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D-3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2 b minor Moderato
나단조 보통 빠르게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의 ‘곤돌라 사업본부’는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 3층에 자리하고 있지만, 본부장 온정은 나왕산 꼭대기에 자리한 통나무 사무실 뒤의 코딱지만 한 별채에 상주했다. 본채는 곤돌라를 관리하고 운영하는 직원들의 공간이기 때문에 되도록 별채에서 거의 모든 일을 해결했다.
당연히 오늘도 온정은 곤돌라를 타고 다른 직원들과 함께 산꼭대기로 이동했다. 정식 운행 시간은 아니지만 직원들을 위해 아침에 두 번 따로 운행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온정이 탄 곤돌라는 두 번 운행하는 곤돌라 중에서 첫 번째였다.
곤돌라가 도착하자 온정이 1번으로 내렸다. 그러자 함께 타고 올라온 카페 점장 윤명수가 바로 따라왔다. 곤돌라 정거장 바로 옆에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에서 직영하는 커다란 카페가 있는데, 바로 그곳을 책임지고 있었다. 산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굉장히 도시적인 스타일의 남자로 온정과 똑같이 서른세 살이었다.
“본부장님. 제 커피 드십니까?”
“언제는 안 마신 것처럼 그래요?”
윤 점장이 빙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어제 바람이 엄청나서 산에 갇히는 줄 알았습니다.”
“걸어 내려가면 되잖아요.”
“어우! 그러느니 산장에서 하루 자고 맙니다.”
날씨 변화가 요지경인 산속인 관계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비상식량이 가득한 산장이 카페 뒤쪽에 숨어 있었다. 평소에도 직원들이 휴식을 위해 뻔질나게 드나드는 곳이기도 했다.
“밖에 나가셔도 운행 끝나기 전에 한 번은 들르시더니 어제는 안 보이셨습니다.”
“아! 누구 때문에 붙들려서 시간을 놓쳤어요.”
“누구요?”
온정이 피식, 했다.
“되도 않게 까부는 누구요.”
윤 점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서 혼내셨습니까?”
온정이 더 크게 웃었다. 그러는 동안 윤 점장이 열쇠로 문을 열고 온정을 먼저 들여보낸 후 조명부터 켰다. 그러곤 부리나케 손만 씻고는 바로 온정의 커피부터 준비했다.
“일찍 움직이는 거 안 힘드십니까? 계시는 데서 여기까지 거리가 제법 된다면서요.”
“그래봤자 30분이에요. 그리고 여기가 마음 편해요.”
윤 점장이 또 빙긋, 웃었다.
이후로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잠시 후 윤 점장이 공들여 내려준 커피를 들고 별채로 향했다. 그런 온정의 눈에 본채 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포스터가 들어왔다. ‘대니얼 도 바이올린 독주회’를 알리는 포스터였다.
‘하아! 내가 좀! 그러긴 했지. 그렇다고 저도 똑같이 좀! 그러면 어떡해.’
그랬다. 좀 그랬다.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 정문에 내린 이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대니얼이 좀 그랬고, 그렇다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한 자신도 좀 그랬다.
‘찾아보니까 훈정이보다도 어리던데.’
훈정은 온정의 남동생으로 서른한 살인데 ‘스키 앤 보드 사업본부’ 본부장을 맡고 있었다. 같은 낙하산이라도 학생 때 꽤 유명한 스키 선수였던 훈정이 일반 문과 출신의 온정보다는 대외적 입장이 좀 나은 편이었다.
‘스물여덟이 뭐야, 스물여덟이. 서른도 안 된 아가더러 뭘 바라고 그랬다니, 온정아.’
쏟아지려는 한숨을 도로 삼키며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하아! 숲 냄새.”
숲에서보다 별채에 있을 때 숲 냄새가 더 짙다니, 아이러니였다.
백팩을 내려놓고 창가로 갔다. 창문을 전부 열고 방충망 사이로 밖을 내다보며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어쩜 말을 한마디도 안 하냐고.’
첫인상이 딱 ‘퇴폐’여서 느물거리거나 질척거릴 줄 알았더니 차에서 어찌나 싸가지 없이 굴던지 볼따구니라도 꼬집고 싶었다. 그런데 호텔에 도착해 잠시 따라다녀 보니 그땐 또 영화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미남 뱀파이어 같았다. 등허리까지 내려온 새카만 머리카락 때문에 더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었다.
‘모르겠다. 내가 신경 쓸 일도 아니고.’
그때였다. 가방 안에서 휴대폰 진동 소리가 요란하게 새어 나왔다.
‘이 시간에 누구야?’
그러게 말이다. 이제 겨우 8시 반인데 부지런도 하지.
가방을 뒤적뒤적해 휴대폰을 꺼내 보니 발신자가 아버지였다.
‘하아! 아침부터 또 어인 일이신지.’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대자마자 고함이 들려왔다.
-내려와, 새끼야.
귀에서 휴대폰을 뗐다가 심호흡을 하고 귀에 다시 댔다.
“무슨 일이신데요?”
-무슨 일? 그걸 몰라서 물어?
“네. 몰라요.”
-그럼 내려와서 들어, 새끼야.
뚝.
“훠우!”
똑바로 서서 커피를 마저 넘기는데 휴대폰이 다시 진동했다.
강두식 실장
바로 받았다.
“네. 실장님.”
-저…….
“말씀하세요.”
-미스터 대니얼 도께서…….
‘아하!’
-연주회 엎으신다고.
‘허쭈!’
-본부장님이 직접 무릎 꿇고 사과하셔야 진행하신다고.
“네.”
-예?
“꿇죠 뭐. 제 무릎 저렴해요.”
-본부장님.
“실장님도 아시잖아요. 아버지 앞에서 하도 꿇어서 제 무릎 싸구려 된 거.”
조용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여전히 조용한 휴대폰을 내리고 다시 창가로 향했다.
‘까짓거.’
커피를 넘겼다.
그때였다. 또 진동이었다.
예훈정 본부장
“어.”
-누나 대니얼 씨한테 뭐 사고 쳤어?
“음, 좀?”
-좀? 누나는 좀인데, 그 자식은 왜 좀보다 더 지랄이지?
온정이 깔깔거렸다.
-미친놈 아니야, 그거? 그게 이 아침에 아버지뻘 되는 부사장님한테 전화해서 할 소리야?
“뭐라고 했는데?”
-따님을 굉장히 잘 키우셨다 그랬대.
온정이 또 깔깔거렸다.
“잘 키우신 건 맞잖아.”
-스틱으로 패버릴까? 보드가 나으려나? 어제 얼핏 보니까 풀 스윙 한 번이면 그 자리에서 바스러지게 생겼던데.
“하하하하하!”
하여간 사람 치는 건 장난으로도 못하면서 말만큼은 늘 험했다.
-웃음이 나와?
“너무 나와. 하하하하!”
-헛 참 나!
“들어가. 누나가 알아서 할게.”
-그나저나 연주회인지 뭔지 빨리 끝나야지. 나 아버지랑은 진짜 같이 못 있겠어.
아버지 지용은 어머니 희경과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중간중간 한 번씩 내려오는데, 이번엔 ‘대니얼 도 바이올린 독주회’ 일정 때문이었고 언제나처럼 훈정이 살고 있는 집에 짐을 푼 터였다. 호텔에서 묵어도 되는데 굳이 말이다. 온정은 30분 거리 밖에서 따로 살고 있었다. 훈정의 여자친구 서린이 남매가 한집에 사는 걸 ‘몹시’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조금만 참아. 연주회 끝나면 곧 올라가실 테니까.”
-다른 사람한테 조금이 나한테는 조금이 아니니까 그러지. 하, 알았고. 아무튼 일 커질 것 같으면 말해.
“어.”
휴대폰을 내렸다. 그러곤 남은 커피를 마저 비웠다.
“자, 그럼 무릎 꿇으러 갑시다.”
말은 그렇게 해놓고도 온정은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은 타고 내려갈 곤돌라가 없었다.
***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도 누구 하나 알아채지 못할 밀폐된 방음의 공간 정중앙에 반듯하게 선 채로 대니얼이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스 중 두 번째 곡으로 들어갔다. ‘b minor Moderato’ 그러니까 ‘나단조에 보통 빠르기’로. 대니얼은 평소 이 부분을 조심스럽게 걷는다고 생각하며 연주했다.
먼저 오른발의 뒤꿈치를 가볍게 땅에 찍고, 이어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발바닥을 부드럽게 민 다음, 발가락 전체에 골고루 힘을 실은 상태에서 주의를 기울여 떼는 동시에, 왼발의 뒤꿈치를 가볍게 땅에 찍고…… 그렇게 걷는 식.
그러니까 대단히 조심스러운 상황에서 몹시 조심스러운 사람에게 굉장히 조심스러운 마음가짐으로 다가갈 때처럼 조심조심, 또 조심조심. 물론 속도는 달랐다. 조심스럽다는 게 꼭 느린 걸 의미하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2분 51초 동안 조심스럽게 걷고 나서 눈을 떴다. 그러자마자 온정과 눈이 마주쳤다.
대니얼이 천천히 활을 내리고, 이어서 바이올린도 내렸다. 저절로 차렷이 되었다.
그러자 온정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대니얼은 당황했다.
‘진짜 꿇었어.’
멱살이라도 잡힐 줄 알았다. 정강이라도 걷어차일 줄 알았다. 그런데 정말로 무릎을 꿇다니.
순간적으로 대니얼이 주변을 살폈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기 위해 저러나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없었다. 단 둘뿐이었다.
“미스터 대니얼 도. 마음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적당히 실랑이 좀 하다가 적당히 사과를 받은 후 적당한 협상 끝에 따라다니게 만들 계획이었다. 그것은 온정이 이렇게 나올 때에 대비한 대처방안이 자신에게 없다는 뜻이었다.
‘불편해.’
그랬다. 미동 없는 온정이 불편했다. 꿇은 무릎에 거짓이 없어 보여서 더 불편했다. 상대의 행동이 진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 좋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왜 계속 불편하고 난리지? 젠장! 빌어먹을, 제기랄, 젠장!
대니얼이 온정에게 다가가 바로 앞에 섰다. 그러곤 천천히 활을 들어 온정의 왼쪽 어깨를 세 번 쳤다. 쳤다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약하게 정확히 세 번.
“사했음.”
그리고 덧붙였다.
“일어나요.”
온정이 바로 일어나 똑바로 서자 대니얼이 입꼬리를 한쪽만 올리고 말했다.
“낙하산 씨 아니랄까 봐 엄청 쉽네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온정이 대니얼의 눈을 응시했다. 대니얼도 똑바로 마주 응시했다. 불편하다고 해서 바로 한발 물러서는 성격은 아닌 까닭이었다.
온정이 입을 열었다.
“하루 종일 따라다니는 건 곤란해요.”
‘그래도 따라다니긴 한다는 거군.’
“나도 내 일이 있고…….”
“그건 상황 봐서.”
온정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상황 봐서요?”
대니얼이 씩, 웃었다.
온정이 어깨를 으쓱했다.
“상황. 좋아요. 그럼 미스터 대니얼 도! 우리 일정부터 얘기할까요?”
“댄. 댄이라고 불러요.”
온정이 “흠!” 하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댄. 오늘이 D-3이에요.”
온정이 무어라, 무어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 대니얼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가 온정의 무릎에 닿았다. 검은색 진의 무릎께에 무언가가 묻어 있었다. 바닥이 아무리 깨끗해봤자 바닥은 바닥이니 먼지라도 묻었으리라.
‘진짜 꿇었다고.’
다시 생각해도 놀라웠다.
‘정말 꿇을 줄은 몰랐다니까?’
당황스럽고 놀랍기만 했는데, 뒤늦은 충격이 온몸을 강타해왔다. 그러니까 그냥 당황스럽고 그냥 놀라는 거 말고 극심한 자극 말이다.
‘내가 여자를 무릎 꿇렸어. 이렇게 깨끗하게 생긴 여자한테 먼지를 묻혔다고.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천재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도가 그런 허접한 짓을 했다고.’
부모님이 알면 뒤로 넘어갈 일이었다. 아버지 도준수와 어머니 나디아 쇼Nadia Shore, 그 두 사람이 알면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둥그렇게 뜰 일이었다. 두 사람에겐 타인에 대한 예의가 넘치니까 말이다.
‘하아!’
대니얼이 천천히 시선을 되짚어 올라왔다. 그러다 멈췄다. 어제와 똑같은 초콜릿색의 야상이 이제야 눈에 잡혔다.
“낙하산 씨.”
“네?”
“외박했어요?”
“네에?”
대니얼이 온정에게 다시 눈을 맞췄다.
“어제랑 옷이 같아요.”
온정이 입을 벌리고 대니얼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산에선 이 옷이 편해서요.”
“외박은 아니다?”
온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눈을 반만 뜨고 다니시나 봐요. 속에 입은 옷은 어제하고 다르거든요?”
“속?”
온정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감이 이상했다.
“안이요, 안. 안에 입은 셔츠하고 바지는 다르다는 뜻이에요.”
“그랬나?”
온정이 손을 뒤통수로 뻗어선 머리칼을 헝클어뜨리기라도 하듯 마구 문지르더니 말을 이었다.
“저기 미스터 대니얼 도.”
“댄.”
“아! 댄. 내가 하는 말 안 들었죠?”
“말했어요?”
온정이 “헙!” 하더니 대니얼에게 바짝 다가왔다.
“무릎 한 번 더 꿇을게요.”
대니얼이 갸웃했다.
“무슨 뜻?”
“선 무릎, 후 주먹.”
대니얼이 바로 물러서며 “아니!” 했다.
그러자 온정이 활을 쥔 대니얼의 오른팔을 잡고는 바로 앞에 섰다. 자연스럽게 대니얼이 온정을 내려다보는 자세가 되었다.
“저기 댄.”
대니얼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온정의 얼굴이 굉장히 매혹적이었다. 특히 속눈썹이 그랬다. 손가락으로 한번 쓸어보고 싶을 정도로 길고 까만 속눈썹이었다. 곱상하게 생긴 소년이라고? 아니, 더할 나위 없는 여자의 얼굴이었다.
‘줄 하나 안 그었는데도 굉장히 매력적이야.’
그랬다. 줄은 무슨 줄. 온정은 완전한 민낯이었다.
온정의 얼굴에 한눈을 팔고 있는 사이, 온정이 입을 열었다.
“우리 평화적으로 지냈으면 해요.”
“평화적으로!”
“네. 우호적이고 호의적으로.”
대니얼이 어깨를 으쓱하고는 대답했다.
“그럽시다.”
그러곤 바로 말을 이었다.
“그럼 우호적이고 호의적인 평화 관계를 위해서 낙하산 씨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뭐겠어요?”
온정이 대니얼의 팔을 놓았다.
“당장 들을게요. 파가니니의 24개 카프리스. 댄의 음반으로 들을게요.”
“눈치가 밝아서 좋네요. 또 하나. 이번 연주회 마치기 전까지는 일렉트릭 기타 금지.”
“그럴게요.”
대니얼이 활을 왼손으로 넘겼다. 그러곤 오른손을 온정의 어깨에 올렸다.
“혹시 아버지한테 혼났어요?”
“네.”
“예지용 부사장님은 딸을 혼낼 때 어떤 식으로 행동해요?”
“그게 왜 궁금해요?”
‘가둬? 굶겨? 아, 그러기엔 이제 딸이 너무 큰가?’
온정이 대니얼의 팔을 살짝 잡아선 내려놓았다.
“연습 더하실 거죠?”
“당연.”
“언제 모시러 오면 될까요?”
“아!”
잠깐의 생각 후에 대니얼이 입을 열었다.
“세 시간쯤 후에 방 밖에 있어요.”
“다른 필요한 거는요?”
“내가 연습 마치고 나갈 때까지 방해만 안 하면 돼요.”
“아, 죄송해요. 아까 제가 그랬죠.”
“그건 예외. 무릎 꿇으러 온 거니까.”
“성은이 망극하네요.”
대니얼이 시원스레 웃음을 쏟아냈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폭발했던 신경질이 놀라우리만치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3 e minor Sostenuto-Presto
마단조 무겁게-매우 빠르게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 3층 복도를 온정이 타박타박 걸어갔다. 그러다 이내 한 방 앞에 멈췄다.
홍보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여니 온정을 발견한 직원들이 동시에 기립했다.
‘이래서 내가 이 건물에 오는 게 싫어.’
온정이 활짝 웃었다.
“대니얼 도 이번 연주회 음반, 어느 분이 가지고 계시나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젊은 남자가 튀어왔다.
“찾아 드리겠습니다, 본부장님.”
온정이 고개를 끄덕하고는 웃음을 머금은 채로 손을 흔들었다.
“저 신경 쓰지 마시고 일하세요.”
그 말에 다들 쭈뼛쭈뼛하며 자리에 앉았다.
‘빨리 나가고 싶다.’
그때 칸막이 뒤로 사라졌던 젊은 남자가 손에 CD케이스를 들고 나타났다.
“여기 있습니다, 본부장님.”
“고마워요.”
“아닙니다.”
온정이 바로 몸을 돌려선 방을 빠져나와 문을 닫았다.
“후우우!”
일단 한숨부터 흘린 온정이 CD케이스를 들어 눈에 댔다.
“와우!”
또 다른 분위기의 대니얼이 케이스의 앞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러니 팬들이 난리지.’
기다란 머리를 자연스럽게 늘어뜨리고 정면을 응시한 흑백사진인데, 배우 저리가라였다. 동서양의 아름다움만 모아놓은 외모라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마주하고 있었는데, 그땐 실랑이하는 데 온통 신경이 가 있는 바람에 자각하지 못한 바였다.
‘티켓 푼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전석 매진이라니. 울트라 티켓 파워!’
<오디세이 아트홀>은 결코 작은 규모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가 접근성이 높은 곳도 아니었다. 뿐이랴. 꽃놀이, 단풍놀이, 눈놀이 시즌도 아니고 스키, 워터파크 시즌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순식간에 매진이었다. 당연히 ‘대니얼 도 바이올린 독주회’ 앞뒤로 호텔숙박 예약 또한 가파르게 증가했다.
‘아무튼 아버지도 대단하시지.’
그랬다. 이게 다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의 부사장인 지용이 잡아 온 일정이었다. 뭘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한 번 ‘모시려면’ 삼고초려가 기본이라는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도를 한 번에 데려왔으니 말이다.
온정이 케이스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나저나 누굴 잡아먹으려고 눈빛이 이래.’
한겨울에 꽝꽝 언 빙판 위에서나 발견함 직한 쨍쨍한 눈빛이었다.
‘연주할 땐 이렇다는 거겠지? 아까는 눈을 감고 있어서…….’
온정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조금 떨어진 방으로 향했다.
곤돌라 사업본부
손잡이를 잡고 “후!” 하고는 휙 잡아당김과 동시에 외쳤다.
“일어나지 마세요! 신경도 쓰지 마세요!”
그러곤 사람들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손만 흔들어주고는 ‘본부장실’이라고 써진 방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곤 쏜살같이 들어가선 문을 닫은 후 블라인드 틈으로 밖을 확인했다. 직원들의 시선이 본부장실에 쏠려 있었다.
‘아우! 이래서 여기 오기 싫다고.’
온정이 어깨를 늘어뜨리며 “후!” 하고는 오디오의 전원을 누르고 CD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헤드셋을 연결하고 오디오 앞에 섰다. 그러자마자 곡이 흘러나왔다.
온정이 케이스에 끼워진 속지를 빼내 펼쳤다.
No.1 E major Andante 1:55
귀에 집중했다.
‘낯설어.’
그랬다. 음표가 뜨겁게 엉겨 붙어 뒹구는 것 같은 일렉트릭 기타 소리만 듣다가 냉정하리만치 깔끔한 바이올린 소리를 다이렉트로 들으려니 어색했다.
음악은 곧 다음으로 넘어갔다. 온정이 다시 확인했다.
No.2 b minor Moderato 2:51
그러다 ‘아!’ 했다. 아까 연습실에서 들은 부분이었다.
무릎을 꿇든 머리를 박든, 대니얼의 마음을 한 시간 내로 돌려놓지 않으면 별채를 폐쇄해버리겠다는 지용의 협박에 앞뒤 재지 않고 문부터 열었다가 환상적인 바이올린 소리에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움직였는지. 살얼음 위를 걷기라도 하듯이 살살, 조심조심.
‘그러고 보니 No.2 이 부분도 조심조심, 그런 분위기였는데.’
많이 듣지는 못했다. 대니얼의 맞은편에 반듯하게 서서 대니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1부터 10 정도까지 세니 연주가 끝나버린 까닭이었다.
음악이 다시 다음으로 넘어갔다.
No.3 e minor Sostenuto-Presto 2:39
‘Sostenuto-Presto? 프레스토는 매우 빠르게라는 뜻인데 앞에 이건 뭘 나타내지?’
하지만 온정은 생각을 이어가지 못했다. 갑자기 시작된 울컥 때문이었다.
‘아! 이거 뭐가 이래?’
비탄. 그랬다. 비탄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일반적인 비탄은 아니었다. 보통 비탄이라고 하면 눈물을 펑펑 쏟으며 절규하거나 가슴이나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부림치는 장면을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 비탄은 그런 비탄이 아니었다. 즉 행동하지 않는 비탄이었다. 고요한 비탄이자 숨죽인 비탄이었다.
‘울컥’이 곧 ‘왈칵’으로 이어졌다. 코끝이 징, 하고 울리면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순간 연주가 끝났다. 다음 순서로 넘어가려는 순간 온정이 부리나케 버튼을 눌러선 ‘No.3 e minor Sostenuto-Presto’를 한 번 더 재생시켰다.
왈칵, 왈칵.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서 남자 보는 눈이 그렇게 없냐?
…그게 무슨!
…그놈 여자 있더라. 그것도 8년이나 만난 여자. 혼인신고만 안 했지 부부나 다름없이 살다가 너 만나고 나서 버린 모양이던데, 왜 그랬겠냐? 어? 그게 다면 말을 안 해. 애도 있더라. 그런 놈한테 콩깍지가 씌어선 애비한테 되도 않는 장담을 해? 그 모자는 무슨 죄냐고? 똑바로 눈 뜨고 살아, 새끼야.
온정이 오디오 장에 이마를 댔다.
…당신 만나고 나서 내 남편이 변했어요. 결혼식 안 올렸어도 분명히 내 남편이었는데, 당신 때문에 변했다고요. 알아요. 전혀 모른 거. 그렇다고 해도 당신이 상간녀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아요. 내 아들한테서 아빠 뺏어간 상간녀.
‘아아!’
온정이 서둘러 눈물을 삼켰다. 울고 싶지 않았다. 왜 울어. 왜 울어야 하는데.
헤드셋을 내리고 책상에서 티슈를 뽑아 얼굴을 닦았다. 그러곤 심호흡을 했다.
‘나는 상간녀가 아니라 피해자야. 엄연한 피해자.’
온정이 손에 꼭 쥐고 있던 CD케이스를 다시 쳐다보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대니얼의 눈을 쳐다보았다.
‘무슨 마음으로 연주해요?’
상대방을 흔들려면 자신은 꼿꼿해야 했다. 자신이 흔들리면서 상대방을 흔들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내 발이 땅에 딱 붙어있고, 내 몸이 힘 있게 지탱되어야만 상대방을 흔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안 그렇게 생겨선 꽤 강한가 봐.’
온정이 오디오로 돌아가 버튼을 여러 번 꾹 꾹 눌렀다. 그러곤 헤드셋을 다시 썼다.
‘처음부터 다시.’
PLAY
어깨너비로 다리를 벌린 다음 발바닥에 힘을 주고 똑바로 섰다. 그리고 등을 펴고 손을 맞잡은 후 눈을 감았다. 장조니 단조니, 느리게니 빠르게니, 그 어떤 것도 신경 안 쓰고 일단은 끝까지 들을 작정이었다.
***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에서 운영하는 ‘나왕산 곤돌라’는 한 번에 8명이 정원이었다. 그렇다고 매번 운행 때마다 8명을 채워 올라가는 건 아니어서, 시간표에 따라 한 명을 싣고도 운행을 했다. 그래서 지금 나왕산 꼭대기, 사실 아주 맨 꼭대기는 아니고 조금 아래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밖에서 보면 꼭대기로 보이니까 꼭대기, 그 꼭대기로 올라가는 곤돌라 안에는 대니얼, 온정 그리고 그 두 사람을 힐긋거리는 두 여자와 바깥 풍경에 몰두한 한 남자, 그렇게 총 다섯 명이 타고 있었다.
“이거 몇 대 있어요?”
대니얼의 느닷없는 질문에 온정이 깜짝 놀라선 “네?” 하고 되물었다. 음반 「Daniel Do Niccolo Paganini 24 Caprices」의 충격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터라 정신이 살짝 없었다.
“이거 몇 대 있느냐고 물었어요.”
“105기 있어요.”
대니얼이 “흠!” 하고는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많네요.”
“하루에 다 도는 건 아니에요.”
“그 정도는 나도 눈치껏 알아요.”
하늘에 가 있던 시선을 산으로 옮기며 대니얼이 다시 물었다.
“거리가 얼마나 돼요?”
온정이 피식, 했다.
‘숫자랑은 안 친하게 생겼는데 별 걸 다 묻네.’
생각의 끝에서 바로 대답했다.
“선로 길이가 2,753미터에요.”
“속도는 계속 이 속도에요?”
“네.”
“그럼 10분쯤 걸려요?”
“네. 계산이 빠르시네요.”
“계산이 일이니까.”
순간적으로 ‘어?’ 했던 온정은 이내 이해했다. 바이올리니스트가 왜 숫자와 친하지 않을 거라고 지레짐작했나 싶었다. 박자도 다 계산인데 말이다. 시간 계산 없이 내키는 대로 연주하는 법이 어디 있다고. 어찌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가 계산일 수도 있을 텐데.
그때였다.
“저…….”
대니얼은 가만히 있고 온정만 고개를 돌아보았다. 두 여자 중에서 나이가 좀 더 있어 보이는 쪽이 말을 걸어왔다.
“파가니니 연주하시는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 도 맞으시죠?”
온정이 환하게 웃었다.
“네.”
“안 그래도 아래에 포스터가 붙어 있더라고요. 같은 곤돌라를 타다니 영광이에요.”
“감사합니다.”
대니얼은 여전히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대니얼을 계속 힐끔거리면서 여자가 온정에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러곤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사인 가능할까요?”
“CD가지고 계세요?”
“네? 아니오.”
“그럼 곤란합니다.”
여자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CD에만 사인해주시나 봐요.”
“네. 이해해 주세요. 손이 재산이시잖아요.”
손이 재산, 그 말에 여자의 얼굴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온정이 덧붙였다.
“한 번 예외가 생기기 시작하면 손에 무리 가는 거 금방이거든요.”
“그렇죠. 손이 재산이시죠.”
“공감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네. 그 생각까지는 못했네요.”
여자가 순순히 물러났고, 그러는 동안 곤돌라가 정거장에 도착했다.
“미스터 대니얼 도. 내리실까요?”
대니얼이 그제야 몸을 돌려선 부드럽게 열리는 문을 넘어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반 발짝 앞서가는 온정을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렇게나 자연스럽게 떼어내다니.’
물론 담당자에게서 전해 들었을 수는 있었다. 대니얼은 평소 자신이 연주한 음반을 들고 오는 사람 외에는 절대 사인해주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건 상대가 누구이건 간에 지키는 철칙이었다.
하지만 손이 재산이라느니, 한 번 예외가 생기기 시작하면 손에 무리 가는 거 금방이라느니, 그런 말은 자신의 입으로 내뱉은 적이 없었다. 무슨 그런 것까지 구질구질하게 설명한단 말인가. 그냥 안 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온정은 대단히 부드러운 어조로 상대에게서 공감을 이끌어냈다.
온정의 동그란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자니 온정이 작은 통나무집의 문을 열어주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초콜릿 들어있는 커피 만들어올게요.”
대니얼이 고개를 까딱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작은 공간 안에 혼자 남자 한숨이 쏟아졌다.
“하아아……!”
곤돌라 안에서 산을 내려다보는 내내 옛날 생각이 따라왔다. 다락에 갇혀 울던 옛날, 어둠 속에서 허기져 울던 옛날.
솔직히 옛날이라고 해봐야 수십 년 전 일도 아니었다. 대니얼의 나이 이제 스물여덟이고, 그 일은 열 살 즈음에 끝이 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옛날, 전설처럼 아주 먼 옛날이야기라고 생각해야 견디는 데 도움이 됐다.
‘아무튼 유리 통해서 아래 내려다보는 거 딱 질색이야.’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 떠오른 탓인지 배 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기분이었다.
“젠장!”
…아빠는 네가 활 잡는 모양만 봐도 네가 몇 시간을 연습했는지 알 수 있어. 그러니 정직하게 대답하는 게 좋을 거다. 몇 시간 연습했지?
…두 시간이요.
…아빠가 몇 시간 하라고 했지?
…네 시간이요.
…그럼 두 시간은 어디로 갔지?
…잘못했어요.
…젠장. 너 자꾸 아빠 실망시킬 거야? 이리 와. 갇혀서 굶어봐야 정신을 차리지.
…잘못했어요, 아빠. 용서해주세요, 아빠.
…지하실이 아니라 다락으로 보내는 걸 고맙게 여겨라.
“젠장!”
대니얼이 창가로 움직였다. 걸쇠를 풀고 창문을 여니 방충망이 앞을 가로막았다.
‘한국엔 이거 안 달린 집이 없지. 하긴 벌레가 좀 많나.’
대부분의 사람은 모르는 내용이지만 대니얼은 초등학교 5학년까지 한국에서 살았다. 그때 이름은 도단. 동창들은 그때 자신들이 ‘잡종’이라고 놀리며 몰래몰래 무릎 꿇렸던 혼혈친구 도단이 지금의 대니얼 도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것이었다. 외모가 변해도 좀 많이 변했어야 말이지.
어쨌거나 그 덕에 한국어에 능통했고 한국문화에도 이질감이 없었다. 다만 귀찮은 상황이 생길까 봐 티를 내지 않을 뿐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니얼의 자연스러운 한국어가 한국인 부친 도준수 회장 덕분이라고만 이해하고 있었다.
대니얼이 피식, 했다.
‘내 배 속에도 벌레, 창밖에도 벌레.’
몸을 천천히 돌려 안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책상과 책장, 나무 의자 몇 개, 키 낮은 야전침대, 그리고 소소한 살림살이들.
순간 대니얼의 시선이 책장 한 편에 쏠렸다. CD였다.
바로 걸어가 빼 들고 확인하기 시작했다. 짐작했던 대로 죄다 일렉트릭 기타 연주 음반이었다. 당연히 투 지미에, 자신을 해저 3만리 수준으로 떠밀어버린 잉베이 맘스틴도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다시 꽂아 넣고 돌아서는데 문이 열리고 온정이 들어왔다.
“괜히 왔다 싶어요?”
‘무슨 뜻?’
온정이 테이크아웃 컵을 내밀며 싱긋 웃었다.
“후회하는 표정이라서요.”
“잘못 봤어요.”
온정이 “푸하하!” 하더니 대니얼에게 자신의 테이크아웃 컵을 들어 보였다.
“미안해요. 내 마음대로 생각해서. 사과하는 의미에서 건배해요.”
“낙하산 씨는 뭐 마셔요?”
“댄 거하고 똑같은 거예요.”
CD 때문에 생겼던 신경질이 순식간에 풀어졌다. 그래서 ‘얼른’ 건배를 했다.
대니얼이 한 모금 넘기고 입을 열었다.
“여기도 뱀 나와요?”
“한 번씩 지나가요.”
대니얼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보이는 의자에 그냥 몸을 내렸다.
“곰은 안 나올 테고.”
온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타깝게도 그런 애들은 안 와요. 솔직히 한국은 짐승보다는 귀신이죠.”
대니얼이 어깨를 으쓱했다.
“언제 한 번 밤에 있어 봅시다.”
“왜요?”
“귀신 잡는 바이올리니스트를 보여줄게요.”
“네?”
대니얼이 치렁치렁한 검은 머리를 흔들어 앞으로 내렸다.
“장담하는데, 귀신보다 내가 더 무서울 거예요.”
온정이 깔깔깔 웃기 시작했다.
어쩐지 뿌듯해진 심정으로 대니얼이 몸을 늘어뜨렸다.
“낙하산 씨.”
“네.”
“맛있네요.”
“우리 윤 점장님이 좀 유명해요.”
“윤 점장님?”
“아까 카페 보셨죠?”
주의 깊게 보진 않았지만 대충 생각이 났다.
“거기 운영을 맡고 있는 윤 점장님이 상을 여러 개 받은 바리스타거든요.”
“여자?”
“남자예요.”
몸에 힘이 들어갔다.
“나이 많아요?”
“아주 많아요.”
대니얼이 안심하려는데 온정이 짓궂은 얼굴로 덧붙였다.
“나랑 동갑이니까 많은 거 맞아요.”
대니얼이 몸을 똑바로 했다. 아, 나이! 그 생각을 왜 여태 못 하고 있었나 싶었다. 한국 사람에게 나이가 얼마나 중요한데 말이다.
“낙하산 씨가 몇 살인데요?”
“서른셋이요.”
대니얼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나보다 어린 줄 알았는데.”
온정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정말 그렇게 봤어요?”
“네.”
순간적으로 골똘해지려는 분위기를 대니얼이 바로 끊어버렸다.
“아무 사이 아니죠?”
온정이 바로 고개를 갸웃했다.
“네?”
“바리스타 점장하고 아무 사이 아니죠?”
온정이 무슨 헛소리냐는 표정을 지었다.
대니얼이 한숨을 쉬었다. 순간적으로 커다란 무언가가 심장을 밟고 지나간 기분이었다. 다행인 건 그 덕분에 배 속에서 꿈틀거리던 벌레들이 자취를 감추었다는 사실이었다.
“누나 씨.”
온정의 입이 더 크게 벌어졌다. 그런 온정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대니얼이 말을 이었다.
“내일 9시까지 연습실로 바로 와.”
“네?”
“연습하는 동안 내 옆에 있으라고.”
몇 초가 흘렀을까. 온정이 테이크아웃 컵을 천천히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곤 입에 대기 전에 중얼거렸다.
“며칠만 참자.”
대니얼이 다리를 꼬았다. 승자의 여유랄까. 그러곤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방충망 너머로 작은 새의 잿빛 뒤통수가 보였다. 도대체 언제부터 다 듣고 있었을지 궁금했다.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No.4 c minor Maestoso
다단조 장엄하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의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났다.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에 딱 한 개밖에 없는, <오디세이 호텔 IN 나왕>의 최상층 15층을 통으로 쓰는, 오너가의 장녀인 온정도 구경만 해본 아주 귀한 객실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오죽하면 동생 훈정이 홀리 룸Holly Room, 즉 거룩한 방이라고 일컬을까.
대니얼이 객실로 발을 내딛자마자 온정이 그의 뒤통수에 대고 상냥하게 인사했다.
“그럼 내일 아침 9시에 뵈어요.”
하지만 대니얼은 대꾸 없이 오른쪽으로 사라졌다.
온정이 오른 검지로 닫힘 버튼을 누르는 동시에 왼쪽 중지를 들어 올렸다.
‘싸가지.’
그리고 불량한 자세로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국민이 아는 영화 대사를 그대로 따라 했다.
“내가 니 시다바리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덧붙였다.
“맞지 뭐. 시다바리.”
한숨이 절로 나왔다. 대니얼만 따라다니느라 아무것도 못 하고 있었다. 특히 거풍할 짬이 안 났다. 바람맞이 말이다. 지상의 멀쩡한 사무실을 두고 왜 나왕산 꼭대기에 죽치고 사는데. 그거 다 바람 때문인데. 한마디로 말해서 온정은 바람 중독자니까 말이다.
…허구한 날 바람, 바람 하니까 사내도 바람피우는 놈을 만나지. 애비 속 터뜨려 죽일 작정이지? 꺼져, 새끼야.
온정이 피식, 했다.
‘그 긴 문장에 어쩜 틀린 구석이 하나도 없는지.’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모퉁이를 돌아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다들 퇴근했을 시간이니 사무실에 들를 생각이었다. 카드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3층에 내려 ‘곤돌라 사업본부’ 방으로 걸어가는데 휴대폰이 진동했다.
Daniel Do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왜 또!”
그러다 깜짝 놀라선 주변을 살폈다. 적어도 문을 열고 나와서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하는 사람은 없었다.
심호흡을 하고는 휴대폰을 귀에 대며 목소리에 상냥함을 입혔다.
“네. 미스터 대니얼 도.”
-올라와.
‘이런 삐리리 같은 놈.’
솟구치려는 목소리를 다독였다.
“무슨 일이신데요, 미스터 대니얼 도?”
-더워.
‘이게 아까부터. 나보다 반 십 년이나 덜 산 게 진짜.’
누나 씨, 라고 한 이후부터 말이 계속 짧고 있었다.
“찾아보시면 조절 버튼 위치가…….”
-찾기 귀찮아.
“그럼 프런트에…….”
-사람 들락거리는 거 싫어.
온정이 입술을 모아선 소리 나지 않게 ‘후!’ 했다.
-올라와.
뚝.
온정이 휴대폰에 대고 주먹을 흔들었다.
“아우 이걸. 아우우…… 이걸 진짜.”
그러곤 몸을 돌려 다시 직원 전용 엘리베이터로, 1층으로, 내려서 모퉁이로, 이어서 프레지덴셜 스위트룸 전용 엘리베이터로 움직였다.
‘훈정이었어 봐. 열 번은 메다꽂았지.’
체급 차이가 난다고 해서 메다꽂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마음만 있으면 했다. 그러려고 애써 배운 호신술이었다.
‘아버지가 한다면 하는 분이라 별채 사수하겠다고 이러고 있기는 한데, 떠나기 전에 진짜 내 손에 한 번 거의 죽어볼래?’
아무것도 씌어있지 않은 블랙카드를 대자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 아무 숫자도 씌어있지 않은 검은색 버튼을 누르자 엘리베이터가 부드럽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참자. 이 순간만 넘기면 곧 D-2. 그럼 금세 떠날 날이 오겠지.’
온정이 호흡을 골랐다. 순간 문이 열렸고 ‘거룩한 방’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미스터 대니얼 도!”
조용했다.
“댄!”
역시 조용했다.
서둘러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 방향을 가늠했다.
‘길 잃어버리겠네.’
그랬다. 너무 넓어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아까 대니얼이 오른쪽으로 사라졌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는 주저 없이 오른쪽으로 길을 틀었다.
최고급으로 꾸며진 공간을 가로질러 천천히 움직였다.
“댄!”
그때였다. 어렴풋이 물소리가 들렸다. 온정이 소리가 나는 방향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그럴수록 물소리가 가까워져 왔다.
‘설마 씻어? 사람 불러놓고 저는 씻어?’
물소리가 새어 나오는 커다란 불투명 유리 앞에 섰다.
‘정말 씻네? 무슨 이런 경우 없는.’
이를 앙다물며 팔짱을 끼는데 옆의 테이블 위가 번쩍거렸다. 대니얼의 휴대폰이었다. 다가가서 보니 액정에 ‘King’이라고 떠 있었다.
‘킹? 왕?’
번쩍임이 멈췄다.
온정이 으쓱하고는 조금 물러 나와 몸을 돌렸다. 그러곤 객실을 눈으로 살폈다.
‘이런 데서 잠이 오나? 불안할 것 같은데.’
정서의 틀이 잡히는 어린 시절을 지극히 평범하게 살았기 때문에 온정은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의 장녀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식의 공간이 여전히 버거웠다. 아버지 지용과 어머니 희경의 결혼생활이 15년을 꽉 채우기까지 문 씨 집안에서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 까닭이었다. 외할아버지가 돈줄을 막아버린 탓에 당연히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때 차곡차곡 쌓인 한이 지금의 지용을 만들었을 수도 있었다. 괴팍한 지용 말이다.
자신도 모르게 “하아!” 하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온정이 돌아보자 얇은 배스로브 차림의 대니얼이 머리에서 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서 있었다.
‘헉!’
대니얼이 수건으로 기다란 머리를 틀어 올리며 온정 앞을 지나갔다.
‘뭐야, 사람 놀라게.’
“나 더운 거 질색인데, 더워. 누나 씨 곤돌라 관리하는 사람이잖아. 기계 잘 볼 거 같아서.”
온정이 대니얼의 뒷모습을 눈으로 따라가며 정신을 빠르게 차렸다.
“가을 아침 정도로 맞추면 될까요?”
“한국 가을?”
“네. 9월 말이나 10월 초 중에서 어느 쪽이 낫겠어요?”
“10월 초로 맞춰 봐.”
‘맞춰 봐? 내가 네 하녀지? 어?’
온정이 속으로 발끈하는 동안 대니얼이 카우치에 털썩 몸을 내리고는 몸을 느슨하게 기댔다. 그 바람에 대니얼의 허벅지가 드러났다. 온정은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바로 몸을 돌려선 실내온도조절기를 찾았다. 일반 객실은 중앙에서 통제하지만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은 알아서 조절이 가능했다.
온정이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산이라 새벽에 꽤 서늘할 수 있는데,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그때였다.
“네.”
‘네?’
“씻느라고 몰랐어요.”
온정이 상체를 뒤로 젖히고 대니얼 쪽을 바라보았다. 모습은 보이지 않고 소리만 이어졌다.
‘통화하는 거 맞지?’
별다른 내용 없이 계속해서 네, 그리고 네. 대니얼 도에게 저리도 다소곳한 면이 있을 줄이야.
온정이 아까 액정에 떠 있던 ‘King’을 떠올렸다.
‘누가 왕 노릇을 하시나 모르겠네. 왕 모시고 사는 거 힘든데.’
온도를 재설정하고 대니얼 쪽으로 향하자 대니얼이 휴대폰을 카우치에 집어 던지고는 아까보다 더 느슨한 자세로 몸을 늘어뜨렸다.
“조금 있으면 온도 내려갈 거예요.”
“어.”
순간 대니얼이 몸을 틀며 카우치에 기다란 두 다리를 들어 올렸다. 배스로브가 거의 중심 부분까지 벌어졌지만 대니얼은 양팔을 뒤통수에 대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저, 미스터 대니얼 도.”
“댄.”
“아! 댄. 그럼 할 일 했으니까 갈게요.”
“누나 씨.”
“네.”
“여기서 자.”
온정은 기절초풍했다.
“네?”
“혼자 못 있겠으니까 여기서 자라고.”
“그건 곤란한데요.”
“곤란한 거 알아. 그래도 자. 나 밤새 죽을지도 몰라.”
“미스터 대니얼 도.”
“댄.”
온정이 심호흡을 했다.
“댄.”
“자. 네 번이나 말했어.”
대니얼이 고개를 뒤로 꺾어선 온정에게 눈을 맞췄다.
“다섯 번 채울까?”
온정이 대니얼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죽을지도 모른다는 말이 왜 헛소리 같지가 않지?’
잠깐의 고민 끝에 대답했다.
“침대는 내가 골라서 잘 거예요.”
처음 보는 부드러운 미소가 대니얼의 얼굴을 채웠고, 그 얼굴이 온정의 시야에도 가득 찼다.
***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바로 앞에 대니얼이 서 있었다.
“여기서 뭐 해요?”
“시간 재고 있었어.”
객실로 발을 내디디며 온정이 대꾸했다.
“10분 안에 온다고 했잖아요.”
“12분 지났어.”
“그래요?”
“잡으러 내려가야 하나, 그러고 있었어.”
“그 차림으로요?”
아닌 게 아니라 대니얼은 여전히 배스로브를 입은 채였다.
“어때!”
온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 다시 대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요.”
대니얼이 온정이 들고 있는 가방을 턱짓했다.
“외박 자주 해? 그렇게 따로 옷 가방을 챙겨두고 있을 만큼?”
“산에서 못 내려올 때가 있어요.”
“그럼 가방이 산에 있어야지 왜 차에 있어?”
“산에 둔 거 하고 바꾸려고 챙겨왔는데, 오늘 아침에 잊고 안 들고 올라갔어요.”
대니얼이 “흠!” 하고는 덧붙였다.
“믿어주지.”
‘쪼끄만 게 진짜 뭐라는 거야.’
대니얼이 고개를 까딱했다.
“침대 골라.”
온정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왼쪽을 가리켰다. 그러자 대니얼이 피식, 했다.
“그쪽엔 침대 없어.”
“그럴 리가요.”
“없어.”
온정이 “내가 확인해보면 되지.” 하고 발짝을 떼자 대니얼이 온정의 팔을 붙들었다.
“너무 멀어.”
“있긴 있다는 거네요?”
“어. 그런데 너무 멀다고. 도움 안 돼.”
온정이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요. 가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니얼이 온정을 잡아끌고는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그러곤 욕실을 지나치자마자 바로 나타난 왼쪽의 출입문을 손바닥으로 짚었다.
“여기서 자.”
“댄은 어딘데요?”
대니얼이 바로 맞은편 방을 가리켰다. 실소가 터졌다.
“왜 웃어?”
“침대 귀신 무서워할 나이는 아니지 않아요?”
대니얼이 피식, 했다.
“아까도 말했듯이 귀신은 대수가 아니야. 귀신보다 내가 더 무섭거든.”
온정이 대니얼을 빤히 쳐다보았다.
“어제는 어떻게 잤어요?”
“어젠 괜찮았어.”
“그런데 지금은 왜 그래요?”
대니얼이 입을 꾹 다물었다.
온정이 바로 말을 이었다.
“꼬치꼬치 캐물어서 미안해요. 알았어요. 여기서 잘게요.”
대니얼이 고개를 약하게 끄떡했다.
온정이 방문을 열려다 말고 대니얼을 다시 쳐다보았다.
“룸 바꿀래요? 원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안 돼.”
‘안 돼? 싫은 게 아니라 안 된다고?’
“골치 아픈 일 생겨.”
순간 온정에게 염려가 치올랐다. 이건 본능이었다.
“저, 댄.”
눈과 눈이 마주쳤다.
“방문 열어두고 잘까요?”
대니얼이 활짝 웃었다. 학교도 들어가기 전의 소년처럼, 그렇게 활짝 웃었다. 온정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래 주면 고맙고.”
“알았어요.”
온정이 몸을 틀며 말을 이었다.
“들어가요. 조명은 내가 씻고 나와서 끌게요.”
“어.”
온정이 완전히 몸을 돌리는데 대니얼의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누나 씨, 진심으로 고마워.”
철렁했던 심장이 이번엔 울컥했다.
‘도대체 뭐가 무서운 거야.’
입을 열었다가는 흔들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싶어 손목을 까딱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어둔 채로 야상을 벗어 걸고 옷 가방에서 속옷을, 백팩에서 세면도구를 꺼내 들었다. 온정은 평소에도 호텔의 어메니티를 사용하지 않았다.
팔 가득 들고나오니 맞은편 침실이 그새 깜깜해져 있었다. 온정은 자신이 잘 방의 불이 환한 걸 확인하고는 조명을 모두 소등했다. 그리고 대니얼의 침실을 흘깃하고는 욕실로 들어가 씻었다. 순식간에 몸이 나른해지면서 정신이 몽롱해졌다. 하루 동안 있었던 일이 촤르르 지나갔다.
내려와, 새끼야.
제 무릎 저렴해요.
사했음.
우리 평화적으로 지냈으면 해요.
선로 길이가 2,753미터에요.
여기도 뱀 나와요?
연습하는 동안 내 옆에 있으라고.
올라와. 여기서 자.
‘내려와로 시작해서 올라와에서 끝나네.’
그리고 처음으로 온전하게 들은 그의 연주.
‘앞으로 파가니니라는 이름을 들으면 니콜로 파가니니가 아니라 대니얼 도를 떠올리게 되겠지?’
샤워를 마치고 짧은 머리를 순식간에 말린 후 실내복을 걸쳤다.
‘별일 없을 것 같긴 하지만 별일이 생긴데도 걱정할 건 없어. 패면 돼. 팔만 안 부러뜨리면 되겠지.’
욕실 문을 열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방으로 들어가 조도를 흐릿하게 조정하고는 태블릿PC를 꺼냈다. 이어서 그룹웨어로 올라온 오늘 치 곤돌라 운행 기록과 카페의 시간별 매상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니 졸음이 밀려왔다.
‘내가 오늘 스트레스를 받긴 했나 보다.’
그때였다. 문가에 대니얼이 나타났다. 배스로브는 그새 사라지고 검은색 민소매 티에 같은 색의 짧은 반바지 차림이었다.
온정은 놀라지 않았다. 마치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평심을 유지했다.
“못 자겠어요?”
“같이 자.”
참으로 건조한 목소리에 대니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외할아버지한테 모진 소리 듣고 서럽게 울던 어린 훈정의 모습이 겹치면서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알았어요. 가요.”
온정이 몸을 일으켜 대니얼의 팔을 잡고는 맞은편 방으로 향했다. 예상했던 대로 침대가 두 개였다.
군소리 없이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대니얼을 지켜보고는 그 옆의 침대로 올라갔다. 방금 전까지 온정이 있던 방에서 약하디약한 불빛이 흘러나와 대니얼의 실루엣을 비추었다. 그 실루엣에 시선을 두고 온정이 생각했다.
‘괜히 그러는 거로는 안 보여. 꿍꿍이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그래서…… 아파.’
아무래도 「Daniel Do Niccolo Paganini 24 Caprices」 말고 다른 음반도 구해야지 싶었다. 파가니니의 곡은 전부 녹음했다고 했으니, 다 들어보고 싶었다.
온정이 눈을 감았다.
‘내가 바이올린 소리를 스스로 찾아서 듣게 될 줄은 몰랐네.’
그때였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매트리스가 살짝 흔들렸다. 대니얼이 온정이 누워있는 침대 위로 건너왔다는 뜻이었다.
‘아!’
속으로 탄식은 했으나 당황스럽지도 않고 긴장되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았다. 그저 마음이 계속 아플 따름이었다.
잠시 후 이불이 들리고 대니얼의 체온이 느껴짐과 동시에 그가 온정을 끌어안으며 가슴에 고개를 묻었다.
온정은 밀어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보듬어주지도 않았다. 물론 눈도 뜨지 않았다. 호흡 때문이었다. 대니얼의 안정된 호흡 말이다. 그것은 곧 대니얼이 지금 남자로 다가온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대니얼의 머리에서 나는 은은한 샴푸 향이 올라왔다.
‘우리 호텔 어메니티 좋네.’
물론 일반 객실용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참 탁월한 선정이라는 판단이었다.
‘아버지가 감각은 있으시지.’
아닌 게 아니라 호텔에서 사용하는 모든 물품은 <오디세이 호텔 앤 리조트>의 부사장인 지용의 최종 확인을 거치게 돼 있었다. 품질이 마음에 안 찬다 싶으면 담당자의 입에서 단내 날 상황이 벌어지는 건 당연지사이고 말이다.
그때 대니얼이 온정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그런 대니얼을 위해 온정이 몸에서 힘을 완전히 뺐다. 그리고 그 상태로 스르르 잠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