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장. 부재의 효과 (8/24)

8장. 부재의 효과

새벽 공기가 시리게 코끝에 닿았다. 해가 뜨기 직전의 그 오묘한 하늘의 색이 메마른 시야에 가득 담겼다. 새까만 밤을 가르고 잔잔히 떠오를 태양으로 인해 하늘이 점차 푸른 기운을 짙게 띠고 있었다. 푸른 듯 까맣고 까만 듯 푸르른 그 넓은 천공은 마치 깊은 바다 속 같기도 했다. 심해를 닮은 하늘. 서하가 폐부를 적시는 혼탁한 밤의 여운이 섞인 숨을 들이켰다. 베란다에 놓인 화분에 고인 이슬방울이 투명하고 맑았다. 입술 사이에 문 하얀 담배가 제 몸을 태우는 작은 불꽃에 몸을 맡기고 조금조금 재가 되어 갔다. 찬 공기를 물들이는 희뿌연 연기가 잠시 고였다 흩어졌다.

“하…….”

단 하루, 자리를 비운다고 말했던 강제혁은 나흘째 소식이 없었다. 강제혁이 없는 강의실은 다른 학생들로 북적였지만 그의 부재만으로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꺼져가는 담배를 멍하니 물고 있던 서하가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 창을 켰다.

「일어났어요. 9:16」

「오늘은 별 다른 일정이 없어서 카페에 가요. 11:45」

「커피를 줄이기 어려워서 라떼를 시켰어요. 두유 넣은 걸로요. 12:07」

「샌드위치 두 개 먹었습니다. 13:14」

「아메리카노 한 잔만 더 마실게요. 투 샷 만요. 15:26」

「방금 들어와서 씻었어요. 17:53」

「저녁은 간단하게 사과 먹을게요. 견과류도 있어요. 18:42」

「서재에서 강의 준비하다 이제 자려고 누웠어요. 23:57」

「안녕히 주무세요. 내일 봬요. 00:06」

「보고 싶어요. 01:12」

거기까지 읽은 서하가 미련 없이 휴대폰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비슷한 내용의 메시지가 이틀 치나 더 있었다. 물론 감정을 담은 문자는 그 후로 보내지 않았다. 평범한 일과만을 보고했다.

서하는 하루를 약속하고 답장조차 없는 강제혁에게 몇 번이고 일상을 알리는 메시지를 보냈다. 우스운 일이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하지만 나흘째에 이르자 그조차 어려웠다. 오늘도 일어났다고 보고를 해야 하는데, 방금 전 보았던 화면은 단순히 글자 몇 개로 이루어진 풍경이었음에도 지독히 외로워 보였다.

“아직 새벽이니까…….”

이제 막 6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하루 동안 자리를 비운단 말은 거짓이었을까. 왜? 이유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읽었다는 표시조차 없는 적막한 대화창이 자꾸만 떠올랐다. 차라리 메아리라면 제 대답이라도 돌아올 텐데. 그리스 신화 속의 가여운 에코가 떠올랐다. 저는 에코만도 못했다. 연이어 입에 물었던 담배들이 쓸쓸히 재떨이로 향했다. 오늘은 운동을 할 기분도 들지 않았다. 그저 피로했다.

***

여리게 돋아났던 새순은 햇빛을 머금고 잔뜩 푸르러져 있었다. 시간이 꽤 빠르게 흐른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랬다. 서른여섯의 나이는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서하를 처음 만났던 스물여섯의 제가 떠올랐다. 딱 10년이 지났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정말 많은 게 변한 것 같다.

그럼에도 서하는 그대로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서하가 변한 건지, 아니면 제가 서하를 몰랐던 건지. 분명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희미해지고 완전히 다른 형태로 굳어지고 있었다. 알고 있던 세계가 허상이었다는 걸 알게 되자 장자의 호접몽을 제가 더러 꾸고 있는 것 같다는 기묘한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날아든 하얀 나비가 잔디밭에 머무르는 모습이 보였다. 괜히 허무한 웃음이 나왔다. 여태까지 뭘 알고 있다고 자만했던 걸까. 약혼자였던 혜인의 생각도, 10년을 곁에서 지켜본 서하의 속내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저 멀리서 제 수업을 듣는 학생 하나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김산이 그런 학생을 보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래, 안녕.”

서하가 딱 저만했다. 스무 살의 서하. 지금보다 어린, 뭐라 말을 건넬 때마다 흰 목을 빨갛게 물들이며 입술을 꾹 물던 서하. 양복 정장이라곤 생각도 할 수 없던, 지금보다 마른 몸에 커다란 회색 후드티를 걸치고 어색하게 동아리방에 서 있던 후배. 말을 붙이지 말 걸 그랬나. 하지만 그러기엔 10년간 함께했던 세월이 즐거웠다.

- 너는 과팅 같은 거 안 나가?

- 그런 데 관심 없어요.

그런 게 괜히 궁금했다. 김산은 대학교에 입학한 신입생이라면 으레 꿈꾸는 생활을 서하도 바랄 거라고 여겼다. 동시에 서하가 다른 사람과 연애하는 모습이 궁금했었던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초연하게 대답하는 서하의 모습은 예상외의 것이기도, 동시에 예상했던 것이기도 했다. 그때의 저는 그런 서하를 보며 시원하게 웃어주었다.

- 군대 가기 전에 연애해 봐야지.

- 필요 없어요.

불퉁하게 대답하는 서하가 귀여웠다. 그래, 그런 대로 좋다고. 좋은 여성이 나타나면, 그때 첫눈에 반해 그림 같이 백년가약을 맺어도 좋겠다고. 서하를 두고 그런 상상을 했더랬다. 그때의 제게 있어서 짝을 만나 결혼을 하는 것은 당연히 거쳐야 할 일이었으니까.

“등신새끼…….”

헛웃음이 터졌다. 뭘 알아서.

“하…….”

김산의 한숨이 연이어 바닥을 꺼뜨릴 듯 내려앉았다. 풀 향기를 머금고 부는 바람에 제 덧없는 한숨과 그에 실린 시름이 섞여 희석되길 바랐다. 서하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제 위로를 서하가 바랄까. 매몰차게 절 내보냈던 서하는 여태까지 연락 한 번 없었다. 그런 서하가 원망스러울 법도 했지만,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저 곁에서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가르쳐주고 싶었다. 뭐든. 서하를 위해서. 그러려면 얼굴을 봐야 하는데, 결국 김산이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연락이 오지 않는다면 제가 먼저 하면 될 일이었다. 휴대폰을 쥔 손이 어쩐지 무거웠지만 전화를 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

또 다시 해가 졌다. 강제혁은 아직까지 연락이 없었다. 서하는 느지막이 일어난 척, 또 다시 일과를 보고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겠지. 애써 초조한 마음을 달래는 사이, 서하의 발걸음은 카페 앞에 멎어있었다. 오후에 김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버릇처럼 무음으로 설정해두었던 휴대폰은 벨소리로 바뀐 지 오래였다. 혹시나 강제혁에게서 연락이 올지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꾼 것이었다. 그래서 그 벨소리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드디어 연락을 준 걸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물어봐도 될까. 대답을 해주긴 할까. 아니, 대답을 주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그저 목소리를 듣고 일과를 꼬박꼬박 보고한 것에 대한 칭찬 한 마디만 들으면 그간의 서러움은 눈 녹듯 사라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화면에 뜬 이름은 기다리던 이의 것이 아니었다.

[서하야.]

“…….”

[얼굴 좀 보자.]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의 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 그 일 때문에 더 그렇겠지. 김산의 앞에 못 볼 꼴을 보였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사과를 해야 하나. 머리가 아팠다.

[걱정돼서 그래. 그냥…….]

“제가 죄송하죠.”

[넌 잘못 없어.]

그 말이 왜 이리 우습게만 들리는지. 전부 바보 같았다. 저를 가질 수 없다고 그런 짓을 저지른 강제혁이나, 그런 꼴을 보고도 동생이 걱정돼서 얼굴 좀 보자는 김산이나, 제게 만행을 저질렀던 강제혁이 보고 싶어 괴로운 자신이나. 그래서 김산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홧김에 김산을 만나러 간다는 메시지를 강제혁에게 남겨볼까도 했지만 억울한 감정이 들어 그만두었다. 실은 무서워서였다. 그런 메시지를 보냈음에도 답장이 없을까봐서.

“…선배.”

서하가 카페의 구석자리에 앉아 멍하니 시켜둔 음료를 응시하던 김산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하야.”

반가움과 걱정으로 얼룩진 그의 감정이 제게도 여실히 전해졌다. 미묘한 기분이었다.

“밥은 먹었어? 커피 시켜줄까?”

“…배고파요.”

김산이 내미는 손을 거절하지 않았다. 서하의 중얼거림 비슷한 말도 한 번에 알아들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서하를 이끌었다.

“밥 먹으러 가. 얼굴이 왜 이렇게 상했어. 뭐 먹고 싶어?”

“고기요.”

“우리 작년에 갔던 교외 식당으로 갈까? 형 차 가져왔어.”

“좋아요.”

서하가 제 손을 잡아끄는 김산을 따라 카페 밖으로 발을 뗐다. 답지 않게 분주하게 구는 김산의 모습은 제가 알던 것과 조금 다르고, 약간 낯설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위로를 받을 곳이 필요했다. 저를 기다려온 김산의 모습에서 강제혁을 기다리는 제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

뜨거운 숯불 위에서 달궈진 철판에 고기가 올려졌다. 치익, 고기 구워지는 소리가 꽤 맛깔스럽게 울렸다. 식욕을 절로 당기게 하는 광경과 소리에도 서하는 꽤 무미건조한 낯을 하고 있었다.

“소주 한 병 주세요.”

바쁘게 지나가는 아르바이트생을 불러 세운 김산이 술을 주문했다. 소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서하였지만 말리는 말이 없었다. 그런 서하의 눈치를 보던 김산은 그게 무언의 허락이라고 생각했다.

“소주 한 병 나왔습니다. 더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네. 또 필요하면 부르겠습니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아르바이트생의 붙임성 좋은 인사를 끝으로 다시 테이블이 고요해졌다. 김산이 서하의 잔에 소주를 반쯤 채워주었다. 투명한 액체가 고인 잔을 물끄러미 보던 서하가 단숨에 그것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왜 이렇게 급하게 마셔.”

“더 주세요. 이번엔 가득 채워서요.”

입가에 묻어난 소주를 손등으로 닦아낸 서하가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연달아 반병을 비워낸 서하가 알코올향이 짙게 묻어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고기 먹고 술 마셔.”

김산이 서둘러 젓가락을 들고 익은 고기 한 점을 서하의 입가에 대 주었다. 반쯤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노릇하게 잘 구워진 고기가 들어갔다. 무의식적으로 턱을 움직여 씹던 서하가 오랜 시간 끝에 입안에 든 것을 삼켜냈다.

“…맛있어요.”

“너 전에도 그랬잖아. 여기 맛있다고.”

“별걸 다 기억하시네요.”

괜히 웃음이 나왔다. 지난 며칠간 불안과 초조에 뒤섞여 음식을 먹어도 먹는 것 같지가 않았다. 서하는 숟가락을 집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칼칼한 된장찌개를 한 술 떠 입안으로 넣었다. 매콤하고 구수한 국물이 고기와 먹기에 딱 좋았다.

“밥도 시켜주세요.”

“여기 공기밥 두 개 더 주세요.”

손을 들어 재차 주문을 하는 김산은 꽤 즐거워 보였다. 서하의 접시에 열심히 구운 고기며 장아찌 같은 것을 얹어주던 김산이 술 대신 물을 따라 주었다.

“술 마시고 싶어요.”

“취하지마.”

“선배가 시켰잖아요.”

“적당히 반주하려고 시킨 거지, 너 취하게 만들려고 시킨 거 아니야.”

대꾸하는 목소리가 단호하고 칼 같았다. 서하가 한숨을 내쉬며 그 단호한 어조에도 더 이상 설레어 하지 않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젠 구태여 설레지 않는다, 생각하지 않아도 될 만큼 진심으로 아무렇지 않았다. 그럴수록 강제혁이 더 보고 싶어질 뿐.

“먹고 나면 할 얘기 있어. 취한 상태로 하고 싶지 않아.”

그런 서하를 보던 김산이 조금 누그러진 어투로 제 앞에 앉은 이를 달래었다.

“그럼 빨리 먹을게요.”

“급하게 먹으면 체해. 천천히 먹어. 시간 많잖아.”

다급히 만류하는 김산을 뚫어져라 보던 서하가 눈시울을 붉혔다. 이상하게 눈물이 나려 했다. 괜히 고개를 돌리고 입안에 든 것을 열심히 씹어 삼켰다. 들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 가야 돼?”

“…….”

“강제혁이 기다려서?”

결국 눈물이 왈칵 터졌다. 이렇게 나이를 먹고 바깥에서, 그것도 고깃집에서 울음을 터트리긴 처음이었다. 이름 세 글자가 전부가 아니었다. 강제혁의 이름에, 기다린다는 단어가 붙자 서러움이 해일마냥 밀려들었다. 서하에겐 그런 설움을 막아줄 방파제가 없었다.

“서하야, 너 울어?”

“아니에요.”

물기가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는 그 자체로 거짓이나 다름없었다.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고작 소주 반병에 취한 것도 아닐 텐데, 눈가가 붉어지고 눈물샘이 자꾸만 액체를 흘려보냈다.

“매워서 그래요. 이거, 고추 장아찌.”

“너 먹은 거 고추 아니고 무잖아.”

“요즘 무가 매운가 보죠. 여름에 수확한 무가 맵다잖아요.”

“이제 5월인데 이게 여름에 수확한 무라고?”

개소리였다. 서하의 말대로 여름에 수확한 무는 더러 매운 맛이 나기도 했지만, 그런 매움으로 이렇게까지 우는 사람은 없을 게 분명했다. 게다가 김산의 지적처럼 지금은 아직 여름도 아니었다.

“서하야, 형 좀 봐.”

“그만 먹을래요.”

“그래, 안 먹어도 돼. 일단 차에 가자. 여기서 이러면 네가 민망하잖아.”

김산의 말이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어차피 눈물이 멈추지 않는 고로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울고 싶지도 않았다. 수긍한 서하가 자리에서 일어났고, 김산이 서둘러 계산을 마쳤다. 그의 등 뒤에 숨어 눈물에 젖은 얼굴을 가리고 함께 차로 향했다. 차문이 닫히고 오로지 둘만 남자, 김산이 먼저 울고 있는 서하의 손을 당겨 끌어안아 주었다.

“울지 마.”

“흑, 흐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서럽고 억울했다. 강제혁이 보고 싶었다. 언제 돌아올까. 돌아오긴 하는 걸까. 언제까지 그를 기다려야 하는 걸까. 10년이나 김산을 홀로 짝사랑해 왔던 주제에, 강제혁이 없어진 나흘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눈물을 펑펑 쏟아내는 서하를 다독이던 김산은 끝끝내 어떤 말도 건네지 않고 서하를 안아주었다. 누나가 죽고 9년 만에, 처음으로 그렇게 설움에 받혀 울고 말았다. 몹시 우울한 날이었다.

***

울음의 여운이 가시자 뒤늦게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서하가 화끈거리는 눈가를 괜히 소매로 꾹꾹 누르며 입술을 깨물었다. 얼결에 김산을 제 집까지 들이고야 말았다. 김산의 집으로 가는 것보단 나았지만, 어쨌건 강제혁이 알면 기뻐할 리 없는 일이었다. 잊으려 해도 헐렁한 바지 속 정조대가 그의 존재를 자꾸만 상기시켰다.

“따뜻한 차라도 타 줄까?”

“괜찮아요.”

아직까지 물기를 벗겨내지 못한 목소리가 어두운 거실 안에 나지막이 울렸다. 김산은 물끄러미 서하를 내려다보고 있었고, 서하는 아늑해야 할 제 집에서 불필요한 긴장을 느껴야 했다. 괜히 그를 집에 들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제혁과 있을 때 성적 긴장으로 팽팽하다면, 김산과 있을 땐 아슬아슬했다. 그가 어떤 말을 할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 무서웠기 때문에.

하지만 조금 지나니 그마저도 흐릿했다. 서하는 너무나도 지쳤고, 강제혁 외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정조대 때문일 지도 모른다. 그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건 어떻게 되는 걸까. 온다고 한 날짜를 지나자마자 풀었어도 될 일이었는데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그깟 약속이 뭐라고. 그런 생각을 하자 겨우 말랐던 눈가가 다시금 젖어들기 시작했다. 늦은 나이에 때 아닌 열병이라도 앓는 것 같았다.

“서하야…….”

“…네.”

당장 괜찮다고 하고 김산을 보내야 하는데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질 않으니, 구실도 없었다. 질질 짜면서 괜찮으니까 가세요, 하면 그가 곧이곧대로 들을 리도 없거니와 더는 그딴 목소리로 울먹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서하에게 김산이 다가서며 질문을 던졌다.

“형이 갔으면 좋겠어?”

수면에 파동을 일으키는 듯한 물음이었다. 떠먹여 주듯 김산이 갔으면 좋겠냐는 물음을 주었음에도 이런 질문에 선뜻 가라고 말 할 수 없었다. 마음 한편으론 그가 가지 않길 바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누구라도 좋으니 곁을 지켜주길 원했다. 강제혁 때문에 아무도 없는 밤이 어색하고 낯설어졌다. 홀로 잠드는 게, 어이없게도 싫어졌다.

“자는 거 보고 갈게.”

“…감사합니다.”

서하가 조금 긴장이 풀어진 얼굴로 감사 인사를 뱉었다. 김산이 머뭇거리던 손을 뻗어 서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 일이 있고 처음으로 만난 서하는 훨씬 감정적으로 변한 채였다. 그 변화가 강제혁으로 인한 것이라는 사실이 화가 났지만, 애써 숨겨냈다. 밤은 길었으니까.

***

테이블 위에 양주가 반쯤 비워진 채였다. 지금으로부터 30여 분 전, 얼결에 술을 한 병 꺼내게 된 탓이다. 김산을 두고 씻으러 가기도 그래서 그대로 눈을 붙이려 했는데, 영 잠이 오질 않았다. 결국 술이나 한 잔 마시고 푹 자라는 따뜻한 말이 이 상황을 초래했다.

“야, 안주빨 세우지마!”

“땅콩이 안주빨 세우는 거예요?”

어색한 것도 잠시, 그래도 지낸 세월이 있어 어느 순간 분위기가 풀렸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마치 강제혁을 만나기 전처럼, 김산이 결혼에 대한 결심을 언급하기 전처럼. 찬장에 굴러다니던 견과류 봉지를 뜯어 하나씩 입에 넣으며 언제 받아왔는지 기억나지 않는 양주를 한 잔씩 나눠 마셨다.

“맛있는 안주는 네가 다 버리고 왔어. 그 고깃집에.”

“아, 아깝다. 다시 가서 가져와주세요.”

“진짜 가? 다녀온다? 너 내가 못할 것 같지?”

“으, 됐어요. 웃기고 있어, 진짜.”

부산스레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김산이 우스꽝스러웠다. 서하가 내도록 굳히고 있던 입꼬리에 힘을 풀고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웃고 떠드니 즐거웠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하가 지난 십 년간 겪은 즐거운 일 속엔 항상 김산이 있었으니까. 취기가 알딸딸하게 오르자 옛 이야기가 하나 둘 터져 나왔다.

“그때 그래서 걔 토하고 그랬잖아.”

“토만 했게요? 손에 다 묻혀가지고 그거 동기 옷에 닦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맞다. 진짜 웃겼어. 그리고 기숙사 들어가서 룸메이트 손에 토했다며.”

“그거는 걔가 바닥에 토하려고 하니까 룸메가 못 하게 막는다고 손 내밀었다가 참변 당한 거예요.”

꽤 역겨운 얘기였지만 옆에서 방관한 입장으로는 재밌었던 일이었다. 대학생이라면 겪을 수 있는 흔한 이야기. 주량 이상 술을 마시고, 아무데나 구토하고. 서하도 그랬었다.

“서하 너도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 술 먹고 토했잖아.”

생각났다는 듯, 김산이 쾌활히 웃으며 서하의 과거를 끄집어냈다. 하지만 서하의 머릿속엔 그 일이 떠오른 게 아니었다. 강제혁도 그래본 적 있을까? 흔한 대학생처럼, 신입생 시절에 술에 취해서 토하고 실수한 적이 있을까? 그런 얘기를 나눠 본 적이 없어 몰랐다. 또 다시 강제혁에 대한 생각이 들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호탕하게 웃던 서하가 입매를 굳혔다.

“…강제혁이랑 무슨 일 있었어?”

어두워진 서하의 표정을 잡아낸 김산이 금기어에 가까운 이름을 꺼냈다. 김산에게 있어서 글자의 나열만으로도 기분을 망칠 수 있는 힘이 있는. 서하에겐 이 순간만큼은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기도 했다.

“선배.”

“그날 일, 형은 괜찮아. 내가 널 이해하지 못해서 계속 상처 줬던 거니까.”

김산이 눈을 꾹 감은 채 감내하듯 말했다. 받아들이기 힘든 거겠지. 애초에 서하도 누군가 그런 저를 받아들여주길 바란 적 없었다. 그냥 난 그런 인간이니까. 하지만 뭇매를 맞는 게 두려워 숨겼을 뿐.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꼭 그 자식이어야 해?”

입을 다물고 손끝으로 땅콩 따위를 굴리는 서하의 손목을 덥석 잡으며 김산이 물었다. 그 목소리가 꽤 쓸쓸하고, 또 억울해보여서 서하가 입술을 잘근거렸다.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그 자식이 지금 없다고. 없어진 지 나흘째라고. 어쩌면 저를 떠난 걸지도 모른다고. 눈물이 자꾸만 맥없이 눈가에 고여 들었다. 쪽팔리게. 서하가 의연한 척 고개를 쳐들고 그 눈물을 삼키려 애를 썼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왜 그 이름만 나오면 울상이야. 무슨 일 있었어? 그 미친놈이 너 싫대?”

그런 서하를 보던 김산이 답답한 듯 따져 물었다. 그로서는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까지 말랑한 서하를 본 일이 없었으니까. 열등감 비슷한 것이 자꾸만 추하게 고개를 들이 밀었다.

“왜 자꾸 욕을 해요, 어린애한테.”

눈물을 욱여넣는데 실패한 서하가 불퉁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떨궜다. 자연스레 감긴 눈꺼풀에 고여 있던 눈물이 툭 하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우습다.

“난 이해가 안 돼. 서하야.”

“세상 모든 일이 다 선배의 이해 범위 안에서 일어나진 않아요…….”

“서로 좋아하는 사이엔 상처를 줘서는 안 돼. 그럴 수는 없어. 실수라면 모를까, 의도하고 상처를 주는 관계가 정상적이니? 그게 건강한 관계야?”

김산이 흥분한 듯 목청을 틔우며 서하를 꾸중했다. 꾸중이나 다를 게 없었다. 그런 건강하지 못한 관계를 이어가는 게 서하 본인이었으니까. 반박할 말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이만큼 건강하지 못한 관계도 없을 것이다. 때리고 맞고 지배하고 지배당하고, 어쩌면 강제혁도 저와의 놀이가 재미없어져 떠난 것일지도 모른다. 서하의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자괴감이 든 탓이었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김산의 말이 서글펐다. 제 행복을 온 마음을 다해 비는 ‘좋은 형’의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제대로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거칠한 감정을 서툴게 고백했던 그가 떠올랐지만, 금세 잊혀졌다.

“…행복이 별 건가요.”

지금은 제 무너진 감정을 재건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강제혁의 부재를 인정할 수 있을 힘이 필요했다. 하지만 김산은 그런 서하를 몰아붙이길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비인간적인 취급당하면서, 그렇게 울면서 행복하다고? 거짓말 치지 마. 서하야. 사랑은 그런 게 아니야. 남자와 남자 사이라도 사람끼리 만나는 건데 왜 너만 이렇게 아프고 힘들어야 해.”

“…….”

“그런 성벽, 그래, 그건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그게 네가 완벽하게 즐길 수 있는 관계라면 너 이렇게 울면 안 되는 거잖아. 그 이름만 나와도 울면서 행복하다고? 그런 관계를 즐기고 있다고? 그럼 울지 말았어야지.”

마지막 목소리가 차디찼다. 냉정하게 단정 짓는 말이 한 점 틀림이 없었다. 알코올 기운과 처참한 심경에 김산의 그 ‘지당한’ 훈계가 더해지자 서하에게서도 실소가 터졌다. 그래, 비정상적인 관계다. 좋아하냐고? 그 물음에 아니란 대답을 해야만 했던 이유가 뭐겠는가. 언감생심 사랑이란 말이 붙을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저만 아프고 힘들다. 육체든 정신이든. 서하가 잔에 남아있던 진한 갈색빛 액체를 한 번에 들이켰다. 목구멍을 태우듯 타고 내려가는 액체가 독하고 썼다.

“…저 씻고 잘게요.”

“서하야, 형 말 아직 안 끝났어.”

비틀거리며 욕실로 향하는 서하를 김산이 따라나섰다. 터벅터벅 걷는 걸음마다 김산의 발자국이 따라 붙었다. 아주 느린 추격전 같았다. 지친 사냥감과 그런 사냥감을 배려하는 사냥꾼이라도 된 것처럼.

서하가 어지러운 머리로 겨우 욕실에 당도했다. 탁, 스위치 누르는 소리와 함께 욕실의 불이 켜지고 어두운 가운데 빛과 어둠의 경계가 서하와 김산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서하가 발을 떼기 직전에 김산의 손이 서하의 팔을 붙잡았다. 망설임 없는 손길이었다.

“…놔 주세요. 피곤해요.”

지친 서하가 팔목을 털어내려 했지만, 김산은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할 말이라도 있는 걸까.

“싫다면?”

들려 온 음성은 이상하게 낯선 느낌이었다. 김산의 손아귀에 붙들린 팔목이 세게 조여들고 있었다. 목덜미가 서늘했다.

“…네?”

“놓기 싫다고.”

묘한 기시감에 서하가 고개를 돌리자, 김산이 싸늘한 표정으로 서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10년이란 긴 시간동안 봐온 사람이었음에도, 처음 마주하는 얼굴이었다.

***

아침인지 밤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커튼이 쳐진 실내는 지극히 어두웠다. 빛이 들어오긴 했지만 아주 극미한 양에 불과했다. 그래도 그 엷은 빛 덕분으로 적어도 한밤중이 아니란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해가 지는 건지 뜨는 건지, 희미한 빛이 얕게 내부를 밝히고 있었다.

실내는 넓고 고풍스러웠다. 짙은 고동색 원목 가구의 완고한 모양새는 수십 년간 한 자리를 지키고 있었음을 알려주었다. 다만 먼지 한 톨 없이 관리되던 저택의 복도는 불청객의 더러운 구둣발로 엉망이 되어 불결해진 채였다. 짙은 밤하늘 색의 융단 카펫 위에 흙 발자국을 새긴 주인공이 콧노래를 부르며 붙박이장의 서랍을 들쑤시고 있었다. 이렇게 어두운 와중에도 집 안의 집기들이 잘 보이는 건지, 남자는 어두움에 익숙한 눈을 가진 듯했다.

“패물 같은 것도 안 차고, 꼬장꼬장한 노인네. 그런 게 남는 거지. 쯧.”

불쾌함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그가 지칭하는 꼬장꼬장한 노인네는 아마도, 서랍 위 작은 액자에 무표정한 낯으로 앉아 정면을 응시하는 노년의 여성을 이르는 듯했다. 그의 말대로 사진 속 여성은 장신구라곤 없이 무채색의 밋밋한 옷차림을 고수하고 있었다.

“오, 시계는 좋네.”

결국 서랍을 뒤져서 만년필과 손목시계 따위를 찾아낸 사내가 낡은 주머니에 그것들을 쓸어 담고 기분 나쁜 미소를 지어보였다. 끝이 늘어지는 말투와 불쾌하리만치 붉게 번진 낯이 그가 취중임을 알려 주었다. 흐리멍덩한 눈동자가 허공을 헤매듯 매만졌다. 술에 취한 거지꼴의 중년 남성과 이 저택은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공간에 두 발로 서 있었다. 그렇다는 건 누군가 문을 열어줬다는 뜻이었다.

“아들, 아직도 서명할 기분이 안 나?”

술 냄새가 푹푹 풍기는 입으로 비틀비틀 누군가에게 걸어간 남자가 아들이란 호칭을 내뱉으며 서명을 운운했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간 곳엔 누군가 흐트러진 호흡을 뱉으며 의자에 형편없이 묶여 있었다. 어두컴컴한 실내 한구석에 커다란 몸을 구속당한 채로.

“그러게 아버지가 연락할 때 재깍재깍 답장하고, 돈도 보내고 그랬으면 이럴 일 없잖아.”

남자가 청년의 뺨을 쥐고 비죽 웃어 보였다. 깨끗했을 이마는 굳은 혈액에 엉망으로 물들어 있었다. 상처가 난지 한참은 지난 듯했다. 밧줄에 사지가 묶인 채, 맞아서 터진 입가로 거친 숨을 내쉬는 남자는 강제혁이었다. 서하가 그토록 그리는.

***

나흘 전. 강제혁은 서하와 헤어지자마자 외관을 정돈하고 검은 마세라티 위에 몸을 실었다. 깔끔히 빗어 넘긴 머리카락이며 주름 한 점 없이 다림질한 셔츠가 그의 행선지가 예의를 요하는 곳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생기 없는 두 눈은 도로를 응시하고 있었고 차 안은 그저 적막했다.

내비게이션의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익숙한 길을 찾아가고 있었다. 도로를 메우던 차량이 점차 줄어들고, 한적한 길로 들어서자 건물이라곤 단 하나밖에 없었다. 커다란 담장이 드높게 솟은 저택은 풀과 나무밖에 없는 다른 풍경과 대비되어 마치 고성처럼 보이기도 했다. 강제혁의 어린 시절이 녹아있는 그 곳. 조모의 집이었다.

“…다녀왔습니다.”

강제혁의 입에서 짧은 인사말이 흘러나왔다. 행여 누가 들을까 차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로, 저택의 대문을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이곳에 더 이상 들고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와 집기 관리 등을 맡긴 사용인이 방문하기는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조모와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은 저 말고는 없었으니까.

그런 저 역시도 조모의 기일이 아니면 굳이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작고하신 분의 완벽한 손주 노릇을 하기에는 제가 너무도 타락했기 때문이다. 강제혁의 낯에 자조적인 미소가 배어나왔다. 반나절 정도 머물 예정이었기에 따로 내부에 주차를 하지는 않았다. 이 일대는 다 조모 소유의 부지였으니 곧 제 것인지라, 어디에 차를 대든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차량의 시동을 끈 강제혁이 휴대폰을 잠시 들었다가 그대로 보조석에 내려두었다. 서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당장 확인하면 도로 돌아가 그 옷을 벗기고 싶어질 것만 같았다. 1년 중 단 하루, 조모를 기리는 날이었으니 아무리 서하가 보고 싶어도 참아야 했다. 최소한의 도리였다.

“그래도 너무 보고 싶다. 당신이 날 좋아하지 않아도.”

짧은 불평 후에는 재킷을 털어내고 차에서 내려 낡은 티가 나는 열쇠를 꺼내 들었다. 철컥, 툭. 철문의 자물쇠가 열리고 육중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정돈된 마당 안에서 조모가 굳은 얼굴에 얇은 미소를 띠며 저를 반길 것만 같은 기이한 착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들려선 안 될 타인의 조급한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동시에 눈앞이 깜깜해졌다. 붉게 번지는 시야의 가운데 저를 내려다보는 늙은 남자가 있었다. 추악한 얼굴이었다.

***

강제혁이 정신을 차렸을 땐 저택 안이었다. 사지는 구속된 채였고 머리가 아파 연신 눈을 깜빡여야만 했다. 통증보다 분노가 먼저 치밀었다. 어두운 가운데 술병을 들이켜는 남자는 낄낄거리는 웃음을 흘리며 소파를 더럽히고 있었다.

“일어났나보네.”

“…누구야, 당신.”

“단번에 기절시키는 것까진 좋았는데 너무 세게 쳤나봐. 빨리 안 일어나서 답답했거든.”

남자는 강제혁의 말 따윈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그저 기다리느라 몹시 지루했다는 뉘앙스를 풍겨댈 뿐이었다. 강제혁이 엉겨 붙은 피 때문에 잘 떠지지 않는 왼쪽 눈을 버려두고, 오른쪽 눈으로 남자를 쳐다봤다. 수염이 지저분하게 난 남자는 강제혁과 꽤 닮은 외양을 하고 있었다.

“뭡니까, 대체.”

“존댓말 쓰는 거 보니 이제 알아봤나 봐.”

요령 없이 되는 대로 묶어놓은 주제에 단단히도 묶었다. 줄기차게 문자며 전화를 해댈 때 알아봤어야 했다.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땐 어이가 없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할머니께서 돌아가셨을 때도 연락 한 번 없었던 주제에.

“이거 안 풀어?”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애비한테 반말이나 찍찍 해대고…. 이 씨팔, 빌어처먹을 놈의 새끼가!”

분노조절장애라도 있는 건지 남자가 별안간 소리를 질렀다. 그는 강제혁의 부친이었다. 오래전에 사라진.

남자의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시계는 방금 전까지 강제혁이 차고 있던 물건이었다. 재킷은 짓밟혀 바닥을 뒹굴고 있었고, 차 키와 지갑, 휴대폰이 탁상 위에 놓여 있었다. 제가 일어나길 기다리며 차 안을 뒤져 돈이 될 만한 것을 챙긴 모양이었다. 대충 알 법했다. 못 본 새 더 저질이 됐네. 흐릿한 유년 시절의 기억 속 남자는 늘 짜증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돈 필요해?”

강제혁이 피곤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버지란다.’ 따위로 시작하던 역겨운 문자도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다. 거의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났다. 어머니와 이혼한 후로 처음부터 알지 못했던 사람처럼 사라진 사람이었다. 좆같게도 닮은 얼굴이 아니었다면 알아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모친의 장례에도, 조모의 장례에도 낯짝 한 번 비추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돈이 필요해 친자식을 폭행하고 감금한 남자가 역겹게 느껴졌다. 역겹다 뿐인가. 기가 막혔다. 정상적인 사고가 안 되는 게 틀림없었다.

“이렇게 말이 잘 통하면서 왜 연락을 씹었어. 기분 좆같게. 그래도 이렇게 보니까 말이 좀 통한다. 그지? 노친네랑은 달라.”

“하…….”

“애새끼 훔쳐 간 대가를 치러야 되지 않겠냐고 얘기했더니 푼돈 몇 푼 쥐어주고 쫓아내더라고. 근데 그걸로 평생 먹고살 수는 없잖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단 것은 제 착각인 듯했다. 맞은 것보다 더 짜증나는 충격이 뒤통수를 강타했다. 할머니를 찾아왔었던 모양이다. 염치도 없지. 시종일관 굳어있던 강제혁의 낯에 경멸이 섞였다.

“왜, 정자 값으론 부족했어?”

“근데 이 쌍노무새끼가…….”

휘적휘적 걸어온 남자가 다짜고짜 강제혁의 얼굴을 후려갈겼다. 술에 취한 덕인지 그다지 아프진 않았지만 기분은 충분히 더러웠다. 입안에 고인 핏물을 퉤 뱉어내자 남자가 강제혁의 멱살을 쥐어 당겼다.

“나도 네 면상 보고 싶진 않았어. 근데 어차피 이 집, 너 필요 없잖아. 팔자. 아버지한테 줘. 요긴하게 쓸게. 돈 못 주겠으면 이거라도 줘봐.”

욕심에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구역질이 났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종이를 눈앞에 들이대며 ‘아버지’를 운운하는 남자가 끔찍했다. 대체 언제부터 그곳에 숨어있었던 건지. 결국 이 집을 원했던 것이다.

“여기 서명해. 이 집이랑 부지 다 나한테 넘긴다고. 그 정도는 줘야 내가 네 눈앞에 안 나타나지.”

그가 바라는 것은 아주 명확하고도 지저분했다. 저 서류가 법적인 효력을 지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를 이렇게 묶어두고 협박하는 남자에게 순순히 원하는 것을 내어주고 싶진 않았다.

“그냥 죽여.”

아주 오래된, 처음부터 바라던 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아주 어렸던 시절부터 밤마다 속으로 되뇌던 낡은 소원을 입으로 뱉어냈다. 너 같은 것만 아니었으면 나는 이 엿 같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을 텐데.

“재밌는 소리를 하네. 우리 아들이… 애비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죽이라고!”

“아무래도 부자지간의 회포를 좀 풀어야겠다.”

술 냄새가 코앞에서 역하게 풍겼다. 남자가 바닥에 나뒹굴던 각목을 고쳐 잡았다. 본격적인 폭행의 시작이었다.

***

붙잡힌 손목이 욱신거렸다. 얼어붙은 뺨에 무거운 시선이 고였다. 시간이 그대로 멈춘 것만 같았다. 오갈 데 없는 눈동자를 다른 곳으로 돌리고 싶었지만 저를 똑바로 보는 김산을 도무지 피할 도리가 없었다.

“…선배.”

“형이라고 부르랬잖아. 몇 번이나.”

낮게 침전된 목소리는 이제까지 김산에게서 언뜻 보았던 강압적인 모습과는 농도가 달랐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서하는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꿈일까. 하지만 꿈이라도 반가운 꿈은 아니었다.

“이러지 마세요.”

“뭘 이러지 마. 너 이런 거 좋아하잖아.”

손목을 틀어쥔 김산의 손이 억센 탓에 서하의 손은 오히려 희게 질리고 있었다. 머리가 멍했다. 갑작스럽게 변모한 김산의 태도가 도리어 제 추한 진실을 까발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선배!”

“나도 할 수 있어. 나라고 못 할 줄 알아?”

영문을 알 수 없는 외침과 함께 김산이 서하의 옷을 다짜고짜 벗기기 시작했다. 대체 뭘 증명하려고 하는 건지 추측할 새도 없이 서하가 제 옷을 잡아 벗기는 김산을 만류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바라고 있잖아. 누구든 좋은 거 아니었어? 아니, 너 나한테 그런 생각한 적 단 한 번도 없었어?”

말문이 막혔다. 서하가 순간적으로 굳으며 손을 가늘게 떨었다. 술기운과 더불어 들켰다는 생각에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김산이 서하의 몸을 벽 쪽으로 밀었다.

그래, 김산을 상대로 수음했다. 수음뿐만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김산을 재료로 몇 번이고 자신을 학대하고 아래를 들쑤셨다. 그가 때려주길 바라면서. 멍하니 충격에 빠진 서하를 내려다보던 김산이 그런 서하의 어깨를 핥아 올리곤 이로 세게 깨물었다.

“아…!”

뱃속을 달구는 진한 통증에 서하가 짧은 신음을 뱉으며 몸을 떨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통증이 몹시 달고 외설스러웠다. 입술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른 곳에도 잘게 잇자국을 남기는 애무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성적 흥분인지 두려움인지 알 수 없는 것이 서하를 괴롭혔다.

“읏, 선배, 제발…….”

“강제혁 생각 같은 거 안 나게 해줄게. 네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줄게. 나도 할 수 있어.”

김산 역시 조급해보였다. 속수무책으로 벗겨진 옷가지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수치심에 달아오른 몸뚱이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이런 와중에도 흥분하다니. 인간 이하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수일 간 강제혁에게서 방치된 몸은 그로 인해 음란하게 변해버린 채였기 때문에 오히려 독이 되었다. 거칠게 두 손을 속박하고, 우악스레 다리를 벌리는 김산의 모습은 분명 지난 10년 간 서하가 꿈속으로 바라던 것이긴 했다.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맞고 싶어 근질거리는 살덩이가 우스웠다. 자꾸만 숨이 차는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때, 속옷을 벗기던 김산이 어이없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그 미친 새끼. 너한테, 이딴 짓도 하디?”

느린 호흡과 분노에 찬 눈이 서하를 꿰뚫을 듯 저몄다. 억지로 벌려진 다리 사이에 투명한 실리콘 정조대가 제 시야에도 들어왔다. 서하가 떨림이 멈추지 않는 손으로 그것을 애써 가렸다.

“…보지 마세요.”

“안 보려고 해도 보여.”

김산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이런 건 상상하지 못했겠지. 서하가 망가진 실소를 터트리며 김산을 밀어냈다. 이제 와서 부정해봤자 뭐가 변할까.

“인정할게요. 선배 상상하면서 자위했어요.”

거친 척, 일부러 아무렇게나 서하의 몸을 훑어 내리던 손이 멈칫하고 굳었다. 이제는 오히려 김산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서하의 목소리가 서늘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질끈 쥐어진 김산의 주먹에 핏줄이 짙게 섰다.

김산은 무슨 생각을 할까. 예전엔 실수라도 이런 고백을 하는 자신을 상상하게 될 때면 애써 잠들려 노력했다. 그때의 김산은 저를 경멸할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지금 이런 고백을 하면서, 서하는 김산의 얼굴이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남의 의지대로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강제혁을 기다리다 죽겠다는 결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저 분명해졌기 때문에.

“이제 아니에요. 역겹다고 패고 싶으시면 차라리 패세요. 저 선배랑 이런 짓 못 해요. 그러니까, 제발 그만 하세요…….”

서하가 메마른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김산이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런 서하를 마주 봤다.

“강제혁이 좋아서? 너 걔 좋아해?”

믿고 싶지 않다는 것 같은 말투였다. 가까이에서 마주한 김산의 얼굴은 조금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어있었다. 엉망진창이다. 헐벗은 채로 이런 질문을 받다니. 강제혁의 질문이 다시금 떠올랐다.

- 나 좋아해요?

팽팽히 조여졌던 긴장이 풀어지자 서하가 벽에 머리를 기대며 한숨을 느리게 내쉬었다.

“…선배 앞에서 말 안 할래요.”

씁쓸한 웃음과 함께 서하가 대답을 미루었다. 인정하기 싫어도 제 답이 가까이 왔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순간이었다. 강제혁이 제게 질린대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

투둑, 툭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둔탁하게 울렸다. 멍하니 굳어있는 김산을 두고 옷을 겨우 걸친 서하가 창밖에 내리는 비를 가만히 응시했다. 유리창에 떨어지는 빗줄기는 굵었지만 세차게 내리진 않았다. 불규칙적으로 소음을 자아낼 뿐이었다. 조금 습해진 방 안의 공기가 영 낯설었다. 원래는 김산을 보내고 씻은 후에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계획이 완전히 뒤틀어졌다. 결론을 도출했으니 행동을 취해야 할 때였다.

강제혁이 아니면 안 된다. 그 사람을…… 좋아한다. 빌어먹게도. 켜켜이 쌓인 마음이 어느새 저를 잠식하고 있었다.

10년 간 그리던 김산의 손길에도 차게 굳은 마음은 흐트러지질 않았다. 서하는 서랍을 열고 새 속옷을 꺼내 다리를 끼웠다. 김산의 손에 의해 벗겨진 옷들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속옷을 추켜올렸을 때, 정조대가 걸려 어쩐지 민망함이 짙어졌다. 망할 놈의 좆. 발기가 가라앉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이게 있어서 더 흥분한 것 같기도 하고. 깨물린 어깨가 몹시 쓰라렸다.

“…강제혁한테 갈 거야?”

어느새 서하를 바라보고 선 김산이 건조한 낯으로 물었다. 술기운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부터 취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김산의 질문은 직설적이었고 서하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곧았다. 서하는 착잡함이 깃든 두 눈을 차마 바로 보기가 힘겨웠다. 강제혁한테 갈 거냐는 물음이 중의적으로 들렸다. 우스웠다. 고백을 묻어두기로 한 일이.

살아있는 감정은 시체가 아니라서, 묻는다고 묻어지지 않는다. 이 간단한 진리를 아주 어렵게 알아낸 것이다.

“나는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김산의 지친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서하의 발목을 붙잡았다. 자정을 넘겨 새카맣게 물든 밤하늘이 음울하게만 느껴졌다.

“서하야, 지금 비 오잖아. 비가 오는데, 가야겠어?”

붙잡는 말이 한없이 애달팠다. 김산은 서하와 강제혁의 자세한 사정을 몰랐다. 서하가 말하지 않았으니까. 어렴풋이 추측만 하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김산의 연락에 응했고, 강제혁의 이름이 나오자 울음을 터트렸으니 대충 차였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어쩌면 그 추측이 맞는지도 모른다. 플레이가 재미없고 김산에 대해 애매하게 구는 제게 질려서, 이젠 버리고 싶어져 도망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한들 따질 자격도 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묻고는 싶었다. 내가 싫어졌냐고. 그럼 이 정조대라도 풀게 해달라고. 그의 허락이 없으면 풀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풀어줄 테니 그만 가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 거기까진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그럼 너무 비참할 것 같았다. 어차피 강제혁이 어디 있는지도, 왜 사라졌는지도 알지 못하니 가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다. 그럼에도 강제혁을 찾아 나서야 한다는 일념은 지워지지 않았다. 거절당해도 좋으니 얼굴을 보고 싶었다. 집에 있을까. 지금 내리는 이 비를 보고 있을까. 가볼 곳은 한 군데밖에 없었다. 이서하는 강제혁에 대해 아는 게 없었으니까. 오로지 그의 집뿐이었다.

“…형이 데려다 줄게.”

차 키를 든 김산이 서하의 앞을 가로막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김산의 이마를 반쯤 가리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저를 몰아세우던 위압감은 사라진 채였다. 상기된 낯에 자욱했던 욕정이 가시자 드러난 건 씁쓸함과 걱정 어린 마음뿐이었다. 원래 이런 다정한 사람이었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술 마셨잖아요.”

“택시 부르면 돼. 같이 가 줄게.”

고집을 부리는 그가 애석했다.

“선배. 저 혼자 갈게요. 그래야 돼요.”

하지만 거기까지 양보하고 싶진 않았다. 강제혁이 그 집에 있건 없건 간에 그 현실을 마주해야하는 건 오롯이 저 하나였다. 홀로 그곳에 서고 싶었다. 강제혁에게 내쳐졌을 때, 반사적으로 의지할 곳을 없애고 싶었다. 김산은 제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됐다.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젓는 서하를 보며, 김산이 한숨을 내쉬고 마지막으로 물었다.

“알겠어. 그럼, 택시 불러다 주는 것까진 괜찮지?”

그럴 것까지 없다고 사양하고 싶었지만 김산은 완고했다. 다물린 턱 근육은 물러설 기미를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망설임 끝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산이 휴대폰으로 택시를 부르는 사이, 서하는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 주머니에 조심스레 넣었다. 돌려주든지, 아니면…….

“서하야, 내려가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짧은 시간이 이상하게 길게 느껴졌다. 둘 사이엔 어떤 대화도 없었다. 아파트를 빠져나와 곧 도착할 택시를 기다리며, 서하는 묻고 싶었던 것을 입 밖에 내었다.

“정말 저랑… 플레이하려고 했어요?”

질문을 던지자마자 조금 후회했다. 뭐가 궁금해서 이런 걸 물어봤을까.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에 대답이 묻히길 바랐다. 택시 한 대가 길가로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못 때리겠더라, 나는.”

조금 허탈한 목소리로, 김산이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는… 너 절대 못 때려. 서하야.”

어깨를 쓰다듬는 손이 다정하고 따뜻했다. 서하가 아프게 웃어보였다. 결국 그게 그의 패착 요인이었다. 설탕처럼 달디 단 다정함은 이서하가 원하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애초부터 그는 서하를 가질 수 없었다.

***

발치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콘크리트 바닥을 조금씩 진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버스가 몇 대나 지나가는 동안 어린 남자아이는 도로에서 한순간도 눈을 떼지 못했다. 아이는 제법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그리고 울지 않았다. 그렇기에 누구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만약 아이가 더러운 옷을 입었거나 울고 있었다면 시선을 받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이는 울지 않았다. 그러니 그저 보호자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차가운 바닥에 닿은 곳이 온통 시렸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무던히 애를 썼다.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 한구석에 쪼그려 앉은 어린 남자애에게 구태여 시선을 주지 않았다. 시리고 씁쓸한 광경이었다. 아이의 얼굴은 무미건조했다. 그런 아이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거의 몇 시간만의 일이었다.

- 비 오는데.

- …….

교복을 입은 하얀 낯의 소년이 말을 걸어왔다. 흔한 미소 한 점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 샐쭉했다. 동정이나 걱정이 서린 음성이 아니었다. 그래서 오히려 더 친숙했다. 무관심이 익숙한 아이는 동정을 받는 게 더 낯설었으니까.

단정한 이목구비는 어쩐지 흐릿했다. 고등학생 쯤 되었을까. 교복에 대해 알지는 못했지만 제법 큰 키가 중학생 같지는 않았다. 까만 머리카락이 이마를 덮고 내려와 있었다. 유달리 하얀 목덜미가 어린 남자애의 시야에도 대번에 들어왔다.

- 우산 있어?

- 필요 없어요.

- 그칠 때까지 기다리게?

- 가세요.

- …추울 텐데.

대화라고 하기 뭐한 말들이 이어졌다. 아이는 귀찮아보였고, 남학생 역시 의욕적이진 않았다. 툭툭 짧게 뱉는 목소리가 건조하고 평온했다. 남학생이 머뭇거리며 남자아이를 바라보다 손을 내밀었다.

- 다음에 갚아.

- …이름 알아야 갚아요.

- …하.

- 잘 안 들려요.

- 이서하. 내 이름이야.

그렇게 노란 포장지의 사탕을 하나 쥐어준 남학생은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 우산도 아니고 사탕을 주나. 저를 어린아이 취급한다 생각한 아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런 아이의 표정을 보진 못했다. 비닐로 된 껍질을 작은 손으로 뜯자 마찬가지로 노란 사탕이 있었다. 입안에 넣어보니 과연, 레몬 맛이었다.

***

“언제까지 자빠져 잘 생각이야?”

별안간 뺨을 후려치는 구타에 강제혁이 눈을 깜빡였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입안에 남은 달달한 사탕의 잔상이 혈액의 비릿한 맛으로 가려졌다. 꿈을 꾼 것 같았다. 기억에서 사라진 옛날 일. 왜 버스 정류장에서 앉아있었던 건지, 이유조차 희미했다. 언제 잠이 들었던 건지도 기억하기 어려운데 당장 흐릿해지기 시작한 꿈을 되새길 여유 따위는 허락되지 않았다.

“서명은 언제 할 거냐고!!!”

벌써 며칠이 지났다. 남자는 저택 진열장의 술을 몇 병이나 비워댔다. 심심하면 강제혁을 협박했고, 말을 듣지 않으면 주먹을 휘둘렀다. 끼니라고 할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남자가 안주가 없다며 저택 밖으로 나간 사이 강제혁도 기절하듯 잠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래봤자 몇 시간이었다. 어느새 저택으로 돌아온 남자가 강제혁의 얼굴에 명의 이전 서류를 들이밀며 술주정을 해댔다.

“풀어주고나 말해.”

“이 개놈의 새끼가 대가리 굴리네. 너 나 패고 튀려고 그러지.”

도무지 말이 통하질 않는다. 강제혁이 이제는 울리지 않는 휴대폰을 쳐다보며 눈을 감았다. 처음 이틀 정도는 휴대폰이 울렸다. 아마 지금은 배터리가 다 되어 울릴 수 없는 상태겠지. 서하는 여전히 제게 일과를 보고하고 있을까.

의자에 묶인 채 무차별적인 폭행에 노출된 첫날, 이따금씩 휴대폰이 울렸다. 숨을 헐떡이며 저를 후려 패던 남자가 휴대폰을 집어든 것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

- ‘보고 싶어요?’

- …….

- 우리 아들, 여자친구라도 사귄 거야? 이름도 예쁘네. 이서하?

잠금 패턴 때문에 전부 다 확인할 수는 없었을 테지만, 연이어 울린 휴대폰의 메시지가 미리보기로 뜬 모양이었다. 그 짧은 다섯 글자에 강제혁의 눈이 처참히 흔들렸다. 입술을 악 물고 신음을 참아내던 아들의 낯에 서린 미묘한 표정을 캐치한 남자가, 비열하게 웃어댔다.

하지만 ‘여자친구’는 아니었다. 강제혁은 행여나 서하에게 피해가 갈까 애써 차분한 척, 고개를 저었다. 아들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남자가 한심했다. 하기야 남자친구라기에도 이상한데, 차라리 애인이냐고 물었으면 그렇다고 대답을 했겠다. 물론 진짜 대답하진 않았겠지만.

- 네 여자친구한테 사진이나 보내볼까? 남자친구가 개떡이 된 걸 보면 얼마나 슬프겠어. 잠금 좀 풀어봐. 아, 아니다. 경찰에 신고할 수도 있으니 그러면 안 되지.

저급한 웃음을 흘리며 혼잣말을 뱉는 남자는 제정신이 아닌 게 분명했다. 오로지 돈에 대한 욕망으로 눈이 멀어서 이따위 좆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다. 강제혁은 그저 사용인이 올 날을 기다렸다. 어차피 주기적으로 저택을 청소하니 며칠 남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길어도 일주일 정도다. 그 정도는 버틸 수 있겠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그것 말고는 기대할 것이 없었다. 저 서류에 법적효력이 있건 없건 간에 저 짐승만도 못한 남자가 단 한순간이라도 기뻐하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궁금해?”

“그럼, 궁금하지. 네가 얼른 똑똑한 판단을 내려야, 내가 이 좆같은 집을 가질 수 있잖아.”

“꿈도 크네.”

“아, 이 씨팔놈의 새끼가.”

약이 바짝 올라 쌍욕을 뱉는 남자를 보며 강제혁이 참지 못하고 한 마디를 날렸다.

“자꾸 자기 욕을 하네. 등신이야?”

그 말이 매를 벌었음은 분명했다.

***

굳게 닫힌 까만 문이 두려웠다. 초인종을 누르기까지 몇 번을 떨었는지 모른다. 서하가 카디건 주머니를 묵직하게 만드는 목줄을 손에 쥐고 숨을 가다듬었다. 망설임 끝에 초인종을 꾹 눌렀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도 될까. 여기까지 온 마당에 그대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서하가 어렴풋이 기억하는 번호를 꾹꾹 누르자 짧은 울림과 함께 현관문이 열렸다. 집안은 고요했다. 한기가 스민 현관을 지나 거실이며 서재, 침실과 작은 방들을 전부 훑어봤지만 새까만 실내엔 인기척조차 없었다.

“어딜 간 거야…….”

차 키도 없었다. 조금 불안해진 서하가 뒤늦게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진즉에 전화를 해봤어야 하는 건데. 뒤늦게 강제혁에게 전화를 걸어봤지만 전원이 꺼져있다는 기계적인 음성이 되돌아왔다. 단순히 배터리가 나간 걸까.

서하는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해가 뜰 때까지 강제혁을 기다렸다. 강제혁의 휴대폰은 내도록 켜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몇 번이나 전원이 꺼져있다는 응답을 받았을까, 온기 한 점 없는 침실에 누워 베개에 코를 묻었다. 희미해진 강제혁의 체취가 서글픔과 동시에 뭔가 이상했다. 그제야 덜컥 겁이 났다. 잠깐 어딘가 다녀온다고 말했던 강제혁이 사라진지 닷새째였다. 그동안 집에도 오지 않은 거라면?

서하의 손끝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왜 나는 그런 생각은 해보지 못했을까. 그때 싸늘한 눈초리를 받더라도 물어볼걸. 어딜 가는지 정도는 물어봐도 됐을 텐데. 더 미치겠는 건, 제가 강제혁에 대해 아는 게 이 집과 무의미해진 전화번호뿐이란 사실이었다.

다른 것도 궁금했었다. 왜 모범적인 삶에 강박을 가지게 됐을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머니는 계시는지, 아버지와 많이 닮았는지, 어린 시절엔 어땠는지. 돌이켜보면 모두 궁금했다. 다만 제가 그런 질문을 받으면 곤란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묻지 못했다. 그리고 물어본다 해도, 알려주지 않을 것 같아서 지레 겁을 먹고 묻지 않았다.

한심스러웠다. 결국 거절이 무서워서……. 거부당하는 게 무서워서 손 한 번 내밀어보지 못했던 꼬마로부터 한 치도 성장하지 못했다.

“나이만 처먹었네…….”

방법은 단 하나였다.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거기에 걸어야 했다. 재고 따질 여유 같은 건 없었다. 미친 짓이라고 욕을 먹더라도 뭐라도 해야 했다.

***

점심시간의 사범대 행정실은 다행히 한산했다. 평소 안면을 트고 지내던 장 선생만이 유일하게 잔뜩 날이 선 표정으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서하가 대학원 석사 시절 조교직을 맡았을 때 자주 보던 교직원이지만 약간 불안했다. 그 시절 척을 진 사람이 제법 되었기 때문에, 장 선생도 그중 하나이진 않을까 싶었던 탓이다. 서하는 두방망이질을 치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장 선생 곁에 다가섰다.

“행정실 점심시간입니다. 1시 넘어서 오세요.”

장 선생의 싸늘한 목소리에 서하는 긴장감을 느끼며 숨을 몰아쉬었다. 거절당할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선생님, 많이 바쁘신가 봐요.”

“어, 이 선생님!”

제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밝아지는 표정에, 서하가 겨우 한시름 내려놓았다. 아직 이 사람한테는 싸가지 없는 소리 안 했나보다. 잘 했다. 과거의 나…….

“무슨 일이세요?”

“아, 다름이 아니라… 제 수업을 듣는 학생이 사범대 학생인데요.”

말을 꺼내는데 자꾸 목구멍이 좁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제대로 먹혀야 할 텐데.

“이번에 교양하신다구 하셨죠. 맞다. 사범대 학생은 왜요?”

“그 학생한테 수업 도우미를 맡겼는데요. 제 자료가 든 USB를 그대로 가져갔는데, 제가 거기 든 자료로 다음 주 학회에서 발표를 할 예정이거든요. 그런데 그 친구가 지난 주 수업부터 나오지를 않네요.”

“세상에.”

강제혁에게 미안한 일이었지만 별 다른 구실이 떠오르질 않았다. 그래서 그의 학적 주소를 알아낼 방법으로 강구한 방책이 바로 이것이었다.

“하필 다른 데 백업도 안 했고, 그 USB로 지금부터 작업해도 빠듯하게 마감 맞출 텐데 전화기도 꺼져있어서요.”

서하가 혼신의 힘을 다해 착잡한 목소리를 냈다. 중간중간 한숨소리도 섞었다. 제가 설정한 상황이었지만 감정이입을 하자 강제혁이 천하의 몹쓸 놈처럼 느껴졌다. 학회 발표를 앞둔 박사 과정생의 USB를 가지고 사라지다니…….

“아, 욕 나오네요. 뭐하는 놈이래.”

다행히 연기가 통한 것인지, 장 선생이 저보다 더 구겨진 얼굴로 기가 막혀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게 서하는 제 모습을 보지 못하니 몰랐지만 하룻밤을 꼴딱 새워 창백하게 질린 모습이 퍽 안쓰러웠기 때문이다. 눈을 내리깔고 한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서하는 몹시 불쌍하고 처연해보였다.

“그런데 그게 학생 개인정보라…….”

서하의 고충을 십분 이해한 장 선생이었지만 조금 난처해하며 말을 미루었다. 만약 그 학생이 문제 제기를 하면 큰일로 번질 여지가 충분했다. 서하도 이 부분 때문에 행정실을 찾아오기까지 수없이 고민했었다.

“선생님,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는데 부탁드립니다. 난처하신 거 알아요. 하지만 아시잖아요. 저 진짜 미치겠어요. 제발요.”

서하가 파리한 낯으로 거의 무릎이라도 꿇을 기세로 매달리자 장 선생도 측은지심이 이루 말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서하가 눈물을 쥐어짜냈다. 평소라면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테지만, 사안이 사안이니 만큼 최선을 다했다.

“…잠시만요.”

“선생님!”

“학생 이름이 뭐라고요?”

서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범법이지만, 다행히 사유가 과히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강제혁 학생이요. 체교과예요.”

그의 이름을 내뱉자 벅찬 느낌이 들었다. 부디 학적 주소는 본가 주소가 나와야 할 텐데. 그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거라면, 적어도 가족은 알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과연 몇 번의 클릭과 키보드를 두드리는 행위로 서하의 고민은 짧게 끝났다.

“여기요. 학교에서 좀 머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꼭 보답할게요.”

“뭘요. 문제 안 됐으면 좋겠네요. 저 진짜 이 선생님 위해서 하면 안 될 짓 하는 거예요.”

“감사해요. 제가 밥 살게요.”

“아이, 뭘 또. 나중에 커피나 한 잔 해요.”

“감사합니다. 생명의 은인이세요.”

내내 창백했던 서하의 얼굴이 조금 밝아지자 장 선생도 만족스러운 듯 웃어보였다. 직접 종이에 자필로 강제혁의 주소를 적어준 장 선생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서하가 행정실 문을 나섰다. 주소만 봤는데도 가슴이 아렸다. 우스운 일이었다.

***

서하는 학교를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아타고 주소를 읊었다. 택시 기사는 별다른 말없이 주행을 시작했고 차는 익숙한 풍경을 지나 낯선 길로 빠르게 접어들고 있었다.

사실은 정말 차인 걸지도 모른다. 강제혁은 과거에 그랬듯 서하가 알 수 없는 곳에서 다른 섭을 안고 있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만약 그렇다하더라도 차라리 제 눈으로 목격하고 싶었다. 그러고 나면, 심정은 처참할지언정 그가 무사하다는 사실에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급한 일인가 봐요.”

“아…….”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뭔 지는 몰라도 별 일 아닐 거예요.”

인상 좋은 중년의 기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서하를 달래주었다. 낯선 이에게 위로를 받으니 제 꼴이 얼마나 처참한지 갑자기 상기되었다. 손을 떨고 있었다. 버림을 받는 게 무서워서? 모르겠다.

“음료라도 한 병 줄까요?”

정지 신호에 걸린 사이, 기사가 비타민 음료를 하나 건네주었다. 왜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 건지. 기억 속 어머니의 얼굴과는 전혀 닮지 않았음에도 기분이 묘해졌다.

“우리 아들 같아서.”

수더분하게 웃어 보이며 중립기어를 주행기어로 바꾼 기사가 부드럽게 액셀을 밟았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여기 뭐가 있나. 되게 외졌네요.”

“아…….”

저도 초행길이니 뭐라 대답할 말이 없었다. 택시 기사의 말대로 종이에 쓰인 주소지는 일반적인 주택가와 동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잘 포장된 도로였지만 주변은 전부 울창한 숲이었다. 덜컥 불안감이 들었지만, 이윽고 담장이 높은 커다란 집이 나타났다.

“거스름돈은 안 주셔도 돼요.”

마음이 급해진 서하가 5만 원권을 내밀고 그대로 차에서 내렸다. 택시 기사는 몹시 당황한 듯했지만 서하에게 그런 것은 보이지 않았다. 집 앞에 덩그러니 주차된 까만 마세라티는 강제혁의 것이 분명했다. 서하는 채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비타민 음료를 꽉 쥐었다.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정적을 깼지만, 서하의 귓전엔 제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뿐이었다. 커다란 대문 앞에 초인종이 있었다.

강제혁이 이곳에 있다. 싸늘한 눈초리를 받을지도 모른다. 연락을 받지 않으면 이대로 끝난 줄 알아야지, 징그럽게 여기까지 찾아왔냐고 쌍욕을 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좋았다. 그저 멀쩡한 얼굴만 확인할 수 있다면.

거멓게 물든 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기십 년 전 보았던 도로에 번진 핏자국이 일순 떠올랐지만, 적어도 차가 멀쩡히 있으니 그런 걱정만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숱한 고민을 접어두고, 서하가 초인종을 눌렀다. 조금 거칠고 큰 초인종 소리가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이 문 너머의 건물 안에, 강제혁이 전과 같은 얼굴로 서 있길 바랐다. 왜 왔냐고 면박을 들어도 좋으니 제발 멀쩡한 모습이기를…….

“누구요?”

예상했던, 혹은 예상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중년 남성이 비척거리며 돌계단을 타고 내려와 대문을 열어젖혔다. 거칠게 열리는 문이 불쾌한 마찰음을 냈다. 남자는 서하와 키가 비슷했지만 어쩐지 강제혁과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난 수염에 가려진 얼굴이긴 했지만. 아버지일까.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는 제게 말없이 가족을 보러 온 걸까.

“안녕하세요, 혹시 여기가 강제혁… 학생 집인가요?”

서하는 침착한 목소리로 예의에 어긋나지 않게 묻고자 애를 썼다. 뒤늦게 제 몰골이 걱정되어 최대한 단정해보이고자 한 탓이다. 그런 서하를 아래위로 훑어본 남자가 불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맞는데, 누구십니까?”

조금 꼬부라진 발음으로 묻는 말에 서하가 준비해두었던 답안 중 하나를 꺼냈다.

“강제혁 학생이 다니는 대학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요. 이서하라고 합니다. 혹시 강제혁 학생 집에 있을까요?”

“이서하?”

이름을 되뇌던 남자의 표정이 일순 팍 구겨졌다. 그리고 어쩐지 경멸이 담긴 눈으로 서하를 야멸차게 바라보며 어깨를 툭하고 밀었다. 돌변이라기엔 뭐하지만 갑작스레 적대적으로 변한 그의 태도에 서하가 움츠러들었다.

“대학에서 수업을 하면 교순가? 요즘 교수가 이렇게 어려? 기생오라비 같이 생겼네. 새끼가.”

제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틱틱 쏘아대는 모습이 이상했다. 가까이 서니 술 냄새가 더욱 진하게 풍겼다. 그제야 노숙자에 가까운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이상했다. 그리고 그런 남성의 기색을 살피던 서하의 눈에 몹시 찜찜한 단서가 들어왔다. 소매 끝자락에 묻은 검붉은 액체. 말라붙은 혈액 같았다.

“우리 아들이 교수한테 돈이라도 떼어 먹었나.”

“네?”

“아니 집까지 찾아오니 말입니다. 영 이상해서.”

픽픽 웃음소리를 내며 비꼬던 남자가 갑자기 서하에게로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섰다. 술 냄새가 무척 역하게 느껴질 만한 거리가 되었다.

“면상 한 번 곱상하네.”

“무슨,”

“교수가 학생한테 그런 문자를 보내면 쓰나. 그것도 남교수가 남학생한테. 응?”

그 말에 서하가 싸늘하게 굳었다. 강제혁에게 보낸 문자들이 떠올랐다. 영문을 알지 못하고 남자의 의중을 살피던 서하의 얼굴이 확연히 굳는 모습에, 남자가 거칠게 폭소하기 시작했다.

“고소당하고 싶어요? 제자한테, 응? 아무리 시대가 변했대도 그렇지, 미친 새끼가. 돈 좀 있나보지? 어딜 사내새끼들끼리 추접스럽게…….”

“…강제혁 어디 있습니까.”

술에 취한 남자. 말라붙은 피. 문자의 내용. 제 이름을 듣자마자 돌변한 적대적인 태도……. 단서는 결코 적지 않았다. 서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과대망상이라도 좋았다. 차라리 그러길 바랐다.

“대학 교수면 이런 거 잘 알겠네. 아들놈이 뒈지면 재산은 애비 몫이 되겠지?”

술에 절여진 목소리로 킬킬거리며 읊는 내용이 끔찍했다. 강제혁의 안위가 불확실했다.

***

느닷없이 초인종이 벼락같은 소리를 내며 시끄럽게 울렸다.

“아이, 씨팔! 깜짝이야!”

방금 전까지 술에 취해 코고는 소리를 내며 잠을 자던 남자가 놀라 바닥에 자빠졌다. 우스운 꼴이었다. 누가 온 걸까. 이 집은 찾아올 손님이 있을 리 없는 유령의 집이었다. 제가 그렇게 만들었다. 주택가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곳은 찾아올 사이비도 없을 텐데.

지금 강제혁은 온전한 정신일 수가 없는 상태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닷새째였다. 제대로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묶인 채로 불규칙적인 폭행에 노출된 게.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고꾸라졌을 것이다. 강제혁이 흐린 눈앞을 다잡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사용인은 열쇠가 있으니 초인종을 누를 이유가 없다.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머리가 멍했다.

“…뭐야, 저 희멀건 샌님은.”

인터폰을 확인한 남자가 툴툴거리며 밖으로 나섰다. 이대로 죽으려나. 어쩌면 저 남자는 자신을 죽이고 재산을 독점하려들지도 모른다. 뉴스에 10초가량 보도되고 지나갈 만한 사안이었다. ‘비정한 아버지, 돈 때문에 20대 아들 살해’ 이런 헤드라인이겠지. 아무도 관심 없을 것이다. 서하는 뭘 하고 있을까. 저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루만 비운다고 했는데, 시간이 제법 흘렀다.

당신은 나를 기다리긴 할까. 쉽게 잊겠지. 이대로 죽어도 좋으니 죽기 전에 서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누군가 들으면 웃을지 몰라도 지금의 강제혁으로선 절실한 바람이었다.

***

“강제혁 어디 있습니까?”

“알아서 뭐 하게?”

서하는 최대한 침착하려 애를 썼다. 비스듬히 선 채 무의식적으로 문을 가로막는 몸짓이 남자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을 알려주었다. 간단한 몸짓 언어였다. 서하는 가만히 방금 전 보았던 것들을 떠올렸다. 주차장을 보유한 주택임에도 강제혁의 차는 바깥에 주차되어 있었다. 그건 강제혁이 이 집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 없었거나,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없었다는 걸 의미했다. 혹은 둘 다였거나.

“비키세요.”

“뭐? 비켜? 이 새끼들이 사람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비키라고 했습니다.”

서하가 남자를 노려보며 말했다. 숨이 자꾸 거칠어졌다. 하지만 남자는 비킬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세를 고쳐 잡으며 서하를 안으로부터 차단하고 있었다. 혹여 서하가 뭔가 보기라도 할까봐.

어깨 너머로 보이는 것은 잘 정돈된 앞마당과 커튼이 쳐진 창문이었다. 반쯤 열린 현관이 눈길을 끌었다. 저 안에 강제혁이 있을 것이다. 서하가 빠르게 휴대폰을 꺼내 112를 눌렀다. 경찰을 불러야 했다. 신호음이 가기 무섭게 서하가 남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이 씨팔놈이 뭐 하는 거야, 지금!”

경찰서라는 단어 하나에 남자가 언성을 높이며 쌍욕을 뱉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꼴이었다. 서하가 날아드는 주먹을 가로막았다. 팔목이 아렸지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손에 쥐고 있던 비타민 음료가 파열음을 내며 바닥에 흩뿌려졌다.

“여기 술 취한 남자가 행패를 부리고 있어서요. 주소는…….”

여기까지 오는 사이 수없이 되뇌다 외워버린 주소를 빠르게 뱉었다. 그때 남자가 다른 손으로 서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휴대폰이 바닥에 거친 소음을 내며 떨어졌다. 액정이 깨진 것 같았다.

“이 개새끼가, 빨리 취소해!”

이성을 상실한 모양인지 남자가 말 같지도 않은 협박을 해댔다. 서하의 옷깃이 무참하게 구겨졌다. 헛웃음이 나왔다. 지금 이 순간 서하에게 중요한 건 옷 따위가 아니었다. 남자의 태도와 몇 가지 단서들이 서하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강제혁 어디 있어?”

“이 개새끼가 어디 눈깔을 부릅뜨고…….”

“어디 있냐고!”

남자는 하얀 낯의 서하를 무시했다. 노상 실내에서 머무는 탓에 햇볕에 노출되지 않아 희멀건 낯은 샌님의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러니 서하의 멱살을 쥐고 비열하게 웃으며 술 냄새를 풍겨댈 뿐이었다. 하지만 서하는 남자의 기대처럼 비리비리하지 않았다. 웨이트 트레이닝이 취미인 마당에 술 취한 50대의 남자를 이기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서하가 잡힌 멱살 그대로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들이받았다. 꽤 폭력적인 타격음이 터졌다.

“어억!”

제 머리도 아팠지만 그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술기운에 비틀거리는 남자의 명치를 발로 걷어차고 주저앉은 남자 위에 올라타 주먹을 날렸다. 준비했던 것처럼 재빠른 몸짓이었다. 1:1로 몸싸움을 하는 일은 드물었으나 아예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남자가 서하의 멱살을 움켜쥐고 옆구리를 때려댔지만 서하는 이를 악물고 참아내며 주먹을 내질렀다.

“강제혁 어디 있냐고, 네 번째, 후, 묻고… 있습니다.”

“이 씨, 씨팔놈이…! 어억, 큭!”

세게 쥔 뼈마디에 피가 묻어나왔다. 남자가 입안에 고인 피를 서하의 얼굴에 퉤하고 뱉었다.

“윽…!”

혈액과 타액이 눈에 들어간 탓에 서하가 잠시 주춤했다. 자세가 전복되고 남자가 거친 손으로 무게를 실어 서하의 목을 졸랐다.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숨이 막히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보통 사람이라면 목을 졸리는 일이 없을 테니 당황했겠지만 브레스 컨트롤에 익숙해진 서하는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침착하게 무릎을 세워 남자의 하반신을 가격할 따름이었다.

“아악!!!”

애매한 부위를 때린 것 같은데, 아니었나보다. 아니면 남자의 것이 애매한 위치에 있거나. 아무튼 유효한 타격이었던 모양인지 남자가 고통스럽게 신음하기 시작했다. 서하는 바닥을 구르며 더러운 신음을 흘리는 남자를 두고 그대로 일어나 현관을 향해 달렸다. 기왕이면 불알이 터졌으면 좋겠다. 남자에게 맞은 부분이 꽤 아파 뛰는 게 힘겨웠지만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강제혁의 안위를 제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짧은 순간 최악의 상황까지 상상한 서하의 얼굴은 희게 질려 있었다.

반쯤 열린 현관이 지옥문 같았다. 거세게 뛰는 심장은 몸싸움 탓인지, 아니면 뜀박질 탓인지, 그도 아니면 자꾸만 엄습하는 짙은 불안감 탓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서하가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흙먼지로 엉망이 된 카펫이 보였다. 신발 자국은 아마 그 남자의 것 같았다. 이 집에 살고 있던 게 아니란 사실이 자명해졌다. 길게 이어진 복도를 지나 걷자 열린 문 안쪽에 어떤 인영이 보였다. 실루엣이 몹시 눈에 익었다. 의자에 앉아있는, 아니 묶여있는 모습이었다.

“강제혁 씨…….”

서하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혈흔이 묻은 이마와 언뜻 보기에도 만신창이가 된 몸이 보였다. 핏자국이 군데군데 말끔했을 정장을 물들이고 있었다. 제가 이름을 불러도 고개를 들지 않는다.

서하가 불규칙적인 호흡을 내뱉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 갈수록 숨을 쉬는 게 어려웠다. 혹여 그가, 숨을 쉬지 않을까 무서웠다. 구급차를 불러야 하는데, 휴대폰이 없었다. 서하의 회색 눈동자가 정처 없이 떨렸다. 미동조차 없는 그가 너무 무서워서. 도로 위에 낭자했던 피가 떠오른다.

“아…….”

더는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제대로 소리를 내어 이름을 부르고 싶은데, 그래도 그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어떡하나 그게 너무 두려웠다. 그렇게 강제혁의 발치에 다다랐을 때에야 아주 미약하게 숨을 쉬는 그의 움직임이 보였다. 방이 너무 어두운 탓이다. 조금만 더 밝았어도 금세 알 수 있었을 텐데. 바깥은 정오의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데 저택 안은 어둡고 습했다.

서하가 차게 식은 손을 뻗어 강제혁의 뺨을 만졌다. 온기가 느껴지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본 날보다 마른 뺨이 가슴을 거칠게 저미고 들었다. 왜. 어째서. 짧은 물음이 연이어 속에서 터졌다.

그때, 멀리서 경찰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강제혁이 감았던 눈을 잘게 떨며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서하에겐 크나큰 파동이었다.

“…….”

강제혁의 뺨을 만지던 서하의 손이 살짝 떨어졌다. 눈을 뜬 강제혁이 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어두운 와중에도 서하의 얼굴을 확인한 강제혁이 찢어진 입가로 작게 웃었다. 끔찍한 악몽을 꾸고 깨어나니 서하가 있었다. 허상이라도 좋았다.

“이서하…….”

메마른 목소리가 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서하의 눈에서 고여 있던 눈물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방울진 그것은 꽤 묵직한 무게로 바닥까지 한 번에 추락했다. 툭, 투둑 빗소리를 닮은 소리였다.

“…보고 싶었어.”

강제혁이 중얼거린 말은 서하가 지난 며칠간 상상했던 것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달디 단 말이었다. 모진 말로 밀어낼 것이라 생각했던 서하였다. 그렇게 생각해야만 어떤 말을 들어도 상처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갈라진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고, 보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가 뜨거웠다. 견디기 힘들 만큼.

뭐라고 대답을 해야 되는데, 속에서 터진 울음 탓에 목소리가 쉬이 나오질 않았다. 복잡하게 엉킨 감정들이 해일마냥 넘실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태산 같았는데, 손에 잡히는 게 없었다. 이런 곳에서 뱉어내기엔 너무 깊은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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