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이무기의 시험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전에 공지한 답사 리포트는 다다음주까지 제 메일 주소로 보내 놓으세요.”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게 일주일이 흘렀다. 서하는 강제혁에 대한 생각을 잊기 위해 운동으로 몸을 혹사시켰다. 하지만 나날이 돋아나는 하체의 검불을 제모할 때면, 저절로 그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다. 보고 싶었다. 그럼에도 차마 먼저 연락할 수 없었다. 대화는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허탈했다. 하루가 머다 하고 매질을 당하던 엉덩이에 든 멍이 점차 사라지고 있었다. 홀로 자위를 할 기분조차 나질 않았다. 아무렇지 않게 강제혁 쪽에서 연락을 줄 것만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제집에 들이닥친대도 좋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일주일이 다 되어가자 만나는 것이 더 두려워졌다. 뻔뻔하게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초조함만 진해졌다. 그렇다고 강사가 수업을 쨀 수도 없고. 결국 학교에 도착했다. 강제혁이 들어오는 것을 볼 자신이 없어 출석체크까지 건너뛰고 모니터만 응시하며 기계적으로 수업을 이었다. 서하가 가방을 정리해서 나가려는 때에, 눈앞에 큰 그늘이 졌다. 익숙한 그림자였다. 심장이 방망이질을 치기 시작했다.
“다른 수업은 단체로 답사 간다던데요.”
리포트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강제혁의 목소리를 못 알아챌 리 없는 서하가 대놓고 굳었다. 이렇게 말을 걸 거라곤 생각해 보지 못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학, 생들의 자율성을 존중하려고요.”
제대로 말하고 있긴 한 건지 유독 목소리가 엉망인 것 같았다. 그가 어떤 의도로 말을 건 것일까 확신할 수 없어 기어들어가듯 대답하고 말았다.
“같이 갈 사람이 없는데, 강사 선생님한테 같이 가달라고 하면 부정행위인가요?”
얄궂은 질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질문을 빙자한 강제였지만.
“…부정행위는 아닐 거예요.”
표정을 정리한 서하가 고개를 들고 답했다.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처럼. 눈이 마주치자 강제혁이 언뜻 잔인해 보이는, 그리웠던 미소를 지어주었다. 입술에 머무는 눈동자가 유독 뜨거웠다. 키스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끝내 그의 입술은 제게 닿지 않았다. 기나 긴 침묵이 이어졌다.
***
리포트의 주제는 간단했다. 한국미술과 관련된 전시를 보고 감상문을 써오는 것이었다. 실제로 답사를 다녀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인증 사진도 첨부하라고 했다. 아마 다른 학생들은 친구나 연인을 동반해서 갈 것이다. 다른 수업에서는 단체답사도 진행하는 걸 알았지만, 서하는 떼거지로 학생들을 몰고 다니는 게 적성에 맞지 않아 자율로 돌렸다. 결국 그 덕에 강제혁과 단둘이 박물관에 오게 됐지만.
행여나 같은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목격 당할까 봐, 서하는 일부러 추천목록에 없는 전시장으로 향했다. 날씨가 유독 맑았지만 박물관 앞은 한산했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 것 같았다.
“일찍 왔네요.”
“방금 도착했어요.”
“지하철 타고?”
“네.”
“밥은.”
“아침에 커피 한 잔 했습니다.”
“그게 밥인가 봐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대화가 이어졌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서하는 마음 한구석이 싸했지만, 굳이 언급해서 해결을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저 묻어뒀다. 강제혁은 제가 커피로 식사를 때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근처에서 갑자기 식사를 하는 것도 어정쩡했다. 결국 서하가 먼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전시보고 같이 밥 먹을래요?”
“그럼 이서하 씨는 나랑 밥 안 먹을 생각이었어요?”
돌연 어이없다는 반응이 돌아와 서하가 뺨을 긁었다. 이게 아닌가. 너무 어려웠다.
“기가 막히네.”
“…죄송,”
“죄송할 일은 아니고.”
그럼 왜 면박을 줘. 서하가 속으로만 불평했다. 기껏 밥 먹자고 먼저 말 꺼낸 건데, 용기 낸 게 무색해졌다.
“들어가죠.”
서하는 등을 떠미는 손에 밀리듯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와중에도, 지난 주 이후의 첫 접촉에 묘하게 긴장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좀 더 함부로 만져주었으면 좋겠다. 제 3자가 들으면 기함할 만한 생각이었다.
***
전시는 꽤 괜찮았다. 중간중간 강제혁이 질문을 던졌고, 서하는 성심껏 대답을 해주었다. 입술을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지긴 했지만, 서하 역시 강제혁의 얼굴을 흘깃흘깃 살폈기 때문에 뭐라 할 자격은 없었다. 그것만 빼면 아주 바람직한 사제지간 같았다. 전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자 배가 고파졌다.
“이만 밥 먹으러 갈까요?”
“…주변에 잘하는 곳 알고 있나 봐요.”
“공부 때문에 박물관이라면 밥 먹듯 다녀서 어쩔 수 없이 알아요. 그리고… 강제혁 씨 배고플 것 같아서.”
문득 데이트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하가 손가락을 꼬물거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그 머뭇거리는 얼굴을 전부 눈에 담은 강제혁은 소리 없이 웃었다.
“가요.”
“오늘은 제가 살게요.”
“아직 먹지도 않은 거 돈 얘기부터 하네.”
“학생한테 얻어먹는 거 불편해요.”
터벅터벅 걸으며 나누는 대화가 평화로웠다. 그와 이렇게 범상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게 새삼 이상했다. 그 전의 만남을 생각하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물론 평화롭다는 건 서하의 생각일 뿐이었다.
“내가 그냥 학생인가.”
낮은 물음이 언뜻 음산하게 들렸다. 최악을 생각하는 쪽이 나으니까, 잠정적으로 관계가 깨어졌다고 생각했던 서하에겐 어쩌면 반가운 질문이기도 했다. 그가 제게 그저 학생이 아니란 증거였으니까. 하지만, 주인이었던 학생을 말하는 거라면? 최악을 상상하는 게 익숙한 사고방식엔 변함이 없었다.
“그죠. 건물주인 학생이죠.”
그래서 서하는 애써 다른 쪽으로 해석해보이며 농담처럼 받아쳤다. 부디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기만을 바랐다. 포커페이스엔 능한 편이었으니 티가 나진 않았을 것이다.
“…차 가져왔는데.”
“가까운 데예요. 차는 다시 가지러 오는 게 나을 것 같아요.”
“…그래요.”
아직까진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서하도 마지막 만남에 대해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걸 알았지만, 관계가 끝난 것을 재확인하는 꼴이 될까 무서웠다. 그래서 더 이 시답잖은 대화에 집중했다. 그와 끝내고 싶지 않았으니까.
***
나무로 된 문을 열자마자 풍경이 예쁜 소리를 내며 손님을 반겼다. 가게 안은 비교적 한적했다. 남자 점원이 안쪽 테이블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분위기가 제법 호젓했다. 실내에 장식처럼 심겨진 대나무를 배경삼아 앉아있는 강제혁의 모습이 퍽 그림 같았다. 한 폭의 동양화 같다고 하면 좀 진부한 감상일 것 같긴 했지만, 남자를 주제로 그려낸 미인도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생선 먹을 줄 알죠?”
“못 먹으면요?”
“아…….”
이 집은 생선 요리로 유명한 한정식집이었다. 생선 알러지가 있을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는데, 생각해보니 별로 좋지 못한 메뉴 선정이었던 것 같다. 깔끔한 요리가 적절할 것 같아 고른 선택지였는데, 강제혁의 취향을 고려하지 않은 게 문제였다.
사실 그가 뭘 좋아하는지 알지도 못했다.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정도는 물었어도 됐을 텐데. 그와 만나서 플레이 말고는 한 게 없다는 사실이 와닿는 순간이었다. 어찌나 난처한지 메뉴판을 들던 손까지 멈출 정도였다. 그런 서하를 보던 강제혁이 미지근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먹을 수 있어요. 장난친 거예요.”
“…그럼 C코스로 2인분 주문할게요.”
아무렇지 않은 듯 대답을 하는 서하였지만, 귀 끝은 만져달라는 것처럼 발갛게 달아올랐다. 강제혁에게 있어선 여러모로 즐거운 풍경이었다. 메뉴를 고르고 찻잔을 채우는 사이, 가볍게 먹을 수 있는 샐러드와 모시조개가 담긴 된장국이 나왔다.
“잘 먹을게요.”
이어진 인사말에 서하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저보다 한참 어린 학생의 ‘장난’에 이처럼 쉽게 넘어간 것이 꽤 민망했다. 서하는 젓가락을 움직여 입안을 가득 채우고 오물대는 것에 집중했다. 강제혁과 겸상한 일이 적지 않은데도 일주일만의 식사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때 일 이후라 그런 건지 무척 어색했다.
그릇이 순차적으로 상을 채우고 빠지길 반복했다. 하얀 전복찜을 입에 넣자 부드러운 식감이 느껴졌다. 좀 싱겁네. 서하가 종지에 간장을 따르고 고추냉이를 담았다. 꽤 괜찮은 곳이라 주저 없이 데려온 것인데, 과연 강제혁의 입에 맞을지는 미지수였다.
“그렇게 맛있어요?”
“네?”
“말도 안 하고 밥만 먹어서.”
뜬금없는 질문에 서하가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그리고 뒤늦게 제가 꽤 긴 시간동안 입을 열지 않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먹을 때를 제외하고.
“강제혁 씨는 맛없어요?”
맛이 있냐고 물었기에 서하는 제 입에 맞는 것을 전제로 한 질문을 던졌다. 정황상 비꼬는 말처럼 들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구구절절 왜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는지 설명하는 것보다는 나은 답변 같았기 때문이다.
“맛있어요. 누가 고른 식당인데.”
“…그럼 다행이고요.”
“그런데 너무 말이 없어서 심심해서 한 번 물어봤어요.”
“그게…….”
“나랑 밥 먹기 싫었어요?”
왠지 대화가 옆길로 새는 것 같았다. 지난주의 일이 언급될 것 같아서 괜히 심장이 쫄렸다. 원래 이렇게 소심한 성격이 아닌데, 어째선지 강제혁의 앞에선 맹수 앞 피식자처럼 몸을 사리게 된다.
“싫었나본데.”
“아니에요, 그런 거.”
실망감이 담긴 단정적인 말에 서하는 서둘러 부정부터 했다. 조금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 억울했다. 강제혁에게 김산과 관련된 일로 아둔하게 군 것은 제 잘못이긴 했지만, 그렇게 헤어지고 내도록 아무런 연락도 주지 않은 것은 서운했다.
저를 좋아하느냐고 묻기에 급변하는 상황이 두려워 아니라고 한 것뿐인데, 그 길로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연락이 끊기니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었다. 저도 사람인지라 화도 났다. 그렇게 헤어졌는데 제가 먼저 연락을 하는 것도 이상했다. 갑을 관계를 따지자면 엄연히 서하가 을인 관계였으니까. 아니다. 병이나 정쯤 될 지도 몰랐다.
“나한테 화났어요?”
돌연 떨어지는 질문에 서하가 입술을 물었다. 화가 났느냐 묻는다면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화를 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근래 들어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는 서하였다.
“…아니요.”
“그런데 왜 날 안 봐.”
이제는 오히려 강제혁이 화가 난 것 같았다. 서하는 제 앞에 무섭게 앉아있는 강제혁을 차마 보지 못했다. 얼굴을 대놓고 보는 게 무섭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강제혁 앞에선 제가 몰랐던 스스로가 드러난다. 사람이라는 게 참 입체적이구나. 순간순간 눈이 마주쳤지만, 애써 피하는 자신이 있었다. 상황을 정면으로 마주하기 싫은 마음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어렵네.”
“그러게요.”
“이런 건 대답 잘하지.”
그 말엔 할 말이 없었다. 서하가 제 앞에 놓인 전복 한 조각을 마저 입에 넣었다. 간장을 찍는 손이 괜히 떨려 고추냉이가 많이 묻었다. 코가 맵고 눈이 아렸다. 금세 서하의 말간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고추냉이 탓이었다.
“울면 역효과 나는 거 알면서 왜 울어요.”
“그런 게 아니라,”
“고추냉이 때문이든 뭐든, 내 앞에서 울어서 좋을 거 없는 거 알잖아요.”
휴지를 건네주는 손길이 쓸데없이 다정했다. 그대로 뺨이라도 쓰다듬어 주었으면 좋겠다. 입 맞추고 싶다. 이상한 충동. 예전의 서하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생각이었지만, 서하도 그것까진 인식하지 못했다. 코를 붙잡고 눈물을 참는 서하를 보던 강제혁이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못 먹겠으면 내 손에 뱉든가.”
“더러워요.”
“별 게 다 더럽네요. 더한 것도 묻혔으면서.”
그리고 강제혁의 손이 귓전에 닿았다. 조금 아프게 귀를 긁듯 매만지는 손에 서하가 아주 얕은 한숨을 뱉었다. 명백한 섹스어필이었다.
“연락 없는 동안 나도 혼자 생각을 많이 했어요.”
결국 서하가 두려워할 만한 주제가 화두에 올랐다. 느릿하게 말을 이으려는 강제혁의 손을 붙잡고 서하가 겨우 눈을 맞추었다.
“꼭 여기서 얘기해야 돼요?”
“싫어?”
“…네.”
적어도 밥집에서 차이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서하는 손가락을 옭아매듯 겹쳐오는 것을 뿌리치지 못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이뤄진 스킨십이 농밀하고 진했다. 곧 메인메뉴인 생선요리가 나왔다.
“맛있게 드세요.”
점원의 인사에도 강제혁은 손을 놓지 않았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그의 손은 여전히 서하의 손을 잡은 채였다. 왜 잡은 건지, 왜 놓지 않는 건지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 같았지만, 서하는 애써 내리눌렀다. 그랬다간 그가 손을 놓아버릴 것 같았으므로.
***
결국 다시 그 차 안이었다. 계산을 하기 위해 서하가 먼저 손을 뿌리쳤고 재빨리 카드를 꺼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제혁이 탐탁지 않은 눈으로 서하가 계산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지만, 거기서 마저 굴할 수는 없었다. 오늘만큼은 밥값을 치르고 싶었다. 혹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 밥 한 끼 정도는 제가 사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닿았던 손이 아쉬웠지만 별수 없이 걸어 주차장에 도착했다. 가는 길이 짧게만 느껴졌다.
“전시는 재밌었어요?”
“그런 게 궁금해요?”
“할 말이 없어서요.”
차 안에 도착해서는 그가 방금 전 입에 올렸던 이야기를 꺼낼까봐 더 급히 화제를 돌렸다. 하지만 금세 동이 났다. 말 그대로 할 말이 없었던 탓이다.
“재밌었어요. 그림도 좋았고, 이서하 씨도 좋았고.”
“…리포트 쓸 때 제 얘기는 빼주세요.”
“어차피 발표할 것도 아니고 선생님만 볼 건데 안 되나요?”
“그건 그런데,”
“그럼 이제 내가 하고 싶은 얘기해도 돼요?”
드디어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서하는 단두대에 선 사형수처럼 비장한 표정으로 정면만 응시했다. 어두운 주차장 끝에서 괴물이라도 튀어나왔으면 좋겠다. 그러면 적어도 차이지는 않을 테니까. 있는 힘껏 부정적인 생각을 한 서하가 느리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는 이서하 씨가 갖고 싶은데, 안 가져지니까 화가 나요.”
“네?”
메마른 음성이었지만, 차분한 분노가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제 그만 봤으면 좋겠다는 말 같은 걸 예상한 입장에선 당황할 수밖에 없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강제혁은 그런 서하의 반응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마저 들어요. 있으나 마나한 세이프워드 걸어 놓고, 초짜마냥 끝까지 몰아붙이고 못할 짓 했어요. 사과해야 되는데 애새끼처럼 사과도 안 하고 잠적한 것도 미안하고. 그전에 하나만 물읍시다. 구멍은 괜찮아요?”
걱정이 묻어났지만 서하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질문이었다. 줏대 없는 아래가 지끈거렸다. 아마 그날 하루 내내 화장실이며, 차 안, 별장에서 연이어 플레이했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마도 상의 없이 두 개를 넣은 것도…….
“…괜찮아요.”
“그건 다행이네.”
차 안에 잔잔히 틀어진 히터 때문인 건지, 미열이 오르는 듯했다. 서하의 기분이 파도를 타는 듯 넘실거리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서긴 했지만, 무서웠을지언정 싫지는 않았다.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구나. 묘한 기분이었다. 잠시 이어진 침묵에 서하 역시 쌓아뒀던 질문 중 하나를 골라 물었다. 내내 궁금해했던 것이기도 했다.
“저한테 왜 그런 질문 했어요?”
“…모르겠어요.”
자신을 좋아하냐는 질문, 그대로 언급하는 게 민망해 에둘러 물었는데 바로 숨은 뜻을 알아낸 강제혁이 두리뭉실한 대답을 내놓았다. 서하는 그 대답이 마음에 차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모르겠다는 그에게 캐묻고 싶진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수긍해야 했다. 머릿속이 어질러진 방처럼 복잡했다.
강제혁은 이서하를 갖고 싶어 한다. 이미 그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서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바람이었지만, 그가 저를 놓지 않음에 만족스러운 마음이 드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서하 씨를 시험하고 싶은데, 동의할래요?”
“시험이요?”
질문을 빙자한 명령이 떨어졌다. 열이 오른 서하의 뺨에 강제혁의 손이 닿았다. 바라고 바랐던 접촉이었으나 막상 닿으니 심장이 떨려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이대로 뺨이라도 후려쳐 주었으면 좋겠다. 성적인 의미가 아니라, 정신 차리라는 뜻으로. 하지만 서하의 바람과 달리 강제혁의 손은 그대로 떨어져 목덜미를 감쌀 뿐이었다.
“멀티플, 좋다고 체크 했었잖아.”
“아…….”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나는 오싹한 목소리였다. 그는 대체 뭘 시험하고자 하는 걸까. 목덜미를 쥔 손에 악력이 거세졌다. 동맥이 뛰는 움직임이 그 손에 느껴질까 겁이 덜컥 났다. 그가 말한 멀티플의 의미를 되새기자 서하의 호흡이 눈에 띄게 흐트러졌다. 조절할 수 없을 만큼. 그날 한계를 넘어섰다고 생각했는데, 강제혁은 아니었나보다. 저를 더 몰아붙일 길을 도모하다니.
“지금 흥분했죠?”
“읏…!”
“오늘, 이서하 씨가 가장 처절하게 망가진 순간에 손님이 올 거예요.”
가까워지는 숨결에 서하가 두려운 감정을 담아 강제혁을 올려다봤다. 마주친 눈은 언뜻 텅 비어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의 입술이 움직이는 모습을 눈으로 덧그렸다. 그리고 그 말뜻을 되새겼다. 손님…….
“음란한 구멍을 한껏 벌리고 내 좆을 받아먹고 있을 때, 다른 사람이 그 광경을 보게 할 거라고.”
뱉어지는 말이 온통 음란하고 뜨겁다. 서하의 눈이 금세 열기에 휩싸였다. 생각만 해도 숨이 차고 오한이 드는 가정이었다.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일 생각을 하니 공포심이 드는 것과 동시에 어쩔 수 없이 흥분이 됐다.
“하…….”
“싫으면 나한테 욕이라도 하세요. 재갈 같은 거 안 물릴 테니까.”
입술이 닿을 것 같았다. 닿기 직전이었다.
“끝나면, 뺨이라도 맞아 주겠습니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맹세였지만, 서하는 곧 들이닥친 혀에 맥을 못 추고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간만에 삼킨 타액이 꿀처럼 달았다. 재갈이나 다름없는 키스였다.
***
입맞춤이라기보다 약탈에 가까웠던 키스 후엔, 침묵만이 남았다. 차는 도로를 달려 낯선 듯 눈에 익은 길로 들어섰다. 흐트러졌던 호흡은 정상 궤도에 올랐지만 두방망이질을 치는 가슴은 여전히 엉망인 채였다. 그렇게 도착한 곳은 ‘그 호텔’이었다. 강제혁과 이서하가 처음 만났던 그 장소.
높게 솟은 건물이 긴장감의 끝에서 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불현 듯 그날의 기억이 서하의 머릿속을 무참히 후비고 지나갔다. 그날 서하는 김산의 폭탄선언에 도피하듯 만취했었고, 충동적으로 오프라인 플레이에 임했다. 그땐 긴장된 마음으로 홀로 엘리베이터에 올랐지만 지금은 달랐다. 위압감을 주는 옆얼굴이 곁에 선 채였으니까.
서로의 집이 아닌 호텔에서 플레이를 하는 것은 그 이후로 처음이었다. 호텔로 장소를 옮긴 이유는 자명했다. 강제혁이 제안한 멀티플을 위한 장소 선정이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이 제 플레이를 관람한대도, 나아가 저를 유린한다 해도 맹세컨대 처음 그날보단 떨리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서하의 입에서 작게 실소가 터졌다. 간이 제법 커졌다.
“웃음이 나오나 봐요.”
정말 작게 웃었는데, 들리기라도 한 건지 차가운 눈을 한 강제혁이 서하를 느리게 훑고 있었다. 오해 받은 것 같아 당황했지만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도 이상했다. 마침 24층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성이 나오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융단이 깔린 복도에 발을 디디자 그 밤이 더욱 생생히 떠올랐다. 단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그가 제 앞에 선 채 걷고 있다는 것뿐. 서하가 강제혁의 너른 등을 길잡이 삼아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호흡이 점차 가빠졌다. 그때 그 복도에 다시 강제혁과 섰다.
“들어가요.”
2407호. 잊고 있던 숫자였지만 보자마자 더 분명해졌다. 이 문 앞에 서서, 다시 돌아 나가려 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괜히 알은 체를 하고 싶어지는 장소였지만 등을 떠미는 손과 어느 때보다 차갑게 굳은 얼굴이 말을 아끼게 했다.
“못 하겠어요? 하기 싫으면 지금이라도 그만두자고 말해요.”
알 수 없는 감정이 서린 목소리였다.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한 말이었지만, 그때는 유혹하듯 들렸다면 지금은 왠지 만류하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서하는 고개를 저었다. 그로부터 저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들었고, 아니라고 답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플레이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감정이 배제된 관계라는 증명 같아서. 그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게 진실임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끝내 그만두자 말하지 않는 서하를 보며 강제혁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강제혁이 카드키를 대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고, 서하가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어두운 호텔 방안은 고요했다. 문이 달칵 닫히는 소리와 함께, 부드러운 천이 눈을 가렸다.
“안 보여도 옷은 벗을 수 있겠지.”
“…주인님.”
불안정하게 오르내리는 가슴께를 어루만지는 손이 야릇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오로지 그의 목소리만 가득했다. 서하가 제 가슴을 만지는 손을 겹쳐 잡고 마른 침을 삼켰다. 오랜만에 입에 담은 호칭이 서하를 흥분시켰다.
“왜? 무서워?”
“…네.”
“무서우면 그만하자고 해요.”
플레이를 제안한 건 그인데, 왜 이렇게 하기 싫어하는 것 같을까. 얼굴이 보이질 않으니 목소리에 스민 감정이 더욱 선명히 닿았다.
“제가 그만하자고 하길 바라세요?”
궁금함을 담아 물었지만 대답은 들려오질 않았다. 결국 서하가 먼저 단추를 끄르고 셔츠를 벗었다. 그가 옷을 벗으란 말을 했으니 멍하니 대답을 기다리는 것보단, 이편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하가 속옷까지 벗고 나체가 되자 강제혁이 예의 그 낮고 뜨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침대에서 자세 취하고 있어요.”
손바닥으로 벽을 더듬어가며 제법 긴 복도를 지나 겨우 침대에 안착했다. 중간에 몇 번 넘어질 뻔 했지만, 손바닥에 닿는 푹신한 침구가 서하의 짧은 여정이 성공했음을 알려주었다.
자세,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까. 고민하기가 무섭게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뭐든 가장 음란한 모습을 원할 테니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서하는 뺨을 침대 위에 댄 채로 엎드려 엉덩이를 치켜들고, 손바닥으로 구멍을 벌려 보였다. 까만 시야였지만, 얼굴은 달아올랐다. 보지 않아도 부끄러웠다. 그리고 긴장감으로 굳은 서하의 몸에 강제혁의 손이 닿았다.
“상처가 거의 다 나았네요.”
“…네.”
“그 와중에 제모는 했네.”
그 말에 서하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언제 그가 부를지 모른다는 생각에 아래를 정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하느라 좀 힘들었지만.
“구멍도 괜찮고.”
“읏…….”
품평하듯 이곳저곳을 검사하는 무심한 손길이 이어졌다. 서하는 자꾸만 흥분하는 육신 탓에 입술을 꽉 깨물어야 했다. 발기하지 않으려 애를 썼지만 간만의 플레이라는 걸 알아챈 몸은 쉽게 말을 듣질 않았다.
“윽!”
“자위 한 번 안 하고 얌전히 지냈나 봐요?”
갑작스레 마른 입구를 침범한 손가락에 아픈 신음이 터졌다. 하지만 통증이 지나가자 미약하게 이는 쾌감에 결국 서하는 조금 발기하고 말았다. 찰싹 소리가 나도록 엉덩이를 때리는 손길이 야멸찼다.
“조금만 쑤셔줘도 질질 싸니까, 내가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잖아.”
머리카락 사이로 파고드는 강제혁의 손가락이 외설스러웠다. 단순한 접촉에도 발끝이 저릴 지경이었다. 몇 번 더 안을 거칠게 쑤시던 손가락이 빠져 나가자 아쉬운 마음이 더 먼저 들었다. 구제불능이란 단어는 저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고, 서하가 자책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손, 등 뒤로 돌려요.”
강제혁이 시키는 대로 엉덩이를 벌려 잡고 있던 손을 옮기자, 로프 같은 거친 질감의 무언가가 제 목을 한 바퀴 감싸고 몸에서 번갈아 교차되기 시작했다. 추측으로는 본디지 중의 하나인 귀갑묶기 같았다. 어쩐지 야릇한 느낌에 서하의 등에 식은땀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가방을 뒤적이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고, 엉덩이에 차갑고 딱딱한 매가 닿았다.
“얼마나 맞고 싶어요?”
“주인님 때리고 싶으신 만큼, 때려주세요.”
서하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최대한 의연하게 청했다. 그에게 맞고 싶은 나머지 성기는 반쯤 발기한 채였다. 이를 악물기도 전에 바람을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볼기에 매질이 떨어졌다. 평소보다 더 묵직하고 아린 통증이 전신을 덮쳤다. 맞은 건 엉덩인데 온몸이 오싹했다.
“자꾸 예쁜 짓을 하니 봐주고 싶어도 봐줄 수가 없네.”
“흣, 으응…!”
묵직하게 떨어지는 매가 서하의 엉덩이를 예쁘게 물들이고 있었다. 강제혁의 스팽킹은 거친 듯 정갈해서, 맞을 때마다 통증이 배가 되곤 했다. 숫자를 세란 말은 없었지만 서하는 제 몸을 후려갈기는 매를 차근차근 헤아렸다. 스무 대쯤 맞자 엉덩이가 화끈거려 몸이 배배 꼬였다. 그 후 열 대는 허벅지 뒤쪽을 강타했다. 서하의 몸이 덜덜 떨리고 벗은 등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몽롱한 가운데 문이 열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지만 그런 것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좋아요?”
“하, 흐으, 읏, 네, 조, 좋아요….…”
서하의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편할 리 없는 자세 탓에 몸이 더욱 뻐근했다. 까만 시야는 통증과 쾌감으로 얼룩져 희게 번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빳빳이 선 성기를 어딘가에 문지르고 싶었다. 게다가 오늘의 매는 강약조절이 없어서 더욱 매서웠다. 그 탓에 서하는 금세 한계에 다다르고 말았다.
“그만, 흐, 아…….”
“내가 만족할 때까지 맞겠다며.”
“제발, 주인님, 흑, 흐윽…….”
언제 흐른 건지 모른 눈물로 안대가 흥건했다. 물기로 얼룩진 목소리로 연신 빌었지만 강제혁은 대답이 없었다.
“흣, 으, 주인님 좆물 먹여 주세요…….”
간청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서하가 아예 노선을 틀었다. 강제혁의 욕구를 풀어줘야만 할 것 같았다.
“구멍 안이 간지러워?”
“네, 간지러워요, 흑, 아…….”
“어떻게 해줄까.”
“쑤, 셔 주세요. 자지, 로, 하으, 학, 으… 으응, 흣…….”
다소 누그러진 물음에 서하가 엉덩이를 좀 더 치켜들고 보채기 시작했다. 곧이어 닿는 불덩이 같은 귀두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드디어…….
“아!”
강제혁이 엎어져있던 서하의 목덜미를 끌어 당겨 몸을 세우게끔 했다. 숨통을 조르기라도 할 것처럼, 목덜미를 감싸는 손이 심히 위협적이었다. 단단한 팔이 허리를 잡고 성기 끝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빡빡한 아래에 뜨거운 살 기둥이 밀려들어오는 느낌이 몸서리쳐지게 야릇하고 폭력적이었다. 안을 쑤시고 드는 성기에 서하가 헛숨을 삼키며 긴장을 풀려 애쓰는 사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두꺼운 기둥이 끼워 맞춘 것처럼 안을 쑤셨다.
“아, 아아…….”
“천박하게 굴지 마.”
“좋아요, 제발, 읏, 흐으, 제 천박한 구멍을, 읏, 쑤셔, 아흑, 주세요, 학, 아, 아으읏, 망가뜨려 주세요…….”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쾌감에 머리가 저렸다. 거친 삽입이 주는 쾌감과 안을 때려 박을 때마다 울리는 엉덩이의 통증에 서하의 성기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다리 벌려. 손님이 보고 계시잖아.”
“아윽……!”
짓씹듯 중얼거리는 말에, 서하가 눈에 띄게 몸을 떨며 발작적으로 엉덩이를 찧었다. 좀 전에 들었던 문 열리는 소리가, 그가 말한 손님이 오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서하의 호흡이 더 엉망으로 무너져 내렸다. 누군가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떨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그제야 진한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안을 들쑤시는 움직임이 더욱 거칠어졌다.
“젖꼭지 만져요.”
“하, 하아…….”
“예쁜 건 자랑해야지.”
로프가 풀어짐과 동시에 잔혹한 명령이 떨어졌다. 그의 말에 홀린 듯 서하가 제 유두를 짓뭉개고 꼬집어 보였다. 그 순간에도 구멍을 드나드는 굵은 기둥은 쉬질 않았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우리 야옹이 입이 심심할 텐데, 거기서 씨발, 구경만 하지 말고 좆이라도 물려주든가.”
노기 어린 음성이었다. 하지만 서하에겐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가 제게 성기를 물릴 거라는 상상이 더 지배적이어서, 강제혁의 음성에 서린 분노 같은 것을 잡아 낼 수 없었다. 무섭고, 겁나고, 흥분되는 순간, 인내 끝에 입술에 닿는 남자의 손가락을 혀를 내어 핥았다. 건조하고 뜨거운 손가락을 빨며 서하는 머리가 터질 것처럼 흥분했다.
“부탁해 봐.”
귓가에 우짖듯 속삭이는 목소리는 강제혁의 것이었지만, 서하에겐 계시처럼 들렸다. 새까만 눈앞에 형체 모를 남성이 서 있었다. 쾌감에 얼룩진 머리는 정상적인 사고를 불가능하게 했다.
“손님, 읏, 좆물, 학, 흣, 아으, 먹여, 주세요…….”
열띤 신음과 뒤섞인 음란한 청이 이어졌다. 수치스럽고 잔인한 상황이었지만 그만큼 배덕감에 창자가 뒤틀리는 것 같았다.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부끄러움도 모르고 꺼덕이고 있었다. 뒤를 쾅쾅 때리는 강제혁의 성기를 문 채로, 낯선 이의 것을 물고자 입을 벌렸다. 흥분에 머리가 반쯤 돌았다. 그리고 억겁 같은 시간이 흐른 후에, 남자의 손이 서하의 안대를 벗겨 냈다.
“…서하야.”
적응이 안 되어 흐릿한 시야에, 눈물로 얼룩진 두 동공에 김산의 일그러진 낯이 가득 찼다. 그리고 거칠어진 추삽질에 허무하게 서하가 파정했다. 덜덜 떨리는 몸은 쾌감과 충격으로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사정의 기운이 가라앉기 무섭게 서하의 낯이 희게 질리기 시작했다.
강제혁이 낮게 신음함과 동시에 안에 퍼지는 정액의 감각에도 벌어진 입술은 다물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금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화끈거리는 구멍과 엉덩이가 이게 실제 상황이라는 걸 더욱 선명히 알리고 있었다.
“…선배.”
무의식적으로 입에서 떨어진 단어는 제 앞에 선 남자의 정체를 다시금 되새기게 했다. 서하에겐 그 짧은 순간이 몹시 길게 느껴졌다. 더 괴로운 것은 따로 있었다. 10년 동안 수없이 봐온 얼굴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띠고 있었으니까.
***
그 후로 대화는 없었다. 김산은 복잡미묘한 표정으로 서하를 바라봤고, 강제혁은 뚫어질 듯 서하를 응시했다. 패닉상태에 빠졌지만, 서하가 이 황당한 상황에서 도망치지 못한 것은 오로지 강제혁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거지 같은 이유밖에 없었다. 그가 성기를 빼내자마자 하얀 이불로 서하를 꽁꽁 싸매곤 제품 안에 가뒀으니 가지 말라는 신호나 다름없었다.
“…서하야. 집에 가자. 데려다 줄게.”
긴 침묵을 깬 것은 김산이었다. 그는 강제혁의 품에서 바들바들 떠는 서하를 당겨 안고 싶었다.
“…가세요.”
다만 서하가 내놓은 대답은 김산이 바라던 것과 한참 동떨어진 것이었다. 김산에겐 충격이었다. 이 자리에 온 것도 서하가 강제혁에게 정이 떨어지길 바라서였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저를 보내는 서하가 이해되질 않았다. 그러니 발이 떨어질 리가.
“서하야!”
“가시라고요.”
서하의 낮은 음성엔 분명 부정적인 감정이 칼날마냥 서려 있었지만 그 날이 저를 향한다는 사실이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벌어진 틈으로 서하의 어깨가 떨리는 게 김산의 눈에 들어왔다.
“나중에, 제가 따로 연락드릴 테니까, 지금은 가시라고요. 제발…….”
눈가가 뜨거웠다. 서하 역시 발간 눈으로 바닥에 시선을 떨군 채였다. 흐트러진 목소리가 측은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가여운 서하.’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호텔 방 문을 나서며, 김산이 작게 욕설을 씹어 뱉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아무것도 아닌 자신이 싫었다. 가장 역겨운 것은 서하가 무참히 유린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차마 성기를 넣지 못해 손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발기했다는 것이었다. 참담했다. 서하가 핥고 빤 손가락이 불에 덴 것마냥 뜨거웠다.
***
김산 앞에선 포승줄마냥 저를 옥죄던 손이, 불청객의 부재와 함께 풀어졌다. 서하는 차라리 이 순간 강제혁이 더욱 잔인하길 바랐다. 합의되지 않은 상황에 제가 성심껏 화낼 수 있도록. 하지만 떨리는 제 손보다 강제혁의 손이 더 희게 질린 것처럼 보였다. 거칠게 뛰는 심장은 분노로 인한 것인지 흥분으로 인한 것인지조차 가늠할 수가 없었다.
“…안 때려요?”
서하의 바들거리는 몸을 돌려 세운 강제혁이 가라앉은 눈으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물었다. 서하로선 기가 막힌 물음이었다.
“저한테 맞고 싶어서, 이런 짓 한 거예요?”
“…….”
“맞는 거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럼에도 생각보다 떨리지 않는 목소리였다. 다행이라 해야 할지. 서하가 망가진 호흡을 추스르며 강제혁의 텅 빈 눈을 마주봤다. 동공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새까만 눈이 저를 쏘아보고 있었지만 허탈함이 가득해 어째선지 상처를 준 게 자신처럼 느껴졌다. 뒤에선 강제혁이 싸지른 정액이 흐르고, 맞아서 부은 엉덩이는 통증에 저릴 지경인데, 아직 뺨 한 대 맞지 않은 강제혁의 표정이 더 처참했다.
“때리면 맞아주겠다고 했잖아요.”
도저히 대화가 가능한 상태가 아니었다. 최소한 서하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그래서 저를 잡고 있는 손을 비틀어 빼내고, 몸을 일으켜 바닥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지만 애써 덤덤한 척 하려 노력했다. 서하가 옷을 꿰어 입는 동안에도 강제혁은 미동조차 없었다. 빙하기라도 찾아온 것처럼, 냉동된 시체 마냥 차게 굳은 강제혁을 가만 바라봤다.
“가볼게요.”
가지 말라고 하면 멈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가 가지 말라면 가지 못하는 몸으로. 씨발. 이 와중에도 그의 명령을 기다리는 제 모습이 우습고 비참했다. 기가 막혔다. 플레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눈시울이 점점 더 붉어지고 있었다. 울 것 같았다. 그렇게 서하가 몇 걸음 쯤 뗐을까.
“…!”
순식간에 잡힌 손목에 몸이 휘청하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부딪힌 엉덩이가 아팠다. 서하를 깔아 눕힌 강제혁이 타는 듯한 시선으로 서하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서로의 감정을 읽어내려는 듯 한참을 그렇게, 치열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붉어진 서하의 눈가를 손가락으로 짚어낸 강제혁이 짓씹듯 물었다.
“흥분했어?”
서하가 눈꺼풀을 몇 번 깜빡이자 어느새 고여 있던 눈물이 맥없이 흘러내렸다. 눈물이 살갗보다 뜨거워 화상이라도 입는 것 같았다. 한 번도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의 폭풍이 서하를 힘겹게 했다.
“흥분했냐고 묻잖아!”
강제혁은 화를 내고 있었다. 그를 알아챈 서하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헛웃음이 터졌다. 대체 뭘 바라고 이런 짓을 한 걸까. 짓밟힌 것은 육체뿐만이 아니었다.
“…흥분하라고 그런 거 아니었어요?”
“…….”
“씨발, 나보고 흥분하라고 그런 거 아니었냐고!”
서하가 묻고 싶은 말은 분명했다. 당신이 이런 상황을 만들었잖아. 그의 멱살이라도 잡고 싶었다. 하지만 강제혁에게 붙들린 손목엔 어떤 힘도 들어가질 않았다. 무력했다.
“놔요.”
이 무능한 육신은 강제혁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이젠 스스로에게 묻고 싶었다. 뭘 바란 거냐고. 그에게 욕보일 권리를 줬다. 망가트릴 권리를 줬다. 제가 준 것이다.
흥분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김산의 얼굴을 본 순간 충격 받았지만, 흥분감이 고조된 것은 사실이었다. 싸늘하게 식는 머리만큼 어느 한구석은 열기로 범벅이 되어 젖어갔다. 이중적이고 추잡한 마음이었다. 일순 강하게 손목을 그러쥐고 제 낯을 훑던 강제혁이 몸을 떼어냈다. 옭아매진 순간 괴로웠지만, 강제혁의 얼굴이 보이지 않자 불안함이 더 몸집을 부풀렸다.
“…내가, 시험하고 싶다고 했잖아요.”
정돈된 듯, 정돈되지 못한 목소리였다. 마음 같아선 벌떡 일어나 강제혁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몸을 잘게 떠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이 하나도 없었다. 이대로 기절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만족하셨어요?”
그나마 움직이는 입술을 뻐끔거려 질문을 던졌다. 결국 강제혁은 서하가 온전히 제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 이런 만행을 저질렀다는 뜻이었다. 서하가 턱을 꾹 다물고 젖은 눈가를 소매로 닦았다. 눈물까지 흘린 제가 창피하고 머저리 같이 느껴졌다. 소유물인 섭을 한계까지 굴리는 건, 돔의 의무이기도 했다. 게다가 멀티플이 좋다고 한 건 자신이니 어쩌면 제 잘못일지도 몰랐다. 서하가 자신을 질책하는 사이에도 강제혁은 끝까지 대답하지 않았다.
“만족했냐고 묻잖아요.”
“…후회는 안 해요.”
“진짜 엿 같은 거 알죠. 엿 먹어요.”
손가락을 내밀진 못했어도 분노를 담아 일갈했다. 서하의 말에 강제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하 역시 호텔 방을 떠나는 강제혁을 잡지 않았다. 그럴 기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
주차장으로 내려오자마자 갑작스레 쏟아진 폭력에 강제혁의 뺨이 맥없이 돌아갔다. 입안에 고인 피를 뱉어내고 제게 주먹을 휘두른 남자를 보는 눈이 지극히 무심했다. 강제혁의 그런 행태는 김산의 화를 돋우기에 차고 넘치는 모습이었다.
“…개새끼. 네가 인간이야?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
더러운 것을 보는 듯한 눈은 역겨움과 분노로 타고 있었다. 강제혁이 그런 김산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다. 비꼼이 가득한 미소였다.
“연락 주자마자 좋다고 개처럼 달려온 주제에 누구더러 개새끼라는 겁니까?”
“넌 서하 생각은 하나도 안 하지?”
김산이 강제혁의 멱살을 틀어쥐고 겁박하듯 외쳤다. 멸시가 가득 담긴 어투였다. 끝이 떨리는 건 아마도 이서하를 향한 제법 애틋한 감정 탓일 테지. 강제혁이 싸늘한 눈으로 김산을 마주보았다. 가늘게 뜬 눈이 김산의 신체를 우롱하듯 훑었다.
“그러는 댁도 흥분해서 좆까지 세운 주제에 상당히 위선적이네요.”
“뭐?”
“내가 그거 하나 못 알아봤을까 봐? 손가락을 잘라 버리고 싶네.”
당황한 김산을 거칠게 밀어낸 강제혁이 구겨진 옷깃을 털어냈다. 다분히 신경질적인 몸짓이었다. 그 말에 김산이 제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욱신거리는 뺨은 서하를 위한 것이었는데, 허락하지도 않은 인물이 고통을 주었다. 어찌됐건 한 대쯤 맞고 싶은 심정이었으니 고마움이라도 표해야 할까.
“좋은 구경 시켜줬는데 냅다 주먹부터 갈기면 섭섭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평생이 걸려도 못 볼 장면이었는데.”
“이 새끼가,”
“내가 왜 이서하가 아니라 당신한테 맞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미친놈. 넌 끝났어, 이제.”
“되게 기분 좋은가 봐. 그런데 그거 알아요?”
강제혁이 미친 사람처럼 히죽거리며 김산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내려다보는 강제혁의 시선이 검고 어두운 탓에 김산이 불쾌하게 그를 응시했다.
“적당히 비비고 꺼져. 넌 이서하한테 아무것도 못 해줘.”
핏방울이 맺힌 입가가 단정 짓듯 움직였다. 그건 김산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진실이었다. 바닐라인 김산은, 서하를 사랑하고 아껴줄 수 있을지언정 서하에게 가닿지 않을 것이다.
“넌 미친 변태새끼야. 쓰레기 새끼. 서하는 너 같은 거 절대 안 좋아해.”
김산은 강제혁에게 모멸감을 주고 싶은 마음을 가득 담아 폭언을 쏟아냈다. 제 자존심이 상한 만큼, 아니 그것보다 더 강제혁의 기분이 더러워지게끔 하고 싶었다.
“변태새끼? 그 말이 나한테 모욕적일 거라고 생각해? 아니, 뒷말은 조금 타격감이 있네.”
흘러내린 앞머리를 손으로 빗어 넘긴 강제혁이 소매로 피가 묻은 입가를 닦아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그런데 내가 미친 변태새끼면, 이서하도 다를 것 없어.”
씁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김산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대로 강제혁이 김산을 스쳐 지나가며 말했다.
“바닐라 새끼는 이제 빠져. 주제 파악이나 하라고. 그리고 이서하는 너도 안 좋아해. 너 같은 위선자 새끼는 특히나.”
잠시 후, 검은 색 마세라티가 주차장을 거칠게 빠져나갔다. 남은 것은 굳은 낯의 김산 뿐이었다.
***
입이 썼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강제혁으로선 감정을 풀어낼 길이 없어 그저 멍하니 창밖을 응시할 따름이었다. 밤바람이 유리창에 쏟아지는 소음만 잔잔히 울리고 있었다.
- 그래서, 만족하셨어요?
생각나는 것이라곤 젖은 눈가와 떨리는 목소리 뿐.
- 엿 먹어요.
강제혁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김산의 앞에서 서하를 유린하고 안으며 흥분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서하가 흥분한 것을 탓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화가 났다. 김산의 얼굴을 보고 서하가 더욱 달아올랐음을, 뒤에서 그를 안고 있던 강제혁이 모를 리 없었다. 강하게 조여드는 구멍의 느낌이 선명했다. 당장 서하를 범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밀려드는 성감이 엿 같기 그지없었다.
“씨발…….”
자꾸만 탐을 내는 김산에게 협박을 가하고자 한 일이었다. 그리고 좀처럼 제게 잡히지 않는 서하를 시험하는 행위였다. 결국 시험 당한 것은 저였지만.
그 호화로운 호텔 방 안에서, 세 사람 모두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 가지 확인한 것은, 적어도 서하가 저를 먼저 내보내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승리감에 도취되기엔 미약한 단서였지만 지리멸렬하게 치솟는 욕구를 일부분 만족시킬 수는 있었다. 복잡하게 얽힌 감정의 해일 속에서 강제혁이 눈을 감고 서하의 낯을 되새겼다. 참혹하리만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다.
***
정신을 차렸을 땐 하염없이 걷고 있었다. 서하의 눈에 보도블록의 규칙적인 모양새가 담겼다. 의식하지 않아도 발은 저절로 움직였지만 지면에 닿는 감촉은 다소 사실적이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풍경은 반짝거렸고 아름다웠다. 다만, 한적한 길가에 사람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따스하게 보이는 사물과 달리 피부에 닿는 공기는 미묘하게 차가웠다. 오랜만에 걷는 길이었다.
그렇게 천천히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니 익숙한 집이 보였다. 서하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소담스레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담장 앞에 선 채 그 소리를 듣다가, 창문 너머로 웃고 있는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새로 산 교복을 입고 제 모습을 자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대견해하는 중년 부부의 목소리가 익숙하게 들렸다. 익히 아는 음성과 얼굴들이다. 이미 흩어져 버린 지 오래됐지만 기억에 있는 것들이었다.
- …누나.
그 정체를 알아채자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일순, 따뜻한 색감으로 펼쳐져 있던 광경이 순식간에 얼어붙고 트럭의 괴물 같은 경적소리가 고막을 찢어놓을 듯 울렸다. 쿵 하는 거친 소음과 함께 타이어가 도로에 긁히는 요란한 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아무도 없던 도로가 삽시간에 표정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사고 현장이 뻔한 길 위에서 홀로 등을 돌린 채, 서하가 저를 스쳐 지나가는 부부를 응시했다.
- 연하야!
선명한 비명소리. 돌아보고 싶지 않은데, 뻔히 알고 있는 장면인데 고개는 저절로 돌아갔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교복을 입고 웃어보이던 아이는 어느새 도로 위의 핏빛 웅덩이에 망가진 채로 누워있었다. 세상이 온통 붉게 물드는 순간, 등줄기를 적시는 식은땀에 가쁜 숨을 터트리며 눈을 떴다.
“하…….”
하얀 천장과 끈적한 피부가 눈을 뜬 현실이 꿈이 아님을 알려주었다. 푹 젖은 몸이 몹시 불쾌했다. 하지만 일어날 힘이 없었다. 스트레스가 심한 날이면 종종 꾸는 꿈이긴 했지만, 강제혁을 만난 후로 거의 꾸지 않았는데. 오랜만이어서 그런지 도무지 기분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꿈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감정 탓에 몸이 제멋대로 울음을 쏟아내고 있었다.
“울기 싫은데…….”
서하의 잠긴 목소리엔 물기가 가득했다. 좀처럼 진정되질 않아 바람과 달리 한참을 울어야만 했다.
***
퉁퉁 부은 눈가가 쓰라렸다. 차마 거울을 볼 자신이 없을 만큼. 되도록 보고 싶진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마주친 유리창에 제 얼굴이 그대로 비쳐졌다.
“면상 다 조졌네.”
욕지기가 차올랐다. 딱히 제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한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봐줄 만 하다곤 생각했는데. 분명 눈을 뜨고 있으니 앞이 보이는 건데, 유리창에 반사된 제 얼굴은 눈을 감고 있었다. 눈탱이 밤탱이……. 어쩐지 호텔 직원이나 택시 기사가 묘한 표정을 하더라니.
자포자기한 채로 서둘러 집안으로 들어서자 긴 여행에서 돌아온 것처럼 뻐근하고 어색했다. 허전하지만 어지러운 광경은 제 집이 확실했다. 서하는 냉동식품을 주문하고 처박아둔 아이스 팩을 냉동실에서 꺼내 얼굴에 대고 문질렀다.
“으…….”
깡깡 얼은 아이스 팩으로 인해 닿은 피부가 몹시 얼얼했다. 그냥 집 안에 처박혀 있을 수 있다면 굳이 이런 귀찮은 짓은 하지 않을 텐데, 하필 오늘은 꼭 나가야 하는 날이었다. 서하가 휴대폰의 메일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진즉 확인했어야 할 공지를 다시 살폈다.
「A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사은회 행사알림」
까마득한 후배님께서 어찌나 각이 잘 잡혀 계신지, 문자로도 알림을 주어 알게 된 일정이었다. 메일 공지는 일주일 전에 도착했으니 제가 얼마나 정신이 빠진 채로 살았는지 새삼 놀라웠다.
언제 날짜가 이렇게 흘렀나. 강제혁을 만난 지도 어느새 2개월이 훌쩍 지났다. 만난 지 2개월 밖에 안 된 어린 남자애는 제 세상을 이다지도 바꾸어 놓았다. 그 생각을 하자 지난밤이 다시금 스쳐지나갔다. 별로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지만, 마냥 비관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 좆같긴 했지만.
“붓기야, 빠져라.”
안 그랬다가는 모두에게 시선을 받을 것이다. 서하는 제 낯에서 발하는 열기로 인해 녹아가는 아이스 팩을 다시금 고쳐 잡으며 부질없는 주문을 외웠다. 그래도 휴학하고 꽤 오래 도망 다녔다. 지끈거리는 육신을 손 망치로 두드리며 행사까지 남은 시간을 되짚었다. 그 전까진 휴식을 취해야 했다.
***
“이게 누구야. 오랜만이다.”
안내 메일 속 식사 장소에 도착하자, 건물 앞에서 석사 시절 바로 위 학기 선배였던 현수가 서하를 반겼다. 만면에 가득한 미소가 호의적인 태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별로 사이 안 좋았던 것 같은데……. 서하가 머나먼 기억을 떠올리며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붓기가 덜 빠진 얼굴이었지만, 들키지 않은 것 같다고 안심했다.
“잘 지내셨어요?”
“그래, 나 너한테 뭣 좀 물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잘 만났다.”
“선배가 저한테요?”
“박사는 네가 선배잖아. 그건 오쌤 드리려고 사온 거?”
“네.”
“역시 총애 받는 제자는 달라. 할망구 챙기는 건 네가 제일일 것 같다.”
지도 교수를 할망구라 칭하는 불온한 언사가 몹시 귀에 거슬렸다. 혹시 누가 듣기라도 할까 제가 다 겁이 났다. 불행히도 오늘은 현수 옆자리에 앉아야 할 모양이었다. 쓸데없는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불현듯 떠올랐다. 망했다.
“들어가자. 아는 얼굴 거의 없더라.”
“네.”
졸업한 지가 몇 년짼데 당연한 말을 늘어놓는 현수를 따라 발을 옮기며 서하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벌써 피로했다. 강제혁의 연락은 없었다.
***
붉은 천에 금실로 복福자가 거꾸로 새겨진 장식이 잔뜩 걸린 벽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중국 음식점이라더니, 제법 괜찮은 곳 같았지만 별로 식욕이 돋지 않았다. 수첩과 펜을 든 채 눈을 여기저기 굴리는 인물이 아마도 회계 담당인 것 같았다. 서하가 5만 원권 한 장을 제 후배일 학우에게 건네고 이름을 친절히 알려주었다.
“이서하예요. 잔돈은 회비에 보태고.”
“아, 감사합니다. 선배님.”
티 나게 안도하는 얼굴이 안쓰러웠다. 움푹 팬 뺨을 보자 남한테 관심 없는 저로서도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선배가 워낙 많으니 이름 알아내느라 고생이 많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수첩에 ‘눈탱이 밤탱이 - 5만 원’으로 기록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먼저 이름을 밝힌 것이었다.
“이 군, 자네는 이리로 앉게.”
가장 상석인 자리에 차분히 앉아있던 서하의 지도 교수, 오 교수가 손을 들어 서하를 안쪽으로 이끌었다. 현수가 마치 자석마냥 저를 따라 가까이 붙었다.
“선생님. 잘 지내셨어요?”
“말이라고.”
가득 찬 찻잔을 털어 넘기는 오 교수의 몸짓에서도 피로가 묻어났다. 오랜만에 뵙는 스승을 머쓱한 표정으로 보던 서하도 제 앞에 있는 찻잔으로 마른 목을 축였다.
“자네 얼굴이 좀 부었는데.”
“…라면 먹고 자서 그런가 봐요.”
“몸에 안 좋은 걸 알면서 먹나.”
꽤 괜찮은 핑계라고 생각했는데, 핀잔을 들었다. 그도 그럴게 제 스승은 먹는 것에 예민한 편이었으니 말실수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꼴에 박사라고 이 자리에 앉은 게 괜히 불편했다. 마음 같아선 구석에 앉아있다 집에 가고 싶었는데.
“스승의 날 미리 감사드려요.”
“이런 거 가져오지 말라니까.”
눈썹을 찌푸리는 제 스승의 성미를 저 역시 알고야 있었지만 아무래도 빈손으로 올 수는 없었다. 준비해온 카네이션 바구니를 건네자 드디어 손이 가벼워졌다.
“서하가 살뜰한 편이잖아요.”
“자네는 이름이 뭔가.”
제 자식이 아니면 통 관심이 없는 오 교수가 말을 붙이는 현수에게 불쾌한 티를 내며 치명타를 날렸다. 서하는 빈말이라도 살뜰하다는 소리를 들은 게 조금 역해 찻잔을 물리고 단무지를 씹었다. 애초에 지도교수를 빼면 데면데면하게 굴곤 했는데, 저를 칭찬해 오 교수에게 눈도장을 찍고자 하는 현수가 짜증났다. 오 교수의 원천 차단으로 현수가 조용해진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어느새 꽉 찬 방 안이 수다스런 학생과 선생들로 인해 비좁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오 교수를 위한 채식 요리가 테이블 위에 한 상 가득 펼쳐졌다.
“고기 좋아하는 자네들한테 미안하군.”
“아닙니다, 선생님. 맛있습니다.”
바로 옆 테이블부터는 고기가 없는 그릇을 찾아보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서하는 군말 없이 젓가락질을 했다. 음식이 중요한 때가 아니었다. 한 차례 소란스레 축하 케이크와 서툴게 스승의 은혜를 부르는 과정이 지나갔다. 술잔을 몇 번 돌리자 다들 얼큰하게 취해가는 게 보였다. 역시 서하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 군, 의자가 불편한가?”
“…아닙니다.”
엉덩이가 아팠다. 사정 봐주지 않고 작살을 내놓은 강제혁의 지난 밤 스팽이 서하를 뜻하지 않게 괴롭히고 있었다. 몸 상태도 나쁜데 상처가 평소보다 깊게 남은 탓에 좌석에 앉는 게 몹시 힘겨웠다. 제 스승은 술자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이변이 없는 한 식사만 마치면 자리를 파하게 될 것이었다. 서하는 그때를 기다리며 최대한 미동 없이 식사하려 애를 썼다.
“이만 먹고 다들 가지. 회비 받은 것 있으면 돌려주던가 하게. 내가 계산할 테니.”
“감사합니다.”
감사 인사에도 귀찮은 듯 손을 휘저은 오 교수가 일어나자 다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 어쩐지 더운 바람이 불었다.
“이 군은 조만간 내 연구실에서 한 번 보지.”
“…네.”
복학을 종용할 게 분명했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에 서하는 순순히 대답을 드렸다. 오 교수도 만족한 듯 주름 가득한 얼굴에 입꼬리만 올려 보이고 차에 올랐다. 서하는 드디어 살았다는 생각을 하며 최대한 빨리 집으로 갈 방법을 고민했다. 하지만 그런 서하의 귀가를 현수가 저지했다.
“2차 가죠. 번거롭게 돌려주는 절차 거치지 말고 회비 씁시다. 이 선생, 도망갈 생각 마요.”
대놓고 죽상을 쑤는 후배들 사이에서 서하 역시 굳은 얼굴로 입술을 씹었다.
“저 오늘 좀 바빠서,”
“비싸게 굴지 말고.”
단박에 말을 자르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결국 호프집으로 자리를 옮긴 서하가 제 앞에 놓인 생맥주를 말 그대로 노려보았다. 노란 액체가 오줌처럼 보였다. 건강이 많이 상한 사람의 오줌. 결국 현수의 앞자리에 앉고 말았다. 귀가 욕구가 한층 더 강해졌다.
“이 선생 진짜 라면 먹고 자서 부은 거야?”
“선생이라고 부르지 마세요. 졸업 멀었는데요.”
“안 그래도 물어볼 거 많았어. 복학 언제 해?”
맥주 거품을 인중에 잔뜩 묻힌 현수가 교수도 던지지 않은 질문을 함부로 던져댔다. 딱히 거창한 이유가 있어서 휴학한 건 아니지만 별로 얘기하고 싶지 않은 문제였다.
“글쎄요. 오 선생님 뵙고 상의 드리려고요.”
“나 이번에 박사 과정 입학하려고. 그래서 너한테 물어보고 싶은 거 많다고 한 거야.”
“저보다는 과사무실 조교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까탈스럽게 굴지 말고 친하게 좀 지내자. 인맥도 중요하잖아.”
너는 별로 중요한 인맥도 아닌 것 같은데요. 속으로만 삼키며 맥주잔을 든 서하가 코를 찡긋했다. 이상하게 친하게 굴더니 박사 입학 때문이었나 보다. 석사 시절에 현수가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트집을 잡곤 했었기에 별로 사이가 안 좋았다는 게 기억났다. 그 땐 심지어 바쁜 나머지 밥 먹을 시간도 없었는데, 현수가 저지른 실수를 수습하는 데 시간을 쓰기도 했다. 그러니 사이가 좋았을 리가. 내키지 않는 술자리가 영 불편했다. 그리고 그때 휴대폰의 진동이 낮게 울렸다.
“서하 너 아직도 그 김산?이랑 친하게 지내나?”
불편한 인물에게서 가장 불편한 이름이 튀어나왔다. 서하가 메시지가 분명할 휴대폰을 쥐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전화 와서 잠시만요.”
“얼른 다녀와.”
안주를 씹는 현수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간신히 서하를 놓아주었다. 이대로 집에 가야지. 애초에 가방도 챙겨 오지 않은 서하였다. 호프집 의자는 확실히 더 딱딱하고 불편했다.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를 한 대 문 서하가 방금 전의 진동 알림을 떠올리며 휴대폰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불도 붙이지 못한 담배가 바닥에 툭, 맥없이 떨어졌다.
「전화해요.」
단출한 네 글자에 온점까지. 발신자는 강제혁이었다.
***
강제혁과의 통화는 길지 않았다. 서하는 고민 끝에 통화 버튼을 눌렀고 대화랄 것도 없었다. 1분 남짓한 시간에서 10초 정도는 침묵으로 버려졌으니까. 캄캄한 하늘엔 별도 하나 없었다. 발 근처에 떨어진 흰 담배가 가로등 불빛에 노랗게 빛났다. 마치 제 처지 같았다.
- 내 집에서 봐요.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이었다. 그럼에도 강제혁이 기다리는 곳으로 서둘러 가긴 싫어서, 서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지하철에 올랐다. 피곤한 표정으로 덜컹거리는 낯선 이들 틈에서 서하는 까맣게 스쳐 지나가는 열차 밖 풍경을 헤아렸다. 반짝거리는 도심 아래 어두운 통로를 지네마냥 헤집고 다니는 지하철의 풍경은 어둡고 어두웠다. 까맣게 번진 창밖엔 분명 기둥이며 잡다한 것들이 있을 게 분명한데, 뭐가 있는 지도 모르게 어두웠다.
그게 마치 강제혁의 눈동자 같았다.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싶은데, 그마저 쉽지 않다. 확실한 사실은 모든 게 엉망이 되어버렸다는 것뿐이었다. 그건 제 잘못일까. 그렇다면 뭐가 잘못일까. 골치가 아팠다. 서하는 이 느린 전철이 끝까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늦었네요.”
어떻게 도착했는지 모를 그의 오피스텔 앞에서, 서하는 가벼운 차림새로 저를 바라보는 강제혁을 마주했다. 산책이라도 나온 건지, 아니면 저를 마중 나온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별로 알고 싶진 않았다. 강제혁이 저를 기다리며 바깥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까만 눈이 저를 보고 있었지만, 차마 그의 눈을 마주볼 자신은 없어서 고개를 떨어뜨린 채 집 안으로 들어섰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그의 체취가 가득한, 학생의 집치고 지나치게 넓은 집이 익숙하게 느껴졌다.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한 내부에 오로지 저만 흠 같았다.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담배가 간절했다. 떨어진 거라도 주워서 피우고 올 것을 그랬다.
“…강제혁 씨.”
“미안하다고 하면, 돔답지 않다고 싫어할 건가요?”
어느새 가까이 다가선 강제혁이 서하를 뒤에서 안으며 물었다. 그답지 않게 조심스러운 포옹이 서하의 눈가를 뜨겁게 만들었다. 간신히 붓기가 빠진 얼굴인데 무의미해질 것 같았다.
“모르겠어요.”
서하의 초라한 대답에 두툼한 팔이 뻣뻣한 허리를 부러질 듯 감싸 안았다.
“화가 나서 그랬어요.”
변명일까. 서하가 판단하기는 어려웠다. 실상 쉬운 게 없었다. 하지만 저 역시 화가 났기 때문에 그의 팔을 벗어나며 물었다.
“제가 강제혁 씨 소유물이 아닌 것 같아서요?”
공허한 시선이 서하에게 닿았다.
“…맞아요.”
“도대체 어떻게 해야 증명되는 건데요? 서류라도 쓸까요?”
서하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아무래도 저 역시 그에게 화가 났었던 모양이다. 강제혁은 말없이 그런 서하를 보고 있었다.
“권리도 넘겨주고, 시키는 거 다 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뭘 더 어떻게 해야 되는 건데요? 선배는 왜 부른 건데요? 화가 나서? 화가 나면 그래도 돼요? 아무리 내가 나에 대한 권리를 넘겨준다고 했어도……!”
“그 새끼가 당신 좋아하잖아.”
“……!”
그 말에 속엣말을 쏟아내던 서하가 눈을 크게 떴다.
“알면서 끝까지 말 안 하고…, 근데 그러고도 당신이 내 거야?”
“…….”
“공적인 관계 때문에 만날 일 있다고 했을 때, 내가 뭐라고 했어요? 나한테 말만 하라고 했잖아. 근데 그거 당신 지켰어? 나한테 말도 없이 그 새끼 만날 생각하고, 그 새끼가 당신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입 다물었잖아.”
강제혁이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이 서하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분명 그에게 화가 났었는데, 참을 수 없어서 엿 먹으란 말까지 했던 건데. 하루도 지나지 않아 수척해진 강제혁의 얼굴을 보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더군다나 그가 꽤 오래전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걸 이렇게 알게 되니 더더욱 그랬다.
“…좋아해요?”
목적어가 없었지만, 모를 수 없는 질문이었다. 서하가 그렇게 묻는 강제혁을 불안한 눈으로 응시했다.
“김산, 좋아하냐고.”
강제혁은 얼마 전 서하에게 저를 좋아하냐고 물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 때 서하는 아니란 대답만 남겨두고 돌아섰다. 지금의 질문에도 아니라고 답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치졸한 생각이 들었다. 서하의 눈에 강제혁의 떨리는 손이 보였다.
“…안 좋아해요. 정말이에요.”
어쩌면 공평한 결과였다. 강제혁이 그 대답에 안도했다.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만큼. 지금은 그 사실만으로 족했다. 이서하가 김산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
“그럼 내 사과는, 받아줄 거예요?”
서하는 저보다 훨씬 어린 남자애의 핏줄 선 손등을 감싸 쥐었다. 단단하고 뜨겁다. 그의 눈이 뜨거우면서 서늘하게 느껴졌다. 호흡이 가빠지는 느낌이 묘했다. 강제혁이 저 때문에 불안해한다는 사실이 싫지 않았다. 사과를 받아줄 거냐고 묻는 그의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게 저를 약하게 만들었다.
김산이 저를 좋아하게 된 건 제 잘못이 아니었지만, 강제혁에게 이 사실을 숨긴 것은 제 잘못이었다.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제 주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가 불안해한다. 나 때문에.
“…화해할까요?”
미안하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화해는 하고 싶었다. 그래서 물었다. 아무것도 잃고 싶지 않았던 서하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다. 강제혁과 이대로 계약을 파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다. 이 결정의 이유가 ‘강제혁’을 잃기 싫어서인지, 아니면 ‘주인’을 잃기 싫어서인지.
화해를 말하는 제 제안에도 강제혁은 어떤 답도 주지 않았다. 서하는 조급해졌다. 충분히 좋지 못한 하루였지만, 더더욱 엉망진창이 되고 싶었다.
“…괴롭혀 주세요.”
“…….”
“아프게요.”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이게 강제혁에겐 정답이지 않을까. 서하는 묘한 희망을 품었다. 답안지에 쓸 정답을 모르겠다. 그럴 땐 채점자의 입맛을 맞춰야지. 서하가 아는 강제혁은 사디스트였으니까. 침묵 끝에 강제혁이 서하의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으며 선명한 발음으로 속삭였다.
“씻고 와요. 빌 때까지 괴롭혀 줄 테니까.”
“…….”
“역할을 다해야지. 그게 이서하 씨가 나한테 바라는 거잖아.”
말 그대로 바라던 바였다. 하지만 어쩐지 싸늘한 그 목소리에 가슴 한구석이 지끈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
서하가 물기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욕실 바깥으로 나왔다. 벗은 몸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어두운 집 안에서 유일하게 빛이 새어 나오는 서재로 걸어 들어가자 천장에 설치된 쇠고리에 가죽으로 된 줄이 여러 개 늘어져 있었다. SM 영상을 주로 하는 포르노 사이트에서 본 것만 같은 광경이었다.
“이리 와.”
낮은 목소리에, 서하가 무릎을 꿇고 기어서 강제혁의 발아래에 당도했다. 바닥에 깔린 러그 덕에 무릎의 통증은 면했다. 순종적인 서하의 모습을 무심히 내려다보던 강제혁이 그대로 서하의 팔뚝을 잡아 거칠게 일으켰다.
“꿇으란 말이 없어도 납작 엎드리네. 노예가 천직인가 봐.”
비꼬는 게 분명한 말투였다. 방금 전 김산을 좋아하냐고 묻던, 떨리는 목소리와는 다른 질감이었다.
서하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마저 강제혁의 눈엔 진절머리 나게 예뻤다. 강제혁이 낮게 혀를 차고 사무적인 몸짓으로 서하의 손목에 가죽 줄을 매주었다.
“다리 올려.”
복잡한 심경을 지우지 못한 서하가 포기한 듯 강제혁의 말대로 움직였다. 물건의 정체를 알아채자 심리적인 상황과 관계없이 아랫배가 지끈거렸다. 허벅지를 받쳐줄 푹신한 받침대에 다리를 꿰자 자연스레 서하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벌어진 다리 탓에 엉덩이 안쪽까지 공기가 닿았다. 줏대 없는 성기가 반응하기 시작했다. 70kg은 거뜬히 나가는 몸인데, 서하는 이 와중에도 걱정이 일어 단단히 제 몸을 지탱하는 행잉 도구의 끝을 걱정스레 쳐다봤다.
“이거… 안 떨어지겠죠?”
“차라리 떨어지길 바랄 겁니다.”
무방비하게 노출된 신체에 차게 식은 강제혁의 손이 닿았다.
“입 벌려.”
서하가 입을 벌리자 둥근 공이 달린 볼 개그가 빈 공간을 메웠다. 단단히 조여진 가죽 끈이 뒷목에 채워졌다. 안대를 집어 들었던 강제혁이 잠시 생각하는 듯 서하와 손에 든 것을 번갈아 보더니 선반에 다시금 올려 두었다.
“내가 이서하 씨를 어떻게 아프게 만드는 지 똑똑히 봐요.”
아직 반쯤 말랑한 유두에, 스틸 재질의 니플 클램프가 채워졌다. 따끔한 통증에 헛숨이 터졌지만 신음은 목 안으로 삼켰다. 오늘 서하에겐 소리를 내는 게 허락되지 않았다. 벌어진 허벅지 안쪽에 나무로 된 패들이 닿았다.
“이걸로 때려줄 거예요.”
“…….”
“걸어서 나갈 수 없게.”
넓적한 매는 마치 곤장처럼 보였다. 고문에 가까운 플레이 계획이었다. 상의 없이 벌어졌던 플레이를 반성하는 건지, 강제혁은 앞으로 펼쳐질 플레이를 친절히도 알려주는 중이었다. 아직 한 대도 맞지 않은 허벅지가 가늘게 떨렸다. 고통을 기대하는 분명한 반응에 강제혁이 비틀린 웃음을 작게 터트렸다.
“숫자는 속으로 세도록 해요.”
그리고 판판한 나무패들이 서하의 벌어진 허벅지를 무참히 강타했다. 화끈하게 번지는 통증에 서하가 발끝을 오므렸다.
“마음에 들어?”
시간차를 두고 붉게 물드는 오른쪽 허벅지 안쪽이 서하의 눈에도 선명히 보였다. 입을 벌린 채론 침을 삼키는 게 어려워서, 금세 입가가 축축해지고 있었다.
“아프게 해달라고 했으니 원하는 대로 해줄게요. …그게 이서하 씨가 나한테 바라는 거니까.”
서하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끝말의 진의는 파악하지 못한 채였다. 퍽 하는 타격음과 함께 붉어진 허벅지가 다시 매질 한 가운데 놓였다.
“흐으……!”
눈앞이 반짝거릴 만큼 강렬한 통증이었다. 연달아 패들을 휘두르는 손은 기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살갗이 터지는 것만 같은 소리가 방 안에 가득 찼다. 핏줄이 터져 군데군데 검붉은 울혈이 번지고 있었다. 맞지 않은 다른 허벅지가 더 창백하게 보일 만큼.
“읍, 으…….”
서하가 울음 섞인 웅얼거림을 뱉으며 매를 든 강제혁을 간절히 바라봤다. 균일한 통증이 간절했다. 다리를 좀 더 벌려 시선을 돌렸지만 강제혁의 눈은 다른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구멍이 가려워?”
서하가 고개를 저었지만, 이미 그를 외면한 강제혁이 서랍에서 크리스탈로 된 애널 비즈를 꺼내 들었다. 반짝거리는 투명한 구슬이 빛을 받기 무섭게 서하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다. 메마른 입구에 단단하고 서늘한 구체가 닿았다.
“흐, 흐윽…….”
“벌써 울면 안 되지.”
안을 비집고 들어오는 물건은 거침이 없었다. 하나, 둘, 셋, 그리고 넷. 뒤이어 중지까지 깊게 밀어 넣어졌다. 서하가 물을 뚝뚝 흘리는 성기를 어쩌지 못하고 턱 아래로 타액을 흘렸다. 뒤를 빠듯하게 메운 비즈 밑으로 검은 줄이 툭 떨어졌다.
“흘리면 내일까지 안 내려줘.”
“흡, 으응…….”
서하는 도무지 터지는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시 터진 허벅지에 매질이 가해졌다.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중력 탓에 차차 밀려나는 비즈를 머금고자 엉덩이를 조여야만 했다. 서하의 몸이 연신 움찔거렸다. 일순 허벅지를 강타하던 나무패들이 물을 흘리는 성기를 짓뭉갰다.
“흣, 흐으으…….”
질질 흐른 타액이 바닥에 뚝뚝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었다. 귀두에서 흐른 체액을 패들 한 면에 덧바른 강제혁이 하얗게 빛나는 왼쪽 허벅지 안쪽을 문질렀다.
“아님 여기가 간지러워?”
“학, 흐윽…!”
짝 소리가 나며 내도록 통증을 기다리던 백지 같은 살갗을 물들였다. 물감이라도 번진 것처럼, 붉게 매 맞은 자국이 일어났다. 서하가 쾌감 어린 신음을 터트리며 허리를 뒤틀었다.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힘이 빠진 뒤가 구슬 하나를 반쯤 뱉어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상황이었다.
“흐읍, 학, 후으…….”
축축한 신음을 흘리며 서하가 고개를 자꾸만 저었다. 뒤를 다시 쑤셔주길 바랐다. 하지만 강제혁은 그런 서하의 신호를 무시한 채 왼쪽 허벅지를 때릴 따름이었다. 아픔은 좋았지만 뒷일이 두려웠다. 서하가 통증에 바짝 선 성기를 까딱이며 다리를 파르르 떨었다. 읍읍거리는 소음에 강제혁이 재갈의 둥근 부분을 손가락 끝으로 훑으며 허벅지 안쪽을 꾹 눌렀다. 아픔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할 말이 있나 봐.”
“흐윽, 흡…….”
“말해 봐요.”
강제혁이 서하의 입안을 틀어막았던 볼 개그를 풀어주었다. 고여 있던 타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실처럼 이어진 물기를 손으로 끊어낸 강제혁에게 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청했다.
“뒤, 하윽, 다시, 쑤셔 주세요…….”
“왜?”
이유를 묻는 말이 낯설었다. 서하가 눈을 가늘게 뜨고 강제혁의 눈을 마주보았다. 까만 눈동자는 생각을 읽을 수 없을 만큼 어두웠다.
“주인님 손으로, 흣, 안이 가려워요. 제발…….”
답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아무렇게나 이유를 지어내 그에게 고해 바쳤다. 강제혁이 마른 눈으로 서하의 낯을 면면이 살피다 손을 뻗어 벌어진 틈을 비집고 나온 구슬을 둥글렸다. 코앞에 와 닿은 강제혁의 낯이 서하의 시선을 옭아맸다. 서하가 저도 모르게 강제혁의 아랫입술을 물고 빨았다.
“귀여운 짓을 하네.”
“주인님, 제발, 흣, 흐으…….”
“뭘 해달라고?”
서하가 젖은 입술을 벌려 본능대로 속삭였다.
“쑤셔 주세요…….”
그리고 굵은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린 강제혁이 서하의 안을 두 손가락으로 쑤심과 동시에 벌어진 입안으로 혀를 쑤셔 넣었다. 성기처럼 입안을 드나드는 살덩이에 서하가 신음하는 순간 비즈의 올록볼록한 부분이 쾌감점을 강하게 짓눌렀다. 빳빳이 선 성기에서 정액이 튀었다.
사정감에 도취된 서하의 몸이 얕게 떨렸다. 손가락 두 개가 부은 입구에서 쑤욱 빠져나감과 동시에 입안을 범하던 폭행에 가까운 키스가 끝났다. 벌어진 채 떨리는 입술 사이를 빠져나가는 혀의 움직임이 농밀했다. 흐리멍덩한 시야 속, 강제혁의 상의에 제가 싸지른 희멀건 정액이 엉겨 붙은 게 보였다. 더 붉어질 뺨도 없었다. 자극에 무너져 내린 허리가 자꾸만 뒤틀리고 있었다. 그리고 채 의식하지 못한 사이 서하를 매달아 놓은 줄이 아래로 훅 내려왔다.
“…!”
순간 놀란 서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강제혁을 올려다보았다. 조정된 눈높이보다 낙하감이 더 소름끼쳤다.
“왜요, 내가 떨어뜨리기라도 할까 봐?”
강제혁의 부푼 앞섶이 서하의 낯과 상당히 가까웠다. 엉덩이가 바닥과 멀지 않아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었지만, 서하는 얌전히 입을 벌리고 혀를 내밀었다. 의미하는 바가 확실했기 때문이다. 오늘 강제혁은 저를 끝까지 몰아세울 작정인 듯했다.
“구멍 대접 받는 게 그렇게 좋을까.”
“아…….”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낮은 조롱과 함께, 바지 안에서 꼿꼿이 서 있던 남근이 서하의 입 앞에 놓였다. 붉은 살 기둥을 보자마자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대로 내민 혀를 귀두 끝에 대고 고개를 내밀어 굵은 것을 삼키자 절로 아래가 조여 들었다. 서하는 입술을 오므려 부푼 성기를 물고 빠는데 집중했다. 새하얗게 빈 머릿속이 음란한 색으로 물든다. 복잡한 생각일랑 잊고 싶었다.
“가끔, 후, 그런 생각이 들어요.”
“하, 하아…….”
“오히려 내가 이서하 씨를 위한 섹스토이 같다고.”
흥분에 절여져야 마땅한 그 목소리는 어딘가 서글픈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를, 서하는 듣지 못했다. 멍한 머리를 더듬어 구태여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저 강제혁의 물건을 입안 가득 넣고 가끔씩 뺨으로 부비고 뿌리부터 핥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서하를 가만 내려다보던 강제혁이 제 물건을 서하의 목구멍 깊숙이 쑤셔 넣었다. 대화의 종식이었다.
***
모래시계 속의 떨어지는 모래를 몇 번이고 돌이켜 다시 흐르게 했다. 행위 자체는 무의미했지만, 그 자체로 어떤 의미를 가지길 바랐다. 하얀 모래가 유리의 좁은 틈 사이로 떨어져 내리는 모습이 초연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허무맹랑한 생각이었다.
“컵라면 물이나 받든가, 주접은.”
“…….”
“아니면 양치를 하지? 그거 3분 짜리야.”
돌연 들려온 목소리에 김산이 모래시계를 움켜쥐고 고개를 돌렸다. 짧은 머리를 뒤로 넘기는 혜인의 낯엔 피곤함이 잔뜩 서려 있었다.
“…퇴근은 안 해요?”
“팔자 좋은 소리한다.”
아무렇게나 빼놓은 의자에 몸을 구겨 넣은 혜인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끄집어냈다. 구겨진 담뱃갑은 그 자체로 스트레스 덩어리처럼 보였다. 김산이 팔을 뻗어 창문을 열며 입바른 소리를 늘어놓았다.
“이 건물 금연이에요.”
“알아. 냄새만 맡는 거야.”
하얀 담배 한 가치를 손가락에 올려놓은 혜인이 마약 중독자마냥 코를 대고 냄새를 맡고 있었다. 차라리 흡연박스에 가지.
“노친네들 여자가 담배 문 꼴 보면 뒤집어지잖아. 갑자기 심장마비로 뒈지면 복잡해지니까 참는 거야.”
딱히 말하지 않았는데도 속내를 읽은 건지, 혜인이 귀찮음이 잔뜩 묻어나는 목소리로 첨언했다. 김산이 그런 혜인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가방을 챙겨 들었다. 아무래도 혼자 있고 싶었다.
“꺼지려고?”
“…촛불도 아니고 사람이 어떻게 꺼져요.”
“너 그거 서하 앞에선 하지 마라. 안 그래도 영계랑 비교될 텐데, 농담에서 아저씨 냄새 나.”
혜인이 대놓고 얼굴을 구기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김산이 말없이 충고를 새겨 넣으며 자리를 뜨려던 때, 담뱃잎 향을 마시던 혜인이 그 손목을 잡아챘다. 제법 강한 힘에 김산이 고개를 돌려 혜인을 보았다. 하지만 혜인의 시선은 정면을 향한 채였다.
“산아.”
“…….”
“후회할 짓은 되도록 하지 말고, 무덤 들어가기 직전까지 아쉬울 것 같으면 그냥 저질러.”
다정한 부름과 함께 떨어진 조언은 꽤 깊이 박혀들었다. 김산이 턱을 단단히 다물고 혜인의 말을 되새겼다.
“사과해야 할 때는 쓸데없이 망설이지 말고, 웬만하면 구라도 치지 말고.”
“…알았어요.”
김산이 제 손목을 버겁게 쥔 혜인의 손을 잡아 한 번 꾹 쥐고 다시 몸을 물렸다. 일말 남아 있던 미련이 툭 떨어져 나가는 듯했다. 혜인의 말이 옳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따지기 전에, 사과할 일은 사과를 해야만 했다.
“빨리 꺼져라.”
손을 휘휘 젓는 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김산이 조용히 말했다.
“미안해요.”
“…나한테 사과하라고 강요한 건 아닌데.”
“그래도 사과드려요. 고맙습니다.”
감사 인사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저 역시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
입안이 온통 정액으로 끈적했다. 거칠게 쑤셔진 목구멍이며 기구에 조여진 유두가 통증에 화끈거렸다. 매달린 채로 움직일 수 있는 거라곤 발끝이나 손가락이 전부여서, 서하는 온전히 강제혁의 손아래 제 몸을 던져 놓고 신음하고 있었다. 저를 능욕하는 두 눈은 심연처럼 까맣고 어두웠다. 허벅지는 검붉게 물들어 모진 고문이라도 당한 것 같았다. 뒤를 채우던 크리스탈 비즈를 한 번에 당겨 잡아 뺀 강제혁이 서하를 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숨 막히는 침묵 속에서, 서하는 엉망이 된 채 벌어진 구멍을 더 거칠게 들쑤셔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도 모자라?”
“…네, 부족해요.”
제 목구멍을 아작을 내놓고도 아직 흉흉한 그의 성기를 서하가 멍하니 응시했다. 당겨진 가죽 줄로 인해 시야가 다시금 강제혁의 가슴께에 닿았다. 타의에 의해 움직이는 몸이 마치 제 것 같지가 않았지만 통증은 오로지 제 몫이었다. 강제혁이 그런 서하의 뺨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강압적인 스킨십에 서하의 성기가 다시금 발기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어쩐지 유쾌하지 못한 시선으로 살피던 강제혁이 서하의 발간 귓바퀴를 아득 소리가 나게 씹었다. 그리고 서하의 벌어진 구멍에 손가락을 한 번에 세 개쯤 욱여넣었다.
“하윽…!”
“내가, 어디를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은데.”
“어, 어디요? 지금요?”
색욕으로 진탕이 된 와중에도 충격적인 말이었다. 겁이 덜컥 난 서하가 강제혁에게 시선을 맞추며 다급히 물었다. 내일까지 매달아놓는다더니, 그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나. 강제혁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서하의 뺨에 입을 맞추곤 물었다.
“지금은 가면 안 돼?”
“가지마세요…….”
“듣기 좋네.”
“아…!”
손가락을 움직여 뒤를 쑤시는 손길은 다정했지만 거칠었다. 서하의 손가락이 연신 꼬물거렸다. 가죽 줄이 아니라 강제혁의 두터운 몸에 매달리고 싶어서였다.
“…자리를 비워야 되는데, 네가 너무 음란해서 마음이 안 놓여.”
“흣, 으응…!”
“조금만 혼내줘도 발정이 나잖아.”
무슨 뜻인지 의미 파악이 어려운 꾸중이었다. 화가 난 음성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래서 어딜 언제 가야 한다는 건지 왜 가야 한다는 건지 무엇도 알 수 없었다.
“미리 시험을 해보려고.”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시험이란 단어가 두려움을 가중시켰다. 빳빳한 성기를 우악스레 쥔 손에 고개를 꺾으며 신음하는 사이 달칵 소리가 났다. 투명한 정조대가 서하의 성기를 옭아매고 있었다. 이미 부푼 성기가 쾌감과 갑갑함으로 뒤덮였다. 발가락을 연신 오므리고 펴길 반복하는 사이 몸을 돌린 강제혁이 서랍에서 꽤 두꺼운 바이브레이터를 꺼내 서하의 입에 잠시 물렸다.
“빨아.”
서하가 고개를 움직여 정성껏 남근모양 바이브레이터를 빨자, 강제혁이 젖은 물건을 꺼내 서하의 벌어진 뒤로 욱여넣었다. 순식간에 뒤를 메운 굵은 막대에 서하가 엉덩이를 바짝 조이며 가쁜 호흡을 짧게 뱉어냈다. 타액이 입꼬리를 타고 흐르는 때, 스위치가 켜지고 웅웅거리는 소음과 발작적인 진동이 내벽을 울려대기 시작했다.
“하아윽…!”
내버려 두었던 안대를 몇 번 만지작거리던 강제혁이 서하의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손에 든 것을 걸어주었다. 삽시간에 시각을 차단당한 서하가 짧은 신음을 뱉으며 울먹거렸다.
“학, 으읏, 아…!”
“자리 비우는 때를 대비해서 우리 고양이가 얼마나 참을 수 있는 지 보려고.”
그리고 살갗을 아프게 어루만지던 손길이 떠나갔다. 달칵 소리가 났고, 그 후에야 서하는 제가 이 방 안에 홀로 남았음을 깨달았다. 텅 빈 공간에 매달린 채 방치되어 기계에 범해지는 것이 몹시 낯설고 동시에 외설스러웠다. 뒤를 헤집으며 진동하는 모조 성기에 서하가 앓는 신음을 인내 없이 터트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애를 썼다.
“주인님, 흣, 하윽, 아…….”
갑작스러운 방치플에 눈물이 자꾸 번졌다. 까맣게 차단된 시야가 공포로 가득 찼다. 얼마나 이렇게 있어야 하는 걸까. 뒤를 쑤시는 물건은 거칠고 무성의했다. 진동이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 성기는 아플 정도로 발기했고 안대는 어느새 축축해졌다.
“흣, 흐으, 어, 어디, 흑…. 가지마세요, 제발…….”
눈물이 자꾸만 흘렀다. 무섭고 수치스러웠다. 언제쯤 돌아올까. 그가 시험하고자 하는 건 대체 뭘까. 왜 그러는 걸까. 뒤이어 서러움이 치고 올라왔다. 아무것도 모르고 싶은데, 알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궁금하게 만드는 그가 원망스럽고, 보고 싶었다.
“강, 제혁 씨……. 어디, 어디 있어요? 무서워요. 아, 흐악, 아……. 나 좀, 허윽, 어떡, 아…!”
그의 이름을 내뱉자 성감이 고조됐다. 몰려오는 사정감에도 구겨진 성기로는 쉽게 정액을 사출할 수 없었다. 진동이 거세지고 뒤가 저릴 지경이 되었을 때, 떨리는 입술 사이로 축축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이제는 익숙하다 못해 입안에 없는 게 어색할 지경인 강제혁의 혀였다. 나간 줄 알았는데, 언제 다시 들어온 걸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은 그가 필요했다. 서하가 제 입안을 쑤시고 드는 혀를 핥고 빠는 사이, 툭 소리가 나며 바이브레이터가 떨어졌다. 강하게 허리를 쥔 손이 시원했다. 심하게 달아오른 체온에, 그의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벌어진 뒤로 강제혁의 흉흉한 성기가 쑤시고 들어왔다.
“아…! 아, 읏, 아으응…!”
“…또 말해 봐.”
낮은 음성과 함께 제 애널을 찢어먹을 듯 박아대는 추삽질이 색스러웠다.
“가, 강제혁 씨…!”
“응.”
“나 좀, 제발…! 아, 아읏, 학, 하아, 아, 으응, 가지 마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연신 귓가를 강타하는 퍽퍽 살 부딪히는 소리에 서하가 자지러지는 신음을 뱉으며 입술을 문댔다. 뺨으로 추정되는 부분에 서하의 혀와 입술이 마구잡이로 뭉개졌다.
“거기가 아니지.”
웃음기 스민 목소리가 반가웠다. 그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얼굴, 흣, 주인님, 아, 강제혁 씨 얼굴, 아, 아아…! 보여, 흐윽, 아!”
안대가 벗겨짐과 동시에 열 오른, 잘생긴 제 주인의 낯이 드러났다. 서하가 그런 강제혁의 입술에 제 것을 겹쳤고, 순간 손목을 조이던 가죽수갑이 풀렸다. 바라던 대로 강제혁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은 서하가 뒤를 뚫는 강제혁의 성기를 느끼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쾌감이었다.
***
뜨끈하게 열 오른 살결에 닿는 미지근한 물이 유독 시원하고 기분 좋게 느껴졌다. 잠기운이 가시지 않은 머리는 몽롱했지만, 목덜미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이나 수면의 파동이 안락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음…….”
이를 세워 핥아 올리던 목덜미를 콰득 깨무는 통증에 잠기운이 조금 달아났다. 연약한 부분에 닿은 송곳니가 묘하게 관능적이었다. 눈을 뜨고 상황을 파악하니 제가 욕조 안에서, 강제혁의 품에 안겨 여기저기 만져지고 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강제혁 씨.”
“일어났어요?”
나른한 목소리가 진하게 울렸다. 젖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춘 강제혁이 서하의 허리를 당겨 안으며 입술을 물었다. 단단한 혀가 입술 사이를 가르고 밀려들어오는 감각이 외설스러웠다. 입안을 거칠게 헤집는 키스가 숨을 가쁘게 만들었다. 그 미약한 쾌감에 서하의 몸이 연신 움찔거렸다. 한참 그렇게 혀를 섞는 행위가 이어졌고, 마침내 접했던 입술을 떼어냈을 쯤엔 허리 아래가 녹진해진 뒤였다.
“…저 얼마나 잤어요?”
부딪힌 코끝이 간지러웠다.
“그걸 잤다고 하긴 뭐 한데. 기절한 거 아니에요?”
“…….”
“한 시간 쯤 잤어요.”
그와 플레이를 하면 반 이상은 기절하는 것으로 마무리를 짓는 것 같았다. 다시금 입술을 겹치고 싶다는 욕구를 애써 내리누르며 서하가 먼저 고개를 틀었다. 등 뒤에 닿는 강인한 남체가 열기를 품고 제 몸을 구속하고 있었다.
“다 씻고 약 발라야 해요.”
“좀 아파요.”
“아플 만하지.”
욕조에서 묵직하게 가라앉아있던 몸을 일으키자 일순 현기증이 일었다. 다행히 강제혁이 휘청거리는 몸을 잡아주어 넘어지진 않았다.
“더 아프고 싶어서 그래요?”
“아니요……. 현기증이 좀 나서.”
강제혁이 그런 서하를 번쩍 들어 안아주었다. 헉 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놀랐지만 갑자기 발이 붕 뜨니 떨어질까 무서워 강제혁의 목에 엉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결코 작은 키도 가벼운 몸도 아닌데, 어쩔 수 없는 체격차로 아기 취급을 당하는 것 같아 몹시 창피했다.
“갑자기 안으면 어떡해요.”
“이러다 넘어지면 구급차 불러야 할 텐데, 이서하 씨 몸이 누가 봐도 맞은 몸이라 신고 당할 것 같아서요.”
장난스럽게 농담을 던지는 강제혁은 기분이 꽤 좋아보였다. 젖은 살갗에 뺨을 기댄 서하가 강제혁의 목덜미에 입술이 닿지 않도록 애를 쓰며 그 기색을 살폈다. 플레이 전까진 살얼음을 걷는 것 같은 분위기였는데, 그래도 돔인 그의 기분이 나아졌다니 서하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그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스스로가 정상 같진 않았지만 당장은 그렇게 생각했다. 싫지 않았다.
“내가 감옥에 가면 안 기다려줄 거잖아요.”
“무슨 그런 말을 해요.”
“아니라곤 안 하네. 일단 엎드려 봐요.”
강제혁이 서하를 푹신한 침대 위에 내려주며 말했다. 그가 시키는 대로 녹아들 듯 엎드린 서하가 발가락을 꼬물거렸다. 군데군데 욱신거리긴 했지만 맞은 곳이 전부였다.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린 후에 강제혁이 연고며 소독약이 든 구급상자를 들고 다가왔다. 가만히 누운 서하가 그 구급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쯤 되면 제 이름을 써 붙여도 좋을 통이라고 생각했다.
“다리를 벌려야지.”
“읏…….”
뭉그적거리며 다리를 벌리는 사이, 침구에 마찰된 상처 부위가 쓰라렸다. 체온보다 차가운 소독약과 미끈한 연고가 차례로 다리 사이와 둔부에 발라졌다. 쓰라린 느낌이 꽤 자극적이어서 서하가 눈을 질끈 감았다.
“엉덩이 벌려보라고 하면 흥분할 겁니까?”
“…저도 이성이란 게 있습니다.”
약간 오기가 나서, 애써 멀쩡한 목소리를 내며 서하가 먼저 엉덩이를 조심히 벌렸다. 은밀한 곳에 찬 공기가 닿자 소름이 돋았지만 티내고 싶지 않았다.
“빨갛게 부었어요.”
“…….”
“보여주고 싶은데.”
꽤 만족스러운 듯한 음성이었다. 서하는 그저 베갯잇에 얼굴을 파묻을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아…!”
입안을 파고들던 혀가 이번엔 부은 입구를 적시고 있었다. 허벅지를 잡은 채 뒤를 끈덕지게 핥고 쑤시는 혀가 야릇하고 잔인했다. 이성이 있다고 답하기 무섭게 그 이성을 죽이려하는 강제혁이 더 잔인했다. 하지만 상처 부위를 무참히 짓누르는 손가락 끝이 주는 통증과 안을 들쑤시는 혀가 주는 쾌감이 진득하게 어우러졌다.
터지는 신음을 막고자 서하가 베갯잇을 이로 물었다. 제 뒤에 얼굴을 묻고 있을 강제혁의 낯을 상상하자 머리끝까지 열이 올랐다. 다정하고도 잔혹한 애무에 서하의 성기가 파들거리며 선액을 뱉어냈다. 흰 침구가 액체에 젖음으로써 보다 진한 색으로 물들어갔다.
“그만, 흣, 으응…!”
혀를 떼어내기 무섭게 회음부를 짧은 손톱으로 쭉 긁어내리는 손길에 엉덩이가 조여들었다. 뻐끔거리다 오므라드는 구멍을 기분 좋게 감상하던 강제혁이 쪽 하고 입구에 잔 뽀뽀를 해주었다.
“약 발랐다고 생각해요.”
“…….”
“나 없이 하루는 버틸 수 있어요?”
꽤 달콤한 질문이었다. 연인 사이라면 아주 진하게 사랑에 빠졌을 때 나눌 만한.
“이 음란한 몸이 나 없이 하루라도, 안 맞고 버틸 수 있겠냐고.”
하지만 질문이 가리키는 방향이 달랐다. 그는 지금 돔으로서 묻고 있었다. 구속과 매질로부터 자유로운 하루를 버틸 수 있겠냐는 물음이었다.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어쩐지 음산하게 들렸다. 서하가 고개를 모로 돌려 그런 강제혁의 얼굴을 보았다.
“…참을게요.”
10년도 참았다. 그가 말하는 하루가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를 만나고도 일주일씩 플레이를 하지 못한 날들이 있었질 않나. 서하는 그제야 강제혁의 질문에서 불안감을 찾아냈다. 그가 불안해하고 있었다.
“어디… 가요?”
“어디 갑니다.”
“언제요?”
“내일. 하루예요. 연락 안 돼도 허튼 짓 하지 말고 일과 보고는 계속 하세요.”
돌아온 대답은 뜻을 알 수 없게 모호했다. 서하가 흥분을 잠재우려 애쓰며 베개를 부둥켜안았다. 그 사이 구급상자를 정리한 강제혁이 탄탄한 등을 그대로 보이며 돌아서 서랍을 열고 상자를 수납하고 있었다. 서하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섬세하게 꿈틀거리는 등 근육을 저도 모르게 넋 놓고 바라보다 입술을 물었다. 어디 간다고 했으면서, ‘어디’에 가는 지 끝끝내 말해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저 역시 그에게 구태여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기에 따질 수도 없었다. 심지어 만약 제가 말하지 않는 것들에 대해 강제혁이 묻는다면, 저는 대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반대로 강제혁에게 제가 질문을 던진다면? 강제혁에겐 답할 의무가 없었고, 제겐 물을 권리가 없었다. 그런 사이였다. 결국.
정리를 마친 강제혁이 방 안의 전등을 끄고 어둑해진 침상 위로 올라오는 동안, 서하는 고개를 베개에 파묻은 채 자꾸만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안으로 욱여넣었다.
‘어디 가는 건지 물어보면 안 돼요?’
물어보고 싶었다. 알고 싶었다. 짧은 순간 강제혁이 고르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잔잔히 울렸다. 그에 대해 궁금한 것을 물을 권리, 잠든 그를 깨울 권리. 아무 것도 주어진 게 없었다. 문득 차오르는 설움은 낯선 것이었다. 그를 만나고 드물게, 쉬이 잠들 수 없는 밤이었다.
***
- 바닐라 새끼는 이제 빠져. 주제 파악이나 하라고.
서하가 저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는 뒷말은 제쳐두고, 그 짧은 경고가 자꾸만 김산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였다. 바닐라. 김산은 그 평범한 단어가 왜 저를 가리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결국 정보의 바다를 믿고 인터넷에 바닐라를 검색해보기에 이르렀다. 당연하게도 바닐라 한 단어로는 강제혁의 경고를 해석할 수 있을 만한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보다 전문적으로 보이는 설명은 끽해야 베이킹 레시피가 전부였다.
“이걸 서하한테 물어볼 수도 없고…….”
그날 이후로 서하를 만나지도 못했다. 차마 먼저 연락을 할 자신도 없었고. 김산이 까끌하게 올라온 수염을 매만지며 피곤한 얼굴을 찬물로 적셨다. 바닐라에 은어라는 검색어를 덧붙여볼까. 강의며 프로젝트, 논문 작성으로 피로한 와중에도 그에 대한 생각은 지워지질 않았다. 결국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 창에 ‘바닐라 은어’를 검색해보았다. 그리고 단번에 눈에 들어온 것은 ‘게이’라는 단어였다. 게이들만의 은어. 단순히 이성애자를 가리키는 말이었던가. 맥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강제혁은 제가 이성애자라고 생각해서 빠지라고 한 걸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보여준 장면의 폭력성이 짙었다. 김산이 몇 번 더 마우스를 움직여 페이지를 여닫길 반복하자 보다 음습한 게시글이 펼쳐졌다.
「Smer를 위한 용어 정리」
이런 쪽으로 문외한인 김산에겐 어려운 단어들뿐이었다. Smer가 뭘까부터 시작해서 스팽이니 본디지니 영단어에 기초를 둔 희한한 용어들이 정리되어 있었다. S는 가학 성애자인 사디스트를 의미했고 M은 피학 성애자인 마조히스트를 의미하는 말이었다. 그리고 두 가지 성향을 전부 가진 스위치, 그 다음으로는 바닐라였다. Smer가 아닌 사람. 단순한 정리였지만 그 정의는 저와 그들을 가르는 선이 되어 주었다. 이제야 강제혁의 경고를 해독할 수 있었다. 충격 어린 눈으로 용어를 꼼꼼히 읽어 내려가던 김산의 머릿속에 그날의 서하의 모습이 생생히 펼쳐졌다.
- 흣, 으, 주인님 좆물 먹여 주세요…….
- 저는 주인님의, 읏, 노예예요.
서하는 강제혁을 주인님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노예라고 칭했다. 당황한 탓에 김산은 관계 중에 주인님이나 노예란 단어를 내뱉는 모습을 의심하지 못했다. 다시금 폭력적으로 느껴졌던 그날의 분위기가 상기됐다. 그게 제가 찾은 답이 정답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자마자 뻐근하게 발기한 성기를 가라앉히려 애를 쓰며, 김산이 창문을 거칠게 열어 젖혔다. 초여름의 미적지근한 바람이 달아오른 낯으로 쏟아졌다.
“서하야…….”
낮은 한숨이 터졌다. 언제부터, 왜. 머리가 지끈거렸다. 서하의 그 비정상적인 모습에 흥분하는 스스로가 역겨웠지만, 그게 성향이라는 걸 알고 나자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이건 제가 모르는 세계였다. 그곳에 몸을 담근 서하를 건져 올리고 싶다는 마음과 더 밀어 넣고 싶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이 어지럽게 뒤섞였다. 오래전에 끊은 담배가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