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외전. 기말고사 (11/24)

리버 오브 본디지(River of Bondage) 3권

외전. 기말고사

푹푹 찌는 날씨에 땀방울이 관자놀이에서부터 턱 끝까지 단번에 추락했다. 지면이 부서져라 쏟아지는 햇볕은 말 그대로 작렬하고 있었다. 겨우 6월 하순인데 벌써 이렇게 더우면 7, 8월은 어쩌지. 장담컨대 지옥도를 방불케 할 것이다. 얼마 전까지 밤에는 카디건을 꼭 입고 다녔던 것 같은데 날씨 변화가 몹시 화끈하다. 에어컨 틀고 밖으로 나오지 말아야지.

서하는 기말고사 시험지가 담긴 종이봉투를 품에 한가득 들고 인문대를 향해 걸었다. 도무지 가까워지지 않는 건물이 마치 신기루 같았다. 날씨가 뜨거우니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폈다. 기껏 반팔셔츠를 입었는데 아무 의미가 없다. 그때, 타오르는 서하의 동그란 머리통 위로 금쪽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이런 날엔 양산을 써야지.”

“아, 선배.”

양산을 들고 선 남자는 다름 아닌 김산이었다. 자연스레 서하에게서 짐을 뺏어간 김산이 양산을 든 손을 서하 쪽으로 더 기울여 주었다.

“고맙습니다…….”

살 것 같았다. 서하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땀방울이 목선을 타고 흘렀다.

“차 타고 왔어야지. 버스 탄 거야?”

제게 차가 없는 걸 알면서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아마 강제혁을 돌려 까는 것일 터였다. 강제혁이 차가 있긴 하지만, 그의 집은 학교 정문과 그리 멀지 않다. 굳이 차를 타는 게 더 낭비라고 생각하는데……. 요컨대 제 집에서 출발을 했어도 차가 있는 강제혁이 차로 저를 픽업하러 왔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이다.

“저 차 없는 거 알잖아요.”

“그 친구가 있잖아.”

“그 친구 오늘 시험 쳐야 되는데요. 어제 같이 안 있었어요.”

“왜?”

“왜긴요. 시험지 유출될 수도 있잖아요. 그리고 한창 공부해야 될 땐데 뭘 맨날 붙어있어요.”

제가 말하고도 아무말대잔치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제 엉덩이가 다 터지는 모종의 거래 끝에 일주일 간 시험 공부 타령을 하며 만나지 않았다. 물론 연락은 꼬박꼬박 주고받았다.

“권태기 왔어?”

일말의 기대인지 뭔지, 미소를 띠고 묻는 김산의 물음에 서하가 헛웃음을 지었다. 권태기는 무슨. 애초에 그에게 제대로 묶인 지 한 달쯤 됐는데, 뭐 얼마나 만났다고 권태기가 오냐는 말이다. 더군다나 서하가 강제혁을 저렇게 밀어낸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 언제 사랑한다고 말할 거예요?

- 아, 아으, 학, 으, 흣…!

부어터진 엉덩이 사이로 성기를 욱여넣으며 물을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강제혁은 잊을 만하면 채근을 했다. 뒤를 무참히 쑤시던 그 성난 몸짓이 다시금 떠오르자 걸음이 차마 떼어지지 않았다. 멈칫하여 우두커니 선 서하를 가만 내려다보던 김산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얼핏 보기에도 권태기가 온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으니까.

“시험 시간까지 30분 남았는데, 내 연구실에서 쉬다 가던지.”

“됐어요. 선배랑 있었던 거 알면 ‘그 친구’ 뒤집어져요.”

그리고 제 몸뚱이도 요절이 날 것이다. 서하가 으, 하고 몸서리를 치며 답했다.

“되게 속 좁은가 보네.”

비아냥거리는 말투가 좋지 않았지만 쾌차하자마자 기어코 김산을 찾아가 주먹을 날린 강제혁을, 그가 좋게 생각할 리 만무했기에 반박하는 것은 관뒀다. 그 일로 김산은 갈비뼈에 금이 갔다. 명명백백히 폭행죄였지만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김산의 말에 어영부영 무마되었다. 서하가 김산의 맞은 부위를 슬쩍 쳐다보았다. 다 낫긴 한 걸까. 얇은 셔츠 너머로 보이는 복대의 실루엣에 서하가 눈썹을 찌푸렸다. 미안하긴 했다.

그렇게 소소한 대화를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인문대였다. 덩치 큰 남자 둘이 사이좋게 양산 하나를 나눠 쓰고 걷는 모습에 몇몇 시선이 따르긴 했지만 날이 워낙 덥다보니 마냥 이상한 광경도 아니었다.

“양산 고마워요.”

“뭘, 전화하면 바로 나올 수 있어.”

“양산 씌워달라고 해 뜨거운 날마다 선배한테 전화를 하라고요?”

“그래. 김산 말고 양산이라고 저장해도 되니까.”

김산의 궁시렁 대는 말투에 서하가 웃음을 터트렸다. 뽀얗게 살이 오른 뺨으로 기분 좋게 웃어 보이는 서하의 모습은 김산이 봐온 10년간의 얼굴 중 가장 행복해 보였다. 그만큼 좋다는 거겠지. 저보다 열세 살은 어린 애새끼한테 그 기회를 뺏겼다는 게 새삼 억울했지만 더 이상 한탄해봐야 바뀔 것은 없었다. 모든 게 제 탓이었으니까.

“다음에 그 친구한테 술 한 잔 하자고 전해줘.”

“보고요.”

마지막 말을 끝으로 서하가 짐을 받아들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양산을 든 채로 서하의 뒷모습을 보던 김산도 발길을 돌렸다.

***

“와서 내 대가리 좀 쳐봐.”

연구실에 들어가자마자 보인 것은 제 책상에 엎어져 있는 우혜인이었다. 김산이 학내 카페에서 사온 아이스 라떼를 커피 테이블에 올려두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대꾸했다.

“무슨 헛소리예요. 더위 먹었어요?”

날이 덥긴 한가보다. 시럽이 들어간 진한 라떼가 목 넘김 좋게 식도를 적셨다.

“저 새끼 말하는 싸가지 좀 봐. 내 거는.”

“계신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사 와요?”

혜인은 김산이 전 남자친구였다는 사실은 완전히 망각한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김산의 손에 들려있던 라떼를 갈취해 한 번에 벌컥벌컥 들이마신 혜인이 얼음을 아득아득 씹곤 냉기 가득한 한숨을 내쉬었다.

“산아.”

“…왜요?”

“나… 연하 좋아하나봐.”

갑작스러운 취향 고백에 김산이 인상을 찌푸렸다. 혜인의 전 애인들이 저를 포함해 전부 연하였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으므로 새삼스러운 이야기였다.

“알아요. 저도 연하였잖아요.”

“아, 그 연하 말고!”

혜인이 답답한 듯 소리를 버럭 지르자 그와 동시에 문이 벌컥 열렸다. 바깥의 찝찝한 더운 공기가 시원한 연구실 안으로 밀려들어옴과 동시에 나타난 것은, 하얗고 나긋나긋한 생김새의 여학생이었다. 흰 티셔츠와 청바지, 끈 달린 운동화가 딱 그 나이대의 풋풋함을 담고 있었다.

“교수님!”

“어, 여, 연하야.”

연구실 주인인 김산은 쳐다보지도 않고 혜인을 올곧게 바라본 여학생을, 혜인이 어색한 투로 불러주었다. 연하? 방금 전 연하를 좋아하는 것 같다는 혜인의 의미 모를 말이 천천히 짜 맞춰지며 김산의 의아함 가득한 시선이 혜인에게 향했다.

“저 계속 교수님 찾아다녔는데, 여기서 목소리가 들려서…….”

“무슨 일이야?”

답지 않게 허둥대는 혜인의 모습은 몹시 낯선 양태였다. 김산이 상황을 파악하느라 멍하니 앉아서 둘을 번갈아 봤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학생이 품 안 가득 책 꾸러미를 안고 혜인의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있었다. 못해도 5kg은 나갈 것 같은 책의 두꺼운 두께와 마른 팔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졌지만 편견이겠거니 생각했다.

“전공 공부하다 너무 어려워서요.”

보통 그런 이유로 교수를 찾아오는 학생은 드문데.

“너도 참……. 전화하지. 무거운데, 이런 무거운 책은 들고 다니지 말고 스캔해서 파일로 가지고 다녀야 편해.”

제자의 손에 들린 책을 뺏어들며 혜인이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투로 답했다. 어째 분위기가 미묘하다.

“교직원 카드 줄 테니까 내 연구실로 가 있을래? 이거 결제도 되니까 카페에서 뭐 사와도 돼. 너 마시고 싶은 걸로 사.”

“저는 교수님이 내려주신 커피 마시고 싶은데…….”

혜인은 아무렇지 않은 척 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짧은 단발머리 속 귀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김산이 충격 어린 눈으로 그 광경을 모두 목격했다.

“빨리 오셔야 돼요.”

“응…….”

생글생글 웃으며 말해놓고 문을 닫고 나가기 직전, ‘연하’가 저를 향해 날카롭고 서늘한 시선을 꽂아 넣었다. 제 뒤에 뭐가 있기라도 한 걸까. 당연히 아무것도 없을 텐데…….

“…누나.”

“…어.”

“쟤가 설마 그 ‘연하’예요?”

묘하게 익숙한 이름인데. 어느새 뺨까지 붉힌 혜인이 묵묵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산의 표정이 무참히 구겨졌다.

“쟤 신입생 아니에요?”

“맞아. 심지어 조기 입학이라 19살이래. 나 자살할까?”

“허, 18살 차이…….”

어찌 된 게 저만 빼고 다들 봄이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혜인의 한탄 같은 연애상담에 김산이 눈을 질끈 감았다. 한여름에 들어서는 6월 하순에 홀로 옆구리가 시리기 시작했다.

***

시험은 깔끔하게 한 시간 동안 진행됐다. 강제혁은 시험이 시작하기 딱 2분 전에 들어왔고. 서하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책상에 앉아 시험을 칠 준비를 했다. 서술형 문제 중심으로 출제를 했기 때문에, 다들 시험지에 머리를 박고 필기구를 연신 움직이고 있었다. 물론 서하의 눈은 강제혁의 머리통에 꽂혀 있었지만.

일주일 만에 얼굴 보는 건데, 어떻게 한 번을 안 쳐다보나. 서하는 괜히 제가 뭘 또 잘못했나 걱정이 됐다. 그런 와중에도 잘생긴 손가락이 펜을 쥐고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모습은 화보 같았다. 저게 문제였다. 강제혁이 조금만 못생겼어도 서하가 연애까지 고사하진 않았을 것이다. 주인이 저렇게 잘빠졌는데, 옆에서 공부만 한다고 얌전히 있을 수 있는 서하가 아니었다.

“20분 남았습니다.”

시간을 알린 서하가 책상에 쌓인 시험지를 훑었다. 백지가 한 세 장 쯤 들어왔고, 구구절절 사죄의 말과 강사를 향한 찬미의 문장이 가득한 시험지가 두어 장 있었다. 방금 신의 축복 어쩌고까지 읽은 것 같은데. 나머지는 나름대로 답안을 작성한 듯했다. 시험지에서 눈길을 거둔 서하가 버릇처럼 강제혁을 쳐다봤다. 탄탄한 몸을 감싼 흰 티셔츠가 육감적이다. 지난번처럼 끝까지 앉아있으려나.

서하가 내심 기대를 하는 사이, 강제혁이 시험 시간을 10분가량 남겨두고 시험지를 제출했다. 눈을 맞추려 했지만 강제혁은 서하가 길거리에 늘어선 전봇대라도 되는 양 무심하게 스쳐지나가 버렸다.

“허…….”

서운함이 차올랐지만 따지자면 제가 이상한 것이었다. 여긴 공적인 자리였으니까. 한숨을 푹 내쉰 서하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주고받은 메시지들이 반짝거렸다.

「잘 잤어요? 8:01」

「8:03 지금 일어났어요.」

「아침밥 사진 보내고 출근하세요. 8:23」

「8:25 아침 안 먹고 커피 마시려고 했는데요.」

「10대 추가. 8:25」

헐레벌떡 사과 하나를 꺼내 사진을 찍어 보냈지만, 추가된 매의 대수가 줄어드는 일은 없었다. 지금 저렇게 일주일 간 연락으로만 쌓은 스팽의 양이 240대라는 사실이 서하를 설레게도, 긴장되게도 했다. 강제혁의 기말고사가 끝나려면 아직 3일은 더 남았는데 엉덩이가 터지고도 남음이겠다.

“시험 종료합니다. 한 학기 동안 고생 많았어요.”

마지막으로 시험지를 제출한 이름 모를 학생에게 서하가 기분 좋게 웃어보였다. 한 학기가 끝났다. 정말 파란만장했다. 가능하면 이건 강제혁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었는데, 아쉬웠다.

마지막 학생이 나가고 탁 닫히는 문소리에 서하가 시험지를 넣고 봉한 봉투와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끼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익숙한 걸음 소리였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애써 돌아가려는 고개를 가방에 고정한 서하가 괜히 머뭇거리며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지금 복수하는 거예요?”

바로 옆에 바짝 선 그로 인해 저와 그 사이의 작은 틈으로 열기가 고였다. 반팔 셔츠 탓에 드러난 팔목이 화끈거릴 만큼. 핏줄이 선 강제혁의 팔뚝이 서하의 맨 살갗을 스쳤다. 그 작은 접촉에 서하가 꿀꺽 소리가 나도록 침을 삼켰다. 고요한 강의실에 그 민망한 소리가 꽤 크게 울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위를 보자 저를 내려다보는 뜨거운 시선이 닿았다.

“선생님이 공사 구분 좋아하시는 거 생각해서 그런 건데, 마음에 안 들었어요?”

“…잘, 했어요.”

드물게 존대를 하며 의중을 묻는 말에 서하가 잘했노라 칭찬을 했다. 잘한 거 맞으니까……. 하지만 제 대답이 시원찮았는지, 강제혁이 눈썹을 까딱이곤 나른하게 말했다.

“그럼 나한테 키스해 봐요.”

“네?”

“잘했다며. 말로만 칭찬해주는 거예요? 선생님이? 치사하잖아.”

입술이 닿기 직전이었다.

“집에… 가서요.”

말을 뱉는 그 작은 움직임만으로 입술이 미세하게 닿고 떨어지길 반복했다.

“겁나서?”

“잠깐…….”

허리를 감싸는 손이 너무 뜨거웠다. 단단한 가슴팍이 저를 속박하듯 조였다. 누가 들어올까 겁이 나는데, 자꾸만 몸을 붙이는 그가 얄궂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서하가 강제혁을 미약하게 밀어내며 눈을 맞췄다.

“읏, 하, 한 학기… 고생 많았어요.”

그 말에 강제혁이 눈을 접어 웃어 보였다.

“이서하 씨도 고생 많았어요.”

닿은 살결이 따뜻하고 기분 좋았다. 정말 한 학기가 끝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

얼결에 강제혁의 차에 오른 서하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두 눈을 깜빡거렸다. 3일 뒤에 시험이 전부 끝나면 만나기로 했는데, 오랜만에 얼굴을 보니 너무 좋아서 그 사실을 깜빡 잊고야 말았다. 안전벨트를 채우자마자 정신이 들 건 뭐람. 자연스레 기어를 바꾸고 차를 출발시킨 강제혁을 보며 서하가 급하게 물었다.

“근데 기말고사 아직 안 끝났잖아요. 기말고사 끝나기 전까지 만나지 말자고,”

“방금 이서하 씨 기말고사 끝났는데.”

누구 기말고사인지는 말한 적 없잖아요, 라는 말을 덧붙이며 강제혁이 아무렇지 않게 액셀을 밟았다. 부드럽게 도로로 진입하는 차량의 움직임에 서하가 입술을 씹었다.

“왜요, 240대가 모자라서? 지금도 충분히 많을 텐데.”

“그건… 나눠서 맞으면,”

“누구 마음대로. 남은 시험 한 개고,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 사서 걱정하지 말아요. 그리고 3일 더 있다간 내가 못 참아서 안 돼요.”

강제혁이 서하의 말을 자르고 피식 웃었다. 물론 마지막 말은 꽤 진지한 투로 중얼거렸다. 참기 힘든 것은 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좋아서 뇌가 녹을 것만 같았다. 지금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 손끝이 저릿할 지경이었으니까. 하지만 240대를 하루에 어떻게 다 맞는단 말인가.

“저희 어디 가요?”

애초에 그가 차를 끌고 왔다는 것 자체가 그의 집으로 향한다는 뜻은 아니었다. 집이야 코앞인데 굳이 차를 탈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제 집으로 가는 방향도 아니었다. 그래서 목적지가 궁금해진 서하가 온당한 질문을 던졌다.

“같이 밥 먹고, 본가에 가려고요.”

“…본가요?”

본가라 함은 서하가 행정실에서 해선 안 될 짓을 해 찾아낸 그 주소를 이름이었다. 장 선생에게 USB를 찾았다고 밥을 사기까지 했고.

“거긴 왜요?”

“이서하 씨한테 보여주고 싶어서.”

보긴 했다. 워낙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새삼 그곳이 강제혁의 어린 시절이 녹아든 곳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엉망진창이 되어 묶여있던 강제혁의 모습만 뇌리를 스쳤다.

“밥 뭐 먹을까.”

그가 살아서 다행이다. 살아서 제 곁에서 이렇게 있어 주어서.

“비빔냉면 먹고 싶어요.”

“매운 거?”

“네.”

괜히 들뜨는 기분에 입술을 꾹꾹 깨물고 식사 메뉴를 정했다. 날이 더우니 시원한 음식이 당겼다. 서하의 메뉴 선정에 입꼬리를 당겨 웃은 강제혁이 중얼거렸다.

“혀도 아픈 걸 좋아하나봐.”

그 말에 서하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법한 일이었다.

***

냉면은 생각보다 더 매웠다. 새빨간 양념과 코를 쏘는 매운 향에 맵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듣자하니 매운 걸로 유명한 가게랬다. 물냉면을 시켜서 깔끔하게 먹은 강제혁과 달리 서하는 연신 물을 들이켜야 했다.

이렇게까지 매운 곳에 데려올 필요는 없었잖아. 서하는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물론 강제혁은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라서 통통 부은 입술로 거칠게 숨을 뱉는 서하의 모습을 즐겁게 감상하고 있었다.

“아… 너무 매워요.”

“이상하네. 매운 게 좋다며.”

“이건 좀 심하잖아요…….”

우유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 통증이었다. 눈물이 맺힌 서하의 얼굴을 유심히 보던 강제혁이 눈썹을 찌푸렸다.

“하다하다 냉면을 야하게 먹네.”

“네?”

“혀가 아파서 그렇게 예쁘게 우는 거예요?”

진지하게 묻는 말에 서하 역시 미간을 구겼다.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이게 야하다고요?”

“구멍에 바이브레이터 박은 채로 한 삽십 대 쯤 맞았을 때 얼굴이랑 비슷해요.”

아무리 닫힌 방 안에서 식사 중이라도, 지나치게 노골적인 단어 선택에 서하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릇을 물린 서하가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거 너무 매워요. 나가서 우유 사 먹을래요.”

“우유가 먹고 싶어요?”

제 발등에 닿는 강제혁의 발끝이, 몹시 야릇했다. 그가 말하는 우유가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아래가 파여 있는 좌식 테이블이 이렇게 야할 일인가. 식당에 들어온 지는 어느새 20분이 흐른 때였다. 마음 같아서는 밑으로 기어 들어가 그의 성기를 물고 싶었지만 서하는 스스로 상식이 있는 편이라고 생각했다.

“저 지금 입안에 캡사이신 한 가득이라, 강제혁 씨 아파서 안 돼요.”

타당한 이유를 찾아 반박하자 강제혁이 언제 색스러운 기색을 띠었냐는 듯 무심한 눈으로 되물었다.

“우유를 먹는데 왜 내가 아파요?”

놀림이 점점 짓궂어지는 것 같다. 또 당했다는 생각에 서하가 입을 꾹 다물고 보리차를 들이켰다. 수치스러웠다.

***

식사 후엔 카페까지 들려 테이크아웃으로 음료를 구매하고 강제혁의 본가로 향했다. 부드럽고 달달한 음료가 입술과 혀를 한 김 식혀주었다. 배부르고 시원하니 잠이 솔솔 왔지만 보조석에 앉은 입장으로 숙면을 취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싶어 몇 번이고 눈을 부릅떠야 했다. 커피라도 시켰으면 카페인의 덕을 크게 봤을 텐데, 강제로 커피를 끊긴 지 벌써 몇 주째였다.

강제혁은 서하가 스스로의 건강을 해치는 것을 몹시 불쾌해 했다. 서하가 그와 반 동거 생활을 하며 보다 명확히 알게 된 것은, 강제혁이 상당히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담배도 술도 가까이 하지 않으며 인스턴트 음식을 혐오하다시피 했다. 아직 어려서 그런가 싶었지만 제가 23살일 때를 생각해보면 그도 아닌 것 같았다.

“운전 언제 배웠어요?”

서하는 졸음을 깨고자 질문을 던졌다. 소소한 대화라면 잠을 깨는데 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면허 땄어요.”

“…부지런하네요.”

“차가 있으면 다니는 게 편하잖아요.”

“그렇죠.”

할 말이 떨어졌다. 곤란해진 서하가 질문거리를 찾아 차 안을 두리번거렸다. 언제 봐도 깔끔한 게 마치 새 차 같았다. 결벽증이라도 있나, 싶을 만큼.

“이 차는 산 지 얼마나 됐어요?”

“제대하고 바로 뽑은 거예요.”

“군 생활… 은 안 물어볼게요.”

“왜?”

제 군 생활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물론 그다지 힘들진 않았다. 소위 남들이 꿀 빤다고 말하는 의경 경리행정병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서하는 대체로 행정반장과 함께 경비와 예산에 관련된 업무를 보곤 했다. 어쩌면 봐줄 만한 학벌 덕을 톡톡히 보았다고 할 수 있겠다. 행정반장은 무던한 사람이었고 서하도 실수를 하지 않았던 탓에, 책잡히는 일 없이 놀다시피 군 생활을 하고 제대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극한 상황은 없었다. 사실은 좀 아쉬울 지경일 정도로…….

“그러고 보니 이서하 씨는 군대에서도 흥분했겠네요.”

묘하게 까칠해진 강제혁의 말투에 서하가 손을 꾹 쥐었다. 질투의 신호다.

“…행정병이어서 편하게 지냈어요.”

“그래서 아쉬워?”

“……아니요. 절 뭐로 보는 거예요.”

제대로 보고 있지. 날카로운 통찰력에 소름이 다 돋았다. 서하가 질문을 강제혁에게 돌리기로 했다. 그가 제 관심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인님은 어떠셨는데요.”

“조교였어요.”

“…!”

지는! 서하가 눈을 크게 뜨고 배신감에 떨었다. 군 시절 유일하게 설렜던 게 조교한테 발로 엉덩이를 걷어차인 일이었다. 그마저도 얼굴을 보니 식었지만. 하지만 강제혁이라면 다를 것 같았다. 새삼 저 잘빠진 몸으로 군복을 입고 빨간 모자를 쓴 강제혁을 보고 싶어졌다. 생각하면 할수록 섹시할 것 같았다.

“다 왔어요.”

“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순간 당도한 익숙한 전경에 서하가 짧은 한숨을 뱉었다. 울창한 숲 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저택은 꽤나 쓸쓸해보였다. 사실 이곳은 강제혁을 키워주신 조모의 무덤이나 다름없다. 그가 기일마다 찾아와 향을 피운다고 했으니까.

“따로 납골당은…….”

“이 집 가장 안쪽에 모셔놨어요.”

정말이었네. 왠지 숙연해졌다. 차를 주차하고 굳게 닫힌 대문을 열쇠로 열고 들어가자 너른 앞마당이 있었다. 처음 왔을 땐 제대로 살필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없었는데, 다시 보니 평화로운 풍경 그 자체였다. 알맞게 자란 잔디가 푸른빛을 자랑하며 바닥을 수놓고 한편에는 커다란 버드나무와 작은 연못도 있었다. 작은 물레방아가 돌아가며 아래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지는 햇빛을 받아 붉게 반짝 거렸다. 제법 커다란 석등은 아마 작고하신 집주인의 취향인 듯 했다.

“연못이 마음에 들어요?”

“…물을 좋아해서요.”

“참고해야겠네.”

잠깐 시선을 준 것 뿐인데 티가 났나. 괜히 머쓱해진 서하가 뺨을 긁었다.

“뒷마당에는 꽃이 많아요. 내일 새벽에 이슬 맺혔을 때 보면 좋을 거예요.”

고즈넉한 풍경이 자꾸 눈길을 끌어서, 서하는 이 집이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강제혁에겐 어떨지 모르지만. 애초에 왜 여기로 오자고 한 걸까? 생각을 읽을 수 없는 옆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그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섰다.

어질러져있던 내부는 말끔히 청소된 상태로 바깥과 다를 것 없이 정돈된 분위기였다.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후엔 복도에 즐비해있는 수묵화를 스쳐지나 거실이라고 할 법한 공간에 도착했다. 조명을 켜고 보니 그 전과 사뭇 달랐다.

“왜 여기 온 건지 궁금하진 않아요?”

항상 실내에 단둘이 있을 때면 야릇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지금은 뭔가 달랐다. 강제혁의 단출한 물음에 서하가 대답을 고르다 내밀어진 손을 먼저 잡았다. 부드럽고 단단한 살결이 주는 안정감이 꽤 컸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궁금하지는 않고?”

그저 그가 오자고 하니 따라 왔을 뿐이었다. 이유가 필요할까. 그의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가 채워진 순간부터 서하는 그의 노예나 다름없었다.

“하루 쯤 같이 보내고 싶었거든요.”

“…….”

“난 나더러 완벽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은 여기가 숨 막혀서 도망쳐 나온 거니까,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하는 이서하 씨한테 여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담담하게 제 입장을 토로하는 강제혁을 보며 뜬금없이 무언가 떠올랐다.

- 언제 사랑한다고 말할 거예요?

집요한 물음. 그 물음에 대한 답은 어쩌면 정해져 있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그에게 사랑한다고 답하고 싶었다.

“사…….”

지금이 적기인 건 아닐까.

“사…….”

“…?”

“사연 없는 무덤 없다잖아요…….”

문제는 서하가 그런 것에 면역이 없다는 점이었다. 이럴 때 쓸 만한 격언은 아닌 것 같은데, 이미 뱉어진 ‘사’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제대로 된 답이 없었다. 초라한 실패였다.

***

“2층이 내가 쓰던 곳인데 먼저 올라가 있어요.”

“네.”

잡은 손을 그대로 당기며 말하는 강제혁의 바스락거리는 미소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홀로 나무계단을 밟고 위층으로 올라가자 강제혁의 어린 시절을 볼 수 있겠구나, 묘한 기대심이 생겼다.

넓은 테라스에는 티 테이블이 있었고 관상용 화분이 멋들어지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보다 좀 더 어렸던 강제혁이 저기서 공부를 했겠지, 그런 생각을 하니 기묘했다. 교복을 입은, 지금보다 체격이 작은 주인을 상상하자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덩치가 산만큼 큰 지금도 이따금 귀여운데 그땐 얼마나 귀여웠을까. 그리고 단정하게 생긴 꼬마 아이가 어쩐지 낯익은 얼굴로 탁상 위 작은 액자 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귀엽다.”

어렸을 때랑 별로 다를 건 없네. 어린 아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생기 없는 표정이 마음에 밟혔다. 저 역시 화목한 집안에서 자라진 않았다지만, 누나가 살아 있을 적에는 그래도 이따금 웃기라도 했던 것 같은데.

서하는 강제혁의 사진을 몇 차례 더 눈에 담다가, 가장 처음으로 보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꽤 넓은 방이었다. 벽면에는 싱글 침대 하나와 책상이 있었는데, 그 주인이 장성한 것을 생각하면 시간이 멈춘 보존현장 같은 느낌이 선명했다. 교과서와 입시용 문제집, 그리고 권장 도서들이 가득 꽂힌 책장은 성실한 학생의 방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나이차가 있다 보니까 제가 쓰던 것과는 다른 것들이었지만…….

그러고 보니 그는 제 수업에서도 A+를 받아갔다. 안 그렇게 생겨서 성실하고 모범적이다. 서하는 낙서 한 점 없이 밑줄과 필기로 가득한 교과서가 신기하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도 글씨 잘 썼구나. 악필인 서하와는 대비되는 부분이었다. 평범해 보이는데, 대체 언제 ‘성향’을 깨달았다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성향을 깨달은 후부터 도구를 사 모았던 서하에 비하면 이 방은 청렴결백 그 자체였다. 어디 서랍 같은 데 있을까? 싶었지만 뒤지는 것까지는 너무…….

“재밌어요?”

달칵 소리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선 강제혁이 서하에게 말을 걸었다. 재미있냐는 물음이 뭔가 뜨끔했지만 자연스럽게 웃어넘겼다. 강제혁이 음료를 담아 온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엄청 깔끔한데요.”

“매주 청소하시는 분들 오시니까요.”

그런 뜻이 아니었으므로 서하가 조금 더 말을 덧붙였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분위기 자체가 단정한 느낌이에요.”

“그런 데 집착했었다고 얘기했잖아요.”

침대 위에 털썩 앉은 강제혁이 멀뚱히 서 있는 서하를 아래위로 훑었다. 진득한 시선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지 않는다.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고, 그에게 복종하고 싶다.

“이서하 씨 학생 때도 그런 상상하면서 자위했어요?”

“…네?”

“맞아서 퉁퉁 부은 엉덩이로 좆 먹는 상상.”

말만 들었는데도 저릿한 느낌에 서하가 주먹을 꾹 쥐었다. 뒤를 벌리고 들어서는 성기의 포악함을 알고 있다.

“나는 했어요. 누군가의 엉덩이를 터질 때까지 때리고, 좆 박는 상상.”

“주인님…….”

“바지 벗고 의자 위로 올라가요.”

눈앞이 흐릿해지는 명령이었다. 교복을 입은 강제혁이 공부를 하고 음험한 상상을 하며 성기를 훑던 단정한 방 안에서, 어렸던 그의 욕망대로 벌거벗겨질 스스로를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했다. 침묵 끝에 서하가 바지버클을 풀었고 천이 마찰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추락했다. 드러난 허벅지와 종아리에는 묵은 멍 자국이 연하게 색을 입힌 수묵화처럼 잔잔하게 물든 채였다.

서하는 바로 꽂히는 시선을 느끼며 의자 위에 올라 무릎을 꿇고, 강제혁이 이따금 사정감을 느끼며 뒤통수를 묻었을 등받이의 윗부분에 뺨을 기댔다. 차가운 가죽의 느낌에 몸이 떨렸다. 등받이를 끌어안고 엉덩이를 내밀자 이윽고 속옷이 내려졌다. 서하가 숨을 헐떡이며 매질을 기다렸다.

“기대돼?”

“…네.”

낮은 목소리에 짧게 긍정했다. 기대만으로 성기가 단단해지고 있었다. 강제혁이 책상 위에 놓인 원형의 연필꽂이에서 30cm 자를 꺼냈다. 검정색의 철제 자가 서하의 엉덩이를 길게 긁어내렸다.

“흣…….”

“엉덩이 똑바로 내밀고 속으로 숫자 세.”

그리고 짝 하는 소리와 함께 엉덩이에 따끔한 충격이 내려앉았다. 간만의 통증에 눈이 크게 뜨이기도 잠시, 연타로 떨어지는 매질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읏, 아, 흐윽…!”

셋, 넷, 그리고 다섯……. 당연하게도 맞을 때마다 허리가 연신 뒤틀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타액이 흘렀다. 스팽 만으로 쌀 것 같았다. 등받이 말고는 기댈 곳이 없었다. 서하가 한껏 부어오른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수를 셌다. 열 셋, 열 넷……. 너무 좋아……. 그 즈음 서하의 입가엔 얇은 미소가 고여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강제혁이 짧게 웃었고, 그 웃음소리에 수치심이 서하의 뺨을 달궜다.

“그렇게 좋아?”

“하, 으응, 네…….”

“엉덩이 벌려.”

아직 덜 맞았는데. 매질이 멈춘 순간, 엉덩이가 화끈거려오기 시작했다. 아쉬움이 들었지만 주인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등받이를 껴안았던 팔을 풀고 엉덩이를 잡아 벌리자 방금 전까지 서하의 엉덩이를 야멸차게 내리치던 자가 입구를 꾹 눌렀다.

“흣…!”

짧게 튀기듯 구멍을 때리는 날카로운 통증에 서하가 좀 전보다 크게 엉덩이를 뒤틀었다.

“자세 똑바로 안 합니까? 못 쓰게 되면 좋겠어요?”

서하가 벌벌 떨리는 입술을 말아 물고 볼기를 다시 잡아 벌렸다. 그대로 몇 대나 더 맞았을까. 입구가 화끈거렸다.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강제혁이 부어오른 입구에 차가운 구슬을 가져다 댔다. 그건 서하가 잘 아는 감촉이었다.

“하아…….”

굵고 차가운 원형의 유리구슬이 화끈거리는 구멍을 벌리고 안으로 빠듯하게 들어서고 있었다. 갑작스레 벌어진 입구가 뻐근하게 아파왔다. 가장 굵은 지름을 먹어치우자 다음은 가뿐히 흡입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엉덩이를 벌려 잡은 서하의 손가락 마디가 희게 질려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다.

“흐, 아, 그, 그만…….”

겨우 두 개를 집어 삼켰는데, 하나가 더 안을 비집고 들어오려 하고 있었다. 서하가 다급하게 만류했지만 강제혁의 대답은 달콤하고도 가차 없었다.

“싫으면 세이프워드를 외쳐요.”

“흐으, 학, 아!”

“싫지 않으면서, 그만이라고 말했어요? 벌 받아야겠네.”

웃음기 섞인 즐거운 목소리가 잔인하고 야릇했다. 커다란 구슬을 세 개나 먹어치운 구멍에 손가락까지 밀어 넣은 강제혁이 잔혹했지만, 그런 와중에도 구멍을 조여 그의 손가락을 조이는 것을 잊지 않는 서하였다. 세이프워드는 개뿔, 이렇게 좋은데. 내가 왜? 하지만 배가 무거웠다. 얼마나 깊게 삽입한 걸까. 그리고 강제혁이 다시 자를 집어 들었다.

“손 치우고 엉덩이 내밀어야지. 아직 덜 맞았잖아.”

“으읏…….”

무거워진 배를 감싸고 싶었지만 등받이를 안았다. 배를 받쳐봤자 통증이 덜한 것도 아니고 더한 것도 아닐 게 분명했다.

“아…!”

그리고 떨어진 매질의 충격은 좀 전과 사뭇 달랐다. 스팽의 강도가 강해진 것도 문제였지만 자가 엉덩이를 후려칠 때마다 안에 든 구슬에도 충격이 전해졌다. 괴롭게 안을 짓뭉개는 구슬에 서하가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기 시작했다. 속으로 매질의 횟수를 세라고 했는데, 눈앞이 번쩍거리는 충격과 쾌감에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땀으로 젖은 살갗에 쇠로 된 자가 끈덕지게 달라붙으며 통증을 더욱 심화시켰다. 죽을 것 같았다.

“내 방에서 무슨 생각 했어요? 방에 들어가도 된다고 한 적은 없었는데.”

그 말에 서하가 헛숨을 삼켰다. 그랬다. 그는 2층에 올라가 있으라고 했을 뿐, 제 방에 들어가도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서하가 열 오른 머리로 변명을 주워섬겼다.

“흣, 그냥…. 흐으, 주인님, 어렸을 때……. 어떠셨을까, 궁금해서, 아!”

“나도 이서하 씨 어렸을 때가 궁금한데. 혼자만 훔쳐봤으니까, 벌 받아야겠네.”

“하으윽…!”

그렇게 서른 대쯤 더 맞았을까. 서하의 등이 땀으로 흠뻑 젖었고, 별안간 멈춘 매질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구슬 하나가 구멍을 벌리며 아래로 반쯤 빠져나왔다.

“하으, 아…….”

“먹여준 건데 흘리면 안 되지.”

“아악…!”

벌려진 입구가 아릿하게 느껴질 쯤, 구슬이 다시 내부를 쑤시고 들이쳤다. 배가 아플 만큼 깊은 삽입이었다.

“이대로 좆을 박아줄까?”

“아, 흐, 아, 안 ㄷ…….”

이 상태에서 강제혁의 흉기를 밀어 넣는다면, 분명 찢어질 것이다. 그냥도 깊은 곳을 헤집고 안쪽을 짓누르는 성기인데 구슬을 세 개나 넣은 채로 품는다면 내장이 망가질 게 분명했다. 서하가 엉망이 된 엉덩이를 움찔거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상상만으로 겁이 났다.

“그럼 몇 대 맞았는지 말해봐.”

멍한 머리에 충격에 가까운 질문이었다. 바보가 된 것처럼, 서하가 젖은 눈으로 강제혁을 올려다보았다.

“맞추면 다 빼주고 박아줄 거고, 틀리면…….”

“….”

“숫자 오차는 세 대까지 봐 줄게요.”

젖은 눈가에 입맞춰주며 속삭이는 말에, 서하가 최대한 기억을 되새겼다. 열다섯 대쯤 매질을 멈췄고, 구멍을 몇 대 때리고 삽입한 후에 다시…….

“오십, 오십 대요.”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오차를 봐준다고 했으니 그만하면 너그러운 처사였다. 공포와 희망이 얼룩져 있는 서하의 얼굴을 새까만 눈으로 응시하던 강제혁이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아깝네요. 오십 한 대를 맞았는데…….”

살았다. 틀렸지만 오차 안에는 들었다. 서하가 조금 풀어진 눈으로 안도감에 떨었다. 그리고 묘한 표정을 지은 강제혁이 서하의 귓가에 대고 다음 말을 이었다.

“하나 틀렸으니까, 하나 빼고 뱉어요.”

“오차를…! 아!”

“봐 준다고 했지, 용서해 준다고는 안 했잖아.”

구슬이 세 개라 오차를 세 대까지 봐 준다고 한 건가. 강제혁은 제가 그 이상 틀리지 않은 걸 아쉬워한 게 분명했다. 서하는 반박할 힘도, 의지도 없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니까, 지금으로선 구슬을 뱉게 해준 그의 선처에 감사해야 하는 것이다. 게다가 야비한 그의 수법이 싫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취향이면 어떡해야 하는 거지? 서하가 엉덩이를 벌려 잡고 배에 힘을 주었다. 수치스러운 감각이 전신을 휩쓸었지만, 방도가 없었다. 눈물 젖은 뺨도 따끔거렸다.

“흐, 으으…….”

붉은 색의 구멍이 벌어지고 투명하고 매끈한 구슬이 말단을 드러냈다. 수축과 이완을 반복하며 구슬을 ‘뱉는’ 사이, 강제혁은 서하가 엉덩이를 벌리고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만족스럽게 감상하고 있었다. 크게 벌어진 입구가 구슬을 하나 토해냈고, 다시 오므라들었다 벌어지길 반복했다.

“으읏…….”

내장 안에서 구슬이 밀려 내려오는 감각이 소름끼치도록 선명했다.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다. 서하가 다시금 뒤에 힘을 주자 구슬이 입구를 거치고 쑤욱 빠져나갔다. 고된 과정이었는지, 서하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수치심에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그리고 반사적으로 빠져나온 구슬이 입구에 걸렸을 때, 강제혁이 언제 그렇게 흉흉하게 발기했는지 알 수 없는 거근을 서하의 뒤로 단번에 밀어 넣었다.

“아! 읏, 학…….”

새하얗게 물들었다 다시금 검게 번지는 시야에, 서하가 새된 신음을 내지르며 등받이를 절박하게 껴안았다. 까슬한 음모가 골 사이를 간지럽힐 때, 강제혁의 흉근이 제 안을 점령했음을 깨달았다. 구슬이 어딘가를 완전히 지나 장기를 지그시 누르고 있었다. 내장의 휜 부분을 쑤셔대는 음경이 거칠고 난폭했다. 창살에 꿰뚫린 물고기보다 더한 경련이 일었다. 서하가 바들바들 떠는 순간 성기가 뒤로 빠졌고, 내벽이 딸려나감과 동시에 다시금 깊게 쑤셔졌다. 퉁퉁 부은 볼기가 엉망으로 부딪히며 강렬한 통증을 선사해주고 있었다.

“학. 히익. 흐으으…….”

울음과 새된 신음, 그리고 불규칙한 호흡만 이어졌다. 성기가 쑤셔질 때마다 눈앞이 희게 번지길 반복하고 엉덩이는 찌르르한 통증에 범벅이 된 채였다. 침대 시트가 투명한 액체로 흠뻑 젖어 들었다. 무색무취한 그 액체가 마치 소변이라도 되는 것 같아 몹시 수치스러웠다. 서하가 숨을 헐떡이며 체액을 토해내는 성기를 가죽 시트에 문대는 순간,

“커윽…!”

강한 악력에 목이 졸리기 시작했다. 서하가 제 뒤를 깊게 헤집으며 목을 조르는 강제혁의 팔뚝을 구명줄마냥 잡고 매달렸다. 눈이 뒤집힐 것 같은 잔인한 쾌감이었다.

“읏, 이서하. 사랑해…….”

그리고 뒤를 쑤시던 굵은 좆이 움찔거리며 체액을 뱉어냈다. 거친 신음과 진한 감정이 서린 음성이 숨통을 조르는 손길과 함께 서하의 몸을 점령했다. 강제혁이 서하의 입술 사이로 흐르는 타액을 핥아 삼키며 목줄을 쥔 손에 힘을 풀자, 서하가 뒤를 뻐끔거리며 몸을 떨었다.

“가, 감사합…….”

강제혁이 원했을 답이 아닌, 훌륭한 섭의 대사가 서하의 입술을 타고 흘러 나왔다. 사랑한다는 고백에 대한 대답이 아니라, 안에 정액을 싸주어서 감사하다는 의미일 게 뻔했다. 미운 말을 내뱉는 입술을, 강제혁이 틀어막고 깊게 혀를 집어넣었다. 결국 그 말은 곧 완성되지 못한 채 서하의 목 안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서하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음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

목이 타는 것만 같은 갈증에 눈을 뜨자 온통 어두컴컴했다. 서하는 덜컥 겁이 나 눈앞에 있는 것을 덥석 잡았다. 손바닥에 닿은 것은 부드럽고 단단한 살갗이었다. 익숙한 체취에 안도감이 먼저 들었다.

“…악몽이라도 꿨어요?”

“아뇨…….”

다소 좁은 싱글 침대 위에서 두 남자가 진득하게 얽혀있는 장면은 어쩌면 우스울 수도 있었으나, 당사자들이 느끼기엔 그렇지 않았다. 비좁은 공간임에도 좋았다. 어느새 제 목에 채워져 있는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서하가 강제혁의 가슴팍에 뺨을 기댔다.

“제가 먼저 잠들었나 봐요.”

“기절했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죠.”

조금 투박한 말씨에 서하가 입술을 깨물었다. 성감이 몰아치면 정신을 놓는 편이란 걸 그를 통해 깨달았다. 그러게 적당히 좀 하지, 싶었지만 그게 또 싫지 않았다. 제 체력이 좋은 편이라고 자부했는데 체내에 쌓인 피로가 성감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싶었다. 평소에 잠을 좀 많이 자둘 걸 그랬나. 이게 다 대학원을 다녀서 그래. 서하가 말도 안 되는 합리화를 했다.

“기분 상하셨어요?”

잠기운이라곤 하나도 묻어나지 않는 두 눈이 서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을 감싸 안은 손이 별안간 엉덩이를 타고 내려갔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살덩이 사이를 헤집고 부어오른 입구를 무감하게 쓰다듬었다. 지독히도 외설적인 접촉에 서하가 몸을 떠는 순간,

“내가 좋아요?”

단조로운 질문이 떨어졌다. 생각이 많아 보이는 눈과 달리 간단한 물음이었다.

“…네.”

좋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좋다. 그의 앞에 서면 온몸이 떨렸다. 피학적인 성향의 결과물일까. 서하가 그 손길에 제 몸을 온전히 맡기며 시선을 굳혔다. 서로의 눈동자에 서로만 고이는 순간이 좋았다. 강제혁은 그런 서하를 보며 뜬금없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서 이런 짓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

“이서하 씨라 되나 봐요.”

부가적인 설명이 붙지 않은 문장을 이해하는 게 어려웠지만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졸음은 달아난 지 오래였다.

“예전부터 이 집이 싫었어요. 여기는 너무 완벽하고 훌륭한 장소잖아요. 나랑 안 어울리게.”

“…주인님이 완벽하지 않아서요?”

서하는 강제혁이 말했던 것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서하의 물음에 강제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제야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떻게든 완벽한 척하고 살았는데, 나야말로 한참 밑바닥에 가까운 인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까 여기가 너무 숨 막혔어요.”

“….”

“그래서 도망친 거죠. 어차피 돌아올 거면서.”

서하가, 천장으로 시선을 돌린 강제혁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복잡해 보이는 옆얼굴은 액자 속 소년을 꼭 닮아 있었다.

“타인을 상처주고 능욕하면서 쾌감을 느끼는 게 정상은 아니잖아.”

‘정상적인’ 말을 하는 그가 왠지 낯설었다. 하지만 서하 역시 동감하는 부분이기도 했다. 저 역시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긴 적은 없으니까. 그럼에도 정상을 동경하지는 않았다. 될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만큼 비참하고 서글픈 일은 없으리라.

“그래서 저를 만났잖아요.”

문득 서하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문장이 튀어나왔다. 말을 해놓고 쪽팔렸다. 제가 뭐라고. 이 말은 곧 그가 불완전한 게, 저를 만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대답 없이 시선만 주는 강제혁의 태도도 부끄러움을 가중시켰다.

“그러니까, 제가 대단한 존재라는 건 아니고요. 원래 인간은 불완전한 거니까. 저도 강제혁 씨를 만남으로써 더 성장하고…….”

씨발. 주례사 쓰냐고……. 어째 말을 하면 할수록 망하는 것 같은 느낌에 서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작게 웃음소리가 들리자 더 수치스러웠다. 이런 수치플은 좋지 못한데. 어느새 허리를 끌어안은 손이 서하를 더욱 깊게 끌어 당겼다. 별안간 강제혁의 턱 끝을 눈앞에 둔 서하가 헛숨을 삼켰다.

“그럼 이서하 씨는 계속 내 옆에 있어야겠네요. 이서하 씨가 있으면 완전해질 수 있다는 거잖아요.”

“그게 그렇게 되나요…….”

“싫어?”

싫을 리가. 좋아 죽겠다. 차마 말로는 꺼내지 못한 진심에 서하가 얌전히 그 품에 안기며 속으로만 웅얼거렸다.

“조금 더 솔직해지면 좋을 텐데.”

“나이를 먹어서 그렇습니다…….”

“그럼 내가 아직 어려서 솔직하다는 거예요?”

그게 또 그렇게 되나. 하지만 그를 어리다고 애 취급한 적은 없는데. 말싸움으로 져본 적이 없는데, 어째 강제혁에겐 매번 지는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관계기도 했지만.

“주인을 깔보고, 이리 저리 도망치기나 하고.”

“제가 언제…….”

“말대꾸도 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멘트였다. 애초에 돔에게 개기는 성향이 아닌지라 그가 이렇게 혼내는 말투로 얘기하면 등골이 다 오싹했다. 물론 쾌감으로.

“계속 내 곁에 있어요.”

“안 버리시면,”

“내가 사랑하는 널 왜 버려.”

아, 또다. 진득하게 묻어나는 애정에 서하가 몸을 얕게 떨었다. 꿀에 절여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묶고, 때리고, 능욕하고, 엉망으로 만들지언정 버릴 일은 결단코 없으니까 헛꿈 꾸지 말아요.”

세상 어느 것보다 달콤한 고백이었다. 이쯤 되면 저 역시 뭐라 답을 줘야 할 성 싶은데, 입술이 도무지 떨어지질 않았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서하의 회피에 익숙해진 강제혁이 잠을 청하려는 게 보였다. 결국 다급해진 서하가 아무렇게나 입을 떼고 말았다.

“사랑해요.”

마음이 차고 넘쳐서, 입 밖으로 터진 말이 정돈되지 못한 생김새로 공기 중에 흩뿌려졌다.

“말로 다 못할 만큼…….”

진심이었다.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걸, 당신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랑이 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 충만한 기분이 드니까.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떨리고 설레니까. 입 맞춰주는 게 좋아졌으니까.

그 순간 침대가 덜컹했다. 강제혁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서하가 제 허리를 끌어다 ‘자세’를 취하게 하는 행위에 눈을 크게 뜨고 힘겹게 뒤를 돌아봤다. 정염에 불타는 눈이 된 강제혁이, 서하의 부은 엉덩이를 주무르며 낮게 속삭였다.

“너무 늦은 벌로, 남은 189대 맞을 준비해요.”

적립한 240대 중 저녁에 맞은 51대를 제한 숫자였다. 사랑 고백에 대한 답이 체벌이라니, 어쩌면 정답일지도 몰랐다.

***

“납골당으로 옮긴다고요?”

서하가 엉망이 된 몸으로 새벽을 맞이하고, 1층 서재에 모셔진 조모의 위패에 향을 올린 후의 일이었다. 강제혁이 간단히 차린 아침을 먹으며 나누게 된 대화는 뜻밖의 것이었다. 조모의 유골함을 납골당으로 옮길 예정이라는 이야기였다. 서하가 베이컨을 겨우 씹어 삼키고 귀를 기울였다.

“원래 어머니 유골함이랑 같이 안치해달라고 하셨어요.”

서하는 알 수 없는 과거의 일에 그저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하지만 의문점이 들었다. 애초에 할머님의 흔적이 남은 집을 숨 막혀 했던 그였고, 그런대로 굳이 유골함을 집에 둔 것이 이상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애초에 이 집에 둘 필요 없었다니.

“근데 왜 처음부터 그렇게 안 하고…….”

당연하게 이어지는 질문이었다. 왜? 그러자 강제혁이 무심히 수란을 나이프로 터트리며 대답했다.

“어머니한테서 ‘엄마’를 뺏고 싶었거든요.”

그 심정을 모를 수 없기에, 서하가 강제혁이 식사하는 모습을 그저 바라봤다.

“유치하고 치졸하지만… 작은 복수였어요.”

“그럼… 이제 복수 끝난 거예요?”

잘 우러난 커피가 좋은 향을 내고 있었다.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서하가 강제혁에게 최대한 무겁지 않은 어투로 물었다.

복수가 끝났으면 좋겠다. 저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면 좋겠다. 버림받고, 잃고, 버림받을 게 무서워 숨죽였던 어린 아이는 이제 없었으면 했다. 저 역시 괜찮아졌으니까. 강제혁도 그러길 바랐다. 그리고 서하를 마주 본 강제혁이 얇게 웃어보였다.

“나한테는 이서하 씨가 있으니까.”

“…….”

“나를 사랑한다면서.”

그 말에 서하가 얼굴을 시뻘겋게 달궜다. 지난밤에 제가 했던 서툰 고백이 생각난 탓이었다.

- 사랑해요.

- 말로 다 못할 만큼…….

제가 그런 날 것 그대로의 고백을 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미칠 것 같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커피를 들이켜는 서하를 보며 강제혁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좋아하는 것 같던데…….”

“…….”

“나중에 여기서 단둘이 살아요. 인테리어도 바꾸고, 이서하 씨를 위한 ‘방’도 만들어 줄게요.”

꿈처럼 그려지는 미래에 서하가 눈을 깜빡거렸다. 그를 만난 지 한 학기가 지난 지금, 먼 미래를 그리게 되는 현재가 싫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그의 곁에 묶이게 될 스스로가 문득 행복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외전. 뜻밖의 문자

폭풍우 치는 밤. 대지 어딘가를 꿰뚫을 듯 내리치는 천둥과 번개 속에서, 채 잠들지 못하고 요동치는 심정을 기후의 탓으로 돌리는 이가 있었으니…….

“하…….”

다름 아닌 서른의 여름을 맞이한 이서하 되시겠다. 진득한 플레이 후 약 세 시간이 흐른 지금, 완벽한 애프터케어 후 잠든 강제혁의 곁에서 서하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대체로 플레이가 끝난 뒤에는 서하가 뻗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특별히 내일의 스케줄을 생각해 강제혁이 서하를 봐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니면 그가 휴대폰 관리를 소홀히 한 게 문제였던가. 그것도 아니면…….

- 씻고 올게요.

약 세 시간 전, 희롱하듯 서하의 젖꼭지를 한 차례 꼬집은 강제혁이 벌거벗은 그대로 샤워실로 향했다. 서하 역시 나른한 만족감 속에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잠에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짧은 알림음과 함께 강제혁의 휴대폰에 문자가 도착했고, 평소라면 보지 않았을 서하였지만 어째선지 눈길이 갔다. 보지 말 것을.

「주인님, 보고 싶어요. 또 때려주시면 안 될까요?」

간결하고 짧은, 의도가 명확히 느껴지는 문자. 처음 문자를 본 순간엔 어떤 감정도 들지 않았다. 이게 뭘까. 누구지. 어떤 새끼지. 생전 느껴보지 못한 기묘한 감각에 서하는 재빨리 눈을 감아보았다. 분명 졸음이 쏟아지던 시점이었으니까, 눈을 감으면 잠이 올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정신이 점점 또렷해졌다.

- 아직 안 잤어요? 얼른 자야지. 내일 바쁠 텐데.

- 이제 자려고 했어요.

- 얼른 자요. 나 아쉬워지기 전에.

샤워를 마치고 나온 강제혁이 익숙하게 무드등을 끄고 침대에 누워 서하의 허리를 움켜쥐고 관자놀이에 입술을 부빌 때까지도, 서하의 생각은 방금 본 문자를 향해 있었다. 휴대폰을 확인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할지 아니면 확인하기를 기다려야 할지, 기다렸다 한들 문책할 자격은 있는 건지……. 오만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빠져 나가길 반복했다.

그렇게 약 세 시간이 흐른 지금.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끔찍한 기분에 혀끝이 바짝바짝 말라가는 상태였다. 이런 기분을 느낄 거라곤 단 한 번도 예상해 본 적이 없는데. 아니다. 예상해 본 적이 전혀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분명히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제 주인의 첫 플레이 상대가 제가 아니라는 시점에서 이미 예측된 사건일 수도 있었고. 커뮤니티에서 강제혁의 닉네임을 여러 차례 본 기억도 있지 않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억울한 감정이 드는 것은 왜일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어리지 않은 나이에 이미 인간관계를 통달했다는 생각도 했고, 사람의 감정이란 게 어쩌면 가장 우스운 것이라는 사실도 깨달았다고도 여겼다. 한참 대학 생활을 영위하던 시절, 별것도 아닌 일로 싸우는 연인들을 얼마나 많이 보았던가. 제가 본 캠퍼스 커플만 해도 열 쌍은 넘었다. 그들이 지독하게 싸우는 모습을 몇 번 쯤 목격했었고, 대개 가장 부질없는 싸움은 바로 전 애인을 향한 질투로 인한 것이었다.

- 얘 뭔데 너한테 연락하는데?

- 내가 어떻게 알아?

그네들이야 어리니까 그럴 수 있었다지만 제 나이가 몇이던가. 잠 못 드는 밤, 천지가 울리는 굉음 속에서 서하의 심상 역시 요동치고 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좆같잖아…….’

지금에 와서 그 ‘질투’를 느끼고 보니 그 피해자(?)들이 얼마나 기분이 더러웠을지, 왜 그렇게 핏대를 세우며 싸운 건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것도 통렬히. 그리고 ‘또’ 때려달라는 그 말이 자꾸만 서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언제 만난 걸까. 만약 저와 만난 이후에 문자 속 상대를 만난 거라면? 이것도 멀티플이라고 하나? 그때 강제혁은 분명 그게 싫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건 섭 한정이었나? 돔은 그래도 된다든지……. 바람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건가? 서하의 생각이 꼬리를 물고 끝도 없이 이어져 나갔다.

“자야 되는데…….”

나른하게 퍼져나가는 숨소리와 짐승의 우짖는 소리를 닮은 천둥소리. 내일 학회를 갈 예정이니 조금만 봐달라고 간청한 끝에 얻은 수면시간은 부질없이 사라졌다. 잠들 수 없었기 때문이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샷 두 개 추가해서요.”

최근 카페인을 줄여가던 추세였지만 한숨도 못 잔 덕에 커피의 힘이 절실해졌다. 짧은 기다림 끝에 진한 색의 커피가 서하의 손 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한숨도 못 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오랜만에 밤을 샌 탓에 눈앞에 얇은 막이라도 씌워진 것처럼 눈알이 뻑뻑했다.

“야, 이서하. 너도 왔어?”

“……?”

탁한 시야에 들어온 남자는 석사 시절 선배였던 현수였다. 전에 사은회 때 본 것 같은데,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그새 머리라도 기른 건지 원래도 비호감이었던 인상이 더더욱 짙어졌다. 그게 아니라면 강제혁의 얼굴에 익숙해져 눈이 높아진 것이든지.

“오 선생님이 꼭 오라고 하셔서요.”

“역시 애제자는 달라.”

“…….”

비꼬는 게 분명한 말투였기에 딱히 받아치려 하지 않았다. 뭐 저렇게 불만이 많아. 서하가 빨대를 입에 물고 커피를 빨아 당겼다. 씁쓸한 커피가 목구멍을 지나쳐 흐르는 느낌이 꽤 만족스러웠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야, 나 이번 학기에 박사 입학하려고.”

“…? 하세요.”

“면접 완전 살 떨렸잖아. 석사 때랑은 달라. 그치?”

뭐 어쩌라는 거야. 서하가 대놓고 얼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기분 안 좋은데 하필 학회 직전에 만난 상대가 별로 반갑지 않은 대상이라 더 기분이 나빴다.

“근데 너 요즘 연애하냐?”

“흡…!”

갑작스러운 공격에 사레가 들렸다. 거친 기침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새빨개진 얼굴로 괴로움을 호소하는 서하를 보며, 현수가 혹시나 제 옷에 커피가 튀었을까 눈썹을 구기고 서하를 타박했다.

“야, 너 왜 이래? 진짜야?”

“갑자기 무슨,”

쉽게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는 사레의 여운에 서하가 따지듯 묻다 멈추길 반복했다. 이것만 아니었어도 어떻게 잘 넘어갈 수 있었는데! 현수가 킬킬거리며 재수 없게 쪼개더니 서하의 어깨를 툭툭 쳐댔다.

“장사 하루 이틀이지. 이 새끼 이거 바쁜 척은 다 하더니 할 건 다 하네.”

“아니라니까요.”

“아니긴 뭘. 흠도 아니고 왜 이렇게 빼? 부럽다, 야.”

이럴 줄 알았으면 학회 시간에 맞춰 나오는 건데, 괜히 강제혁을 마주하고 있기가 불편해 일찍 나온 제 잘못이었다.

- 데려다 줄까요?

- 괜찮아요. 얼마 안 걸리고…….

서하는 강제혁과 눈도 못 마주치고 서둘러 가방을 챙겨 나왔었다. 지금쯤이면 그 문자를 봤을 텐데. 그게 뭔지 물어봐야 하는데.

“왜. 헤어질 것 같아?”

“네?”

“헤어질 것 같아서 이렇게 부정하냐고. 근데 천하의 이서하가 연애를 다 하네.”

학회 시작 전까지는 30분 정도가 남은 상황이었다. 그런 문자를 본 마당에 헤어지네 마네 하는 소리를 들으니 더더욱 착잡했다.

“어디 이 형님이 연애 조언이라도 해줘?”

“연애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야, 네가 무슨 스님도 아니고 너 너무 도 닦듯이 살아. 사람이 그러면 안 돼.”

별 씨발 뭔 좆같은 소리야. 너나 잘해. 서하가 날카롭게 일어선 신경을 다듬지 못하고 속으로 쌍욕을 뱉었다.

“저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연애를 꼭 해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요.”

연애하는 게 아니라고 부정하는 대목에선 조금 찔렸지만 뒷말은 틀린 말이 아니었기에 당당히 뱉었다. 연애만능주의자도 아니고.

“아닌데, 볼이 빤질빤질한 게 아무래도 냄새가 나는데.”

어제 이 뺨에 정액이 뿌려지긴 했다. 하지만 깨끗이 씻었고 그냥 자려는 걸 강제혁이 억지로 스킨에 로션까지 발라주었으니 그 냄새가 날리는 없었다. 서하가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으며 커피를 마저 마셨다.

“어쨌든 넌 조심해라. 우리 같은 사람들 바람 맞기 십상인 거 알지? 공부한답시고 연락 안 되지. 돈도 없지. 매력이 없어요, 매력이. 전공가지고 이상한 농담이나 하고.”

“…….”

“특히 어린 애들은 잠깐이야. 아직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다, 내가.”

지랄, 지가 등신 같으니 바람난 걸 뭘 직업 탓을 해. 그렇게 생각하는 서하였지만, 지난밤에 본 문자 때문에 자꾸만 생각이 다른 길로 뻗어 나갔다. 주절주절 제 전 연애 이야기를 늘어놓는 현수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서하가 휴대폰을 움켜쥐었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를 의심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애를 썼다. 이런 쪽으로 상처 받는 건 전혀 자극적이지 않았으니까.

***

“…….”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집안이 조용했다. 강제혁도 일정이 있다고 했었기에 오늘은 집으로 귀가했다. 가벼운 내용의 메시지도 주고받았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토요일 오후였다. 무슨 일정이라고 했더라. 설마 그 문자의 주인공을 만나러 간 건 아니겠지. 불현듯 스치는 불안감에 서하가 소파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저녁 먼저 먹어요. 기다리지 말고.」

바로 직전에 도착한 메시지였다. 반쯤 동거하듯 살고 있었고, 방학을 맞이하고 나선 당연하게 그의 집으로 귀가하곤 했는데 오늘은 제 집으로 왔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홀로 지내 왔음에도 오랜만에 맞는 혼자만의 시간이 전혀 기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저 오늘은 집으로 왔어요. 밥 챙겨먹을게요. 주인님도 맛있는 거 드세요.」

서하는 착한 섭의 전형 같은 내용으로 메시지를 꾸며 보내고, 손등으로 피로한 눈두덩이를 가렸다. 기분이 영 별로였다. 그 문자가 뭐냐고 물어보지도 못하고, 기다리지 말라는 말에 왜 기다리면 안 되냐고도 묻지 못한다. 변한 게 없는 것 같았다. 괜스레 착잡해지는 기분에 서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손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답장이 온 걸까 싶었는데 진동이 멈추질 않았다. 전화구나.

“…여보세요.”

[전화 받을 때 그렇게 받지 말랬지.]

어째선지 싸늘한 음성에 서하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답했다.

“…주인님.”

[왜 그 집으로 갔어요?]

그로선 당연한 물음일지도 몰랐다.

“오늘 저녁에 안 들어오신대서요.”

[그거랑, 이서하 씨가 우리 집에 안 들어오는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간략하게 이유를 읊었는데 강제혁은 납득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언짢음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그 집에 혼자 있기 서러워서요.”

무슨 용기인지, 서하의 입에서 감정이 가득 담긴 투정이 터져 나왔다. 새삼 학회 시작 전에 현수가 했던 시답잖은 개소리가 떠올라 울컥한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서하의 대답은 강제혁이 예상했던 내용이 아니었는지 잠시간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서하가 먼저 전화를 끊고자 다음 말을 이었다.

“죄송해요. 오늘은 혼자 좀 쉬고 싶어요.”

[내가 서럽게 했어요?]

“…….”

강제혁이 서럽게 한 걸까. 따지자면 그랬다. 그가, 다른 섭을 만나서 서럽다. 그게 과거든 현재든 간에.

“…신경 쓰실 일 아니에요.”

[그럼 뭐가 내가 신경 쓸 일인데.]

조금 노기 서린 음성이 들려왔다. 하지만 서하는 대답을 골라내기가 어려웠다. 약속이 있다고 외출한 강제혁이었고 제가 이렇게 딴지를 걸 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애도 아니고. DS에 연애까지 하는 사이라도, 이제 와서 누구를 만났냐 왜 만났냐 묻기에는 엄두가 나질 않았다. 따져도 되나? 그와 저 사이에 선행하는 관계는 엄연히 DS였기에 그를 취조해도 되는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사랑한다는 고백을 주고받았대도 서하는 아직 이 관계가 어려웠다.

“들어오시는 시간 맞춰서 갈게요, 그러면.”

그가 시키는 대로 그 집에 가서 혼자 그를 기다려야 하는 순간이 서러웠다. 예전엔 방치된 채로 그를 기다리며 쾌감을 느꼈었는데, 그가 저 말고 다른 섭을 농락하고 있을 거란 상상을 하자 한없이 서럽고 질투가 났다. 우스운 일이었다.

[목소리가 왜 그래.]

“시키시는 대로 하면 되잖아요…….”

[거기 있어요.]

“네?”

그리고 전화가 툭 끊겼다. 강제혁의 집으로 향하기 위해 소파에서 일어섰던 서하가 망부석마냥 굳었다. 그의 집으로 가지도 못하고, 이젠 또 그가 용건을 마치고 제 집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신세였다.

***

서하는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걸친 채로 밖으로 나왔다. 언제 도착한 건지 강제혁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서하를 그대로 마주했다. 하지만 곧 시선을 돌리며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킨다. 시선이 닿았을 땐 숨이 턱 막혔는데 눈을 맞추지 않으니 심장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강제혁을 바라보던 서하가 먼저 입을 뗐다.

“주인님…….”

급하게 들이켠 물이 조금 넘쳐 강제혁의 턱 끝을 따라 바닥에 툭 떨어졌다. 찬 바닥에 무릎을 꿇은 서하가 강제혁의 발등에 시선을 떨어뜨렸다. 여기가 제 자리였으니까.

“혼나고 싶어서 일부러 신경 건드린 거예요?”

“…….”

“대답을 해야지.”

“읏…….”

거칠게 당겨진 머리채에 서하가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제 낯짝에 서린 복잡미묘한 표정이 그대로 노출되자 수치심이 들었다. 질투를 느낀 스스로가 창피하고, 그럼에도 해명을 듣고 싶다.

“입 벌려.”

낮은 명령에 서하가 고분고분 입술을 벌렸다. 단단하고 두꺼운 강제혁의 손가락이 서하의 좁은 입안을 가득 메웠다. 혀 위에 놓인 엄지에 침이 고여 들었다.

“빨아야지. 일일이 말로 해야 알아들어요?”

서하가 입술을 오므려 강제혁의 손가락을 사탕마냥 핥고 빨아 당겼다. 밋밋한 살 내음에 다른 게 빨고 싶어졌다. 뒤늦게 강제혁의 눈을 바라보자 새까만 동공이 저를 끈적하게 응시하는 게 보였다.

“엉덩이가 간지러웠어요?”

“흣, 으…….”

대충 동여 맨 가운의 매듭이 강제혁의 손짓 한 번에 맥없이 풀어졌다. 반쯤 발기한 성기가 공기 중에 노출됐다.

“무릎 꿇고 손가락 빤 것만으로 세우고.”

“흡…….”

“침대로 가서 엉덩이 내밀고 엎드려 있어요. 오늘 많이 맞아야 할 것 같으니까.”

서러운 마음과 다르게 육신에는 오싹하고 익숙한 말이었다. 맞지 않는 게 더 어색한 몸이 되어버렸다. 발기한 성기가 그 증거였다.

***

“서른, 다섯…!”

등 뒤로 묶인 손이 욱신거렸다. 무릎과 뺨이 닿은 침대는 폭신했지만, 뒤에 떨어지는 매질은 사납기 그지없었다. 가죽패들로 맞으니 맞는 면적이 넓어 중심축이 흔들릴 정도였다. 전신에 얕게 전기가 흐르는 것만 같았다. 눈이 가려진 채 손목을 구속당하고, 가운을 대충 올려 엉덩이를 얻어맞는 스스로의 모습이 남이 본 것 마냥 머릿속에 그려졌다. 강제혁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숫자를 뇌까리는 사이 엉덩이 골 사이로 차갑고 질척한 액체가 떨어져 내렸다. 순식간에 코끝에 스치고 드는 복숭아 향에 자주 쓰는 젤임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허벅지 사이로 흐르는 미끈거리는 액체가 마치 강제혁의 체액처럼 느껴졌다. 문득 아무런 말도 없이 제 엉덩이를 매질하고 삽입을 준비하는 강제혁이 매정하게 느껴졌다. 그의 그런 면을 좋아하는데, 왜 이렇게 서운한지.

“흣, 아…!”

입구에 닿는 삽입용 기구의 촉감에 서하가 허리를 떨었다. 대체 뭘 넣는 걸까, 고민하기 무섭게 뿌리 끝까지 밀어 넣어진 것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실제마냥 핏줄이 돋아있는 실리콘 성기였다. 강제혁의 것보단 한참 작은 것이었다.

어쩌면 오늘은 매질보다 그의 것을 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미적지근한 모조 성기에 괜히 눈물이 났다. 삽입을 했을까. 다른 섭과도 이런 식으로 뒹굴었을까. 갈 곳을 잃은 질투심이 자꾸만 서하를 괴롭혔다.

“집중 안 하지.”

“…죄송해요.”

안대가 조금 젖어들었다. 들키고 싶지 않아 시트에 코를 묻었다. 이윽고 딜도가 처박힌 엉덩이에 다시 패들이 닿았다. 단순히 닿았다고 하기에는 거친 타격이었지만, 강한 마찰음을 내며 제 살갗을 붉게 물들이는 순간이 자극적이었다.

“하, 아으…….”

서하가 흐르는 눈물을 통증 탓으로 돌리며 몸을 떨었다. 삽입된 채로 매를 맞으니 볼기가 화끈거리는 걸로 모자라 안쪽까지 묵직하게 아려왔다. 서하의 성기에서 투명한 액체가 흐르고 또 흘렀다. 과하게 느끼는 탓이다. 그렇게 스무 대 쯤 더 맞았을까. 엉덩이에 불이라도 난 것 같았다. 너무 아파서 아무것도 닿지 않는데도 괴로웠다. 축축해진 안대에 이어 볼까지 물기가 흥건했다.

“뱉어요.”

뒤를 조이고 풀며 모조성기를 밀어내자, 느리게 뒤를 빠져나가는 기구가 더욱 진득하게 느껴졌다. 화끈거리는 엉덩이 밑으로 제 온도에 달궈진 딜도가 툭하고 떨어졌다. 뻐끔거리는 구멍 안쪽에 익숙한 온도의 살덩이가 닿았다.

“하…….”

“빌어야지.”

조금 빠른 삽입 타이밍에 서하가 숨을 꾹 삼켰다. 그리고 떨리는 입술을 열어 제 주인이 바라는 간청을 뱉었다.

“주인님, 자지… 먹여 주세요…….”

물기 가득한 음성이 서하의 입술 새를 비집고 나왔다. 울음기가 선명한 목소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른 섭에게도 이런 말을 하도록 시켰을 거라고 생각하니 몹시 서럽고 화가 났다. 그리고 별안간 몸이 뒤집히고 안대가 벗겨졌다. 구겨진 가운에 등이 배겼다. 서하가 흐릿한 시야를 다잡자 다리 사이에 자리한 강제혁의 얼굴이 한가득 들어왔다.

“울어?”

“…아, 아파서…….”

“내가 이 정도 구분도 못할 것 같아요? 아파서 우는 거랑 목소리가 다른데.”

집요하게 눈을 맞추는 그의 시선에 서하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차마 얼굴을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오늘 왜 이래요?”

플레이는 접어둔 건지, 강제혁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서하의 눈가를 핥으며 물었다. 묶인 손 탓에 그를 만질 수 없는 게 억울했다.

“안고… 싶어요.”

강제혁이 군말 없이 서하의 손목을 풀어주었다. 서하가 뻐근한 팔을 뻗어 강제혁의 허리를 부둥켜안자 두꺼운 양감에 벅찰 지경이 되었다. 맞닿은 가슴이 뜨거웠다. 강제혁의 얇은 셔츠를 사이에 두고 두 몸뚱이가 얽혔다.

“왜 울지.”

“…….”

조금씩 젖어 들어가는 어깻죽지에 강제혁이 서하의 귀를 핥아 올리며 속삭였다. 그러게, 왜 울까. 이유는 분명했다.

“우리 다 말하기로 한 것 같은데.”

부드럽게 서하의 엉덩이를 주무르는 손길에 조금 가라앉았던 성기가 다시금 욱신거렸다. 손길은 부드러웠을지 모르나 이미 과하게 맞은 상태였기 때문에 닿은 것만으로 아팠다. 그 통증이 쾌감을 가져다주었음은 물론이었다. 한참 숨을 골라낸 서하가 참지 못하고 결국 물음을 던졌다.

“…그 문자 누구예요?”

“문자?”

서하의 귓바퀴를 핥고 깨물던 강제혁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질문으로 가득한 대화가 코미디 같았다.

“어젯밤에…….”

“…아.”

한참 눈썹을 찌푸리고 서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강제혁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그것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 사람 만나러 간 줄 알고,”

“내가? 오늘?”

털썩, 강제혁이 몸을 기울여 서하를 품에 안은 채 옆으로 누웠다. 사랑스러운 연인 같은 자세였다.

“오늘 제대한 동기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요.”

그제야 지난주에 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 다음 주 토요일에 동기가 제대해서 저녁 먹기로 했어요. 마침 이서하 씨 학회 날이네. 약속해요. 먼저 와서 밥 먹고 기다리고 있기.

이 나이에 새끼손가락까지 걸어가며 약속을 했었다. 그제야 실수를 깨달은 서하가 얼굴을 붉혔다. 강제혁이 눈썹을 까딱이며 서하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주인 스케줄도 모르고.”

“죄송해요…….”

“의심이나 하고.”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그래도 알고 싶었다. 그 문자 이전과 이후의 일에 대해서.

“그럼 의심 안 하게 해주세요.”

서하는 조금 더 분명한 발음으로 의사를 전했다.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보고는 눈매를 접어가며 웃었다.

“옛날 일인데…….”

“DS였던 건 아니고요…?”

“그런 거 안 했다고 했잖아요. 내 말을 코로 듣나봐.”

“그럼 플레이 파트너…….”

강제혁이 코를 꾹 꼬집는 탓에 서하가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대꾸했다. 사실 저를 만나는 중에 만난 게 아니라면, 더더욱 따질 명분이 없는 문제였다.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저를 만나기 전의 그에 대해서. 그러자 강제혁이 낮은 한숨과 함께 서하의 손목을 지분거리며 답했다.

“한두 번 만났나본데. 기억은 잘 안 나고. 나 없는 사이에 다른 남자 집에 들여서 옷까지 벗겨진 사람이 심통 부릴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

“이서하 씨 만나기 전 일이에요.”

그렇게 말하니 정말 할 말이 없었다.

“질투했어요?”

짧은 물음이었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좆 빨 때만 입 열지 말고 이럴 때 좀 열어봐.”

노골적인 단어 선정에 서하가 낯을 붉히며 입술을 우물거렸다. 언제 또 그랬다고…….

“과거가 아예 없다곤 말 안 해요. 거짓말 치는 거니까. 그래도 진심으로 대한 건 이서하 씨뿐인데. 그럼 내가 먼저 따져도 돼요?”

“…뭘요?”

“왜 이렇게 늦게 나타났어.”

낯간지러운 물음이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과거에 대해 따지고 묻다가 결국은 왜 늦게 나타났냐는 질문으로 이어지는 달콤한 대화. 유치하지만 싫지 않았다.

“주인님이 어렸잖아요.”

“고등학교 때 이서하 씨 만났으면 좋았을걸. 과외 아르바이트 같은 건 안했어요?”

강제혁이 열여덟이었을 때, 서하는 스물다섯이었다. 학부를 조기 졸업한 탓에 그땐 대학원 입학을 준비했을 텐데.

“제가 과외 아르바이트하던 시절엔 주인님 중학생이었는데요.”

그의 집에서 보았던 조금 미성숙한 몸집의 사진 속 소년이 떠올랐다.

“너무 어려?”

“…네.”

“지금은.”

“지금은 몸이 크니까…….”

“몸이 큰 게 좋은 겁니까, 좆이 큰 게 좋은 겁니까?”

그게 그거 아닌가. 물론 강제혁은 중학교 때도 범상치 않은 크기였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어리니까. 저도 양심이란 게 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새삼 그와의 나이 차이를 실감하게 됐다. 저가 대학교에 입학해 술을 사발로 마시던 시절, 그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악업을 쌓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문득 오 교수의 농담이 떠올랐다.

- 요즘은 LTE시대라 업보도 이생에 온다네. 다들 성실히 선업을 쌓도록.

교수님, 그럼 저는 좆 된 것 같아요. 서하가 과거의 오 교수에게 늦은 답을 전했다.

“무슨 생각해.”

“…제가 좀 쓰레기 같다는 생각을.”

“내가 어려서요? 이상한 소리를 하네. 아픈 건 이서하 씬데, 내가 더 쓰레기 아닌가. 건실한 대학 강사를 따먹었는데.”

“아읏…….”

적나라한 표현과 함께 강제혁이 서하를 모로 돌려 눕히고 부은 엉덩이를 잡아 벌렸다. 강제혁의 한쪽 팔에 걸린 서하의 오른 다리가 공중에서 달랑거렸다. 그리고 아직 남아있는 젤로 축축한 아래에 언제 다시 발기했는지 모를 굵은 성기가 닿았다.

“그래서 지금 나는 좋아요?”

“…네.”

느리게 안을 헤집는 성기는 별 다른 폭력적인 행위가 없음에도 그 굵기만으로 서하를 버겁게 만들었다.

“…짜.”

눈물로 젖었던 볼을 핥았으니 어쩌면 당연한 소감이었다. 서하가 조금씩 안을 벌리고 들어서는 성기에 헛숨을 들이켜며 입술을 얕게 떨었다.

“내가 때리는 매도, 박아주는 좆도 다 이제 이서하 씨 건데, 뭐가 그렇게 불안해서, 응?”

“흐, 아으… 읏…….”

“미안해요. 못 기다려서. 그래도 열심히 연습한 덕에 이서하 씨 마음에 쏙 드는 돔이 됐잖아.”

“그 연습도, 흐, 저랑, 했으면 좋았잖아요. 아!”

“어떻게 감당하려고 자꾸 예쁜 짓을 해.”

가장 굵은 뿌리 부분까지 먹혀들자 뱃속을 얻어맞은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서하가 제 손목으로 입술을 막고 들이치는 추삽질에 얌전히 순응했다. 거친 허릿짓과 함께 비부에 부벼지는 까실한 음모가 외설스러웠다. 자세 탓에 보다 깊은 삽입은 어려웠지만 쾌감은 선명하고 진했다.

“흣, 으, 아윽…….”

“부탁해 봐요. 다, 들어줄게.”

평소라면 뭘 부탁하라는 걸까, 고민해야 할 문제였지만 서하의 입술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흣, 다른 사람, 으응, 하고, 아, 하지, 하지 말아요…….”

“뭘. 똑바로 말해야 알지.”

“흣, 아윽, 아, 전부, 응, 플레이도, 후윽, 섹스…도, 아…!”

낯간지러운 청이었다. 강제혁이 단번에 성기를 뽑아낸 후 서하의 다리를 벌리고 바로 위에서 다시 쑤셔 넣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강제혁이 삽입하는 얼굴을 마주하며, 서하가 제 안으로 들어오는 성기의 뿌리를 시야에 담았다. 지나치게 자극적인 장면이었다. 삽입된 성기와 연결된 부분이 선명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쾌감에 찌푸려진 강제혁의 미간이 색스러웠다.

“번호, 바꿀까.”

“흣, 아…….”

질퍽거리는 소음이 귓전을 어지럽혔다. 그런 와중에도 강제혁이 저를 위해 번호를 바꿀까 운을 떼는 것이 만족스럽게 느껴졌다. 서하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거리자 강제혁이 서하의 발목을 잡고 달궈진 살 몽둥이를 더욱 거칠게 쑤셔 박았다.

“커뮤니티도, 읏, 탈퇴해주세요…….”

“진즉에 했어요. 그리고 또?”

“저만, 읏, 저만 사랑해주세요. 아, 하으……! 저도, 그럴 테니까, 아, 으응, 읏, 학, 흐으……!”

푹푹 박혀드는 성기가 안을 찌르며 난도질을 해놓았다. 죽을 것 같은 쾌감이었다. 전신에 튀는 쾌감에 서하가 사정감을 참지 못하고 백탁액을 토해냈다.

“먼저 싸도 좋다고 한 적 없는데.”

“죄, 송…해요. 아, 아으, 그만…!”

사정하기 무섭게 퍽퍽 안을 쑤시는 행위에 울음이 번졌다. 예민해진 몸에 쏟아지는 쾌감의 폭격이 고통스러울 만큼 자극적이었다. 이번 눈물에는 강제혁 역시 행위를 멈춰주지 않았다. 서하 역시 멈추길 바라지 않았으므로 서로에게 좋은 선택이었다.

***

결국 밤늦게까지 괴롭힘을 당한 서하는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었다. 강제혁은 아예 서하를 들고 욕실로 들어갔고, 욕조에 앉은 채 서하를 씻기고 저도 씻는 묘기를 선보였다. 초주검이 된 서하의 입장에선 대단하게 느껴지는 일이었다. 그리고 먼저 밖으로 나와 젖은 시트를 치우고 폭신한 새 시트를 깔아놓은 강제혁이 비척거리는 서하를 당겨 제 품에 안았다. 서하가 강제혁의 몸에 결박당했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깜빡거릴 때, 그가 서하의 몸을 끌어안고 속삭였다.

“번호 이걸로 바꿀까 하는데.”

“…이게 뭔데요…?”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서하는 제 쉬어빠진 목소리에 내일 일정이 없음을 안도했다.

“이서하 씨 생일이랑, 이서하 씨 번호 뒷자리.”

어쩐지 익숙하더라. 결국 그 밤의 문자는 강제혁이 번호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뺨을 만지는 손이 뜨겁고 입술을 가르는 혀가 곰살궂다. 이서하 서른의 여름, 첫 질투의 수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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