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장. 완벽한 구속 (9/24)

9장. 완벽한 구속

경찰이 당도했다. 현장에서 그나마 멀쩡한 게 서하였기 때문에 서하가 범인으로 몰릴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다행히 그 남자가 생각보다 더 멍청한 덕에 그런 번잡한 일은 면했다.

경찰차 소리에도 귀가 먹은 건지 흉기를 들고 있던 남자가 현행범으로 잡혔다. 서하에게 휘두르려던 것이 분명했다. 게다가 신고자도 젊은 남성이었으니 더 따질 필요가 없었다. 닷새간 감금되었던 강제혁은 그대로 병원으로 이송됐고, 서하 역시 다친 흔적으로 인해 우선 병원으로 보내졌다. 차후 경찰과 접촉해야하긴 했지만 일단은 외상을 치료하기로 했다. 며칠간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한 강제혁의 상태가 급했다. 다행히 신체가 워낙 건강했던 덕에 걱정한 만큼 큰 문제는 없었다. 간신히 목을 축인 강제혁은 꽤 단정한 말씨로 말했다.

- 저 사람도 진료해주세요.

제 몸이 온전치 않은 와중에도 서하를 콕 집어 간호사에게 부탁의 말을 전하는 그는 끔찍할 만치 다정했다.

“…….”

나중에 정확히 알게 된 일이었지만 과연 그 남자는 강제혁의 부친이 맞았다. 하지만 친권을 포기한 지 오래였다. 남이나 다름없는 남자는 명백한 범죄 행위로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 했다. 끔찍했던 소동치고 결과는 간결하기 그지없었다.

일련의 소란을 거치고 병실 안엔 단둘만 남았다. 서하가 간단히 진료를 받고 병실로 돌아온 것이다.

- 타박상이니 금방 나을 겁니다. 처방해드리는 약 바르시고 소염제 드세요.

사실상 진료랄 것도 없었지만, 서하는 몹시 긴장했다. 옷을 걷어 상처 부위를 보여주다, 맞은 지 오래 되어 누렇게 멍이 든 흔적을 들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상처는 다른 누구도 아닌 강제혁이 입힌 것이었다.

- 멍이 엄청 많으시네요.

- …잘 넘어져서요.

- 아프면 병원에 꼭 찾아오세요. 다 큰 성인이라도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는 건 절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랜 의사 생활로 눈치가 백 단일 의사가 묘한 첨언을 덧붙였다. 공식적으로 폭행을 당한 건 강제혁인데, 어쩐지 제게 하는 말이 꼭 오랜 폭력에 노출된 피해자에게 하는 말 같았다. 틀린 말은 하나도 없는데 제게 해당되는 말은 아니란 사실이 기묘했다.

서하가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처치를 받기 위해 진료실을 빠져나왔다. 그 사이 강제혁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병실 침대에 누워있었다. 링겔을 꽂고 시체처럼 누워 숨을 내쉬는 강제혁이 마치 환영 같았다. 아직까지 망가진 것처럼 뛰는 심장은 도무지 진정되질 않았다. 밝은 곳에서 보니 강제혁의 훤한 낯이 많이 고단해 보였다. 자칫 죽을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서하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그를 찾으러 간 게 다행이었다. 만약 제가 그를 찾지 않았다면, 그는 어떻게 됐을까.

“…왜 울어요.”

조용한 가운데, 무겁게 눈을 뜬 강제혁이 서하의 손을 쥐며 물었다. 서하의 눈시울이 일순간에 붉어졌다. 감각도 없이 울고 있었던 모양이다.

“대체…….”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해요.”

눈물을 닦아주는 손가락이 차디찼다. 물어볼걸. 어디 가는지 알았다면 그를 닷새나 그런 끔찍한 현장에 두지 않았을 텐데. 강제혁은 영양실조 외에도 타박상과 출혈, 골절상 등으로 성치 못한 상태였다. 앞으로 족히 한 달은 고생할 예정이었다.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목소리가 온전히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서하를 보던 강제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돈이 떨어졌던 모양입니다. 할머니한테도 지속적으로 돈을 받았던 것 같은데, 이번엔 그 집을 달라고……. 나한테도 꽤 여러 번 연락했었는데, 무시했어요. 그날이 할머니 기일이었거든요. 그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각목을 휘둘렀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묶여있었고. 이럴 줄 알았으면 할머니께 죄송해도 불효 좀 저지를 걸 그랬네요. 안 그래도 이서하 씨가 눈에 밟혀서 가기 싫었는데.”

차근차근 설명을 잇는 그가 힘겨워 보였지만, 말을 끊고 싶지는 않았다. 서하가 잠자코 강제혁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 작을 기침소리를 듣고 물이 든 컵을 건넸다. 미지근한 생수가 담긴 컵이 강제혁의 마른 입술을 적셔주었다.

“묶여보니까 요령 없는 사람이 얼마나 엿 같은지 알겠더라고요. 그래도 이서하 씨 입장도 이해해보고 좋은 기회였어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강제혁의 시답잖은 농담에 서하가 불퉁한 목소리로 타박했다. 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땐가. 웃음기를 머금은 뺨이 뭉클했다. 어색한 감정이었지만 부정하기는 싫었다.

“안아보고 싶은데.”

“저는 많이 안았어요.”

누운 채로 낮게 속삭이는 말에 서하가 눈물을 멈추고 강제혁을 밀어냈다. 그가 기절했을 때, 경찰이 오기 전까지 원 없이 그를 안았다. 괜히 부끄럽고 창피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이런 그를 두고 별 웃기는 상상들을 했다.

“이리 와.”

명령 같은 말이었지만 어조는 다정했다. 강제혁의 얼굴을 애써 외면하던 서하가 그 말에 홀린 것처럼 강제혁의 품에 안겼다. 1인실이라 다행이었다. 환자복을 입은 강제혁이 낯설었다.

“…주인님은, 잘 묶어주셔서 안 힘들어요.”

며칠을 굶었어도 여전히 넓고 탄탄한 품에 뺨을 기대며 중얼거렸다. 아주 작게 읊조렸음에도 들렸는지, 강제혁이 서하의 턱을 당겨 입술을 맞췄다. 조금 마른 입술이 부딪히는 감촉이 뜨겁고 건조했다. 시선이 오고가는 느낌이 진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강제혁이 서하의 뺨을 감싸며 다시 한번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저도요.”

그리움을 전하는 강제혁의 말에 서하도 용기를 냈다. 똑같이 말할 수는 없어도 마음을 전했다. 그 탓에 입술이 간질거렸다.

“강제혁 님. 링겔 확인하겠습니다.”

별안간 들이닥친 간호사가 고저 없는 친절한 목소리로, 강제혁의 이름을 호명했다. 물에서 방금 건진 생선처럼 서하가 파닥거리며 강제혁에게서 물러났다.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못 봤겠지. 못 봤을 거야. 방금 전까지 강제혁의 품에 안겨있었던 서하가 창가에 선 채로 말없이 화분의 이파리를 만지작거렸다. 무척 부자연스러운 몸짓이었다.

“보호자 분?”

“예?”

눈에 띄게 어깨를 떨며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서하를 보며 강제혁이 작게 웃었다. 겁을 한 움큼 집어먹은 새끼고양이 같다.

“환자분 링겔 중간중간 확인해주시고요. 다 맞기까지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예요.”

“네, 알겠습니다.”

“아무래도 뼈에 금도 갔고 당장 움직이긴 힘드셔서 며칠은 더 입원하셔야 할 것 같은데 필요한 물건 같은 거 챙겨 오셔야겠어요.”

“아, 네.”

간호사가 몇 가지 주의사항 등을 알려주는 사이, 강제혁은 누운 채로 서하의 엉덩이를 보고 있었다. 해후를 좀 더 즐기고 싶은데 여긴 방해꾼이 꽤 많았다.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마자 서하는 강제혁이 제 엉덩이를 보고 있는 건 꿈에도 모르고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어딜 가려고.”

“간단한 세면도구 같은 거 사오려고요. 강제혁 씨 입고 온 옷들 다 피에 절어서 세탁소에 맡겨야 할 것 같던데요. 아, 그리고 일단은 미음 먹어야 한 대요. 저는 경찰서에도 다녀와야 할 것 같고, 병원비도…….”

“그딴 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내 눈은 왜 피해요?”

강제혁은 단둘이 되자마자 눈을 요리조리 피하는 서하가 귀여웠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 주제에 이렇게 찾아온 것도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더군다나 잘 이어지지 않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것도 깜찍하고.

“형사들이 직접 올 거라고 들었는데 아픈 이서하 씨가 가긴 어딜 가요. 세면도구도 병원 1층에서 팔던데. 옷이야 퇴원할 때 맞춰서 심부름센터 이용해도 되고. 병원비 계산은 내가 하고. 미음은 이서하 씨가 직접 입에 넣어줄 거고. 또 어디 가야할 구실 있어요?”

“아니요…….”

아무래도 할 말 없게 만드는 데는 선수인 것 같다. 서하가 어정쩡하게 선 채로 눈을 굴렸다.

“…할머니 기일인 거 왜 말 안했어요?”

저도 모르게 그 질문이 나왔다. 그가 물어보지 않아 말해주지 않았다고 하면 따로 할 말도 없을 텐데, 왜 이런 무의미한 질문을 던졌는지 저도 모르겠다.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보며 대답했다.

“그럼 이서하 씨는 누나 얘기 왜 나한테 안 해 줬어요?”

“……!”

강제혁의 입에서 나올 거라 생각해본 적 없는 이야기였다. 당황한 서하를 본 강제혁 역시 낮게 한숨을 쉬었다.

“탓하는 거 아니에요. 나도 일부러 알려고 한 것도 아니었고.”

“어떻게,”

“어쩌다 들었어요. 그리고 나도 어쩌다 그렇게 됐고. 굳이 알려주기 싫은 거. 화목한 가정에서 자라지 못했다고 떠벌려서 나한테 좋을 게 없으니까. 혹시나 이서하 씨가 나한테 실망할까 봐요.”

강제혁의 씁쓸한 말투에 서하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생각처럼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서 실망할까 봐.”

“…….”

“나는 이서하 씨 과거가 어떻든 상관없어요. 근데 당신은 아닐 수도 있잖아.”

모범적인 삶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건 곧 완벽에 대한 강박이 있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 제게도 그런 부담을 느끼고 있었나. 서하가 강제혁의 곁에 앉았다. 그가 누나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이 싫은 건 아니었다. 그냥 당황했을 뿐이었다. 말한 적 없는 문제니까.

“실망 안 해요.”

“기대한 적 없어서?”

조금 서늘한, 그만큼 설움이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서하가 그런 강제혁을 보며 입술을 열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그냥?”

“좋, 아하니까…….”

저도 모르게 툭하고 튀어나왔다. 얼결에 일생일대의 고백을 뱉어내고야만 서하가 고백을 들은 강제혁보다 더 당황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다행히 목소리가 아주 작았다. 그래서 못 들었을 것이라고 열심히 합리화를 했다. 들은 이의 표정 변화가 없었기에 아마 제 추측이 맞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야만 했다. 서하의 얼굴이 순식간에 토마토처럼 벌겋게 익었다.

“1층에 다녀올게요!”

“어딜 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문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서하를 강제혁이 덥석 안아 제 무릎 위에 주저 앉혔다. 갑작스런 신체 접촉에 서하의 얼굴이 더 달아올랐다. 들었나? 치솟는 불안감에 서하가 몸부림을 쳤다.

“윽…….”

다친 곳을 눌린 강제혁이 앓는 소리를 내어 결국 무산됐다. 작은 신음소리였음에도 혼비백산한 서하가 강제혁의 안색을 살폈다.

“아니, 아픈 사람이 대체…!”

“아픈 사람을 혼자 두고 가려는 사람이 더 나쁘지. 안 그래요?”

문득 허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농밀했다. 링겔이 꽂힌 손이라 뿌리칠 수도 없었다. 마주친 눈이 구속구 같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내가 이서하 씨 아프게 만들고 그냥 간 적 있어요?”

“그게 여기서 왜…….”

“정조대는 잘 차고 있었어?”

앞섶에 닿은 손이 노골적으로 성기를 만졌다. 서하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시선을 외면하고 병실 침대의 시트만 바라보았다. 말랑한 살덩이가 아니라 인공적인 굴곡이 만져졌을 테니, 굳이 제가 대답하지 않아도 강제혁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보다 제 고백을 들은 건지, 듣지 못한 건지 확인하고 싶은데 어쩐지 달큰해진 시선이 수치심을 더욱 돋웠다.

“흣…….”

“어찌나 착하고 사랑스러운지.”

조금 긴 웃옷 아래 가려져 있던 바지춤 속으로, 커다란 손이 침범하고 들었다. 서하가 혹여 강제혁의 링겔 줄을 건드리기라도 할까, 서하는 몸을 굳히고 숨을 헐떡였다.

“환자복 안에는 속옷 안 입는 거 알아요? 책임져요. 이서하 씨가 얌전히 정조대 차고 기다렸다는 생각하니까 좆 빨게 하고 싶어졌어.”

“모, 모르, 으읏…….”

귓가에 속삭이는 말이 온통 음란했다. 1인실이긴 하지만 문 너머로 분명 사람들이 다닐 텐데, 오랜만에 닿은 손을 거절하는 게 더 싫었다.

“아파?”

“읏, 으응, 흑, 아!”

고환을 손바닥으로 내리누르며 중지로 구멍을 비벼대는 탓에 회음이 조여들었다. 압박된 성기가 아팠다. 간만에 만져지는 터라 참기가 힘들었다. 서하가 강제혁의 어깨를 부여잡고 앓는 사이, 손가락 두 개가 예고 없이 애널 안을 쑤시고 들었다. 여기서? 갑작스레 벌려진 아래가 욱신거렸다.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말캉한 안을 제멋대로 헤집고 곧 살이 마찰하는 음란한 소리가 병실 안을 울렸다.

서하는 거의 울기 직전이었다. 아직 밝은 오후에, 그것도 새하얀 병실에서 환자복을 입은 주인에게 뒤를 따먹히는 제 모습이 몹시 수치스러웠다. 반면 아예 제대로 능욕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음란한 생각이 자꾸만 뇌리를 스쳤다.

“하으, 아, 주인님…….”

“지금은 간단히 할게요. 이것만 하고, 마저 얘기해요. 우리 할 얘기 엄청 많을 것 같은데.”

정력도 좋다. 분명 전문 의료인들이 입을 모아 며칠은 기력이 없을 거라고 했는데, 얇은 환자복 아래에서 위용을 자랑하는 그의 성기는 예외인 것 같았다.

“아, 아으윽…!”

적응하기가 무섭게 손가락이 두 개 더 삽입되었다. 한 번에 벌어진 구멍이 빠듯했다. 뒤를 아무렇게나 쑤시며 목덜미를 갈취하듯 물고 씹는 간단한 행위에 서하가 정조대가 터지도록 성기를 세우고 말았다. 강제혁의 환자복 상의를 구겨지도록 움켜쥐고 몸을 떠는 사이, 달칵 소리가 나며 답답하게 조여들던 성기가 해방되었다.

“힉, 흐으, 아…!”

목덜미의 여린 살을 잘근잘근 씹어대는 거친 애무에 도저히 참을 수 없을 즈음, 뒤를 쑤시던 손가락이 더욱 깊게 푹 소리를 내며 삽입되었다. 결국 참지 못한 서하가 고개를 꺾으며 정액을 터트리자 사정하는 서하의 눈물을 핥아주며 강제혁이 짧게 속삭였다.

“그렇게 좋아?”

행위에 대한 물음인지, 아니면 강제혁에 대한 물음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쾌감에 젖은 서하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둘 다 틀린 답은 아니었으므로.

***

창밖이 어두웠다. 시야를 가리던 얇은 막 하나가 걷어진 것처럼, 창 사이로 스미는 밤바람이 쾌적했다. 강제혁이 미음을 먹고 얼마 안 있어 사복을 입은 형사 둘이 다녀갔다. 가해자의 죄가 명명백백한 상황이었기에 따로 걱정할 문제는 없었다. 진단서와 증언 몇 마디만 필요할 뿐이었다. 수고롭게 서하가 경찰서에 갈 일도 없었고. 물론 형사 처벌 외에도 따로 민사 소송을 할 예정이긴 했다. 강제혁은 싹을 끊어 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서하의 신상을 알고 있으니까.

감금당한 시간이 짧지 않은 탓에 몸이 아직은 불편했지만 탈출로부터 고작 반나절이 흐른 것치고 꽤 괜찮았다. 애초에 강제혁은 병원에 당도한 순간부터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제가 생각해도 제 몸은 회복력이 좋은 편이었으니까. 오히려 놀랐을 서하가 걱정된다면 모를까. 그리고 그 쓰레기와 몸싸움이라도 한 건지 조금 상한 서하의 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치료를 받았으니 망정이지. 그리고 눈가에 맺힌 눈물을 핥아줄 때의 그 달뜬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파르게 떨리던 속눈썹, 그 안에 고인 엷은 채도의 눈동자, 하얀 목덜미가 붉게 물드는 그 모습도.

- 실망 안 해요.

완벽하지 않아도 실망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 …필요한 것 좀 사올게요.

한시도 떼어놓고 싶지 않았지만 서하가 고집을 부려대는 통에 현재 강제혁은 혼자 병실에 누워있었다. 사정의 기운이 가라앉기 무섭게 병실을 빠져나가려는 서하가 못마땅했지만 어색함을 견디지 못하는 게 귀여워 시간을 주었다. 처음 플레이를 했던 그 밤에도 아침이 밝기 무섭게 도망쳤던 그가 떠올랐다. 결국 이렇게 제 손에 잡혔지만.

서하는 짧지 않은 그 시간 동안 무던히도 제게 잡혀주질 않았다. 억지를 부려 제 옆에 두고 서하가 강압적인 분위기에 약한 것을 이용해 취했다.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 말한 서하였지만, 그럼에도 제 것이었기에 조바심내지 않으려 애를 썼다. 그러나 좀처럼 손아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서하가 저를 찾아 그 먼 곳까지 왔다는 사실은, 강제혁을 들뜨게 하기 충분했다.

- 좋, 아하니까…….

그보다 더 작은 목소리여도 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끄러워하는 게 귀여워서, 더 놀려주고만 싶었다. 얼굴을 못 본 그 며칠이 몇 년 같았다. 하루 빨리 서하를 품에 안고 양껏 희롱하고 싶다. 이서하를 향한 욕구는 병중에도 줄어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좋아한다는 그 깜찍한 고백으론 한참 부족했다. 저 없이 살 수 없도록 만들고 싶었다. 제가 그렇게 되었듯이.

“…물이랑, 필요한 거 좀 사왔는데.”

문을 열고 들어선 서하에게서 담배 냄새가 풍겼다. 강제혁이 링겔을 꽂지 않은 손을 뻗어 보였다. 착하게 안기는 서하의 허리춤에 고개를 묻었다. 그 가벼운 접촉에도 숨을 멈추는 서하가 여간 사랑스러운 게 아니었다.

“이서하 씨 먹을 건.”

“별로 배 안 고픈데요.”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요.”

손을 내려 엉덩이를 쓰다듬자 기묘한 욕구가 다시금 차올랐다. 괴롭히고 싶다. 뒤를 벌리고 장난감을 잔뜩 쑤셔 넣은 후에 우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프다고 신음하면서도 제가 더 괴롭혀주길 바라는 서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제 이름을 부르며 제게만 안기고자 하는 서하를. 그러면 그를 온전히 소유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처럼.

“읏…….”

점점 짙어지는 스킨십에 서하가 물건이 가득 담긴 비닐봉투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물병과 세면도구, 포장된 과일 몇 개, 그리고 콘돔이 병실 바닥을 굴렀다. 새하얀 병실 바닥 위에 덩그러니 떨어진 콘돔은 대충 얼버무릴 수 있는 비주얼이 아니었다. 비타민이라고 구라치고 싶다.

“자, 잠깐,”

“저건 왜 샀어요?”

“아니, 그게, 혹시 모르니까……. 집에 마침 떨어진 것 같…고.”

대번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서하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제가 말하고도 수치스러운지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모습에 강제혁이 낮게 웃었다.

“이런 게 왜 필요합니까.”

“…….”

“좆물 마시는 걸 좋아하면서.”

서하가 발을 뻗어 열심히 콘돔을 가리려 애를 썼다. 저도 모르게 집은 것이었다. 정말 홀린 듯 구매했다. 어쩐지 병원 편의점에선 담배를 팔지 않을 것 같았다. 그래서 담배를 사러 나간 김에 조금 더 멀리 나갔는데, 계산하기 직전에 그게 눈에 들어왔다. 돌기형이라, 저도 모르게 집었다. 전에 그가 돌기형 핑거돔으로 절 괴롭혀주었던 즐거운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차피 당장 쓸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본 김에 사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

“대답 안 해요?”

“그게…….”

“아니면 먹기가 싫어?”

“아뇨. 아니, 안 싫은데요.”

다급하게 대답한다는 게 더 수치스러워졌다. 미친 새끼……. 서하가 스스로를 힐난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미친 게 틀림없었다. 병실에서 나눌 대화는 아닌 것 같은데. 결국 서하가 진실을 토로했다.

“도, 돌기형이거든요.”

약간 죽고 싶어졌다. 내장을 치고 올라오는 강렬한 자괴감…….

“돌기형?”

“그게…….”

굳이 한 번 더 묻는 그가 얄궂다. 서하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왜 쓸데없는 짓을 해서.

“전에 좋았어요? 큰 걸로 쑤셔지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으음…….”

“종류별로 사볼게요. 퇴원하면.”

“……네.”

엉덩이를 주무르는 강제혁을 만류할 명분도 없었다. 어쩌면 그보다 제가 더 발정이 난 것 같았다. 좋아한다는 말을 내뱉고 나자 자꾸 울컥울컥 마음이 치솟았다. 마른 뺨이 눈에 들어올 때마다 가슴이 저려서, 괜히 더 얼굴을 보기가 힘겨웠다. 어서 화제를 돌리고만 싶었다.

“바나나 사왔네요.”

콘돔 외에 다른 주제가 강제혁의 입에 오르자 서하가 빠르게 대답했다.

“이 정도는 먹어도 되지 않을까요? 배고플 것 같아서요.”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으므로.

“나 주려고?”

되묻는 목소리가 어쩐지 더 야릇하게 들렸지만 콘돔보단 나았기에 서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편의점에서 바나나가 하나 비닐 포장 되어 있기에 냉큼 집어왔다. 컵에 담긴 과일도 있었지만 그건 새콤한 과일이 위주라 위 상태가 나쁜 강제혁이 먹을 건 아닌 것 같았다. 미음은 아무래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의 덩치를 생각해봤을 때 더더욱.

“꼭꼭 씹어 먹으면 괜찮을 것 같아서 사왔어요.”

“나는 이서하 씨가 먹는 걸 보고 싶은데.”

만으로 꼬박 4일을 굶었으면서 고작 미음 한 그릇으로 배를 채운 그가 제 식사를 챙기는 모습이 조금 기가 막혔다. 저는 그래도 전날까지 김산과 고기도 먹었는데. 거기까지 생각하자 미안함에 말문이 턱 막혔다. 고기만 먹은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눈을 맞추려하는 강제혁이 서하를 더욱 움츠러들게 했다. 보고 싶은데 보기가 어렵다. 결국 서하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저는 별로 배 안 고파요.”

“반항하는 거예요?”

나른한 목소리로 되묻는 말에 서하가 입술을 꼭 다물었다. 분명 내려다보는 쪽은 자신인데, 어째선지 우위를 점할 수가 없다. 타고난 성향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 앉아서 천천히 먹어요.”

강제혁이 침대 옆 의자를 가리키며 명령하듯 말했다. 일단 앉기 전에 어지럽혀진 것부터 주워야 했다. 그의 명령대로 과일을 먹으려면 줍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섬주섬 담는 사이, 바닥에 닿아있는 강제혁의 발이 서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 앞에서 허리를 숙이고 물건을 줍는 것만으로 아래가 화끈거렸다. 핏줄이 솟은 잘생긴 발등에 입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자꾸만 번졌다.

하필 맨발이라. 그가 제 얼굴을 밟아주었으면 좋겠다. 그의 앞에서 엎드려 길 때 뒤에서 엉덩이 사이를 그가 이 발로 자근자근 밟아주었던 플레이가 떠올랐다. 점점 야심한 시간이 되어가니 더더욱 생각의 나래를 참기가 어려웠다.

이 병원의 1인실은 가장 고층에 위치해 있었는데, 유동인구가 가장 적은 곳이기도 했다. 면회시간이 끝났으니 저 같은 간병인과 환자들만 있는데, 방금 전 병실에 들어오기 전에 슬쩍 본 결과 비어있는 병실이 더 많았다. 그러니 더더욱 긴장이 되었다. 누울 자리를 보고 발을 뻗는다더니, 제가 딱 그 꼴이었다. 발을 뻗으려고 누울 자리를 열심히 살피고 있었다.

“왜 안 일어날까.”

“…….”

“핥고 싶어?”

정곡을 찌르는 낮은 음성에 서하가 헛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의 상태를 생각해야 했다. 한참 어린 강제혁보다 자제심이 없어서야 연장자의 체면이 서질 않았다. 애초에 그 앞에서 제게 체면이란 게 있긴 했나 싶긴 했지만.

“…나중에요.”

일부러 더 또박또박 대답하며 서하가 의자에 앉았다. 싫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건 거짓말이었으니까. 그런데 길쭉한 바나나를 들고 껍질을 까다보니 또 묘해지는 것이다.

“표정이 이상하네.”

그런 서하를 보는 강제혁의 표정 역시 이상했다. 즐거운 듯 괴로운 듯, 고충이 어린 낯이었다. 하얀 기둥 모양의 과육을 한입 베어 물자 달콤하고 풋풋한 바나나 향이 입안 가득 번졌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바나나를 한 입 한 입 베어 먹는 서하를 강제혁이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지금 굉장히 억울해요.”

“…한 입 줄까요?”

“아니, 그거 말고.”

강제혁이 서하의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긴장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집에 간다고 할 걸.

“이만 씻고 잘까요?”

“같이?”

도망치려고 던진 물음인데 또 잡혔다. 1인실에는 욕실도 딸려있었다. 홀로 씻고 싶었지만 기력이 없는 강제혁이 쓰러질까 걱정되어 선뜻 거절할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잔뜩 발기했던 성기를 생각하면 기력이 충분한 것 같긴 했지만, 상대는 며칠을 감금당해 곡기까지 끊었던 몸이었다.

“도와줄게요.”

어차피 단둘이 지새야 할 밤이었다. 최대한 발정하지 않을 방법을 강구해야만 했다.

***

나란히 양치까지 마치고 개운해진 몸으로 간병인용 침대에 몸을 눕혔다. 강제혁은 서하가 제 옆에 눕지 않은 것이 못내 불만스러웠지만 그 역시 피곤할 테니 하룻밤 정돈 편히 쉬게 해주고 싶었다. 가장 편한 것은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겠으나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강제혁이 눈을 꼭 감은 서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이목구비 하나하나를 담았다. 달빛에 반사된 낯이 희고 맑았다.

“이서하 씨는 나 안 보고 싶었어요?”

“…보고 싶었어요.”

“손.”

침대 밑으로 손을 뻗자 서하가 손을 마주 잡아왔다. 깍지를 끼우고 틈 하나 없이 밀착했다. 손이라도 그렇게 닿아야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생각 많이 했어요?”

“……안 쉬고요.”

“기특하네.”

달밤에 나누는 대화가 달다. 아직도 꿈만 같았다. 지난 며칠이 어찌나 지옥 같았는지, 맞아서 아픈 것보다 서하를 보지 못해서 더 괴로웠다. 정조대를 차고 저를 기다리고 있을 서하가 그리워서.

“전에 어떻게 성향에 대해 알게 됐는지 듣겠다고 했는데, 정확하게는 못 들었어요.”

“…별 거 없는데.”

“우리 이제 서로 뭐 숨기지 말아요.”

부여잡은 손바닥이 점차 온기로 달궈지고 있었다. 알고 싶다는 욕구만 남았다.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 없이 알고 싶다. 그리고 김산이 서하의 성향에 영향을 끼친 바가 있는지, 강제혁은 정확히 알고 싶었다. 과거에 대한 것도. 무슨 버릇이 있는지, 어렸을 땐 어땠는지.

그건 서하도 마찬가지였다. 숨기지 말자는 그의 말이 양심을 대차게 찔렀지만 ‘그 일’ 외에는 숨기고 싶지 않았다. 입술을 사려 물고 호흡을 안정시킨 서하가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그때 말한 게 다예요. 진짜로요. 그런 게 좋았어요. 나를 속박하는 게. 누군가 나를 좀 강하게 붙들어줬으면 해서…….”

정말 계기랄 게 없었다.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준 일들이 있기야 하겠지만, 그건 서하가 모르는 문제들이었다. 혼날 때 짜릿했고, 구속당하고 싶었다. 사회의 가장 작은 단위인 가정에서 소속감을 느끼지 못해서 그런 걸지도. 그런 서하를 보며 강제혁이 그 손을 거머쥐었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도요. 강압적으로 휘둘러주고, 아프게 해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아프게 해봤어요? 스스로? 누구의 도움도 없이?”

“…네.”

공기가 한층 뜨거워졌다. 이런 대화를 병원에서 해도 되는 걸까. 분간이 되질 않았다.

“자위할 때 셀프 스팽이라도 한 거예요?”

“…네.”

“한 번 보고 싶은데.”

서하의 얼굴에 홍조가 어렸다. 강제혁의 눈앞에서 스스로를 매질하는 모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좀 꼴린다. 아니, 꽤.

“…시키시면 할게요.”

“재밌겠네요.”

강제혁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그의 말대로 재미는 있을 것이다. 제가 수치스러워 그렇지. 물론 그게 서하에게 있어선 재밌는 일이기도 했다. 한 숨 호흡을 들이켠 서하가 돌연 입을 뗐다.

“누나 일은…….”

대답이 없는 강제혁이 어쩐지 무서워 눈을 감고 말을 이었다.

“너무 오래 된 일이라서, 사실 잘 모르겠어요.”

“…….”

“그래도 가끔 누나 꿈을 꿔요. 좋은 사람이었거든요.”

누나의 사고로부터 벌써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다. 서하는 무감각하게 운을 떼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야기를 읊었다. 강제혁은 조용히 들어주었다. 잡은 손을 놓지 않고.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유독 달빛이 환한 밤이었다.

***

퇴원까지는 사흘 정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며칠간 병실에서 해선 안 되는 짓도 제법 저질렀다. 간병을 한 건지, 간병을 위장한 플레이를 한 건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 씻을 때마다 쳐다보네.

- 그게…….

- 빨고 싶어?

대체로 넘실거리는 욕구를 참지 못한 서하의 잘못이 크긴 했다. 그도 그럴 게 강제혁의 물건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끌었다. 학창 시절이며 군대에서 남자 좆이라면 수도 없이 본 것 같은데 왜 참지를 못 하는 건지. 유례없는 크기라서 일까. 대충 강제혁의 탓으로 돌렸다. 그래야지만 병실 욕실에서 무릎을 꿇고 환자의 좆을 입술이 찢어져라 빤 것을 정당화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직도 입술이 시큰거렸다. 회복력이 좋은 강제혁의 육체 탓도 덩달아 했다. 그가 못 하겠다고 뺐다면, 저도 붕대를 친친 감은 어린 주인을 탐하지 못했을 테니까. 몸무게를 재어 본 결과 평소 체중보다 6kg 정도가 빠졌었다고 했다. 열심히 병원에서 식사량을 채운 덕에 회복되긴 했지만.

강제혁은 마침내 환자복을 벗었다. 대신해서 그 몸을 감싼 검은 트레이닝복이 섹시하게 보였다. 트레이닝복이 섹시할 수도 있구나. 안에 든 게 섹시해서 그런 걸지도 몰라. 서하가 제 앞에 선 주인을 힐끔 보며 입맛을 다셨다.

“심부름센터에서 옷 같은 것도 사다 주는 줄은 몰랐어요.”

“심부름센터잖아요.”

심부름센터는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이용해본 적은 없는데 제법 유용하게 써먹었다. 그 집에 주차되어 있던 차도 병원으로 가져다 달라고 했고. 좀처럼 서하가 옆을 떠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강제혁 탓에 대부분의 것을 심부름센터를 통해 해결했다. 돈으로 안 되는 게 없구나.

“TV에서 불륜 잡는 것 밖에 못 봐서…….”

그리고 서하는 그 말을 뱉은 것을 후회했다. 불륜이란 단어에 뭔가 가슴이 따끔했다. 강제혁이 없어진 동안 김산과 밀회를 가졌다는 사실이 자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산만 입 다물면 완전 범죄가 될 수 있었다. 말하면 죽일 것이다.

복잡한 일들이 그 며칠 사이 다 마무리되고, 남은 것은 퇴원 절차뿐이었다. 서하의 기준에서 꽤 비싼 1인실 입원 비용을 치르고 병원을 빠져나왔다. 날씨가 제법 후덥지근해졌다. 기말고사 시험문제 낼 준비해야 되는데.

“운전 할 줄 알아요?”

강제혁이 차 키를 보여주며 묻는 말에 서하가 고개를 가로 저었다.

“하면 200%의 확률로 사고 낼 것 같아서 손도 안 댔어요.”

“왜?”

“…보복운전 할 것 같아서요.”

애초에 성격이 좋지 못한 편이었다. 그래서 아예 싹을 잘라두었다. 그 말에 강제혁이 낮게 웃어보였다. 오늘의 그는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도 그럴 게 며칠간 병석에 누워있었으니 바깥 공기만으로 쾌적할 터였다. 병원 생활의 고단함을 모르지 않는 서하였다. 누나도 힘들었겠지. 아무리 약을 발라도 낫지 않을 쓰라린 상처였지만, 잊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운전하는 것만 타면 되겠네.”

“배울까요?”

서하가 보조석에 앉아 벨트를 매며 강제혁의 의중을 물었다. 매번 그만 운전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공평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차를 직접 모는 것은 어쩌면 트라우마를 유발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극복하고 싶었다.

“사고 당하기 싫어요.”

하지만 강제혁은 학습력이 뛰어난 학생이었다. 서하의 인내심을 믿지 못하던가. 그에게 인내심이 부족한 모습을 여러 번 보였기에 변명할 여지조차 없었다.

“저녁 맛있는 걸로 먹을까요? 병원식 때문에 입맛 상했을 것 같은데.”

빠르게 납득한 서하가 휴대폰으로 근방의 맛집을 검색하며 물었다. 이내 휴대폰 화면에 바이럴 마케팅으로 얼룩진 게시글들이 가득 찼다. 제목만 봤는데도 신뢰도가 폭락했다. 글 내용은 더했다. 특유의 이모티콘이 거슬렸다.

“집밥 먹고 싶은데.”

“집밥이요?”

“만들어줘요. 가는 길에 장보면 되겠네.”

서하는 내비게이션에 찍히는 제 집 주소에 별안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당장은 던져진 과제가 시급했다. 강제혁을 위한 가장 적합한 식단을 찾아야 했다.

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방금 퇴원한 사람 레시피’를 검색하는 서하를 보며 강제혁이 작게 웃었다. 센스가 없다. 그가 검색한 것을 보자 인육 요리법 같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서하는 모를 일이었다.

***

마트에 도착하자마자 서하가 중얼중얼 재료를 읊으며 강제혁을 이리저리 끌고 다녔다. 몇 번의 검색미스 끝에 제대로 된 식단을 찾아낸 것이다. 물론 거기엔 강제혁의 어드바이스가 큰 도움이 되었다.

- 너무 아픈 사람 취급하지 말고 그냥 보양식 정도로 검색하면 좋을 거예요.

- 흑염소 요리가 기력 보강에 좋대요.

- 마트에서 파는 재료를 우선순위에 둬야죠.

골몰하는 서하의 모습이 귀여운 나머지 조금씩 힌트를 준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 장어 드실래요?

- 장어?

- 원기 회복에 좋다는데요.

- …그래요.

원기 회복과 더불어 강렬하게 떠오르는 효과가 있긴 했지만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강제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졸지에 정력을 보강하게 생겼다.

- 많이 사요. 이서하 씨도 엄청 먹어야 되니까.

강제혁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인 서하와 마트에 들어섰다. 마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지 이십여 분쯤 지나자 손질된 장어를 포함한 여러 식재료가 카트 안에 가득 담겼다.

“전에 같이 장 봤었는데, 그때 기억나요?”

“아…….”

그 말에 서하가 움찔하고 멈춰 섰다. 강제혁이 얼마 지나지도 않은 기억을 들춰내는 이유는 뻔했다. 그때 서하는 아래에 ‘장난감’을 담은 채로 쇼핑을 했었다. 생각만으로 발끝이 저릿했다.

“…후식으로 먹을 것도 살까요.”

“말 돌리네.”

간단히 속내를 간파해내는 강제혁이 얄미웠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에 서둘러 과일 코너로 향했다.

“강제혁 씨는… 어떤 과일 좋아해요?”

별 게 다 궁금하다. 하지만 서하는 알고 싶었다. 언젠가 그가 말하지 않아도 제가 알아서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사서 가져다줄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그에 대한 것을 알아야만 했다.

“음……. 이서하 씨는요?”

“저는 별로 안 가리는데.”

“그래도 제일 좋아하는 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고 보니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제 호불호도 모르는 주제에 남의 것을 묻고 있는 것도 웃기긴 했다. 한참 생각한 서하가 고심 끝에 답을 내놓았다.

“포도?”

“그럼 포도 담아요.”

동글동글한 청포도가 싱싱한 자태를 자랑하며 반짝거리고 있었다. 말은 시키는 투였으면서 제가 먼저 팔을 뻗어 포도가 든 상자를 카트에 넣는다. 잠깐 스친 것뿐인데 미약한 소독약 냄새가 코끝에 고였다. 서하가 멍 자국이 남은 강제혁의 얼굴을 안쓰럽게 쳐다봤다. 잘난 얼굴이 상한 게 몹시 속상했다. 그러는 제 얼굴에도 반창고가 붙어있긴 했지만.

“강제혁 씨는요?”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서하가 강제혁의 손목을 쥐고 물었다. 제 쪽에서 그의 손목을 잡은 건 처음인 것 같은데. 물론 강제혁이 쥐는 것과는 조금 다른 느낌으로 만지고 있긴 했다. 살갗이 닿은 면이 간질거렸다.

“나도 포도.”

어려서 그런가. 왜 이렇게 귀엽지. 문득문득 치고 올라오는 낯간지러운 감정에 요동치는 안면 근육을 단속하느라 바빴다. 얼굴 탓인가. 얼굴만 봐도 이렇게 좋을 일인가. 마음을 인정하기 무섭게 강제혁의 모든 것이 좋았다. 김산을 홀로 좋아했던 스물한 살 때쯤에도 이러진 않았던 것 같은데. 먹음직스럽게 익은 과일을 고르려 집중한 얼굴도 좋았다.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 눈도. 여기 저기 난 상처만 빼놓고. 피멍이 번진 피부가 몹시 아파보였다.

“자꾸 보네.”

“아…….”

“상해서 꼴 보기 싫어요?”

냉장고 속 오래된 채소도 아니고. 상처가 났어도 잘생겼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퇴폐적으로 보였음 보였지.

“큰일 났네.”

강제혁이 한숨을 푹 쉬며 중얼거렸다.

“네? 뭐가요?”

“이서하 씨 내 얼굴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상해서 어떡하지.”

“아닌데요.”

능청스러운 농담에 서하가 괜히 얼굴을 굳히며 부정했다. 마트 안이 한적해서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덩치 큰 남자 둘이 아슬아슬하게 붙어서 누가 봐도 미묘한 뉘앙스를 풍기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싫어요?”

“그냥 상처가 너무 심한 것 같아서…….”

얼굴을 좋아하지 않느냐는 말에 부정한 건 아닌데 괜히 신경이 쓰였다. 너무 휘둘리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강제혁의 마음은 듣지 못했다. 고백을 듣긴 한 건지, 전에 저를 갖고 싶다곤 했었는데 정확히 좋아해서 갖고 싶다고 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하가 괜히 찝찝해지기 시작하는 기분에 얼굴을 굳혔다.

그래도 DS를 맺었으니 강제혁이 제게 질리거나 하지 않는 이상 당장은 괜찮겠지. 10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으니까……. 물론 그러기 싫긴 했다. 연애를 겸하는 DS를 연디라고 하던데 그것도 어쩐지 낯간지러웠다. 단어가 왜 저래.

“요령 없이 때려서 가죽만 상했어요.”

강제혁은 서하가 제 걱정을 하느라 얼굴이 굳었다고 생각해 덧붙여 말했다.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서하는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지금 강제혁이 말하는 요령은 사람을 두들겨 패기 위한 요령을 말하는 것이었다. 서하에게 있어서 때리는 요령이란 최대한 다치지 않게 아프게 때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보기보다 아프지는 않다는 뜻이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안심을 하기도 뭐했다.

“왼팔도 실금 간 정도고, 물리 치료 더 받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무리하면 안 돼요.”

“오늘 내가 무리할 것 같아요?”

그 대목에선 정말 표정관리가 힘들었다. 내심 본격적인 플레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제혁의 건강이 더 중요했다. 반깁스를 한 왼팔이 시선을 끌었다. 결국 서하가 아쉬운 마음을 내리누르며 고개를 저었다.

“무리하면 안 되죠. 당분간은, 집에서도 쉬어야 할 것 같은데…….”

“나만 쉬면 되잖아요.”

서하의 눈에 의아함이 담겼다.

“…?”

“혼자 하는 거 볼 좋은 기회네요.”

시선에 온도라도 있는 것처럼 강제혁의 눈빛이 닿은 부분이 괜히 뜨거웠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는 철없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물론 지금 집안이 강제혁에게 보여선 안 될 상태라는 중요한 사실을 잊은 덕이긴 했다. 만약 이 시점에서라도 그 사실을 깨달았다면, 서하는 절대 제 집으로 강제혁을 초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

엘리베이터 안의 공기가 뜨거웠다. 재료를 잔뜩 사긴 했지만 과연 들어가자마자 무사히 주방에 이 재료들을 내려둘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솔직히 강제혁이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무릎을 꿇고 그에게 능욕당하길 자처할 것만 같았다. 병실에서의 장난질 정도로는 식을 욕정이 아니었다.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미적지근한 실내의 공기가 둘을 반겼다. 주머니 안에 자리한 목걸이를 힘주어 만졌다. 언젠가 강제혁이, 제게 선물해준 것이다. 언제 걸지. 미치겠네. 서하가 바싹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지금 바로 요리할까요?”

식재료가 가득 든 종이봉투를 바닥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은 강제혁이 대꾸 없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애초에 제 집은 강제혁의 오피스텔처럼 넓지 않았다. 주방까지 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멈춰선 걸까. 서하가 주머니에 든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한 발 더 움직였다. 그리고 강제혁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

제가 강제혁을 찾아 가기 전날 밤, 김산과 가졌던 술자리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술잔 두 개, 빈 접시, 포크 두 개, 그리고 마지막으로 욕실 문가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제 옷가지들까지.

그리고 싸늘하게 가라앉은 음성이 들렸다.

“…변명해 봐요.”

차가운 시선이 서하의 얼굴에 곧게 떨어졌다. 변명의 기회를 주는 걸 감사히 여겨야 할지, 숨이 턱 막혔다. 잘못을 저지른 시점에서 이미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흔적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저조차도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그게,”

뭐라 말을 해야 하는데 뭐라고 서두를 떼야할지 모르겠다. 사실 거짓으로 둘러대려면 둘러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냥 친구와 집에서 술 한 잔 한 것뿐이고, 술에 너무 심하게 취한 탓에 정리정돈을 하지 못한 거라고.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제 반응이 틀렸다. 서하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툭, 하고 바닥에 무언가 떨어졌다. 강제혁이 밀어 떨어뜨린 것이었다. 죽이 든 봉투였다. 저건 서하가 모르는 것이었다.

“쪽지도 붙어 있네.”

포스트잇을 떼어낸 강제혁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그 내용을 읊었다.

“서하야. 형이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밖에 없다. 김산.”

서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사려 물었다. 전화가 오는 걸 받지 않았던 잘못일까. 강제혁을 찾아낸 날 밤, 김산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 김산으로서 못할 전화는 아니었다. 어쨌건 그는 서하를 동생으로도 아꼈으니까. 하지만 멍든 얼굴로 병실에 누워서 자고 있는 강제혁을 두고 태연하게 김산과 통화를 나누기는 싫었다. 그래서 문자로만 소식을 전했다. 아무 문제없다고, 강제혁을 찾았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내용이 주된 골자였다. 차라리 전화로 자초지종을 전했다면 그가 이런 오지랖은 부리지 않았을 수도 있는데.

“김산이랑 술 마셨어요?”

“…….”

“변명도 안 하고, 대답도 안 하고……. 나 미치라고 일부러 그러는 건가.”

낮은 한숨과 함께 떨어지는 목소리가 단조로워 더 겁이 났다. 차라리 소리를 질렀으면 싶을 지경이었다. 고저 없는 음성과 더불어 제게 꽂히는 눈빛도 온도를 가늠할 수 없었다. 차디찬 건지, 아니면 뜨거운 건지.

“맞고 싶어서 입 닫고 있는 건 아니죠? 여기서 내가 이서하 씨 때리면 그거 그냥 폭행 밖에 안 되는 거 알 텐데.”

“…….”

“난 그런 식으로 당신 패고 싶지 않아.”

거기까지 듣고 나자 목소리 끝이 미약하게 떨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화를 꾹꾹 눌러 참는 강제혁은 터지기 직전의 활화산 같았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 말 말고는 상황을 타개할 확실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강제혁이 더 이상 서하를 쳐다보지 않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 제가 생각해도 설득력 없는 변명이었다. 오해 받는 상황이 억울한데, 반대로 생각하면 저 역시 오해하고도 남았을 상황이었다. 한참 창밖을 본 채로 잠자코 숨을 내쉬던 강제혁이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날 좋아한다며.”

들었구나. 억울한 와중에도 창피한 기분에 서하가 되물었다.

“들었어요?”

“지금 그게 중요해요?”

“…중요해요.”

서하에겐 중요했다. 이기적이라고 욕할 지라도 중요한 문제였다. 결백을 입증하는 일보다 더.

“들었어요. 이서하 씨가, 내가 완벽하지 않아도 실망 안 한다고 말해 준 거. 괜찮다고 했잖아요. 날 좋아하니까.”

강제혁이 또박또박 제가 했던 말을 그대로 읊어냈다. 말을 이으면서 문득문득 화가 치미는 모양인지 이를 악문 소리였다.

“그런데 날 좋아한다고 해놓고 김산을 만나?”

거기까지 말한 강제혁이 낮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어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저 같아도 그랬을 것이다.

“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이에요. 맹세할 수 있어요.”

날카롭게 묻는 말에 서하가 최선을 다해 변명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 적어도 제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어디에 맹세를 할 건데요.”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돌아보고 낮게 물었다. 다시금 꽂히는 시선에 서하가 저도 모르게 눈을 피하고 답했다.

“술만 마셨어요. 걱정하시는 그런 짓,”

“내가 뭘 걱정하는 줄 알고.”

섹스는 하지 않았다. 키스도. 하지만, 그가 걱정하는 게 뭔지 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 김산과 술을 마셨고 옛날이야기를 나눴고 그렇게 분위기가 미묘해졌다.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김산이 강제혁을 대신할 수 있다며 제 옷을 벗겼고 플레이의 전조를 밟았다. 게다가 서하 역시 발기하기까지 했으니 어쩌면 이 모든 게 강제혁이 걱정하는 것의 범주 안에 있는 일일지도 몰랐다.

“확신해요? 내가 걱정하는 일, 없었다고?”

“뭘 걱정하는지 정확히 말해주시면,”

“하.”

서하는 할 수 있는 말이 이것밖에 없다는 게 스스로도 우스웠다. 강제혁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은데 목소리만 들어도 싸늘하고 냉랭해 차마 쳐다볼 수가 없었다.

“가감 없이, 다 얘기해 봐요. 무슨 일 있었는지.”

“…….”

“거짓말 치면…….”

한 발자국, 강제혁이 서하에게 다가섰다. 집요하게 시선을 맞추려는 그가 두려웠다.

“…쳐 봐요. 나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니까.”

억지로 들린 고개 탓에 겨우 눈이 마주쳤다. 새까만 눈동자가 타오르듯 뜨거운데, 등골은 오싹했다. 솔직하게 털어놓기가 무서운데 그 말을 듣고 나니 거짓을 말하는 게 더 겁이 났다. 진퇴양난이었다.

***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되새김질 해 다시금 내뱉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건 서하의 기억력이 나빠서도, 그 일이 희미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단순히 겁이 나서였다. 무슨 대답을 하건 간에 그가 제 얘기를 듣고 관계의 종료를 선언한다면 서하는 무력하게 물러나야만 했다. 그게 서하의 발목을 잡았다.

“양심 없는 거 아는데요.”

“…….”

“하나만, 약속해주시면 안 될까요.”

이런 와중에도 그가 간절하다. 속으로 그런 스스로를 비웃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소리 내서 비웃고 싶을 지경이었다. 어차피 그가 제 고백을 들었음을 확실히 인지한 상태에서 감정을 부정하는 것은 무의미했다. 차마 코앞에 놓인 강제혁의 손을 잡지도 못하고 손끝만 꼼지락거리며 청했다. 서하의 말에 강제혁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뭡니까.”

“만약에, 걱정하시는 일 했더라도… 버리지만, 말아 달라고…….”

눈치도 없이 고여 든 눈물 탓에 서하의 목소리는 물기가 흥건했다. 씨발, 쪽팔리게. 하지만 억울함과 두려움, 그리고 곧 찾아올 망망대해 같은 외로움을 떠올리면 눈물이 참아지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어차피 아쉬운 입장에서 자존심을 세울 수는 없었다. 애초에 그 앞에서 자존심을 세워 본 적이 있긴 했나 싶었지만.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애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약속해주면 좋겠다는 못난 기대가 자꾸만 차올랐다. 언제 이렇게 등신이 됐냐. 자조적인 신음이 목구멍에 뭉쳤다. 그리고 꽉 조여져 있던 강제혁의 턱 근육이 일순 느슨해졌다.

“무서워요? 내가 이서하 씨 버릴까봐?”

어쩐지 분노가 덜어진 것 같은 목소리였다. 희망사항이긴 했다. 서하가 강제혁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 아하는 건 저 혼자니까.”

“누가? 이서하 씨가 나를?”

되묻는 말이 얄궂었으나 서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고백을 다 들었다면서 구태여 물을 것까지 있나. 하지만 죄를 지은 입장이니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의 말을 어기고 김산을 만난 것은 사실이니까. 게다가 문자로 보고하지도 않은 일이었다.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네.”

“나를 좋아하는데 왜 김산이랑 만났어요?”

“그게 일부러 만난 게 아니고요…….”

“일단 말해보세요. 약속할 테니까.”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에 서하가 우습게도 안심했다. 물론 우습다고 생각한 대상은 본인뿐이긴 했다. 그렇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는데 자꾸만 식은땀이 났다. 강제혁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말을 뱉으면 뱉을수록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라 미칠 것 같았다. 화가 난 그가 잠자코 들어주는 게 대단할 정도로. 만약 반대의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집에서 같이 술을 한 잔 했는데, 선배가 어디서 뭘 알아보고 온 건지…….”

그리고 슬슬 위험한 대목이었다.

“자기도 강제혁 씨처럼 할 수 있다고 옷을 벗겨서,”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힘줄이 솟는 강제혁의 주먹을 보며 서하가 빠르게 뒷이야기를 이었다. 이러다 김산을 패러 간다고 하면 또 경찰서 행이었다. 이번엔 가해자일 게 분명했다.

“저항했는데… 진짜 죄송한데, 그게,”

“흥분했어요?”

“아…!”

갑자기 허리를 당겨 깊이 안는 손길에 서하가 새된 신음을 뱉었다. 부서질 듯 안는 팔뚝이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다친 팔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서하는 다음 말을 뱉기 전에 최대한 강제혁을 자극하지 않으려 무덤덤한 목소리를 내야했다.

“제가 정조대도 차고 있었고, 술도 취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누가 그렇게 덮치니까…….”

“내 잘못이란거지.”

정조대를 채워두고 간 것은 강제혁이니 따지자면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답할 수는 없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요…….”

말을 이으면서 옷을 벗기는 강제혁을 막을 수가 없었다. 병상을 떨치고 일어선지 몇 시간이나 지났다고 이렇게 힘이 좋은지. 게다가 좀 꼴리기도 하고. 얇은 카디건이 바닥에 툭 떨어질 때, 주머니에 담긴 목걸이 탓에 보다 묵직한 소음이 울렸다. 그 소리에 마음이 더 다급해진 서하가 재빨리 뒷말을 뱉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런 건 빠르고 덤덤하게 말하는 편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어깨 한 번 물렸어요. 그리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정말로.”

아니나 다를까 서하의 어깨엔 잇자국으로 된 멍이 연하게 남아있었다. 샤워하면서 거울을 보는 편이 아니므로 서하는 알지 못했지만, 강제혁의 눈엔 어떤 상처보다 선명하게 보였다. 제가 남긴 게 아니었으니까 더욱 그랬다.

“죽여 버리고 싶은데…….”

이를 가는 강제혁의 모습을 보며 서하가 흠칫 떨었다. 감금당한 얘기를 할 때도 이렇게 화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덜컥 드는 무섬증에 서하가 강제혁의 몸을 끌어안았다.

“…아, 안 버리고 그냥 죽이려고요?”

“너를? 내가 너를 왜 죽여.”

그렇다는 건 즉 김산을 죽이고 싶다는 말이었다. 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제혁을 올려다봤다. 완벽한 반말과 함께 반쯤 맛이 간 것 같은 타는 눈빛이 서하를 쏘아보고 있었다. 흡사 염라대왕 같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어요! 진짜예요. 잘 거절했어요. 어차피 선배는 저 못 때린다고,”

“때려주면 맞고는 싶고?”

“아니요!”

서하는 있는 힘을 다해 부정했다. 날카롭게 반응하는 강제혁이 무서웠지만 그 와중에도 아랫도리는 줏대 없이 달궈지고 있었다. 진짜 눈치 없다. 이… 망할 자지새끼야. 서하가 제 말조차 안 듣는 성기를 속으로 힐난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강제혁이 제게 화를 내니 흥분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 집에 와서 청소하고 입 싹 닦을걸. 아니다. 그랬어도 어깨의 상처를 들켜 추궁을 당했을 것이다. 일을 저지른 상황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 마냥 돌이킬 방도는 없었다.

“저, 는 강제혁 씨한테만 맞고 싶어요.”

에라, 모르겠다. 다급해진 서하가 강제혁을 부둥켜안으며 진심을 다해 고백했다. 어쩌면 마조히스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고백일지도 몰랐다. 남들이 들으면 어이없을 게 분명하지만 사실이었다.

드러난 어깨에 메마른 입술이 닿았다. 가벼운 접촉임에도 숨이 턱 막히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닿기가 무섭게 살점이 떨어져라 물어대는 통에 서하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헛숨을 삼켰다. 강제혁은 김산의 흔적을 다 지우려는 것처럼 꽤 긴 시간동안 물린 면을 잘근잘근 넓게도 씹어댔다.

“하, 아으…….”

통증과 함께 번지는 쾌감에 눈가며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두터운 손이 엉덩이를 아프게 주무르기 시작했다. 자칫 그의 다친 부위를 건드릴까 겁이 나 몸이 절로 긴장됐다. 열 오른 이마가 제 어깨 위에 닿았다.

“…몇 대 맞을래요.”

타는 것 같이 뜨거운 시선에 서하가 입술을 깨물며 대답을 골랐다. 양심 없는 거 아는데, 그럼에도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듣지 못한 말이 있었다.

“몇 대든, 맞을 수 있는데요. 강제혁 씨는…….”

나른하게 저를 쳐다보는 눈길이 외설적으로만 느껴졌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살면서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될 날이 올 거라곤 생각조차 못 했는데…….

“저한테 사적인 마음이 있는지…….”

강제혁이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듣지 못했다.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그리고 엉덩이를 주무르던 손이 멎었다. 눈을 맞춘 강제혁이 서하의 입술 옆에 입을 맞추고 속삭였다.

“정확히 물어봐요.”

“…….”

쉽게 말이 떨어지질 않았다. 불현 듯 강제혁과 관계를 시작했을 때, 공과 사를 구분하자고 못 박았던 일이 떠올랐다. 그건 사제지간이라는 공적인 관계와 플레이파트너라는 사적인 관계를 구분 짓는 것이기도 했지만, 욕구와 감정을 나누는 말이기도 했다. 강제혁은 제게 연애를 제안한 게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은 사실상 계약 위반이었다.

언제 이렇게 좋아져버렸지. 저만 그를 좋아한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서러웠지만, 그가 저를 좋아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안 좋아할 수도 있지. 꼭 좋아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서하가 서러워지는 기분을 내리누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저, 좋아해요?”

수없이 불행한 대답을 상상한 끝에 서하가 최대한 덤덤한 척 가장하며 짧게 물었다.

아씨, 구질구질해……. 허리를 감싸 안았던 손에 힘이 조금 빠졌다. 숨 쉬기는 편해졌지만, 이 이상 몸을 떨어뜨리고 싶지 않아 서하는 어색하게 서 있었다. 괜히 물어본 걸까. 이 순간, 서하는 강제혁의 얼굴을 훔쳐보고 싶었지만 용기가 나질 않았다.

“……!”

그러다 발치에 떨어진 카디건에 눈길이 갔다. 떨어지는 충격에 목걸이가 반쯤 밖으로 빠져나와 있었다. 그 목걸이를 본 순간 서하의 눈이 흔들렸다. 강제혁은 묵묵부답이었다. 버리지 않는다고 했고, 제 것이라 말했으니 구태여 좋아하지는 않아도 됐다. 소유물이라고 꼭 좋아해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끝까지 떨어지지 않는 대답에 서하가 반쯤 포기했을 때, 눈가에 강제혁의 입술이 깃털처럼 닿았다. 가볍게 내려앉는 입맞춤의 의미를 알 수 없어 시선을 맞추자 뚫어질 듯 응시하는 눈동자가 보였다.

“나한테만 맞고 싶다고 했죠.”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묻는 말에 서하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강제혁을 좋아한다. 그래서 강제혁에게만 맞고 싶다고 생각했다. 사실 뭐가 우선인지는 모르겠다. 강제혁에게 처음으로 맞았기 때문에 강제혁을 좋아한 걸 수도 있다. 하지만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좋아하지 않았을 것 같았다. 강제혁은 마치 서하 자신을 위해 준비된 사람 같았다. 싫은 점이라곤 눈을 씻고 찾아보려 해도 찾을 수 없었으니까.

“나도 이서하 씨만 때려주고 싶어요.”

“……왜요?”

가슴을 울리는 감동적인 고백이었으나 서하는 의문스러웠다. 플레이 경험이 전무한 서하와 강제혁은 근본적으로 달랐다. 경험이 많았을 그에게 제가 특별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왜 저에게만 고통을 주고 싶은지.

한참 서하를 바라보던 강제혁이 준비해두었던 선물을 꺼내듯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사랑하니까.”

“…네?”

“내가 이서하 씨 사랑하니까.”

익숙하지 않은 외국어를 들은 것만 같았다.

“이서하 씨가 나한테만 흥분했으면 좋겠어요. 나만 울리고 싶고.”

“…….”

“혼자만 좋아하는 것 같아서 억울해요?”

“그,”

“내가 더 억울한데. 혼자만 사랑해서.”

뱉어진 음성을 다시금 짜 맞추고, 의미를 되새기는 사이 서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부딪힌 코끝이 간지러웠다. 눈만 깜빡이는 서하를 강제혁이 천천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강제혁이 뱉은 말의 의미를 이해한 시점부터 세차게 뛰는 심장 소리에, 그의 말을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분간이 되질 않았다. 엉덩이를 꽉 쥐는 손길이 새삼스레 거칠게 느껴졌다. 어지럼증이 일 정도로.

“그래서, 몇 대 맞을래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질문이었다.

“…몇 대든, 맞을 수 있다고 했잖아요.”

강제혁이 그런 서하의 입술을 느리게 혀로 핥았다. 성적인 욕구가 진하게 느껴지는 접촉이었다. 입술을 꾹 다물고 잘게 떠는 서하를 채근하려 몸을 움직이는 사이 툭, 강제혁의 발끝에 무언가 채였다. 자연스레 향한 시선 끝에는 반쯤 빠져나온 목걸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실로 수놓아진 글자는 익숙한 것이었다. 강제혁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서하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건 언제부터 가지고 다녔어요?”

계속 가지고 다녔어요. 서하는 낮은 물음에 뭐라 답하기가 민망해 속으로만 중얼거렸다. 잠시 그를 밀어내고 무릎을 굽혀 목걸이를 주웠다. 아마 저와 그는 죽는 한이 있어도 동등한 연인은 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비참하다거나 슬프게 느껴지진 않았다. 어차피 제가 사는 세상은 평범하지 않았으니까. 사랑한다는 그의 고백은 차마 단번에 믿기 어려울 만큼 달콤했지만, 덩달아 사랑한다고 답하기엔 제가 아직 많이 어설펐다.

“…채워주세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목걸이를 내밀며 눈을 감는 것만이 최선의 답변이었다.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집어삼킬 것처럼 탐욕스레 눈 안에 담았다.

“안 풀어줄 거예요.”

이윽고 서하의 하얀 목덜미에 채워진 까만 가죽 줄에서 금빛으로 새겨진 강제혁의 이름이 반짝거렸다. 목줄을 당기며 입술을 맞물리는 행위에 서하가 뜨거운 혀를 받아들이며 신음했다. 완벽한 구속이었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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