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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 해로동혈偕老同穴 (24/24)

八. 해로동혈偕老同穴

살아서는 같이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

“여기가… 어딥니까.”

“…….”

질펀한 정사 후에 정신을 차리니 눈앞은 여전히 캄캄했다. 눈을 가리는 비단의 감촉이 어쩐지 낯설게만 느껴졌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곁에 앉은 이는 침묵할 따름이었다.

“고뿔에 걸렸더군. 열을 내리느라 진땀을 뺐다.”

“…송구합니다.”

갈라진 목소리였지만 기절 직전보단 몸이 한결 가뿐했다. 마른 옷이 몸을 감싸고 있었고, 분명 질척해야할 아래도 불편함 없이 말끔했다.

“파도 소리가 들립니다.”

“귀가 밝군.”

침묵 속에 물보라가 치는 소음이 잔잔히 울려 퍼졌다. 바다인가. 한양 땅에선 바다가 보이지 않는데, 언제 이곳에 왔나. 서하는 직감했다. 제 마지막이 다가왔음을. 그래. 어차피 죽는다면 그의 손이 좋았다. 그에게 떠밀려 물속에 잠긴다면 그 역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죽기 전에 나리를 뵙고 싶어 찾아온 것인데, 이리 되니 여한이 없습니다.”

서하는 의연하고자 하였으나 설움에 맥없이 눈물이 고였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에게 안긴 후 그의 손에 생을 마감한다니, 어쩌면 가장 완벽한 마지막이었다.

서하가 눈을 질끈 감으며 울음을 삼켰다. 도포 안주머니에 든 마지막 정표를 주고 싶은데, 그가 받아주긴 할까. 서하가 주먹을 그러쥐고 망설였다. 제가 이리 죽어지면 그는 적어도 저를 기억해주겠지. 정이란 게 이리 우습다.

“내게 그대를 달라고 했잖아.”

“이 마당에… 드리겠습니다. 드릴 테니 빨리…….”

죽음을 목전에 두니 그의 실없는 청에도 헛웃음이 나왔다. 머리에 씌워진 무언가는 아마 그때의 흑립이 아닐까 싶었다. 마지막까지 저를 달라 말하는 그가 서글프고 얄궂다.

“진정 그대는 내가 아니어도 괜찮아? 내가 때려주는 것만 좋은 거야?”

유치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이젠 솔직할 수 있었다.

“…아닙니다. 나리께만 맞고 싶어요.”

이젠 그도 불가할 테지만. 설움이 자꾸만 고개를 쳐든다. 제가 없으면 이제 그는 혼인하여 내자와 해로동혈하겠지. 어차피 그리 될 것이라면 솔직해져도 좋겠다. 온기가 느껴지는 손끝이 서하의 뺨을 쓰다듬었다.

“내게 입 맞춰줘.”

“앞이 보이질 않아요.”

“보지 않아도 만지면 알잖아.”

제혁이 제 뒤에 앉아 저를 끌어안으며 속삭이고 있었다. 울음을 삼킨 서하가 손을 뻗어 제 뒤에 앉은 이를 더듬어 내렸다. 손에 잡히는 옷자락과 그 속의 단단한 가슴팍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몸을 돌려 얼굴이 있을 곳을 더듬자 잘생긴 뺨이 손에 잡혔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그가 매준 비단 끈을 풀어내기 싫었다. 더듬거리던 끝에 입술이 엄지에 닿았다. 서하가 그대로 얼굴을 들어 그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메마른 입술이 닿고 곧이어 혀가 침범하고 들었다. 허리를 그러쥐며 거칠게 접문하는 제혁의 몸짓에 서하가 제 몸을 맡기며 그의 혀를 받아들이곤 빨아 당겼다. 젖은 소리가 귓가를 잠식한다. 파도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을 만큼 깊은 입맞춤이었다.

“이제 되었습니다…….”

“무엇이?”

입술을 떼어낸 서하가 되었다 말하자 제혁이 반문했다. 서하가 숨을 들이켠 후 제 진심을 털어냈다.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고백이었다.

“나리를 은애합니다. 저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버리신대도 괜찮아요. 이것만 가져주십시오.”

서하가 꾸러미를 더듬어 그에게 쥐어주었다.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싶었던 것은 결국 쌍가락지였다. 저 하나, 그 하나 나눠 낀다면 제가 죽더라도 더는 슬프지 않을 것 같았다. 응당 그의 내자에게 내어줘야 하는 자리였으나 곧 죽을 이의 마지막 욕심이었다. 눈을 가린 비단 끈이 무참히 젖어갔다.

“이러려고 일부러 날 화나게 한 건가. 나더러 미안해하라고?”

“…….”

“…이러면 나도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나.”

나를 기억해 달라 하면 비웃으실까. 서하가 속울음을 터트리며 그의 말을 잠자코 들었다. 비단 끈이 벗겨지고 젖은 눈 안에 제혁의 피로한 낯이 들어왔다. 내도록 그리워하던 낯이다. 가락지를 낀 손으로 제게 남은 가락지 하나를 끼워준 제혁이 입가에 미소를 띠곤 말했다.

“그대에게 나를 줄게.”

어찌 주시려고요. 질문이 되지 못한 말이 서하의 입속에서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바닷가가 아니었다. 배 안이었다. 서하의 눈동자에 이채가 띠기 시작했다.

“이 바다를 건너가자.”

“…이게 무슨,”

젖은 뺨에 입술을 맞춰주는 그의 몸짓이 달디 달았다. 당황스러웠다. 그런 서하를 어루만지던 제혁이 한숨 같은 웃음을 보인 후 실토했다.

“할마마마께서 궐에 시집오시기 전 물려받으신 토지를 주셨다. 한양 땅에서 먼 곳이라 누구도 그대를 모를 거야. 나도 모를 것이고.”

“나리…!”

“게서 함께 살자. 옥환을 나눠가졌으니 우리는 이제 부부다. 평화로운 곳에서 그대 좋아하는 교접도 많이 하자꾸나.”

대체 어찌 된 일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의 혼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게 몇 시진이나 지났다고. 서하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왔기에 그리 우는 게야.”

“나리께서 혼인, 하신다고…….”

“썩을, 누가 그대에게 말을 전한 건가. 김 문학?”

이 사람의 입에서 김산이 왜 나오나. 거칠게 욕설을 내뱉는 그는 왠지 몹시 화가 나 보였다.

“요절을 냈어야 하는 건데.”

“제대로 설명해주십시오.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 내게 언질도 없이 좌의정의 여식과의 혼사를 추진하셨지. 나도 오늘 알았고 그대 얼굴만 확인하고 바로 달려가 따져 물었다. 단호하게 나오시기에 그 길로 좌의정 댁에 찾아가 그 댁 낭자를 만났어.”

서하를 끌어안은 채 사건의 전말을 읊는 제혁은 무척 피로해보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곳곳을 다니며 저와 함께 살 길을 찾은 그가 이상하게만 보였다. 어째서……. 서하가 혼란하여 제혁의 얼굴을 면면히 뜯어보았다. 꿈이라도 좋을 정도로, 그가 선명한 모습으로 제 몸을 끌어안고 있는 지금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대가 그리 눈물 젖은 얼굴로 보고 있으면 내가 이야기를 더 할 수가 없잖아.”

“읏…….”

제혁이 서하의 맞아서 부은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따끔한 통증이 작금의 상황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젖은 눈을 매만지는 손길이 다정했다.

- 저 또한 화용군과 혼인하고 싶지 않습니다. 칭병稱病을 할 것이니 용서하세요.

발 뒤에 앉은 규수는 진저리를 치며 제 뜻을 전했다. 다행인 일이었다. 그 후에 제혁은 서둘러 대비전을 찾았다. 조모께선 이미 예상하신 듯 토지 문서와 패물이 담긴 상자를 건네시며 명운을 빌겠다 하셨다. 자포자기한 표정이 제혁의 마음 한편에 아직도 남아있었다.

- 너희는 사신단의 선발로 간 것으로 해둘 것이다. 명분상으로는. 그리고 가는 길에 도적떼를 만나 변을 당한 것으로 하자. 사회의 양친에겐 내 따로 위로의 말을 전하마. 이걸 가지고 떠나거라. 진즉 네 어미에게 주었어야 했음을……. 너무 늦었지. 이 늙은이가 너를 오래 보고 싶어 욕심을 부렸구나. 그래도 할미 덕으로 사회를 만났으니 그것만은 감사히 여기렴.

- 할마마마.

- 금상이 아무리 군왕이라도 어미를 문책하진 않겠지. 걱정 말거라.

복잡한 표정으로 제 손을 잡아주시는 조모에게 마지막으로 감사 인사와 함께 하직 인사를 올리고 떠났다. 마음이 급했다.

“…해서 영운궁에 들러 간단히 짐을 챙겨 그대를 데리러 가려 했는데, 그대가 내 집에 있질 않아.”

“…!”

“옷까지 벗으며 가르침을 주겠다고. 엉덩이를 때려달라고?”

“그, 그만 하십시오!”

“그래놓고 이러려고 만나는 사이 아니었냐며 날 화나게 만들질 않나.”

볼을 꼬집는 손이 매서웠다. 서하의 얼굴이 수치심에 붉게 물들었다. 혼자 오만 가지 망상을 한 것이 부끄럽고 창피해졌다.

“어찌 제게 말씀을 안 하셨습니까!”

“나도 오늘 알았다질 않아. 이 조막만한 머리로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게야?”

“이, 이…!”

서하가 그러쥔 주먹으로 제혁의 가슴팍을 치지도 못하고 씩씩거렸다. 분기가 치밀어 견딜 수가 없었다. 마주친 눈이 뜨겁고 어둡다. 홀로 주접을 떨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혼자 가슴앓이를 했다.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제게로 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질 않았다. 부귀영화가 그곳에 있었는데……. 제혁은 그런 것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올곧게 서하를 직시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그랬을지 모른다. 종학청에서 만났던 그날부터. 아니, 그 밤부터.

“그 그림들은…!”

“내 것은 전부 그대론데, 그대 집에는 없더군. 그게 증좌였나 보지. 나 말고 다른 이를 집에 들인 적이 있나?”

문득 정신이 든 서하가 정표나 다름없는 저와 제혁의 흔적을 떠올렸다. 놓고 온 게 아쉬워 뱉은 말인데 증좌니 뭐니 하며 추궁이 이어졌다. 서하로선 영문을 알 수 없는 물음이었다.

“형님 외에는…….”

“그치를 집에 들였어? 내게 투기죄를 물으려 그러는 게야?”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아, 임 전훈이 왔었습니다. 그 그림이 그럼,”

“없어진 것도 몰랐던 모양이야. 내 그림이 그리 하찮나?”

“그게 남의 손에 들어갔다는 말씀입니까?”

서하가 아연실색하여 물었다.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제혁이 그런 서하의 등허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전하께서 말끔히 처리를 하셨다니 못 해도 불에는 탔을 게야. 내 묻질 않나. 내 그림이 그리 하찮아?”

불퉁한 물음에 서하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홀로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서러운지 그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다시 생각해도 원통하고 분했다.

“나리께서 아십니까? 홀로 그 그림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서러운데요.”

“나는 그대 그림을 보면서 서럽지 않았는데?”

“나리께선 원하실 때 저를 볼 수 있지만, 저는 아니지 않았습니까?”

“그랬군. 그대가 꽤 오래전부터 날 좋아했나 봐. 투기하지 않아도 되겠어.”

더 깊어진 눈빛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고요한 선상에서 오롯이 단둘이었다. 서하를 품에 안은 제혁이 눈을 맞추며 물었다.

“다음 가르침은?”

“…….”

“어서 날 가르쳐줘야지. 안 그렇습니까. 낭군.”

“…그리 부르지 마십시오.”

품에 안긴 순간이 꿈결 같다. 그런 서하를 보며 화용군이 장난스레 말을 이었다.

“허면 이름을 부를까. 내 그대에게 주려고 만든 게 많아.”

“뭔데요?”

기대심이 일었다. 무얼까. 그도 제게 정표를 주려 했던 걸까. 하지만 서하의 그런 쪽 기대심을 뭉개는 답이 이어졌다.

“청국을 오가는 장사꾼들에게서 아기 주먹만 한 진주를 세 개나 구했어. 이걸 엮여서 그대 구멍에 쑤셔 넣을 것이야. 그리고 오동나무를 깎아 만든 널찍한 매도 있는데 그대가 좋아할 게 분명해.”

아기 주먹……. 수치심과 함께 다른 쪽 기대심이 치솟았다. 파도치는 수면 위로 달이 그림처럼 떠있는 밤이었다. 서하는 그에게 주려했던 흑립을 벗어내며 답 대신 그 입술에 제 것을 겹쳤다. 별빛이 바다를 수놓는 까만 밤. 생이 다할 때까지, 아니 다음 생에도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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