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D-2 (3/13)

2. D-2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5 a minor Agitato

가단조 격하게

풀에 팔을 걸고 몸을 한껏 늘어뜨렸다. 거품이 쉴 새 없이 터지는 따뜻한 물 너머로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No.5!’

No.5, 라고 하면 사람들은 으레 향수를 떠올리겠지만 대니얼에게 있어 No.5는 지금과 같은 상황, 즉 동요를 의미했다. 미세한 떨림, 날카로운 흔들림, 뾰족한 날뜀, 그런 것들 말이다. 24개의 카프리스 중에서 다섯 번째 ‘No.5 a minor Agitato’가 자신에게 바로 그런 곡인 까닭이었다.

‘예온정.’

누군가의 품에 그런 식으로 파고든 적이 없었다. 부모는 더했다. 부모의 품에 파고드느니 동물원 맹수 우리의 울타리를 넘고 말지. 그런데 온정 앞에서 내면의 어린아이가 폭발했다. 아버지와의 지긋지긋한 통화야 늘 있던 일인데, 왜 그렇게 한꺼번에 무너졌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어제따라 옛날 생각을 많이 하긴 했지.’

그게 다 곤돌라 때문이었다. 곤돌라에서 내려다본 세상이, 다락에서 내려다보던 세상과 겹쳐 보였다. 높이도 다르고 보인 풍경도 달랐는데 말이다.

“하아아!”

고개를 천천히 뒤로 꺾었다. 그리고 꺾자마자 온정과 눈이 닿았다.

“일찍 일어났네요?”

담담한 어투.

대니얼이 오른손을 들어선 까딱했다. 그러자 온정이 다가오다가 1.5미터쯤 떨어진 자리에 섰다.

“가까이 와.”

온정이 피식하고는 성큼성큼 스파 풀을 지나쳐 테라스 전창을 등지고 서선 대니얼을 응시했다. 거품이 요란해서 물속에 잠긴 알몸, 정확하게 말하자면 겨드랑이 아래쪽이 보일 일은 없었다.

대니얼이 빤히 쳐다보자 온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No.5 같네요.”

대니얼이 움찔했다.

“들었어?”

온정이 고개를 끄떡, 했다.

“어제 댄 연습하는 동안 CD 두 번 왕복했거든요.”

“고작 두 번밖에 안 들었는데도 벌써 No.5를 골라낼 줄도 알아?”

온정이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 표정을 지었다.

“24개나 되는데 그중에서 왜 No.5야?”

“예민해요. 다 예민한데 좀 더 예민해요.”

“No.5가?”

“No.5, 댄, 둘 다.”

대니얼이 천천히 한쪽 무릎을 세웠다.

“누나 씨는 예민해지면 어떻게 풀어?”

“바람 맞아요.”

바람이라.

“혹시 그제 패러글라이딩 캠프장도 바람 맞으러 간 거였어?”

“아! 네.”

“난 비 없고 눈 없는 그냥 바람은 별로던데.”

“비 있고 눈 있는 날은 거기 못 올라가요.”

대니얼이 ‘아!’ 하는 표정으로 눈썹을 치켜 올렸다가 내렸다.

“들어올래?”

그 말에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대니얼이 말을 이었다.

“누나 씨 들어와도 자리 남아.”

온정이 다가와 허리를 굽히며 풀에 손을 짚었다.

“미스터 대니얼 도.”

“댄.”

“미스터 대니얼 도.”

대니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유혹하기보다는 유혹당하는 쪽이죠?”

대꾸하지 않았다.

“본 건 많아요. 들은 것도 많고. 내가 틀려요?”

이번에도 대니얼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재능에, 외모에, 집안에 그 어느 것 하나 예사롭지 않다 보니 유혹이 숱했던 건 사실이었다. 은근한 제스처에서부터 노골적인 멘트까지 다가오는 방식도 다양했다. 하지만 이런 모양으로 유혹당해본 적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상황 자체를 만들지 않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왜? 싫으니까.

“물론 이 상황이 유혹이라는 건 아니에요. 그래 보이진 않아요.”

온정이 오른손을 뻗어선 물 위로 섬처럼 솟아 나와 있는 대니얼의 왼쪽 무릎에 가만히 얹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불쾌해지려고 하네요.”

‘무슨 뜻?’

“나를 여자로 보지도 않는 사람하고 물속에서 노닥거릴 만큼 궁하지는 않거든요.”

온정이 무릎에서 손을 뗐다.

“그런 말은 섹스하고 싶은 여자한테나 하는 거예요. 아무나 풀로 불러들였다가는 큰일 나는 수가 있어요.”

“섹스, 하고 싶다고 하면?”

온정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로 몸을 폈다.

“어제 우리 끌어안고 잤어요.”

“그런데?”

“그런데!”

온정이 대니얼의 옆으로 다가와선 손등으로 그의 볼을 쓸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미스터 대니얼 도의 페니스가 굉장히 얌전했거든요.”

대니얼이 움찔했다.

“아마 지금도 그럴걸요?”

그건 그랬다. 지금 섹스가 당기는 건 아니었다.

온정이 볼에서 손을 떼고는 대니얼 코앞으로 얼굴을 내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콧등과 콧등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미스터 대니얼 도.”

“댄.”

온정이 피식, 했다.

“좋아요. 댄.”

자신도 모르게 목울대가 꿀럭, 했다.

“댄의 몸이 뜨거워지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

온정이 몸을 세웠다.

“룸서비스 요청할게요.”

느릿하게 멀어지는 온정의 뒷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던 대니얼이 풀에서 벌떡 일어섰다. 훈김이 모락모락 일어나는 몸의 완만한 굴곡을 따라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그 상태로 풀을 벗어난 대니얼이 빠른 걸음으로 온정을 뒤쫓았다. 한 열 걸음 정도 이동했을까, 멀찍이에서 온정이 막 객실용 전화기를 집어 들려 하고 있었다.

“누나 씨.”

온정이 고개를 돌려 대니얼을 쳐다보고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

“궁하지 않다는 게 무슨 뜻이야? 남자 있어?”

대니얼은 자신이 지금 발가벗은 상태라는 자각이 없었다. 왜 이렇게 흥분이 되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아무튼 흥분이 됐다.

“남자 있냐니까?”

온정이 전화기에서 손을 떼고 똑바로 섰다. 동요 없이 아주 반듯하게.

“지금은 없어요.”

“지금은? 그럼 언제까지 있었는데?”

“1년 2개월 전까지 있었어요.”

‘1년 2개월? 그럼 총 몇 달이지? 그나저나 그 계산이 그렇게 바로 나온다고? 내내 세기라도 하고 있었어?’

대니얼이 온정을 향해 빠르게 다가갔다. 그러곤 코앞에 섰다.

“그럼 궁할 때 됐잖아. 왜 아니라고 뻗대?”

온정이 여지없이 피식했다.

“저기요, 댄.”

‘미스터 대니얼 도’를 거치지 않고 바로 나온 ‘댄’이 대니얼의 마음을 순식간에 안정시켰다.

“잠깐만요. 따라오지 말고 잠깐만 있어요.”

그 말만 두고 사라진 온정이 커다란 타월과 배스로브를 들고 나타났다.

“감기 걸려요. 우리 지금 10월 초 안에 있는 거 몰라요? 이러고 돌아다니다가는 병나요.”

그러면서 대니얼의 몸에 타월을 둘러주었다. 그제야 대니얼은 자신이 발가벗고 설쳤음을 깨달았다. 순간적으로 멍해진 대니얼을 흘깃하고는 온정이 상반신의 물기를 닦아준 후 배스로브를 입혀주었다. 이어서 허리끈을 예쁘게 묶어주며 빙긋, 웃었다.

“잘 생겼네요.”

대니얼이 ‘무슨 뜻?’ 하는데 온정이 대니얼을 끌어다 카우치에 앉히고는 타월로 머리를 감쌌다.

“댄.”

대니얼은 그냥 있었다.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나는 댄이 이곳에서 좋은 기억만 가지고 가기를 바라요.”

‘그건 또 무슨 뜻?’

하지만 온정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대니얼도 더는 말을 걸지 못했다. 뒤죽박죽 상태에서 말은 무슨 말.

***

대니얼이 ‘No.5 a minor Agitato’로 들어가자마자 온정이 호흡을 골랐다.

‘아지타토. 격하게, 급속히, 흥분해서. 격하게, 급속히, 흥분해서.’

날 밝을 무렵에 벌어졌던 일이 시간순으로 떠올랐다. 침착하게 대처하긴 했으나, 놀라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었다.

‘소년이었다가 남자였다가 어린아이였다가 어른이었다가…….’

대니얼의 뒷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베이지색 니트, 카키색 바지. 그리고 거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치렁치렁한 흑발.

…섹스, 하고 싶다고 하면?

…어제 우리 끌어안고 잤어요.

…그런데?

…그런데! 미스터 대니얼 도의 페니스가 굉장히 얌전했거든요. 아마 지금도 그럴걸요?

‘닳고 닳아 보였으려나?’

상관은 없었다. 닳아 보이든 쉬워 보이든 ‘나만 아니면 돼!’니까 말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자신이 여지를 준 것으로 느꼈다면 어쩌나, 그게 조금 걱정이었다. 게다가 ‘댄의 몸이 뜨거워지면 그때 다시 얘기해요.’라고까지 하지 않았던가.

‘말조심해야지.’

그때 대니얼이 활을 내리며 돌아섰다.

“누나 씨 계속 그렇게 서 있을 거야?”

“그러려고요.”

“왜?”

“댄이 서 있으니까요.”

대니얼이 ‘흠! 그럼 마음대로 해.’ 하는 표정을 짓고는 바이올린과 활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왼손을 주물렀다.

“내가 지금까지 24개의 카프리스를 몇 번쯤 연주했을 것 같아?”

“만 번?”

대니얼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머리가 텅 빈 상태에서도 손이 움직이지.”

“그렇겠네요.”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를 정말로 비워선 안 돼.”

“그 또한 그렇겠네요.”

“왜 그런 줄 알아?”

“글쎄요.”

대니얼이 온정에게 다가와 코앞에 섰다.

“그건 감정 없이 본능으로만 치르는 섹스와 다를 바가 없거든.”

단박에 이해가 갔다.

“그렇……겠네요.”

대니얼이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선 온정의 귓불을 가만가만 만졌다.

“그걸 알아듣는 대단한 귀들이 있다는 게 참 신기하지 않아?”

“그러네요.”

“누나 씨는 어느 쪽인데?”

“본능으로만 섹스를 치러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요.”

“그래?”

“네.”

“그렇다면 그 말은 곧 지난 14개월 동안 섹스가 전무했다는 뜻이네?”

섹스 이야기를 괜히 꺼냈다 싶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선 자연스럽지 않았던가.

대니얼의 손이 온정의 입술로 옮겨왔다.

“나하고 한 번 해볼 생각 없어?”

온정이 피식했다.

“궁한가 봐요.”

대니얼이 멈칫하더니 엄지로 온정의 입술을 꾹 눌렀다.

“그렇다고 치고.”

온정이 대니얼의 손목을 부드럽게 감싸선 입술에서 떼어냈다.

“댄.”

“거절하려고?”

“거절이라기보다는 일단 보류하죠.”

“보류?”

“네. 거절했다가 후회되면 내가 굽히고 들어가야 한다는 건데, 그건 싫어서요.”

대니얼이 한 발짝 물러서선 온정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웃음을 터뜨렸다.

“누나 씨 장난 아니네.”

온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휴식시간 아직 안 끝난 거죠?”

“왜? 화장실 참고 있었어?”

“그것도 그거고, 통화도 해야 해요.”

“아! 통화.”

“5분 뒤에 올게요.”

“1초만 늦어도 찾으러 나갈 거야.”

“혼자 돌아다니지 말아요. 이번 연주회 예매자 중에 미리 와서 숙박하는 분들이 제법 계시거든요. 눈에 띄면 곤란해질 거예요.”

“곤란해지면 누나 씨가 나타나서 구해줄 거잖아.”

“아버지한테 혼나요. 일 처리 흐릿하다고.”

대니얼의 안색이 싹 달라졌다. 달라져도 너무 확 달라져서 온정이 깜짝 놀라버렸을 정도였다.

“어떻게 혼나는데?”

온정이 말을 고르는데 대니얼이 틈도 주지 않고 되물었다.

“가둬? 굶겨?”

‘허!’

표현이 거칠고 어조가 험해서 그렇지, 지용은 자식들을 육체적으로 괴롭히는 아버지는 아니었다.

온정이 서둘러 대답했다.

“포효 알아요?”

“포효? 짐승이 울부짖는 거?”

“네. 우리 아버지는 화나면 포효하시는 분이거든요. 그러니까 나 좀 살려줘요.”

대니얼이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거나 시간 잴 거야. 4분 59초 안까지 돌아와.”

“그럴게요.”

온정이 바로 몸을 돌려선 연습실을 빠져나갔다. 숨을 고르며 휴대폰을 들고 지용의 번호를 눌렀다.

-어디냐?

“연습실이에요. 전화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아닌 게 아니라 대니얼이 연주하는 동안 몇 번이나 액정이 번쩍거렸다.

-컨디션은?

“괜찮아 보여요.”

-보이는 게 뭐야 보이는 게. 확실히 괜찮아야지.

온정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괜찮아요. 아침도 제대로 먹었고 산책도 꽤 했고 기분도…….”

-다른 요구사항 같은 건 없고?

“네.”

-도 회장이 엄청 까다로운 인물이야. 네 외할아버지보다도 지독하다면 말 다한 거지.

‘아! 그러고 보니 King이 도 회장님, 그러니까 댄 아버지셨나 보네.’

-이상한 말 안 들어가게 잘해.

“네.”

-혹시 룸 바꿔 달라고 하면 안 된다고 하고. 아래 급으로 내려보냈다가는 뒤집어지니까.

‘아!’

…룸 바꿀래요? 원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안 돼. 골치 아픈 일 생겨.

-이번 연주회가 단지 연주회뿐이기만 한 게 아니다.

“뭐가 또 있는데요?”

-관심 없다며?

순간적으로 온정이 머릿속을 뒤적였다. 하지만 딱히 나오는 건 없었다. 지용이 하는 말을 죄다 흘려버렸다는 자각이 들면서 내심 후회가 됐다.

“죄송해요.”

-장녀라는 게 애비 도울 생각은 안 하고 허구한 날 죄송 타령은. 집어치워 새끼야.

뚝.

“훠우!”

휴대폰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온정이 화들짝 놀라선 시간을 확인했다.

‘아까 나올 때 몇 분이었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온정이 부리나케 연습실 안으로 튀어 들어갔다.

“4분 57초.”

온정이 양팔을 쫙 펼치며 야구심판 자세를 잡았다.

“세이프!”

대니얼이 소리 내서 웃기 시작했다. 구김이라곤 없는 표정에 온정이 안심하며 대니얼에게 다가갔다. 이제 ‘No.6 g minor Lento’ 차례였다. 생각만 해도 몸속 세포가 개별적으로 떨렸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6 g minor Lento

사단조 느리게

차 문을 닫자마자 온정이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여기서부터는 걸어 올라가야 해요.”

“몇 분?”

“5분이면 돼요.”

“그럼 가.”

하지만 온정은 바로 발을 떼지 않았다.

“내일모레가 연주회에요. 정말 이러고 돌아다녀도 돼요?”

“그래서 돌아다니는 거야.”

“무슨 뜻이에요?”

“일정 없을 땐 하루 열 시간씩 연습만 하거든. 오히려 연주회 앞뒤가 나한테는 휴식이라고.”

하루 열 시간이라는 말에 온정이 경악했다.

“다른 연주자들도 그러고 살아요?”

“남이야 알 게 뭐야.”

대니얼이 온정을 지나쳐 앞서가기 시작했다. 온정이 기민하게 따라붙었다.

“열 시간인 이유가 있어요?”

“파가니니가 그랬대.”

온정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하나에서 열까지 다 파가니니처럼 살아요?”

“나는 나야. 내가 왜 다른 사람처럼 살아?”

“그럼 열 시간은 뭔데요?”

“킹의 명령이야.”

‘킹?’

온정은 대니얼의 휴대폰 액정에서 봤던 ‘King’을 생각해냈다. 그러니까 지금 대니얼은 자신의 아버지 도준수 회장의 명령으로 하루 열 시간씩 연습하느라 평소에는 ‘이러고 돌아다니지’ 못한다고 말하는 거였다. 스물여덟 살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습시간이 아버지에 의해 좌지우지되다니, 순간적으로 기막힘의 한숨을 쏟아낼 뻔했다.

“내년까지만이야.”

“내년이요?”

“서른이 되면 내 마음대로 하기로 했거든.”

생각보다 빠른 대니얼의 걸음에 온정은 거의 뛰다시피 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보폭의 차이가 너무 컸다.

“마음대로 뭘 할 건데요?”

“궁리 중이야.”

순간 대니얼이 발을 멈췄다. 그러곤 위쪽을 빤히 쳐다보았다.

“위에 사람 있어?”

“오다가 차 봤어요? 나는 못 봤는데.”

“나도 못 봤어.”

“그럼 없어요.”

대니얼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곧 패러글라이딩 캠프장에 도착했다. 정말 아무도 없었다.

온정이 숨을 크게 들이켜는데 대니얼이 여전히 빠른 속도로 낭떠러지를 향해 다가갔다. 온정이 대번에 긴장했다.

“댄. 그만 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아슬아슬한 자리에 멈추더니 고개를 뒤로 젖히며 양팔을 벌렸다. 대니얼의 기다란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온정은 바라보기만 하고 가까이 가지는 않았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그랬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것도 아주 몹시 욱신거렸다.

그때였다. 대니얼이 살짝 움직였다. 그것도 앞으로 말이다.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댄!”

온정이 바로 달려가 대니얼을 뒤에서 끌어안으며 몸을 반 바퀴 돌렸다. 그 자세 그대로 두 사람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대니얼을 부둥켜안은 채로 온정이 가쁜 숨을 몰아쉬는데 대니얼이 웃기 시작했다.

“떠밀어버린다던 사람이 누구였더라? 하하하하하!”

하지만 온정은 대니얼의 등에 고개를 붙이고 숨만 쉴 따름이었다. 천천히 웃음소리가 잦아들었다.

“누나 씨.”

대니얼이 일어나기 위해 몸을 꿈틀거렸다. 하지만 온정은 팔을 풀지 않았다.

“누나 씨. 놀랐어?”

온정이 거친 호흡을 뱉어냈다.

“누나 씨. 난 그냥…….”

온정이 서서히 팔을 풀고는 흙바닥에 누워버렸다. 아니 널브러졌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자세가 잡히지 않았다.

“누나 씨.”

대니얼이 몸을 일으켜 온정을 빤히 쳐다보더니 온정의 몸 위에 무릎을 꿇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릎은 땅 위, 엉덩이는 허벅지 위였다.

대니얼이 온정의 겨드랑이 바로 아래에 손바닥을 짚고 허리를 구부려 온정의 얼굴을 직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누나 씨.”

아무리 애써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손가락 끝이 곱아들고 발목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정말 그런 건 아닌데 기분이 그랬다.

대니얼이 흙 묻은 손으로 온정의 뺨을 감쌌다. 그러곤 이마에 이마를 댔다.

“미안. 장난이 심했다.”

가슴을 들썩이며 온정이 천천히 입술을 뗐다.

“나쁜 새끼.”

“미안. 정말 미안.”

“비켜.”

대니얼이 순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온정도 상체를 세웠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마주 앉은 자세가 되었다.

“미스터 대니얼 도. 내 몸에서 내려가세요.”

대니얼이 온정을 끌어안았다.

“잘못했어. 정말 미안.”

“미스터 대니얼 도. 저리 가.”

“용서해줘.”

“댄. 비켜주세요.”

“진심으로 사과해. 누나 씨. 용서해줘.”

온정이 다시 털썩, 하고 땅에 누워버렸다. 당연히 파란 하늘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대니얼도 그대로 땅바닥에 털썩, 하고 몸을 던졌다. 다리는 여전히 온정의 몸 위에 둔 채로 상체만 옆으로 내린 바람에 몸이 완전히 뒤틀렸지만, 대니얼은 상관하지 않았다.

“누나 씨도 패러글라이딩해?”

“날아다니는 데는 관심 없어요.”

“그럼 보기만 해?”

“네.”

대니얼이 상체를 돌려 온정을 쳐다보았다.

“바람이 왜 좋아?”

“바람이 좋은 게 아니라, 바람에 날아가지 않는 내가 좋은 거예요.”

“무슨 뜻?”

“바람 속에서 내 두 다리로 버티고 서있다 보면, 그게 안심이 돼요.”

대니얼이 팔꿈치로 땅을 딛고 온정을 비스듬히 내려다보았다.

“그럼 큰 바람만 신경 써? 작은 바람은 무시하고?”

온정이 대니얼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렇게 바람 크기 일일이 따져가면서 바람 맞지는 않아요. 그나저나 댄. 다리 좀 내려요.”

“아!”

대니얼이 온정의 몸에서 다리를 내림과 동시에 온정을 향해 몸을 더 기울였다.

“누나 씨.”

온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따가 시간 줄 테니까 짐 챙겨와.”

온정이 대니얼을 빤히 쳐다보았다.

“나 떠나는 날까지 같이 있어.”

한숨을 거하게 내뱉는 온정에게 대니얼이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었다.

온정은 어이가 없었다.

“연주회 다닐 때마다 이런 식으로 살아요?”

“누나 씨 같은 사람이 나온 적이 없어.”

“나만 다르게 봐준다고 폴짝거릴 나이는 아니에요.”

“폴짝거리라고 한 말 아니야. 물어보니까 대답한 거지.”

온정이 몸을 일으켰다.

“내 평판은 안중에도 없어요?”

“나하고 같이 있으면 평판이 엉망 돼?”

“내 말뜻 못 알아들어요?”

대니얼이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왜 헤어졌어?”

“네?”

“14개월 전에 왜 헤어졌냐고.”

“갑자기 그걸 왜 물어요?”

“다른 말 다 놔두고 평판이라기에 혹시 질 나쁜 인간한테 걸렸었나, 해서.”

온정이 숨을 몰아쉬는데 대니얼이 바로 말을 이었다.

“나랑 사귄다고 해.”

“네?”

“나하고 같이 있는 걸로 사람들이 수군거리면 내 애인이라고 하라고.”

온정이 다시 “네에?” 함과 동시에 대니얼이 일어섰다.

“우리 꼴 좀 봐, 누나 씨. 온몸이 다 흙투성이야.”

대니얼이 피식했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두 가지를 추측할 거야. 하나, 싸움질했구나. 둘, 섹스했구나.”

“사고는 선택지에 없어요?”

“없어.”

대니얼이 온정에게 손을 내밀었다.

“돌아가자, 누나 씨. 에스프레소 마셔야겠어.”

온정이 손을 밀어내고 그냥 일어섰다.

“순전히 자기 멋 대로지.’

대니얼이 소리 내 웃으며 온정의 팔을 잡았다. 온정은 그것까지는 그냥 내버려 두었다.

***

온정이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 앞에 차를 대자 강 실장이 달려와 조수석의 문을 열어주었다. 대니얼이 다리를 내리다 말고 운전석의 온정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 시간. 시간 잴 거야.”

“세 시간 달랬잖아요.”

“두 시간. 늦지 마.”

대니얼이 내려선 호텔 안으로 성큼성큼 움직였고 그 뒤를 강 실장이 따라갔다. 하지만 강 실장은 대니얼의 몇 마디에 이내 돌아왔다.

“따라오지 말래요?”

“예.”

“하아!”

“저, 본부장님.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물어볼 만 했다. 대니얼도 온정도 흙투성이니까 말이다. 특히 머리카락이 난리도 아니었다.

온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땅에 굴렀어요.”

휘둥그레지는 강 실장의 눈을 보고 온정이 바로 덧붙였다.

“다친 데는 없어요. 그냥 가볍게 굴렀어요.”

“혹시 패러글라이딩 캠프장 가셨습니까?”

“네.”

“미스터 대니얼 도께서 흔쾌히 응하셨습니까?”

“먼저 요청하던데요. 궁금하다고.”

“허!”

“왜요?”

“고소공포증이 있으신 것으로 압니다.”

“네? 그런 기미 전혀 안 보였는데요? 어젠 곤돌라도 탔어요.”

“예. 압니다. 그래서 잘못된 정보인가, 당황하는 중입니다.”

온정의 생각이 한가지 사실에 미쳤다.

“그래서 헬기도…….”

“예. 헬기, 경비행기, 절대 안 타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참고할게요. 틀린 정보인 거 알게 되면 공유도 할게요.”

“예. 그리고 부사장님께서 찾으십니다.”

“어디 계시는데요?”

“퍼팅 연습 중이십니다.”

“네. 들를게요.”

온정이 출발하려는데 강 실장이 차창을 똑똑했다.

“네. 실장님.”

“힘든 일은 없으십니까?”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댄이 저 괴롭히는 건 아닌지, 그걸 물으시는 거죠?”

“댄이라고 부르십니까?”

“네.”

강 실장이 고개를 갸웃하고는 말을 이었다.

“예. 성격이 보통이 아닌 분이시라 걱정이 됩니다.”

“잘 지내고 있어요. 걱정 마세요.”

“예.”

강 실장에게 환하게 웃어주고 차를 움직였다.

‘벌써 몇 분 지났는데 아버지까지 뵈면 늦지 않을까?’

한숨이 나왔다.

“하여간 엉덩이에 뿔 난 망아지도 아니고, 순 제멋대로야.”

골프하우스 쪽으로 들어서자 온정의 차를 알아본 직원이 허리를 공손하게 굽혀 인사하고는 수신호로 차 댈 자리를 안내했다. 어쩐지 초조해져선 부리나케 주차를 하고 인사를 건넨 후 안으로, 이어서 퍼팅 연습장으로 내달렸다.

지용은 금세 찾을 수 있었다. 193이나 되는 큰 키 덕분이었다. 빠르게 다가가자 지용이 고개를 들어 온정을 확인하고는 골프채를 내려놓고 천천히 다가왔다.

“뭐 좀 마시자.”

“시간 없어요.”

지용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뭔데?”

“댄이 기다려요.”

“댄? 설마 대니얼 그 친구 말하는 게냐?”

“네.”

지용이 약간 놀란 눈을 하더니 바로 옆의 의자에 몸을 내렸다.

“하나는 무릎 꿇리고 하나는 무릎 꿇고 그 북새를 떨더니 제법 친해진 모양이구나.”

“네.”

“또?”

온정이 고개를 갸웃했다. ‘또’라니? 무슨 또?

“하여간 말귀 어두운 거는 남매가 똑같아선. 따라다니는 동안 별일 없었느냐고.”

“네. 없었어요.”

“별일 없었는데 꼴이 그러냐? 흙바닥에서 싸움질이라도 했어?”

“미끄러졌어요.”

“혼자? 둘이?”

“둘이 같이요.”

“그 친구 손은?”

“무사해요.”

지용이 한숨을 내쉬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소파 쇼, 라고 들어봤냐?”

“그게 뭔데요?”

“예순둘이나 먹은 애비도 아는 걸 고작 서른셋 먹은 게, 하이고!”

지용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곤돌라 타고 산만 오르내리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것도 공부 좀 해. 속 터져서 원.”

온정은 가만히 있었다. 뭐라고 대꾸해봐야 노여움만 더 북돋을 뿐이었다.

“살롱은 아냐?”

“네.”

지용이 “쯧쯧!”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런 거다. 작은 공간에서 음악회를 여는 거지. 그리고 그걸 인터넷과 SNS로 전 세계에 보여주고.”

“아, 네.”

“관심 겹치는 사람들끼리 소소하게 모여서 노는 거야. 거대자본 이런 거 안 끼우고.”

온정은 이해했다.

“한데 그걸 도 회장이 하고 싶어 해.”

온정은 의아했다. 다국적기업의 회장이 건드릴 만한 사업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대놓고 말고 뒤에 숨어서. 순수 모임으로만 운영이 돼야 하니까.”

“돈이 돼요?”

“돈보다는 이미지지. 돈이 벌린다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고. 투자 개념이다. 너는 그 양반이 자선사업이라도 할까 봐 그런 걸 물어?”

온정은 납득했다. 그만한 기업의 자선사업은 자선사업이라고 간판 크게 걸고 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핵심은 그걸 나하고 같이 할 거란 거다.”

온정은 놀랐다. 지용이 음악 애호가인 건 알지만 그런 데까지 손을 뻗으려 할 줄이야.

“그러니 내 말은, 도 회장 신경 거스를 일 만들지 말란 뜻이다. 대니얼 그 친구가 갑자기 너를 왜 끌고 다니려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알아둔다고 해 될 인물도 아니니 친해 둬.”

“네.”

“도 회장이 워낙 쥐 잡듯 해놔서 그런지, 아편쟁이처럼 생긴 거하고는 다르게 사생활은 아주 깨끗한 모양이더라.”

아편쟁이에서 웃을 뻔했지만 온정은 웃지 못했다. 뒤이어 밀어닥친 놀라움 때문이었다. 문란까지는 아니어도 사생활이 적잖이 복잡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그러니 크게 염려할 것도 없고. 게다가 너보다 다섯 살이나 어리니까 훈정이 보듯 해.”

“네.”

잠시 잠깐의 침묵 후에 지용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온정아.”

“네.”

“애비 꿈이 뭔지는 알지?”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를 예 씨로 채우는 것.

“네.”

“이뤄질 거는 같으냐?”

솔직히 말하면 불가능했다. 온정도 훈정도 기업인 스타일은 아니었다. ‘곤돌라 사업본부’와 ‘스키 앤 보드 사업본부’가 그나마 조용한 쪽인 덕에 본부장 소리 들으며 살고 있지만, 다른 사업본부로 옮겨가라고 하면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네 외삼촌이…….”

거기서 지용이 말을 끊었다.

“됐다. 말 해봐야 입만 아프지. 속 터져서 원.”

죄송했다. 지용이 뿌듯해할 만한 자식이 아닌 것이,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 것이 죄송했다.

“그래서 내가 도 회장하고 이번 프로젝트를 잘하고 싶다고. 잘 되면 너한테 맡길 마음도 있고. 언제까지 산에서 살 거야?”

그렇게 들으니 마치 산 여인이라도 되는 것 같았다. 그 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그러니 대니얼 그 친구한테 잘해. 아들 대접이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 때려치우는 양반이 도 회장이니까.”

“네.”

“그렇다고 너더러 예지용 장녀로서의 자존심까지 내팽개치라는 뜻은 아니다. 그건 용납 못 해.”

그건 온정도 아는 바였다. 왜 이것밖에 안 되느냐고 소리 지르고 구박은 해도 다 안의 일이었다. 자식을 밖으로 끌고 나가 장사할 사람은 아니었다.

“요령껏 해.”

“네.”

“가 봐.”

“네.”

온정이 꾸벅, 인사하자 지용이 손을 대강 흔들고는 일어섰다.

“참, 리셉션 때 말이다.”

‘아! 거기도 가야 하는구나. 생각 못 했네.’

연주회가 끝나고 리셉션이 열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참석해야 한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은 터였다. 하지만 대니얼이 저렇게 나오는데, 무슨 수로 빠진단 말인가.

“신경 써. 아무거나 입고 돌아다니지 말란 뜻이다.”

“네.”

“새끼들. 하이고!”

골프채를 다시 집어 드는 지용에게 한 번 더 인사하고 퍼팅 연습장을, 이어서 골프하우스를 빠져나가며 휴대폰을 들고 대니얼의 번호를 눌렀다.

‘받지 마라. 그 핑계 대고 왕창 늦어버리게.’

하지만 고작 한 번의 신호 끝에 대니얼의 목소리가 들렸다.

-안 돼.

‘하!’

-절대 안 돼.

“한 시간만 더 줘요. 생각해 보니까 세차도 해야 해요. 시트 난리 났어요.”

-세차를 왜 누나 씨가 해?

“다른 사람이 내 차 만지는 거 싫어해요.”

대꾸가 없었다.

“댄.”

-그럼 50분 연장.

“50분은 또 뭐에요?”

-시간 잴 거야.

뚝.

“아우! 이걸 그냥.”

온정이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7 a minor Posato

가단조 조용하게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전용 카드를 대기도 전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더니 대니얼이 온정을 잡아당겼다.

“헉!”

문이 닫히지도 않았는데 대니얼이 온정을 모서리에 몰아붙이고는 팔로 가뒀다. 순간적으로 감시카메라가 떠올랐지만,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에는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일단은 마음을 놓았다.

“7분 지각.”

온정은 발끈했다.

“그래서 한 시간이라고 했잖아요. 한 시간 늘려줬으면 3분 일찍 온 거예요.”

“그건 누나 씨 계산이고. 내 계산은 7분 지각이야.”

그러는 동안 엘리베이터가 순식간에 움직여선 15층에 도착했다. 하지만 대니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온정을 뚫어져라 쳐다보기만 했다.

“안 내려요?”

“사과해.”

“내가 왜요?”

“늦었으니까.”

“난 약속한 적 없어요. 댄의 일방적인 통보였지.”

“약속이야.”

온정이 “이러…….” 했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러 뭐? 이런 나쁜 새끼?”

온정이 호흡을 골랐다.

“댄. 나 팔 아파요.”

대니얼의 시선이 그제야 캐리어를 든 오른팔에, 이어서 슈트케이스를 든 왼팔에 닿았다.

“뭐가 이렇게 많아?”

“칵테일 드레스 챙겨오느라고 가방이 하나 더 늘었어요.”

대니얼이 “드레스?” 하고는 가방 두 개를 뺏어 들고 엘리베이터를 벗어났다.

온정이 가만히 “후우!” 하고는 따라 나가며 말을 이었다.

“리셉션 때 입을 거예요.”

대니얼이 “아하!” 하고는 슈트케이스를 열었다.

“뭐 해요?”

“어떻게 생긴 드레스인지 궁금해서.”

온정은 기가 막혔다.

“다림질 맡겨야 해요. 살짝 구겨졌더라고요.”

대니얼이 슈트케이스에서 비닐 커버에 쌓인 칵테일 드레스를 꺼내선 높이 치켜들었다.

“와우!”

남다른 반응에 온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2년 전 창립기념 행사에 맞춰 고르고 고른 건데 보람이 느껴졌다.

‘이로써 지각 건은 패스.’

순간 귀가 쫑긋했다. ‘No.6 g minor Lento’가 막 끝나고 있었다. 실랑이하느라고 놓쳤는데 대니얼의 음반이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듣기도 하는구나. 그나저나 No.7 정말 마음에 들던데. 이제 곧 시작하겠네.’

생각이 끝나기가 무섭게 ‘No.7 a minor Posato’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아! 정말 좋아.’

그때였다.

“이런 거 또 있어?”

바이올린 소리에 끌려들어 가던 온정이 바로 정신을 차렸다.

“하나 더 있어요.”

“그건 어떤 건데?”

“새틴이라고 반짝거리는 천인데, 아주 파래요.”

“파란색 좋아해? 여기에도 파란색 꽃이 잔뜩 있는데?”

“좋아하는 색은 노랑인데, 나하고는 안 어울리더라고요. 아파 보인데요.”

“그래?”

“네. 파란색 입었을 때가 제일 예뻐 보인대요.”

“누가 그래?”

“네?”

“혹시 그 14개월 전…….”

“아니에요. 훈정이가 한 말이에요. 아, 훈정이는 내 동생이에요.”

“남동생?”

“네.”

“남동생이 누나 옷 색깔도 조언해줘?”

“내가 물어봤어요. 도통 못 고르겠어서.”

“숍에 같이 갔다는 뜻이야?”

“그런 데를 퍽이나 같이 가겠다. 이것저것 입고 사진 찍어서 보여주고 골라보라 했어요.”

“그래?”

“네.”

누가 들으면 꼬치꼬치 캐묻는 것이 질투라도 하는 걸로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속으로 실소가 터졌다.

그러는 동안 온정과 칵테일 드레스를 번갈아 쳐다보던 대니얼이 문득 싱긋 웃었다.

“내일 내 드레스 셔츠하고 같이 다려달라고 하면 되겠네.”

“셔츠만요?”

“어. 슈트는 연주할 때 걸리적거려서 싫어해.”

“알았어요. 아침에 내가 내려보낼게요.”

대니얼이 칵테일 드레스를 소파에 걸쳐놓고는 온정에게 다가왔다.

“그럼 이제 7분 지각한 벌 받아야지.”

‘아! 안 잊어버렸네.’

“내가 안 내려갔으면 8분이 흘러서야 만났을 테지만 1분은 깎아줄게.”

“너무 고마워서 눈물이 다 나네요. 그래서 벌은 뭔데요?”

“같이 자.”

순간적으로 움찔했지만 온정은 곧 평심을 되찾았다.

“어젯밤 같은 거 말하는 거예요?”

“어. 밀착, 아주 초밀착. 하지만 페니스는 얌전한 그런 거.”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요.”

순식간에 환해지는 대니얼을 보면서 온정은 뭔가 술렁이는 기분에 젖어 들었다.

‘한 번씩 이러네?’

뭐랄까. 24개의 카프리스가 No.1부터 No.24까지 랜덤으로 왔다 갔다 하는 기분이랄까.

“누나 씨?”

온정이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무슨 생각하는데 못 들어?”

“나 불렀어요?”

“두 번이나 불렀는데?”

“왜요?”

대니얼이 더 바짝 다가와 섰다.

“실은 안 불렀어.”

“허!”

“연주회 끝나면 곤돌라 한 번 더 태워줘.”

“아 참, 곤돌라.”

온정이 바로 물었다.

“댄 혹시 고소공포증 있어요?”

대니얼이 깜짝 놀라더니 온정의 어깨에 고개를 떨어뜨리고 키득거렸다.

“그런 거 없어. 높은 데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서워하는 건 아냐.”

“그럼 왜 그런 정보가 공식적으로 들어와 있는 걸까요?”

“내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속으로 물음표를 만드는데 대니얼이 고개를 들고는 온정을 껴안았다.

“그런 거라도 있어야 킹한테 덜 끌려다니거든. 안 그러면 내 몸이 안 남아나.”

단박에 이해가 갔다.

“도 회장님이 댄 앵벌이 시키세요?”

“어.”

이해가 안 갔다. 다국적기업의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돈이 없는 것도 아닐 텐데 왜? 혹시 자랑하고 싶어서? 고작 어깨에 힘이나 주려고 그런다고?

“그러니까 포장 잘해줘.”

“미리 말했어야죠.”

“잊어버렸어. 대외적으로 내가 그런 사람인 거 잊어버렸다고.”

안쓰러움이 밀려왔다.

“누나 씨. 나 불쌍하지?”

망설여졌다. 그렇다고 할 수도 안 그렇다고 할 수도 없었다.

“불쌍하잖아. 이 나이에 아버지한테 끌려다니는 거.”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아버지한테 끌려다니는 중이라서요. 그 점에 대해선 딱히 할 말이 없네요.”

“아!”

대니얼이 팔을 풀고는 온정에게 시선을 맞췄다.

“우리 나중에 연대할까?”

“반부친연대요?”

대니얼이 “푸하하!”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정의 가슴에 뜨거운 물이 샘솟았다.

“어? 누나 씨?”

‘왜?’

“누나 씨 눈에 측은지심이 가득 들었는데?”

측은지심. 가엽게 여기는 마음.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어쨌거나 온정은 다정한 미소로 하던 말을 이었다.

“연대장은 내가 해요.”

대니얼이 몸을 흔들며 웃기 시작했다.

***

어제 입었던 검은색 민소매 티와 짧은 반바지 차림의 대니얼이 침대에 ‘큰 대’ 자로 누워있었다. 온정이 도로 밖으로 나가선 맞은편 방의 조명을 흐릿하게 조절했다.

“댄.”

“어?”

“혹시 어두운 거 싫어해요?”

“가끔. 지금은 누나 씨 있으니까 완전히 어두워도 괜찮아.”

하지만 온정은 불빛을 아주 내리지 않았다. 실루엣 정도는 확인이 가능할 정도로 맞추고 다시 침실로 향했다.

온정이 침대로 다가가자 대니얼이 몸을 굴려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누워 있을 때 댄이 들어오는 건 별 무리가 없었는데, 먼저 누워 있는 댄 옆으로 내가 들어가는 건 참 어색하네.’

심호흡을 하고 침대를 빙 돌아 위로 올라갔다. 이불을 들치고 몸을 밀어 넣자마자 대니얼이 온정 쪽으로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으아! 어색하다니까?’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숨이 새어나갔다.

“누나 씨.”

“네?”

“방금 전 누나 씨 숨소리 굉장히 섹시했어.”

“땡큐요.”

푸스스…… 하는 대니얼의 옅디옅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바로 누워 이불을 끌어 올렸다.

“누나 씨. 나 옆으로 간다?”

“네.”

대니얼이 꿈틀꿈틀 다가와 온정을 끌어안았다.

‘후! 어떡하지? 잠 못 잘 거 같은데?’

그랬다. 하루 만에 뭐가 이리 다른지 어안이 벙벙할 노릇이었다. 설상가상 대니얼이 다리를 뻗어선 온정의 하체를 덮으면서 온정은 더 긴장해버렸다.

“누나 씨.”

착 가라앉은 목소리.

“네.”

“나 왜 받아줘?”

“나도 그게 의문이네요.”

“누나 씨 생각에도 받아주긴 받아준다는 거네?”

온정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 누나 씨. 어디까지 더 받아줄 수 있어?”

온정이 고개를 돌려 대니얼을 쳐다보았다. 불빛이 흐린 데다 그마저도 역광이라 눈빛이며 표정이며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질문이 그래요?”

“대답해 봐. 어디까지 받아줄 수 있어?”

“댄.”

순간 대니얼이 부드럽게 입술을 포개왔다. 온정은 밀어내지 않았다.

‘아니지. 밀어내지지 않아서 밀어내지 못하는 거지.’

혀는 가만히 둔 채로 입술만 오물거리는 대니얼의 소소한 입맞춤이 온정의 긴장을 서서히 풀어주었다. 잠시 후 대니얼이 온정의 볼을 감싸 쥐는 동시에 입술이 떨어졌다.

“여기까지는 통과.”

다시 입술이 다가왔고 뒤이어 혀가 입 속을 파고들어 왔다.

아! 이렇게나 조심스러운 움직임이라니. 이렇게나 정중한 혀가 다 있다니. 아편쟁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퇴폐적으로 생긴 남자의 혀가, 뭐가 이렇게 예의 바른지.

온정이 팔을 뻗어 한 손으로는 대니얼의 뒤통수를 쓰다듬고 다른 한 손으로는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대니얼이 몸을 완전히 일으켜선 온정의 몸 위로 올라와 부둥켜안았다.

‘아! 반응한다.’

그랬다. 대니얼의 중심에서 단단한 입체감이 전해져왔다. 하지만 대니얼은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대놓고 비빈다거나 문지른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혀만 움직일 따름이었다.

온정이 대니얼을 꽉 끌어안고는 몸을 굴려 자리를 바꿨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떨어졌고, 그 틈을 타 온정이 물었다.

“어디까지 받아주면 돼요?”

대니얼이 온정의 팔을 쓰다듬었다.

“말하면, 들어는 줄 거야?”

“들어보고.”

“가슴.”

“가슴?”

“누나 씨 가슴, 거기까지.”

“그거면 돼요?”

“지금은. 지금은 그거면 돼.”

온정이 실내복 상의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만난 지 이틀밖에 안 돼서 가슴을 드러내는, 그것도 적극적으로 드러내는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건 가늠하고 자시고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상의를 완전히 벗어 발치로 던지고 몸을 살짝 밀어 올렸다. 그러곤 대니얼의 얼굴에 가슴이 닿도록 자세를 잡고 침대 프레임을 손으로 움켜잡았다.

순간, 대니얼이 온정의 가슴을 덥석 물었다. 물린 건 가슴인데 전기는 중심을 관통했다.

“흣!”

대니얼이 온정의 맨 등을 어지러이 어루만지며 젖꼭지를 부지런히 탐했다. 몸 중심의 경련이 조금씩 심해지고, 그러는 동안 대니얼의 호흡도 점점 거칠어졌다.

온정이 침을 삼켰다.

‘아! 하고 싶어.’

그랬다. 진심으로 섹스가 하고 싶었다. 이렇게나 몸이 욕망으로 뜨거워 본 적이 있었던가.

두 번의 연애가 있었지만 담백하기만 했었다.

첫 번째 연애는 동갑내기에 똑같은 성향의 것들끼리 만나 쏘다니기 바빠 육체관계는 뒷전이었다. 한 마디로 노느라 정신이 없었다.

두 번째 연애는 상대가 원체 조심스러워 했다. 상간녀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에 걸맞은 엄청난 섹스라도 있었을 것 같지만, 첫 번째보다 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겉으로만 보면 사실혼 관계의 아내와 생때같은 자식 두고 불륜에 빠진 쓰레기였지만, 속으로는 계획적인 임신으로 발이 묶여 날로 피폐해지다가 온정에게 간신히 마음 붙인 나름 우여곡절 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전부 나중에 알게 된 내용이었다.

그러한 연유로 온정은 이런 몸의 욕구가 너무도 낯설고 버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쩜 이리도 능숙한 여자인 것처럼 움직여지는지.

“하아아!”

온정은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팬티가 얼마나 젖었는지, 자신의 중심이 얼마나 몸부림치는지.

“댄!”

이름이 뜨겁게 불려서일까. 대니얼이 갑자기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온정의 젖꼭지를 입에 문 채로, 팔은 여전히 온정을 부둥켜안은 채로 다리를 마구 침대에 문질렀다. 그러다 침대 헤드를 꽉 잡은 온정의 손을 잡아 내려선 숨도 못 쉴 정도로 꼭 안고 힘을 주었다.

단거리 달리기라도 한 듯 가슴을 들썩이던 두 사람이 조금씩 안정을 찾아갔다.

“하아, 바지 척척해.”

대니얼의 한숨 섞인 발언에 온정이 피식했다. 자신도 팬티가 척척했다.

“옷 갈아입기 귀찮은데 나 그냥 벗고 잔다?”

“마음대로 해요.”

“누나 씨도 그냥 자.”

그 말에 온정이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벗고는 바지만 도로 입었다. 그러곤 상의도 챙기지 않고 그냥 누워버렸다. 그로써 두 사람은 공평해졌다. 한 사람은 아래가 없고 한 사람은 위가 없으니까 말이다.

대니얼이 온정의 겨드랑이에 고개를 대고 팔로 온정을 감쌌다.

“누나 씨.”

“네.”

“괜찮지?”

‘아니. 안 괜찮아. 하고 싶어 죽을 것 같아.’

“안 도망갈 거지?”

“네.”

대니얼이 온정의 품에 파고들었다.

온정이 눈을 끔벅거렸다.

‘이 기분 뭐라 그래야 하지?’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다. 엄청난 일이 지나간 것 같은데, 바람으로 치면 돌풍이 지나간 건데, 과연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

하지만 지금은 밤이었다. 빛 같지도 않은 흐린 불빛만 번지다 만 캄캄한 밤이었다. 그리고 그런 밤은 이성적인 생각이 불가능했다.

…누나 씨. 괜찮지?

‘그러게. 나 진짜 괜찮겠지? 내일 괜찮겠지? 아니 앞으로도 전부 괜찮겠지?’

무의식적인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갔다. 그러자 대니얼이 온정에게 더 밀착해왔다. 그리고 속삭였다.

“누나. 자.”

누나. 마르고 닳도록 들은 ‘누나’였다. 훈정의 누나니까 말이다. 그런데 왜 이 ‘누나’는 다를까. 마음에 멀미가 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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