五. 무주공당無主空堂
임자가 없는 빈 집.
“또 나 몰래 음탕한 짓을 저질렀다간… 『홍희전紅䐅傳』 꼴이 날 줄을 알아.”
정액으로 범벅이 된 엉덩이를 아프게 꾹 누르며 속삭이는 말에 서하가 몸을 얕게 떨었다. 화용군이 언급한 홍희전은 바로 이틀 전에 준 서책의 제목이었다. 최근 세책집에서 가장 불티나게 팔리는 서책이었다. 붉은 엉덩이 이야기라니 지나치게 원색적이고 노골적이다. 서하가 별다른 말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화용군이 벗어 두었던 도포를 걸치고 갓끈을 맸다.
“고개만 끄덕이는 것은 어디서 배운 예의지?”
“…알겠습니다.”
서하가 기진맥진하여 답했다. 명일부터 화용군이 주상전하와 대비마마를 모시고 왕실 원찰인 은원사까지 행행을 나선다. 거리가 꽤 되니 못 해도 사흘은 머물고 올 테고 오가는 시간까지 합치면 며칠은 못 볼 게 뻔했다. 기껏해야 하루 이틀 떨어져 있던 것에 비하면 긴 시간이었다. 행위 후에는 항상 뒷마무리를 해주던 화용군이었으나, 새벽에 입궐해야 하는 몸이었으므로 영운궁에 들렀다 가려면 시간이 없는 듯 했다. 오늘까지 이런 짓을 해선 안 되는 일이었다. 제가 먼저 만류했어야 했는데……. 며칠 못 볼 것을 생각하니 그를 거절하기가 싫었다. 애초에 거절할 수도 없었고.
며칠 전, 여느 때처럼 서하의 벗은 모습을 그리던 화용군이 화룡점정 마냥 매 맞은 자국을 그려 넣던 때였다. 서하가 그 곁으로 다가가 그림을 빤히 봤다. 화용군은 그날 이후로도 그림을 몇 장 더 그렸다. 흘깃 본 것이지만 궁중화원에 견줘도 손색이 없을 실력이었다. 다만 그림 속 남자가 저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을 뿐. 이리 제대로 보니 춘화도라는 점을 제하면 명화래도 믿을 지경이었다.
- 사내끼리 동침문서를 받아둘 수도 없으니 이거라도 가져야 수지가 맞지.
- …허면 제게도 한 장 주십시오.
- 별스럽군. 그대의 모습을 보며 수음이라도 할 셈이야?
- 문서 대신이라면서요. 저도 나리께서 도망치실 때의 방편을 찾아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니 나리의 모습을 그려 주십시오.
- 내가 도망을?
그 말에 화용군이 평소와 다른 낯으로 웃었다. 대체 무엇이 그를 만족스럽게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미소에 가슴께가 떨렸다. 용기를 낸 결과로 서하의 작은 방, 문갑 속에 화용군이 건넨 그림이 자리했다.
- 이리 겹치면 내가 그대를 안은 모양새가 되지.
화용군이 평소와 다르게 비단이 아닌 얇은 화선지에 그림을 그려내기에 제게 줄 것이라 성의를 덜 하나 하였더니 그게 아니었다. 서하는 그를 만나지 못하는 날이면, 문갑에서 그림을 꺼내 그의 낙관이 자리한 그림 하단을 손으로 만지작거리곤 했다.
서하가 기나긴 상념 끝에 괜히 벗은 몸이 민망해 손에 잡히는 도포를 걸쳤다. 다소 무의미했으나 그럼에도 나체를 가려주니 없는 것보다야 나았다.
“…조심히 다녀오십시오.”
그런 살가운 인사를 올릴 만한 사이는 아니었는데, 돌아서 나가는 화용군을 보다 저도 모르게 그 말이 튀어 나왔다. 무슨 심경의 변화였는지는 모르겠다. 그가 나가면 제대로 목간을 해야지. 딱히 대답을 바라지 않고 던졌던 인사였기에 서하의 시선은 그의 너른 등을 떠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어째선지 들려야 할 문 여닫는 소리가 없어 다시금 고개가 돌아갔다. 그리고 우두커니 선 화용군이 보였다. 달빛이 창호지 너머로 번진 탓에 이쪽을 보고 선 화용군의 표정이 잘 보이질 않았다. 그가 별안간 잇새로 작게 욕설을 뱉었다.
“어…찌 다시 오십니까.”
“그대 잘못이야. 내 오늘 예서 자고 갈 것이니 그 도포 걸친 채로 한 번 더 하지.”
뜻 모를 말이었으나, 그의 말대로 다리를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사출한 씨물로 젖은 뒤가 음란한 소리를 내며 벌어졌다. 동이 트기 전에는 의관을 정제하고 궐로 향해야 할 것인데 어째선지 제게로 돌아온 그를 밀어내기가 싫었다. 갈수록 그에게 약해진다. 생전 이런 적이 없는데, 서하로서도 영문 모를 변화였다.
***
“어찌 그리 급히 오는 게야. 함부로 뛰다가 다치면 어찌 하려고.”
못 본 새 얼굴이 많이 상한 김산이 술기운에 손을 떨고 있었다. 차분히 묻는 말에 어쩐지 뼈가 있는지라, 서하가 쉬이 답하지 못하고 우두커니 곁에 섰다. 심장이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반 시진 전, 홀로 퇴청하여 제 집에 들어서기 무섭게 을덕이 눈물로 범벅이 된 주름진 낯으로 제게 매달렸다.
- 도련님, 우리 주인어른 가엾어서 어떡합니까. 도련님이 좀 살펴주십시오…….
그 말에 서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인과 헤어진 김산이 그저 잘 살 것이라고만 여긴 제가 어리석었다. 제게 별 말이 없으니 이젠 쾌차했겠지, 그리 여겼는데. 듣자하니 우 부인이 집을 나선 게 벌써 보름도 전의 일이라 하였다. 어찌 입때껏 제게 일언반구 전하지 않았을까. 급한 마음에 달려 간 그의 집에선 김산이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으로 쓰러진 것 마냥 앉아있었다.
“…형님.”
큰 산처럼 버티고 서 늘 호쾌한 웃음을 짓던 그가 마치 죽어버린 고목처럼 허탈하게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에게 설레지 않는 것과 별개로 참람하여 가슴이 주저앉는 것만 같았다.
“어찌 이러고 계십니까.”
그리 물으며 그의 옆에 자리하자 김산이 버석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서하를 응시했다. 상심한 그의 낯이 어두워보였다.
“서하야. 나는 부인을 이해할 수 없다. 놓아주기 싫어. 헌데 이게 부인을 은애하는 마음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내 집착 때문인 건지 분간이 가질 않는다.”
“….”
“우린 어려서부터 함께 자랐지. 친구처럼, 남매처럼. 백년가약을 맺고 해로하기로 했는데 한순간에 이리 되니 마음이 아프다.”
술이 과했을까. 김산의 숨결에 술 향이 가득했다. 예전 같았다면 이런 그를 보며 일순 설렜을 수도 있겠다, 하는 몰염치한 생각이 들었다. 외사랑이 되다 만 제 욕정이 갈 곳을 찾았기 때문일까.
“진정으로 은애하셨다면 잡아두셨겠지요.”
해줄 말이 없어서인지 정 없는 모진 말이 터졌다. 김산의 미간이 괴롭게 구겨졌다.
“너도 내가 부인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 모르겠다. 믿었던 사람이 날 버린 게, 지금은, 그게 너무…….”
김산이 지친 이마를 서하의 어깨에 기댔다. 서하도 그의 심정을 느껴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그저…….
“너는 날 떠나면 안 돼. 약조해야 해.”
그 말만이. 제 손을 부여잡는 그 말만이 족쇄가 되어 서하를 묶었다. 제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주었던 김산을 버릴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김산이 제게 닿은 순간 느낄 수 있었다. 그 긴 시간 이어져 온 연정이 끊어졌음을. 이 접촉으로도 화용군이 떠올랐다. 기분이 이상했다. 담장 너머 그런 서하와 김산을 살피는 다른 눈은 알지 못했다. 달도 없이 어두운 밤하늘 탓이었다.
***
“화용군,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이는구나.”
나들이나 다름없는 행행이었다. 금상은 효도를 행하기 위해 대비전과 그의 총아인 화용군을 대동했고, 그나마도 내처 암자 안에서 상소를 보느라 바빴다. 문수보살의 주처라는 오대산엔 단풍도 지고 눈이 쌓이고 있었다. 동장군이 성큼 가까이 온 것이 느껴지는 풍광이었다. 한양에도 눈이 내리면 보기 좋을 텐데.
“배우는 기쁨이 큽니다.”
거짓이 아닌 참으로 제혁이 대비께 답을 올렸다. 근래 들어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서하를 놓고 온 것이 유일하게 싫은 일이었다. 서하는 훌륭한 스승이었다. 여러모로. 그 덕분에 지루했던 생에 처음으로 해 뜨고 지는 것이 기대되기까지 했다. 날이 밝으면 종학청에서 그의 음전한 자태를 감상하고 해가 지면 그의 음탕한 모습을 볼 수 있었으니 말이다. 볼기짝을 때리고 구속하며 거친 교접을 맺는 것이 좋았다. 머리가 텅 비는 것 같은 쾌감이었다. 그 중 맞으며 기뻐하는 대상이 서하라는 게 제일 마음에 드는 부분이었다. 저를 보는 눈이 예쁘고, 쾌감에 벌어지는 입술이 청초하다. 자꾸만 겁을 내는 것도 사랑스러웠다. 그 눈이 다른 이를 향할 때면 그 이를 도륙 내고 싶어질 만큼.
“옳아. 종학청에 상을 내려야겠다. 조 상궁.”
“예, 마마.”
“자네가 직접 종학청 살림을 좀 챙겨주고, 관원들에게 문방사우를 내리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걸음이 점점 느려지자 제혁이 상궁보다 먼저 대비를 부축했다. 서하에게도 문방사우가 내려질 것이다. 그가 하사받은 붓으로 그 몸에 제 이름을 새겨 넣고 싶었다.
“할마마마, 산보는 그만두시고 소손과 차 한 잔 어떠십니까. 날이 많이 찹니다.”
“오냐. 그러자.”
주름이 가득한 손이 제혁의 팔 언저리를 쓰다듬었다. 애정이 묻어나는 손길이었다. 그때 뒤에서 주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마마마. 소자도 끼워주시지요.”
“주상.”
용포가 아닌 도포 차림의 주상은 평범한 선비처럼 보였다. 대비전을 제외한 모두가 무릎을 꿇었다는 점만 제하면 누구도 그가 이 나라의 만인지상이라는 사실을 믿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사람 좋은 미소가 자애로운 아버지 같았다.
“다들 일어나라. 번거롭게 예는.”
“어찌 예를 게을리 하겠습니까.”
제혁이 먼저 무릎을 세워 자리에서 일어서며 제 숙부 되시는 주상을 마주했다. 불경하게도 내려다볼 수밖에 없는 거구였으나 주상은 이미 익숙한 듯 그런 생질의 팔뚝을 툭툭 쳐 보였다.
“글공부는 어떠하냐.”
“안 그래도 방금 어미가 종학청에 상을 내리라 일렀답니다. 배우는 기쁨이 크다니 좋은 일이에요. 진즉에 종학에서 수학해야 했음을, 너무 늦었지요.”
언중유골이라. 제혁이 그런 대비를 묘한 눈으로 봤다. 애당초 평범하고 다정한 모자관계란 것은 구중궁궐에서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금상은 그런 모후의 말에도 언짢은 기색 없이 송구한 듯 답했다.
“소자가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해 모후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앞으로는 특별히 더 신경을 쓰지요.”
천하의 효자로다. 모후를 존경하나 어려서 곁에서 자라지 못한 탓에 모정을 그리는 주상이었다. 이전에는 그런 두 상전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집중하기 바빴는데 이상하게 자꾸만 생각이 다른 곳으로 번졌다. 제혁은 철없게도 하루빨리 도성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자리를 옮겨 암자의 정원에 마련된 정자에서 차를 마시는 중에도 자꾸만 두고 온 서하가 생각나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그런 제혁을 눈치 챈 주상이 대비와 주고받던 대화를 멈추고 제혁을 쳐다봤다.
“우리 조카가 정신이 다른 곳에 있는 듯한데, 사내끼리 술 한 잔 해야 되는 거 아닌가.”
“송구합니다.”
“어미가 자리를 비켜주지요. 허나 사찰에서 술은 아니 됩니다.”
대비께서 말을 꺼내니 무를 수도 없는 지라 얼결에 주상과 독대를 하게 됐다. 궁인과 운검들을 조금 멀리 물린 주상이 웃는 낯으로 제혁에게 말을 걸었다.
“글공부는 어떠하냐. 아까 제대로 답을 듣질 못 해서.”
“부족하나 열심히 배우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살펴주신 덕분입니다.”
깎아 만든 듯 바르고 고운 말들이었다. 그런 조카를 바라보던 주상이 침음 끝에 조용히 읊조렸다.
“과인이… 너를 많이 아끼고 있음을 유념하라.”
“황송합니다. 전하께서 제게 부친이나 다름없는 분이심을 모르지 않습니다.”
아비 없이, 어미 없이 살아온 생애에 주상과 대비만이 제가 기댈 곳이었다. 그를 모르면 금수나 다름없으리라. 다만 그들의 총애는 멀고도 아득했다. 혈육 간의 따스한 애정이 아닌 측은지심과 후회가 바탕이 된 마음이었으니까. 제혁은 그들이 저를 통해 운혜공주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김이 오르는 찻물을 한 잔 더 따르자 손끝에 온기가 전해졌다.
“해서, 정인이라도 생겼느냐?”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질문에 제혁이 마시기 위해 들이키던 찻잔을 멈췄다. 주변을 물린 이유가 이건가, 최대한 여상한 표정으로 제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어마마마께서도 내놓고 말씀은 않으시지만, 네 혼사를 내심 기다리고 계신다.”
약관을 넘겼으니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는 문제였다. 제혁이 금상의 윤음을 가만 듣고 있으니 새소리만 가득했다.
“누구든 좋으니, 정인이 생기거든 과인에게 먼저 말해야 한다. 모후께 네 어머니가 아픈 손가락이었음을 잊지 말거라.”
끔찍이도 싫어하던 사내와 혼인한 탓으로, 일찍이 세상을 저버린 딸의 죽음을 왕실의 탓으로 돌리는 대비였다. 아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저 역시 그리 될까 겁이 나시나. 애초 혼사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나이 차면 해야 할 숙제처럼 여겼으므로 몇 번이고 들어온 그 말을 다시금 되새길 필요는 없었다.
“명심하겠습니다.”
혼인이라는 말에 서하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아직 미취한 몸임을 모르지 않으나 그 역시 조선 땅에서 사내로 났으니 언제고 혼사 이야기가 나올 테지. 게다가 저보다 나이가 많았다. 제혁은 그저 돌아가면 그것부터 추궁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조금 남은 찻물을 들이켰다. 즐거운 한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