 이 애비가 절대 용서 못 한다.
아버지 도준수는 청교도적인 가치관으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즉 청렴과 청결을 신봉하는 금욕주의자였다. 다국적기업의 회장임에도 유흥은 절대로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중에서도 여자 문제에 결벽증적으로 굴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어머니 나디아 쇼는 더한 인물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여자를 만나지 못했다. ‘이성과의 동침은 결혼 후 배우자와만’이 원칙인 부모와 한집에서 함께 사는 외아들로, 물론 그 집이 엄청난 대저택이라 얼굴 한 번 보려면 수십 분을 걸어야 하긴 하지만, 그렇다 해도 부모의 그늘이니만큼 그 두 사람의 눈을 피해 여자를 만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했고, 그렇다고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 여자를 돈으로 사는 건 대니얼의 가치관과도 맞지 않은 까닭이었다. 연주 여행 때의 숱한 유혹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렇다고 성에 무지하지는 않았다.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그림이 대니얼의 머릿속엔 수천 장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그중의 한 장을 지난밤에 꺼내서 현실로 만들었다.
‘킹이 알면 난리가 나겠지. 뭐…… 날 테면 나라고 해.’
차창을 사이에 두고 눈을 마주친 첫 순간부터 온정은 남달랐다. 지금까지 연주 여행을 다니는 동안 인종과 국적과 나이를 불문한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들이 어디에나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냥 시각의 일이었다. 눈에서 끝나버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온정은 신경을 건드렸고 감정을 들쑤셨고 종내는 영혼을 흔들었다.
‘누나만큼은 양보 못 해.’
끌리는 걸 어쩌랴. 궁금한 걸 어쩌랴. 건드리고 싶은 걸 어쩌랴. 나를 쳐다보게 만들고 싶어 죽겠는 걸 어쩌랴.
‘절대 못 해. 어차피 이젠 가두지도 굶기지도 못하잖아. 남은 협박이라고는 상속 없다, 그건데 어차피 난 그 재산에 관심 없거든.’
어느새 풀어져 버린 배스로브를 느슨하게 늘어뜨린 채로 다시 실내로 들어섰다. 전혀 몰랐는데, 스킨십을 거친 피부는 세포라도 재배치되는 모양이었다. 한껏 민감해졌음이 느껴졌다. 고작 얇은 천이 몸을 감싸고 있을 뿐인데도 자극이 됐다.
‘끌어안고 조금 더 자야지.’
배스로브를 벗어 아무 데나 던지고 침실로 향하는데 어딘가에서 번쩍, 하는 불빛이 느껴졌다. 대니얼이 몸을 휙 둘려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다시 번쩍.
침실 맞은편 방, 그러니까 온정의 짐이 있는 방이었다. 온정이 신중하게 설정해둔 흐린 조명을 뚫고 날카로운 빛줄기가 또 새어 나왔다.
대니얼이 주저 없이 방으로 들어가 불빛을 확인했다. 온정의 휴대폰이 환했다.
‘아까 눈 떴을 때가 4시 7분인가 그랬는데, 이 시간에 뭐지?’
다가가 충전 중인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메시지가 도착해있다는 표시가 떠 있었다.
‘이 시간에 메시지라.’
액정을 터치하자 화면이 바로 떴다. 암호 설정이 돼 있지 않았다.
‘어쩐지 그럴 것 같더라니.’
거리낌 없이 터치를 이어갔다.
[죽을 거 같아.]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정아. 보고 싶어서, 네가 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아.]
보낸 사람을 확인했다. 번호만 있었다. 저장돼있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내 인생은 왜 이럴까. 난 그저 친절하게 대했을 뿐인데, 왜 이렇게 된 걸까.]
‘14개월 전에 끝났다는 그 남자로군.’
[아이가 무슨 죄인가 싶어서 아빠로만 살려고 했는데, 날이 갈수록 아이가 제 엄마랑 똑같아져. 눈이 안 가. 손도 안 가. 마음은 더 안 가. 괴로워서 죽을 거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어. 밥도 먹히지 않아.]
‘아이? 아빠? 이 새끼 속이고 누나 만났구나.’
헤어진 지 14개월밖에 안 됐는데 벌써 아이 얘기가 나온다는 건, 14개월 전 그 시점에 이미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것도 남자 쪽에 말이다. 대니얼의 머릿속에는 온정이 외도의 주체라는 가정 자체가 없었다. 즉 온정은 모르고 당했다는 확신이었다.
[정말 죽을 거 같아. 정아.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 온정아.]
거기서 끝이었다. 이후로 더 이상의 메시지는 없었다.
대니얼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메시지를 모조리 지웠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통화목록에 들어가 기록 자체를 지워버렸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죄책감? 없었다.
‘혹시 이전에도 또 보냈던 거면?’
그랬다면 온정은 답장을 했을까? 그러다 번호와 이름이 저장돼있지 않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휴대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내려놓으면서 심호흡을 했다.
‘갑자기 초조해지네.’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침실로 들어섰다. 그러곤 어둠 속의 실루엣을 한참 쳐다보았다.
‘일단은 잡고 봐야겠어.’
침대로 올라가 이불을 들치고 몸을 밀어 넣었다. 그러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온정의 상체를 꼭 끌어안았다.
‘깨우고 싶어. 깨워서 지난밤처럼 또 하고 싶어.’
지난밤처럼? 하나라도 더 해야지, 지난밤처럼 딱 그것만?
한숨을 쏟으며 온정의 몸 위에 다리를 걸쳤다.
그때였다.
“대앤.”
잠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였다. 옅고 흐리고 약하면서 나른한 것이 잠에 취한 목소리였다. 그런데도, 그렇게나 몽롱한 상황인데도 정확하게 ‘댄’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감동이 밀려왔다.
“응, 누나.”
“자요.”
“응.”
온정이 다시 조용해졌다.
…보고 싶어서, 네가 보고 싶어서 미쳐버릴 것 같아.
…괴로워서 죽을 거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어. 밥도 먹히지 않아.
…정말 죽을 거 같아. 정아. 내가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 온정아.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 유일하게 사랑한, 여자.’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자신이 알몸으로 끌어안고 있는 이 여자를 지금 이 시간에 다른 남자가 그리워하고 갈구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열이 올랐다.
그렇다면 어떤 열일까. 분노에서 치미는 열? 질투로 솟구치는 열? 소유욕으로 폭발하는 열?
‘젠장!’
전부였다.
‘답장이라도 할 걸 그랬나? 나 네가 찾는 정이 남잔데 죽고 싶지 않으면 두 번 다시 이따위 메시지 보내지 마, 그렇게라도 적어서 보낼 걸 그랬나?’
팔에 힘을 주었다.
‘어떤 인간인지 모르지만 누나 생각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하지 말라고. 미치든지 죽든지,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누나 생각일랑 당장 그만둬.’
온정의 팔을 가만히 들어 올리고 품에 고개를 묻었다.
‘돌아버릴 거 같아. 내가 미칠 거 같다고.’
손으로 온정의 가슴을 덮었다. 안정적인 심장박동이 손바닥으로 전해져왔다.
‘누나는 지금 평온해. 내 옆에서 지극히 편안해.’
온정의 가슴에 귀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조금씩, 조금씩 대니얼의 심장에도 규칙적인 흐름이 찾아왔다.
***
“댄. 잠 못 잤어요?”
대니얼이 고개를 수그린 채로 가로저었다.
“그럼 혹시 후회돼서 그래요?”
대니얼이 고개를 휙 들고는 온정을 날카롭게 쳐다보았다.
“누나 후회돼?”
“난 아니에요.”
대니얼이 눈을 감으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나도 아니야.”
“알았어요. 연주회 전날이니까 이해해요.”
‘아! 그렇지. 내일이 연주회지.’
“이해할게요.”
온정이 고개를 돌려 연못을 바라보았다.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 오른편에 위치한 인공연못은 아직 오전 여덟 시밖에 안 됐는데도 부지런하게 분수를 뿜고 있었다. 평소 이 시간에 여기에 와본 적이 없는 온정으로서는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온정이 발신자를 확인하고 휴대폰을 귀에 댔다.
“네, 윤 점장님.”
-오늘도 안 올라오십니까?
“네. 내일까지는 어렵고 모레는 들를 거예요.”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네. 연주회 준비 때문에요.”
-아! 계속 함께 다니신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온정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런데 오늘이 금요일이네요, 윤 점장님.”
-하하하하! 예. 오늘내일 죽어납니다. 호텔 예약도 평소보다 많다고 해서 철저히 준비하고 있습니다.
“인원이 더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시즌이 아니라서 그 정도는 아닙니다.
“참, 별채 잘 있나요?”
-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네. 그나저나 윤 점장님 커피 금단증상 왔어요.”
-하하하하! 모레 곱빼기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네. 실시간 매상 기대할게요.”
-예. 행복하실 겁니다.
“행복 좋네요.”
-좋지요, 행복. 다 행복하자고 사는 건데.
“그런가요?”
-저는 그렇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본부장님.
“네.”
휴대폰을 내리자마자 대니얼이 온정의 손목을 잡았다.
“왜 그렇게 웃어대?”
“네?”
“그냥 담담하게 말하면 되지, 왜 처음부터 끝까지 얼굴에 미소냐고.”
“한두 해 본 식구가 아닌걸요.”
“한두 해가 아니면 몇 년인데?”
“내가 본부장 되기 전부터니까 4년 다 돼가네요.”
대니얼이 손목을 더 꽉 쥐었다.
“그 전엔 어디서 뭐 했어?”
“본사 VIP팀에 있었어요.”
“그럼 그땐 서울에 있었어?”
“네.”
“팀장이었어?”
“무슨. VIP팀장을 나 같은 신출내기한테 맡기는 줄 알아요? 아무리 오너 딸이라고 해도 그건 안 돼요.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
“나 못 봤어?”
“네?”
“3년 전에 ‘오디세이 호텔’에 묵었었어. 그것도 열흘이나.”
“연주회 있었어요?”
“아니. 조부님 돌아가셔서.”
“아!”
대니얼이 온정의 손목을 흔들었다.
“못 봤냐니까? VIP팀이었다면서 나 못 봤어?”
“못 봤어요.”
“왜?”
“내가 다른 VIP담당이었나 보죠.”
“누구?”
“그걸 어떻게 기억해요?”
대니얼이 고개를 바짝 들이밀었다.
“얘기도 못 들었어?”
“얘기는 들었죠.”
“뭐라고?”
온정이 가만히 있었다.
“대답해 봐. 뭐라고 들었는데?”
“동료끼리 한 말을 밖에서 털 수는 없어요.”
“안 좋은 말이었네?”
“네.”
대니얼이 온정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미안해.”
“뭐가요?”
“나에 대해 안 좋은 말 듣게 해서.”
‘뭐?’
순간 대니얼이 고개를 휙 들고는 온정을 빤히 쳐다보았다.
“강 실장도, 아니 강 실장님도 뭐라고 하지?”
온정이 입을 벌렸다.
“내가 그날 차 같이 타고 올 때 짜증이 나서 이 말 저 말 막 했거든.”
“댄.”
“응?”
온정이 자신의 손목을 잡고 있는 대니얼의 손을 가만히 감쌌다.
‘위태로워 보여요.’
“왜?”
“평소엔 연주회 전날 뭐 해요?”
“그냥 있어.”
“그냥 있는 게 뭔데요?”
“그냥…… 그냥.”
“연습 안 해요?”
“전날은 연습 안 해. 머리로만 하지 손으로는 안 해.”
“그럼 정말로 그냥 가만히 있어요?”
“응. 그래도 시간 잘 가.”
“그럼 지금 이러고 있는 것도 그냥에 속해요?”
“아니. 이게 어떻게 그냥이야. 누나하고 밥 먹고 말하는데. 심지어 지금은 산책 중인데.”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그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있는다는 소린가.
“혹시 안 하던 거 했다가 몸에 무리라도 가는 거 아닌가 걱정되기 시작했어요.”
“스톱. 멈춰.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돼.”
“정말이죠?”
“응.”
마음이 아렸다. 왜 이렇게까지 아린지.
“댄. 공작 보러 갈래요?”
대니얼의 눈이 커다래졌다.
“공작이 있어?”
“네. 그것도 두 마리.”
“부부야?”
“그럴걸요?”
대니얼이 벌떡 일어섰다.
“보러 가자. 걔네들 깃털도 펴?”
“펴죠. 펴긴 펴는데, 아무 때나 안 펴줘서 못 볼 때가 더 많아요.”
“상관없어. 시간도 많은데 기다리지 뭐.”
‘그래서 말했어요. 같이 기다리자고. 그건 안 힘들 테니까.’
“혹시 사람들 많은 거 아니야?”
“그럴 일 없어요. 아버지 소유거든요.”
“아하! 난 또 동물원 같은 건 줄 알았네.”
“금이야 옥이야.”
“아하하!”
“그래서 더 비싸게 구는 거 같아요.”
“흠! 누나도 안 비싸게 구는데 지들이 뭐라고.”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 충분히 모욕적일 수 있는 발언인데도 전혀 거슬리지 않았다. 솔직히 대니얼에게 쉽게 군 건 맞았다.
‘무릎부터 꿇고 시작했는데 뭐.’
온정이 웃음을 계속했다. 즐겁기도 하고 어이가 없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고, 이게 뭔가 싶은 마음으로 쉬지 않고 웃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9 E major Allegretto
마장조 약간 빠르게
공작 두 마리가 한껏 뻐기며 왔다 갔다 했다.
“쟤네들 굉장히 얄미운데.”
대니얼의 푸념에 온정이 살살 웃었다.
“울타리 넘으면 공격해?”
“안 넘어봐서 몰라요.”
“안에 안 들어가 봤다고?”
“네. 밖에서만 봐도 충분하니까요. 아니지, 밖에서 봐야 더 멋있는 애들이니까요.”
대니얼이 온정을 쳐다보았다.
“나도 그럴까?”
눈과 눈이 마주쳤다.
“겉에서 보면 폼 나잖아.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니 파가니니의 현신이니 수식어도 화려하고. 하지만 속은 수준 이하지. 무례하고 제멋대로고.”
“그래요?”
대니얼이 피식하고는 다시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댄. 바이올린은 언제부터 했어요?”
“잡고 논 건 갓난이 때부터. 소리랍시고 내기 시작한 건 세 살 때부터.”
“팔에 힘이 없었을 텐데 소리를 냈어요?”
“가야금 타듯이 바이올린을 바닥에 내려놓고 활로 긁고 있더래. 그런데 소리가 제법이더래.”
“천재 맞네. 그런데 집에 바이올린이 있었나 봐요.”
“어머니 취미 활동. 진득하게 못 하셔서 그렇지, 악기란 악기는 죄다 건드려보셨더라고.”
온정이 살짝 웃었다. 온정의 어머니 희경도 그런 사람이었다. 다만 악기가 동양 악기라는 점이 차이였다.
“파가니니를 주로 연주하게 된 계기가 따로 있어요?”
대니얼이 온정의 몸에 자신의 몸을 한껏 기댔다.
“24개의 카프리스 중에서 마지막 24번 알지?”
“알죠. 그게 제일 유명하잖아요.”
“응. 유명하지. 파가니니와 카프리스는 몰라도 들으면 아, 이거! 하는 곡이니까.”
광고 음악으로도 쓰였으니 그럴 만했다.
“내가 처음으로 흉내 낸 곡이 그거였어. 어딘가에서 들었겠지.”
“와우!”
“어설프긴 했어도 4분가량이나 되는 곡을 활로만 대강 소리를 낸 거야.”
“그게 가능해요?”
“그렇다고 내가 4분에 끝냈다는 건 아니고. 오래 걸렸지.”
“그래도 그렇지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어설펐다고 했잖아. 활로만 했으니까.”
“그래도 놀라워요.”
대니얼이 체중을 더 실어 기댔다.
“킹이 난리가 난 거지. 그때부터 파가니니로 키워진 거고.”
“자의는 하나도 없었어요?”
“바이올린 자체는 내 뜻이지. 싫은 마음으로는 연주 못 해. 하지만 활을 내리는 순간 지옥 스타트.”
온정이 팔을 뻗어 대니얼을 감쌌다.
“킹한테 질질 끌려다니면서도 킹한테서 못 벗어난 건, 어쨌거나 킹이 내 연주를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라서야. 어머니는 파가니니 별로 안 좋아하거든. 정신 사납대. 신경쇠약 올 거 같고.”
신경쇠약이라는 말에 온정이 피식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파가니니 생존 당시에는 그의 연주를 코앞에서 듣고 기절한 사람도 있었다지 않는가.
“연주회가 끝나면 여러 기사가 떠. 처음엔 꼬박꼬박 찾아봤는데, 다 개소리더라고. 하지만 킹의 한 마디는 그렇지 않았지. 정곡을 찔렀거든. 그게 내가 지금까지 킹을 봐주는 이유야.”
대니얼이 온정의 손 하나를 끌어가선 조물조물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No.9번 말이야. 누나는 어떻게 들었어? 들으면서 떠올린 단어가 있어?”
“변덕. 그게 떠오르던데요.”
대니얼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왜 그렇게 놀라요? 내가 이상한 말 했어요?”
“아니. 그게 내 맘이거든.”
온정이 환하게 웃었다.
“다행이네요.”
그때 대니얼이 온정의 입술을 덮쳤다. 온정은 진심으로 놀랐다. 아무리 아버지 지용의 사적 공간이기는 해도 관리인이 상주하는 곳이었다. 즉 어딘가에서 누가 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런데도 기습 키스라니. 하지만 온정은 가만히 있었다.
‘왜 이렇게 힘이 안 써지나 모르겠다.’
그러게 말이다. 이건 두 아버지 사이의 기업적 거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영역인데 말이다. 결론적으로 안 봐줘도 되는데 말이다.
대니얼이 입술을 떼고는 활짝 웃었다.
“이 감정하고 저 감정이 막 교차하는 거야.”
“No.9요?”
“응. 짜증 냈다가 미안했다가 신경질 쏟았다가 죄의식 느꼈다가 비아냥거렸다가 후회했다가, 갈팡질팡.”
온정이 대니얼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그래요. 댄을 보면 마음이 오락가락해요.’
물론 전혀 내색하지 않고 있었다. 모두 억누르고 있었다. 대니얼은 연주회를 앞두고 예민한 상황이었다. 그런 사람을 궁지에 몰고 싶지 않아서 다 억누르고 있었다.
“누나가 나하고 똑같이 느꼈다니까 짜릿해.”
“그래요?”
“저 얄미운 애들까지도 예쁘게 보…….” 하며 공작에게로 고개를 돌리던 대니얼이 “와!” 했다. 수컷 공작이 깃털을 펴고 있었다. 촤아, 하고 음성지원이라도 되는 듯한 모습에 온정도 눈을 크게 떴다.
순간 공작이 두 사람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수컷인데 여왕인 것처럼 우아하면서도 도도한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다가왔다.
대니얼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작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온정과 공작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요?”
“저 자식 지금 누나한테 꼬리 치는 거 같은데?”
온정이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손바닥을 막았다. 혹시라도 공작이 놀랄까 염려된 까닭이었다.
“와! 이 자식 보게. 누나만 쳐다보잖아.”
대니얼이 똑바로 서선 공작을 노려보았다.
“야. 꼬리 안 치워?”
그러자 공작이 한껏 펼친 깃털을 부드럽게 떨었다. 다 알아듣고 ‘싫어!’ 하듯이 대단히 거만한 몸짓이었다.
대니얼이 “허!” 하더니 몸을 돌려 온정을 향해 허리를 굽히고는 손목을 잡아 내렸다. 그리고 또 입술을 포갰다.
‘아!’
대니얼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쏟아져 양옆의 시야를 가렸다.
‘댄!’
혀가 들어오고 뒤이어 숨이 들어왔다. 동시에 온정의 혀를 휘감고 잡아당겼다. 온정은 순순히 혀를 내주었다. 침도 내주고 숨도 내주었다.
“누나.”
온정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 방금 새한테 질투했어.”
온정이 “풉!” 했다.
‘누나. 새벽에 메시지 보낸 그 자식, 또 연락 안 왔지?’
그래 보이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어떻게든 티가 났으리라.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점장이라는 자식도 있네.’
대니얼이 숨을 몰아쉬었다.
“누나.”
“네.”
‘내가 떠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둘 중의 한 자식? 아니면 또 다른 자식? 아무튼 다른 자식이 누나 가지나?’
“눈으로 아무리 말해봐야 못 알아들어요.”
“그렇겠지?”
“네.”
대니얼이 똑바로 섰다. 그리고 온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밥 먹으러 가자.”
“그럴래요?”
“응. 갑자기 허기져.”
“메뉴는 또 내가 알아서 정해요?”
“응.”
온정이 부드럽게 웃었다.
“편식이 없어서 좋아요.”
“굶어 봐. 그런 거 다 사라져.”
피가 쓸려나가는 기분에 온정이 잠시 가만히 있었다.
…아버지한테 혼나요. 일 처리 흐릿하다고.
…어떻게 혼나는데? 가둬? 굶겨?
‘댄!’
하지만 대니얼은 자신이 방금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고 온정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밥 먹고 잠깐 쉬었다가 온정 옆에 누워 낮잠을 자고 싶다는 욕구가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에 블랙 카드를 대며 온정이 나직하게 말했다.
“쉬고 있어요.”
문이 열리는 동시에 대니얼이 화들짝 놀라며 온정을 쳐다보았다.
“무슨 뜻이야? 어디 가려고?”
“사무실에 좀 들렀다가 올게요.”
“안 돼.”
“댄. 넉넉잡아서 한 시간이면 돼요.”
“싫어.”
“댄.”
“연주회 전날이야. 안 그래도 곤두서는 데 이럴 거야?”
순간적으로 온정은 할 말을 잊었다. 그런 온정을 끌고 엘리베이터에 오른 대니얼이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어제도 두 시간 57분이나 봐줬잖아. 그런데 오늘도 이래? 왜 나한테 하루를 온전히 다 안 써? 따라다니기로 했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다녀야지, 왜 중간에 자꾸 구멍 내려고 해?”
“댄.”
그러는 동안 그새 15층이었다. 하지만 대니얼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그냥 좀 붙어있으면 안 돼? 어디 갈 생각 안 하고 누구랑 통화도 안 하고, 그냥 좀 붙어있으면 안 되냐고. 그게 어려워? 어떤 부분이 어려운데?”
“댄.”
“나 불안하다고. 악보 까먹을까 봐, 박자 놓칠까 봐, 줄 끊어먹을까 봐, 손가락 미끄러뜨릴까 봐 겁난다고. 무대 한복판에서 기절해버릴까 봐 공포스럽다고. 그러니까 나 좀…….”
온정이 대니얼을 와락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나 좀, 그냥 나 좀…….”
“미안해요. 몰랐어요. 그 정도인 줄 정말 몰랐어요.”
대니얼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정을 부둥켜안았다.
“옆에 좀 있어. 지금까지 늘 혼자 버텼는데, 이 악물고 견뎠는데, 이번엔 누나가 있으니까 좋아. 그러니까 제발 옆에 좀 있어.”
“네. 알았어요. 미안해요. 마음 못 짚었어요. 진심으로 미안해요.”
대니얼의 등을 한참 쓸고 어루만지며 온정은 틈틈이 미안하다고, 몰랐다고,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세계가 알아주는 바이올리니스트가 이런 식의 공포를 연주 때마다 겪고 있을 거라고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누나.”
“네.”
“낮잠 자고 싶어.”
“그래요.”
욕실에서 함께 손을 씻고 양치를 하고 나와 룸 가장 끄트머리의 풀장으로 향했다. 그러곤 아무 말 없이 등나무 재질의 둥지 모양 선베드에 비스듬히 자리를 잡았다.
“누나.”
시선과 시선이 부딪쳤다.
“헤엄칠 줄 알아?”
수영할 줄 아느냐가 아니라 헤엄칠 줄 아느냐는 표현이 우스웠지만 온정은 웃는 대신 성의껏 대답했다.
“다 해요.”
“접영도?”
“네.”
“대단하네.”
“헤엄 못 쳐요?”
“빠뜨리면 어떻게든 움직여서 나오긴 하는데, 물을 좋아하지는 않아.”
“스파는 잘하잖아요.”
“그런 물 말고.”
“그런데 왜 물어요? 내가 절벽 대신에 여기서 밀어 떨어뜨릴까 봐 그래요?”
대니얼이 온정에게 팔을 두르며 엎드렸다.
“이미 떨어진 기분인데.”
온정이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대니얼이 비슷하게 반복했다.
“벌써 떨어진 기분이야.”
대니얼이 눈을 감았다.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온정이 숨을 토막토막 흘렸다. 어떤 토막은 크고 어떤 토막은 작은데, 간격만큼은 일정했다. 메트로놈에 맞춘 것처럼 속도도 규칙적이었다.
…누나. 외할아버지가 그러는데, 만고에 쓸데없는 것들이 태어나서 속 썩인대. 우리 엄마 괜히 낳았대. 괜히 낳아서 우리 꼴까지 본대.
…너한테 직접 그러셨어?
…아니, 외삼촌한테 하는 말 들었어. 누나, 우리 옛날 집으로 가면 안 돼? 우리 보기 싫다는데 꼭 여기 살아야 해?
그랬던 외할아버지도 죽음 앞에선 손발을 들었다. 아니, 사위를 인정했다. 자신이 낳은 딸과 아들보다 더 자신을 닮았다고. 부사장 자리 줄 테니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가 공중 분해되는 일만큼은 일어나지 않게 하라고.
하지만 지용은 또 한 번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자식들이, 그러니까 온정과 훈정이 자신을 닮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를 이어갈 그릇이 못 된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이었다.
‘갑자기 이 생각이 왜 나고 난리야.’
온정이 고개를 돌려 풀장에 가득 채워진 물을 쳐다보았다.
…빠뜨리면 어떻게든 움직여서 나오긴 하는데, 물을 좋아하지는 않아.
‘여기서만큼은 걸어서 나올 수 있어요. 수심이 160이거든요.’
시선을 옮겨 대니얼을 바라보았다. 그새 고른 숨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못 잤나?’
그러다 새벽에 대니얼이 알몸으로 파고들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면서 몸에 열이 올랐다.
온정이 몸을 아주 천천히 미끄러뜨려 내렸다. 입고 있던 셔츠가 대니얼의 팔에 걸리면서 위로 들려 올라가는 바람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평심을 찾고 옷매무새를 바로 한 후 대니얼의 얼굴이 마주 보이도록 모로 누웠다.
…나 불안하다고. 악보 까먹을까 봐, 박자 놓칠까 봐, 줄 끊어먹을까 봐, 손가락 미끄러뜨릴까 봐 겁난다고. 무대 한복판에서 기절해버릴까 봐 공포스럽다고. 그러니까 나 좀…….
‘하아!’
…그냥 좀 붙어있으면 안 돼? 어디 갈 생각 안 하고 누구랑 통화도 안 하고, 그냥 좀 붙어있으면 안 되냐고. 옆에 좀 있어. 지금까지 늘 혼자 버텼는데, 이를 악물고 견뎠는데, 이번엔 누나가 있으니까 좋아. 그러니까 제발 옆에 좀 있어.
조심스럽게 팔을 올려 대니얼을 감쌌다. 그러곤 더 조심스럽게 품에 담았다.
‘출국이 언제지?’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다.
‘하아! 어떻게 해야 하지?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온정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마자 지난밤 자신의 가슴에 매달려있던 대니얼의 모습이 선명하게 재생되었다.
…그럼 혹시 후회돼서 그래요?
…누나 후회돼?
…난 아니에요.
‘아니, 후회돼. 끝까지 못 간 거 후회돼. 속옷만 적시고 말아버려서 후회돼. 지난밤과 같은 밤이 또 오리란 보장이 없는데, 거기서 멈춘 게 후회돼. 이제 와 후회돼. 이러고 끝날까 봐 후회돼. 이게 전부일까 봐 후회돼. 후회돼. 후회, 된다고.’
왜 다를까. 대니얼은 왜 이렇게 구석구석이 다를까.
왜 자꾸 질까. 아니, 왜 이길 마음조차 안 생기는 걸까.
어째서 이 남자만 다를까. 어째서 대니얼 도라는 사람만 다 다를까.
순간 서늘한 바람 한 자락이 몸 위를 훑고 지나갔다. 온정이 팔을 뻗어 등 뒤를 더듬거려선 담요를 빼 들어 대니얼을 먼저 덮어주고 남은 자락을 자신의 허리께에 걸쳤다. 그리고 몸에서 이것저것을 덜어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과거의 기억을 덜고, 그다음으로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덜고, 그다음으로 미래에 대한 의심을 덜고, 마지막으로 끓어오르던 욕망을 덜었다. 그리고 애틋함 하나만 남겼다. 적어도 지금 순간만큼은 애틋함 하나만 있으면 되니까 말이다.
무게를 덜어내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온정이 다시 눈을 감았다.
‘24개의 카프리스.’
그러고 보니 몇 시간 전에 No.9를 일러 비유했던 ‘변덕’이라는 단어가 카프리스의 이탈리아어인 카프리치오의 원뜻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일정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곡이라고 해서 ‘미칠 광狂’에 ‘생각 상想’을 써서 광상곡, ‘기이할 기奇’에 ‘생각 상想’을 써서 기상곡이라고 일컫기도 한다던가.
‘그럼 24개의 카프리스는 24개의 미친 이야기를 멜로디로 옮겼다는 뜻인가?’
그때였다. 갑자기 치고 들어온 생각에 온정이 눈을 떴다.
‘나, 일렉트릭 기타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가슴이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차근차근 꾸리고 차곡차곡 쌓아온 예온정의 세상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10 g minor Vivace
사단조 매우 빠르게
반쯤 열어둔 테라스 폴딩 도어 앞 러그에 대니얼이 결가부좌하고 있었다. 여전한 검은색의 민소매 티에 바지만 달라져 있었다. 짙은 회색의 통 넓은 긴 바지로.
…평소엔 연주회 전날 뭐 해요?
…그냥 있어.
…그냥 있는 게 뭔데요?
…그냥…… 그냥.
…연습 안 해요?
…전날은 연습 안 해. 머리로만 하지 손으로는 안 해.
…그럼 정말로 그냥 가만히 있어요?
…응. 그래도 시간 잘 가.
‘지금 머리로 연주 중이에요? 아니면 그냥?’
모성본능이라는 말을 대단히 싫어했다. 그 말이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강박적인 프레임을 씌운다고 여긴 까닭이었다. 부성본능이라는 말도 같이 있다거나, 한꺼번에 아우른 부모성본능이라는 말도 따로 있었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도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유독 모성본능만 있었다. 그게 참 듣기 싫었다. 자식들에게 별 관심 없는 어머니 희경 대신 훈정을 음으로 양으로 보살피면서도 누나, 즉 모성을 장착한 여자라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훈정보다 나이가 많아서일 뿐이라고, 자신이 누나가 아닌 형이었대도 그렇게 했을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온정에게 모성본능이 폭발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자각이 될 정도였다. 다 챙겨주고 싶고 하나에서 열까지 다 살펴주고 싶은 이 아이러니라니.
‘무슨 생각하는지, 아니면 정말로 아무 생각도 안 하는지 궁금해요.’
대니얼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자신이 너무도 낯설었다.
온정이 안락의자에 몸을 늘어뜨렸다. 팔걸이는 없는 대신 다리를 편하게 뻗을 수 있는 부드러운 재질의 의자였다.
자세를 잡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나야말로 살판났네. 휴가가 따로 없어.’
순간 산바람이 불어 들어와 대니얼의 머리를 날렸다. 여기저기 열어둔 창을 타고 맞바람이 잘 치고 있었다. 온정의 얼굴 가득 미소가 번졌다.
‘저런 아들이면 키울 맛 진짜 나겠다. 물론 쥐어박고 싶을 때도 부지기수겠지만.’
그러다 대니얼이 부모님에 대해 말할 때마다 눈빛이 차게 식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미소를 지웠다.
그때였다. 대니얼이 결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온정도 덩달아 상체를 일으켰다.
너른 공간을 사이에 두고 시선이 맞부딪쳤다.
“나 보고 있었어?”
온정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니얼이 온정을 향해 빠르게 다가와 옆에 섰다.
“언제부터?”
“꽤 됐어요. 그런데 그 자세가 굉장히 자연스럽네요? 입식에 익숙할 텐데.”
“긴장하기 딱 좋아.”
“긴장해야 해요? 긴장을 풀어야 하는 게 아니고?”
“몸에만. 몸에만 힘을 주고 마음은 푸는 거지.”
“그게 가능해요?”
“가능, 불가능을 떠나서 난 늘 그렇게 하는데?”
온정이 눈동자를 한 바퀴 굴리고 물었다.
“다른 연주자들도 그래요?”
“알 게 뭐야.”
대니얼이 온정의 몸 위에 걸터앉았다.
“무거워?”
“네.”
“그럼 자리 바꿔.”
온정이 “네?” 함과 동시에 대니얼이 온정을 안고 몸을 돌렸다. 그러면서 온정은 흡사 말 위에 앉은 자세가 돼버렸다.
대니얼이 민소매 티의 끝자락을 죽 잡아당겨선 온정의 손에 쥐여 주었다.
“고삐.”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옷이 늘어나면서 대니얼의 가슴이 훤히 드러나 버린 걸 발견하고 웃음을 서서히 줄였다.
“누나.”
온정이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내일 이 시간이면 난 무대에 있어.”
“그렇겠죠?”
“누나는 어디 있을 거야?”
“어디 있을까요?”
“맨 앞 중앙에.”
“음, 맨 앞줄은 다 주인 있어요.”
“쫓아내.”
“큰일 나요.”
대니얼이 한참을 찌푸리고 있더니 온정의 셔츠 안으로 손을 밀어 넣으며 입술을 뗐다.
“내일 내가 자리 정해줄 테니까 거기 있어.”
“정해준다고 앉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전 좌석 주인 다 있어요.”
“알아.”
온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마음대로 해요.”
대니얼이 손을 빼고는 온정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뭐 해요?”
“가슴 보려고.”
“네?”
“어젠 너무 어두웠어. 밝은 데서 봐야지.”
“댄.”
“안 돼?”
말문이 턱 막혔다. 그리고 그 막힘을 대니얼은 바로 알아보았다.
“무슨 단추가 이렇게 많아.”
구시렁거리며 단추를 모두 풀어낸 대니얼이 셔츠를 양쪽으로 벌렸다. 그러곤 손가락으로 온정의 브래지어를 콕 집었다.
“안에서 이런 거 왜 입어? 답답하게?”
대니얼이 온정의 눈을 빤히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젖꼭지 두드러질까 봐 그래? 그럼 어때서?”
마치 1년 365일 동안 온정의 가슴을 봐온 사람처럼 말하는 대니얼이 어이없었다. 그러는 동안 대니얼이 셔츠를 아예 벗겨버리고는 브래지어도 끌어 내렸다.
온정은 그냥 있었다. 지금 상황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딱히 다르게 움직일 필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니얼이 온정의 맨살에 손바닥을 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쇄골에서부터 가슴까지를 느긋하게 오가며 중간중간 유두를 손가락으로 비볐다.
‘아!’
온정은 열심히 애썼지만 가빠지는 호흡을 멈추지 못했다. 점점 더 크게 들썩여가는 가슴이 느껴졌지만 주저앉히지 못했다.
“누나. 나 먹는다?”
질문이 아니라 통보였다.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바로 물어버렸으니까.
온정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가슴에서 느껴지는 혀의 부드러운 질감과, 따뜻함과 뜨거움 사이의 온도가 피부에 스며들더니 몸 안을 자극했다.
이렇게 빨리 반응하는 몸이 아니었다. 이렇게 빨리 흥분하는 몸이 아니었다. 이렇게 빨리 달궈지는 몸이 아니었다. 과거엔 그랬다.
대니얼의 손바닥이 등을 정신없이 쓸었다. 온정이 손을 움직여 대니얼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순간, 대니얼이 가슴을 놓아주고 자신의 민소매 티를 벗어 던졌다. 그러곤 온정을 거세게 부둥켜안았다.
‘맨살이 닿는다는 게 이렇게나 좋은 거였어.’
숱한 유혹을 받으면서도 여체가 딱히 궁금하지 않았다. 저 여자나 저 여자나 벗겨놓으면 똑같겠지 싶은 것이 굳이 확인해 보고픈 마음도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 체온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그 미지근함이라니. 순전한 호기심으로 수온을 36.5도에 맞추고 그 안에 몸을 담가본 적이 있었다. 바로 온수를 틀어 수온을 끌어올렸다.
36.5는 대니얼에게 그만큼이나 불쾌한 온도였다. 그리고 대니얼은 그 불쾌함의 원인이 스킨십이 거의 없는 가정환경에 있다고 믿었다. 적어도 그의 기억 속 부모님은 대니얼을 따뜻하게 안아준 적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것도 금욕주의의 원칙인가 싶었지만, 직접 물어서 확인해보지는 않았다. 어떤 대답을 듣던 상처가 될 거란 예감이었다.
‘누나 맨살 정말 좋아.’
그랬다. 온정의 체온이 좋았다. 똑같은 36.5도일 텐데 왜 온정만 다르게 느껴지는지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너무 좋았다.
“누나.”
“네.”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어?”
‘하아!’
“응? 가슴에서 더 나가도 돼?”
“댄.”
“싫다고 하면 여기서 멈출 수 있어.”
대니얼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아니, 아니다. 멈출 수 있는 게 아니라 멈추게 하는 거지. 강제로.”
‘다른 건 다 제멋대로이면서 이건 열심히도 챙기네.’
“누나. 나 어디까지 하면 돼? 정말 여기까지만 해? 더는 안 돼?”
대니얼의 숨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어쩌면 온정이 뜨거워서 그렇게 느끼는 것일 수도 있었다.
온정이 대니얼을 살짝 밀어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했다.
“침대로 가요.”
***
침실 밖의 환한 조명과 극명하게 대비되는 침실 안의 어둠 속에서 대니얼의 짧은 호흡이 이어졌다.
‘터질 것 같아.’
그랬다. 계속해서 부푸는 페니스가 곧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이렇게까지 팽창해 본 경험도 없을뿐더러, 이렇게까지 팽창할 수 있을 거란 생각도 해본 적이 없기에 대니얼은 그저 숨만 몰아쉴 따름이었다.
‘아! 누나 손!’
정말이지 부드러운 압박이었다. 그리고 그 압박에 의해 페니스의 주름이 올올이 펴짐과 동시에 위로 옆으로 부피가 늘어났다.
“아아! 누나.”
내내 대니얼의 중심에 꽂혀있던 온정의 시선이 얼굴로 옮겨왔다.
“기분, 좋아요?”
고개를 끄덕이며 오른손을 내밀었다. 온정이 다정하게 잡아주며 고개를 천천히 내렸다.
‘뭐 하려…….’
거기서 질문이 멈췄다. 온정의 혀가 귀두를 덮은 까닭이었다. 대니얼의 몸이 활처럼 휘었다가 내려앉았다. 손도 죽겠는데 혀라니. 온정의 손을 꽉 잡으며 발가락을 곤두세웠다.
온정은 손이 으스러지는 기분에 움찔했지만 혀를 멈추지는 않았다.
‘오럴은 내 사전에 없었는데.’
남자의 페니스는 입을 댈 수 없는 영역이라고 믿었다. 그걸 어떻게? 아무리 연인 혹은 부부 사이라고 해도 그렇지, 해도 될 게 있고 해선 안 될 게 있었다. 바로 성기에 입을 대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니얼의 페니스로 돌진한 것이다.
‘댄. 당신은 참 여러 면에서 예외에요.’
귀두에 혀를 바짝 붙인 상태에서 입을 벌려 입술로 페니스를 감쌌다.
“아아! 아!”
대니얼의 신음에서 떨림이 전해져왔다. 그리고 그 떨림이 온정을 작동시켰다. 손으로 뿌리를 감싸고 입술에 힘을 주며 강하게 빨아들인 것이다. 순간 대니얼에게 잡혀있던 손이 스르르 풀려났다. 온정이 풀려난 손으로 음낭을 감싸고 작은 물결처럼 움직였다.
대니얼은 이제 신음하지 않았다. 온정이 페니스를 공들여 빠는 동안 입을 벌린 상태로 뜨거운 숨만 쏟아낼 뿐이었다.
‘내일은 후회 안 하고 싶어.’
온정이 손 가득 페니스를 쥐고 몸을 일으켰다.
“댄.”
들썩이는 가슴.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냐고 물었죠?”
여전히 들썩대는 가슴에 손바닥을 대고 살짝 눌렀다. 그러곤 무릎으로 밀고 올라가 대니얼의 중심 위에 자리를 잡았다.
“질문에 수정이 필요해요.”
쥐고 있던 페니스를 질구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대니얼의 눈동자가 온정에게로 왔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어디로 받아줄 수 있냐고 정정해야 해요.”
귀두를 질구에 문질렀다.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에 대한 예고라도 되듯 찌걱찌걱하는 소리가 야릇하게 번졌다.
“받아줄게요. 아니, 받아주고 싶어요. 아니, 받을래요.”
페니스를 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리고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허리를 앞으로 주욱 밀었다. 페니스가 몸 안으로 모조리 사라질 때까지, 음낭에 걸릴 때까지.
대니얼이 입을 앙다물며 온정의 두 허벅지를 꽉 잡았다.
‘아! 누나! 너무…… 너무…….’
온몸이 떨렸다. 부들부들, 바들바들, 사정없이 떨렸다.
그때 온정이 골반을 살짝 휘돌렸고, 그러면서 내벽과 페니스 사이에 마찰이 일어났다.
‘하아!’
온정의 허벅지에 손톱을 박아 넣으며 숨을 골랐다. 페니스가 터지기 전에 심장이 먼저 터질 것 같아서 그래야만 했다. 그러다 문득 이 모든 정경을 또렷하게 보고 싶다는 욕구가 치올랐다. 그래서 팔을 휘두르듯 옆으로 뻗어 스탠드에 불을 올렸다.
“아아!”
검은 숲 틈으로 결합 된 부분이 보였다.
그때 숲이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지진 때문에 땅이 갈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숲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안 돼.’
그러자마자 숲이 다시 하나가 되었다.
“아아!”
대니얼이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누나!’
시선을 천장에 둔 온정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정말이지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가느다란 목이며, 완만하게 벌어진 쇄골이며, 선명한 가슴골이며, 떨어져서 보니 풍만하기 이를 데 없는 가슴이며, 그리고 유연하게 회전하는 날렵한 허리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완벽한 바이올린이야.’
온정의 몸에 눈으로 현을 그려 넣었다. G현, D현, A현, E현.
활을 들었다. 물론 보이지 않는 활이었다.
송진을 발랐다. 물론 그 또한 보이지 않는 송진이었다.
대니얼이 연주를 시작했다.
이제 활은 페니스고 송진은 쿠퍼액이었다.
대니얼의 움직임을 느낀 온정이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곤 미소를 지었다. 아주 환한 미소를.
‘그 어떤 후회도 안 남도록.’
온정이 뒤로 몸을 기울여 대니얼의 다리를 하나씩 잡고는 무릎을 풀고 편히 앉았다.
‘그 어떤 미련도 안 남게.’
다리를 양쪽으로 활짝 벌리고, 거기서 무릎을 밖으로 꺾었다. 그러면서 온정의 하체는 밖으로 퍼진 M자가 되었다.
적나라한 모습에 대니얼의 이성이 와르르 무너졌다. 온정의 발목을 꽉 움켜쥐고 아래에서 위로 정신없이 찌르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연주회 전날은 연주를 한 적이 없었다. 전날만큼은 바이올린을 만지지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있었다. 뿐이랴. 소리도 듣지 않았다. 그렇게 텅 비워야 연주회를 감당할 에너지가 생겼다.
그런데 지금 더한 연주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더한 연주가 대니얼에게 영감을 쏟아붓고 있었다. 내일의 연주회가 기대가 됐다. 지금 이대로라면 무대에서 미친 듯이 날뛸 수 있을 것 같았다.
대니얼이 벌떡 몸을 일으켜선 온정을 부둥켜안으며 엎어졌다.
“누나. 소리 내!”
온정이 가감 없이 신음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에서보다 더 다양한 소리가 온정에게서 흘러나왔고, 그 소리 때문에 대니얼은 온몸이 터지는 것 같았다.
“아, 누나!”
허리를 비틀고 꼬고 둥글리고, 그러다 힘차게 내리찍었다. 그럴 때마다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쏠리며 온정을 간지럽혔다. 특히 가슴을 간질거렸다.
“댄. 가슴 물어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니얼이 온정의 가슴을 물었다. 아니 물어뜯었다.
온정은 대단히 만족스러웠다. 갈가리 찢기고 싶었는데, 산산이 조각나고 싶었는데, 대니얼이 지금 그래 주고 있었다.
온정이 팔로 대니얼을 감싸고는 뒤통수를 꾹 눌렀다. 이내 통증이 밀려왔다. 유두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기분 좋았다.
‘더.’
온정이 다리를 들어선 대니얼의 허리를 감았다. 지금 임신이 될 리 없다는 확신이 온정을 밀어붙였다. 아니, 가능성이 있다 해도 안에서 받고 싶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댄. 안에 해요.”
그 말에 대니얼의 움직임이 더 격해졌다. 자신의 속도와 강도에 따라 미세하게 달라지는 온정의 신음을 귓속에 꽉꽉 채워 넣으며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었다.
순간, 전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낯선, 그러니까 익숙하지 않은, 그러니까 겪어본 적 없는 전율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온정의 입술을 벌리고 혀를 꽂아 넣듯 밀어 넣으며 허리에 무게를 실었다. 쿵 그리고 퍽.
살갗에 솜털이 일어나며 소름이 돋았다. 기다란 머리카락이 다 따로 곤두서는 기분이었다.
대니얼이 온정의 몸 위에 축 늘어졌다.
온정이 팔을 더듬거려선 이불을 끌어다 대니얼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꼭 안았다.
“댄.”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자요.”
팔에 힘을 주며 덧붙였다.
“그냥 자면 돼요.”
대니얼이 미동 없이 몸에서 힘만 뺐다. 그러자 페니스가 저절로 빠지며 왈칵왈칵 물이 쏟아져 내렸다. 제법 무겁고 엉덩이는 척척했지만 온정은 다 괜찮았다. 진심으로 다 괜찮았다. 어쩜 이렇게 완벽하게 괜찮을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괜찮았다.
‘죽는 날까지 잊지 못할 거예요.’
온정이 눈을 깜박였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그렇게 세듯이 이 감정, 저 감정을 다 확인하며 보내려면 잠을 자서도 안 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