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결혼 (16/24)

외전. 결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아침, 느지막이 잠에서 깬 서하가 뻐근한 손목을 주무르며 침실 밖으로 나왔다. 눅눅한 공기와 근육통이 동시에 몸을 짓눌러 기상이 무척 힘겨웠다.

“…피곤해.”

침실 밖으로 나온 서하의 목엔 까만 가죽 목줄과 목걸이가 걸린 채였다. 서하가 버릇처럼 목걸이 아래서 달랑거리는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벽에 걸린 시계의 시침은 8을 가리키고 있었다. 출근 시간이 이른 강제혁이 내려둔 커피가 진한 향기를 풍기며 서하를 맞이했다. 좀처럼 커피를 끊지 못하는 서하에게 항복한 강제혁이 특단의 조치로 제가 내린 것만 마시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에, 서하에게 이 커피는 구세주나 다름없는 귀한 것이 되었다.

어느덧 강제혁이 고등학교에 체육 교사로 부임한 지 두 달이 지났다. 막 복학해서 제 강의를 들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커피를 잔에 따른 서하가 비 내리는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겼다. 새삼 그를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시간은 흐르는 물처럼 빠르게 지난다는 말이 옳았다. 어느덧 4년이 흘렀다. 목덜미에 걸린 목줄은 이제 없는 게 어색할 지경이었다.

서하는 박사 과정을 수료하고 논문을 쓰며 연구소에 출퇴근하는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교양 강의를 하기도 했다. 오늘이 마침 그날이라, 서둘러 외출 준비를 했다. 외출할 때면 개목걸이는 빼서 걸어두고 강제혁이 선물해준 시계와 넥타이, 반지가 걸린 목걸이를 항상 착용하고 나간다. 작게 이니셜이 새겨진 모든 물건이 저 역시 그의 소유임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아 설렌다.

그를 만난 지 3년 쯤 되었을 때, 오피스텔에서 반쯤 동거하던 생활을 접고 강제혁의 본가로 들어왔다. 왠지 처가살이를 하게 된 신랑의 심정이었지만 리모델링을 마친 그때의 그 집은 완벽하게 서하와 강제혁을 위한 공간이 되어있었다. 이 집에서 의자에 묶인 채 피를 흘리고 있던 강제혁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갈 때도 있었으나, 함께 사는 1년 동안 새로운 기억이 더욱 많이 새겨졌다.

서하가 답사를 다녀올 때마다 사온 인형이나 찻잔 같은 기념품이 자리를 메우고, 강제혁 역시 조모가 바라던 모습이 아닌 서하와 함께 만들어간 제 흔적을 곳곳에 남겼다. 증거로 2층의 어린 시절 강제혁이 사용하던 방은 조금 더 증축되어 SM 플레이를 위한 도구와 가구를 숨겨둔 엄청난 공간이 되어 있었다. 서하가 좋아하는 음식과 강제혁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워진 냉장고, 채소와 과일이 나는 작은 텃밭, 아침마다 물고기에게 밥을 주곤 하는 연못도 있었다. 물론 마당은 야외 플레이를 위해 쓰일 때가 많았지만.

「저 출근해요. 못 일어나서 죄송해요.」

서하가 운전석에 올라 안전벨트를 맨 후에 메시지를 보냈다. 강제혁이 사준 차였다. 아무래도 이 집으로 이사한 후에는 자차가 있는 게 편해서 운전면허를 따고야 말았다. 면허 시험에 합격한 것으로는 부족해서 강제혁에게 직접 연수를 받아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실수를 할 때마다 마일리지를 쌓고 그만큼 밤에 갚아야 했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는 운전에 도가 튼 서하가 부드럽게 액셀을 밟으며 주차장을 나섰다. 한적한 도로를 벗어나 조금 복잡한 구간으로 들어설 쯤 휴대폰이 울렸다. 핸즈프리로 전화를 받은 서하가 저도 모르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못하고 답했다.

“주인님.”

[목소리가 좋네. 운전 중이에요?]

그도 웃고 있는 것 같은데, 저만 표가 나나 싶어 서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네. 사거리 나왔어요.”

[운전하느라 바쁠 텐데 용건만 간단히 할게요.]

마침 정지 신호에 걸린 차였다. 운전 중만 아니면 더 오래 통화를 할 텐데, 이제 막 학교에 적응하는 신출내기 교사인 그의 사정을 생각하면 용건만 간단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더욱 아쉬워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걱정이 된 탓에 서하가 숨죽인 채 묻자 강제혁이 낮게 웃으며 말했다.

[보고 싶어서. 오늘 늦을 것 같은데 어쩌지.]

“저녁 같이 못 먹는 거예요?”

[최대한 맞춰서 들어가 볼게요. 갈 때 연락할 테니까 연락 없으면 먼저 먹고 있어요.]

아침에도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저녁까지 함께 못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여간 서운한 게 아니었다. 이만 통화를 마무리하려던 때, 수화기 너머로 학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여기서 뭐 하세요? 저…….]

“어….”

[이따가 전화 또 해요.]

툭 끊어진 전화에 서하가 머쓱해진 입술을 씹으며 운전에 집중하려 했다. 제가 모르는 강제혁의 시간이 점점 많아진다.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겠지만, 괜히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진다. 그를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그에게 칭찬을 받고, 때론 혼이 날 학생들이 말할 수 없이 부러워졌다. 인기가 많을 것이라고 내심 생각하긴 했지만 이렇게 직접적으로 듣고 나니 서운했다. 고등학교 시절 젊은 체육 교사라 함은 인기를 독차지하는 아이돌 같은 존재였으니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을 것 같았다. 더군다나 강제혁의 외모를 생각하면 인기가 없을 수 없겠지.

“…부럽네.”

학생들에게 인기 만발일 그가 부러운 게 아니라, 그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들이 부럽다. 서하가 제 유치찬란한 질투에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정신을 다잡았다. 괜히 오늘따라 나이 들어 보이는 얼굴이 신경 쓰여 볼을 꾹 눌렀다.

***

“스승의 날 없앴는데도 이렇게 선물들을 주네. 선생님은 담임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많이 받았어요?”

동료 교사의 질투심 어린 질문에 강제혁이 대외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강제혁의 책상 위에는 카네이션과 초콜릿 따위가 가득이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없어진 스승의 날이지만 학생들 차원에서는 꽤 큰 행사라 그런지 이렇게 선물이 주어지곤 했다. 단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강제혁이었지만 스승의 날을 생각하니 제 사랑스러운 강사 선생이 떠오르는 것이다. 강단에 선 모습이 얼마나 야한지 그는 전혀 모를 것이다. 이 순간에도 서하를 제 품에 가둬두고만 싶었다.

“애들이 착해서 그런 것 같아요.”

“착하기는. 선생님이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셔서 그래요. 얼마나 지랄둥이들인데…….”

“귀엽잖아요.”

“귀여워요? 얼마 전에 학생 하나 급식 빨리 먹겠다고 3층에서 뛰어내려서 구급차 온 거 모르시죠?”

학생들 이야기로 왁자지껄해진 교무실에서 강제혁은 대외적인 대답을 내놓으며 홀로 서하 생각에 빠졌다. 하필 회식이라, 일찍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 몹시 언짢았다. 스승의 날을 빌미 삼아 잔뜩 괴롭혀주려 했는데. 그는 최대한 빨리 도망쳐 나올 계획을 짜며 메시지를 보냈다.

***

“저녁 먹자.”

“같이.”

강의가 끝나기 무섭게 들이닥친 김산과 혜인의 등장에 서하가 놀란 마음을 다독이며 도끼눈을 떴다.

“갑자기 튀어나오면 어떡해요.”

“우 교수님, 우리 천천히 튀어나올 걸 그랬나 봐요.”

“튀어나오지 말라는 뜻이잖아. 그냥 나올게.”

만담콤비도 아니고 세상 참 춥다. 이 둘이 몇 년 전에 결혼 이야기가 오갈 만큼 깊게 교제했던 사이라는 게 거짓말 같았다. 할리우드야, 뭐야. 두 사람의 연애가 생각보다 얕고 가벼웠음을 모르는 서하가 가방을 챙기며 연신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째려봤다.

“혜인 누나 이민 간대. 송별회 해야 돼.”

“이민이요?”

제법 놀란 서하가 눈을 크게 뜨고 혜인을 쳐다봤다. 나이를 먹을수록 더 멋있어지는 사람이다. 특이한 사람이라는 것과 별개로 자꾸만 한계 없이 앞으로 나가는 혜인이 존경스러웠다.

“언제 어디로요?”

“한잔 하면서 얘기해. 여기 계속 세워둘 거야?”

혜인이 김산의 팔뚝을 팔꿈치로 푹 찍으며 짜증을 냈다. 결국 혜인의 송별회라는 얘기를 듣게 된 서하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옮겼다. 강제혁도 오늘 늦는다고 메시지를 보내왔고 저도 혼자 먹긴 좀 적적했으니 보고만 제대로 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뭐, 어린 애인한테 허락 맡냐?”

서하가 학교 근처 선술집으로 이동하며 메시지를 보내고 있자니 혜인이 눈썹을 좁히며 퉁명스레 물어왔다. 저와 강제혁의 관계를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혜인이었기 때문에 서하가 구태여 부정하지 않으며 눈을 굴렸다. 그리고 김산이 콧방귀를 꼈다.

“아직도 그렇게 좋냐?”

“선배도 애인 있으면서 왜 저한테만 그래요.”

재작년인가, 김산이 갓 성인이 된 어린애와 연애한다는 미친 소식을 혜인에게서 들었다.

- 이 새끼 미친 새끼야. 고딩일 때 만났대. 쓰레기 아니냐? 야, 너 강단에서 물러나.

- 걔 꿇어서 20살이었거든요? 그리고 누나가 뭐라고 할 건 아니잖아요!

그때 김산이 크게 반발하자 혜인이 대뜸 주먹으로 김산의 입을 때려서 피를 보고 말았다. 그래서 혜인의 역린이 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김산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사실은 서하로 하여금 어딘가 모르게 무거운 마음 한구석을 편하게 해주는 사건이었다.

결국 서하의 반박에 멋쩍어진 김산이 시선을 돌렸고 곧 선술집에 도착했다. 시간이 이른 탓인지 아직 홀 내부는 한산했다.

“나 잠깐만.”

울리는 전화벨에 김산이 발신자를 확인하곤 얼굴을 구겼다. 서하와 혜인이 먼저 구석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메뉴판을 뚫어져라 정독하던 혜인이 점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삼천이랑 소주 하나요. 해물 뚝배기랑 통삼겹도 주세요.”

적절한 메뉴 선정에 서하가 동의하며 기본 안주로 나온 완두콩을 까먹었다. 짭조름하고 고소한 맛에 식욕이 절로 돋았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바깥에서 통화를 마치고 온 김산이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서하의 옆에 앉았다.

“시켰어?”

“네. 맛있는 걸로 시켰어요.”

메뉴의 이름을 듣자마자 배가 고플 정도였다. 서하가 자연스레 김산의 앞에 수저와 냅킨을 꺼내놓으며 메뉴를 되새겼다. 그런 둘을 보던 혜인이 완두콩을 씹으며 김산에게 말했다.

“여기 해물 뚝배기랑 통삼겹이 제일 맛있어. 너 어린 애인한테 온 전화를 그렇게 똥 씹은 표정으로 받는 건 무슨 예의야?”

“방금 그거 선배 애인한테 온 전화였어요?”

난 또 무슨 교수님 전화인줄……. 서하가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김산을 물끄러미 봤다.

“나 술 약속 있다니까 지도 먹는다고 영상 통화 한 거예요. 말 안 듣는 망아지새끼 같아.”

그리고 주문한 음식이 나왔다. 점원이 테이블에 하나씩 접시며 컵 등을 내려놓는 사이, 테이블이 어색한 적막에 휩싸였다. 평생을 식당에서 사먹어도 이 순간은 어색하다. 빨리 갔으면 좋겠어요……. 모두 속으로만 생각하며 그 억겁 같은 시간을 견뎌냈다. 그리고 점원의 ‘맛있게 드세요.’라는 말을 끝으로 모두 자물쇠를 걸어뒀던 것 같은 입을 동시다발적으로 열었다.

“나이 먹어도 음식 나올 때는 어색해.”

“저도 그래요.”

“맛있겠다. 때깔 봐.”

혜인의 탄성어린 칭찬과 함께 보글보글 끓는 해물 뚝배기와 노릇하게 구워진 통삼겹이 식욕을 자극했다. 서하가 국자를 집어 뚝배기에서 새우와 홍합을 퍼 혜인의 앞에 놓고, 그 다음으로 김산의 접시에 분배했다. 오랜 시간 몸에 익은 대학원생의 습관이었다. 굳이 명명하자면 서열 파악하기랄까. 그리고 마침 휴대폰이 울렸다. 기다리던 전화였다.

“저 전화 좀.”

“너네는 내외하는 것도 아니고 뭘 자꾸 나가서 받아. 눈꼴 시리게……. 야, 네가 서하 그릇 좀 채워.”

차례로 면박을 준 혜인이 김산에게 눈짓했다. 김산 역시 기다렸다는 듯 서하에게서 국자를 받아들었다.

“이서하. 소맥으로 만다?”

전화가 끊어질까 급하게 나가는 서하의 뒷모습에 혜인이 소주병을 흔들어 보였지만 거기에 답할 정신이 아니었던 서하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통화 수락버튼을 당겼다.

“여보세요? 저 지금 식당 밖으로 나가고 있어요. 식사는…….”

[먼저 먹으라고 하긴 했는데, 막상 이서하 씨가 남들이랑 먹는다니까 질투 나서.]

목소리를 듣자마자 찾아오는 안도감이 허기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애초에 밥보다 그가 고팠다. 만약 전화를 받지 못한 채 식사를 마쳤다면 허전한 마음이 더 선명해졌을 것이다.

“저도 질투 나는데요.”

여러 가지로 질투가 난다. 이 정도 감정표현은 아무렇지 않은 수준이 됐다. 보다 견고해진 관계에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나도 여기 있기 싫어요. 그만 둘까 봐.]

진심 어린 한탄에 서하가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농담을 던졌다.

“…주인님이 저 먹여 살린다고 했잖아요.”

작게 들리는 웃음소리에 하루의 피로가 다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강의실에서 그를 가르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야속하다.

[강 선생, 담배 피워? 어? 애인?]

수화기 너머로 별안간 들려 온 낯선 음성에 서하가 바짝 굳어 입술을 꼭 다물었다.

[이따가 또 연락할게요.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중간중간 메시지 보내요.]

빠르게 이어진 당부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머쓱해진 서하가 죄 없는 휴대폰 액정을 바라보다 이내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리고 제가 그의 당부에 당부로 답하지 못했음이 떠올랐다. 가게 문 앞에 선 서하가 다시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써 내렸다.

「주인님도 술 많이 마시지 마세요. 술버릇 무서워요.」

술에 약한 강제혁을 대놓고 겨냥하며 메시지를 전송했다. 숫자는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지만, 마음의 허기를 달래니 뱃속이 요동을 쳤다. 음식이 필요한 때였다.

***

“우리 잘생긴 강 선생은 애인이 몇 살일까.”

어리고 면상 화려한 신임 교사에게 관심이 주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체육 교사라면 보통 후줄근한 트레이닝복 차림인데도 강제혁은 달랐다. 세속에 물들 대로 물든 어른들 눈에도 강제혁이 사용하는 것치고 싸구려가 없으니, 오죽하면 그가 귀한 집 아들인 게 틀림없다는 내기까지 오갔다. 아니면 부잣집 사모님의 ‘이거’라든지.

“제 애인이요?”

교내에 도는 입소문에는 크게 관심이 없는 건지 강제혁이 여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연애하는 사람은 티가 나거든.”

학생 주임을 맡은 임 선생이 명탐정이라도 되는 양 작은 눈을 더욱 게슴츠레 떴다.

“저보다 7살 많아요.”

어린 애인한테 돈을 펑펑 쓰는 부잣집 사모님이라기엔 미묘하게 어린데. 사모님의 ‘이거’라는 쪽에 걸었던 남자 교사들이 대놓고 의아해 했다.

“그럼 애인이 서른 넷? 다섯? 결혼 얘기 안 나와?”

“그래. 여태 안 했느냐고 시달릴 나인데?”

“아, 요즘 세상에 그러는 게 이상한 거죠.”

강제혁은 한마디도 보태지 않았는데 저들끼리 난리가 났다. 당연히 결혼에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쪽에 찬성하는 파였지만 강제혁은 갑작스러운 ‘결혼’이라는 단어에 꽂혔다.

하고 싶다. 결혼. 물론 지금 서하와 저의 관계는 결혼보다 더한 관계긴 했지만, 나라에서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도 뭔가 문서를 받아놓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여하튼, 애인 있어 좋겠네. 강 선생은.”

“네, 좋아요.”

부정할 이유가 없는 말이기에 강제혁은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물론 대놓고 비아냥대는 투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다. 부쩍 제게 시비를 거는 선배 교사인 최은기였다. 최은기는 연차에 비해 나이가 꽤 많은 편이었다. 까칠하게 수염이 올라온 턱 끝을 문지르며 최은기가 강제혁의 어깨를 툭 쳤다.

“강 선생 애인이면 어릴 것 같아서 애인 친구들 다리 좀 놔 달라하려 했더니 공 쳤네.”

최은기의 말에 동료교사들 중 몇은 못 볼 거라도 본 듯 맥주잔을 기울였고 몇몇은 호기심을 보였다. 학교 다닐 때도 자주 보던 유형의 남자였다. 강제혁이 술잔을 문지르다 웃으며 대꾸했다.

“선생님 마흔이시잖아요.”

“내가 무슨 마흔이야! 서른아홉이지!”

결혼이라. 분기탱천하는 최은기는 잊어버리고 강제혁이 그 단어에 대해 골몰했다. 문득 서하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

“그래서, 결혼하러 이민 가신다고요?”

오자마자 시켰던 술은 진작 동이 났고, 새로 나온 술들이 테이블 위의 잔을 메꾸고 있었다. 취기라고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들로 고개를 끄덕인다. 서하가 갑작스런 혜인의 이민행이 결국 결혼에 목적을 두고 있음을 알고 묘한 표정을 지었다.

“상대가 누군데요?”

“서하야, 너 들으면 깜짝 놀랄 걸. 저 인간 우리더러 어린애 만난다고 면박 주더니 본인은…….”

“야! 너 안 닥쳐?”

술집 안에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명색이 교수, 강사들이 나눌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열 받은 혜인이 2차 안주로 나온 생선회를 김산의 얼굴에 한 점 집어 던진 후에야 소란이 멎었다.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서하였다.

“굳이 해외로 가셔야 돼요?”

“그 애가 결혼하재. 나도… 인정받고 같이 살고 싶어.”

“국내에서는 왜,”

“여자애야.”

짧게 떨어진 혜인의 고백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단연 서하였다.

“네?”

“야, 너는 그런 표정 지으면 안 되지!”

“저는 원래…!”

남자 좋아했거든요, 소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으나 이성 한 자락이 서하를 만류했다.

“알아. 아는데, 얘도 ‘원래’는 아니었거든? 원래가 대체 무슨 상관이야. 내가 지금 좋다는데!”

혜인이 김산을 굳이 중지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악을 질렀다. 대단한 생략법으로 이어지는 대화다. 결국 서로 잘 알고 있기에 가능한.

혜인의 말에 틀린 구석이 없었다. 그래. 원래라는 건 없다. 그냥 그런 거지. 결혼하기 싫다고 김산에게 이별을 선고했던 혜인이 많이 변했다. 김산은 이미 알고 있던 일이라 놀랍지 않은지 그저 어깨를 으쓱해 보일 뿐이었다.

“청첩장 주세요. 해외라도 꼭 갈게요.”

서하가 혜인의 얼굴을 마주하며 진심을 담아 말했다.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혜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반짝거렸다. 결혼하는 구나. 할 수 있구나. 생각해본 적 없던 단어가 새삼 일상에 끼어들었다. 축복의 의미로 가득 채운 술잔을 비웠다.

한참 후에 혜인의 휴대폰이 울렸고 웅얼거리며 전화를 받은 혜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쿨하게 결제까지 마친 혜인을 만류하고 싶었지만 결혼식에 와서 축의나 많이 하라는 말에 두 사람 모두 반박할 명분을 잃었다.

“나는 간다. 너네는… 알아서 잘 먹고 잘 살아라.”

황야 너머로 사라지는 무법자처럼, 혜인이 카드를 흔들어 보이며 사라졌다. 혜인의 옆에 설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졌지만 그건 결혼식 때 알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당장 급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

“대리 기사 불러줄게.”

“저도 휴대폰 있고 입도 있는데요.”

“형이 해준다면 좀 가만있어.”

저 찍어 누르는 말투는 여전했다. 이런 것에 설레 잠도 못 자고 자위를 했다는 사실이 아득히 멀게 느껴졌다. 참 순진했구나 싶어서.

“선배 애인한테도 이래요?”

“걘… 내가 이러면 머리채부터 잡을 걸. 완전 미친 애야.”

상상이 가질 않았다. 말로는 저렇게 얘기하면서도 입꼬리는 올라간 게 좋아 죽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한 번 빠지면 어지간해선 물러서는 법이 없는 남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너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아.”

“저도 그래요.”

내가 잘 지내서 좋고, 당신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다. 힘들던 시절 유일하게 기댈 곳이었던 그가 괴로운 건 보고 싶지 않았다.

“혜인 누나 결혼식 때 강제혁도 데려갈 거야?”

차가 주차되어 있는 학교 내 주차장까지 걸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 중엔 혜인의 결혼이 가장 큰 주제였다. 강제혁을 데려갈 거냐는 물음이 생소했다. 데려가도 되려나. 가기는 할까.

“스케줄 보고요. 학교 다니느라 바쁜 것 같아요.”

“시간 빠르네. 애새낀 줄 알았더니 밥벌이도 하고.”

“밥벌이는 그때도 했죠. 건물 임대 주는 것도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애인 자랑은.”

여전히 강제혁을 탐탁지 않아 하는 김산이었다. 서하 몸에 상처가 마르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일까. 김산은 여전히 이런 관계를 이해하지 못했다. 애초에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에, 서하도 그런 김산을 규탄할 생각은 없었다.

“조심해서 가. 다음에 내 애인 보여줄게.”

“제 머리채 잡는 건 아니죠?”

“나한테만 지랄이야. 너한텐 깍듯할걸. 혜인 누나 보여준 날 다른 애인 줄 알았어. 나한텐 쌍욕에 주먹질 달고 살면서 누나한테는 얼마나 생글생글 웃어대던지.”

애인 얘기를 하는 그가 정말 행복해보였다. 그 후 억지로 만 원짜리 몇 장을 손에 쥐어주는 김산에게 됐다고 거절했지만, 서하는 정말 화낼 기세인 그를 만류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 밥 살게요.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차창 너머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대리 기사가 운전석에 오르고 서하가 주소를 말한 후 보조석에서 눈을 감았다. 술기운이 뒤늦게 치고 올라왔다.

이런 소소한 일상이 행복하다. 술자리 중간중간 강제혁의 당부대로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도 곧 귀가한다고 답장을 보내왔으므로 곧 만날 터였다. 결국 하루 종일 못 보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보는 게 못내 서운했다.

“주무셔도 됩니다. 목적지까지 한참 남아서…….”

운전을 하던 기사가 서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쩐지 누군가가 떠오르는 인상이었다. 기억 속 흐릿한 어떤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는. 하루의 끝에서 중년의 남자는 대화를 나눌 상대가 필요했나보다. 강제혁에 대한 생각으로 서운함을 느끼는 것보다 소소한 대화가 낫지 싶었다. 서하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기사에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약주를 많이 하셨네요. 저희 딸도 고등학교 졸업했다고 어찌나 술을 마시고 다니는지. 한창 좋을 때긴 합니다.”

걱정을 하는 건지, 기특하게 여기는 건지 모호한 말이었다. 서하는 딸을 떠올리며 웃는 남자의 얼굴에 불현듯 아버지가 떠올랐다. 딸을 생각하면 더는 웃을 수 없는 남자가.

그 사람은 지금도 괴로울까. 아직도 나를 원망할까. 행복하고 즐거운 일상 속에서도 과거는 잊히지 않고 때때로 현재가 되곤 한다. 서하의 입술이 얕게 떨렸다.

“아이고, 피곤하실 텐데 너무 시끄러웠네요. 주무십시오. 안전하게 가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뜨겁게 달아오르는 눈가를 감추고자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았다. 괜찮다. 강제혁이 있으니까. 그는 떠나지 않을 테니까. 피로 묶인 가족도 나를 버렸지만 그만큼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참을 수 없이 밀려드는 불안감 속에 서하가 억지로 잠을 청했다. 견딜 수 없이 강제혁이 보고 싶었다.

***

기사에게 값을 치르고 차에서 내리자 습윤한 밤공기가 코끝을 적셨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구석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우는 소리를 냈다.

“…배고파?”

하얀 양말을 신은 까만 턱시도 고양이였다. 어쩐지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귀여워 덩달아 마음이 급해졌다. 고양이는 사람이 무섭지도 않은지 가까이 다가와 서하의 다리에 얼굴을 부비기까지 했다. 참치나 닭 가슴살 같은 거 먹지 않나? 야옹거리며 우는 소리를 내는 고양이를 내려다보던 서하가 고양이의 뺨 근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먹을 거 가져다줄게.”

야옹, 화답하는 속삭이는 울음소리에 서하가 급하게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집안은 캄캄했다. 강제혁도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도착했다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일단은 마음이 급했다. 찬장에 차곡차곡 쌓여있는 통조림 사이로 참치 캔 하나가 보였다. 그냥 가져다주려다, 사람 음식은 염분이 있어 좋지 못하단 말이 떠올랐다. 뜨거운 물에 몇 번 헹군 후 집어 먹어보자 밍밍했다. 가방을 바닥에 두고 빠른 걸음으로 대문 밖으로 나오자 고양이는 떠난 뒤였다.

“왜 벌써 가…….”

허탈했다. 뿐만 아니라 서운하고 외로웠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마음이 약해지는 걸까. 다들 떠나서?

때에 맞춰 택시 한 대가 골목 안으로 들어서는 게 보였다. 이 근방에 집이라곤 한 채 뿐이니 강제혁일 게 뻔했다. 서하가 통조림을 들고 있다는 것도 잊고 택시에서 내리는 강제혁을 지켜봤다.

“마중 나왔어요? 먼저 도착했으면 전화를 해야지.”

제게로 걸어오는 강제혁에게 서하가 망설임 없이 다가가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익숙한 체온이 저를 덮친다. 단단한 가슴팍에 코를 묻고 깊게 숨을 삼키자 이제야 숨통이 터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술 많이 마셨어요?”

“…아니요.”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보네. 나도 그랬어요.”

허리를 바짝 당겨 안는 것만으로 그에게 묶인 듯 만족감이 스몄다.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다가 뒤늦게 민망해진 서하가 먼저 손을 뗐다.

“누구 마음대로 손 떼래요. 벌 받고 싶어서 그래?”

길 한복판에서 엉덩이를 주물러 벌리며 다그치는 말에 서하가 이런 와중에도 발기하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엉망진창이 되어 울고 싶다.

“안에 들어가서… 혼내 주세요.”

“그건 이서하 씨 선택사항이 아닌데.”

움찔거리는 서하의 반응을 즐겁게 관망하는 강제혁에게선 향긋한 체향 말고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저만 취한 것 같다. 몇 차례 더 강압적으로 엉덩이를 세게 주무르던 강제혁이 고분고분해진 서하의 볼에 입술을 문대곤 떨어졌다.

“그건 뭐예요?”

“아…….”

생각해보니 캔을 쥔 손으로 강제혁을 끌어안았다. 다행히 엎지는 않았다.

“통조림?”

“참치 캔이요.”

“그걸 왜 들고 있어요? 마중 나오는데 배고파서 들고 나왔어요? 조금 기다렸으면 밥 차려줬을 건데.”

강제혁이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벌레 우는 소리가 찌르르 들리는 가운데 서하가 민망함에 중얼거리며 답했다.

“아까 들어오는 길에 고양이를 봤는데, 들고 나오니까 가버렸더라고요.”

“그럼 나 마중 나온 것도 아니었고?”

사실이긴 한데 택시가 오는 걸 보고 기다렸으니 마중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뭐했다. 대놓고 심기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는 강제혁의 모습에 서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택시 오는 거 보고 기다렸어요.”

“그럼 나는 고양이 덕에 이서하 씨 마중 받은 거네요.”

“그게…….”

기분이 많이 나쁜가. 서하가 강제혁의 눈치를 살피며 캔을 괜히 뒤로 숨겼다.

“그 고양이 상 줘야겠네. 내일 나가서 고양이 간식이나 좀 사올까요. 그건 사람 먹는 거니까 주지 말고.”

짠 기 뺀 건데……. 하지만 그래도 사람이 먹는 것이니 굳이 주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었다. 강제혁의 다정한 제안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을 당겨 잡는 커다란 손에 이끌려 집 안으로 들어서자 정원에서 강제혁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지나가듯 말했다.

“이서하 씨는 벌 받아야지.”

역시 싫지 않은 계획이었다.

***

“하…….”

서하는 현관문을 지나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을 기어야 했다. 엉덩이에 꼬리가 달린 플러그를 박고 그의 발등을 몇 번이나 핥았다. 귀가 후 플레이가 잦았기 때문에 현관에도 도구가 상비되어있던 덕이다. 끝으로 그의 성기를 핥고 빨다 정액을 우유 삼아 마셨다. 폭풍처럼 지나간 행위에 열 올랐던 머리가 조금씩 식고 있었다.

“…아는 누나가 여자친구랑 결혼한대요.”

왜 그 말이 나왔는지는 모르겠다. 근데 저도 모르게 그 말이 나왔다. 서하의 머리카락을 감아 넘기던 강제혁이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듣고 있다는 뜻이었다.

“해외로 이민 갈 거라고……. 결혼식 같이 갈래요?”

“이서하 씨가 가자고 하면 가야죠.”

생각보다 순순히 승낙한다. 괜히 말을 꺼냈나 싶었던 걱정은 사라졌지만 어딘가 편하지 않았다. 왜일까.

“이서하 씨 아는 누나면 우 교수님 밖에 더 있나. 김산도 갈 텐데 내가 이서하 씨랑 둘이 보내줄 것 같아요?”

“선배 애인 생긴 지 2년 됐어요.”

“그거랑은 별개의 문제예요.”

아직도 적개심이 가득한 강제혁의 말에 서하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끝내 져주지 않고 못 박듯 덧붙이는 강제혁이 좋았다. 그가 좋다. 자꾸만 더 좋아진다.

“동성 연인인데 결혼한다는 말에도 별로 놀라지 않네요.”

“왜 놀라야 해요?”

요즘 애들은 그런가. 요즘 애들이란 소리를 듣기엔 강제혁의 나이가 더 이상 20대 초반이 아니긴 했지만 서하의 눈에는 여전히 한참 연하였다. 서하가 가만히 강제혁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괜히 멋쩍음에 마른침을 삼켰다.

“저는 놀랐거든요.”

“왜요?”

막상 왜냐고 이유를 물으니 구체적인 답변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쎄, 왜 놀랐을까. 평생을 쌓아온 커리어와 국내에서의 삶을 접고 사랑을 위해 타국으로 떠나는 그들이 놀라워서? 혜인이라면 해외에서 더 빛을 발할 것이다. 아니면 부러워서? 당당하게 결혼을 선언하는 게? 그런 것 같았다. 서하가 생각을 잇는 사이 강제혁이 서하의 뒷덜미를 감싸 당기며 시선을 얽었다.

“나는 부러워졌는데.”

“네?”

지척에 놓인 얼굴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제 생각을 닮은 말에 서하가 당황했다. 그리고,

“결혼할까. 우리.”

머리가 멍해지는 제안이 떨어졌다. 진득하고 뜨거운 시선이 그 말이 진심임을 그 무엇보다 명확히 알려주고 있었다.

***

도무지 그 장면이 뇌리를 떠나질 않았다. 강제혁은 그런 엄청난 제안을 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잠들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땐 평소처럼 커피를 내려놓았고 샌드위치와 함께 작은 쪽지도 남겼다. 꿈일까, 싶었지만 쪽지에 적힌 글자는 전날 밤의 일이 꿈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었다.

「긍정적인 답변 기다릴게요.」

그를 닮은 정갈하고 날렵한 글씨체가 보다 명확한 모양으로 압박을 주고 있었다. 서하는 쪽지를 손에 들고 내려놓지도 못한 채 커피를 마셔야 했다. 더도 덜도 않고 딱 한 잔 분량만 내려둔 그가 내심 야속했다. 쪽지는 주머니 안에 얌전히 있음에도 물고기 밥을 주고 텃밭에 물을 주는 모든 순간에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강제혁이 오늘 출근을 해서 다행이었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면 바보 같은 모습을 보여줬을 게 뻔했다.

- 결혼할까. 우리.

결혼. 순간의 충동에 취해 한 말이라면 모를까. 강제혁은 진심인 것 같았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아니, 어제 혜인의 일로 조금은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하다. 정원의 벤치에 앉아 멍하니 그 말을 주워섬기던 서하가 울리는 휴대폰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제혁일까, 싶었는데 뜻밖에도 혜인이었다.

“여보세요.”

[무슨 전화를 이렇게 늦게 받아!]

“무슨 일이세요?”

서하가 벤치에 도로 앉아 되묻자 혜인이 잠시 침묵한 끝에 용건을 밝혔다.

[청첩장 주려고.]

“이렇게 빨리 나와요?”

[사실 어제 나왔대. 근데 너네 만나고 들어가서 알았어.]

“천천히 주셔도 되는데…….”

티 안 내려고 하는 게 역력히 느껴지는 들뜬 목소리였다. 혜인의 이런 모습은 낯설었지만 그럼에도 괜히 덩달아 기뻐졌다. 그리고 문득 조언을 구할 적합한 상대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러면… 저희 집으로 한 번 오실래요?”

외곽의 주택에서 동거를 한다니 놀러가게 해달라고 노래를 부르던 혜인이었다. 그간은 어쩐지 부르기가 멋쩍어 못 불렀지만 오늘은 용기가 났다.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고.

[와, 완전 갑질이야.]

“한 번 와보고 싶다고 그러셨잖아요.”

[그건 그래. 주소 찍어줘. 지금 갈게. 밥 줄 거지?]

깔끔하게 인정한 혜인이 서하의 제안을 수락했다. 전화를 마친 서하가 혜인에게 메시지로 집주소를 적어 보냈다. 바로 출발한다고 했으니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았다. 혜인이 오면 바로 먹을 수 있도록 식사준비를 하기 위해 텃밭에서 채소를 땄다. 파스타에 샐러드를 곁들여 먹으면 좋을 것 같았다.

서하는 주방으로 들어서 채소를 씻고 다듬었다. 날이 잘 벼려진 칼은 강제혁이 직접 갈아낸 것이었다. 적당히 해먹을 줄만 알지, 이런 종류의 집안일에는 소질이 없는데 강제혁과 함께 산 뒤로 묘하게 올라간 삶의 질을 이럴 때 느꼈다.

서하가 냉장고에서 토마토와 모짜렐라 치즈를 꺼내 먹기 좋게 잘라내 카프레제를 만들었다. 치커리와 어린 청상추를 찢어 소복하게 쌓고 드레싱은 먹을 때 뿌리기 위해 작은 종지에 담아두었다. 주방 옆 테라스에 놓인 나무 테이블이 적당해보였다. 설렁설렁 샐러드를 만들고 냄비에 물을 담아 불을 올리자 30분 정도가 흘렀다. 이어서 팔팔 끓는 물에 소금을 한 스푼 넣고 스파게티 면을 집어넣었다. 혜인은 어느 정도 삶아진 걸 좋아하려나.

“맞다…!”

서하는 고민하던 중 불현듯 떠오른 사실에 눈을 크게 떴다. 타인을 처음으로 초대하는지라 미리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있었다. 혜인의 성격상 집 구경을 한다며 여기저기 들쑤실 게 뻔한데, 제가 너무 안일했다. 서하가 2층으로 뛰다시피 올라갔다. 그렇게 가쁜 숨을 다독이며 은밀한 물건이 가득한 방문을 단속했다. 혹시 모를 비상사태를 대비해서였다. 그리고 뒤를 돌았는데 군데군데 쉽게 쓰기 위해 비치해둔 물건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집안 곳곳 여기저기 젤이며 플레이 용품이 어찌나 많은지 하나씩 수거해 비밀의 방에 쑤셔 넣고 문을 닫기를 반복해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제가 냄비에 면을 삶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면!”

후다닥 내려온 1층 주방엔 불어버린 면이 잔뜩 졸아버린 물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망했네…….”

도저히 손님상에 내놓을 수준이 아니라 판단한 서하가 면을 버리려던 때였다. 초인종이 울렸다. 잰걸음으로 인터폰으로 향한 서하가 혜인의 얼굴을 확인하고 대문을 열었다. 종종걸음으로 문밖으로 나가자 혜인이 정원을 감상하고 있었다.

“엄청 빨리 오셨네요.”

“응. 좀 밟았어.”

혜인의 괴팍하면서도 칼 같은 운전 실력을 아는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해놓고 사네. 약간… 은퇴한 노부부 집 같아.”

“칭찬이죠?”

“야. 저 석등은 뭐야. 너 진짜…….”

대놓고 질린 표정을 짓는 혜인을 보며 서하가 멋쩍은 듯 웃어보였다. 강제혁의 조모가 남긴 석등이었다. 버리고 싶지 않아 두었는데, 나이 들어 보였나보다.

“강제혁 씨 할머님이 남기신 거예요.”

“아니, 훌륭하다고……. 안목이 대단하시네.”

혜인이 당황한 듯 급히 칭찬의 말을 쏟아냈다. 다른 사람을 초대한 게 처음이다 보니 괜히 긴장이 됐다. 부동산 보러 온 사람 같은 표정으로 여기저기 살핀 혜인이 배를 팡팡 두드렸다.

“배고파. 밥 줘.”

“준비하고 있었어요. 근데 제가 청소하다 면이 좀 불어가지고 다시 삶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요.”

손님인데, 이런 변명 자체가 미안했다. 하지만 혜인은 전혀 상관없는지 손을 휘휘 저었다.

“배고파 죽겠는데 좀 분 게 무슨 상관이야. 국수 삶았어?”

“파스타하려고 했어요. 소스 어떤 거로 할까요?”

“그럼 됐어. 스파게티는 면이 좀 말랑해야 좋더라. 나 마늘 왕창 넣고 알리오올리오 해줘. 마늘 먹고 싶어.”

서하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은 혜인이 씨익 웃으며 먼저 집 안으로 향했다. 그 뒤를 졸졸 따라가던 서하가 휴대폰으로 강제혁에게 통보에 가까운 메시지를 보냈다. 차라리 혼나는 게 맘 편하지 싶었다. 결혼 얘기를 하는 것보다야.

“인테리어 누가 했어? 너?”

“같이 했죠.”

거실에 선 채 집 안을 둘러보던 혜인이 서하를 진지하게 쳐다보며 물었다. 턱을 문지르며 이곳저곳을 눈에 담던 혜인이 대뜸 평면도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신혼집인데, 우리 예쁜이가 인간미 있게도 인테리어에 소질이 없대. 근데 나도 없잖아. 너랑 네 남편 고용하면 안 되겠냐? 돈은 적당히 줄게.”

이 와중에도 잇속은 잊지 않는 혜인이었다. 서하가 그런 혜인을 보며 엷게 웃었다. 남편이라는 단어가 몹시 신경 쓰였지만 여기서 남편 아니란 말로 설전을 벌이기도 힘들었다.

“결혼 선물로 그냥 해드릴게요.”

“야, 안 돼. 나 부주도 받을 거야.”

“그것도 드릴게요.”

“양심 없다고 뒤에서 욕하는 거 아니지? 나 그래도 선물 사왔어. 이따 집 갈 때 차에서 꺼내줄게. 나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네가 말해줘. 선물 달라고.”

“…알겠어요.”

다짐을 받아낸 혜인을 두고 서하가 냉장고를 뒤져 마늘과 베이컨을 꺼냈다. 불어터진 면이 신경 쓰였지만 혜인이 배고프다고 노래를 불렀으므로 급하게 팬을 달궈 파스타를 만들어내 접시에 담았다. 차를 가져온 혜인을 생각해 무알콜 샴페인을 꺼내고 잔 두 개도 내놓자 혜인이 입이 찢어질 듯 웃었다.

“술도 줘?”

“무알콜이에요.”

“칼 같네. 짜증난다. 진짜.”

술을 권해도 차 가지고 왔다고 센스 없다 하실 양반이 부러 입술을 삐죽이는 게 싫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친해진 건지.

조금 불었지만 그래도 먹을 만한 맛에 겨우 한시름 놨는데 파스타를 마시듯 먹어치운 혜인이 카프레제를 뒤적이며 말했다.

“겨우 청첩장 받자고 여기까지 부를 인간이 아닌데. 네가.”

꽤 날카로운 지적이었다. 괜히 뜨끔한 서하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디자인 예쁘게 나왔어. 찬찬히 봐. 감상도 덧붙여라. 길게.”

건네진 청첩장은 티켓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빨간 장미와 하얀 백합이 어우러진 장식이 멋스럽고 기품 있었다. 우혜인이라는 이름 세 글자 옆에 유려한 글씨로 새겨진 이연하라는 이름에 서하의 얼굴이 묘하게 굳었다. 납골당에 가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아서, 이 이름을 보는 게 너무나 생소했다.

“예쁘지.”

“…네.”

“표정이 왜 그 모양이야? 뭐 잘못됐어?”

대놓고 흐트러진 표정인 서하를 본 혜인이 도리어 당황했다.

“아니에요.”

“야, 남의 청첩장 보고 그런 표정 지으면 어떡해! 내 심정 어쩔 거야.”

“그냥, 저희 누나랑 이름이 똑같아서요.”

그 말에 혜인이 입술을 다물었다. 서하의 누나가 세상을 떠난 일은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일이었다. 당시 서하를 아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었으니까. 더욱이 혜인은 당시 학과 조교였으므로 모를 수가 없는 일이었다. 서하가 죽은 사람처럼 희게 질린 채 학교를 걸어 다니던 반 시체 시절이 혜인의 기억 속에서 번졌다.

“그럼 친누나라고 생각하고 부주 많이 해.”

“…그럴게요.”

농담처럼 가볍게 웃을 말을 던져준 혜인 덕에 서하가 웃으며 답했다. 10년도 더 된 일인데 아직도 어제 일 같다. 사후 세계를 믿지 않지만, 누나만큼은 행복하게 아픔 없이 기쁨으로 가득한 곳에서 즐겁게 지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젠 얼굴도 흐릿한 누나였지만. 사진 한 장 허락되지 않은 처지가 서글펐다. 영혼 없이 바짝 마른 병상의 누나를 기억하는 건 괴로웠다.

“그래서 여기까지 왜 불렀냐니까.”

“집 구경하고 싶다 그러셨잖아요.”

“그래. 배 아파 죽을 것 같아. 운치 있고 더럽게 예뻐. 이렇게 된 거 침실도 좀 보자.”

“서, 선배!”

서하가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간 혜인이 곳곳의 문을 열어 젖혔다.

“뭔 방이 이렇게 많아. 식물 페티시 있냐? 밭이네. 아주.”

“…취미예요.”

“너? 아님 네 남편?”

혜인 앞에서 한참 어린 제혁을 ‘씨’자 붙여 부르기도 민망하고 그렇다고 애인이라고 하기도 부끄러워 생략했는데 남편으로 받아치니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서하를 재밌게 본 혜인이 마침내 2층으로 향했다. 말려야 하는데 어찌나 빠른지-더군다나 서하에겐 지난밤의 플레이 여파가 심했다- 따라잡기가 힘겨웠다. 그리고 약 한 시간 전 서하의 예상대로 혜인이 비밀의 방 문고리에 손을 댔다.

“뭐야. 여기 왜 안 열려?”

“그 방 고장 나서 그래요. 창고예요. 볼 것도 없어요.”

서하가 준비해둔 변명을 빠르게 쏟아냈다. 하지만 서하보다 오랜 세월 학교에서 묵은 눈치 백단 혜인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뭐야. 숨기는 것 같아. 여기 막 야한 거 있지?”

단발에 화살을 정 가운데 쏘아 맞추는 것 같은 날카로운 추리력에 서하가 동요를 숨기지 못했다. 하, 야멸찬 웃음을 던진 혜인이 이죽거렸다.

“그래! 한창 좋을 때인 젊은이랑 산다 이거지. 아주 이서하 늙지도 않고 물오르는 게 이유가 있었어.”

“왜 그래요, 진짜…….”

“뭐 얼마나 대단한 거길래 문까지 꼭꼭 잠그고 말이야. 이러니까 더 궁금하네. 우리 다 큰 성인인데 이런 것 정도는 공유해도 되지 않니?”

안 된다. 절대로.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보여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저희는 절대 안 된다. 아니, 애초에 평범한 사람들은 이런 물건도 막 보여주고 그러나? 평범의 기준을 잃어버린 서하가 혼란스러워하며 혜인을 침실로 이끌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진짜로. 침실 구경하시고 커피나 드시고 가세요.”

“내가 ‘진짜’라는 말 덧붙이는 사람치고 구라 안 치는 새끼를 못 봤어요. 오히려 침실은 떳떳하다 이거지? 그게 더 이상해. 미친놈아.”

혜인이 서하의 어깨를 툭툭 치며 미련 없이 1층으로 내려갔다. 어쩐지 폭격을 맞은 것 같은 서하만 2층 복도에 망부석마냥 남아 밀려오는 허망함을 감당해야 했다.

***

손님이 왔으니까, 특별히 스스로 커피를 내렸다. 강제혁은 생각보다 순순히 재밌게 놀라는 답을 보내왔지만 끝까지 제안에 대해 잘 생각해보라는 말을 덧붙였다. 서하가 헤이즐넛 향이 진하게 나는 커피를 경덕진에서 사온 잔에 담아 티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붉은 안료로 그려진 난초가 고요한 멋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여기까지 부른 이유 끝까지 말 안 해줘?”

흔들의자에 앉아 거의 그네를 타듯 발을 구르던 혜인이 커피를 받아 들며 물었다. 저 흔들의자에서 말 못할 짓을 했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애써 지워낸 서하가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청혼… 받았어요.”

“너네 아직 안 했니? 난 진즉에 증서 받고 살림 합친 줄 알았더니.”

커피 잔을 기울이던 혜인이 경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랬음 말했죠.”

“야, 그거 증서 찍어주는 나라 있어. 찾아서 해야지. 여태 사실혼이었어? 이… 문란한 놈.”

동거에 지극히 편견 없는 인간이면서 일부러 저런다. 서하가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말없이 향에 집중했다. 문란하다는 평은 엄연히 따지면 틀린 말도 아니라 정정하기가 어려웠다.

“증서 찍어주는 나라 있는 거 아시면서 굳이 해외로 가세요?”

“편하게 살려고. 근데 괜히 가나 싶기도 하다. 너네 여기서 이렇게 유유자적 사는 거 보면 이민은 가지 말걸 그랬나 봐.”

농담조로 서하의 발을 툭 건드는 혜인은 그저 행복해보였다. 저렇게 좋을까. 그깟 서류가 뭐라고.

“그냥… 결혼 하신다는 분 앞에서 말하긴 뭐한데…….”

“말 해. 언젠 말 가려했다고.”

“그게 무슨 의미인가 싶어서요. 그냥 종이 한 장이잖아요. 안 헤어진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할수록 그랬다. 무의미한 일에 신경을 쏟는 게 아닐까. 혜인이 답지 않게 침음하더니, 곧 진중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깟 종이 한 장이라도, 묶이고 싶으니까. 내 반려자라고 부를 수 있는 증표니까. 헤어질 생각을 했으면 여기까지 안 왔겠지. 미래는 알 수 없어도 지금 내가 그 애랑 하나로 묶이고 싶어서 하는 거야.”

묶이고 싶다는 생각은 물리적인 부분으로 주로 했던 것 같지만, 혜인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모를 수 없었다.

“너도 답을 알면서 왜 그걸 남한테서 찾아? 좋으면 가져. 네 거라고 못 땅땅 박아.”

한 김 열기가 식은 커피를 한 입에 들이켠 혜인이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답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당하자 왠지 민망해졌다. 버릇처럼 가슴팍을 문질러 반지를 더듬던 서하가 멈칫 굳었다. 상의 안쪽에서 맨 살갗에 스치는 작은 반지의 의미가 다시금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강제혁은 오래 전부터 제게 같은 제안을 해온 걸지도 모른다는.

***

“재밌게 놀았어요? 커피 마셨네.”

깨끗이 치워놨는데 대체 어떻게 안 건지. 서하가 강제혁의 관찰력을 살짝 원망했다. 아무래도 오늘 엉덩이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내일 마침 휴일이기도 했고.

“조금 먹었어요. 선배가 커피를 찾으셔서.”

“어쩌지. 오늘 이런 자질구레한 걸로 혼낼 여유가 없어서. 그래서 제안은 생각해봤어요?”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서는 강제혁의 모습에 어쩐지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이렇게 매번 제게 가까이 다가오는 그가 문득 소중하게 느껴졌다.

“손… 잡아주세요.”

뜬금없을지 모르는 청에도 강제혁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서하의 손을 잡았다. 습관처럼 약지를 쓰다듬는 강제혁의 손가락이 서하의 덥혀진 마음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이걸 왜 이제 알았을까. 그리고 이내 걸리는 그림 같은 미소에 서하가 먼저 강제혁의 품에 안겨 들었다.

“예쁜 짓만 골라 하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너무 오래 생각해서 미안해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강제혁의 손 안에서 굴려졌다. 애초에 목걸이가 아니었다. 부둥켜안은 채 바람 냄새가 풍기는 강제혁의 품에 코를 묻은 서하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사랑해요. 많이.”

“내가 더 사랑한다고 하는 건 좀 진부한가.”

“진부해도 좋아요.”

“그럼, 내가 더 사랑해요. 이거 너무 당연한 얘기라 말하는 게 입 아플 지경인데.”

서하의 머리 위에 턱 끝을 사뿐히 올려놓은 강제혁이 여태 들었던 중 가장 기분 좋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조금 더 용기를 낸 서하가 강제혁의 허리를 깊게 끌어안으며 고백했다.

“결혼해요. 우리.”

“우리도 해외로 이민 갈까요?”

이마에 꾹 도장 찍듯 입술을 맞춘 강제혁이 미소어린 얼굴로 답했다.

“증서만 받아오는 것도 있대요. 이 집 너무 좋아서 떠나기 싫어요.”

“그럼 이제부터 신혼여행 계획 짜야겠네. 어디 가고 싶어요?”

“아무 데나요. 휴양지였으면 좋겠어요. 유적 없는 곳으로. 아참, 우리 고양이 밥 사러 가야 되는데.”

“밥그릇도 사야겠다. 우리 할 거 많네요. 결혼반지는 더 비싸고 좋은 걸로 맞출 거예요.”

“그거 살 돈으로 여행 한 번 더 가요.”

“양보하기 싫은데…….”

어느 때보다 즐거운 담소였다.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가 좋으니까. 계속 그에게 묶이고 싶으니까. 누군가에겐 무의미한 종이 한 장일지라도 그와 나란히 반려라는 이름으로 적히고 싶었다. 돔과 섭이라는 이름을 넘어서 사랑이라는, 부부라는 이름으로.

***

“그건 뭐예요?”

“혜인 선배가 강제혁 씨 오면 풀어보라고 주고 간 집들이 선물인데…….”

혜인은 ‘신랑’이라고 지칭했지만 그건 접어두기로 했다. 잠들기 직전에 뒤늦게 혜인이 준 선물이 떠올라 거실에서 들고 올라왔는데, 샤워를 마친 강제혁이 물건의 정체를 물었다. 커다란 상자의 포장을 찢고 열자 검은 색의 납작한 물건이 들어있었다. 의아함으로 비닐포장을 뜯고 물건을 꺼내 펼치자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서하의 입에서 짧은 욕설이 터졌다. 남성용 스타킹이었다. 그것도 그물망사. 고개를 올려 쳐다본 강제혁의 얼굴이 이것의 행선지를 알려 주었다.

“이런 명령은 처음인 것 같은데…….”

낮고 깊은 목소리는, 분명히 플레이의 전조였다.

“입어.”

벗으란 말이 아니라, 입으란 말로 시작된 플레이는 처음이었다. 기나긴 밤이 예상되는 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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