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六. 악사천리惡事千里 (22/24)

六. 악사천리惡事千里

나쁜 일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널리 퍼져 알려진다.

“화용월태의 사내가 스승을 업고 놀았다는 노래가 저자에 퍼졌으니, 이 해괴한 추문이 누구를 겨냥한 것인 줄 모르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새카만 수염을 단 선비가 즐거운 듯 이를 드러내 웃으며 떠들어댔다. 말 그대로였다. 금상과 대비가 도성을 비운 지금, 저자에는 그와 같은 노래와 삿된 추문이 널리 퍼진 채였다.

‘화용월태의 사내가 낮이면 글을 배우고 밤이면 스승을 업고 노네.’

어린애가 아니고서야, 뜻을 모를 리 없는 원색적인 가사였다. 상석에 자리한 부원군은 표정 없는 조용한 낯으로 그런 사내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금상도 몰랐을 것이다. 꼬리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기루에서 일하는 아이에게 은자를 쥐어주니 제가 본 것을 술술 말했다. 만일 거짓이라도 상관없었다. 소문이 난 것만으로 타격이 클 것이다.

“주제도 모르고 종학에 들다니, 곧 상소가 빗발칠 겁니다. 금상도 어쩔 도리가 없겠지요. 비역질이라니.”

씹어내듯 단어를 뱉은 사내가 더럽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비역질이라는 단어만으로 심기가 상한 듯 했다. 제 아들이 술자리에 남창을 꼭 끼우는 것을 모르기 때문일까. 실상을 다 아는 부원군은 그저 흔들리는 촛불 너머로 제각각 화용군의 흉을 보는 늙은 선비들을 응시할 뿐이었다.

“대비전의 옥안이 어찌 일그러질지 궁금하군요.”

“강가놈이 고꾸라지면 중전마마와 세자저하의 앞날도 덩달아 밝아질 것입니다.”

저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선비들이 즐거운 표정으로 부원군을 보았다. 부원군이 공들여 키운 난초로 시선을 돌리며 답했다.

“예끼, 이 사람들. 중전마마와 세자저하의 앞날이 언제 어두웠던 적이 있는가.”

“맞습니다. 그럼요.”

“명실상부 이 나라의 국모요, 국본이시네. 송충이 따위가 비빌 곳이 못 되지.”

“옳습니다. 대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여태 실수 한 점 없던 화용군을 끝까지 추적한 게 옳았다. 그가 종학 교수와 계간하는 사이건 아니건 간에 이 추문은 그를 옭아맬 것이 분명했다. 금상과 대비, 화용군이 회궁하는 날이 몹시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다만…….

“확실한 증좌가 있다면 좋을 텐데…….”

“증좌… 말씀이십니까?”

“그래. 추문은 덮으면 그만이지 않나. 계간하는 사이라면 흔적이 있겠지. 없더라도… 만들어내면 되지 않나.”

부원군의 말에 임 전훈이 표정을 굳혔다. 이 사회와 함께 종학청에 있는 것이 저이니 아마 부원군은 저를 겨냥해 말한 것일 터였다. 주어진 책무가 무겁고도 어려웠다.

“소생이… 대감께 증좌를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이것만 있으면 출세가도를 걸을 수 있다, 무지몽매한 생각이었다.

***

일렁거리는 호롱불을 앞에 둔 임 전훈이 불안하게 손톱을 씹어댔다.

“이를 어찌한다…….”

졸지에 증좌를 만들어 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사회가 화용군과 한 방에서 강론을 하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이는 제가 지시를 내린 일이었다. 두 사람이 진정으로 계간하는 사이라도 종학청에서 일을 벌일 리는 없으니 사람을 사 거짓 증언을 받아 내거나, 뭐라도 흔적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상간하는 장면을 잡아내는 게 아니고서야 분명한 증좌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집을 뒤질 수 있으면 좋으련만.”

거짓 증좌는 가장 마지막 선택지였다. 할 수 있다면 진짜를 찾아내는 게 제일이었다. 다만 영운궁은 경비가 삼엄했다. 당하관의 몸으로 영운궁을 찾는 것도 어렵거니와 담을 타는 것은 더욱 위험했다. 사람을 시킨다 해도 위험부담이 컸다. 가장 쉬운 것은 이 사회의 집을 살피는 것이었다. 교분이 없는 터라 이 역시 쉽지는 않을 테지만, 영운궁보다는 나았다.

하여, 임 전훈이 서하의 작달막한 초가집을 찾았다.

“이 사회 게 있는가.”

사립문 밖에 선 채 목소리를 높이자 곧 끼익하는 소리와 함께 이 사회가 방문 밖으로 나왔다. 관복 차림이 아닌 사회의 모습에 임 전훈이 괜히 헛기침을 내었다.

“전훈께서 예까진 어찌 오셨습니까?”

“선진된 입장으로 내 그동안 소홀하였지? 해서 이리 선물까지 가져왔다네.”

화용군과 계간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보니 사회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서리라도 내린 듯 흰 뺨을 눈여겨보던 임 전훈이 들고 온 상자를 건넸다.

“차 한잔할까 하여, 다과를 좀 가져왔다네.”

“기별도 없이 집까지 찾아오시고,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문제라니. 그대가 맡은 일을 잘해주니 내 기특하여 그러네. 날이 춥군. 안으로 들어 얘기함세.”

“…예.”

서하가 갑작스런 임 전훈의 등장에 초조히 눈을 굴렸다. 가까운 이를 제외하곤 집에 들여 본 일이 없기에 몹시 당황스러웠다. 다만 아랫사람 된 도리로 집까지 찾아온 선진을 내칠 수는 없었으므로 비켜설 따름이었다.

“집이 아주 소박하고 멋스럽군.”

“혼자 사는 집이라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아 누추합니다.”

과연 그 말대로 몹시 초라한 모습이었다. 임 전훈이 서하의 작은 방을 곁눈으로 훑어보았다.

“종학청 일은 어떠한가?”

“좋습니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올라간다더니. 임 전훈이 속으로 핀잔주듯 생각했다.

“차라도 마시면 좋을 듯한데. 내 다기와 찻잎을 좀 가져왔다네.”

“아…. 감사합니다. 제집에도 있는데, 괜히 수고를 끼쳤습니다.”

“더운물 없는가?”

대놓고 물을 끓여오라 눈치를 주니 서하가 불안한 듯 눈을 굴리다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하인이 없어 불편하겠군.”

“아닙니다. 물을 끓여오겠습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그리고 서하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임 전훈이 웃는 낯을 거두고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집이 좁은 탓에 소리를 크게 낼 수 없어 조심스러운 몸짓이었으나, 문갑을 열었을 땐 주먹을 세게 쥐었다. 증좌가 있었다. 의미를 알기 어려운 그림이었으나 명백히 화용군의 낙관이 찍혀있었다. 저고리를 풀어 헤친 그림 속 사내는 화용군을 닮은 모습이었다. 춘화라기에는 다소 음전한 모양이었지만, 어쨌건 사회의 집에 이것이 있을 온당한 연유가 없었다.

“담이 아주 커.”

이리 쉽게 찾을 줄은 몰랐는데. 전훈의 낯이 추악한 기쁨으로 우그러졌다. 이제 이것을 부원군에게 전하기만 하면,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되는 것이리라.

문밖에서 물을 끓이는 서하는 모르는 일이었다.

***

“이 그림이면, 증좌가 되겠습니까?”

고래 등 같은 부원군의 기와집에서, 임 전훈이 히죽 웃으며 제가 찾은 증좌를 내밀었다. 부원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림이 든 비단 주머니를 받아들 뿐이었다.

“저자에 소문이 파다하니, 거짓 증좌라도 도움이 될 걸세.”

기대감이 없었던 모양인지 부원군은 당연하게도 그것이 가짜라 믿는 것 같았다. 그 말에 임 전훈이 목소리를 높이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 증좌가 아닙니다! 소생이 직접 사회의 집에서 찾아낸 것입니다.”

“…참인가?”

“어찌 대감께 거짓을 고하리이까.”

수염 새로 콧김을 뿜어대는 임 전훈의 모습에 부원군이 주머니를 열어 종이를 꺼냈다. 그림이 펼쳐지는 순간 임 전훈의 얼굴이 흥분으로 휩싸였다. 적장의 목이라도 베어온 듯한 뿌듯함 탓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부원군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대단한 인재로다. 어찌 아직 한직에 있는가.”

“황송한 말씀입니다.”

“화용군의 낙관이 맞군. 그 자가 그림으로 이름이 났음은 금상께서 가장 잘 아시지.”

“그림 속 사내도 화용군과 닮았습니다. 정표랍시고 주었나 봅니다,”

임 전훈이 희희낙락하여 덧붙이는 말에 부원군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돌아가 보시게. 내 자네의 공을 잊지 않을 테니.”

“아무렴요. 소생은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드디어 강가 놈을 쳐낼 확실한 패가 제 손에 쥐어졌다. 홀로 남은 사랑방에서 부원군이 기쁨에 몸을 떨었다.

***

“화용월태의 사내가 낮이면 글을 배우고 밤이면 스승을 업고 노네.”

등청하자마자 서책과 붓을 정리하고 있던 김산의 뒤로 성균관 후생인 사서가 노래하듯 말을 걸어왔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그 내용이 심히 괴란한 지라 김산의 미간이 단박에 구겨졌다.

“그게 무슨 노래요?”

“사형, 처음 들으시는 겁니까? 귀가 느리시군요.”

“예삿 노래가 아닌 듯한데.”

노래가 뜻하는 바가 심히 사특했다. 화용군을 가르치는 스승은, 김산이 아는 한 서하가 유일했다. 소름이 끼쳤다. 선비의 생에 이와 같은 추문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게 굳은 김산을 보며 사서가 말을 이었다.

“말씀이라고요. 천치가 아닌 이상 누구를 겨냥하는 노래인지 모를 수가 없을 겁니다. 종학청에 피바람이 불겠어요.”

“고작 노래잖소. 근거도 없는!”

“아니 뗀 굴뚝에 연기가 나겠습니까? 듣자하니 증좌도 있답니다.”

사서가 헛웃음을 치며 답했다. 말도 안 되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증좌라니. 상황이 좋지 못했다. 김산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로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당장 서하를 만나야 했다.

***

“서하야!”

초가집에 들어서며 김산이 서하의 이름을 다급하게 불렀다. 인기척은 없었으나 섬돌 위에 놓인 낡은 갖신은 서하의 것이 분명했다.

“나다. 안에 있느냐?”

“압니다! 잠시만요!”

문을 열기 전에 묻자 안에서 답이 들려옴과 동시에 조금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서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급히 도포를 걸친 듯 이상한 모양의 고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마 화용군이 행행에 따라 나선 후 등청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은 듯 했다. 곧바로 찾은 종학청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해주었으니 말이다.

“얼굴이 어찌 이리 붉어.”

“몸이 뻐근해 조금 움직여보았습니다.”

조금 어색한 말투였지만 김산에겐 지금 급히 물을 말이 있었다.

“지금 그게 중한 게 아니다. 일단 안으로 들자꾸나.”

“무슨 일이십니까? 퇴청할 시간도 아니신데요.”

안으로 들어서자 뜨끈한 공기가 느껴졌다. 김산이 창을 열어젖히며 상석에 자리했다. 제 앞에 앉은 서하는 아직도 뺨을 붉게 물들인 채였다.

“저자에 노래가 돌고 있다.”

“무슨 노래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묻는 얼굴이 해끔하다. 소문이 참이라면, 그럴 리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 쉬이 나오질 않았다. 끔찍한 추문이다. 사제 간의 사통으로 모자라 비역질이라니.

“…아니다.”

“싱겁게 어찌 이러십니까? 무슨 노래요. 말씀을 하셨으면 일러 주셔야지요.”

답답한 듯 말을 잇는 서하를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화용군에게 먼저 물어야 하나. 하지만 방도가 없었다. 멀리서 한 번 본 게 다였고 당장 말을 달려 은원사로 간대도 그를 만날 방법이 있다고 확신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서하를 문책하고 싶지 않았다. 거짓일 것이다. 그럴 리가 없다. 맑디맑은 흰 낯엔 소문과 같은 추잡한 기운 따윈 한 점도 어려 있지 않았다. 헛된 추문이다. 결론을 내린 김산이 화제를 돌렸다.

“네 집에만 있느라, 저자에 나간 지 오래되었을 것 같아 놀리려 한 말이다.”

“뭡니까. 대체.”

“밥은 먹었느냐.”

서하에게 추궁할 수는 없었다. 뚜렷한 근거도 없는 마당에, 그건 못할 짓이었다. 밥을 먹었느냐는 물음에 그저 고개를 젓는 서하는 제게 아직도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비쳐졌으니까.

***

그런 김산이 화용군을 만나게 된 건 생각보다 빠른 일이었다. 서하와 석반을 먹은 후, 그의 초가집을 나서자마자 골목길에서 화용군을 마주했기 때문이었다. 대놓고 저를 쏘아보는 시선이 검고 어두웠다. 서하의 집에서 나왔기 때문일까. 이 골목엔 서하의 초가집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그 귀한 몸으로, 어찌 이곳에 걸음한 걸까.

멀찍이 세워둔 검은 말이 눈에 들어왔다. 은원사에 있어야 할 화용군이 예정보다 빠르게 도성에 도착했다. 그것도 말을 달려서. 김산의 표정이 삽시간에 구겨졌다.

“누구지.”

“화용군이시군요. 예는 어쩐 일이십니까.”

저보다 큰 키가 몹시 압도적이었다. 무관 중에도 이런 거구는 없었다. 깎아 만든 것 같은 얼굴은 멀리서 봤을 때보다 한층 뚜렷하고 사내다웠다. 하지만 그 점마저 김산에겐 나쁘게 보였다. 필시 그의 낯짝 탓에 그와 같은 사특한 소문이 돈 것이다. 김산이 속으로 화용군을 매도했다. 우리 서하가 그랬을 리 없다. 우리 서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니까. 제 자식을 싸고도는 아비 같은 생각을 하며 김산이 화용군을 노려보는 사이, 화용군이 미소를 띤 채 답했다.

“나를 아나보군.”

“모를 리가요.”

“나도 그대를 안다오.”

예상외의 답에 김산이 주먹을 꽉 쥐었다.

“김 문학이 아니오? 저하를 모시는.”

떨어지는 목소리가 어쩐지 칼날 같다. 사실이었지만 어쩐지 그의 눈빛은 그보다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았다.

“잘 아시는 군요.”

“내 스승님을 보러 왔나보군.”

깍듯이 스승이라 칭하고 있음에도 초가집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불쾌하게 느껴졌다. 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 순간 김산은 깨달았다. 만약 노래를 몰랐더라도 자신은 의심했을 것이다.

“행행에 따라나서신 걸로 아는데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예정보다 이르게 도착했소. 제자가 스승께 문안인사 드리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닐 텐데.”

추궁을 해야 하는데. 어쩐지 쉬이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화용군은 노래가 퍼졌다는 걸 알긴 할까. 사실이건 아니건 제동을 걸 필요는 있었다. 김산이 저를 스쳐 지나가려는 화용군에게 일갈했다.

“자중하십시오!”

“…무얼.”

자꾸만 화가 솟구쳤다.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그에 대한 분노가 동시에 치밀었다.

“저자에 화용군과 사회를 두고 더러운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진실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언행을 신중히 하란 말입니다!”

그 말에 화용군의 낯이 일그러졌다. 성큼 다가온 그로 인해 김산의 낯에 그늘이 졌다. 명백한 위협이었으나 그럴수록 김산은 굴하지 않았다.

“사실도 아닌 더러운 소문으로 인해 서하 저 아이가 감당하게 될 죄를 생각은 해보셨습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벌을 받게 될 지도 모르는 서하가 가엾고도 가여웠다. 그런 김산에게 화용군이 물음을 던졌다.

“문학이 진노한 이유가 뭐지? 종친 대접을 받는 내가 스승과 계간한 게 화가 나나? 아니면 그대가 아끼는 서하가 나와 배를 맞춘 게 화가 나는 건가?”

김산의 눈이 경악으로 크게 뜨였다. 가히 충격적인 질문이었다.

***

“저자에 나가 볼까.”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차였다. 화용군이 은원사로 가기 무섭게 일이 없어졌다. 그날 다과를 들고 저를 찾아온 임 전훈이 제게 당분간 쉬어도 좋다는 언질을 주었다. 공으로 녹봉을 받는 건 물론 좋은 일이었으나 어쩐지 멋쩍었다. 선진들은 일이 없어도 등청하여 잡일이라도 하는데 제가 너무 노는 건 경우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임 전훈이 등을 떠밀 듯 휴식을 취하라 하니 반박할 말이 없었던 탓이다.

결국 집에 눌러앉아 음서를 읽으며 하릴없이 손장난이나 하는 시국이었다. 예상치 못한 김산의 방문에 호들갑을 떨어야 했던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화용군이 없으니 적적하다. 우습게도 그가 보고 싶었다. 문갑 안의 그림을 꺼내 볼까도 싶었지만, 그의 그림을 보면 더욱 그가 보고 싶어질 듯하여 그만두었다. 이제는 꺼내 보지 말아야지, 싶기도 했다. 화용군도 없는데 괜히 그걸 보는 게 더 우스웠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김산을 잡아 함께 저자에 나가는 건데.

“오랜만에 산보나 좀 하지, 뭐.”

휘영청 뜬 달이 제법 멋스러울 것 같았다. 시조나 한 수 읊어볼까. 어쩐지 그리움에 대한 시들이 떠오르는 게 기묘한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섬돌을 디디기 무섭게 마루에 앉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그걸 본 서하가 속으로 비명을 내질렀다. 귀신을 본 적은 없지만 시커먼 인영이 귀신일까 두려웠다.

“뉘, 뉘십니까?”

“이제 주인 얼굴도 못 알아보지.”

귀신이 아니라 화용군이었다. 반가움에 제지할 새도 없이 먼저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리고 제 입꼬리가 멋대로 휘어진 것을 안 서하가 빠르게 얼굴을 뭉갰다. 내가 왜 이러지. 그리고 문득 그가 없는 사이 손장난 친 것을 들킬까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들키면 홍희전 꼴이 날 줄 알라고 했는데, 물색없이 기대가 된다. 서하가 그런 스스로를 꾸짖으며 화용군에게 연유를 물었다.

“어찌 오셨습니까?”

“그대가 보고 싶어서. 그대는 아니었나 보군. 애달프다.”

조용히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서글펐다. 저까지 서러워질 만큼. 민망해진 서하가 헛기침을 하며 화용군의 곁에 다가섰다. 보고 싶다는 말이 얄궂다. 그는 그저 육체를 말함일 텐데도 그 말을 듣자 그에게로 쌓여가는 제 감정이 떠올랐다. 저를 보지 않고 멍하니 달만 보는 화용군에게 서하가 용기 내어 질문을 던졌다.

“제가 보고 싶어 예정보다 이르게 오셨다는 뜻입니까?”

“그러면 아니 되나.”

아니 될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답할 수가 없었다. 차오른 달이 희게 세상을 비추고 있었다. 세상에 오롯이 둘만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상하다.

“…언제 아니 된다 하였습니까.”

“이리 가까이 앉도록 해.”

“누가 보면 어찌 합니까.”

“다 죽여 버리면 된다.”

등골이 서늘한 대답이었다. 그는 몹시 피로해보였다. 서하가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리는 바깥을 살피며 화용군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가만히 올려다보며 묻자 화용군이 서하를 마주보았다. 허공에서 겹친 시선이 아지랑이처럼 얽혀든다. 어쩐지 창피해진 서하가 먼저 눈을 돌렸다.

“어찌 이리 어여쁘냐.”

욕정과 결이 다른 감정이 묻어나는 물음에 서하가 움찔했다. 이상하다. 제 낯을 말함인가. 그의 시선을 막아내듯 서하가 벽을 치며 답했다.

“…살을 섞으니 그리 보이는 것뿐입니다.”

그리 답할 수밖에 없었다. 왜 나를 저렇게 보나. 그러자 화용군이 서하의 어깨에 턱을 얹으며 귓가에 대고 물었다.

“허면 그대 눈에도 내가 어여뻐?”

이상한 물음이다. 흘깃 본 얼굴이 서하의 가슴께를 저며 놓았다. 쉬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제자가 묻질 않아.”

제자로서 묻는 것이 아닌 듯한데. 가만히 눈을 굴리던 서하가 조용히 답했다.

“살을 섞으니… 그리 보이는 것뿐이래도요.”

그래. 나도 당신이 어여뻐 보인다. 실상 첫 대답도 제게 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살을 섞으니 그가 자꾸 좋아지는 것이다. 허리춤을 그러쥐는 손바닥이 뜨거웠다. 옷자락 너머로도 느껴지는 체온이 달고 음험했다.

“살 섞는 것을 멈추면 아니 되겠군. 그대가 날 어여삐 봐주는 게 좋으니까.”

귓가에 퍼지는 한숨이 뜨겁고… 좋았다. 결국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이 사내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잔인한 사실을.

***

“흐읏, 으…….”

눈이 가려진 채 뒤로 그의 것을 가득 물고 찔려지니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포승줄에 묶이니 더욱 죄인 같아서,

“나리, 하, 아윽……. 이제, 그만, 아!”

“그대를 가둬두고 싶어. 아무데도 못 가게.”

진심인지 아니면 그저 정사 중에 하는 삿된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문제는 제가 그 말이 싫지 않다는 것이다. 점점 미쳐가는 것만 같았다. 그와 교접하는 것보다 더 큰 문제였다. 그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잔혹한 사실이…….

“흣, 아…!”

오랜만에 보았으니 배운 바를 선보이겠다며 엉덩이를 흠씬 때려놓고 그것으로 모자라 저를 개처럼 기게 한 사내가 어여뻤다. 왜일까. 제 스스로 옥근을 물게 하고 벗은 채 좁은 방 안을 기게 하고, 끝내는 제 것을 물리고 씨물을 먹인 사내인데. 보고 싶어서 일찍 돌아왔다는 그 말이 물색없이 서하를 설레게 했다.

“하아, 아으, 윽, 악…!”

몸 속 깊숙이 삽입되는 거근에 온몸이 저릿할 지경이었다. 능욕 당하고 싶다. 어루만져 주었으면 좋겠다. 희롱해주길 바란다. 그가 저를…….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 봐.”

화용군이 서하를 덜렁 들어 누운 몸 위로 주저 앉혔다. 묶인 팔로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었지만 자유로운 하반신을 움직여 꼿꼿이 선 그의 성기에 제 뒤를 맞추고 허리를 내렸다. 질척한 마찰음과 함께 안으로 먹히는 성기가 주는 쾌감이 지독히 컸다.

“읏, 아, 학, 나리, 아, 제발…….”

“잘, 하면서 어찌 나를 불러.”

“부족, 으읏, 윽, 부족, 해요. 아, 아흐으, 학, 아!”

허리로 방아를 찧으면서도 화용군이 직접 저를 찔러주지 않는 게 아쉬워 발끝이 자꾸만 오므라들었다. 나를 더 괴롭혀주었으면, 놓지 않았으면. 어차피 서하가 원하지 않아도 관계가 파탄 날 여지는 충분히 있었다. 그가 제게 흥미를 잃는다면, 서하가 원한다 하더라도 저를 찾아오지 않으리라.

그리 생각하자 가슴께가 시꺼멓게 타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치미는 설움에 자꾸만 눈물이 번져 눈을 가린 비단을 함뿍 적셨다. 속울음마저 터지려는 것 같다. 그때 화용군이 비단 끈을 당겨 풀어헤치며 서하를 엎어놓고 성기를 다시금 깊게 박아 넣기 시작했다. 눈앞에 보이는 낯이 서하를 더욱 외롭게 만들었다. 뜨거운 한숨을 내쉰 화용군이 서하의 눈물 젖은 눈가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혼인할 생각은 접도록 해. 그대가, 갖고 싶어졌으니까.”

몰아치듯 으름장을 놓는 말에 서하가 허리를 떨며 실금하듯 사정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이 더욱 무거워졌다.

‘허면 당신은요. 나도 당신을 가지고 싶어졌는데, 당신이 혼인하면 나는 어찌 되는 겁니까?’

언제 이리 마음이 깊어졌나. 소리가 되어 나오지 못한 속마음이 서하의 입안에서 신음과 함께 부서졌다. 아마도, 상심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서하가 쓰러지듯 눈을 감았다. 끝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실 종친이나 다름없는 그가 입때껏 미취한 것이 이상한 일이었으니.

***

“문학이 진노한 이유가 뭐지? 자격도 없이 종친 대접을 받는 내가, 분수를 모르고 스승과 계간한 게 화가 나나? 아니면 서하가 나와 배를 맞춘 게 화가 나는 건가?”

김산은 기가 막혔다. 분노로 온몸이 벌벌 떨렸다. 화용군이 서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게 화가 났고, 다음으로 그가 소문을 시인한 게 김산의 격노를 돋웠다.

“지금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하고 눈을 부릅뜨고 쏘아붙이자 화용군은 느른하게 웃어보였다. 그 태연자약한 태도가 다음으로 김산을 화나게 했다.

“나 또한 도성에 당도하자마자 그 노래를 들었으니 그렇지.”

골치 아픈 듯 머리를 짚는 화용군의 얼굴은 피로해보였다. 어이가 없었다. 화용군이 그 더러운 노래를 들었다는 건 저와는 상관없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서하와… 소문이 사실입니까?”

사실 여부였다. 김산은 어찌나 노했는지 꽉 쥔 주먹 사이로 피를 흘릴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긍정으로 모자라 네깟 놈이 어쩔 것이냐는 뜻이었다.

“금상의 생질인 당신은 목숨을 부지할지언정 서하는 다릅니다! 멸문지화를 당할 수도 있단 말입니다!”

“내가 그 꼴을 두고 볼 성 싶은가?”

“허, 오만이 하늘을 찌르는군. 허면 당장 대비전으로 달려가 고해보십시오. 그럴 수 있습니까?”

그 말에 화용군이 입을 다물었다. 김산은 승기라도 잡은 양 의기양양하게 말을 이었다.

“답해보십시오. 서하를 살릴 방도가 있느냔 말입니다!”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이용만 당한 서하가 가엾고 그를 착취한 화용군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대가 내 스승을 처음으로 회초리질한 장본인이라지?”

의중을 알 수 없는 질문이 떨어졌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같은 소리에 김산의 얼굴이 세차게 구겨졌다.

“그게 지금 무슨 뜬금없는 소립니까?”

“그에게 다가가지마라. 염려도 하지 말고, 꾸중도 말아라. 내 경고는 여기까지야. 더는 참지 않을 걸세.”

“당신이 무슨 상관인데…!”

“내 그 정인 된 몸으로 이 정도 말도 못 하나?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그에게 피 한 방울 안 묻게 할 테니 옆집 형님은 꺼져달란 말이다.”

전의를 상실케 하는 단어였다. ‘정인’이라니.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화용군의 낯은 시종일관 진지하고 굳세었다. 어이가 없었다.

“사내끼리 ‘정인’이라니!”

“좋아. 그대는 그리 편협하게 살게. 좋은 것은 전부 내 차지일 터이니.”

몹시 즐거운 듯 웃으며 어깨를 꾹 누르는 손이 거칠고 무거웠다. 웃고 있는 낯이었으나 적의가 선명하게 느껴지는 태도였다. 허나 그보다 믿을 수 없는 사실이 김산을 더 강하게 짓누르고 있었다. 저를 스쳐 지나가는 화용군을 잡아챌 수가 없었다. 그저 원망스레 그 뒷모습을 바라볼 밖엔.

***

궁궐 안은 조용하고 어두웠다. 화용군이 먼저 도성에 도착한 후, 대비와 금상이 행행을 마치고 회궁한 게 바로 오늘이었다. 중궁전이 아닌 자경전에 든 금상이 시름이 가득한 낯으로 모후를 마주했다. 대비는 그저 찻잔을 기울일 따름이었다. 꽤 긴 시간의 침묵 끝에 대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저녁 문후치고는 많이 늦었습니다. 주상.”

“상의할 일이 있어 이리 찾아왔습니다. 소자의 불효를 용서하십시오.”

도성에 돌아오자마자, 시전을 지나는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에 대해 듣고야 말았다. 황망함에 어찌할 바를 모르며 고하던 상선의 표정이 작금에도 선명히 떠오를 지경이었다. 의도된 것처럼 금상의 귀에 들어온 노래는 지극히 퇴폐적이고 사특한 가사로 이뤄져 있었다. 화용월태의 사내가 영운궁의 주인을 가리킴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 분명했다. 제 생질에게 그런 더러운 추문이 붙다니, 분기가 치밀었다.

“항간에 화용군을 풍자하는 더러운 노래가 유행처럼 불리고 있습니다.”

대비전에 알리지 않고 해결을 보고 싶었으나, 제가 생각한 방도로 대처하기 위해선 대비의 윤허가 필요했다. 그래서 이 늦은 밤에 모후를 찾아왔다. 운을 떼기 무섭게 눈썹을 찌푸린 대비가 입술을 열었다.

“화용군이 스승을 업고 논다고요? 증좌도 있다지요? 무슨 그림이라던데.”

“어마마마…!”

어찌 알고 계시는가. 금상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진노한 금상이 조 상궁을 노려보자 상궁이 엎드려 읍소했다.

“송구하옵니다. 소인의 불찰이옵니다.”

“조 상궁은 어미의 사람인데, 계속 이리 꿇게 할 것입니까?”

자신을 타박하는 말에 결국 금상이 구겨진 미간을 피곤 조 상궁에게 일어나라 명했다. 속이 답답했다. 그런 금상을 보며 대비가 나직이 물었다.

“그림이 어디 있는지, 어떤 그림인지는 알고 계십니까?”

“그를 모르니 미칠 노릇입니다.”

“소문의 출처는, 찾았습니까?”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마 그림을 가진 이가 나타날 것입니다. 그자를 죽여야 하는데…….”

“그게 누구든, 뒤에는 부원군이 있겠지요. 제혁이를 못마땅해하는 이들의 수괴가 아닙니까?”

“늙은이가 욕심만 많아서는……. 중전이 그 치를 닮지 않아 다행입니다.”

대비는 시종일관 침착했다. 금상의 속이 탈 정도로. 금상이 화가 나는 것은 다름 아닌 이와 같은 대비의 태도였다. 증좌까지 있다니 믿지 않으려 해도 방도가 없었다. 들끓는 심정으로는 무뢰배들이 거짓추문으로 제혁을 음해한다 여긴대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장성하도록 여인을 가까이하지 않는 제혁을 속으로 의심해왔기 때문이다. 해서 더더욱 그가 정인이 있다 말해주길 기다린 것인데. 누이의 일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참한 규수를 찾아 백년가약을 맺어줬을 것이다.

“제혁이를 어찌 종학청에 들게 했는지, 그 과정이 얼마나 힘겨웠는지 어마마마께서 모르시진 않겠지요.”

“알다마다요.”

“헌데 어찌 이리 초연하십니까!”

저보다 더 질색할 것이라 여겼던 모후인데 미동조차 없는 표정에 할 말이 없어진 금상이 따지듯 물었다. 대비가 가만 창 너머 달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정분이 나는 것이 어디 사람의 소관입니까? 월하노인의 장난이지.”

“소자는 두고 볼 수 없습니다. 화용군의 혼사를 서두를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추문을 잠재울 방도가 없으니까요.”

대비가 파리한 낯으로 눈을 감으며 조용히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읊조렸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였어도 상심하신 게 이제와 눈에 들어왔다. 금상이 덩달아 눈을 질끈 감으며 말을 이었다.

“사회는 파직시켜 귀양을 보낼 것입니다. 홀로 화용군을 가르쳤다니 추문의 주인공이 분명할 테지요. 노래를 들었다면 그 역시 책임을 회피할 수 없다는 걸 알았을 겁니다. 그림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사회와 연관이 있을 테니 모른 척한대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아니 될 말입니다.”

내처 조용히 침음하던 대비가 단호하게 답했다.

“어마마마!”

“그 아이에게 벌을 주면 추문이 사실임이 공고해지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흥분했던 금상이 입을 꾹 다물었다. 금상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끼는 조카에게 더러운 물을 끼얹은 사회를 벌하고 싶었다. 그래선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차라리 그 아이의 이름을 이번 청국 사신 명단에 올리십시오. 그리되면 제혁이도 더는 찾지 않을 겁니다. 벌을 주었다간 무슨 사단이 날지 몰라요. 어미는 더 이상 내 새끼들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어마마마….”

“그리고 부원군을 부르세요. 지금 금상께 증좌를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났을 겝니다.”

“…….”

“그림을 보이면 책임을 그에게 묻고, 그에 대한 언급이 없거든 한 번은 봐주십시오. 중전에게 태기가 있다니 그 말도 전하시고요. 부원군도 생각이 있다면 자중할 것입니다.”

기침을 하는 대비의 곁에서 조 상궁이 맑은 차를 우려 따라주었다. 금상이 착잡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모후께서 중궁으로 계시던 시절, 연거푸 유산한 후에 낳은 첫 아이가 완혜였다. 그 뒤를 이어 태어난 것이 저라, 애정이 덜하다 하였어도 모후를 존경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몇 번의 산고 끝에 누이와 저를 보았던가. 막달까지 품고도 사산을 해야만 했던 모후의 고통을 모르지 않았다. 저와 누이를 낳느라 상한 몸 탓에 찬바람만 불면 저리 기침병을 앓으시니 더더욱 모후의 앞에선 작아지는 아들이었다.

“…그리 하겠습니다.”

“제혁이 그 아이가 말을 들어야 할 텐데……. 나무아미타불…….”

말을 듣지 않는데도 방도가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된 데는 제혁의 탓이 가장 컸다. 조용히 살다 정인을 만들면 혼사를 맺어주려 했건만, 한순간의 치기 어린 욕정으로 조모와 숙부의 마음을 저버렸으니 마음 없는 혼사 정도는 참아야 옳았다. 게다가 사내를 품다니.

“화용군의 혼처를 알아 보거라.”

“예, 전하.”

“또, 노래가 퍼진 근원지를 추적하고 노래의 가사를 바꾸어 다시 퍼뜨려라. 누구도 원곡을 따라 부를 수 없도록.”

“명 받잡겠습니다. 전하.”

금상의 곁을 지켜선 상선이 명을 받들었다. 최선의, 발 빠른 처사였다. 이젠 조카를 설득해야 한다. 휘영청 뜬 달을 보며 금상이 낮게 탄식했다.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

“…웃기지도 않네.”

한편 세책집에 발걸음을 한 서하는 그 옆의 노점상에서 발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본디 이런 것에 크게 욕심이 있는 편이 아니라 골백번을 다녔어도 이 옆에 이런 노점상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는데.

“나리, 이게 그 귀하다는 홍보석을 세공한 흑립입니다! 게서 보고만 계시지 말고 가까이서 보셔요. 보시는 값은 따로 안 받는답니다!”

신이 난 듯 호객행위를 하는 상점의 주인을 보며 서하가 슬쩍 가까이 다가섰다. 과연 가까이서 보니 더욱 마음에 드는 지라, 주머니를 열고 싶어졌다. 화용군에게 꼭 맞을 것 같은 생김이었다. 홍보석을 세공해 엮은 줄이 까만 갓을 멋스럽게 장식하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시선을 잡아끄는 지라 붉은 보석이 잘 어울릴 것 같은 색스러운 낯이 자꾸만 떠올라 발이 떨어지질 않던 차였다. 주인은 그런 서하의 속내는 모르므로 그저 서하가 쓸 것이라 여긴 듯 했다.

“나리 낯이 훤하시니 이걸 쓰시면 부인께서 함박웃음을 지으실 겁니다. 혹시 아십니까! 오늘 밤 예쁨 좀 받으실지! 헤헤헤……. 음…….”

서하의 얼굴을 보며 준비라도 한 듯 조잘대던 주인이 갑자기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옹송그렸다. 서하가 내게는 부인이 없다 답하려던 차에 입을 꼭 다문 주인을 의아하게 보았다.

“얼마를 주면 내게 팔 텐가?”

제 바로 뒤에서 떨어진 익숙한 목소리에 서하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과연 화용군이 거기 있었다. 서하가 화용군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주인이 새로 나타난 손님의 외관을 훑었다. 최고급 옥을 세공해 만든 게 분명한 관자며, 겉보기엔 화려하지 않아도 돈 냄새가 풀풀 나는 비단 도포만 봐도 바로 전에 눈독을 들이던 선비보다 몇 곱절은 온족해보였다.

“이, 이것은 장인이 만든 것이라 못 해도 두, 아니, 석 냥은 주셔야…….”

“석 냥이라니, 너무 과하지 않은가!”

말도 안 되는 덤터기에 서하가 주인의 말을 가로막자, 주인은 언제 서하를 객 취급 하였냐는 듯 파리 쫓듯 서하에게 손을 휘휘 저어보였다.

“아, 안 사실 거면 저리로 가십시오! 웃기는 나리일세, 그려.”

“아니, 참나…….”

화용군은 서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엽전 세 개를 꺼내 노점상 위에 올려놓을 따름이었다. 기가 찬 서하가 그런 화용군을 억울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제가 화용군에게 주려고 마음에 둔 것인데, 어찌 이리 되나.

“어서 갑시다.”

“예?”

갑자기 제 손을 잡아끄는 화용군의 행태에 서하가 속절없이 끌려갔다. 공대는 무슨……. 그런 저희에게 상인이 희희낙락하는 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올렸다.

“살펴 가십시오! 또 오시고요!”

다신 안 올 거야! 서하가 속으로만 외쳤다. 덤터기를 쓴 것으로 모자라 뺏기기까지 했으니 화가 안 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영운궁 본채 후문으로 들어선 서하가 화용군의 손을 팍하고 뿌리쳤다.

“어찌 그래?”

“됐습니다!”

“이게 갖고 싶어 코흘리개 어린애마냥 침을 질질 흘리며 그 앞에 서있질 않았어?”

“제가 언제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한참 어른인 저를 이토록 능멸하는 그가 어이없었다. 오늘은 화까지 났다. 제가 사서 그에게 주려던 것인데. 하나쯤은 뭐라도 그에게 주고 싶었다. 그래야 그가 언제고 저를 떠나더라도 그 물건을 보면서 저를 떠올리지 않겠나 싶었기 때문이다. 조금 우울해진 서하가 바닥만 보자 화용군이 서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대에게 줄 테니 기분 풀어.”

“됐습니다. 아무 의미 없어졌어요.”

제가 그에게 이렇게 화를 내면 안 되는데. 음서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이런 감정을 내비치지 않았다. 명백히 계약 위반이다.

“어찌 의미가 없어? 내가 그대에게 주고 싶어서 산 것인데.”

“제가 먼저 본 것인데요?”

“그래서 그대에게 주려는 거잖아.”

“제가 갖고 싶어서 사려던 게 아닙니다!”

오리무중 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화용군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고 서하는 심통이 나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

“허면 내게서 사도록 해.”

“예?”

“그대가 내게 값을 지불하고 사가라고.”

솔깃한 제안이었으나 두 냥은 과했다. 서하가 조금 풀어진 표정으로, 그러나 복잡한 심경은 감추지 못한 채 화용군을 쳐다봤다.

“석 냥은 너무 비싼데요.”

“내게 돈을 주려 했어? 값으로 따지자면 이건 석 냥 가지곤 안 되는 가격인데.”

“예? 제가 방금 화용군께서 석 냥에 산 것을 봤는데도요?”

이젠 아예 장사를 하려 드는구나. 서하가 충격으로 얼룩진 낯으로 항변했다. 하지만 화용군은 아무렇지 않게 서하를 마주하며 헛웃음을 쳤다.

“원래 중간상인을 끼면 값이 뛴다. 그것도 모르나?”

“하, 대체 얼맙니까?”

“…그대를 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혼란스러운 감정에 어떻게 답변을 해야 할지 가늠조차 되질 않았다. 서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화용군은 흑립을 손에 올린 채 말을 이었다.

“내게 준다고 한 적이 없어. 갖고 싶다 말했는데도.”

“…어찌 저를 자꾸 시험하십니까?”

“그대는 어찌 나를 시험하지?”

자꾸만 그가 좋아진다. 그러면 안 되는데. 언제고 그는 저를 떠날 사람인데.

“제가 나리께… 저를 드린다고 하면 후회하실 텐데요.”

“어째서?”

서하가 입을 조가비마냥 다물었다. 버리고 싶어졌을 때, 그가 저를 버린다고 하면……. 후회는 제 몫이 될 터였다. 주인이 물건을 버리겠다는데 물건이 주인을 만류할 수는 없었다. 이 흑립처럼 그가 원하는 만큼 가져지고 그가 더 이상 원하지 않으면 버려지리라. 그럼 저는 후회하겠지. 그에게 팔려간 것을. 차라리 노점에 오래토록 남아있었다면 적어도 누군가 사가기 전까지는 누구에게도 버려지지 않을 테니까. 고작 흑립 하나로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어느새 깊어진 마음의 바닥은 더 이상 짚을 수 없을 만큼 아득하고 무량했다.

***

“혼사라니…!”

퇴궐하여 귀택한 부원군이 사랑채에 들자마자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금상께서 친히 사정전으로 부르시기에 그 추문이 드디어 금상의 귀에 들어갔나 싶었건만.

- 화용군이 혼기가 찬지 오랜데 어찌 경은 일언반구 언급이 없는 거요? 아무리 과인의 집안일이라 하나 부원군 역시 과인의 장인으로 한 가족이거늘…….

오히려 저를 꾸중하는 말에 말문이 막혔다. 혼사를 언급한다는 것은 곧 그 추문을 들었다는 뜻일 터. 당장 명일부터 매수한 유생 몇몇이 상소를 올릴 예정이었는데 이렇듯 윤음으로 화용군의 혼사를 읊으시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게다가,

- 좌의정의 여식이 반듯하고 영특하다니 과인의 마음에 찬다오.

대체 어찌 하시려는 건가. 좌의정의 여식은 늦둥이에 무남독녀 금지옥엽이라 그 가문의 세에 기대어 혼담이 들어와도 좌의정 선에서 잘려나가곤 하였다. 허나 금상이 직접 제 생질과의 혼인을 주선한다면 아무리 고고한 좌의정이라도 응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라. 외려 제 사위될 사내의 추문을 안다면 좌의정 쪽에서 반기를 들 수도 있었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금상은 더했다. 도무지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화용군을 꺾어내야 하는데 좌의정의 사위가 된다니. 머리가 아팠다.

- 전하, 외람되오나…….

- 부원군.

- 예, 전하.

- 무슨 말을 하려거든 잘 생각하고 꺼내시오. 국구께서 불명예스러운 일을 당하면, 중전께서 얼마나 상심하시겠소? 듣자 하니 중궁께 태기가 있다더군. 과인의 손으로 중전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게 하지 마시오.

그 말에 부원군이 차게 굳었다. 하나뿐인 아비에게 그 중대한 사실을 알리지 않은 여식의 의중을 알 것 같았다.

‘자중하십시오.’

마지막 만남에서 제게 꾸중하듯 말하던 여식의 말을 떠올린 부원군이 주먹을 쥐었다.

- 소신, 아둔하여 전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 부원군의 패가 무엇이든, 과인은 수작질을 벌이는 신하를 봐줄 생각이 없소.

결국 지엄한 윤음에 들고 간 그림은 꺼내 보지도 못했다. 추문을 언급하시면 증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 볼까 했는데……. 금상은 모든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쓸모없다.”

화용군의 그림이 사회의 집에서 나왔으니 증좌로 충분했으나, 사회가 아닌 화용군의 모습을 담은 그림이라 모호했다. 게다가 의금부에서 수색한 것도 아니고 훔쳐낸 것이니 이것이 사회의 집에서 나왔노라 말하려면 임 전훈의 증언이 필요했다.

- 소, 소생은 모르는 일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듣고 온 것인지 임 전훈은 눈에 띄게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금상이 저보다 먼저 그 치에게 손을 쓴 게 분명했다. 이까짓 그림 한 장으로는 사통의 증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막말로 그저 자화상을 그린 것이라, 그리고 그를 잃어버린 것이라 꼬리를 자르면 할 말이 없었다. 부원군이 화용군의 그림을 화로에 구겨 넣으며 잇새로 욕설을 뱉었다.

“이리되면 사회 놈을 쳐야 하나.”

하지만 그도 요원했다. 화용군이 몇 번 데리고 논 장난감이나 다름없을 사내놈을 친다 한들 화용군이 꺾어질 리 만무했다. 외려 시원하게 여길 수도 있다. 화용군이 혼인한 후에도 그 사내를 찾다 사통이 탄로 나는 게 가장 좋은 길이었으니……. 생각보다 몸정이 깊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끝까지 포기하지 못하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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