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선물의 의미
“입 벌려 봐.”
학교 엘리베이터 앞에서 마주친 후 서하가 들은 첫 마디였다. 다른 학생들이 있는 로비에선 사람 좋은 얼굴로 정중히 인사를 해놓고 둘만 남으니 반말을 던지는 게 아주, 훌륭한 도미넌트다웠다.
서하가 별 저항 없이 입을 아하고 벌렸다. 전날 강제혁이 펠라티오를 시키며 찢어놓은 입가가 따끔거렸다. 모양 좋은 그의 손가락이 입안으로 쑥 들어왔다. 복도 끝은 사람이 없긴 했지만 누가 올지도 모르는데, 겁도 없지. 물론 응해주는 서하 본인도 겁 없긴 마찬가지였다. 순간적으로 중지를 올려 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물론 실제로 그러진 않았다. 당황하는 그의 얼굴도 보고 싶었지만, 그보단 손가락을 빠는 게 더 좋았다.
손가락 두 개가 입안을 쑤실 듯 들어와 동그랗고 딱딱한 무언가를 남기고 빠져나갔다. 아쉬움에 서하가 입술을 다물어 빠져나가는 손가락 끝을 살짝 물었다. 부드럽게 달라붙는 입술을 훑어낸 강제혁이 일상적인 말투로 물었다.
“맛있어요?”
혀를 굴려 입안에 든 것을 맛보니 사탕이었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네.”
벌써 그에게 맛있냐는 물음을 들은 게 꽤 된다. 강제혁은 섭에게 무언가 먹이는 걸 좋아하나 보다. 서하가 속으로 가만히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그런 서하를 찬찬히 살피던 강제혁이 뜬금없이 물었다.
“좋아해?”
사탕에 대한 감상을 묻는 걸 텐데, 괜히 이상하게 들리는 말이었다. 중의적인 질문일까. 그렇다한들 사탕 외에 무엇에 대한 호오를 묻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좋아해요, 레몬 맛.”
서하가 사탕의 맛을 추측해 대답했다. 시고 단 사탕의 맛이 혀 안쪽을 자극한다. 색깔을 봤다면 좀 더 확신할 수 있었을 텐데 안 보고 말하려니 조금 헷갈렸다. 생각보다 시각적인 부분이 크구나. 멍하니 생각하는데, 다행히 정답이었는지 강제혁이 부정하지 않고 물었다.
“다른 건?”
강사와 학생이 복도에서 뜬금없이 사탕 맛의 기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게 좀 이상했지만 보는 사람이 없으니 걱정할 건 없었다.
“라임 맛도 좋아하고…….”
어떤 사탕을 좋아했더라. 평소 생각해본 적 없던 문제였기 때문에 서하의 말끝이 금방 늘어졌다. 사실 사탕보단 방금 제 입안을 헤집듯 출입한 손가락의 맛이 자꾸 입가에 맴돌았다. 서하가 그 맛과 감촉을 지우려 열심히 사탕을 굴려 빨았다. 그 사이 서하가 사탕을 먹는 것을 만족스러운 눈으로 보던 강제혁이 웃음기 섞인 감상을 중얼거렸다.
“시큼한 걸 좋아하나 봐요.”
중의적인 말이었다. 이번엔 목적어가 생략되었어도 두 번째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시큼한 거라면 뻔하지 않나. 바로 전날 강제혁이 말하는 시큼한 액체를 한 가득 삼킨 몸이기에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는 문제였다.
“…강제혁 씨는요?”
음습한 평가에 상기된 얼굴을 감추고 싶어 서하가 빠르게 되물었다. 화제를 전환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탕 별로 안 좋아해요.”
딱히 긍정적인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의아한 구석이 있었다.
“근데 왜 들고 다녀요?”
“이서하 씨 주려고.”
당연히 이는 궁금증에 좋아하지도 않는 사탕을 왜 들고 다니는 거냐고 물었는데,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것 같은 눈빛이 돌아왔다. 그리고 짧게 떨어진 이유는 대답하기가 머쓱한 내용이라, 서하가 눈을 굴렸다. 약간 어디 로맨스 드라마에서 본 것 같은 장면인데. 물론 평범한 한국의 로맨스 드라마에선 볼 수 없는 장면이긴 했다. 드라마에서 손가락을 빨진 않으니까.
괜히 간질간질해지는 묘한 기분에 서하가 입을 꾹 다물고 사탕을 먹는 것에 집중했다. 조금 있으면 강의를 진행할 시간인데, 사탕을 물고 강의에 임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그걸 물려준 주인 앞에서 사탕을 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열심히 빠는 수밖엔 없었다.
“감사 인사는?”
서하가 안심할 만한 차가운 목소리가 떨어졌다. 사탕을 먹느라 혀가 뻣뻣했다.
“…감사합니다.”
서하는 귀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애써 무시하며 강제혁이 바라는 대답을 뱉었다. 입이 간지러웠다.
“착하네.”
사탕의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달디 단 칭찬이었다. 수업만 아니면 어디 외진 곳에서 일이라도 치르고 싶을 판이었다. 그러기엔 주어진 시간이 짧았지만.
***
뜨겁게 달아오른 엉덩이를 만지는 손길에 서하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더 없이 만족스러운 때였다. 살짝 열어놓은 창문 사이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열 오른 몸에 딱 좋은 온도였다. 푹신한 침대에 눕혀진 채 후희와 같은 애프터케어를 받고 있자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었다. 정신없이 범해지다 까무룩 기절하듯 잠드는 것도 좋았지만, 이런 것도 좋았다.
서하가 입가에 스미는 웃음을 잠재우려 얼굴 근육에 힘을 주고 베개를 끌어안았다. 맞은 곳이 전부 욱신거렸지만 차가운 크림이 열기를 한 김 식혀주고 있었다. 평화롭다. 김산과의 일도 없던 일로 덮어지고, 강제혁에게 거짓말을 할 일도 사라지니 마음이 아주 편했다.
“기분 좋은 고양이 같네.”
“흣, 으응…….”
서하의 허벅지를 쓰다듬듯 치료하던 강제혁이 상처 부위를 꾹 누르며 속삭였다.
“마를 때까지 돌아눕지 말고, 오늘 자고 가요.”
“…네.”
노곤한 느낌에 금방이라도 잠들 것만 같았다. 서하는 제 옆에 자리를 잡고 누운 강제혁을 멍하니 바라보며, 먼저 잠들지 않기 위해 눈을 열심히 깜빡거렸다. 잠옷 한 장 허락되지 않은 몸이었지만 쓰다듬는 손이 있어 허전함이라곤 한 꺼풀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두운 침실, 플레이의 여운이 진하게 남은 공기 중에 두 남자의 숨결이 천천히 섞여들고 있었다. 서하는 제 몸을 어루만지는 강제혁의 눈을 가만가만 쳐다보며 지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고민했다.
“제모할 생각 있어요?”
힘이 풀린 복근을 천천히 매만지다, 사타구니의 수풀까지 손을 내린 강제혁이 의외의 질문을 던졌다. 별로 촉감이 좋지 못할 것 같은 아래를 간지럽히듯 헤집는 손가락이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시키시면…….”
서하가 별 고민 없이 대답을 내놓았다. 음모에 집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이 깎으라면 깎아야지 별수 있나.
“야하네요.”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마주 웃어야 할지 고민하던 서하가 강제혁의 의중을 떠보았다.
“하고 올까요?”
“그냥 하면 아파서 안 돼요.”
“아…….”
해본 적이 있어야 알지. 조금 머쓱해진 서하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하반신의 검불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갑작스러운 질문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어려웠다.
“해줄까?”
가볍게 묻는 말이긴 했지만 신기함이 앞섰다.
“그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재주가 많다고 해야 할지, 아님 이전에 만나던 섭들 제모도 본인이 해준 건가. 그런 생각까지 하자 서하는 문득 강제혁의 과거가 궁금해졌다. 지금의 강제혁은 BDSM 커뮤니티를 일절 관둔 상태였고, 예전에 만나던 파트너들도 거의 일회성 만남이었다고 이야기 했었다. 저도 얼추 알고 있던 사실이었고. 새삼 그의 전력이 궁금해지는 게 이상했지만, 궁금한 걸 안 궁금하다고 할 수는 없었다. 어차피 물어볼 것도 아닌데.
“해본 적은 없는데,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셀프키트 같은 것도 팔던데.”
“별걸 다 파네요.”
조금 잠이 깬 서하가 보다 선명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럼 이전에 해본 적은 없는 건가. 하지만 플레이는 많이 했겠지. 돌연 다른 사람의 엉덩이를 때리고 성기를 삽입하는 강제혁의 모습을 떠올리자 기분이 묘하게 불쾌해졌다. 아니, 좆같아졌다.
뜬금없는 상념을 지우고자, 서하가 어둠 속에서 휴대폰을 찾아 검색어를 입력하다 겨우 적절한 글을 발견해 빠르게 읽어냈다. 물론 제대로 된 검색어를 찾기 까지 ‘거시기 털 뽑기’, ‘음모 제거’ 같은 이상한 검색어를 입력하긴 했다.
제 앞에서 골몰하듯 인터넷을 뒤져보는 서하의 모습을, 강제혁은 즐겁게 관람했다. 깜깜한 와중에 휴대폰 불에 비친 서하의 하얀 얼굴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찾아보니까 잘못하면 엄청 아프다는데요.”
눈썹을 찌푸리고 입술을 움찔댄다. 별 거 아닌 표정 변화였지만 강제혁은 그 안에 서린 서하의 감정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두려움 한 스푼, 걱정 두 스푼, 그리고 기대감 반 스푼.
“아픈 거 좋아하잖아요.”
이제는 귀에 배어버린 말이다. 그가 놀리듯 대꾸하자 서하가 금세 발간 입술을 조가비마냥 다물었다. 몸을 가까이 접붙인 강제혁이 서하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당겼다. 입술이 닿기 직전, 까만 동공을 응시하며 어느새 뽀송해진 엉덩이를 손에 쥐었다.
“아프게 한 다음에 크림 발라줄게요. 우리 평소에 하는 거랑 별반 다를 거 없네.”
‘우리’라는 단어가 달다. 강제혁이 서하의 입술에 제 것을 부딪혔다. 그 후엔 촉촉한 혀가 마주 닿았다. 입술을 빠는 소리가 밤공기 사이로 어지러이 얽혀들었다.
***
그의 말이 실천된 것은 며칠 뒤였다.
“그렇게 있으니까 꼴리네요.”
강제혁이 벌거벗은 채로 침대에 묶여있는 서하를 천천히 훑어보며 말했다. 사지를 구속당한 서하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강제혁이 말하는 것에 대한 의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나체의 섭이 무력하게 구속된 모습을 어떤 돔이 싫어할까.
“방치 플레이는 어때요. 한 번 할까.”
강제혁이 검정색 실리콘 장갑을 손에 꿰어 넣으며 지나가듯 묻는 말에 서하가 몸을 움츠렸다. 그래봤자 움직인 범위는 티끌에 가까웠다.
“시, 싫어요.”
반사적으로 싫다고 하긴 했지만, 당연히 싫지 않았다. 그저 관망하는 돔 아래서 사정하지 못한 채 방치되는 게 싫을 리 없었다. 하지만 방치플의 범위는 넓었다. 잔뜩 흥분한 채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하염없이 그만 기다리는 것도 방치플의 하나였다. 그래서 내심 두렵기도 했으므로, 싫다는 말이 튀어나온 것이다.
“싫어?”
그리고 커다랗고 섹시한 손에 검정색 얇은 장갑이 덧씌워진 모습이 서하의 눈을 사로잡았다. 차가운 낯이 저를 꿰뚫듯 보는 순간 발기하고 말았다.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섹시한 탓이었다. 그런 서하를 본 강제혁이 피식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지 빨딱 세우고 싫다고 하는 거, 별로 설득력 없는 것 알죠?”
그것 때문에 발기한 건 아니었지만, 방치플이 완전히 싫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서하가 입술을 꾹 다물고 시선을 돌렸다. 이윽고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강제혁이 날이 선 작은 제모용 나이프를 들고 다가왔다. 건조한 아래에 금세 면도용 크림이 발리고 나이프가 닿았다.
차가운 칼날의 감촉이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반항할 수 없도록 구속당한 사지와 급소 위에 닿는 흉기가 공포에 상승효과를 더하고 있었다. 가장 위쪽의 음모가 삭하는 소리와 함께 베어져 나갔다. 서하의 훌륭한 변태성은 그런 와중에도 발기를 유지시켜주고 있었다. 서하는 두렵고 공포스러운 동시에 야릇하고 농밀한 기분을 느꼈다.
“그렇게 겁먹은 눈 하면 역효과란 걸 알아야지. 실수하고 싶어지잖아.”
“나이프는…….”
“내가 이걸로 이서하 씨 상처 낼까 봐?”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크게 뜨고 물었는데, 질문이 돌아왔다.
“아…….”
사실은, 그간 왁싱 영상을 보며 내심 기대를 했었기 때문에 조금 김이 샜다. 이거보다 더 아픈 게 있다는 걸 아는데, 굳이 이 방법을 택한 강제혁이 의아했다. 아픈 거 좋아하는 거 알면서 왜? 이거보다 더 아픈 거 있잖아! 서하가 입술을 꾹 깨물자 강제혁이 짧게 웃고 나이프를 거뒀다.
“실망했나본데.”
그의 말이 옳았다. 날카롭게 벼린 칼날이 아래에 닿는 것도 두렵고 흥분됐지만, 서하가 기대한 것은 짧고 화끈한 통증이었다. 매질을 닮은 듯 닮지 않은 그런……. 이후에 찾아올 욱신거리는 쾌감도.
“이걸 기대했어요?”
“…….”
“혹시나 해서 둘 다 준비했는데, 그러길 잘했네.”
그리고 강제혁이 들어 보인 통은 서하가 인터넷 검색으로 수없이 본 물건이었다. 말 한 마디 안 해도 제 속을 속속들이 아는 강제혁이 신기하고 두려웠다. 남의 속마음이 들리는 초능력도 있지 않나.
‘나도 난데, 너도 참 지독한 변태다.’
속으로 생각해봤지만 그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틀린 말이 아니라 타격감이 없나? 서하가 영양가 없는 생각을 접고 긴장감에 흐트러진 호흡을 정돈하지 못한 채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성기가 조금 더 단단해졌다.
“솔직해서 좋네요.”
“…….”
“아프게 해줄게요.”
강제혁이 왁스를 녹이러 방을 비운 사이, 서하가 긴장된 근육을 풀고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쿠퍼액이 고인 귀두 끝이 아주 잘 보였다. 쪽팔린 만큼 기대된다. 시선을 하얀 천장으로 돌린 서하가 가까워지는 발걸음에 긴장을 굳혔다. 기대하던 통증이 다가올 시간이었다. 얼마나 아플까.
그리고 서하는 10여 분 후 이 선택을 후회했다. 생털을 뜯기는 감각은 결코 환영할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제가 아무리 변태새끼라도.
***
어느덧 봄기운이 완연했다.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떠는 학생들 사이로 캠퍼스를 가로지르는 남자의 발걸음은 묘한 기운을 담고 있었다. 다행히 행인들은 인지하지 못할 수준이었지만. 남자, 서하는 지금 밋밋한 국부가 신경이 쓰여 걸을 때마다 발끝이 오므라들어 고역이었다. 바로 어제, 제 어린 주인님께서 친히 털 정리를 해주신 덕이었다.
하얗고 맨들맨들한 그곳은 까마득한 옛날, 2차 성징이 오기 전에 본 모습과 과히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낯이 부끄러웠고 생각보다 더 수치스러웠다. 까만 실리콘 장갑을 낀 강제혁의 모습에 조금 흥분한 탓에 왁싱 시작도 전에 발기했다. 그리고 사지를 묶인 채로 제모 방법을 선택하고 최종적으로 강한 통증을 동반한 채 음모를 잃었다. 어찌나 아픈지, 서하가 통증에 호소하듯 울먹이자 강제혁은 그림 같게도 웃어 주었다.
- 이서하 씨가 원하던 방법이잖아요.
촌철살인에 더 할 말이 없었다. 그 후엔 크림을 발라주며 다른 곳도 아프고 싶으냐고 재차 물었다. 서하는 아닌 척하면서도 빳빳이 서는 성기에 신음하며 뒤로 딜도를 물고 매질을 당해야 했다. 물론 오백 점짜리 플레이였지만.
“어디 가?”
그리고 누군가 서하의 손목을 덜컥 잡았다. 이 학교에서 저를 이리 대할 사람은 단둘뿐이었다. 그나마 좀 다정한 음성은…….
“선배.”
서하가 괜히 간질거리는 손목을 잡아 빼며 저를 세운 장본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호쾌한 미소를 짓고 저를 내려다보는 남자는 김산이었다.
“점심 먹었어?”
그늘 쪽으로 서하를 돌려 세워놓은 김산이 뜬금없는 안부 인사를 던졌다. 밥 먹었냐는 건 보통 만났을 때 하는 말이니까, 서하도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아뇨, 귀찮아서.”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생각이 없어서 끼니를 챙기지 않았다. 서하는 수업 준비를 해야 한다며 새벽 즈음 강제혁의 차를 얻어 타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부족한 수면시간을 채우고 나니 오전이었다. 별로 배가 고프지 않아 커피 한 잔 마신 게 전부였다. 제 집에서 학교가 더 가까우니 앞으로는 노트북을 들고 오라고 말한 강제혁이었지만, 그러겠다곤 대답하지 못했다. 수업 전까지 그와 함께 있다간 출강은커녕 그 집에서 일을 치르고 둘 다 결석하지 싶었다. 수업시간까진 여유가 있었지만, 별로 밥 생각은 없었고 도서관에서 책이나 좀 빌릴까싶어 빠르게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김산을 만났고.
“같이 먹으러 갈까? 학교 근처에 맛있는 집 생겼어. 너 좋아하는 내장탕 팔아.”
“아니에요. 생각 없어요.”
내장탕 이야기엔 조금 솔깃했지만 그렇게 거하게 먹을 만큼 배가 고프진 않았다. 게다가 일상 보고를 하는 와중에 김산과 점심을 먹었다고 하면 강제혁이 가만있지 않을 게 뻔했다. 구라도 한두 번이지. 서하는 원체 평화주의자라, 쓸데없는 분란을 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김산에겐 아닌 모양이었다. 굳이 분란을 야기하고 싶은 건지,
“아주 혼나고 싶어서 안달이지.”
두어 달 전 서하가 들었으면 그날 밤 반찬으로 썼을 만한 대사를 아주 음험한 목소리로 뱉는 것이다. 강제혁으로 인해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서하였지만 저렇게 본격적인 멘트에는 거절하기가 쉽지 않았다.
“좋게 말할 때 밥 먹으러 가자. 형이 사줄게. 자꾸 굶으면 나중에 골병들어.”
“…….”
“하…. 밥 먹으면서 일 얘기할게. 그럼 돼?”
일단 말하지 말고, 들키면 일적인 문제라고 둘러대자. 분명 안일한 생각이었지만 별 다른 수가 없었다. 김산과 화해했고, 앞으로 또 계속 공적으로 만나게 될 텐데 밥이 대순가. 더는 거짓말 치지 말자고 생각한 게 방금 전 일이었지만 방도가 없었다. 강제혁이 싫어한다고 해도 김산을 일상에서 완전히 밀어낼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서하가 애써 합리화를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성 없는 승낙이었어도 김산의 기분을 좋게 만들기엔 충분한 몸짓이었다.
***
“꼭꼭 씹어 먹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기 때문에 드문드문 빈자리가 있는 식당은 지극히 조용했다. 그런 와중에 어린애 혼내듯 식습관을 지적하는 연상의 남자는 그게 아주 익숙한 모양새였다. 서하는 김산에게 딸린 네 명의 동생들을 떠올리며 공손히 대답했다.
“그럴게요.”
누가 보면 제가 치아가 없는 줄로 알겠다. 잘 씹어 먹고 있다고 입을 헤 벌리기라도 해야 하는 건지, 김산은 서하를 면밀히 살피며 이것저것 신경 쓰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국물이 코로 들어가는 지 눈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겠다.
“맛있어?”
연거푸 수저질을 하는 서하를 보던 김산이 조금 뿌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먹을 만해요.”
맛있다는 뜻이었다. 음식 평가에 인색한 서하를 아는 김산은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몫의 갈비탕을 한술 삼켰다. 뜨끈하고 고소한 국물이 입안을 적시고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맛있었다.
“…오늘 수업 끝나고 시간 있어?”
한참 식사를 하던 와중에, 김산이 애써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왜요?”
그럼에도 반감이 드는 건지, 서하가 제법 뾰족한 목소리로 이유를 물었다. 사유서라도 써서 올려야 할 판이다.
“너 저녁 먹이려고.”
김산은 젓가락으로 깍두기를 집으며 단순한 이유를 댔다.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저 안 굶고 다녀요.”
불만스레 대답하는 모양새가 버릇없고 귀여웠다. 하지만 서하의 대답엔 허점이 있었다.
“방금 점심 먹었냐니까 안 먹었다며. 그래서 나랑 지금 먹고 있고. 아침도 안 먹었지?”
“…….”
“‘안 굶고 다녀요’? 계속 굶으면서 할 소리야?”
서하를 훤히 꿰고 있는 김산이 타박하듯 말을 줄줄 잇는 동안, 서하는 괜히 먹지도 않을 어묵볶음 따위를 뒤적거렸다. 심통이 난 것이다. 김산이 그런 서하를 빤히 봤다. 애도 아니고 저렇게 불만을 표시하는 서하가 귀여웠다. 왜 동생 같다고 착각을 했을까. 제 동생놈들이 밥상머리에서 저런 짓을 하면 벼락같은 불호령을 내렸을 텐데.
“고집 부리지 말고 저녁에 시간 내. 강의실 앞에서 기다릴게.”
서하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으로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김산은 그런 서하를 외면하며, 노련한 어른의 얼굴로 그 의심을 잠재우듯 뻔뻔히 말했다. 물론 순수한 의도로 이러는 것은 아니었지만.
“…알겠어요.”
서하는 제 앞에서 고집스레 식사 약속을 종용하는 김산을 가만 보다 대충 대답했다. 그래, 밥이 뭐 별 건가. 밥의 신이라도 모시나보지. 남한테 밥 못 먹이면 죽는 계율이라도 있나보다. 하지만 강제혁이 자꾸만 마음에 걸렸다. 메시지로 미리 말할까.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실제로 매를 맞는 걸 말하는 속담은 아닐 테지만 일단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까지 자판을 두드리던 서하가 화면을 껐다. 뭐 굳이 지금 말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수업 끝날 때쯤 말해도 되겠지. 역시 안일한 생각이었다. 김산이 제게 고백했다는 사실은 강제혁이 모르는 일이었고, 요즘 강제혁과의 관계가 몹시 평화로웠기 때문에 서하는 조금 말랑해져있었다. 게다가 강제혁은 생각보다 더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돔이었다. 화를 낸다고 해봤자, 거친 플레이를 할 뿐 극단적인 행보는 보이지 않았기에 서하는 겁을 상실한 상태였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까지 끝낸 김산이 서하와 함께 문을 나서며 말했다.
“저녁 약속 잊지 마.”
그까짓 밥이 뭐라고. 하지만 화해한 게 얼마 전인데 식사 약속을 티 나게 피한다면, 말짱 도루묵이 될 것이었다. 괜히 어색해지긴 싫었던 서하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알았다니까요.”
안도하는 그의 미소가 묘하게 안쓰럽고, 이질적이었다. 정말 안 어울리는 표정이다. 김산이 불안해하는 모습이라니. 건물 앞에서 헤어져 흡연구역으로 향하며, 서하가 복잡해지려는 머리를 헝클었다. 그래봤자 흐트러지는 건 정돈된 머리카락뿐이었고, 복잡한 머릿속에야 아무런 효과도 없었지만 나름대로 최선이었다. 한 가치 남은 담배를 보고나서야 생각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서하는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학내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희고 긴 담배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키기 무섭게, 폐부를 찌르는 회색 연기가 자꾸만 떠오르는 상념을 지워주었다. 좋은 도피처였다.
***
“중간고사 성적은 다음 주 안으로 공지할게요. 파일로 올려줄 거고, 이름은 빈칸 처리할 테니 학번으로 확인하면 됩니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마무리 멘트로 준비한 말이었다. 아직 채점은 한참 남았지만, 서하 스스로 목표를 잡은 것이기도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잘못하다간 기말고사까지 밀릴 것 같아서였다. 몇몇 시험지는 백지라 쉬웠지만 몇몇 시험지는 종이가 새카말 지경이었다. 아랍어 같기도 하고. 개중 단연 눈에 띄는 것은 강제혁의 시험지였다. 정갈하고 단정한 필체가 그 다우면서, 언뜻 사나운 기색이 있는 게 또 딱 강제혁 그 자체였다. 저 역시 필체가 좋지 못하기에 악필인 학생들의 처지가 공감되면서도, 채점하는 입장에선 힘겨워 강제혁의 시험지를 가장 나중으로 미뤄두었다. 맛있는 것 아껴먹는 그런 심보라고 해야 되나.
“질문 없으면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죠. 다들 수고했어요.”
서하는 고개를 처박고 조는 남학생의 정수리를 집중해서 보며 수업을 끝냈다. 학생들이 일어서며 의자 밀리는 시끄러운 소리가 강의실을 가득 메웠다. 서하의 집중점이 되어주던 정수리 학생도 일어나 자리를 떠났다. 서하는 애써 강제혁의 시선을 무시하며 가방을 정리했다. 막상 마주하고 저녁 약속 타령을 하자니 좀 겁이 난 탓이다. 김산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추궁하는 주인에게 정확한 대답을 피하면서 동시에 심기를 맞춰드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저녁 먹으러 가요.”
어느새 강단까지 걸어와 제 손을 잡아 쥐는 강제혁이 제안의 탈을 쓴 명령을 내렸다. 평소 같았다면 네, 하고 군말 없이 따랐을 테지만 그럴 수 없는 서하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아, 그게…….”
뭐라고 말을 해야 그나마 나을까. 김산과 화해한 사실은 강제혁도 알고 있었고, 그 후에 제가 공적으로나 사적으로 얽힐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럴 경우엔 꼭 알려주겠단 말을 했더니 눈썹을 한 번 찌푸릴 뿐 별 반응이 없긴 했다. 그러니 말을 해도 될 것 같은데. 어쩐지 감은 그러지 말라고 저를 말린다.
“왜, 선약이라도 있어요?”
서하의 난처한 기색에 강제혁이 넘겨짚어 질문을 주었다. 그게 선약이긴 한데…….
“서하야.”
문가에 서 있던 김산이 서하의 이름을 부르며 둘 사이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강의실 앞에서 기다리겠다는 말을 했었다. 타이밍 참 개 같다. 서하가 낭패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안 봐도 강제혁의 눈빛이 보이는 것 같다.
“저녁 먹으러 가자.”
반면 김산은 강제혁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알은 체 없이 서하에게 말을 건넸다. 말 한 마디 없었지만 팽팽한 신경전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서하를 짓눌렀다. 어디 가서 키 작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위압적으로 내려다보는 두 남자 사이에서 참 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약간, 사라지고 싶었다. 기화해서……. 그리고 긴 침묵을 깨부순 건 강제혁이었다.
“안 되겠는데.”
짧은 말이었지만 도화선에 불을 지피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히려 짧아서 더 날카롭게 들리기도 했고.
“학생, 뭐라고요?”
그런 강제혁에게 김산이 물었다. 일부러 선택한 호칭이란 게 여실히 느껴지는 태도였다. 서하는 본격적으로 변해가는 공기의 농도에 질식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전보다 공손한 어투였지만 강제혁의 표정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서하는 마치 이무기와 호랑이 사이에 낀 듯한 착각을 느꼈다. 이상하게 이무기 쪽으로 마음이 더 가기는 했지만.
“내가 이서하 선생이랑 식사를 하겠다는데, 학생이 무슨 권리로 안 된다고 하는 거죠?”
선생과 학생 사이일 뿐이란 걸 지적하듯 선을 긋는 의미였다. 다만 김산이 모르는 게 있긴 했다. 그가 연모하는 이서하 선생에 대한 모든 권리가, 눈앞의 강제혁 학생에게 양도되었다는 사실 말이다. 서하는 ‘권리’라는 단어에 벌겋게 달아오르는 귓바퀴를 숨기기 위해 괜히 머리를 긁는 척 했다. 강제혁 쪽에선 가리지 않은 왼쪽 귀가 예쁜 빛을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권리…….’
단어만 들었는데 이상한 기분이 든다. 분명히 문제가 있었다. 그런 서하의 귓가를 미소 띤 얼굴로 보던 강제혁이 김산의 말에 대꾸했다.
“제가 오늘 교수… 아니, 선생님과 선약이 있어서요.”
“그럴 리가요.”
기가 막힌다는 듯 반박하려는 김산을 무시한 강제혁이 서하의 손목을 감싸 쥐며 물었다.
“그렇죠? 선생님?”
“…….”
“진로 상담도 해주시기로 했고, 그 김에 저한테 밥 사주신다고도 하셨잖아요.”
물론 강제혁의 그런 물음에, 이서하가 부정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게다가 간만에 착하고 모범적인 태도로 제게 말을 붙이는 강제혁이 귀엽기도 했다. 하지만 얼결에 약속을 두 개나 잡아버린 상황이 됐다. 나 지금 좀 개새끼 된 것 같아. 서하가 스스로를 탓했다.
“…맞아요.”
“서하야.”
마치 협박당하는 피해자를 보듯, 김산이 애처롭게 서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부질없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선배. 제가 깜빡 했어요. 선약이에요.”
그는 서하가 제 잘못임을 자처하니 화를 낼 수도, 그렇다고 선약을 파기하게 할 수도 없었다. 김산이 스톡홀롬 증후군에 걸린 인질을 보는 시선으로 서하를 바라봤다. 답답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안타깝네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승자의 여유가 담긴 인사였다. 명백한 조롱이었지만.
곧 강제혁이 서하의 손을 끌어 당겼고, 턱을 꾹 다물고 실망어린 기색을 숨기지 않는 김산을 스쳐 지나가야만 했다. 서하는 미련이 담긴 김산의 눈빛을 피하며 강제혁의 단호한 옆얼굴로 시선을 고정했다. 그게 차라리 낫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강의실 밖은 한산했다. 꽤 시간을 끈 탓이었다.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길에, 강제혁이 서하의 손목을 놓아주며 뜬금없는 말을 던졌다.
“화장실에 가는 게 좋겠어요.”
“네?”
화장실? 갑자기? 서하는 잠시 의아했지만 말없이 눈짓으로 화장실을 가리키는 강제혁에게 싫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화장실에 들르자는 말에 거부하는 것도 이상했고. 괜히 화장실이란 말을 들으니 요의가 느껴지는 게, 저 역시 수업에 임한 후로 화장실에 가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알겠어요.”
서하가 별 다른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상찮은 미소가 마음에 걸렸지만 태만한 마음가짐으로 화장실로 걸어 들어갔다. 앞일은 생각지 못한 처사였다.
***
텅 빈 화장실 안으로 들어서다, 문득 강제혁이 보는 앞에서 볼일을 보는 게 수치스럽게 느껴져 발걸음이 멎었다. 칸으로 들어갈까. 주춤거리는 사이 강제혁이 서하의 몸을 당겨 끝 칸으로 밀어 넣고 머리채를 잡았다. 갑자기 좁은 공간에 처박힌 서하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헉하고 숨을 집어 삼켰다. 이윽고 차가운 타일 벽에 뺨이 문대어졌다. 매일같이 청소를 하는 곳은 지극히 깨끗했지만, 공중화장실이란 사실 탓에 수치심이 들었다. 자연스레 내밀어진 엉덩이를 세게 쥐는 손은 여느 때와 같았지만 장소는 아니었다.
“가, 강제혁 씨!”
놀란 마음을 담아 강제혁의 이름을 불러 보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학생 강제혁의 것이 아니었다.
“이서하 씨는 내가 하는 말이 말 같지가 않나 봐요.”
차갑게 식은 건지 아니면 분노로 달궈진 건지, 온도를 가늠하기 어려운 목소리가 무방비한 귓구멍에 꽂혀 들었다. 등줄기가 다 오싹했다.
“그게,”
뭐든 변명을 해야 할 것 같아 말을 뗐는데, 강제혁이 뭘 추궁하는 지 알 수 없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아니, 알 것 같기도 하고.
“바지 벗어.”
익숙한 명령에 홀린 것처럼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가던 서하가 멈칫했다.
“…여기서요?”
따지자면 화장실에서 바지 벗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제 엉덩이 골 사이에서 자기주장을 하고 있는 강제혁의 성난 성기로 인해 온당치 못한 행위 같았다. 게다가 눈치 없는 요의가 자꾸만 고개를 들고 있었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읏…!”
머리카락을 움켜쥔 맵시 좋은 손가락이 바짝 조여들었다. 두피가 바싹 서는 느낌이 야릇했다. 이 와중에 흥분하는 자신이 제일 원망스러웠다.
“속옷도 내려야지.”
당연한 절차를 밟듯 요구하는 강제혁의 음성에 서하가 떨리는 손으로 속옷을 내렸다. 바로 어제 매질을 당한 탓에 멍이 든 엉덩이가 공기 중으로 노출됐다.
“흣…….”
“날 화나게 했으면 화를 풀어줘야죠. 화내고 싶으면 내라며.”
말에 가시가 돋친 듯했다. 나른한 목소리에 밴 선명한 노기에 서하가 마른 입술을 축였다. 화내고 싶을 땐 내라고 분명 제 입으로 말했다. 그러니 책임을 져야 했다. 김산과 약속을 잡아놓고 말하지 않아 화가 난 것 같았다. 그게 분명했다. 제 잘못이라 할 말도 없다.
“죄송해요…….”
“용서는 나중에 빌고, 얌전히 엉덩이나 내밀어.”
급했던 모양인지, 뜨겁게 달궈진 거근이 엉덩이 골 사이를 비집고 마른 비부에 닿았다. 젤 없이 삽입을 당하면 무척 아플 것이다. 강제혁의 물건은 포르노 사이트에서 본 것 중에서도 손에 꼽을 수 있을 만큼 컸으니까. 게다가 서하는 그 거근이 주는 통증이 곧 쾌감을 진하게 동반한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문제는…….
“흣, 화, 화장실…….”
“왜, 장소가 마음에 안 들어?”
“그게 아니라, 소변이……, 급해서요…….”
말로 뱉고 나니 더 창피했다.
“난 또 뭐라고.”
허리를 잡은 손이 서하의 몸을 변기 쪽으로 이끌었다. 다리 사이에 변기를 두고, 강제혁에 의해 자세를 취하게 된 서하가 헝클어진 머리로 가쁘게 숨을 내쉬었다. 볼썽사납게 내려간 바지가 한쪽 발목에 걸려 있었다.
“흐읏!”
“조용히 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마디 굵은 손가락에 성기가 잡히자마자 바깥 화장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심이 담긴 충고에 서하가 몸을 떨며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싸고 싶다며.”
“흐읍…….”
“발기하면 요도가 압박돼서 참는 게 좀 쉬워진다는데, 해볼까.”
바깥에 들리지 않게 하려는 건지, 강제혁이 내도록 속삭거리는 탓에 서하가 입술을 연신 깨물었다. 자극에 약한 몸이 자꾸만 떨렸다.
“박아줄 테니, 싸지 말고 참아봐.”
“흣…….”
“내가 안에 싸주면 이서하 씨도 쌀 수 있는 거예요.”
서하가 의미를 알아채기도 전에 무섭게 밀려들어오는 굵은 귀두에 새된 신음이 터졌다. 하지만 아무리 수년 간 자위로 쑤셔온 구멍이라도, 갑작스러운 삽입엔 쉬이 벌어지질 않았다. 물론 강제혁의 성기가 지나치게 큰 탓도 있었다.
“흣, 흐으…. 찢어, 찢어져요…….”
“알아서 풀어 봐.”
“…네?”
뒤늦게 강제혁의 말뜻을 알아차린 서하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억지로 삽입을 당하는 것과, 좆에 박히기 위해 스스로 구멍을 푸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게다가 여긴 학교 화장실이었고.
“아니면 내가 풀어줄까? 그걸 원해요?”
메마른 강제혁의 손가락이 귀두 끝이 빠져나간 구멍을 느리게 둥글렸다. 하지만 강제혁의 손가락을 머금었다가 그가 제 약점을 문지르기라도 하는 날엔 그 손에 사정을 먼저 할 것만 같았다.
“선택을 해야지.”
“제, 제가… 할게요.”
저도 모르게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튀어 나왔다. 서하가 비참함에 몸서리치게 흥분하는 자신을 애써 채찍질하며, 손가락을 빨아 적신 후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하나로 어느 세월에 그 좁은 구멍을 풀게.”
“흣, 흐응…….”
“느끼지 말고. 내가 지금 자위하라고 한 게 아니잖아.”
“아!”
“똑똑한 머리로 왜 이렇게 말을 못 알아들어. 사람 열 뻗치게.”
거칠게 일갈하는 말과 함께 엉덩이를 때리는 손에 서하가 발끝을 오므렸다. 양손으로 뒤를 벌리고 쑤시기 시작하자, 스스로가 더욱 비참해 눈물이 났다. 당연히 싫어서 흘리는 눈물은 아니었다.
“알아요?”
“흣…….”
“이서하 씨가 뭘 선택했건, 나는 당신이 스스로 쑤시게 했을 거예요.”
“아, 읏…….”
“내 좆을 삼키겠다고 열심히 뒤를 푸는 모습이 보기 좋으니까.”
“아으, 학, 아악!”
강제혁의 목소리가 조금 커진 것 같았지만, 그러기 무섭게 입구를 꿰뚫고 들어오는 성기 탓에 서하는 그를 나무라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었다. 오늘 새벽까지 물고 있던 성기가 다시금 뜨뜻한 내벽을 점령해 나갔다. 느린 속도로 안을 쑤시고 드는 성기에 서하가 흐트러진 호흡을 뱉으며 끙끙 앓았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곧 찢어질 것만 같았다.
“넌 내가 원할 때마다 다리를 벌리고, 뒤든 앞이든 좆물 삼킬 생각만 하면 돼.”
낮게, 짓이기듯 속삭이는 말에 서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흐으, 읏……. 아, 악, 흐윽, 학, 아…!”
터지는 신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폭력적인 삽입에 제 것도 힘을 받아 팽팽히 서기 시작했다. 요의와 사정 욕구가 뒤섞이고 있었다.
“하, 억지로 당하는 게 좋아?”
음산한 질문에 서하가 떨리는 턱을 다물고 대답했다.
“조, 좋아요…….”
좋아서 죽을 것 같다. 그의 말대로 다리를 벌리고 남근을 받아먹는 스스로가 비참했고, 그래서 좋았다.
“힘 안 빼?”
“윽!”
끝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 낮게 신음하던 강제혁이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며 서하의 둔부를 후려갈겼다. 멍든 곳에 뿌려지는 타격감에 성기에서 질척한 쿠퍼액이 흘러내렸다. 변기 안에 뚝뚝 투명한 액체가 떨어지는 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강제혁이 거칠게 서하의 머리채를 잡고, 추삽질을 해대며 인을 박듯 말했다.
“하아……. 넌 내 노예야. 내 소유고. 넌 아무 권리도 없어.”
서하를 흥분시키는 가장 훌륭한 말이었다.
“저는 주인님의, 읏, 노예예요. 아무 권리도, 하으, 악, 읏, 없, 없어요…….”
서하가 울음 섞인 신음을 뱉으며 강제혁의 말에 화답했다. 정신이 날아갈 것 같았다. 꺾인 허리가 아플 법도 한데, 그런 것보단 마구잡이로 다뤄지는 상황이 좋아서 엉덩이를 내밀기 바빴다. 한참동안 살이 부딪히는 질척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것 같으니 상을 줘야지.”
“아, 아아, 흣, 으윽…!”
아예 반쯤 정신을 잃고 흔들리는 서하에게 강제혁이 칭찬하듯 입을 맞췄다. 뒤로 성기를 먹고, 입으로는 혀를 먹는 행위가 서하에겐 몹시 버거웠다. 서하가 몸을 떨었을 때, 강제혁이 스퍼트를 올려 서하의 안을 난도질하듯 성기를 박아 넣었다. 이윽고 질퍽한 신음과 음란한 마찰 소리가 세게 울렸고, 강제혁이 복근을 꽉 조이며 서하의 안에 정액을 싸질렀다. 사정하지 못한 서하의 성기가 흔들리고 있었다.
“이제 싸야지.”
“모, 못 싸겠……. 아!”
아직 단단한 성기가 쾌감점을 진하게 문지르자 서하가 고개를 쳐들고 정액을 흩뿌렸다. 변기 안으로 희끗한 색의 묽은 액체가 떨어졌다.
“오줌은.”
직설적이고 원색적인 단어에 서하가 움찔 몸을 떨었다. 수치심이 배가 되는 느낌이다.
“그, 그것도…….”
“싸도 돼요.”
성기를 빼주었음 싶은데, 강제혁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느리게 남은 정액을 사정한 서하가 애써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이제 그의 앞에서 못할 짓이란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뒤를 꿰뚫린 채 배뇨한다는 사실이 주는 진한 배덕감에 서하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아읏…!”
“손이 많이 가지. 우리 고양이는.”
서하의 눈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덮어 가려준 강제혁이 그의 성기를 손으로 받쳐주고 허리를 움직여댔다. 강제혁이 싸지른 정액으로 질척한 내벽에 굵은 성기가 다시금 문대어지는 사이, 힘이 풀린 아래에서 묽은 소변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뒤를 꿰뚫린 채 소변을 보는 느낌이 소름끼치도록 이질적이고 야릇했다.
“버릇 되겠네.”
제 손바닥 아래에서 연신 깜빡거리는 서하의 속눈썹 감촉에 강제혁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가 서하의 뒷목에 입술을 맞추자 쪽,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가 났다.
그리고 강제혁과 서하가 음란한 플레이를 펼치는 칸 밖에선,
‘말도 안 돼…….’
낯이 새파랗게 질린 김산이 충격에 굳어 있었다.
***
얼굴이 온통 새빨갛다. 거울에 비친 뺨이 수치심을 더했다. 서하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상기된 얼굴을 식히려 애를 쓰는 사이, 먼저 손 씻기를 마친 강제혁이 차 키를 건넸다.
“먼저 차에 가 있어요.”
“차요?”
저녁 먹으러 가는 건가. 서하는 내심 그의 집으로 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뜬금없이 쥐어진 차 키에 당황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자 강제혁이 어깨를 가볍게 으쓱해 보이며 서하의 동의 없이 세운 계획을 말했다.
“오늘 데이트 가려고 끌고 왔어요.”
“아…….”
“이틀 시간 낼 수 있으면 같이 일박으로 여행가고.”
강제혁을 만나는 일이나 학교에 나오는 것 외에는 정해진 스케줄도 없는 서하였다. 그러니 그가 시간을 내라면 냈을 것이다. 다만 걸리는 게 있던 서하가 의문스럽게 물었다.
“짐이 없는데요.”
“시간만 있으면 됩니다. 필요한 건 사면 되니까요.”
간단하고 깔끔한 대답이었다. 약간 과소비 같은데. 그래도 연하인데 자꾸 얻어먹는 게 마음에 걸렸던 서하가 주춤했다.
“집 가까운데, 들렸다가 가면 되잖아요.”
“시간 아까워요.”
돈 많은 놈들은 시간도 돈 주고 사는구나. 이미 있는 것이라도 가지러 갈 시간이 아까워 새 걸 사는 심보가 대단했다. 서하가 찜찜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망설였다.
“같이 쇼핑할까.”
“흣…….”
지극히 일상적인 제안을 하며 엉덩이를 만지는 건 왜일까. 빼내지 못한 체액이 남은 아래에서 통증을 동반한 묘한 감각이 일었다.
“이서하 씨 안에 넣고 싶은 것도 직접 고르게 해줄게요.”
그 쇼핑이 그 쇼핑이 아닌 모양이었다. 떨어지는 말이 지나치게 농밀했다.
“…감사합니다.”
서하가 떨리는 목소리로, 정해진 대답을 내놓자 강제혁이 잘했다는 듯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손바닥이 차가워 기분이 좋았다.
“먼저 가 있으세요.”
잠시 후 등을 떠미는 손에 서하가 화장실 밖으로 빠져 나왔다. 화장실 앞에는 청소중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누가 가져다 놓은 거지, 들어갈 땐 없었던 것 같은데. 덜컥 겁이 난 서하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빠르게 계단으로 내려갔다. 생각해보니 끔찍이도 대담한 행위를 했다.
서하가 바쁘게 발을 움직여 겨우 지상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은 한적했다. 강제혁의 차를 찾아 조수석에 탄 서하가 겨우 벅찬 숨을 내쉬었다. 식은땀이 나는 경험을 했다. 다음부턴 야외 플레이는 삼가야할 것 같다고 말하자. 휘말리지 말고. 서하가 별 의미 없는 다짐을 했다.
***
수도꼭지에서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강제혁이 편한 자세로 손님을 기다렸다. 서하가 나가고 정확히 2분 뒤, 한 사내가 우레 같은 소리로 문을 세게 열어젖히며 화장실 안으로 거칠게 들어섰다.
“너 이 새끼…!”
단말마 같은 욕지거리와 함께 사내가 강제혁의 멱살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김산이었다.
“멱살 잡는 건 습관입니까?”
제 옷깃을 되먹지 못한 손길로 우악스레 쥔 김산을 같잖은 듯 내려다보며, 강제혁이 비웃음을 담아 물었다. 진한 눈썹이 일그러진 모양새가 꽤 보기 좋았다. 강제혁의 입가에 비틀린 미소가 걸렸다.
“서하한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충격과 분노가 진하게 서린 낯은 처참했다. 따져 묻는 말의 내용은 지극히 무례했고.
“무슨 짓?”
강제혁이 김산의 되먹지 못한 단어 선택을 지적하듯 따라 읊었다. 김산이 저와 서하의 플레이를 엿들은 것을, 강제혁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행위를 멈추지 않은 건 일종의 경고였다.
“너 경찰에 신고할 거야!”
“누구를, 나를?”
그걸 지금 협박이라고 하는 건지. 강제혁이 코웃음을 치며 김산의 손을 떼어냈다. 셔츠가 볼썽사납게 구겨진 게 눈에 들어왔다. 짜증이 치솟았다.
“알지도 못 하면서 자꾸 씨불대는 게 영 짜증나긴 하네요. 이번에도 선빵 칠 겁니까? 그렇게 좋아하는 경찰서 한 번 갈까요? 그런데 내가 오늘은 약속이 생겨서 어쩌지. 아저씨랑 놀아줄 시간이 없어. 곤란하게도.”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는 제스처와 함께 비꼬는 말이 이어졌다. 김산이 당장이라도 주먹을 내지를 듯 핏줄이 돋게 부르쥐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씨발, 나이 많아서 좋겠네. 발기는 됩니까?”
비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서하가 연상에게 약하다는 걸 내심 알고 있는 강제혁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강제혁이 일부러 김산의 좆이 있을 곳에 시선을 한 번 주고 비꼬자, 김산이 입안말로 쌍욕을 뱉고 경고했다.
“도발하지 마.”
도발 같은 소리하고 있네. 일부러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으며 강제혁이 속에 담긴 말을 그대로 건넸다.
“도발은 그쪽이 먼저 했지. 어디 남의 거에 침을 흘려. 거지새끼마냥.”
“이 새끼가,”
강제혁이 악센트를 줘가며 이죽거리자 김산의 이마에 핏줄이 돋았다. 온몸으로 화를 분출하는 모양새가 아주 웃기고, 죽여 버리고 싶었다. 서하에게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우습고.
“이서하 씨가 그런 취향인 건 엄연히 따지자면 내 탓은 아니죠. 안타깝지만. 내 탓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강제혁이 진심을 담아 사실을 전했다. 여기까지 힌트를 줘도 모를 것이 분명했다. 강제혁은 이 순간 김산이 끝없이 괴로워하길 바랐다. 사디스트적인 본능이 아니라, 제 것을 탐내는 날강도를 비방하고 싶은 마음을 담은 것이었다.
“뭐라고?”
아니나 다를까, 김산은 알지 못하는 외계어라도 들은 사람처럼 눈썹을 찌푸리고 등신 같은 물음을 던질 뿐이었다.
“모르면 공부라도 하세요. 학위는 발가락으로 땄나.”
문 앞을 가로막고 선 김산의 어깨를 치고 지나가며 강제혁이 낮게 읊조렸다.
이만하면 경고가 됐겠지. 아무리 애정이 깊어도 다른 남자와 몸 섞는 장면을 간접적으로 본 상황에서 정신이 멀쩡하기란 어려운 일일 터였다. 강제혁이 후련한 낯으로 화장실을 빠져 나가려던 때, 김산이 강제혁에게 거칠게 경고했다.
“너, 자만하지 마.”
단순히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이면 무시하고 나갔을 텐데, 예상치 못한 충고에 강제혁이 고개를 돌려 김산을 응시했다. 대체 뭘 자만하고 있다는 건지 들어나 보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 말에 반응을 보이는 강제혁을 본 김산이 억지로 입꼬리를 당겨 웃으며 말을 이었다.
“너 서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같잖은 섹스 취향 말고.”
김산도 바보는 아닌지라 서하의 취향이 조금 특이하다는 건 유추할 수 있었다. 강제혁과 말다툼을 했을 때 그런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서하의 몸에 남은 상흔으로 어림짐작했다. 하지만 그게 서하의 취향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그저 섹스가 처음인 서하를 저 미친놈이 제 입맛대로 가스라이팅한 결과물이라고 생각했다.
김산은 서하가 끝까지 저를 놓지 못해 사과를 받아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김산은 강제혁이 서하의 성적인 욕구를 채워줄 수 있을지언정 감정적인 부분은 채워줄 수 없다고 확신했다. 절대적으로 자신이 우위에 있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오로지 강제혁의 기분을 망치기 위해,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카드를 내밀었다.
“서하가 누나에 대한 거 말 안 했지?”
서하의 과거. 저 역시 단편적으로만 아는 이야기였다. 누나라는 단어도 들어본 적이 없는 건지, 강제혁의 표정이 구겨졌다. 김산이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서하의 취향에 대한 단서를 줬으니 저 역시 힌트를 줘 강제혁을 상처 줘야 옳지 않겠나.
“…서하는 외롭게 자랐어. 아버지 사랑 한 번 제대로 못 받아본 애야. 그래서 더 나한테 의지하는 걸지도 모르지.”
“…….”
“걔가 너한테 말해주지 않은 걸 보면, 너는 몰라도 될 이야긴가 봐.”
말을 뱉을 때마다 움찔대는 안면 근육이 김산의 추측에 힘을 실어 주고 있었다. 한참동안 김산의 말을 들어주던 강제혁이 표정을 지우고 되물었다.
“알아야 합니까?”
충격 받지 않은 척해도 분명 놀랐을 것이다. 김산은 그런 강제혁을 보며 경고의 끝을 맺었다.
“넌 결국 서하한테 그 정도인거야. 착각 하지 말고, 서하 인생에서 사라져. 섹스토이 주제에 건방지게.”
결국 김산이 강제혁에게 날리고 싶은 비수의 정체는 바로 이것이었다.
“…….”
강제혁이 대꾸 없이 문을 나섰다. 홀로 남은 화장실에서 김산이 뒤늦게 이는 후회와 비참함에 침음했다. 순간적인 분노로 해선 안 될 말을 뱉고야 말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뱉어버린 말을 주워 담을 길은 없었다. 강제혁이 서하에게서 떨어져 나가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좆같네.”
한편, 문을 나서 건물 밖으로 나온 강제혁이 씁쓸한 감상을 뱉었다. 알지 못했다. 알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저 역시 제 과거에 대해 언급한 적 없었으니, 서하가 그러지 않았다고 해서 화낼 명분도 없었다. 우겨서 화를 내려면 낼 수야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서하의 과거는 중요치 않았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고 크는 건 아니었다. 김산만 그걸 알고 있다는 사실이 지독히 싫었을 뿐. 서하에게 있어 김산이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 어쩌면 감정적으론 저보다 선행할 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강제혁의 기분을 더럽게 만들었다.
서하를 좋아한다. 그렇기에 그가 필요했다. 그런데 서하는 저를 필요로 할까. 아니, 이서하가 원하는 건 그저 저를 구속해줄 돔일까? 그럼 꼭 나여야만 하는 건 아니잖아. 추잡한 질투심과 소유욕이 자꾸만 강제혁을 낭떠러지로 밀어 넣고 있었다.
***
차게 굳은 강제혁의 옆얼굴엔 차마 말을 붙이기도 어려울 정도로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아직도 화가 안 풀렸나. 서하가 자꾸만 불안히 뛰는 심장을 달래려 가슴께를 손으로 꾸욱 눌러 보았다. 별 다른 효과는 없었다.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한참의 침묵 끝에 먼저 질문을 던져 보았지만, 강제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할 뿐 대답을 주진 않았다. 아무래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다. 아니면 운전에 집중하느라 제 목소리를 듣지 못했거나. 그럴 리 없을 거란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서하가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강제혁을 불러 보았다.
“…주인님?”
그제야 들은 체를 하는 강제혁의 턱짓에, 서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지 신호에 차가 멈추었다. 계속해서 제 얼굴을 살피는 서하의 시선을 느낀 건지, 강제혁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목적지를 묻는 겁니까?”
“네.”
들었네. 앞서 물었던 질문에 대한 대답이 들리자 서하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가는 거냐는 물음을 뻔히 듣고도 주인님이라고 부를 때까지 대답을 하지 않은 강제혁이 심술궂게 느껴졌다.
“양양이요. 바다 보러 갑니다.”
“아.”
“싫어요?”
양양 간 지 오래 됐는데. 애초에 여기저기 쏘다니는 성격이 아닌지라 어디든 오랜만이긴 했다. 호오를 묻는 말이 괜히 낯간지러웠다.
“좀 멀리 가는 것 같아서요.”
서울에서 양양이면 못 해도 세 시간은 걸릴 텐데, 운전을 하는 그가 꽤 피로할 것 같았다. 체력이 대단한 편이니 아무렇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섹스만 할 건데 뭐 하러 멀리 가나 싶어요?”
강제혁이 조금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게 아니라,”
물론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한 것은 아니지만, 날카롭게 꽂혀드는 비꼼에는 부정할 필요가 있었다. 괜히 머쓱해진 서하가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차에 강제혁이 짜증 섞인 한숨을 뱉고 손을 저어 보였다.
“사과하죠. 예민했어요.”
빠른 사과에 뭔가 아쉬움이 드는 스스로가 변태 같았지만, 사실이니 할 말이 없었다. 왜 저래. 저보다 한참 어린 이 남자의 눈치를 살피는 게 이제 익숙해져간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직 화나셨어요?”
“아직?”
“아까, 화장실에서 화 다 내신 줄 알았는데.”
서하가 조금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자 강제혁이 허탈한 웃음소리를 냈다. 핸들이 꺾어지며 반동으로 서하의 몸이 운전석 쪽으로 쏠렸다.
“난 언제나 화나있는데, 이서하 씨한테.”
예상외의 답이 돌아온 건 대화의 흐름이 끊겼다고 생각했을 때쯤이었다. 늘 화가 나있다는 대답은 정말 의외였다. 원래 사디스트들은 그런 건가. 그는 제게 화가 난다고 말했다. 서하가 홀로 그 말을 해석해 보려다가, 결국 이유를 물었다. 도저히 혼자선 알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요?”
차가 멈춘 사이, 강제혁이 제게 이유를 묻는 서하에게 시선을 주었다. 미묘한 표정이었다.
“내 마음대로 안 되니까.”
“제가요?”
“네.”
저와 강제혁의 관계는 언제나 그의 의지대로 흘러갔던 것 같은데. 서하가 의아함을 숨기지 못하고 골몰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제혁이 플레이 파트너를 원했고, 그에 따라 서하와 파트너 관계를 맺었다. 플레이 역시 돔인 강제혁이 주도했고, 권리를 달라기에 그것까지 줬는데 대체 뭐가 마음대로 안 돼서 화가 난다는 걸까. 서하가 고민하며 무의식적으로 제 손가락을 쪼물거렸다.
“한숨 자요. 자꾸 꼬물거리는 거 보이니까 따먹고 싶어서 운전에 집중이 안 됩니다.”
“…네.”
낮게 가라앉은 음성에 서하가 고개를 모로 돌렸다. 저 역시 뜨겁게 와 닿는 시선에 허리 아래가 들썩이려 했지만, 여기가 차 안이고 달리는 도로 위임을 상기하자 눈이 쉽게 감겼다. 화장실에서 급하게 섹스를 한 후였기에 긴장이 풀어지니 졸음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조수석에서 잠을 자면 안 되는데……. 하지만 주인이 명령한 것이니 거리낄 것은 없었다. 부드럽게 주행하는 차량 안에서, 서하가 눈을 감고 수마에 빠져 들었다.
***
차가 멈추는 동시에 서하가 부스스 눈을 뜨고 창밖을 살폈다. 어딘지 모를 지하 주차장 안이란 사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차량은 많지 않았고, 타고 내리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여기가 양양이에요?”
“거긴 최종 목적지죠.”
따라오는 대답이 건조했다. 그러고 보니 필요한 물건을 산댔나. 청결에 유난떠는 편이 아니고 제품도 별로 가리지 않기 때문에 굳이 쇼핑을 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제가 뱉은 항변이 있기에 거절하기도 뭐했다.
차에서 내리는 강제혁을 따라 밖으로 나오자 지하 주차장 특유의 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외관이 멀끔해도 이런 미묘한 냄새까지는 어쩌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건물 상층부로 올라가는 사이에도 두 사람은 별 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문이 열리고 나서야 서하는 여기가 평범한 쇼핑을 위한 곳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다.
“표정이 왜 그래요?”
제 안색을 살피는 눈에 서하가 머쓱하게 웃어보였다. 애써 잊으려 했던, 강제혁이 건넨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 이서하 씨 안에 넣고 싶은 것도 직접 고르게 해줄게요.
여긴 성인용품점이었다. 인터넷으로 용품을 주문해본 적은 있어도 오프라인 매장에 온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서하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투명한 유리문 안으로 보이는 매대에는 눈에 익은 물건들이 전시되듯 진열되어 있었고, 손님으로 보이는 사람이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먼저 보였다. 으레 성인용품점이라고 하면 핫핑크색 간판에 묘한 글씨체로 ‘성인용품’이라고 적힌 것밖에 본 적이 없는데, 여긴 마치 백화점 같은 모양새였다. 요즘은 이런 곳도 있다고 듣기만 했는데 생각보다 더 현대적이고 깔끔했다.
“와본 적 없어요?”
“네.”
“그건 마음에 드네.”
강제혁이 굳었던 표정을 풀고 근사하게 웃어 보였다. 장소만으로 외설적인 곳이었다. 적어도 서하에게는. 그렇기에 입장하는 것만으로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이윽고 들어선 곳에선 제 또래의 몇몇이 쇼핑을 즐기고 있었고 서하는 괜히 심장이 떨려 강제혁의 뒤에 숨듯 했다.
“왜 이래. 귀엽게.”
강제혁이 서하의 손을 잡아당기며 웃음기 섞인 타박을 건넸다. 점원과 몇 마디 주고받는 강제혁의 모습에 서하가 괜히 입구로 시선을 던지며 입술을 재차 깨물었다. 부끄럽다. 성인임에도 성인용품을 파는 곳에 손님으로 있는 것이 표정관리를 힘겹게 했다. 이런 것에 면역이 없는 탓이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점원이 ‘STAFF ONLY’라고 적힌 팻말이 있는 곳으로 길을 터주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가보면 알아요.”
검은 색 복도는 아까 전까지 보던 매장과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계단을 하나 내려가자 작은 로비가 있었고, 문 앞엔 마스크와 안대, 가면 따위가 걸려 있었다.
“눈을 가리면 앞이 안 보이니까, 재갈을 겸하는 마스크 쪽이 좋겠네요.”
“네?”
“여기는 SMER 전용 코너거든요. 바닐라는 못 들어옵니다. 몰라서 못 오는 것도 있고. 이 중에 뭐가 좋아요?”
안대와 가면, 재갈 같은 것이 즐비한 벽면을 가리키며 묻는 말에 서하가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굳어있었다.
“아까부터 얼굴 빨개진 거 보니까 창피한 것 같아서요. 이제부터 더 창피해질 텐데 얼굴 가릴 기회 정도는 줄까 해서.”
지극히 자비로운 제안이었다. 이제부터 더 창피해질 거라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파악할 수 없었지만 어쩐지 신변을 보호받는 느낌이 들었다. 성인용품점에서 부끄러워질 일이 뭐가 있을까. 서하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묘하게 불안했다.
“아, 해야지.”
서하가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동그란 구체가 입을 구속하듯 물려지고, 얇은 가죽으로 된 마스크가 얼굴을 감쌌다. 착용을 돕는 강제혁의 손길이 은밀해서 서하가 순간 젖은 눈으로 강제혁을 올려다보았다.
“사실은 이서하 씨 빨개진 얼굴 남 보여주기 싫어서 이러는 거예요.”
짓궂은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서하가 흠칫 떠는 사이 강제혁이 진열대에서 개목걸이를 빼내 서하의 목덜미에 걸어주었다.
“얼굴까지 가렸는데, 쇼핑에 간단한 플레이 정돈 겸해도 되겠지.”
“흐으…….”
오만한 폭군처럼, 강제혁이 서하의 정강이를 툭 치며 속삭였다. 다정함이 도려내지니 서하로선 딱 죽을 맛이었다. 근데 이거 다 파는 거 아닌가? 찜찜했지만 신경쓰지 않으려 했다.
“엎드려서 기어봐.”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이 닿았다. 목소리를 잃은 채 네 발로 기게 된 서하가 흥분에 달뜬 숨을 뱉었다. 정장 바지가 무참히 바닥에 쓸렸지만 야릇할 뿐이었다.
***
“마스터신가요?”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검은 정장을 차려입은 여성이 응대를 해왔다. 강제혁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고, 서하는 타인의 앞에서 개처럼 기는 스스로의 모습에 재차 수치심을 느꼈다.
“펫을 동반하셨군요. 목줄을 주의해주세요.”
아무렇지도 않게 안내 사항을 늘어놓는 점원의 태도가 소름끼치도록 프로다웠다. 그 태도 탓에 정말 제가 강제혁이 기르는 펫이 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갈까.”
흥분에 젖은 서하가 멍하니 수치심에 떠는 모습을 가만히 보던 강제혁이 목줄을 잡아끌었다. 결코 급하지 않은 당김이었음에도 서하는 자꾸만 오르는 열기에 발가락을 연신 구부려야 했다.
“새로 나온 상품인데, 저온초보다 조금 더 뜨겁고 일반 양초보단 조금 온도가 낮은 제품이에요. 어떠신가요?”
강제혁은 매장 안을 여유롭게 돌아다녔고, 서하는 그를 따라 네 발로 기어야 했다. 점원은 그런 그들을 서포트하듯이 따라붙으며 강제혁이 시선을 주는 상품을 전부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이제는 조금 적응이 된 서하가 숨을 돌리려는 사이, 강제혁이 신발을 신은 발로 서하의 엉덩이 사이를 꾹 밟으며 점원에게 물었다.
“고양이를 위한 상품은 없습니까?”
“물론 있죠. 야옹이가 좋아하는 장난감은 주로 어떤 종류인가요?”
앓는 신음이 자꾸만 입 밖으로 번졌다. 아무렇지도 않게 저를 반려동물처럼 여기는 두 사람의 대화가 수치스럽고 모멸적이었다. 그 대화는 서하를 흥분하게끔 만드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구멍에 삽입 당하는 걸 좋아합니다. 매 맞는 것도 좋아하고, 벌 받는 걸 좋아해서 큰일이에요.”
“저런. 걱정이 많으시겠어요. 보통 고양이보다 더 버릇이 없는 경우엔 도구를 다양하게 쓰시는 걸 추천 드립니다.”
정말 고민인 것처럼 서하에 대해 늘어놓는 강제혁과 진지하게 상담을 해주는 점원이 괴이했다. 진짜 펫한테도 저런 말은 하면 안 되는데, 어쩌면 제 처지가 동물만도 못했다. 서하가 수치심에 속으로 비참해하면서도 아래를 세우는 사이 점원이 아, 하는 탄성과 함께 강제혁을 이끌었다. 덩달아 네 발로 기어야 하는 서하까지 점원의 인도를 따라야 했다. 뒤가 욱신거렸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진동이 강해지는 딜도가 새로 나왔는데, 이건 어떠신가요?”
동물이 아니기에 말뜻을 알아듣는 서하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눈이 마주친 강제혁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뻔뻔하기도 하지. 서하가 속으로 그를 책망했다.
“야옹이가 좋은가 봐요. 담아주세요.”
“색상은 핑크와 블랙이 있는데 어떤 걸로 드릴까요?”
눈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타인이 저를 능욕하는 상황이 소름끼치게 야했다.
“핑크가 좋아, 블랙이 좋아?”
강제혁이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묻는 말에 서하의 속눈썹을 바르르 떨렸다. 언어가 허락되지 않은 지금, 의사 표현을 할 수 있는 것은 몸짓뿐이다.
“핑크?”
엉덩이를 파고드는 손가락이 농밀했다. 서하가 강제혁의 다리에 얼굴을 기대고 끙끙거리자 그가 기분 좋게 웃었다.
“핑크로 주세요.”
그 후로 더 몇 차례, 서하는 수치스러운 상황에 직면하며 쇼핑을 해야만 했다. 마지막엔 흥분한 성기가 잔뜩 부풀어 겉으로도 보일 지경이 되었다. 계산대 앞에 선 강제혁이 목줄을 당겼지만 다리가 풀려 움직일 수가 없었다.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흰 운동화를 맥없이 응시하고 있자, 어느새 곁에 선 강제혁이 서하의 다리 사이로 손을 집어넣으며 달래듯 속삭였다.
“오줌이 마려워?”
“흐읏…….”
치욕스러운 상황에 눈물이 터졌다. 아래를 꽉 조인 손이 엉덩이를 주무르며 떨어져 나갔고, 바닥에 몸을 웅크린 채 신음하는 서하를 두고 강제혁이 말했다.
“요도플러그랑 정조대도 하나 계산해주세요. 여기저기 실례를 해대서.”
“종류가 꽤 많은데, 카탈로그를 보여드릴까요?”
“기왕이면 밖으로 티가 안 나는 상품이면 좋겠네요.”
서하의 의사는 끝까지 반영될 수 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만 점짜리 쇼핑이었다.
***
물 내음이 스민 공기에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노을이 지는 탓에 붉어진 동해의 물빛이 시야를 가득 채워주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서하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낮게 신음했다.
“하…….”
아무리 부드럽게 주행해도 방지 턱이 있기 때문에 조금은 몸에 충격이 있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문제였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제혁이 백화점에 들러 간단한 물건 몇 가지를 사온다고 차량을 나섰을 때, 서하에게 내건 조건 때문이었다.
- 다녀올 테니까, 그때까지 사정하지 말고 기다려요. 싼 건 핥아먹게 할 겁니다.
그리고 서하의 손에 쥐어진 건 아네로스였다. 드라이 오르가즘을 주기로 유명한 도구라, 서하에게도 눈에 익은 물건이었다. 사실 너무 가는 게 무서워서 직접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아마 쇼핑 끄트머리에 서하가 반쯤 멍한 상태가 되었을 쯤 구입한 것 같았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는 물건이 아니었으니까.
‘진짜 미친 새낀가 봐. 안 싫어서 더 문제다.’
삽입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오가는 사람이 많은 백화점 지하 주차장에서 바지와 속옷을 내리고 기다란 자위 기구를 삽입하는 행위가 어려웠다. 썬팅이 짙게 되어 있긴 했지만, 이쪽에선 저쪽이 잘 보이니까 더 어렵기도 했다. 평범하고 정상적인 사람들 틈에서 유리된 스스로가 더 선명히 느껴져서.
서하는 삽입을 마치고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앉아 강제혁을 기다렸다. 사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바지나 속옷이 젖기라도 할까봐, 차마 옷을 걸칠 수 없었다. 그렇게 얇은 담요로 벗은 하체를 덮어놓고 한참동안 강제혁을 기다려야 했다. 별다른 자세를 취하지 않고도 삽입하자마자 전립선을 자극하는 악랄한 형태에 서하는 내처 한숨 같은 신음을 뱉어야 했다.
30분 쯤 지났을 때, 강제혁이 쇼핑백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서하는 건조한 눈으로 담요를 걷어내는 강제혁의 무심한 손에 반쯤 발기하고 말았다.
- 출발하죠.
어쨌든 그렇게 주어진 미션에 충실히 임한 덕에, 흔들리는 차 안에서 몇 번은 사정없이 간 것 같았다. 허벅지가 자꾸만 떨렸다. 뒤로 느끼는 것에 익숙한 몸은 아네로스의 공격에 무참히 무너졌다. 성기를 흔들어 사정하고 싶은 걸 열심히 참자 드라이 오르가즘이 몇 번이고 육체를 덮쳤다.
“흐으, 학, 읏…!”
담요는 투명한 액체로 젖어 들었다. 정액이 아니니 먹이진 않으려나,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바다가 보이는 지점까지 도착했다. 해안 도로를 따라 달리자 인적 없는 곳에 멋스러운 건물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쾌감에 손끝이 저릴 지경이 되었을 때, 차는 잔디가 깔린 마당 안으로 진입했다.
“배는 안 고파요?”
선명히 들려온 물음에 서하가 풀린 눈으로 강제혁을 바라보았다. 지금 배고픈 게 중요한 게 아닌데.
“고기 좀 구워주려고 사왔는데.”
“빨게 해 주세요…….”
서하가 뱉을 수 있는 말은 이게 전부였다. 어떻게든 강제혁의 성기를 물고 빨아서, 제 안을 쑤시게 만들고 싶었다.
“이렇게 참을성이 없어서야…….”
타박하는 말과 달리 강제혁의 입가에 서린 미소는 기분 좋게만 보였다. 너 때문이잖아! 소리가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꾹 참아 삼켰다. 아무래도 강제혁 한정으론 서하의 배짱이 발동될 일이 없는 듯했다.
“흣, 주인님…….”
“빨아요.”
그 말에 서하가 몸을 숙여 강제혁의 바지를 헤쳤다. 급하게 문 성기는 저와 다를 것 없이 발기된 상태였다. 여유로운 척 운전을 했으면서, 바지 속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다. 서하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새삼 그가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하아…….”
머리 위에서 느리게 뱉어지는 신음에 뇌가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예상치 못하게 벗은 엉덩이에 닿는 단단한 손바닥에 서하가 허리를 떨었다. 잔뜩 달궈진 탓에 아주 작은 접촉에도 해일 같은 쾌감이 일었다.
***
도착하기 무섭게 차 안에서 한바탕 일을 치르자 체력이 0에 수렴하는 것만 같았다. 서하는 내도록 잡힌 머리채에 이러다 머리 빠지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막상 뽑힌 머리카락은 없었다.
강제혁은 이곳이 제 소유의 별장이라고 했다. 관리인이 있었던 모양인지, 건물 내부도 흠잡을 곳이 없었다. 원목 소재의 가구들이 편안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흰 커튼 역시 방금 빨아 걸은 것처럼 깨끗하고 주름이 없었다. 복층으로 천장이 트인 거실엔 먼지 한 톨 없었다.
“씻고 나와요.”
서하가 별장 안을 구경하는 사이, 정리를 마친 강제혁이 쇼핑백 하나를 건네주었다.
“이게 뭐예요?”
“갈아입을 옷.”
소비를 참 좋아하는 구나.
“간단히 샤워만 하고 와요. 밥 먹게.”
욕실 안은 넓고 쾌적했다. 넓은 욕조가 눈에 들어왔지만, 간단히 씻고 나오라고 했기에 애써 시선을 돌렸다. 서하는 서둘러 샤워를 마치고 쇼핑백을 열었다. 제가 피우는 담배와 세면도구, 그리고 부드러운 면 소재의 홈웨어가 있었다. 열심히 봉투 안을 뒤져봤지만, 속옷은 없었다.
“입지 말란 소리겠지.”
이젠 익숙해진 서하가 맨몸에 옷을 꿰어 입었다. 음모도 속옷도 없는 아래가 굉장히 허전했다. 하지만 방금까지 입고 있던 속옷엔 강제혁이 싸지른 정액이 묻은 상태였다. 저걸 다시 입는 건 그것대로 야했지만 위생적이진 못했다. 그리고 쇼핑백을 접으려던 순간 달그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건…….”
금색 방울이 달린 목걸이가 있었다. 고양이용 목걸이 같은 모양새였다. 얇은 검은 가죽 띠의 겉면에 금빛 나는 필체로 익숙한 이니셜이 적혀 있었다. 우산에서 봤던 것과 같았다. 이건 강제혁의 이니셜이었다. 그리고 안쪽엔 하얀색으로 SH.Lee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서하의 이름이었다.
선물에 크게 의미를 두는 편은 아니었지만, 이 선물은 뭔가 달랐다. 마치 이서하가 강제혁의 소유물이란 증거 같았다. 습기를 머금은 낯에 묘한 기운이 어렸다. 서하는 한참을 그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꽤 긴 시간이 흐를 때까지.
***
젖은 머리카락에 밤바다의 찬 공기가 닿았다. 해끔한 얼굴로 마당으로 나온 서하에게, 강제혁이 얇은 카디건을 걸쳐 주었다. 강제혁의 눈이 서하의 하얗고 긴 목덜미를 먼저 살폈다. 서하 역시 그 시선을 느끼고 마른 침을 삼켰다. 그는 화를 낼까. 아니면 실망할까.
“배고프죠.”
하지만 예상과는 다른 질문이 돌아왔다. 분명히 목걸이에 대한 걸 물어볼 줄 알았는데, 질문은 전혀 다른 내용의 것이었다. 질책 당할 거라고 생각했던 서하는 뭔가 머쓱해졌다. 일단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배가 고팠기 때문이다. 검은 색 앞치마를 둘러 멘 강제혁이 달군 숯불 위에 고기를 올리며 턱짓으로 서하의 자리를 가리켰다. 말할 타이밍을 놓친 서하가 조용히 자리에 착석했다. 한참을 말없이 고기와 채소를 구우며 상 위를 채우던 강제혁이 입을 열었다.
“와인 좀 따라줄래요?”
“아, 네.”
투명한 크리스털 잔에 붉은 와인을 따라냈다. 식욕을 자극하는 향기가 가득했다.
“배고플 텐데, 일단 들죠.”
“…네.”
먹음직스럽게 구워진 고기를 한 점 집기 무섭게, 입 앞에 커다란 쌈이 닿았다. 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제혁을 쳐다보았다.
“이거 먼저.”
반사적으로 입을 벌리자 금세 입안이 가득 찼다. 너무 큰 것 같은데. 볼이 빵빵해진 서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안에 든 것을 열심히 씹어댔다. 맛있었다. 나 배고팠구나, 새삼 자각할 만큼.
“나는 안 줘요?”
서하가 마무리할 겸 와인을 한 모금 마시는데, 강제혁이 조금 퉁명스럽게 말했다. 쌉쌀한 레드와인의 맛이 사라지기 전에, 서하가 다급히 상추를 손에 올렸다. 젓가락을 움직여 쌈에 들어갈 것을 하나하나 집으며 강제혁의 눈치를 살폈다. 몇 번의 고갯짓 끝에 완성된 쌈을 들어 보이자 강제혁이 미동 없이 입만 아 벌렸다. 이게 무슨 짓이지. 약간 민망해진 서하가 얼른 일어나 강제혁의 입안에 고기쌈을 밀어 넣었다. 끝으로 손가락에 닿은 강제혁의 입술 탓에 괜히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 누구한테 이런 걸 싸줘 봤어야지.
“맛있네요.”
입을 꼭 닫고 쌈을 씹어 삼킨 강제혁이 기분 좋게 답했다. 술잔이 기울어지고 식사가 끝날 무렵까지도 서하가 염려한 질문은 떨어지지 않았다. 주머니 안에서 목걸이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듯했다. 그냥 메고 나올 걸 그랬나. 이까짓 게 뭐라고. 서하가 제 행동을 후회하고 있을 때, 강제혁이 식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제가 할게요.”
“아니, 이서하 씨는 침실로 가세요.”
이어진 단호한 손짓에 서하가 민망해진 손가락을 접어 뒤로 숨겼다.
“오늘 사온 거 쓸 준비해야지.”
낮은 음성에 등골에 소름이 돋는 것만 같았다. 방금 전까지 평화로웠던 분위기가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
거울 속 물기 어린 얼굴은 무미한 빛을 띠고 있었다. 물방울이 턱 선을 따라 뚝뚝 떨어져 내렸다. 김산의 말이 자꾸만 뇌리를 떠돈다. 개중 넌 섹스토이일 뿐이란 좆같은 말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주문 제작 해둔 목걸이를 충동적으로 건넨 것도 그로 인한 파급 효과였다.
강제혁은 스스로가 등신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꾸만 추잡한 욕심이 일었다. 닿으면 닿을수록 더 부족했다. 갈증을 닮은 욕구가 저를 집어 삼키는 것만 같았다. 쉽게 흥분하는 서하가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김산은 정확히 모르는 듯했지만, 강제혁은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은 끝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이서하는 김산으로 인해 흥분했을 것이다. 본능처럼.
“…좆같아.”
강한 확신이 들었지만 동시에 제 헛된 망상이길 바랐다. 생각만 했을 뿐인데 불쾌감에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손이 저릴 만큼.
***
침대에 걸터앉자 주머니에 든 목걸이의 존재감이 더욱 진하게 느껴졌다. 푹신하게 감겨드는 침구 위에 서하가 고개를 묻었다. 바지 위로 만져지는 목걸이를 손으로 덧그리며 방금 전의 식사 장면을 되새김질했다. 이게 뭐 대단한 거라고 안 차고 나간 건지 후회가 막심했다.
우산이나 저나 별 다를 것 없는 소유물의 하나란 뜻일 텐데. 그가 시킨 일이라는 이유로 강의실에서 자위도 한 주제에 이깟 목걸이가 뭐라고 안 차고 나갔을까.
“꼴값…….”
이 순간 저를 묘사하는 완벽한 단어였다. 어쩌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저 혼자 일지도 모른다. 서하가 한숨을 내쉬며 배를 통통 두드렸다. 적당히 부른 배가 포만감을 주고 있었다. 일정으로 꽉 찬 하루에 피곤함이 밀려왔지만 그대로 잠들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차 안에서 눈을 붙인 탓에 졸음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았고.
“…뭘 준비해야 하지.”
게다가 강제혁이 준 미션도 있었다. 오늘 산 물건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으란 말. 어떻게 준비를 해야 할까. 이제 와서 목걸이를 목에 걸고 서프라이즈인 척 할 수도 없고, 다 벗고 있으면 되나. 강제혁이 직접 입으라고 건네준 옷이었기에 벗는 것도 뭔가 납득이 되질 않았다.
그런 서하가 고심 끝에 택한 건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고도 꽤 오랜 시간 강제혁이 2층에 올라오지 않는 탓에, 서하가 자세를 흐트러트린 채로 침대 맡에 얼굴을 기대고 있을 무렵이었다.
“편해 보이네요.”
문 열리는 소리도 없이 안으로 들어선 강제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놀란 서하가 몸을 바르게 해 앉기 무섭게, 강제혁이 침대 위에 앉아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 보였다.
“이리 올라와서 엉덩이 대고 엎드려.”
다정한 기운이 남은 목소리가 이질적이었지만 거부할 방도는 없었다. 서하는 군말 없이 침대 위로 몸을 옮겼다. 무릎이 푹 잠기며 서하의 몸을 먹어 들었지만, 단단한 강제혁의 허벅지 위에 엎드려 눕자 아랫배와 성기가 절로 긴장이 되었다. 오늘 그렇게 섹스를 해댔지만 매는 한 번도 맞질 않았다. 이미 상처가 만연해있었지만 그래도 기대가 되는 것은 어쩔 방도가 없었다. 이 구역의 구제불능 마조히스트가 있다면 바로 저일 것이다.
“본격적으로 혼나볼까요.”
두 팔을 감싸 얼굴을 묻은 서하가 침을 꿀꺽 삼켰다. 대충 바지를 내리는 손길이 묘하게 거칠었다. 공기 중에 드러난 맨 엉덩이엔 이미 멍 자국이 수놓아져 있었다.
“흐…….”
돌연 엉덩이 살을 양쪽으로 벌려 잡는 탓에 예민한 입구가 드러났다. 보랏빛 멍이 든 하얀 살덩이 사이 분홍빛의 작은 틈에 투명하고 미끈거리는 액체가 쏟아져 내렸다. 차디찬 온도에 서하가 낮게 신음했다. 흡사 꿀에 절여진 말랑한 떡 같은 모양새였다. 그 광경을 눈에 담은 사람은 오직 강제혁뿐이었다.
서하는 제 몸에 예고 없이 닿는 모든 것을 감내하며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자꾸만 이는 쾌감을 애써 내리눌렀다. 그가 혼나야 한다고 말했으니 화가 난 포인트는 모르더라도 반성하는 기색을 보여야만 했다. 다만 닿을 때만 해도 차가웠던 젤이 내부로 스며듦과 동시에 점점 뜨겁게 달아올라 문제였다. 또 삽입하는 걸까? 매를 맞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다.
“원래는 따뜻하게 데워서 쓰는 거라고 하던데, 혼나는 거니까 이 정돈 참을 수 있겠지.”
나른한 목소리가 이어지고 단단하고 차가운 무언가가 젖은 입구에 닿았다. 결코 느리지 않은 속도로 다물린 구멍을 파고드는 묵직한 삽입에 서하가 애끓는 신음을 터트렸다.
“보기 좋네.”
투명한 유리 딜도가 핫젤로 달아오른 안을 무참히 쑤시고 들었다. 굴곡이 진 딜도가 내벽을 제법 아프게 눌렀다. 서하에겐 그마저 달콤한 통증이었다. 발끝이 자꾸만 곱아 들었다. 장난치듯 휘젓는 손짓에 엉덩이를 내밀고 끙끙대자 강제혁이 멍이 든 살덩이를 손끝으로 긁어내렸다. 반가운 통증이 서하의 등줄기를 스쳐 지나갔다.
“사정하지 말고.”
“읏, 막아주세요…….”
“어디를.”
“앞에, 흐, 자지 구멍…….”
발기한 성기가 단단한 허벅지에 비벼지고 있었다. 하루 종일 쾌감에 노출된 몸은 빠르게도 달아오르고 있었다. 유리 딜도를 머금은 안의 붉은 부분이 강제혁의 시선을 끌었다. 손잡이 부분을 돌리자 서하가 자지러지는 신음을 내며 끙끙거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서하의 손에 둥근 링이 닿았다.
“알아서 채워.”
싸늘한 명령에 서하가 급하게 발기한 성기에 링을 채우고 다시 자세를 잡았다. 딱딱한 유리 재질의 딜도가 움직일 때마다 안을 뭉갰다. 엉덩이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내민 엉덩이를 쓰다듬던 강제혁이 손잡이를 잡고 딜도를 뽑아냈다.
“아!”
“예쁘긴 한데, 매질할 때는 별로 적합하지 않아서.”
구경할 거 다했으니 볼 일 없다는 듯 던져진 유리 딜도가 서하의 손에 쥐어졌다. 미끈하고 뜨뜻한 유리의 질감이 이질적이고 동시에 외설적이었다. 방금 전까지 제 안에 있던 것이다. 열기가 오른 눈으로 딜도를 쥐고 바라보는 서하를 보던 강제혁이 혀를 찼다.
“넣고 싶어?”
“읏, 아니요.”
매를 맞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에 서하가 고개를 저었다. 얼마 안 있어 상자를 여는 소리와, 뒤이어 작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뭔가의 전원을 킨 듯했다. 입구에 닿는 물건은 얕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더 달궈진 안으로, 살덩이를 닮은 느낌의 실리콘 바이브레이터가 삽입되었다. 유리 딜도보다 두꺼운 굵기에 서하가 베개를 끌어안으며 몸을 떨었다.
“내가 때릴 때마다 잘못한 게 뭔지 대답해 봐요.”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가 낮고 감미로웠다. 잘못……. 서하가 멍한 머리로 잘못에 대한 걸 떠올리는 사이, 단단한 손바닥이 예고도 없이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윽!”
단 한 대였지만 맞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강제혁의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걸.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잊고 있었는데, 온전히 둘이 되자 그의 감정이 선명히 느껴졌다. 평소와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매질에 등골이 다 오싹했다. 서하의 손끝이 떨렸다.
“뭘 잘못했는지 말하라고.”
“마, 말 안 한 거요.”
“뭘?”
그리고 또 강한 타격음이 났다. 이미 멍이 든 엉덩이인지라 조금만 눌려도 아픈데 묵직하게 핸드스팽을 하니 몸이 움찔움찔 떨릴 지경이었다. 체중을 실은 핸드스팽은 어떤 매보다 더 거칠고 따가웠다.
“선배랑, 흣, 밥 먹기로 한, 아!”
“선배?”
날카롭게 되묻는 말에 겁이 덜컥 났다. 그렇게 부르면 안 되는 걸까. 고심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름을 말했다.
“김산…….”
그러자 매질이 더욱 거세졌다. 그리고 착각하는 게 아니라면,
“보고를 하라고 했더니, 언제든 말만 하면 되는 건줄 알았나봐. 그건 통보지. 안 그래요?”
강제혁이 엉덩이를 때릴 때마다 애널 안에서 진동하는 바이브레이터의 강도가 거세지고 있었다. 아주 약하게 진동하던 것이 어느새 확실한 진동음을 내고 있었다. 성인용품점에서 네 발로 기며 들었던 설명의 일부가 떠올랐다. 충격을 받을 때마다 진동이 강해지는 딜도가 있다더니 이거였구나.
“네 모든 권리가 나한테 있다는 말, 이해를 못 했어?”
“아, 아흐읏…….”
“허락을 구했어야지.”
살이 터질 것 같은 강한 울림이었다. 쾌감과 통증이 극한으로 어우러져 연신 눈앞이 희게 번졌다.
“자, 잘못했…….”
“잘못한 건 그것뿐이에요?”
무섭게 채근하는 말에 서하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으려 했다. 하지만 도무지 뭘 잘못했는지 떠오르질 않았다. 쾌감이 진한 탓이다. 돌연 머리채를 잡은 강제혁이 손을 내려 서하의 목덜미를 눌렀다. 브레스 컨트롤을 하려는 걸까,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모, 모르겠…….”
“‘모르겠다’는 답이 아니잖아요. 매가 별로 아프지 않은가 봐요? 그럼 더 효과적인 걸로 괴롭혀줘야겠네.”
이미 내부에서 바이브레이터가 진동하는 와중에 긴 손가락이 하나 더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손가락이 굽혀지며 안을 무참히 넓히는 행위가 시작됐다. 찔꺽이는 질척한 소리와 덜덜 떨리는 진동음에 서하가 입으로 잘못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이윽고 몸이 잠시 들렸고, 아예 베개를 서하의 배 아래에 밀어 넣은 강제혁이 자연스레 내밀어진 입구에 제 성기를 가져다 댔다. 쾌감이 뇌를 좀먹어가는 것만 같다. 빨갛게 달궈진, 이미 수차례 멍이 든 볼기 사이엔 바이브레이터가 삽입된 채였음에도 강제혁은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방금 전의 핑거링으로 조금 틈이 생긴 입구에 말도 안 되게 굵은 것이 함께 밀려들기 시작했다.
“헉, 어윽…!”
“잘, 먹네요.”
두 개의 기둥을 머금은 구멍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서하가 충격에 벌어진 입술을 다물지도 못하고 가쁘게 숨을 들이켰다. 단 한 번도 두 개를 넣어본 적은 없었는데. 문득 김산이 출연했던 3p 꿈이 떠올랐다. 하지만 막상 경험하니 꿈에서 느꼈던 쾌감따윈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었다.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학, 아, 아흐윽, 헉…….”
“하아, 너무 좁잖아.”
야금야금 안을 채우는 성기가 서하를 속박했다. 서하가 동요하는 만큼 떨리는 내벽에 강제혁이 그의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가뒀다. 끝까지 넣을 수는 없었지만, 한계 이상으로 벌어진 아래에 서하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찢, 하으, 악, 찢어져요…….”
“글쎄요. 얼마나 잘 먹는지, 이서하 씨한테도 보여주고 싶을 정돈데…….”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겁이 났다. 하지만 동시에 좋아서 숨이 턱턱 막혔다. 삽입된 성기가 느리게 추삽질을 잇자 충격이 일 때마다 바이브레이터의 강도도 점차 강해졌다. 찰박찰박 물기 젖은 소음이 귓가에 가득했다. 장골이 부딪히는 바람에 멍든 엉덩이에도 재차 통증이 가해지고 있었다. 폭력을 닮은 피스톤질에 서하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붉게 달아오른 뺨으로 눈물이 번지고 턱 끝엔 온통 타액과 눈물뿐이었다.
이전에도 플레이에 대한 설명 없이 서하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던 강제혁이었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화가 많이 났던 걸까. 바이브레이터의 진동이 심한 탓에 내벽이 징징 울릴 지경이었다. 뜨거운 눈물이 맥없이 뺨을 적셨다.
“하, 하으, 악, 하악, 읏, 으응, 아…!”
신음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지고 있었다. 흰색의 면 티셔츠가 자꾸만 말려 올라가 곧은 허리가 온통 노출되고 있었다. 제 것과 더불어 바이브레이터까지 머금고 쾌감에 몸을 떠는 서하를 보면서 강제혁이 이를 악물었다.
“오늘은, 읏, 주먹도… 들어갈 수, 있겠어요.”
“하으, 아, 안 돼요. 안, 으읏, 아, 학, 그건……!”
“좆을 두 개나, 먹고 있으면서… 왜 안 된다고 생각해.”
정말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목소리였다. 언제나 플레이를 할 때면 한 층 낮고 음습한 기색을 띠긴 했지만, 그와 비교해도 달랐다. 김산과 약속을 잡은 사실 때문에 화가 많이 난 걸까? 서하가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저었다.
“잘못, 잘못했어요. 흐으, 아, 윽, 아……!”
“내 화가 풀릴 방법을, 알잖아.”
거칠게 성기를 삽입하며 뇌까리는 말에 서하가 울음을 터트렸다. 무엇이 그의 화를 풀어줄 수 있을까. 그의 말대로 주먹이라도 넣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무서웠다. 이미 한계치를 벗어나도록 벌어진 아래가 불에 덴 것처럼 뜨겁고 욱신거렸다.
푹푹 파고드는 성기와 미친 것처럼 떨리는 바이브레이터가 서하의 아래를 진창으로 만드는 중이었다. 차라리 그가 사정한다면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대체 뭘로 그의 분노를 달랠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이미 정액 한 방울 토해내지 않고도 몇 번이나 간 채였다. 더는 체력이 없었다. 한참을 쑤셔박히던 끝에 서하가 백기를 들었다.
“아흑, 읏, 흐으, 주먹, 으읏, 주먹 넣을게요. 강제혁 씨, 꺼, 그거 넣을 테니까, 제발, 그만…….”
눈물로 범벅이 된 서하의 말에 거칠게 추삽질을 하던 강제혁의 허리가 멎었다. 그리고 강제혁이 서하의 목덜미를 거머쥐고 물었다.
“…그게 내 화를 풀 방법이에요?”
“흣, 뭐든, 뭐든 할 게요. 흐, 피어싱, 피어싱도 할 수 있, 고, 성노예가 되라면 될 테니까…….”
이만 멈춰주었으면. 울 기운도 없었다.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강제혁은 그런 서하를 놓아주는 게 아니라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가할 뿐이었다. 순식간에 목이 졸린 서하가 엉덩이를 조였다.
“세이프워드가 아니라, 그냥 내 마음대로 하라고?”
“컥, 흐읍, 학…….”
“김산을 안 만나겠다는 게 아니라?”
강제혁이 화를 내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서하는 제정신이 아닌 채였다. 한계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두 개를 넣은 채 브레스 컨트롤까진 무리였던 모양이다.
“학, 흡, 흐으…….”
발작하듯 떠는 서하의 목덜미를 놓아준 강제혁이 아래에서 성기를 뽑아냈다. 이윽고 벌어진 틈에서 바이브레이터도 빼내자 서하가 경련하듯 떨며 침대 위로 쓰러졌다. 타액을 줄줄 흘리며 잘게 떠는 서하가 실금하듯 사정하고 있었다.
“씨발…….”
“하, 으….”
눈물에 젖어 새하얗게 질린 낯과 대비되는 붉은 눈가가, 음험한 욕구에 불을 지피는 동시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괴롭혀주기만 하면 다 좋은 걸까, 당신은.
묻고 싶었다. 하지만 물을 수가 없었다. 정말 그렇게 대답할까봐 무서웠다. 끝끝내 제가 준 목걸이를 착용하지 않는 서하를 보면서 화가 났다. 아무리 DS라도 결국 놀이일 뿐이다. 그깟 목걸이가 뭐라고, 그것 하나 차주지 않는 서하가 자꾸만 미워졌다. 생전 느껴본 적 없는 감정이었다.
강압적인 섹스에 발기하고, 사정하지 말란 말에 성기를 막아 달라 애원하고, 엉덩이를 때려주면 기뻐하는 그는 제가 바라는 이상이었지만, 동시에 전부 가질 수 없는 존재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의 품에서 이렇게 야하게 울며, 제 생각이라곤 눈곱만큼도 하지 않을 서하를 생각하자, 강제혁은 퓨즈가 나가는 것만 같았다. 미친 듯이 달아오르는 육체와 상반된 정신이 싸늘하게 굳고 있었다.
***
빗소리가 잠을 깨웠다. 지난밤, 기절하듯 잠들고 부스스 눈을 떠보니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서하는 무의식적으로 빈 시트를 만지작거리다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아직 어두웠다. 새벽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무겁게 내려앉는 하체를 무시하고 침대 밑으로 내려서자 입가가 따끔했다. 어쩐지 목덜미도 욱신거리고. 아무래도 당분간 목을 잘 가리고 다녀야 할 것 같았다. 화를 자초했지, 싶었지만 내심 좋았으므로 불만은 없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침상은 강제혁의 손길이 온전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서하에겐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다. 시트 위는 꽤 싸늘했다. 그가 자리를 비운지 한참 지난 것 같았다.
“담배가 어디 있더라…….”
갈증과 함께 흡연 욕구가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침실 밖을 나서 나무계단을 내려간 서하는 거실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 잠든 강제혁을 발견했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그의 굴곡진 근육이 비쳤다. 천둥이 번쩍 칠 때마다, 육감적인 몸매가 드러났다. 창밖에선 바다가 성난 움직임으로 파도치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하의 시선은 강제혁에게로만 향했다. 저 몸이 제 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기 때문에, 갈증이 한층 더 진해졌다.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다 목걸이가 손에 걸렸다. 서하는 매끄러운 가죽 줄의 감촉을 애써 무시하고 주방에서 물을 한 잔 따라 강제혁의 곁에 섰다.
“왜 여기서…….”
까지 말을 뱉다 입술을 꾹 다물었다. 돌려진 고개가 고단해보였다. 제 목소리에 잠이 깰까, 말하는 것을 관뒀다. 서하는 선 채로 물 한 잔을 다 비우고 강제혁의 자는 모습을 구경했다. 이렇게 곤히 자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제 곁에서 쉽게 잠들지 않는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타인 같다.
서하가 규칙적으로 오르락내리락 움직이는 가슴께에 저도 모르게 손을 가져다 댔다. 숨을 쉬고 잠을 자는 그가 새삼 인간적으로 느껴짐과 동시에 처연하고, 두려웠다. 속을 알 수 없는 남자였다. 한 번도 자의로 먼저 그를 만져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플레이를 제외한다면, 정말 처음인 것 같았다.
손바닥에 감기는 단단하면서 부드러운 피부는 따뜻했다. 그새 올라온 수염 자국에도 손이 갔다. 서하는 몸을 굽히고 강제혁의 잠든 모습을 눈에 담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가져다 댔다. 강제혁처럼 혀부터 밀고 들어오는 진한 키스가 아니라 건조한 맞닿음이었다. 심장이 입술에서 뛰는 것 같다. 충동적인 행위였다. 그리고 그 때 강제혁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발신 제한 번호였다.
“…도둑고양이가 따로 없네.”
서하가 놀라 입술을 떨어뜨림과 동시에 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서하가 반쯤 굳은 채로 저를 응시하는 까만 눈을 마주했다. 강제혁의 휴대폰만이 발신 제한 화면을 띄운 채로 요란하게 울려댈 따름이었다.
“그게,”
“변명하지 마요.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웃음기가 섞인 것 같기도 하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뉘앙스였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할까. 당황한 서하가 습관처럼 말했다.
“…잘못했어요.”
“틀렸어요.”
왜? 예상외의 싸늘한 대답과 함께 강제혁이 몸을 일으켰다. 서하가 머뭇거리는 사이 강제혁이 빈 컵을 받아들고 창밖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사이 울리던 전화는 끊어진 채였다. 누구지. 이 밤에.
“비가 오는데.”
“…네.”
“이만 갈까요.”
돌연 귀가를 말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서하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기묘한 새벽이었다.
***
차 안은 조용했지만 잠이 오진 않았다. 핸들에 손을 얹고 조용히 운전하는 강제혁의 옆에서, 서하는 동이 터 오는 창밖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 후로 한 마디도 대화를 주고받지 않았다. 문득문득 답답할 만큼 어색했지만 멋대로 입을 맞춘 것에 화가 났다면 더 할 말이 없었다. 엄연히 돔과 섭의 관계니 허락하지 않은 스킨십에 그가 화가 났대도 따질 명분이 없었다. 그럴 권리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고. 아무래도 그가 너무 쉽게 제 입술을 갈취해서, 저도 그러고 싶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서하는 처음으로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커뮤니티로 얻은 간접적 정보에 의하면, 아무리 DS 관계라도 별 다른 이유 없이 파기될 수 있었다. 애초에 사람 관계란 게 그런 거니까 특별히 기대해서 좋을 것도 없었다. 저야 강제혁에게 모든 권리를 주었다지만, 강제혁은 그런 적이 없었으니 제멋대로 입을 맞춘 것에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후회가 막심했다. 충동적인 행동이었으니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아침 먹을래요?”
한참동안 어떤 말도 하지 않았으면서 기껏 묻는 게 식사 얘기였다. 서하는 조금 허탈해져서, 고개를 저었다.
“별로 생각 없습니다.”
“왜.”
강제혁의 낮은 물음에 이번엔 서하의 표정이 구겨졌다. 왜냐니.
“원래 아침 잘 안 먹어서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해봤지만, 말끝에 짜증이 묻어나는 건 숨길 수 없었다. 강제혁이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기분이 나빠진 건 이쪽이었다. 화낼 권리도 없다고 하겠지만, 어차피 계약이 파기될 거라면 그런 말장난은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자 서하의 입이 자동으로 열렸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톡 쏘듯 묻자 강제혁이 눈썹 사이를 좁히는 게 보였다. 울컥하는 마음에 제동이 걸리질 않았다.
“알 권리도 없습니까?”
“…이서하 씨.”
“진짜 기분 나빠서 그럽니다. 자는 거 건드린 건 미안한데, 이렇게까지 사람 무안 줄 일이에요? 다신 안 하면 되잖아요…….”
호기롭게 목소리를 높인 것과 달리 서하의 끝말은 사그라드는 투였다.
‘씨발, 자존심 상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대로 계약이 파기되는 건 싫었다. 스스로가 비참했지만, 생전 처음으로 판타지를 충족시켜준 남자를 놓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적어도 강의를 하는 한 학기 동안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저와 관계를 깨고 다른 사람을 안는 그와 멀쩡히 얼굴을 마주할 순 없다고 생각했으므로.
“이서하 씨.”
“이제 안 그럴게요.”
애초에 경험이 많았던 그였고, 커뮤니티에선 여전히 그를 찾는 사람들이 있었다. 제가 아니어도 그에게 굴종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이제 안 그런다는 말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말을 이을수록 자신이 초라해졌지만, 그의 앞에서 초라한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내가 화난 건,”
“목걸이 안 해서요?”
서하가 내심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것을 묻자, 이번엔 강제혁이 입을 다물었다.
“지금 할게요. 그럼 되잖아요.”
“하지 마요.”
주머니에 든 목걸이를 우악스레 꺼내자 강제혁이 오른손으로 서하의 팔목을 잡았다. 운전 중인 강제혁을 뿌리칠 수 없었던 서하가 애먼 입술만 깨물어댔다. 답답하고 억울했다. 그 상태로 꽤 오랜 시간 길을 달려야 했다.
“놔 주세요. 안 할 테니까.”
비참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적어도 서하의 생각엔 그랬다. 강제혁의 손이 풀어지자 잡혔던 팔목이 욱신거렸다. 이 와중에 강제적인 상황에 흥분하는 스스로가 진절머리가 났다. 서하의 집 근처에 다다랐을 때, 강제혁이 생각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이서하 씨.”
“…….”
“나 좋아해요?”
맹세컨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다. 서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제혁을 쳐다봤다. 질문을 던진 남자의 표정은 방금 전과 다를 게 없었다. 그래서 그가 장난을 친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묻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몇 초 되지 않는 시간이 영겁처럼 길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여운을 더 길게 끌고 있었다. 담배라곤 한 번도 피워보지 않았는데, 피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서하가 떠난 빈자리가 아직 따뜻했다. 그래서 더 기분이 엿 같았다. 애초에 기대한 적도 없으면서, 이토록 무겁게 내려앉는 기분이 우스웠다.
- 아니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이서하가 좋아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는 것. 음란한 그는 오로지 잔인한 돔만을 원한다. 그 돔이 꼭 강제혁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강제혁도 알고 있었다. 그는 빗방울이 차창을 적시는 모습을 관망하며 핸들에 고개를 묻었다.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서하를 능욕하고 싶었다. 그의 몸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 끝이 추악할지라도.
***
알코올 향에 코가 아릴 지경이었다. 무력하게 술이나 잔뜩 사 들어와 소주를 연신 들이키는 스스로가 비참했다. 제가 목격한 광경이 어찌나 믿어지지 않는지, 정확히는 귀로 들은 거지만. 김산이 술이 흐른 턱을 아무렇게나 닦아내며 서하의 연락처를 띄워놓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봤다.
“거짓말…….”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 애초에 그 시간에 그 화장실에 들어가는 게 아니었는데. 처음엔 서하가 강제혁에게 억지로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 넌 내가 원할 때마다 다리를 벌리고, 뒤든 앞이든 좆물 삼킬 생각만 하면 돼.
심장이 방망이질을 쳤다. 돌처럼 굳어 눈만 크게 뜨고 숨을 멈췄었다.
- 억지로 당하는 게 좋아?
- 조, 좋아요…….
문을 부숴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때, 서하가 좋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 넌 내 노예야. 내 소유고. 넌 아무 권리도 없어.
- 저는 주인님의, 읏, 노예예요. 아무 권리도, 하으, 악, 읏, 없, 없어요…….
그 뒤는 더 들을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음란하게 우는 서하는 제가 아는 모습이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단정하고 곧은 애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모습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다. 순간이나마 서하를 경멸했던 자신이 역겨웠다. 서하를 상대로 한 더러운 꿈을 꾼 적도 있으면서.
그래. 김산이 더 충격을 받은 것은 제가 꿈속에서 봤던 서하의 모습과 그 모습이 불현듯 겹쳐지면서 저 역시 흥분했다는 것이다.
“죽자, 그냥…….”
실천하지도 못할 자조적인 혼잣말이었다. 김산은 서하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와 동시에 강제혁을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 분노로 해선 안 될 말까지 하고 만 것은 더욱 후회됐다. 서하의 과거를 제 입으로 발설해선 안 되는 일이었는데.
“씨발…….”
살면서 이렇게까지 비참하고, 엿 같고, 초라한 날은 없었다. 서하를 설득해야 하는데, 그토록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입을 뗄 자신도 없었다. 게다가 충동적으로 서하의 과거를 입 밖에 꺼낸 것은 명백한 잘못이었다. 차라리 책망을 듣더라도 좋으니 서하를 돌려받고 싶었다. 강제혁의 말대로 서하가 바라는 게 그런 강압적인 행위라면, 못해 줄 것도 없었으니까.
***
서하는 도망치듯 집으로 달려와 비에 젖은 몸을 샤워박스 안에 아무렇게나 구겨 넣었다. 그리고 암전이었다. 갑자기 저를 좋아하느냐 묻는 말에, 부정의 말을 쏟아내고 상황을 회피했다.
좋아하냐고? 찬물이라도 맞은 것 같았다. 그렇게 묻는 강제혁의 표정은 알 수 없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왜,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한 걸까.
“왜겠어, 미친 새끼. 왜 갑자기 답지도 않게 키스를 하고 지랄이야.”
알 것 같았다. 저지른 짓이 있으니 모르고 싶어도 자꾸만 제 잘못이 상기되었다. 연애가 아니라 DS를 맺기로 해놓고 잠자는 그에게 남몰래 키스한 행위는 계약 위반이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강제혁이 그런 제 행태에 의문을 품고 자신을 좋아하느냐 묻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다. 어떻게든 임기응변으로 아니란 대답을 내놓았지만 자꾸만 이는 처참한 기분에 욕실 벽에 머리를 박으며 탄식했다.
‘왜 그랬을까.’
10년간 침만 삼켜본 경험도 있는 주제에, 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저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었다. 주종관계에서 그런 깜찍한 감정이 화두에 오르게 한 제 잘못이었다. 아침 햇살이 제 뻔뻔한 낯을 밝히기 전에 빠르게 잠들고 싶었다. 서하는 아무렇게나 물기를 닦아낸 후 침대에 얼굴을 묻었다. 이대로 깨어나고 싶지 않았다.